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2009년, 샤넬의 창시자인 가브리엘 샤넬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이 개봉하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샤넬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그리고 사랑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샤넬의 사랑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서 샤넬의 사랑을 독차지한 남자의 이름은 바로 ‘아서 카펠’이었다. 



↑ 영화 속 아서 카펠과 가브리엘 샤넬



출생의 아픈 비밀을 간직한 남자 

샤넬의 연인으로 알려진 아서 카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샤넬처럼 카펠 또한 ‘보이’라는 다소 귀여운 별명이 있었다. 샤넬과 만나기 전 카펠은 런던에서 최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렸고,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귀족 스포츠였던 폴로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귀족 출신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고 카펠 자신도 출생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신을 몹시 따지는 상류 사교계는 그를 받아들였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뉴캐슬에 석탄 수송 화물선을 보유한 재벌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우수 어린 눈동자의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귀족적인 성품이 상류층의 취향에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펠이 학비가 비쌀 뿐 아니라 영국에서 귀족들만 다니는 엘리트 학교를 다녔다는 점 또한 재산에 예민한 귀족들의 관심을 자극했다. 

출생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덕분에 카펠은 사교계에서 항상 소문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족의 사생아나 재벌의 숨겨진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무수한 소문 중 그의 아버지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인물은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1.9.~1910.5.6. 영국 윈저왕가의 왕으로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재위했다)와 페레르 형제(에밀 페레르와 이사크 페레르. 철도 사업을 비롯해 운송 사업, 보험, 부동산 개발 등 각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제2제정기 프랑스의 최대 사업가. 최초의 산업은행인 ‘크레디 모빌리에’를 설립했다) 등이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카펠에게도 출생의 비밀은 언제나 상처였다.  


샤넬과의 우연한 만남

카펠이 샤넬과 처음 만난 것은 1908년 프랑스 피레네 지방에 있는 ‘포’라는 곳에서였다. 샤넬은 당시 에티엔 발장과 함께 몰이사냥을 위해 그곳에 방문했다. 에티엔과 샤넬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었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샤넬이 에티엔에게 적당히 빌붙어 살고 있는 관계였다. 

비록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은 훌륭한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강력한 후원자나 튼튼한 배경이 있는 양갓집의 얌전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젊음과 여성이라는 점을 애매하게 무기로 삼아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반면 에티엔은 일종의 신흥 부르주아로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특별한 직업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던 나이 지긋한 독신남자였다. 성격이 쾌활하고 친구들을 좋아하던 에티엔은 경주용 말을 키우며 지냈고, 남는 시간은 친구들과 함께 주로 파티를 하면서 보냈다. 말(馬)을 너무나 좋아하는 에티엔은 경마 일정에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포에서 우연히 산책을 하던 중 카펠과 만난 것이었다. 

폴로 선수였던 카펠은 말을 다루는 데 뛰어났고, 이 점은 즉시 에티엔의 흥미를 끌었다. 에티엔은 카펠을 콩피에뉴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루아얄리외’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에티엔과 함께 지내고 있던 샤넬은 첫눈에 카펠에게 반했다. 카펠은 서른 살, 샤넬은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샤넬은 카펠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남자(카펠)는 정말 미남이고 매력적이었어. 단순히 잘생기고 멋진 것 이상의 남자였지. 그 무관심한 태도와 초록빛 눈이 얼마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고집 센 말에 올라타곤 했는데, 아주 강한 남자였어. 나는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지.” 


과거를 감추고 싶어하는 연인을 이해하다

성공에 대한 야심이 큰 카펠은 사업을 위해 뉴캐슬이나 파리, 런던 등을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루아얄리외 저택을 자주 찾았다. 에티엔과의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샤넬 때문이었다. 카펠은 변변치 못한 성장 과정을 애써 숨기고 싶어 하는 자존심 강한 여인에게 관심이 생겼다. 얼마 후, 카펠은 샤넬과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고 연인이 된 후 그녀를 훨씬 농밀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샤넬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고 가난했다. 아버지는 장돌뱅이였고, 늘 바깥을 떠돌며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일편단심 사랑하며 뒷바라지하다가 과로 끝에 병으로 죽었다. 그 후 샤넬의 아버지는 그녀와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겼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샤넬은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죽는 날까지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샤넬은 평생 동안 카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카펠은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그녀의 ‘거짓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공을 갈망하는 샤넬을 정식 비즈니스의 세계로 이끌다

샤넬은 당시 루아얄리외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주문에 맞춰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에티엔이 보기에 샤넬이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자를 만드는 것은 샤넬에게는 절박한 일거리였다. 그녀는 결혼 가능성도 없고 뜨거운 애정도 없는 에티엔에게 계속 얹혀살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카펠은 그처럼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샤넬의 속마음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카펠과 사랑에 빠진 샤넬은 더욱 에티엔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랐지만 그렇다고 카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에티엔이 심심풀이로 생각하던 모자 디자인 작업이 샤넬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주문이 늘어났다. 샤넬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에티엔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에티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샤넬이 비록 에티엔의 정식 정부(情婦)가 아니라 해도 그녀가 돈을 벌게 내버려두는 것은 에티엔의 입장에서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카펠이 나섰다. 그는 샤넬이 은행 대출을 받아 가게를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보증까지 섰다. 그는 샤넬의 감각과 재능에서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신했다. 1910년, 샤넬은 카펠의 도움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캉봉 거리 21번지 2층에 있는 커다란 작업실을 빌렸다. ‘샤넬 모드’의 첫 시작이었다. ‘샤넬 모드’가 오픈한 후 샤넬은 에티엔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카펠의 연인이 되었다. 샤넬의 첫 상점이자 샤넬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곳, ‘샤넬 모드’는 카펠과 샤넬의 사랑의 증거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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