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데니스는 두 사람의 신혼집으로 고급 주택지인 첼시의 플랫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두었다. 마거릿은 많은 여성들이 꿈꾸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생계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우아한 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남편의 재력을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 아닌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했다. 곧바로 법률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자기 계발을 시작한 아내를 응원하다

옥스퍼드에서 화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법률 공부는 마거릿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다. 데니스는 아내의 선택을 두말없이 존중했고 가정부를 고용해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을 없애주었다. 남편의 이해와 지원을 속에서 원했던 공부를 마음껏 시작한 마거릿은 1953년 6월, 쌍둥이를 출산했다. 딸 캐럴과 아들 마크였다. 출산의 기쁨은 컸지만 그보다 더 마거릿을 조급하게 만든 것은 4개월 후에 있을 법정 변호사 시험이었다.

임신 자체는 공부를 크게 방해하지 않았지만 출산을 하자 육아에 대한 압박이 어깨를 짓눌렀다. 공부는커녕 갓난아기 둘을 돌보는 데 24시간을 꼬박 투자해도 모자랐다. 마거릿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데니스는 쌍둥이를 돌볼 보모를 구해주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결 여유가 생긴 마거릿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4개월 후 마침내 법정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마거릿은 이 결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훗날에도 두고두고 쌍둥이를 돌보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데니스의 자상한 배려와 넉넉한 재력 없이도 그것이 가능했을까. 아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운 데니스가 있었기에 마거릿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변호사 활동을 위해 미혼 행세를 한 아내를 이해하다

법정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마거릿은 이번에는 세금 전문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에 도전했다. 이것은 6개월간의 실무 수습 기간이 필요했다. 마거릿은 세금 전문가인 피터 롤런드 변호사 밑에서 실무 수습을 시작했다. 가족이 둘이나 늘어났지만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는 데니스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라면 굳이 마거릿이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새색시이자 생후 10개월 된 쌍둥이의 엄마인 마거릿은 자신의 꿈을 하루라도 빨리 성취하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연수 기간이 끝난 후 마거릿은 본격적으로 취업 활동을 시작했다. 가사와 육아를 뒤로하면서까지 사회 진출을 위해 노력해 뛰어난 성과를 올렸지만 지원을 한 곳마다 거듭 거절을 당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마거릿이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거릿을 고용하려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마거릿의 고용 조건으로 ‘미시즈(Mrs)’ 대신 ‘미스(Miss)’로 간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1호 여성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려면 그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마거릿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조건을 냉큼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는 기혼 여성이었지만 취업을 위해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세금 전문 변호사 활동’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이쯤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마거릿은 미스 대처로서 공공연하게 미혼임을 드러내는 간판을 걸고 5년간 세금 문제 변호사로 일했다. 이번에도 데니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내의 꿈을 위해 시간과 돈 그리고 이해심을 아낌없이 주었던 데니스와 달리 마거릿은 사업가인 남편을 위해 별다른 내조를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가정에서 위안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을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했으며, 본인의 꿈과 미래를 위해 오로지 전진하는 아내를 조용히 응원했다.

마거릿의 정치 입문과 출세 

 

1955년부터 줄기차게 정치 활동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마거릿은 5년 만에 마침내 핀츨리 선거구에서 출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10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국회의원이 되었다. 마침내 정치가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34세였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는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마거릿의 야심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젊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는 따가운 시선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마거릿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의 배로 시간을 들여가며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거릿에게는 이미 이룬 가정보다 앞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자신의 미래가 더욱 중요했다. 그녀는 남자들을 능가하는 성과를 보이며 두각을 나타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마거릿은 당선된 지 2년 만에 수상인 해럴드 맥밀런에 의해 국가 연금 및 보험 담당 장관 휘하의 정무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에드워드 히스 정부 하에서 잇달아 주택공사장관, 재무장관, 연료전력장관, 교육장관 등 여러 각료직을 거치며 경험을 쌓고 입지를 굳혔다. 정치적으로 점점 중요한 위치에 다가설 때마다 가정에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항상 자신이 가정에도 충실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번은 누군가 마거릿에게 그녀의 경력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된 적은 없느냐고 묻자 마거릿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겠지만 데니스를 필두로 한 가족들은 언론이 ‘엄마’나 ‘주부’로서의 자질이나 책임에 대해 마거릿을 추궁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발언을 옹호했다. 이러한 가족의 협조는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정치가인 마거릿에게 큰 힘이 되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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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1 

 

순탄한 사업과 실패한 결혼

데니스 대처의 가족은 켄트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20세기 초, 비소와 나트륨이 바탕인 온천을 발견해 자신의 사업처를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만든 사업은 그의 아버지가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가업을 농수산 관계의 화학 약품, 예를 들어 제초제와 양을 씻는 세제 등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로 발전시켰다. 데니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업을 물려받았다.

순탄했던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좌절은 바로 이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그는 마거릿 캠프슨과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 포병대에 들어가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마거릿 캠프슨은 남편이 부재중인 동안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데니스는 이혼으로 4년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성공한 이혼남과 야심찬 처녀의 만남

그 후 독신으로서 데니스는 상속받은 가업을 시대에 맞게 잘 꾸려나가며 36세에 회사의 총 지배인이 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회사인 아틀라스는 에리스에 위치해 있었다. 성공한 지역 사업가인 데니스는 에리스 납세협회 위원으로서 보수당협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보수당의 인물들과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그는 주변의 추천을 받고 주 의회 선거에 입후보한 적도 있었는데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처음부터 정치가가 되는 일에 그다지 큰 뜻이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낙선의 아쉬움보다 오히려 이제 막 정치의 뜻을 펴기 시작한 마거릿 로버츠라는 젊은 여성을 만난 기쁨이 더 컸다. 

마거릿 로버츠는 1950년 총선에 입후보한 인물 중 가장 젊은 여성 후보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친 후보였다. 하지만 노동당이 우위를 점한 다트퍼드에서 그녀는 1950년과 1951년 총선에 출마했고 두 번 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데니스가 마거릿 로버츠를 만난 것은 1951년, 두 번째 출마한 그녀가 한창 뜨겁게 선거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보수당원인 친구의 선거를 돕기 위해 마거릿의 선거 지역인 다트퍼드에 와 있던 데니스는 선거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자신의 차로 런던까지 데려다 주었다. 훤칠한 키에 호남 형이었던 데니스는 여유 있는 집안 출신답게 스포츠와 사업에 관심이 많았으며 정치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치는 그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 사교를 위해 필요한 사항일 뿐이었다.

마거릿은 데니스보다 열 살이 어렸다. 따라서 데니스의 눈에는 지나치게 열성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투쟁적인 마거릿의 성격이 다소 ‘순수하고 귀엽게’ 비쳤다. 또한 인생에 대한 목표와 계획이 확고하고 투철하다는 점에서도 호감을 느꼈다. 독실한 감리교도이며 똑 부러진 성격의 마거릿은 그의 첫 번째 아내 같은 실수를 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또한 정치에 대해서는 단호했지만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마거릿의 입장에서도 데니스는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춘 남자였다. 중하류 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실력과 노력으로 아등바등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하는 마거릿에게 데니스와의 결혼은 중산층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마거릿 로버츠와의 만남과 재혼

총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51년 가을, 마거릿과 약혼한 데니스는 선거 결과에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마거릿 선거 진영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약혼 발표를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의 선거를 도왔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마거릿은 선거에 패배했다. 그해 12월 13일, 데니스는 두 번의 낙선 경험이 있으나 정치에 꿈을 버리지 않은 열렬한 보수당원이자 식품 잡화점의 둘째 딸인 마거릿 로버츠와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데니스는 ‘결코 바람을 피우지 않는 아내’를 얻었고, 마거릿은 ‘든든한 경제적 후원을 해주고 영원히 그리고 무조건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중하류 계층에서 중류 계층으로 신분 상승도 이루었다. 훗날 두 사람의 딸인 캐럴 대처는 데니스와 마거릿의 결혼을 ‘사랑이라기보다는 상호 편의에 의한 파트너십’ 관계였다고 보기도 했다.

데니스는 마거릿과의 신혼여행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파리를 선택했다. 마거릿에게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영국 중부의 소도시 그랜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대학 시절을 보낸 옥스퍼드와 처음으로 직장(BX 플라스틱스) 생활을 했던 콜체스터 그리고 선거 지역인 다트퍼드 밖에서는 생활해본 적이 없었다.

한편 수출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데니스에게는 신혼여행이 출장 여행이기도 했다. 마거릿은 허니문까지 ‘일’을 싸들고 간 남편을 이해했다. 합리적인 성격의 그녀가 열 살 연상에 이혼 경력이 있는 데니스와의 결혼을 선택한 데에는 그의 부유함,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기대가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그녀는 데니스의 사업이 허니문 때문에 영향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데니스는 사업 때문에 바쁜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어린 신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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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결혼을 통해 야심의 발판을 마련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카펠은 〈승리에 대한 단상들과 국가 동맹 계획〉이라는 정치적 에세이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이로써 카펠은 정치 관련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인 1917년에는 베르사유의 연합국 이사회에서 영국 측 서기관으로도 임명되었다. 이어 그는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세웠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명망과 지위의 획득이었다. 카펠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계 진출이었다. 하지만 ‘정치’라는 새로운 세계에 수월하게 진출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이 절실했다. 

어느덧 마흔에 접어든 카펠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전통적으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인맥 구축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샤넬은 카펠에게 매우 특별한 여성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붓감’으로 훌륭한 신분을 지닌 현모양처 타입의 여성을 원했다. 운 좋게도 카펠은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희망 사항에 부합하는 가문의 여성을 매우 로맨틱하게 만났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간호사로 활동하며 슬픔을 이겨내고 있던 라이블스데일 남작의 막내딸 다이애나 윈덤은 카펠이 원하는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춘 신붓감이었다. 다이애나의 유일한 약점은 미망인이라는 처지였으나 출신의 결함이 있는 카펠에게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요소였다. ‘정통 귀족’인 다이애나의 가족들이 보기에 카펠은 출생이 불분명하다는 점만 빼면 부유하고 장래가 밝다는 면에서 흡족한 상대였다. 또한 잘생긴 외모에 다정한 매너를 지는 카펠은 외로움에 지친 다이애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쟁 중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성의 개인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당시 다이애나는 임신 중이었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정식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된 카펠은 출생에 대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다이애나는 딸을 낳았다. 카펠에게 첫딸은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유명 정치가인 클레망소가 대부를 서주면서 상류 부르주아 사회에서 공고히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카펠의 인생은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행복의 절정에서 맞은 갑작스런 죽음

카펠이 영국에서 결혼할 무렵 샤넬은 9년 동안 그와 함께 살았던 파리의 집을 떠나 한적한 교외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3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경영자였지만 한편으론 사랑하는 단 한 명의 남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이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샤넬은 교외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갈 가족 같은 직원들을 고용했다. 가정부와 집사, 요리사 그리고 출퇴근용 감색 롤스로이스를 운전해 줄 전용 운전사였다. 

하지만 카펠의 결혼으로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샤넬 역시 사랑만큼이나 일과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이었기에 카펠의 선택을 이해했다. 카펠은 변함없이 바쁜 시간을 틈타 샤넬을 만나러 왔다. 카펠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는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샤넬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연인과 완벽한 가정 속에서 카펠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결혼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카펠은 칸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신혼의 달콤함이 절정이던 그때 다이애나의 배 속에는 카펠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카펠의 장례식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항구도시 프레쥐스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이애나는 두 번이나 남편을 앗아간 프랑스를 미련 없이 떠났고, 카펠의 시신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영국에 묻혔다.

장례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던 샤넬은 사고 장소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카펠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 샤넬은 “보이를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죽음, 그 후 샤넬의 연인으로 불린 남자  

 



 

1920년 2월, 〈런던타임스〉에 카펠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총 7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카펠의 재산 중 62만 파운드는 부인인 다이애나와 두 딸에게, 남은 8만 파운드는 각각 4만 파운드씩 익명의 두 여성에게 상속되었다. 사람들은 익명의 여성들에 대해 수군거렸으나 다이애나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언장의 내용은 카펠만큼이나 빠르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익명의 여인 중 한 명인 샤넬은 이미 충분한 유명 인사였다. 독하게 성공에 매진한 샤넬의 집념은 현실이 되었다. 샤넬은 부와 명성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패션의 역사에 혁명을 가져온 여성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화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카펠이 생전 이룬 것보다 훨씬 커다란 성공이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대한 패션 제국 ‘샤넬’의 여왕이 된 샤넬은 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물론 그녀의 회고에는 카펠의 이름도 등장했다. 샤넬의 기억 속에 자리한 카펠은 마치 공들인 수작업으로 정교하게 완성되는 옷처럼 아름답고 완벽했다. 샤넬은 카펠을 소중하고도 애틋하며 고마운 존재로 기억했고,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행적을 따스한 시선으로 세세하게 기억했다. 

샤넬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카펠의 이야기는 제2의 샤넬을 꿈꾸는 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킨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카펠의 후계자들이 ‘샤넬’처럼 숨은 보석 같은 여성을 만난다면 제2의 샤넬 혹은 샤넬을 능가하는 여성의 탄생 또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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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건련의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연달아 여섯 가지 신통력을 터득하였다. 여섯 가지 신통력이란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하는데 신통력은 좋은 의미에서 매우 비범하고 뛰어난 능력이긴 했지만 자칫 사용하는 자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악용될 수도 있다. 단적인 예로 사람들과 왕의 눈을 미혹시킨 제바달다의 신통력이 그러했다. 그런 일을 막고자 부처님은 신통력의 사용을 자제시키기도 하셨다.

하지만 목건련은 자신의 신통력을 오직 중생교화를 위해 꼭 필요할 때만 사용했을 뿐 악용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중생 뿐 아니라 천상과 지옥에 있는 중생까지 적극적으로 구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마음 놓고 '나의 제자 중에 신통 제일은 목건련이다(『증일아함경』)'라고 칭찬을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지닌 신통력을 사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교단을 유지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비범한, 너무나 비범한 능력 육신통(六神通)을 갖추다
천안통(天眼通)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으로 단순히 멀리 있는 것까지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뛰어넘은 세계마저 보는 눈을 말한다. 또 천이통(天耳通)은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으로 천안통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뛰어난 청각을 지닌 것 뿐 아니라 이 세상 뿐 아니라 여러 세상의 온갖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또 그저 신기해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뒤로 갈수록 능력의 범위는 점점 엄청나게 커진다.

눈과 귀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과 전생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이 그것이다. 그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고 사람의 전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우면서도 일순 오싹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신통력이란 요가 등의 선정 수행으로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다 보면 생겨나는 초인적인 능력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도 요즘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농락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또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들 중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여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다음은 바로 신족통(神足通)으로 주위 환경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고 그곳이 어떤 곳이든 원하는 장소에 언제든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금까지 말한 이 능력들은 부처님도 지니고 계셨던 것으로 경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환상적인 요소들 역시 부처님이 지닌 신통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10대 제자 중 목건련만이 신통력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려 했던 제바달다로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아나율은 천안통(天眼通)을 가지고 있었고 목건련이 훗날 제도한 연화색 비구니는 수행 끝에 숙명통(宿命通)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신통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신통력 누진통(漏盡通)을 지녔는가 아닌가로 나뉜다. 왜냐하면 누진통(漏盡通)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다른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도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누진통(漏盡通)은 번뇌를 스스로 끊을 수 있는 능력으로 아라한만이 갖출 수 있는 신통력이다. 또한 누진통(漏盡通)을 갖추게 되면 사바세계에서 결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신통력은 목건련이 스스로 열반을 선택함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훗날 그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의 마음 없이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아라한만이 지닐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덕분이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며 교단의 홍보와 대중성을 담당하다
목건련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유쾌한 것은 부처님을 뵙기 위해 33천에 올랐다가 제석천을 골탕 먹인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어머님이 계신 천상으로 설법을 하러 가셨을 때 많은 비구들이 부처님을 그리워하자 신통력을 지닌 목건련은 그들의 마음을 읽고 비구들을 대표하여 부처님을 모셔오기 위해 천상에 갔다. 그때 다른 신들과 함께 부처님으로부터 집착을 버림으로써 해탈로 들어서는 이치를 접한 제석천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쭐한 마음으로 거처인 도리천으로 돌아갔다가 천상에 온 목건련을 만나게 되었다.

목건련이 부처님의 상수제자임을 알고 있던 제석천왕은 자신 또한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는 거만한 마음이 들어 그를 불렀다. 그때 제석천왕은 500명의 천녀들과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거처와 누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목건련에게 신나게 자랑하였다. 그러자 목건련은 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조차 자랑거리로 여기고 또한 지나치게 부귀영화와 아름다움에 집착함을 알고는 이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신통력을 부려 엄지발가락으로 누각을 쳤다. 그러자 누각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고 이에 500천녀들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역시 누군가를 골탕 먹이는 이야기는 통쾌함을 줄 뿐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가 제석천왕(옥황상제)보다 뛰어나다는 교훈으로 중생을 교화하기에도 그만이다. 아무리 그래도 천상의 주인이자 신들의 왕인 제석천왕을 발가락 하나로 비웃어 줄 정도의 신통력이라니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는 되어야 중생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제대로 인식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수많은 몸 개그를 선보이며 망가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리는데 다양한 역할을 하는 제석천왕이야말로 포교의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목건련은 이렇게 천계와 인간계를 모두 소통하는 신통을 구비한 부처님 제자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목건련의 신통력은 천상에만 발휘되지 않았다.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던 그는 천상은 물론 지옥에도 다녀온다. 목건련이 이승과 저승 그리고 천상을 넘나들었던 이야기는 오디세이보다 흥미로울 뿐 아니라 ‘효(孝)’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어 대중성이 뛰어난 것은 물론 교훈까지 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목건련이 지옥에 다녀오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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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제자들의 인연은 전생부터 이어져 온 경우가 많은데 특히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초전법륜을 굴리셨던 녹야원에서 만난 다섯 명의 비구는 매우 각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사슴, 원숭이 등으로 태어나며 수생에 걸쳐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계속하던 시절, 새끼를 낳고 굶주린 어미 사자에게 스스로 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런 지극한 공덕으로 부처님께서는 몇 생을 앞당겨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때 굶주린 어미 호랑이가 낳은 일곱 마리의 새끼 호랑이들 역시 훗날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바로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녹야원에서 첫 가르침을 받은 다섯 명의 비구이다. 그러고 보면 사리불이 그 다섯 명의 비구 중 한 사람인 앗사지 비구를 만나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것도 다 전생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또한 목건련과 사리불이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평생을 형제보다 더한 친구로 함께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전생에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였던 인연 덕분일 수도 있다.


사리불과 함께 수재로 불리던 어린 시절
목건련은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의 콜리타(Kolita)라는 마을에 한 부유한 바라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바라문 중에는 종종 왕으로부터 마을을 다스릴 권한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목건련의 아버지 역시 그랬다. 그런 마을과 그 마을을 다스리는 바라문의 이름은 대게 일치했는데 그 예로 목건련의 아버지의 이름은 마을 이름과 같이 ‘콜리타(Kolita)’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하는 외동아들 목건련의 이름 또한 아버지와 같은 ‘콜리타(Kolita)’였다.

어린 콜리타(훗날의 목건련)는 바라문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지위와 부유한 가정환경 그리고 외동아들로써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성장하였다. 4가지 베다를 비롯한 고도의 학문 세계를 충분하게 학습하면서 그는 점차 빼어난 자질을 발휘하였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지성과 지혜를 갖춘 그는 이내 콜리타 마을의 자랑이 되었고 인근 마을에서 마찬가지로 비범하기로 소문난 또래의 소년 우파티샤(훗날의 사리불)과 만나 우정을 키워나갔다.

외동아들이었던 콜리타가 보기에 우파티샤는 여덟 형제 중 장남답게 책임감이 남달랐고 항상 생각하는 것이며 행동하는 것이 자신보다 어른스럽고 의젓했다. 게다가 함께 학문이나 인생, 진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할 때면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형제가 없는 콜리타는 우파티샤와의 우정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것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도 변치 않았다.


출가에서 부처님 제자 되기까지 ‘친구 따라’ 인생
우파티샤에 대한 콜리타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는데 어느 날 산정제 참가 이후 우파티샤가 출가를 결심하고 그에게 함께 출가할 것을 권유하자 두말없이 따랐을 정도였다. 우파티샤의 부모는 장남을 포함하여 아들이 여덟이나 있었지만 출가를 반대하였다. 결국 우파티샤는 일주일간의 단식 끝에 출가를 허락받았다. 하지만 콜리타의 경우, 외동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에 크게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두 아들 모두 부모에게 있어 출가시키기에 너무나 아까운 자식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자질은 출가 후에도 빛을 발했다. 콜리타는 우파티샤와 함께 수도 라자가하에서 논사로 이름을 날리던 자야 벨라티 푸트라(Sanjaya belrati putra)의 문하에 들어간 지 7일 만에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터득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제자에서 선생이 되어, 스승 산자야의 문하에 있는 25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스승의 가르침에서 진리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우파티샤가 운명처럼 앗사지 비구를 만나 그에게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앗사지 비구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우파티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자신과 콜리타가 늘 찾아 헤맸던 진리의 말씀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는 당장에 콜리타에게 달려와 부처님의 제자가 되자고 권했다. 이번에도 콜리타는 두말없이 친구의 말을 따랐다.

산자야는 두 사람을 말렸지만 우파티샤의 결심은 단호했고, 콜리타의 생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파티샤와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고, 스승을 대신하여 그들이 지도했던 250명의 제자들이 산자야 대신 두 사람을 따라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걸음을 함께했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 앞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미소로 두 사람을 받아주셨다.

부처님께 귀의한 후, 콜리타는 어머니의 이름(Maudgaly)을 따서 목갈라나(Maudgalyayana)라 불렸고 우파티샤 역시 어머니의 이름(Rupasari)을 따서 샤리푸트라(Sariputra)로 불리게 되었다. 출가 전에는 마을의 이름(콜리타)과 똑같은 아버지의 이름(콜리타)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외동아들은 출가 후, 부처님께 귀의한 다음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부처님의 제자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질투는 나의 힘, 상수제자의 길
부처님은 목건련과 사리불을 제자로 받으며 곧장 상수제자의 자리를 내리셨기 때문에 다른 비구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하지만 목건련은 거만한 자세가 아닌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맹렬하게 수행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터득했다. 그 결과 한달 남짓한 시간 만에 번뇌를 끊고 진리를 터득하여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이토록 빠른 깨우침과 탁월한 자질 그리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통해 그보다 일찍 부처님께 귀의했던 비구들로부터는 차츰 불만이 잦아들었다.

사실 어디에나 빼어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취업의 문을 뚫고 온갖 노력 끝에 취직을 했는데 갑자기 낙하산으로 누군가 들어왔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차라리 실력이나 능력이 형편없으면 앞에서나 뒤에서나 놀리고 무시라도 할 텐데 그 낙하산이 실력까지 월등해버리면, 게다가 겸손까지 하다면 불만이 쌓여도 할 말이 없기 마련이다.

먼저 출가한 비구들이 사리불과 목건련을 비방하며 불만을 제기한 이야기를 볼 때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옛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조직 생활에 있어서 구조란 참 변치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목건련은 실력, 외모, 인간성 3박자를 모두 갖춘 멋진 특채였던 것이 분명하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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