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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이미륵.
한때 큰언니가 몹시 즐겨읽던 전혜린의 작품들 속에서
우연히 건진 책이다.
교과서에 금아선생의 글을 있었지만
이미륵이라는 작가는 언급되지 않았으니까,
혼자서 우연히 알지 않고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마구마구 울어버렸었다.
서정적인, 너무나 서정적인 문체와 흐름에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눈물이 자꾸 났다.
어린 시절 많은 누이들 사이에서 성장한 미륵의 자전적 이야기.
처음 붓글씨를 배우던 것.
함께 자란 사촌 수암과 칠성.
친구들의 이야기.
아버지와의 추억과 죽음.
아련한 기억 속의 누이들과 어머니.
한일합병과 학생운동.
그리고 독일 유학까지.
내가 읽다가 울음을 터트린 장면은
미륵이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내용이었다.
아니, 처음 술을 배우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달 밝은 밤, 살구나무 아래서 어머니는 웃고 계셨으며,
미륵은 아버지에게 술 한잔을 받아 마시고
익숙하지 않은 독한 맛에 눈물이 쏙 배어나오려고 할 때
아버지가 입에 넣어준 대추를 씹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아버지, 당신은 아십니까"
라며 작게 부린 주정이 너무 고와서.
그 밤의 풍경이 그냥 절로 그려져서.
홀로 밤에 마시는 술맛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나서였다.
특별히 주도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이후로 나는 술만큼은
꼭 선비처럼 마시려고 아직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풍류
풍류
풍류도.
- 압록강은 흐른다 중 <병석에 누운 아버지> 중 일부 발췌 -
아름다운 달밤에는 샘뜰 살구나무 아래에 아버지가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적인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고 이따금 소리높여 시를 읖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늘 지녔던 근엄함도 사라지고, 만약 좋은 운이 떠올라 기분이 내키면 나와 농까지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병에서 한잔 가득 따라 나에게 마셔보라고 한적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리 옆에 없던 어느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은 잘된 일이었다. 어머니는 결단코 내가 아버지와 술을 마시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술에 대해서는 엄한 반대자였고, 아버지는 이 독한 물을 무척 즐겼다. 그 때문에 둘 사이가 종종 불쾌해지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관대하였고 매일 밤 아버지에게 쌀술을 한병 가득 갖다 주곤 했다. 아버지와 내가 자리를 같이할 때면 술병이 놓여있는 자그만 상에는 두 개의 술잔과 쟁반 가득 담긴 과일이 놓여 있었다. 보통때 어머니는 밤이 이슥하게 깊에 술병이 거의 비게 될 때까지 우리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여름밤엔 모든 아낙네들의 독서회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옆에 없었던 것이다.
달은 어느덧 빈 서당의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으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텅 빈 이 큰집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모든 생명, 모든 인식이 나에게는 그처럼 잘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아버지는 술잔을 더 기울렸고 그럴수록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만 했다. 수많은 시들이 인용되었고 읖어졌다.
" 너, 위대한 시인 김삿갓을 아느냐?"
"모릅니다."
나는 새오운 이야기에 대한 행복스런 기대에 차서 대답했다.
중략
아버지는 술잔을 보더니 얼른 다 마셔버렸다, 나는 다시 잔을 채우려 했지만 병이 텅 비어버렸다.
"더 없느냐?"
그때 약간 - 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 아버지는 슬프게 보였다.
"더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내 손을 쥐었다.
"넌 참 대단하구나. 어머니께 잘 말해 봐라, 아마 너에게 줄지 모르겠다."
"술을 꼭 가져다 드리겠어요."
나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 병 하나 가득 가져와서는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였다.
중략
"저 같으면 할아버지를 도왔을 텐데요."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그걸 모른다. 임금께 충성을 맹세한 이상 결코 불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 할아버지께도 복종을 약속하였으니 그것 또한 거부할 수 없지 않아요."
"물론이지."
아버지는 나의 논리에 기뻐하면서 동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할아버지에게 반대 행동을 하지 않았고 시인이 되어서 이 세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전 할아버지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임금 때문에 자기 조부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이 고집쟁이야!"
아버지가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저는 아버지가 어른이라고 해서 저보다 그걸 더 잘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말했어! 자, 이 똑똑한 녀석아. 어디 우리 한잔 같이 마셔보자."
아버지는 사용하지 않던, 확실히 치레만을 위해서 놓아두었던 다른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깜짝 놓았다. 이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언제나 반대하여 이야기하였기에 취하게 하는 음료를 적으로 여기는데 익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자, 마셔라."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나 잠시 후에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술은 무척 독했다. 아버지가 얼른 대추를 입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훨씬 나아졌다.
"맛이 좋았지?"
"좋았어요."
"그것 봐! 자, 한잔 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가슴속은 울렁거렸고, 목은 마치 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신음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는 그동안 김삿갓의 시를 하나씩 읖었다.
우리들이 둘째잔을 비웠을 때는 나는 손에 대추를 두 개 쥐고 있었다. 이번은 그렇게 나쁘지가 않았다. 나는 유쾌하고 사내답게 대추를 씹었다. 그러자 곧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스럽고도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물러나지 않고 마치 편한 것처럼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와서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이지, 그럴 수밖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두 잔이나 마셨거든!"
어머니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선은 그렇게 엄격하지도 꾸짖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약간 비웃는 듯했다.
"한잔 더 마셔도 되나요?"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
어머니가 소리치며 술잔을 빼앗았다.
"제발 그렇게 무참하게 하지 마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두잔의 술은 결코 해롭지 않아. 나는 이 외로움 속에서 친구를 가져야 하지 않겠소?"
"오늘 한번만은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조용히 잔을 채웠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세째잔을 비웠다. 왠지 나 자신이 무척 자랐고 큰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버지의 친구가 되다니! 저렇게 현명하고도 그렇게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 아버지, 너는 아니 참 당신은 아십니까 - 나는 이제부터는 존대하여야겠습니다 - 어머니가 시인에게 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아시기만 한다면!"
"그래!"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감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놀라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정말 상관이 없었다.
달은 아주 밝았고 살구는 향그러웠으며, 나는 술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