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제자 중에 가장 먼저 부처님께 귀의했으며, 또 아라한이 된 사리불은 부처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당시의 일반 철학이며 종교에 대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꿰뚫고 있었다. 학문적 지식과 깨달음을 통한 경험,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그는 이를 바탕으로 바라문 출신의 승려나 수행자를 비롯하여 외도들과 대론을 펼쳐 ‘한 이론 혹은 한 철학’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귀의시켰다.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데바닷다
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후, 많은 비구들과 재가자들은 사리불에게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처소에서는 법문을 청하는 비구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설법이 끝난 후에는 대개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실력이 미천함을 염려하여 감히 부처님께 질문을 하거나 가르침을 청하지 못하는 다른 비구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수행 중에 의문이 나는 일이 있거나 부처님의 말씀이 필요한 순간에 비구들을 대표하여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사리불을 중심으로 설법을 펼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만큼 그는 인품과 지혜를 겸비한 출중한 인물이었다. 증일아함(增一阿含) 「제자품(弟子品)」에서는 그런 그를 일컬어 '지혜가 무궁하여 모든 의심을 절대적으로 이해하는 비구는 사리불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부처님에게는 사리불을 포함하여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도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데바닷다(Devadatta)이다. 그는 세속에서는 부처님과 사촌지간이며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아난의 친형이기도 하다. 이처럼 데바닷다는 누구보다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항상 부처님을 경계하고 또 경쟁상대로 생각하며 질투를 하였다.

그런 데바닷다의 성품을 잘 알고 계시던 부처님은 그가 출가하여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을 때 거절하며 재가자가 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데바닷다는 부처님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석가모니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다니며 신통에 밝은 ‘수라타’라는 비구의 제자가 되어 신통력을 얻었다.


사리불은 나의 장자(長子)이다
신통의 도를 얻은 데바닷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500여명의 비구들이 사문을 떠나 데바닷다에게로 갔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불과 목건련을 보내 데바닷다에게 미혹된 비구들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이는 사리불과 목건련이 그만큼 믿음직스럽기도 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가의 친족이 출가 후 얻은 제자만도 못한 슬픈 경우이다.

데바닷다를 따라 갔던 500여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과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자 두 사람이 부처님 곁을 떠나 데바닷다에게 귀의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여 데바닷다의 위엄을 의심하지 않았게 되었다. 이에 더욱 의기양양해진 데바닷다는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설법을 청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리불은 교단을 배신하고 떠난 비구들에게 어떤 강요나 꾸중도 하지 않고 데바닷다가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후, 데바닷다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사리불이 펼친 그 단 한 번의 설법은 눈앞에 신통에 미혹된 500여 비구들은 깨우침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법으로 비구들을 깨우친 사리불의 설법이 성공적으로 끝나자마자 목건련은 데바닷다보다 더 큰 신통을 발휘하여 500여 비구들을 단번에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다. 이처럼 승가의 화합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리불을 기특하게 여기신 부처님은 그를 '나의 장자(長子)'라 불렀다.

실로 사리불은 부처님의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자 교단의 지혜로운 맏형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많은 비구들이 그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가르침을 청할 때마다 그는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만족스러운 답을 주곤 했다.


교단 최초의 사미 라훌라의 스승이 되다
사리불은 교단 내에서 모든 비구들의 맏형과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부처님이 출가 전에 둔 친(親)아들 라훌라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부처님이 자신의 나라인 카필라국에 간 것은 깨달음을 얻은 후 3년이 지난 후였다. 라훌라가 태어나던 출가를 하여 6~7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또 다시 3년이 흐른 후에 고국에 갔으니 거의 10년 만의 환향이었다.

부처님의 속가 아들인 라훌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카필라국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며 아버지이자 부처님 곁에 항상 있기를 청했고, 부처님은 라훌라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라훌라는 목건련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깎고 사리불을 계사(戒師)로 사미십계를 받고 출가하여 승가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사리불은 어린 라훌라를 아들처럼 보살폈고 비슷한 시기에 라훌라 또래의 소년 한 명을 제자로 받아 어른들 밖에 없는 교단에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좋은 도반이 되도록 배려해 주었다. 또한 사리불은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마다 꼭 라훌라를 데리고 갔고 참선을 할 때도 곁에 두었으며 법을 전하기 위해 다른 지방에 갈 때도 항상 라훌라와 함께했다.

한 번은 사리불과 라훌라가 함께 걸식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시비를 거는 부랑자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리불과 라훌라의 발우에 모래를 붓고 몽둥이로 두 사람을 때리며 ‘너희 수행자들은 하는 일도 없이 밥이나 빌어먹고 다니면서 자비니 인욕이니 하는데 이런 상황도 참을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다. 머리는 터져 피가 흘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부어올랐지만 사리불은 표정이나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반면 일단 참긴 했지만 라훌라는 아무 이유 없이 당한 폭력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결국 사리불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는 지금도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하여 그렇게 금방 화를 가라앉히셨나요?”

그러자 사리불이 대답했다.

“라훌라야, 나는 화를 금방 가라앉힌 것이 아니라 화가 난 적이 없단다.”

사리불의 말에 라훌라는 화가 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스승의 뒤를 따랐다. 화가 난 적이 없다는 스승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라훌라의 마음에는 분노가 사라지고 환희심이 차올랐다. 넘쳐흐르는 기쁨을 느끼며 라훌라가 말했다.

“스승님,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인욕(忍辱)을 배웠습니다.”

사리불은 한 단계 성숙해진 라훌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사리불은 입에 발린 이론이 아니라 라훌라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 수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가르쳐 준 스승이며 모범이었다.

또한 그는 부처님께 이날 있었던 일을 고했다. 이에 부처님은 라훌라를 불러 칭찬을 해주셨다. 이에 라훌라는 더욱 더 수행에 정진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혔다. 사리불과 부처님은 이런 라훌라의 성장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훌라와 같이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한 젊은 수행자에게 칭찬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잘 알았던 사리불은 진정 좋은 스승이었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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