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가섭은 효자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출가수행’을 하기로 결심했던 그에게 부모님의 뜻에 어쩔 수 없이 따랐던 10여 년간의 결혼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크게 슬퍼하기 보다는 마침내 출가를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부처님과 반대로 마하가섭에게는 부모가 출가에 ‘장애’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출가가 늦어졌다고 해서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지역과 일족의 지도자 겸 가장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지혜로운 아내에게 집안과 재산을 맡겨놓고 자신이 좋은 스승을 만나면 데리러 올 테니 함께 수행을 하자는 약속을 하고 솜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최고의 아들, 최고의 남편에서 최고의 제자로
훗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어가신 후, 승단의 지도자가 된 마하가섭이 500명의 장로들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막무가내로 그저 다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단계적으로 마무리를 잘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결혼’을 했으니 효자요, 결혼을 하고 나서는 출가수행을 원하는 아내와 함께 세속적인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아내에게도 최고의 동반자였다. 또한 일족의 가장이며 지역의 지도자라는 자리는 버렸지만 그를 의지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고 아내에게 위탁하여 소위 자신이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적응기간’을 주었으니 일족에게도 책임감 있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마하가섭은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 출가를 했다. 그가 출가할 무렵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별을 보고 성도(成道)하여 깨달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만남이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의발제자라는 인연을 가진 마하가섭이 나타날 때까지 부처님께도 약간의 시간과 준비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출가를 했지만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평온을 찾지 못해 마하가섭이 방황 아닌 방황을 하는 동안 부처님은 반대로 그를 만날 준비를 착착 하고 계셨다.

재가 제자로써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의 후원과 귀의를 받고, 베르바나(죽림정사)라는 머물 곳이 생기고, 사리불과 목건련이라는 걸출한 상수제자들이 이끄는 천여 명의 승가가 생기기까지의 시간은 고작 2~3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출가를 하고 스승을 찾았으나 진리라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던 마하가섭에게 2~3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상 가장 멋진 이 두 남자는 정해진 운명대로 만났다.

성도 후,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또 갈구하지 않더라도 가르침이 필요한 제자들을 위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법륜을 굴리셨다. 항상 ‘고요한 수행’을 중요하게 말씀하신 부처님이셨지만 초기에는 정말 워커홀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정말 지혜롭고 신통한 사리불과 목건련을 제자로 맞이한 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자질구레하고 어지간한 일들은 그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처님은 마하가섭을 맞이하러 가셨다.


역사상 가장 멋진 두 남자의 운명적인 만남
만약에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발명되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가장 보고 싶은 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만남’이다. 두 번째로 보고 싶은 것은 삼국지 적벽대전의 주역인 주유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손책의 만남이다. 멋진 남자들의 만남은 정말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길에서 만났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하가섭이 지나가게 될 길에 부처님이 의도적으로 미리 앉아계셨다. 예정된 만남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승단을 빠져나와 라자가하(왕사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길가 나무 아래에 앉아 마하가섭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 간절하게 스승과 깨달음을 구하는 마하가섭과 만났다. 부처님은 마하가섭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가 의발제자가 될 것을 알고 맞이하러 나오셨던 것처럼, 마하가섭도 길가 나무 아래 앉아 계신 부처님을 보자마자 자신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하가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처님께 가서 두 발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때까지 마하가섭은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석가족의 성자에 대한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눈이 높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도도한 마하가섭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발에 이마를 댄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더욱 멋졌다.

“가까이 오라, 그대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이미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매개로 염화미소를 주고받기 전, 첫 만남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확인했던 것이다. 마하가섭과 부처님의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은 부처님의 반열반 이후까지도 계속된다. 참으로 감격스럽다. 부처님의 말씀이 끝나자 마하가섭은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참지 못해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며 말했다.

“저는 카샤파 종족 카필라와 수마나데위의 아들 핍팔라야나입니다.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당신은 진정 저의 스승이십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의 제자입니다.”

지금의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마하가섭의 행동이나 말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승’을 찾기 위해 마하가섭은 집 안에서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왔고, 출가 하고 난 이후에도 2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스승과 가르침을 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스승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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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가섭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핍팔라야나(pippalayana)였는데 이는 그가 핍팔라(pippala :畢鉢羅)라는 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것을 기려서 불렀던 ‘애칭’이었다. 대부분의 명망 높은 바라문들이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종족의 이름을 갖는 것처럼 마하가섭도 대를 이어 그가 속한 종족을 대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성장하자 어린 시절의 이름 대신 그가 속한 종족, 마하가샤파(Makasyapa)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마하카샤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그 외에도 마하가섭파(摩訶迦葉波), 대가섭(大迦葉), 대가섭파(大迦葉波)라고도 한다.


모든 것을 갖춘 남자의 한 가지 고독
어마어마한 집안의 외아들로써 마하가섭이 얼마나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기대를 듬뿍 받으며 자랐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랑 속에서도 그가 결코 버릇없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함과 비범함을 드러냈던 마하가섭은 부모님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8세 때 바라문의 계조(戒條)를 외웠으며 제사법은 물룬 산술, 천문, 지리, 기상, 춤, 음악 등 못하는 것이 없는 아이로 성장하였다.

마하가섭이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준수한 청년이 되어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의 부모는 하루빨리 좋은 여자와 맺어주어 후손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마하가섭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기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세속의 환락과 남녀 간의 정욕을 더럽게 생각했다. 자신의 성품을 잘 알았던 그는 일찌감치 출가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하여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들로써 정성껏 모시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출가를 할 생각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하나뿐인 아들이 출가를 하겠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뜻밖이었던 마하가섭의 부모는 깜짝 놀라 더욱 강하게 혼인을 추진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아들이 뜻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마하가섭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 황금으로 실물크기의 완벽에 가까운 여인을 만든 뒤, 그녀가 자신의 이상형이며 ‘이런 여자’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결혼을 원하는 부모의 뜻을 잠시라도 늦추기 위해 실물크기의 여인을 황금으로 빚다니, 과연 마가다국 제일의 부자집 아들이 아니라면 생각해낼 수 없는 작전이다. 그런데 더욱 대단한 것은 그의 부모가 결국 아들이 말한 ‘그런 여자’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마침내 마하가섭은 더 이상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아버지가 결정해준 맛다국 사갈라의 꼬시야 종종 장자의 딸 밧다카필라니와 결혼하였다.


출가의 뜻을 둔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고르고 고른 며느리의 정체

마하가섭은 결혼과정은 부처님과 닮은 점이 많은데, 부처님 역시 스무살 무렵 출가의 뜻을 두었으나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바람을 이기지 못해 출가 전, 결혼을 하셨다. 하지만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결혼생활을 사뭇 달랐는데, 부처님이 결혼 생활을 통해 아들을 하나 얻으신 것과 달리 마하가섭은 결혼생활 내내 청정함을 유지하였다. 그가 출가 전, 무려 12년 동안이나 정결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덕이 컸다.

바라문답게 마하가섭의 결혼은 중매였다. 밧다카필라니는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빼어난 성품을 지녀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아들을 위해 고르고 고른 며느리는 알고 보니 결혼에 뜻이 없고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출가에 뜻을 둔 여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마하가섭의 부모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아들과 꼭 맞는 천생연분을 골랐던 것이다.

신혼 첫날, 손끝하나 닿지 않은 채 밤새도록 마주앉아 밤을 새운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이 같은 것을 알고는 부부의 모습을 유지하되 서로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다른 침대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플라토닉’한 부부생활을 마하가섭의 부모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들이 인생의 즐거움을 기꺼이 모두 누리기를 바랐던 마하가섭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하가섭 부부의 방을 찾아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은 뒤 침대 하나를 아예 부숴버렸다.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부부가 사는 법
그러자 두 사람은 차마 침대를 다시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침대를 쓰되 결코 몸을 섞지는 말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잠자는 시간을 정했다. 초저녁부터 한밤중까지는 마하가섭이 침대에서 잠을 잤고, 한밤이 지나서는 아내가 침대를 사용한다는 규칙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매번 시간을 지킬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매일 밤, 침대 가운데 꽃다발을 놓고 잠을 잤다. 마하가섭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두 사람이 출가를 할 때까지 꽃다발은 한 번도 헝클어진 적이 없었다.

한번은 마하가섭이 한참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곁에서 아내가 깊이 잠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검은 빛이 도는 독사 한 마리가 침대 밑에서 나와 혀를 날름거렸다. 팔 하나를 침대 밖으로 늘어뜨린 채 단잠에 빠진 아내와 독사의 거리가 가까워 금방이라도 물릴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발견한 마하가섭은 급히 옷을 벗어서 옷으로 아내의 팔을 잡아 침대 위로 올려 주었다. 혹시라도 맨살이 닿지 않도록 주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에 잠에서 깬 아내는 옷을 벗고 있는 마하가섭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마하가섭이 이제까지의 약속을 어기고 욕망을 누리고 싶어 했다고 생각해 근엄하게 꾸짖었다. 마하가섭은 아무 설명이나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아내의 책망을 들었다. 후에 마하가섭이 독사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맨살을 닿지 않기 위해 옷을 벗어 팔을 올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그의 인품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하물며 오해를 하여 비난하는 자신에게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존경의 마음이 솟구쳤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오해를 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다른 부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생활이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마하가섭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치른 뒤에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서로의 머리를 깎아 준 것이었다. 드디어 출가의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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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제자 중 생사를 벗어나 사과(四果)를 이룩하고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든 아라한이 1200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뛰어난 ‘아라한’이 500명이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10분을 10대제자라고 부른다. 아라한이 된 제자 1200명 중 뛰어난 500명 안에 들어가기까지 경쟁률은 약 2.4:1, 둘이나 셋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500명 중에서 10대 제자 안에 들려면 50:1이라는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처음 1200명의 아라한 중에서 으뜸가는 10명이라고 하면 120: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이다. 이 정도라면 지옥 같다거나 살인적이라고 불리는 입시나 취업 경쟁률을 너끈히 뛰어넘을 정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10대 제자라고 불리는 분들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꽃보다 남자>의 F4를 닮은 마하가섭, 아난, 사리불, 목건련
하지만 2명만 모여도 알게 모르게 승부근성이 발휘되고, 비교하게 되는 것이 본능이다. 그런 중생의 본능에 충실한 시선으로 보았을 때 10대 제자 중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인물이 4명이 있으니 가히 10대 제자 중의 ‘F4(만화 <꽃보다 남자>에 등장하는 말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에서 월등하게 뛰어난 미모와 권력과 부유함을 꽃미남 4명을 일컫는 말)’라고 할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F4' 중에서도 다시 두드러지는 2명의 남자가 있다.

앞서 소개했던 사리불과 목건련은 상수제자이자 실질적으로 부처님의 뜻을 알고 승단을 이끌었던 쌍두마차라 할 수 있으니 당연히 10대 제자 중 F4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두드러지는 2명에 속하지는 않는다. 지금 소개하려는 마하가섭이야말로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존재감이며 지위를 비롯하고, 출가 전 집안이며 환경 등을 두루 고려했을 때 F4의 압도적인 리더, 구준표(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한국형’ 이름. 원작의 이름은 ‘도묘지 츠카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잘 생긴 외모로 유명한 아난은 F4 중에서 ‘구준표’와 전혀 다른 부드러운 매력과 사랑의 라이벌로 주인공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윤지후(원작의 이름은 ‘하나자와 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마하가섭, 아난, 사리불, 목건련은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 신통, 수행, 포교뿐만 아니라 활약이며 인지도, 출가 전 출신배경, 외모 등에 있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F4라고 할 수 있다. 구준표와 윤지후가 같은 F4의 멤버였으면서도 때로 대립하고 티격태격 하는 관계인 것처럼 마하가섭과 아난도 가장 가까우면서도 은근히 예민한 관계였다.


F4의 리더, 구준표와 마하가섭의 공통점
마하가섭이 얼마나 F4의 리더, 구준표와 닮았는지, 얼마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비교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출가하기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하가섭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던 시절,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가하(왕사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하사타라 마을에서 이름 높은 바라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가다국에서도 제일가는 부호 느야그로다(Nyagrodha) 바라문이었는데 그 부유함의 정도가 마가다국 국내 장자(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선량함과 덕을 모두 갖춘 오늘날의 ‘명망 높은 재벌’) 수준이 아니라 중인도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부처님보다 신분이 높은 바라문을 비롯하여 왕과 장자 등 권력과 지위와 재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꼽았을 때에도 마하가섭의 집안은 압도적이었다.

마하가섭의 탄생은 부처님의 탄생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부처님의 생모이신 마야부인이 산달이 가까워오자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진통을 느껴 보리수 아래에 산실을 마련하고 왕자 싯다르타를 낳았던 것처럼 마하가섭도 나무 아래서 태어났다. 마하가섭의 어머니는 산달이 가까워진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던 중 진통을 느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커다란 핍팔라(pippala:畢鉢羅) 나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그때 공중에서 홀연히 하늘의 옷(天衣)이 내려워 나뭇가지에 걸쳐졌고 자연스럽게 산실이 마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하가섭이 태어났다.


승단을 이끈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비결
그의 어머니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마하가섭을 낳은 핍팔라(pippala:畢鉢羅) 나무는 칠엽수(七葉樹)로 그 근처에 커다란 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굴을 핍팔라 굴, 즉 칠엽굴(七葉窟)이라고 했는데 이 굴이 훗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500명의 장로들이 모여 제1차 결집을 했던 장소로 유명한 바로 그 굴이다. 정원 부근에 500명이 모일 정도로 커다란 굴이 있다니, 마하가섭의 어머니가 집안이 아니라 정원에서 그를 낳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와 닿는다. 아마도 진통을 느낀 후,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정원이 크고 넓었던 것이리라.

부처님의 의발을 이어받아 결집을 주도한 사람이 마하가섭이었다. 그가 일사천리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500명의 인원이 모여서 밤낮없이 회의를 할 편안하고 적절한 장소를 제공하고, 그 뒷바라지를 살뜰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자들이 모여서 화려하게 가든파티를 하는 모습이 나오곤 한다. 결집은 결코 파티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았겠지만 자신의 집 안마당에 500명을 초대할 수 있는 남자는 오늘날에도 그리 흔치 않다. 출가 후, 재산을 정리하고 두타행(頭陀行)을 즐기며 물질적인 것을 철저하게 벗어났던 마하가섭이었지만 그의 집안과 재산은 부처님의 뒤를 이어 그가 승단을 이끌어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500명의 장로를 결집시키고 밤낮으로 회의를 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일을 그토록 쉽게 해낸 마하가섭을 떠올릴 때면 재력이 주는 자유와 카리스마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한 것을 곧바로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부자집 아들’이라는 마하가섭의 출신이 멋지고 부러운 것을 넘어 그의 존재가 승단에게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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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목건련의 교화 대상 역시 인간과 신, 착한 존재와 악한 존재의 경계를 늘 가뿐하게 넘나들었다. 뛰어난 신통력을 바탕으로 목건련은 천상에서는 제석천왕을 반성하게 만들고, 지옥에 가서는 죽은 어머니를 구제하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 제바달다를 구원했다. 목건련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의 제자 중 그 누가 기꺼이 그리고 단숨에 지옥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온갖 세계의 말을 듣는데 걸림 없는 귀를 지닌 그는 다른 세계의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러 다녀온 적도 있었다.
 



자신의 숙명을 살펴 죽음을 결정하다
이미 죽은 자들까지도 구제하고 구원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목건련은 불법을 만나고 전하는 과정에서 실로 많은, 다양한 죽음을 접했다. 특히 그의 주변 여인들은 삶과 죽음이 기구한 경우가 많았다. 먼저 마음껏 풍요롭게 살았으나 죽어서 고통에 빠졌던 그의 어머니가 그랬고, 그가 구제하여 불법에 귀의하게 했던 여인은 각고의 수행 끝에 숙명통을 얻었으나 제바달다의 손에 맞아 숨졌다. 이런 과정들을 겪은 목건련이 본래 선량한 사람보다는 인간이든 귀신이든 괴로움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고자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이런 정신은 결국 그 자신의 열반으로 이어졌다.

일흔이 넘도록 왕성하게 활동하며 사람들을 교화하고 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모신 목건련은 많은 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생각이 다른 외도들에게는 그만큼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흔이 넘었을 무렵, 그는 어느 날 선정에 들어 자신의 숙명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전생의 업보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보를 알게 되면 끊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삼세의 인과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업장의 뿌리를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이 생에서 이 업보를 끊지 않는다면, 그를 증오하고 미워한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지옥에 관해서 누구보다 해박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목건련은 마음을 정했고, 죽음을 아니 열반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호시탐탐 그를 없앨 기회를 노리는 외도들이 살고 있는 산 밑을 일부러 지나갔다. 말 그대로 죽기 위해 용을 쓰는 격이었다. 외도들은 목건련이 오는 것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산 위에서 돌을 굴리기 시작했다. 목건련은 아무런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았고, 그들이 힘껏 굴리고 던지는 돌들을 맞으며 자신의 업에 맞섰고 삼매에 든 채로 열반했다. '신통력'에 의지하여 인과응보의 진리를 어기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열반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여준 것이었다.
 


궁극의 자비, 최초의 순교
목건련의 열반의 불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이기도 했다. 빔비사라왕의 아들이자 마가다 국의 왕인 아사세사투 왕은 자신이 존경하던 목건련 존자의 죽음에 슬퍼했다. 동시에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목건련의 시신은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에 '누군가 그를 일부러 죽게 했다'는 사실이 왕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분노와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던 아사세사투 왕은 의심이 가는 외도들을 모두 잡아와서 모조리 죽이고자 했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거의 50년을 함께한 일흔의 제자를 잃은 부처님은 이 소식을 듣고는 아사세사투 왕을 찾아와 그들을 용서하라고 설법했다. 애틋한 제자를 떠나보낸 슬픔을 감추며 그것이 목건련의 숭고한 열반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설법에 아사세사투왕은 간신히 분노를 누구러뜨렸다.

목건련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부처님의 만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외도들은 용서를 빌며 죄를 뉘우쳤고 부처님께 귀의했다. 하지만 부처님은 새로 제자를 얻은 기쁨보다는 사랑하는 제자를 먼저 떠나보낸 애잔함이 더 컸다.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께 목건련 존자가 신통력이 그렇게 뛰어났음에도 스스로의 죽음을 방어하지 못한 이유를 물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의 열반이 지니는 의미를 말씀해주셨다. 이미 깨달은 이에게 나고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목건련은 부처님 생전에 다른 제자들에게 여실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목건련은 불법을 펴는 데 크게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끝내 목숨마저 바쳤다는 것을 일러주시며 목건련의 자비가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목건련이 열반한 뒤, 사리불은 부처님께 허락을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곁에 없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감추지 않으셨던 부처님도 오래지 않아 반열반에 들으셨다. 너무나 아름답게 한 길을 걸어가던 커다란 스승과 빛나는 제자 둘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끼며 마지막을 맞았다. 다음 편에는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불법을 계승한 가섭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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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神通)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신통력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목건련은 자신의 거침없는 신통력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그가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불리는 진정한 이유는 신통을 넘어선, 보살과 같은 자비롭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귀의 고통을 덜어주다
목건련의 구제 대상은 결코 인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부처님이 천상의 신들로부터 정중한 초대를 받아 신들에게 설법을 하셨다면 목건련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하찮은 존재들, 인간보다도 못한 존재들을 놓치지 않았다.

한 번은 별들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 맑고 깨끗한 강가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선정에 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목건련의 눈에 한 무리의 아귀들이 들어왔다. 아귀들은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 강가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쇠몽둥이를 든 채 강을 지키는 귀신이 무서워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선정에 든 상태에서 그들의 업보를 하나 하나 살펴본 목건련은 아귀들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배 고프고 목마른 고통이 얼마나 심하냐?"

보는 사람마다 식겁을 하며 도망치기 바쁜 아귀들에게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물어봐 준 이가 있었겠는가.

목건련의 관심에 아귀들은 그의 곁에 다가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하였다. 목건련은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펴보았던 인과를 말해주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아귀는 전생에 점치는 일을 하며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고통스럽게 하며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들개에게 온몸을 뜯어먹혀 뼈가 드러나지만 바람을 쐬자마자 새로운 살이 돋아나 다시 뜯어먹힌다는 아귀는 전생에 온갖 짐승들을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목건련은 그들에게 각자의 잘못을 말해주고 참회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목건련의 신통은 이처럼 아귀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한 오롯한 진실로 뉘우침을 주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외도들을 제도하다
목건련의 신통력은 또한 빠르고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한 번은 코살라국의 프세나짓 왕이 시원한 강가에서 큰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 연회에는 왕족과 대신들이 모두 참석했을 뿐 아니라 부처님을 비롯하여 각 종교의 대표들과 바라문들을 초대한 실로 엄청난 자리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선착순으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다들 앞다투어 빨리 도착하려고 했다.

연회에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했는데 물이 불어 쉽게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과 제자들도 강가에 도착했다. 강물이 불어난 것을 본 목건련은 신통력으로 칠보로 된 화려한 다리를 놓아 부처님이 건너시도록 했다. 하지만 목건련이 다리를 놓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른 외도들과 바라문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뒤로 밀렸다.

목건련은 다리를 거두는 대신 그들이 다리에 오르도록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들이 강 중간쯤 갔을 때 다리가 스스로 없어지도록 했다. 그렇게 부처님과 제자들을 밀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려던 사람들이 모두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부처님과 제자들이 다리를 다시 건넜다. 그리고 물에 빠진 외도들을 건져내도록 지시했다.

다리를 놓고, 다리를 건너기까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프세나짓 왕의 연회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의 위엄은 그 자체로 가장 압도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각 종교의 대표들과 바라문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고스란히 보여준 셈이었으며 온몸이 완전히 젖은 상태였으니 사람들의 존경은 자연히 부처님을 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리에서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며 외도와 바라문, 부처님을 공평하게 존중하던 프세나짓 왕에게도 확실하고 강력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연화색 비구니의 귀의
목건련이 제도한 특별한 인물 중에는 연화색 비구니가 있다. 부처님께 귀의하기 전 아름다움을 무기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태연자약하게 몸을 팔던 그녀는 본디 외도들의 청탁을 받고 목건련에게 접근했었다. 신통력이 뛰어난 목건련은 외도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자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목건련이 보여준 신통력 때문에 많은 외도들이 불법에 단숨에 귀의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의 신통력이 두려워 함부로 보복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생각 끝에 미색이 뛰어난 몸 파는 여인에게 그를 유혹할 것을 사주한 것이다.

평소 목건련이 다니던 길을 미리 눈여겨 보던 여인은 대담한 차림새와 노골적인 눈빛을 보내며 그에게 접근했다. 목건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흔들림 없는 담담한 눈으로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들여다 본 것처럼 그녀의 속셈을 차근차근 읊었다. 목건련이 입을 열 때마다 여인의 얼굴은 창피함으로 굳어졌으나 마지막까지 자신의 소임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목건련의 눈빛은 단호했고 여인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마침내 여인은 괴롭고 수치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자신이 이런 생활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하며 눈물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대체 어떤 과보가 있었기에 이런 기구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지금의 삶으로부터 얻을 과보는 무엇인지 물었다. 여인의 고통을 알아본 목건련은 더이상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 대신 언젠가 스스로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부끄러움을 깨달은 여인은 부처님을 뵙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비천한 삶이 옳지 못한 것을 알고 망설였다.

그러자 목건련은 그녀을 데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부처님은 여인을 받아주었다. 여인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고 수행에 매달렸다. 때때로 괴로움을 참을 수 없을 때면 부처님이나 목건련에게 자신의 인과를 말해달라고 했으나 두 분은 머리를 저으며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올 것이라고만 말했다.

결국 10년 째 되던 해, 여인은 자신의 과보를 볼 수 있었다. 연화색 비구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그렇게 숙명통을 얻었다. 그리고 제바달다가 교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의 해치려고 할 때 그를 찾아가 꾸짖다가 그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몸 파는 여인이 아닌 거룩한 부처님의 제자로써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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