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예술가의 남편

1969년 3월 20일 존은 마침내 요코와 결혼했다. 존과 결혼한 이후 항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신시아와는 달리 요코는 돈과 명성 그리고 세계 최고의 광고 효과를 가진 남자의 아내라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이 특권 속에서 요코는 새롭게 활기를 찾았고 예술가로서도 많은 것들을 성취했다. 

결혼식 이틀 후, 존과 요코는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의 스위트룸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에 열두 시간씩 1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통해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사회운동을 섹슈얼리티와 결합시킨, 다분히 정치적이었던 이 기상천외한 베드인 시위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요코는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원하는 것 이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데, 그리고 레논은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과 기대를 역이용했다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한때 예술가로서 성공의 길이 보이지 않자 우울증에 걸려 입원까지 했던 요코는 이제 ‘존 레논’이라는 충성스러운 홍보 담당자를 대동한 초호화 전위 예술가이자 창의적인 작가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존은 또 그동안 요코가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누적해온 빚을 한 번에 갚아주었다. 

음악으로 엄청난 돈과 인기를 얻은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존은 오노 요코라는 훌륭한 예술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돈과 명예 그리고 유명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는 그것이 교활하고 이기적인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요코와 예술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해 4월 22일 존은 요코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공증인을 세우고 29년 동안 사용해온 ‘존 윈스턴 레논’이라는 이름을 요코의 성이 들어간 ‘존 오노 레논’으로 개명을 하기에 이른다. 

 

 


뉴욕에서의 생활과 음악 활동 

“영국에서는 나를 한몫 잡은 운 좋은 놈 정도로 취급한다. 요코는 그 한 몫 잡은 놈이랑 결혼한 운 좋은 일본 여자고. 하지만 미국에서 우리는 둘 다 예술가 대접을 받는다. 뉴욕은 천국이다.”

같은 해 12월, 요코와 함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존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요코도 예술가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뉴욕에서 이들은 영화를 찍었다. 천국과도 같은 뉴욕에서 두 사람이 찍은 영화를〈존과 요코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상영했다. 경제적인 여유에 매스컴의 관심이 더해진 덕분에 요코의 경력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1971년 7월 존은 〈Imagine〉을 녹음했다. 미국에서 9월에, 영국에서는 10월에 발표된 이 앨범은 미국에서 30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영국에서는 18주 동안 톱 텐을 차지했다. 그 즈음 요코 역시 자신의 앨범 〈Approximately Universe〉를 발표했다. 하지만 요코의 앨범에 대한 반응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에 존은 대중성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한 요코의 명예를 위해 요코가 〈Imagine〉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존의 노력으로 결국 소책자에 가까운 요코의 〈그레이프프루트〉가 정식으로 재 발매되었다. 플럭서스 예술가가 쓴 책이 재발매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고, 또 출판 기념 기자회견을 연 것도 요코가 처음이었다. 이 밖에도 요코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을 때조차 정기적으로 공식 석상에 존을 대동해 자신을 확실하게 홍보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생일 선물

같은 해 존과 요코는 다시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 시러큐스의 에버슨 미술관이 요코의 개인 전시회를 대규모로 기획했던 것이다. 요코에게 이 전시회는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그녀의 경력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정식 기회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요구사항을 내놓았고 결국 총 기획을 지휘하던 요코의 친구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두 손을 번쩍 들 만큼 예산이 초과되었다. 

요코의 의지대로 전시회를 진행하기 위해 결국 존은 엄청난 사비를 털어 이 초과된 예산을 채워 넣었다. 요코는 존에게 이 전시회가 그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말하며 그를 초대 예술가로 참여시켰다. 존이 전시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비틀즈의 팬들이 몰려들어 전시회는 오픈 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71년 10월 9일, 마침내 전시회가 오픈했을 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전시회를 제일 먼저 체험하기 위해 차가운 비를 맞으며 건물 밖에서 야영을 했다. 플럭서스 전시회의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명의 팬들이 밖에서 밤새 야영을 한 것은 전시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번도 대중적인 흥행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요코는 이 이례적인 사건이 마침내 자신의 예술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을 새워 전시회 오픈을 기다린 수천 명의 팬들 중에는 오노 요코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보다 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 전시회에서 비틀즈가 다시 뭉쳐 공동 콘서트를 열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믿고 찾아온 비틀즈의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팬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요코는 예술가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