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흔히 ‘꽃미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든 꽃이 똑같이 예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화려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향기, 치명적인 가시까지 두루 갖춘 장미는 꽃 중의 왕 혹은 여왕이라고 불린다. 반면 백합은 단아한 생김새와 그윽한 향기, 견고하면서도 서늘한 감촉이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꽃다운 남자의 아름다움 또한 서로 다른 매력으로 발산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는 꽃, 장미  


장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는 아마도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콧대 높은 장미일 것이다. 한 행성의 왕자를 순식간에 정원사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이 장미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꽃 중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먼 조상은 산과 들 어디서나 강인한 생명력으로 쑥쑥 자라는 야생의 찔레꽃이라는 것은 장미만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덕분에 장미는 혈통보다는 자체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꽃으로 평가 받는다. 장미는 먼저 태양을 듬뿍 받으며 꽃을 활짝 피우고, 달콤한 향기를 뿜으며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리고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한다. 사랑 받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가시를 세워 자존심을 지킨다. 이러한 특징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착하거나 정의롭지 않은 남자도 얼마든지 장미로 만들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빼어난 외모를 바탕으로 강아지 같은 눈망울과 상처받은 눈빛으로 여자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하는 남자야말로 장미의 화신이다. 장미 같은 남자는 최근 대세로 자리 잡은 ‘나쁜 남자’ 트랜드와도 어울린다.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즐기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프라이드>의 기무라 타쿠야, 형의 여자에게 자신을 봐 달라고 막무가내로 때를 쓰는 모습조차 귀엽게 보였던 <봄날>의 조인성, 어두운 과거를 지녔음에도 오히려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달콤한 인생>의 이동욱,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함 속에 감춰진 여리고 순수한 속마음을 어색하게 표현하는 <꽃보다 남자>의 마츠모토 준이나 이민호 역시 장미 같은 남자이다.

장미의 이미지를 닮은 캐릭터의 공통점은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하고, 사랑 받길 원하고 풋풋한 질투와 소유욕을 미처 감출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 원숙한 어른이 않은 소년의 느낌을 충분히 간직한 남자만의 아름다움은 여자, 특히 연상의 여자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선천적인 우아함을 무기로 삼는 꽃, 백합   


백합은 덩굴처럼 어우러져서 꽃을 피우기보다 한 송이마다 자신의 공간을 오롯이 차지한 채 정해진 모양대로 피어난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는 백합은 발랄하고 명랑한 꽃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만들 정도로 귀티가 난다. 그래서일까 몇 년 전, 장동건과 화보를 진행했던 한 패션지에서는 그에게 “사막에 핀 백합 같은 광대로 미소를 지었다”는 표현을 바치기도 했다.

청순한 기품을 자아내는 순백의 꽃잎과 고아함을 완성하는 깊고 그윽한 향기는 고아함을 완성하는 백합의 이미지는 군계일학처럼 무리 중에서 빛나는 남자에게 어울린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엘프 족, 그 중에서도 눈처럼 하얀 피부와 궁극의 스트레이트를 보여주는 긴 금발머리, 알통 하나 없을 것 같은 가녀린 몸매로 반지 원정대에서 비주얼을 담당한 레골라스는 진정 백합 같았다.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설정이 레골라스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100분 내내 부산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며 당장이라도 침을 튀기며 싸울 것처럼 흥분한 사람들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제압하며 서늘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손석희는 안개꽃 사이에 홀로 피어있는 한 떨기 백합처럼 빛난다. 사슴처럼 곧은 목덜미와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차분하고 지적인 눈빛, 잡스러운 헛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입술과 깨끗한 목소리, 뼈와 힘줄의 윤곽이 보이는 희고 마른 손과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가진 손석희의 아름다움은 백합과 닮아있다.

백합은 여자를 두근거리게 하기보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가시에 찔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다가가기 보다는 그저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히 흐뭇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빈틈을 보이는 순간, 공들여 쌓은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장미와 백합은 색조화장과 투명화장처럼 다르다
색조화장과 투명화장의 매력이 다른 것처럼 장미와 백합은 명백하게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기 쉬운 햇살이 환한 곳에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미는 덩굴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두고 자신을 방어한다. 그 모습이 오히려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꽃을 피우는 백합은 그윽하고 강한 향기로 자신을 드러낸다.

색조를 지운 뒤 드러나는 얼굴에서 청순함이 빛을 발하기도 하는 것처럼 첫 인상의 강렬함 뒤에는 또 다른 매력이 숨어있는 것이 장미 같은 남자의 매력이다. 그리고 여자로 하여금 비록 가시에 찔리더라도 그 매력을 자신의 손으로 찾아주고 싶은 마음을 먹게 만든다. 반면에 공들여 완성된 투명화장은 굳이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화장을 지우지 않은, 곱게 단장한 얼굴을 감상하는 것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는다.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기사입력 2009.04.22 (수) 07:50, 최종수정 2009.04.22 (수)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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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애호가 2011-04-1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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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 지인들과 함께한 샤넬


샤넬을 교양을 갖춘 ‘사업가’로 성장시키다

카펠은 여러모로 샤넬에게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샤넬을 그저 연인으로 대하기보다 사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 카펠은 샤넬에게 성공이 얼마나 절실한지 잘 알고 있었다. 과감한 투자자이자 사회생활 선배이며 자상한 연인으로서 카펠은 샤넬이 어엿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 

문제는 샤넬이 경영에 문외한이며 사교 경험이나 인맥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카펠은 패션 전문가인 마드무아젤 생퐁에게 패션 용어를 비롯해 상류사회에 필요한 화술과 교양 등 샤넬의 기본적인 교육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샤넬이 시작한 패션 사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상류사회의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샤넬은 상류사회 고객층을 대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이때 익힌 것들은 그녀의 사업에 유용하게 쓰였다. 

사실 샤넬은 카펠이 만나는 친구들에 비하여 문화, 예술, 학문 등에 대한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의 자신감을 북돋워주기 위해 가급적이면 전문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기보다 그녀가 지닌 직관력과 같은 장점을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카펠의 칭찬을 통해 샤넬은 스스로도 몰랐던 장점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훗날 샤넬은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라며 카펠의 이러한 사려 깊은 행동이 그녀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카펠은 누구보다 이해타산에 예민한 그리고 뛰어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넬 모드’의 운영만큼은 절대적으로 샤넬의 뜻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부족함이 빤히 보이는 샤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함으로써 투자자이자 사업가로서 대단한 모험을 행한 셈이었다. 그는 샤넬이 조언을 구할 때만 성심성의껏 대답할 뿐 ‘샤넬 모드’의 주인은 그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런 절대적인 지지와 믿음의 결과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은 놀라운 속도로 번창하기 시작했고 샤넬 역시 사업가로서 쑥쑥 성장했다.
 

  

↑ 영화 속 카펠과 샤넬


도빌에서의 밀월여행과 제1차 세계대전 

샤넬을 위해 아낌없는 도움을 주긴 했지만 카펠 역시 한 사람의 독립된, 그리고 매우 바쁜 사업가였다. 또한 자수성가한 그는 인맥의 중요성을 누구보가 잘 아는 영리한 남자였다. 따라서 프랑스에 올 때면 여러 유력 인사들과의 교류에 힘썼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도 늘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카펠은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9.28. ~1929.11.24.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이며 의사. 상원의원과 총리 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육군 장관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전권 대표로 참석하였고 베르사유조약을 강행하였다)를 비롯한 정치인, 은행가, 언론계 주요 인물 등과 교류했다.

‘샤넬 모드’의 성공이 안정권에 접어들 무렵 카펠은 샤넬과 함께 휴양지 도빌로 휴가를 떠났다. 파리에서 가까운 해변에 위치한 도빌은 휴가철이면 전 유럽의 부유층 유력 인사들과 멋쟁이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카펠 또한 도빌에서 상류층의 사업 파트너들과 만나거나 폴로 게임을 즐기곤 했다. 한편 샤넬은 휴양지 자체를 처음 가보긴 했지만 오붓하게 밀월여행을 즐겼다. 

카펠은 패션과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빌에 ‘샤넬 모드’의 분점을 차릴 것을 샤넬에게 제안했다. 샤넬은 즉각 동의했다. 이에 카펠은 분점 설립에 필요한 거금을 즉시 지원했고, 샤넬은 재정적인 걱정 없이 원하는 위치에 상점을 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도빌의 ‘샤넬 모드’ 분점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시기에 느닷없이 위기가 닥쳤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당연히 카펠도 동원되었다. 사업을 확장해 놓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샤넬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전쟁터로 떠나면서 카펠은 좌절에 빠진 샤넬에게 ‘무엇보다 가게 문을 닫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는 조언을 했다. 그의 말에 힘을 얻은 샤넬은 사업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가는 대신 도빌에 남아 가게를 운영했다. 뒤죽박죽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그녀는 오직 카펠의 말만 떠올리며 꿋꿋하게 가게를 지켰다. 


현명한 조언과 자금지원으로 전쟁 중 비약적인 도약을 맞다

얼마 후, 부유한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도빌로 몰려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옷과 액세서리들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이들은 도빌에 도착하자마자 샤넬의 가게를 찾았고, 샤넬은 뜻하지 않은 호황을 거의 독식하게 되었다. 모자를 디자인하던 샤넬은 이를 계기로 의류 전체를 총괄하는 패션 디자이너로 변모했고 ‘샤넬 모드’는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한편 전쟁에 동원된 카펠은 존 프렌치 원수(1852~1925. 트란스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3년에 원수가 되었고 1914년에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에 파견되었다)의 연락장교로 일하던 중 프랑스 석탄 수입을 책임지는 프랑스 - 영국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군사위원회 의장은 카펠로부터 석탄 화물선과 석탄 수송(카펠을 재벌로 만든 사업이자 그의 주력 사업이었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관심을 보였던 클레망소였다. 평상시 쌓아둔 인맥이 빛을 발휘한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석탄 수입 적임자가 된 카펠은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전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일에서 벗어난 카펠은 며칠 휴가를 얻어 샤넬과 함께 전선에서 가장 먼 휴양지 중 하나인 비아리츠로 갔다.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비아리츠는 스페인 귀족들도 휴가를 오는 초호화 휴양지로 전쟁과 동떨어진 별세계였다. 도빌에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샤넬은 비아리츠에서 값비싼 드레스를 파는 고급 의상실을 오픈할 것을 결심한다. 전쟁  중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번에도 카펠은 샤넬을 믿고 주저 없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샤넬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의상실이 오픈하자 두둑한 지갑을 가진 비아리츠의 모든 귀족들과 부자들이 몰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넬은 60명의 재봉사를 데리고도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성공이 확실한 적확한 지역을 선택, 거침없이 초기 자금을 공수해 온 카펠은 ‘샤넬 성공 신화’의 숨은 조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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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2009년, 샤넬의 창시자인 가브리엘 샤넬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이 개봉하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샤넬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그리고 사랑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샤넬의 사랑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서 샤넬의 사랑을 독차지한 남자의 이름은 바로 ‘아서 카펠’이었다. 



↑ 영화 속 아서 카펠과 가브리엘 샤넬



출생의 아픈 비밀을 간직한 남자 

샤넬의 연인으로 알려진 아서 카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샤넬처럼 카펠 또한 ‘보이’라는 다소 귀여운 별명이 있었다. 샤넬과 만나기 전 카펠은 런던에서 최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렸고,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귀족 스포츠였던 폴로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귀족 출신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고 카펠 자신도 출생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신을 몹시 따지는 상류 사교계는 그를 받아들였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뉴캐슬에 석탄 수송 화물선을 보유한 재벌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우수 어린 눈동자의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귀족적인 성품이 상류층의 취향에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펠이 학비가 비쌀 뿐 아니라 영국에서 귀족들만 다니는 엘리트 학교를 다녔다는 점 또한 재산에 예민한 귀족들의 관심을 자극했다. 

출생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덕분에 카펠은 사교계에서 항상 소문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족의 사생아나 재벌의 숨겨진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무수한 소문 중 그의 아버지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인물은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1.9.~1910.5.6. 영국 윈저왕가의 왕으로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재위했다)와 페레르 형제(에밀 페레르와 이사크 페레르. 철도 사업을 비롯해 운송 사업, 보험, 부동산 개발 등 각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제2제정기 프랑스의 최대 사업가. 최초의 산업은행인 ‘크레디 모빌리에’를 설립했다) 등이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카펠에게도 출생의 비밀은 언제나 상처였다.  


샤넬과의 우연한 만남

카펠이 샤넬과 처음 만난 것은 1908년 프랑스 피레네 지방에 있는 ‘포’라는 곳에서였다. 샤넬은 당시 에티엔 발장과 함께 몰이사냥을 위해 그곳에 방문했다. 에티엔과 샤넬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었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샤넬이 에티엔에게 적당히 빌붙어 살고 있는 관계였다. 

비록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은 훌륭한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강력한 후원자나 튼튼한 배경이 있는 양갓집의 얌전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젊음과 여성이라는 점을 애매하게 무기로 삼아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반면 에티엔은 일종의 신흥 부르주아로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특별한 직업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던 나이 지긋한 독신남자였다. 성격이 쾌활하고 친구들을 좋아하던 에티엔은 경주용 말을 키우며 지냈고, 남는 시간은 친구들과 함께 주로 파티를 하면서 보냈다. 말(馬)을 너무나 좋아하는 에티엔은 경마 일정에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포에서 우연히 산책을 하던 중 카펠과 만난 것이었다. 

폴로 선수였던 카펠은 말을 다루는 데 뛰어났고, 이 점은 즉시 에티엔의 흥미를 끌었다. 에티엔은 카펠을 콩피에뉴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루아얄리외’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에티엔과 함께 지내고 있던 샤넬은 첫눈에 카펠에게 반했다. 카펠은 서른 살, 샤넬은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샤넬은 카펠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남자(카펠)는 정말 미남이고 매력적이었어. 단순히 잘생기고 멋진 것 이상의 남자였지. 그 무관심한 태도와 초록빛 눈이 얼마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고집 센 말에 올라타곤 했는데, 아주 강한 남자였어. 나는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지.” 


과거를 감추고 싶어하는 연인을 이해하다

성공에 대한 야심이 큰 카펠은 사업을 위해 뉴캐슬이나 파리, 런던 등을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루아얄리외 저택을 자주 찾았다. 에티엔과의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샤넬 때문이었다. 카펠은 변변치 못한 성장 과정을 애써 숨기고 싶어 하는 자존심 강한 여인에게 관심이 생겼다. 얼마 후, 카펠은 샤넬과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고 연인이 된 후 그녀를 훨씬 농밀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샤넬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고 가난했다. 아버지는 장돌뱅이였고, 늘 바깥을 떠돌며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일편단심 사랑하며 뒷바라지하다가 과로 끝에 병으로 죽었다. 그 후 샤넬의 아버지는 그녀와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겼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샤넬은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죽는 날까지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샤넬은 평생 동안 카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카펠은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그녀의 ‘거짓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공을 갈망하는 샤넬을 정식 비즈니스의 세계로 이끌다

샤넬은 당시 루아얄리외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주문에 맞춰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에티엔이 보기에 샤넬이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자를 만드는 것은 샤넬에게는 절박한 일거리였다. 그녀는 결혼 가능성도 없고 뜨거운 애정도 없는 에티엔에게 계속 얹혀살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카펠은 그처럼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샤넬의 속마음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카펠과 사랑에 빠진 샤넬은 더욱 에티엔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랐지만 그렇다고 카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에티엔이 심심풀이로 생각하던 모자 디자인 작업이 샤넬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주문이 늘어났다. 샤넬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에티엔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에티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샤넬이 비록 에티엔의 정식 정부(情婦)가 아니라 해도 그녀가 돈을 벌게 내버려두는 것은 에티엔의 입장에서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카펠이 나섰다. 그는 샤넬이 은행 대출을 받아 가게를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보증까지 섰다. 그는 샤넬의 감각과 재능에서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신했다. 1910년, 샤넬은 카펠의 도움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캉봉 거리 21번지 2층에 있는 커다란 작업실을 빌렸다. ‘샤넬 모드’의 첫 시작이었다. ‘샤넬 모드’가 오픈한 후 샤넬은 에티엔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카펠의 연인이 되었다. 샤넬의 첫 상점이자 샤넬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곳, ‘샤넬 모드’는 카펠과 샤넬의 사랑의 증거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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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사라진 열정, 사라진 재능

이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존과 요코의 사랑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요코를 향해 뜨겁게 불타올랐던 존의 사랑은 5년쯤 지나면서부터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요코를 비난하는 세상에 맞서 싸웠던 존이 지쳐갔던 것이다. 사회성과 정치성을 띤 시위를 계속해 온 탓에 당국으로부터 집요하게 감시를 당하는 것 역시 존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 했다.

언제나 주류에 속하는 것을 거부했던 존은 세상을 비웃기 위해 시작한 ‘비틀즈’를 통해 자신이 거대한 주류가 되자 당황했다. 철저하게 비주류인 요코와의 삶에 끌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코와의 하루하루는 점차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가까웠고, 이것은 존의 창작욕과 감수성을 바싹 말려버렸다. 요코와 함께 하면서 주류 사회의 속성이나 습성을 통쾌하게 꼬집어내는 것에 희열도 점차 사라졌고, 창작 의욕과 영감이 사라진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존에게 기쁨이나 위안이 되지 않았다. 존은 눈앞이 캄캄했다. 


별거, 잃어버린 주말 

존이 점점 지쳐갔던 반면 요코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모든 분야에 도전했고,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모든 분야에 존이 관여해 주기를 원했다. 결국 존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육체적인 것으로 해소했다. 존과 요코의 비서로 일하던 젊은 중국계 여성 메이 팡이 그 대상이었다.
요코는 누구보다 빨리 이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존의 불륜까지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요코는 메이 팡에게 존의 요구에 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대범하게 대처했다. 존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코의 생각과는 달리 한 번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1973년 10월, 존과 요코는 별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요코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 제작에 매달렸다. 존은 별거 중이었지만 요코의 예술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두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요코는 존 레논이란 부록이 없는 한 자신의 예술 활동은 대중성이나 상업성 그리고 화제성에서 타격을 입을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했다.  

 




되찾은 주말, 아들 ‘션’의 탄생

앨범이 실패한 후 요코가 선택한 새로운 일은 바로 사업이었다. 존의 절대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도 매번 예술가로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했던 요코는 마침내 자신이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저작권과 부동산 등 ‘재산 증식’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많은 수익을 올렸다. 수년에 걸쳐 줄기차게 적자를 기록해온 요코는 예술이 아닌 사업을 통해 적어도 투자에 대한 감각만큼은 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 

홍보 담당이자 경쟁자인 존이 곁에 없는 동안 요코가 예술에 대한 욕심을 잠시 접고 사업에 열중해 있는 사이 존은 메이 팡과 18개월 동안의 밀월을 마치고 요코에게 돌아갔다. 존은 요코와 떨어져 지낸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표현하며 용서를 빌었고 요코는 받아들였다. 요코와 존은 평소처럼 별거 전과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세상을 향한 전투적인 공격성만큼은 다소 줄어들었다. 요코의 임신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유산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이도 적지 않았던 요코는 존과 재결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특별히 조심했다. 아홉 달 동안 거의 아무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지냈던 요코는 1975년 10월 11일 새벽 제왕절개로 아들 션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요코는 “나는 9개월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보냈어요. 이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신 차례예요.”라고 말하며 존에게 아이의 육아를 일임했다. 첫 아들 줄리안을 낳았을 때도 육아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존은 요코의 결정을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요코는 계속해서 사업에 몰두했다. 사실 존은 음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능력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그런 점 때문에 요코의 예술에 그처럼 무모한 투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예술가로써는 수익이 전무했던 요코는 사업가로써 탁월했다. 원래부터 충분했던 존의 재산은 요코의 손을 한 번씩 거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존은 결국 요코의 뜻에 따라 그녀를 자신의 공식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의 동상이몽,〈Double Fantasy〉

1980년 6월, 존과 요코는 아들 션과 함께 팜비치로 여행을 떠났다. 온 가족과 함께 간 이 여행에서 존은 심한 풍랑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존은 길고 긴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다시 살려냈다.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존은 5년간의 전업 주부 생활을 끝내고 오랜만에 다시 창작 활동에 들어갔다.

존이 의욕을 되찾자 요코도 앨범 작업에 동참했다. 예술에 대한 욕심을 접었던 요코가 갑자기 다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자취는 확연했다. 11월 16일 발표한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는 곡의 순서가 ‘존-요코-존-요코’ 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매우 평등했지만 새로운 영감으로 충만한 존의 곡들과 달리 요코의 곡 중에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이 엿보이는 노래도 있어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대중들과 평론가들 역시 이 불편함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Double Fantasy〉가 세간의 비난을 받자 섬세한 존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양한 음악 활동을 기획했다. 다시 슬럼프로 움츠러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980년 12월 8일 밤, 앨범 홍보 활동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존은 한 남자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의 이름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 25세의 그는 존의 열성 팬이었다. 


죽음 그리고 요코에게 남긴 것

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엄청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존의 시신이 화장된 날, 요코는 공식 성명을 내고 자신의 ‘남편’인 존을 위한 묵념을 제안했다. 12월 14일 일요일, 전 세계적으로 10분간 묵념이 거행되었다. 팬들이 요코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존의 아까운 죽음은 요코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날 밤 녹음한 요코의 〈Walking on Thin Ice〉는 성공을 거뒀다. 이 노래는 요코의 곡들 중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곡이 되었다. 존이 살아 있을 때 요코를 무조건 적대시하던 대중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요코의 작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존의 그림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요코의 작품과 활동들은 천천히 대중들 사이로 스며들었고, 존은 세상을 떠나서도 매개자 역할을 했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2월 8일이 되자 세계 곳곳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이날은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 팬들은 함께 모여 밤을 새우며 추모 의식을 가졌다. 

같은 날, 뉴욕 저팬소사이어티에서 〈예스 오노 요코〉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존 레논의 미망인인 오노 요코 단독 주연, 감독, 각본의 〈예스 오노 요코〉는 뉴욕을 시작으로 미니애폴리스, 휴스턴, 케임브리지, 토론토,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를 순회하며 열렸다. 전시회에서는 오노 요코의 전기 형식의 수필과 비평 그리고 요코의 새 음반 CD가 들어 있는 아트 북 〈예스 오노 요코〉를 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요코는 자신의 작품에 기여한 존의 영향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제는 일흔이 넘은 요코는 존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존 레논 재단을 운영하며 남편을 추모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예술가로 언론 앞에 설 때면 “존 레논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긴 하지만 존과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작품들을 포함한 예술 활동이 계속되는 한 그녀는 언제나 존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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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예술가의 남편

1969년 3월 20일 존은 마침내 요코와 결혼했다. 존과 결혼한 이후 항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신시아와는 달리 요코는 돈과 명성 그리고 세계 최고의 광고 효과를 가진 남자의 아내라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이 특권 속에서 요코는 새롭게 활기를 찾았고 예술가로서도 많은 것들을 성취했다. 

결혼식 이틀 후, 존과 요코는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의 스위트룸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에 열두 시간씩 1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통해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사회운동을 섹슈얼리티와 결합시킨, 다분히 정치적이었던 이 기상천외한 베드인 시위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요코는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원하는 것 이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데, 그리고 레논은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과 기대를 역이용했다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한때 예술가로서 성공의 길이 보이지 않자 우울증에 걸려 입원까지 했던 요코는 이제 ‘존 레논’이라는 충성스러운 홍보 담당자를 대동한 초호화 전위 예술가이자 창의적인 작가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존은 또 그동안 요코가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누적해온 빚을 한 번에 갚아주었다. 

음악으로 엄청난 돈과 인기를 얻은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존은 오노 요코라는 훌륭한 예술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돈과 명예 그리고 유명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는 그것이 교활하고 이기적인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요코와 예술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해 4월 22일 존은 요코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공증인을 세우고 29년 동안 사용해온 ‘존 윈스턴 레논’이라는 이름을 요코의 성이 들어간 ‘존 오노 레논’으로 개명을 하기에 이른다. 

 

 


뉴욕에서의 생활과 음악 활동 

“영국에서는 나를 한몫 잡은 운 좋은 놈 정도로 취급한다. 요코는 그 한 몫 잡은 놈이랑 결혼한 운 좋은 일본 여자고. 하지만 미국에서 우리는 둘 다 예술가 대접을 받는다. 뉴욕은 천국이다.”

같은 해 12월, 요코와 함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존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요코도 예술가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뉴욕에서 이들은 영화를 찍었다. 천국과도 같은 뉴욕에서 두 사람이 찍은 영화를〈존과 요코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상영했다. 경제적인 여유에 매스컴의 관심이 더해진 덕분에 요코의 경력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1971년 7월 존은 〈Imagine〉을 녹음했다. 미국에서 9월에, 영국에서는 10월에 발표된 이 앨범은 미국에서 30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영국에서는 18주 동안 톱 텐을 차지했다. 그 즈음 요코 역시 자신의 앨범 〈Approximately Universe〉를 발표했다. 하지만 요코의 앨범에 대한 반응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에 존은 대중성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한 요코의 명예를 위해 요코가 〈Imagine〉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존의 노력으로 결국 소책자에 가까운 요코의 〈그레이프프루트〉가 정식으로 재 발매되었다. 플럭서스 예술가가 쓴 책이 재발매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고, 또 출판 기념 기자회견을 연 것도 요코가 처음이었다. 이 밖에도 요코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을 때조차 정기적으로 공식 석상에 존을 대동해 자신을 확실하게 홍보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생일 선물

같은 해 존과 요코는 다시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 시러큐스의 에버슨 미술관이 요코의 개인 전시회를 대규모로 기획했던 것이다. 요코에게 이 전시회는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그녀의 경력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정식 기회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요구사항을 내놓았고 결국 총 기획을 지휘하던 요코의 친구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두 손을 번쩍 들 만큼 예산이 초과되었다. 

요코의 의지대로 전시회를 진행하기 위해 결국 존은 엄청난 사비를 털어 이 초과된 예산을 채워 넣었다. 요코는 존에게 이 전시회가 그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말하며 그를 초대 예술가로 참여시켰다. 존이 전시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비틀즈의 팬들이 몰려들어 전시회는 오픈 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71년 10월 9일, 마침내 전시회가 오픈했을 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전시회를 제일 먼저 체험하기 위해 차가운 비를 맞으며 건물 밖에서 야영을 했다. 플럭서스 전시회의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명의 팬들이 밖에서 밤새 야영을 한 것은 전시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번도 대중적인 흥행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요코는 이 이례적인 사건이 마침내 자신의 예술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을 새워 전시회 오픈을 기다린 수천 명의 팬들 중에는 오노 요코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보다 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 전시회에서 비틀즈가 다시 뭉쳐 공동 콘서트를 열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믿고 찾아온 비틀즈의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팬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요코는 예술가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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