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데니스는 두 사람의 신혼집으로 고급 주택지인 첼시의 플랫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두었다. 마거릿은 많은 여성들이 꿈꾸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생계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우아한 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남편의 재력을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 아닌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했다. 곧바로 법률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자기 계발을 시작한 아내를 응원하다

옥스퍼드에서 화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법률 공부는 마거릿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다. 데니스는 아내의 선택을 두말없이 존중했고 가정부를 고용해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을 없애주었다. 남편의 이해와 지원을 속에서 원했던 공부를 마음껏 시작한 마거릿은 1953년 6월, 쌍둥이를 출산했다. 딸 캐럴과 아들 마크였다. 출산의 기쁨은 컸지만 그보다 더 마거릿을 조급하게 만든 것은 4개월 후에 있을 법정 변호사 시험이었다.

임신 자체는 공부를 크게 방해하지 않았지만 출산을 하자 육아에 대한 압박이 어깨를 짓눌렀다. 공부는커녕 갓난아기 둘을 돌보는 데 24시간을 꼬박 투자해도 모자랐다. 마거릿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데니스는 쌍둥이를 돌볼 보모를 구해주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한결 여유가 생긴 마거릿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4개월 후 마침내 법정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마거릿은 이 결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훗날에도 두고두고 쌍둥이를 돌보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데니스의 자상한 배려와 넉넉한 재력 없이도 그것이 가능했을까. 아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운 데니스가 있었기에 마거릿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변호사 활동을 위해 미혼 행세를 한 아내를 이해하다

법정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마거릿은 이번에는 세금 전문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에 도전했다. 이것은 6개월간의 실무 수습 기간이 필요했다. 마거릿은 세금 전문가인 피터 롤런드 변호사 밑에서 실무 수습을 시작했다. 가족이 둘이나 늘어났지만 생활을 꾸려나가는 데는 데니스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라면 굳이 마거릿이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새색시이자 생후 10개월 된 쌍둥이의 엄마인 마거릿은 자신의 꿈을 하루라도 빨리 성취하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연수 기간이 끝난 후 마거릿은 본격적으로 취업 활동을 시작했다. 가사와 육아를 뒤로하면서까지 사회 진출을 위해 노력해 뛰어난 성과를 올렸지만 지원을 한 곳마다 거듭 거절을 당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마거릿이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거릿을 고용하려는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마거릿의 고용 조건으로 ‘미시즈(Mrs)’ 대신 ‘미스(Miss)’로 간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1호 여성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려면 그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마거릿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조건을 냉큼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는 기혼 여성이었지만 취업을 위해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세금 전문 변호사 활동’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이쯤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마거릿은 미스 대처로서 공공연하게 미혼임을 드러내는 간판을 걸고 5년간 세금 문제 변호사로 일했다. 이번에도 데니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내의 꿈을 위해 시간과 돈 그리고 이해심을 아낌없이 주었던 데니스와 달리 마거릿은 사업가인 남편을 위해 별다른 내조를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가정에서 위안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을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했으며, 본인의 꿈과 미래를 위해 오로지 전진하는 아내를 조용히 응원했다.

마거릿의 정치 입문과 출세 

 

1955년부터 줄기차게 정치 활동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마거릿은 5년 만에 마침내 핀츨리 선거구에서 출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10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국회의원이 되었다. 마침내 정치가의 꿈을 이룬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34세였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는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마거릿의 야심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젊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는 따가운 시선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마거릿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의 배로 시간을 들여가며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거릿에게는 이미 이룬 가정보다 앞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자신의 미래가 더욱 중요했다. 그녀는 남자들을 능가하는 성과를 보이며 두각을 나타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마거릿은 당선된 지 2년 만에 수상인 해럴드 맥밀런에 의해 국가 연금 및 보험 담당 장관 휘하의 정무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에드워드 히스 정부 하에서 잇달아 주택공사장관, 재무장관, 연료전력장관, 교육장관 등 여러 각료직을 거치며 경험을 쌓고 입지를 굳혔다. 정치적으로 점점 중요한 위치에 다가설 때마다 가정에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항상 자신이 가정에도 충실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번은 누군가 마거릿에게 그녀의 경력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된 적은 없느냐고 묻자 마거릿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겠지만 데니스를 필두로 한 가족들은 언론이 ‘엄마’나 ‘주부’로서의 자질이나 책임에 대해 마거릿을 추궁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발언을 옹호했다. 이러한 가족의 협조는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정치가인 마거릿에게 큰 힘이 되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