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제자 중에 가장 먼저 부처님께 귀의했으며, 또 아라한이 된 사리불은 부처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당시의 일반 철학이며 종교에 대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꿰뚫고 있었다. 학문적 지식과 깨달음을 통한 경험,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그는 이를 바탕으로 바라문 출신의 승려나 수행자를 비롯하여 외도들과 대론을 펼쳐 ‘한 이론 혹은 한 철학’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귀의시켰다.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데바닷다
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후, 많은 비구들과 재가자들은 사리불에게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처소에서는 법문을 청하는 비구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설법이 끝난 후에는 대개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실력이 미천함을 염려하여 감히 부처님께 질문을 하거나 가르침을 청하지 못하는 다른 비구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수행 중에 의문이 나는 일이 있거나 부처님의 말씀이 필요한 순간에 비구들을 대표하여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사리불을 중심으로 설법을 펼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만큼 그는 인품과 지혜를 겸비한 출중한 인물이었다. 증일아함(增一阿含) 「제자품(弟子品)」에서는 그런 그를 일컬어 '지혜가 무궁하여 모든 의심을 절대적으로 이해하는 비구는 사리불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부처님에게는 사리불을 포함하여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도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데바닷다(Devadatta)이다. 그는 세속에서는 부처님과 사촌지간이며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아난의 친형이기도 하다. 이처럼 데바닷다는 누구보다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항상 부처님을 경계하고 또 경쟁상대로 생각하며 질투를 하였다.

그런 데바닷다의 성품을 잘 알고 계시던 부처님은 그가 출가하여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을 때 거절하며 재가자가 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데바닷다는 부처님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석가모니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다니며 신통에 밝은 ‘수라타’라는 비구의 제자가 되어 신통력을 얻었다.


사리불은 나의 장자(長子)이다
신통의 도를 얻은 데바닷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500여명의 비구들이 사문을 떠나 데바닷다에게로 갔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불과 목건련을 보내 데바닷다에게 미혹된 비구들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이는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만큼 믿음직스럽기도 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가의 친족이 출가 후 얻은 제자만도 못한 슬픈 경우이다.

데바닷다를 따라 갔던 500여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과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자 두 사람이 부처님 곁을 떠나 데바닷다에게 귀의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여 데바닷다의 위엄을 의심하지 않았게 되었다. 이에 더욱 의기양양해진 데바닷다는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설법을 청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리불은 교단을 배신하고 떠난 비구들에게 어떤 강요나 꾸중도 하지 않고 데바닷다가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후, 데바닷다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사리불이 펼친 그 단 한 번의 설법은 눈앞에 신통에 미혹된 500여 비구들은 깨우침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법으로 비구들을 깨우친 사리불의 설법이 성공적으로 끝나자마자 목건련은 데바닷다보다 더 큰 신통을 발휘하여 500여 비구들을 단번에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다. 이처럼 승가의 화합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리불을 기특하게 여기신 부처님은 그를 '나의 장자(長子)'라 불렀다.

실로 사리불은 부처님의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자 교단의 지혜로운 맏형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많은 비구들이 그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가르침을 청할 때마다 그는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만족스러운 답을 주곤 했다.


교단 최초의 사미 라훌라의 스승이 되다
사리불은 교단 내에서 모든 비구들의 맏형과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부처님이 출가 전에 둔 친(親)아들 라훌라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부처님이 자신의 나라인 카필라국에 간 것은 깨달음을 얻은 후 3년이 지난 후였다. 라훌라가 태어나던 출가를 하여 6~7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또 다시 3년이 흐른 후에 고국에 갔으니 거의 10년 만의 환향이었다.

부처님의 속가 아들인 라훌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카필라국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며 아버지이자 부처님 곁에 항상 있기를 청했고, 부처님은 라훌라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라훌라는 목건련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깎고 사리불을 계사(戒師)로 사미십계를 받고 출가하여 승가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사리불은 어린 라훌라를 아들처럼 보살폈고 비슷한 시기에 라훌라 또래의 소년 한 명을 제자로 받아 어른들 밖에 없는 교단에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좋은 도반이 되도록 배려해 주었다. 또한 사리불은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마다 꼭 라훌라를 데리고 갔고 참선을 할 때도 곁에 두었으며 법을 전하기 위해 다른 지방에 갈 때도 항상 라훌라와 함께했다.

한 번은 사리불과 라훌라가 함께 걸식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시비를 거는 부랑자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리불과 라훌라의 발우에 모래를 붓고 몽둥이로 두 사람을 때리며 ‘너희 수행자들은 하는 일도 없이 밥이나 빌어먹고 다니면서 자비니 인욕이니 하는데 이런 상황도 참을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다. 머리는 터져 피가 흘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부어올랐지만 사리불은 표정이나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반면 일단 참긴 했지만 라훌라는 아무 이유 없이 당한 폭력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결국 사리불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는 지금도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하여 그렇게 금방 화를 가라앉히셨나요?”

그러자 사리불이 대답했다.

“라훌라야, 나는 화를 금방 가라앉힌 것이 아니라 화가 난 적이 없단다.”

사리불의 말에 라훌라는 화가 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스승의 뒤를 따랐다. 화가 난 적이 없다는 스승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라훌라의 마음에는 분노가 사라지고 환희심이 차올랐다. 넘쳐흐르는 기쁨을 느끼며 라훌라가 말했다.

“스승님,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인욕(忍辱)을 배웠습니다.”

사리불은 한 단계 성숙해진 라훌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사리불은 입에 발린 이론이 아니라 라훌라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 수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가르쳐 준 스승이며 모범이었다.

또한 그는 부처님께 이날 있었던 일을 고했다. 이에 부처님은 라훌라를 불러 칭찬을 해주셨다. 이에 라훌라는 더욱 더 수행에 정진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혔다. 사리불과 부처님은 이런 라훌라의 성장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훌라와 같이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한 젊은 수행자에게 칭찬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잘 알았던 사리불은 진정 좋은 스승이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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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닷타 장자가 시타바나라고 하는 묘지에 이르렀을 무렵,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계시다가 그를 발견하였다. 수닷타의 마음을 읽은 부처님은 길 가에 자리를 깔고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수닷타가 다가오자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부처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해 주었다.

솟구치는 환희심을 감추지 못한 수닷타에 예배를 받은 부처님은 그에게 보시(普施)와 지계(持戒)의 공덕에 대해 설법을 해주셨다. 수닷타는 곧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또한 교단과 함께 코살라국에 와서 법을 설해주실 것을 청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코살라국을 가다
부처님은 수닷타 장자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는 매우 기뻐하며 부처님이 교단과 함께 코살라국에 오셨을 때 머무를 수 있는 정사(절)을 짓기 위해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코살라국으로 돌아가기 전, 수닷타는 돌아가서 교단이 머무를 정사를 지어야 하는데 자신은 모르는 것이 많으니 부처님께서 함께 가주실 것을 부탁했다.

부처님을 옹호하며 지지하는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과 달리 코살라국은 강대국이지만 어떤 국가인지, 어떤 외도들이 있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독실한 불자(佛子)가 된 수닷타 장자 한 사람의 부탁만으로 교단이 움직이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진리의 가르침을 펼쳐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상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부처님은 수닷타 장자에게 자신은 지금 교단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수닷타는 난처해하며 그렇다면 다른 제자라도 좋으니 자신과 함께 코살라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 수닷타는 크게 만족해하며 사리불과 함께 코살라국으로 갔다. 과연 사리불은 부처님의 가장 믿음직한 제자였음이 분명하다.

코살라국에 도착한 수닷타 장자는 사리불에게 어떤 곳이 정사를 짓기에 가장 적합한지 물어본 끝에 수도 사왓티(사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숲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은 파세나디(波斯匿)왕의 아들인 기타태자의 땅이었다. 수닷타는 기타태자를 찾아가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정사를 짓기 위해 태자의 숲을 사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은 숲을 팔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수닷타는 돈을 얼마든지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기타태자는 자신에게 돈으로 거래를 제안하는 수닷타가 괘씸했다. 돈이라면 자신도 얼마든지 있었다. 확고한 수닷타의 얼굴에 부아가 치민 기타태자는 농담 삼아 수닷타에게 만약 숲을 황금으로 덮을 수 있다면 그 부분만을 팔겠다고 대답했다.

기타태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닷타는 곧장 집으로 가서는 창고를 열고는 수레마다 황금을 가득 싣고 숲으로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한 태자는 그때서야 수닷타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묻고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는 황금이 덮이지 않은 땅을 비롯하여 정사를 짓는데 필요한 나무들을 자신이 보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기타 태자의 나무, 즉 기수(祈樹)와 급고독(給孤獨) 장자, 즉 수닷타 장자가 보시한 정사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을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른다. 부처님께 보시(普施)의 공덕에 대하여 배운 수닷타 장자는 그때부터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며 도와주었기 때문에 아나타핀다카, 즉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돕는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교단이 머물 기원정사의 공사를 감독하다
이후 기원정사의 공사는 사리불의 감독 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리불은 정사를 총 어느 정도 규모로 할 것인지를 비롯하여 계율과 교단의 관습 그리고 법도에 따라 어긋남이 없도록 다양한 사항들에 대하여 꼼꼼하게 지시하고 감독하였다. 또 비구들이 수행하는 장소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곳은 어떤 크기로 어떻게 지어야 할지, 또 잠자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등 수많은 일들을 직접 결정하였다.

수닷타 장자는 사리불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일꾼들을 동원하여 1000명이 넘는 비구들이 생활할 승방(僧房)과 휴게실, 세면소와 목욕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기타태자가 보시한 나무들을 심어 산책을 하거나 참선을 할 숲을 꾸미고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아름답고도 편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완성된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은 평생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셨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법을 설하셨다.


코살라국 외도들의 도전에 응하다
하지만 사리불이 코살라국에 온 이유는 단지 기원정사의 공사를 감독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사리불을 먼저 코살라국에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부처님은 자신이 코살라국에 방문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일들에 대하여 미리 알아보고 대처하기 위해 가장 믿음직스러운 제자 사리불을 보낸 것이었다.

과연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을 위해 기타태자의 숲을 사서 정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나자 코살라국의 바라문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그 중 과격한 성품을 지닌 몇몇은 논쟁을 하기 위해 기원정사로 찾아왔다. 이에 사리불은 점잖은 태도와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이들을 상대했다. 지혜와 확신으로 충만한 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외도들의 도발에 응하는 사리불의 모습에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복했고, 어떤 이는 침묵한 채 돌아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었음을 참지 못해 사리불을 위협하거나 실제로 해를 가하기도 했다.

사리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두려움 없이 이들을 하나하나 상대했다. 그러자 일부 바라문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코살라국 백성들 사이에서도 부처님의 명성이 서서히 높아졌다. 이처럼 지혜로움으로 무장한 채 외도들을 상대한 사리불의 활약은 부처님이 코살라국에 직접 방문하시기 전 ‘예고편’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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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바나(죽림정사)에 도착한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을 뵙자 의식대로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돌고 오체투지의 예로 예배를 드리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오라, 비구여’라는 말씀으로 이를 허락하였고, 두 사람은 곧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사리불은 부처님께 귀의한 후 15일 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아라한과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등 깨달음을 이르는 4단계 중 최상의 경지이다.

또한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정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전까지 아버지 ‘티샤’의 이름을 딴 ‘우파티샤’ 대신 어머니 ‘사리’의 이름을 딴 ‘사리푸트라(사리불 舍利弗 Śāriputra)’가 그의 새 이름이었다. 그 후 열반에 이를 때까지 그는 줄곧 사리불이라 불리었다.


마가다국 바라문들의 잇따른 출가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당시 마가다국에서 큰 화제였다. 특히 두 사람은 이미 산자야 문하에서 최고의 후계자로 이름을 날렸었기 때문에 더욱 외도들과 바라문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리불의 스승이었던 산자야를 비롯하여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의 많은 외도들과 바라문들은 그가 부처님께 실망을 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리불은 이들의 기대를 보란 듯이 저버렸다. 그 뿐 아니라 논사(論師)이자 수행자로써 바라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사리불의 외삼촌 구치라(Kotthira)를 비롯하여 우파세나(Upasena), 춘다(Cunda), 레왓타(Revata) 등 사리불의 동생들도 줄줄이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출중한 바라문인 사리와 티샤의 여덟 아들 중 절반이 동시에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이를 반영하듯 높은 학식과 덕망, 권위를 모두 갖춘 바라문과 찰제리 출신의 인물들도 연달아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빔비사라왕은 이를 막기는커녕 아예 출신과 상관없이 원하는 자는 누구나 출가를 할 수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가다국의 바라문들은 몹시 당황하였고 부처님과 교단을 향해 온갖 악담과 비방을 퍼부었다. 그러나 반대로 진리를 구하기 위해 베르바나(죽림정사)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비구들의 시기와 전생의 인연
부처님은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청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해주셨으나 사리불과 목건련 두 제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각별하셨다. 모든 비구들은 출가한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교단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긴 것은 물론 모든 비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사람에게 계경(戒經)을 암송하는 일을 맡도록 지목하셨다. 그러자 먼저 출가한 비구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전생의 인연을 들어 사리불과 목건련이 세세생생 동안 선근을 닦으며 부처님의 상수(上首) 제자가 되기를 발원한 끝에 이번 생에 태어났음을 설명해주셨다. 비록 지금은 다른 비구들에 비해 출가 순서가 늦었지만 이미 부처님과 만나서 먼저 인연을 쌓았음을 말해주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처음으로 설법을 듣고 제자가 된 교진여(僑陳如 Anna-Kondanna)의 경우 마찬가지로 전생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그는 상수제자가 아닌 첫 번째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였기에 지금 최초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만을 품는 비구들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몸소 이렇게 말씀하시며 사리불과 목건련을 아끼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불과 목건련을 따르고 가까이 하라. 그들은 청정한 삶은 돕는 훌륭한 벗이다. 사리불은 그대들에게 생모(生母)와 같고, 목건련은 그대들에게 양모(養母)와 같은 사람이다.”


생모(生母)와 같은 사리불과 양모(養母)와 같은 목건련
어느 단체에서나 아버지 역할과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 그런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져야 편안하게 일이 진행된다.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이 비구들의 아버지라 자처하셨다. 그렇다면 교단에서 어머니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 바로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었던 셈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믿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다행히도 생모(生母) 사리불과 양모(養母) 목건련은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가는 친구로 깊은 우정을 지니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뜻을 잘 알았으며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이는 부처님에게 있어서도,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있어서도, 교단에 있어서 행운 중의 행운이다. 탁월한 지혜와 현명함 그리고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모습에 비구들의 시기와 질투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한편 사리불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후에도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인도해준 앗사지 비구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사리불은 항상 앗사지 비구가 머무는 곳을 향해 예배하고 그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다. 부처님도 앗사지 비구를 향한 사리불의 애틋한 고마움의 마음을 알고는 이를 허락하셨다.


수닷타 장자와의 만남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깨달음을 이룬 이후, 부처님은 줄곧 마가다국에서만 설법을 해오셨다. 하지만 북쪽의 강대국 코살라국과의 인연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인연을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코살라국의 수도 사왓티(사위성) 출신의 장자(長子) 수닷타였다.

경전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자(長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신분과 부유함은 물론 사회적 명망과 덕을 고루 작춘 인물을 뜻한다. 어느 날 수닷타 장자는 일을 보기 위해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 왔다가 결혼한 여동생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그를 보고 기뻐하며 환영해주었을 여동생과 매부가 온통 손님을 초대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수닷타는 내심 서운하여 매부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이 처남을 본체만체 하시오?”
그러자 매부가 대답했다.

“처남, 나는 지금 몹시 바쁘다네. 내일 아침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지.”

매부의 말에 더욱 섭섭해진 수닷타는 바쁘다는 매부를 붙들고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지, 왜 공양을 올리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매부는 하는 수 없이 잠시 일을 멈추고 수닷타에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매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닷타의 마음속에 있던 서운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부처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매부, 지금 당장 부처님을 뵙게 해 주시오!”

떼를 쓰듯 외치는 수닷타에게 매부는 부처님께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날 밤, 수닷타는 잠을 자다가 아침이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일어났다. 하지만 밖은 여전히 깜깜하기만 했다. 결국 아침이 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던 수닷타는 집 밖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가 동이 틀 무렵 시타바나라고 하는 묘지에 도착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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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은 7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산자야의 가르침을 모두 숙지하였을 뿐 아니라 스승의 인정을 받았고 또 젊은 나이에 250제자 중 으뜸이 되어 교단을 이끄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산자야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지만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사리불의 의문은 여전히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스로 깨달음을 구해보기로 결심하고 교단을 나오지 않은 상태로 잠시 스승의 곁을 떠나 따로 수도장을 마련했다.


앗사지(阿說示 Assaji) 비구와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근처를 지나던 사리불은 길에서 한 비구를 보게 되었다. 그 비구는 머리를 빡빡 깎았고 수수한 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발우를 든 채 음식을 빌고 있었다. 사리불이 그 동안 보아왔던 온갖 수행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 비구의 외양은 지극히 평범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모든 거동이 점잖고 의젓한 모습에 왠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한 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땅을 향한 그 비구의 눈에는 고요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사리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이 세상에 참다운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 이 사람에게 그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리라.'

이 상황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려는 사리불의 간절함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와 눈을 가진 사리불의 매서운 안목에 입이 딱 벌어진다. 게다가 겸손할 줄 아는 예의와 실천력까지 겸비했으니 과연 부처님의 상수(上首)제자 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사리불은 곧장 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는 사문이신가요?”

그러자 그 비구는 역시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예, 저는 고타마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하고 있는 앗사지라고 합니다.”

앗사지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법을 했던 녹야원에 머물던 5명의 비구 중 한 명이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석가족의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던 사리불은 기뻐하며 다시 물었다.

“저는 사리불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예, 저희 스승께서는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났다가 인연을 따라 멸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 모든 것은 덧없어서 나면 멸하는 법이며, 났다가 멸하는 일이 끝나면 고요한 경지를 낙으로 삼는다(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佛本行集經』)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리불은 귀가 번쩍했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진리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선근이 깊을 뿐 아니라 빼어난 총명함과 진리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지닌 채 정진해온 사리불은 앗사지 비구가 말한 인연법을 듣고는 곧장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환희에 넘친 사리불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인연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앗사지 비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 깊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의 스승께서 가르치신 대로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더욱 자세한 가르침을 원하신다면 저희 스승께 여쭈어보십시오.”

공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에게 한 치의 거만함 없이 오직 아는 것만을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한 앗사지 비구의 태도 또한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이 멋진 두 남자의 만남은 훗날 교단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발명품이 등장하여 역사 속에서 보고 싶은 장면만을 골라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멋진 두 남자의 만남이야말로 여성은 물론 남성 불자(佛子)들까지도 가장 보고 싶은 장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문하를 떠나 부처님께 향하다
앗사지 비구와의 만남 이후 사리불은 곧장 목건련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산자야의 제자가 된 지금까지 항상 사리불과 함께했던 목건련은 이번에도 두말없이 친구의 뜻을 따랐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곧바로 스승 산자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기쁨에 들뜬 사리불의 이야기를 들은 산자야는 이 뛰어난 두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사리불과 목건련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제까지 자신이 누려온 명성과 권위를 버리고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산자야는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진리를 찾으려다 실패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자신과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앗사지 비구에게서 가능성을 찾은 그들의 굳은 의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제자가 원하는 궁극의 가르침을 줄 수 없는 스승보다 무력한 존재는 없다. 산자야는 이미 두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뛰어 넘은지 오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산자야를 대신해서 그들이 지도했던 250명의 제자들 역시 사리불과 목건련의 뒤를 따랐다.

라자가하(왕사성)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논사(論師)이자 뛰어난 제자까지 두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그는 손 써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250명의 제자를 잃었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제자가 오는구나
한편 베르바나(죽림정사)에 머물며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던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목건련, 두 사람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부처님께는 이미 천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라문이나 찰제리 등 출신이 제각각 달랐는데 부처님께서는 교단 내에 평등과 화합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일단 귀의한 후에는 출가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했다.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 예로 석가족의 왕자들과 이발사 우바리가 출가할 당시, 우바리가 먼저 출가를 하자 부처님께서는 왕자들에게 교단 내에서는 그를 당연히 ‘선배’로 대할 것을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처님 생전에 출가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교단의 규칙을 벗어난 예외의 경우가 단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리불과 목건련의 경우이고, 두 번째가 마하가섭의 경우이다. 멀리서 사리불과 목건련의 선두로 한 250명의 제자들이 오는 것을 지켜보던 부처님은 설법을 멈추고 빙그레 웃으며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열어라. 저기 내 훌륭한 상수(上首)제자가 오는구나.”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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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떠난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 <천녀유혼>은 낭만적인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난하고 순진한 세금징수원 영채신 역으로 분한 장국영은 돈을 들이지 않고 하룻밤 묶어갈 곳을 찾다가 산 속에 있는 황폐한 절 난약사에 가게 된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한 그곳에서 그는 귀신을 퇴치하는 도사 연적하를 만나게 된다.

어둠이 깔리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서워하는 영채신에게 연적하는 한 권의 불경을 준다. 그리고 무섭거든 소리 내어 외우라며 경전의 제목을 가르쳐 주고 훌쩍 사라진다. 홀로 남은 영채신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연적하가 가르쳐준 경전의 제목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난약사를 돌아다닌다.


반야심경과 사리불
연적하가 알려준 ‘귀신을 퇴치하는 힘을 가진 경전의 제목’은 무엇일까.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이라면 바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아닌가. 이 반가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

반야심경은 총 270자로 구성된 짧고도 완전무결한 경전이다. 반야심경은 여느 경전들처럼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초반에 ‘사리불이여’하는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설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데 부처님이 사리불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을 독송할 때면 마치 사리불 한 명의 제자를 앉혀놓고 다정하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리불은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표적인 경전에서도 항상 등장하여 수많은 천신, 인간, 비구, 중생 등 각 대중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끄는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사리불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렇다면 사리불은 과연 부처님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리불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부터 인연을 맺어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눈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 출신이다. 사리불의 어머니는 ‘니타라’라는 뛰어난 브라만의 딸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새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지녔다고 하여 ‘사리(Rupasari)’라고 불렸다. 사리가 한창 아름답게 성장했을 때 남인도 지방에서 젊은 ‘논사(論師)’로 이름난 바라문 출신의 ‘티샤’라는 청년이 ‘니타라’를 찾아와 논쟁 끝에 이겼다.

이에 왕은 ‘니타라’가 다스리던 땅을 ‘티샤’에게 내렸고, 사리는 티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곧 사리불의 부모이다. 이들은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근처 마을에서 살았는데 사리가 첫 아이(사리불)를 임신했을 때, 남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논사(論師)였던 구치라(사리불의 외삼촌)가 찾아왔다. 그리고 사리에게 ‘누님의 아이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르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구치라는 훗날 사리불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사리와 티샤의 여덟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리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우파티샤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이름인 ‘사리’를 따서 샤리푸트라(Sariputra) 즉, ‘사리의 아들(舍利子)’로 불리게 되었다. 사리불과 어머니의 관계는 평생 무척 각별했는데 훗날 사리불이 열반에 들 때 그의 어머니가 임종을 지켰을 정도였다.


마갈다국 최고의 엄마 친구 아들이던 어린 시절과 산자야와의 만남
어머니를 닮아 출중한 외모를 타고났던 사리불은 어린 시절부터 인도의 고대 성전인 네 가지 베다에 통달할 만큼 총명해 10세 무렵에 이미 소년학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16세 때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미 거침없는 논리와 언변으로 부친의 제자들을 비롯한 논사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뛰어난 논사였던 아버지 티샤 역시 사리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리불은 친구 목건련과 함께 영축산(靈竺山)에서 벌어진 산정제(山頂祭)에 참가하게 되었다. 산정제는 바라문교에서 집전하는 제사였는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는 요란스럽고 번잡할 뿐 아니라 괴기스럽기까지 한 축제의 무의미함에 깊은 환멸과 허무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기로 맹세한 그는 곧장 7일간의 단식 끝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절친한 친구 목건련과 함께 출가하였다. 출가 후 그가 목건련과 함께 찾아간 스승은 당시 유명한 논사(論師)라고 일컬어지는 6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에서 ‘회의론자’로 이름이 높던 산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였다.

산쟈야는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로 결코 어떤 ‘입장’에 서지 않는 판단 중지의 자세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명석했던 사리불은 ‘산자야’의 문하에 들어간 후 단 7일 만에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깨우쳤다. 이에 산자야는 기뻐하며 그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교단을 맡겼고 그는 250명의 제자들 가운데 으뜸, 즉 상수 제자가 되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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