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의 만남과 비밀 결혼

1961년 11월, 리버풀 최대의 음반매장 NEMS(North End Music Scores)의 소유주인 젊은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공연을 보러 왔다. 그는 비틀즈에게서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날것 그대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브라이언은 비틀즈에게 자신이 그들의 매니저가 되고 싶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이제껏 음반 판매 사업만 해 왔던 브라이언에게도 이런 결정은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안목과 느낌 그리고 비틀즈의 가능성을 믿었다. 

계약은 이루어지자마자 브라이언은 거칠고 반항적인 비틀즈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유능한 사업가이자 발이 넓을 뿐 아니라 열정까지 갖춘 브라이언은 또 세계적인 음반회사 EMI의 자회사인 팔로폰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팔로폰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은 계약 조건으로 드럼 주자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고 새 드럼 주자로 링고 스타(본명 Richard Starkey)가 영입되었다. 이로써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틀즈가 탄생했다. 이제까지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던 어느 날, 존은 신시아로부터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신시아는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렸고, 존 역시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브라이언은 매니저로써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는 고조되기 시작한 비틀즈의 인기와 극성맞은 소녀 팬들로부터 신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혼할 것을 추천했고 그의 주선 하에 1962년 8월 23일 존과 신시아는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빛나는 성공의 나날들

얼마 후인 9월 초, 비틀즈는 생애 첫 녹음을 하고 첫 번째 싱글 〈Love Me Do〉를 발표했다. 〈Love Me Do〉에 대한 반응은 크지 않았지만 1962년 1월 11일 발표된 〈Please Please Me〉는 한 달 뒤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자작곡인〈Please Please Me〉가 1위를 하면서 비틀즈는 그들을 비웃던 EMI 관계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두 달 후인 3월 22일, 수록된 14곡이 전부 단 하루 만에 녹음한 전설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역시 발표하자마자 1위를 차지했다. 빛나는 성공의 시작이었다.

더불어 존은 아빠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신시아가 무사히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존은 아기에게 어머니 ‘줄리아’의 이름을 따 ‘줄리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데뷔 앨범 이후 발표한 싱글 〈From Me to You〉, 〈She Loves You〉 등은 영국을 뒤흔들었고, 비틀즈의 광팬을 지칭하는 ‘비틀매니아’라는 신조어와 함께 신드롬을 낳으며 비틀즈의 인기는 고속 질주를 거듭했다. 두 번째 정규 앨범 〈With the Beatles〉가 발매되었고, 새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선주문 100만 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야말로 비틀즈 열풍이었다. 

영국과 유럽을 완전 정복한 비틀즈는 미국으로 진출했다. 미국에서 비틀즈의 인기는 유럽 이상으로 뜨거웠다. 1964년 3월 16일 미국에서 발표한 싱글 〈Can’t Buy Me Love〉는 단숨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1964년 4월 4일 빌보드 싱글 차트의 1위에서 5위까지를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독식(1위 〈Can’t Buy Me Love〉, 2위 〈Twist and Shout〉, 3위 〈She Loves You〉, 4위 〈I Want to Hold Your Hand〉, 5위 〈Please Please Me〉)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비틀매니아들을 위해 비틀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이제 비틀즈는 단순한 밴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거대한 문화 현상이었다.


진정한 뮤지션으로의 성장과 위기 

하지만 무리한 일정과 혹독한 스케줄은 비틀즈의 육체와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자신을 치유하는 동시에 세상을 조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음악을 만들어온 존은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발표한 곡들이 계속 1위를 차지하자 회의를 느꼈다. 지나친 성공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 무렵 존은 밥 딜런을 만났다. 

밥 딜런을 통해 음악이 세상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존은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존의 변화는 비틀즈의 음악과 직결되었고 경쾌하면서고 순수하게 감정을 말하던 비틀즈의 음악은 보다 진지하게 변모했다. 달라진 비틀즈의 음악은 그들을 거품 같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보이밴드로만 생각하던 비평가들과 동료 뮤지션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았다. 팬들은 진정한 뮤지션으로 도약한 비틀즈를 더욱 열렬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순조로운 성공에 존은 성취감보다는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멤버들 역시 누적된 피로와 매스컴의 지나친 관심이 계속되자 신경이 예민해졌다. 결국 1966년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순회공연 도중 돌연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순회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매니저인 브라이언은 펄쩍 뛰었지만 존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갑자기 갖게 된 돈과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던 존이 ‘오랫동안 뜨고 싶어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빚에 허덕이던 예술가’였던 오노 요코를 만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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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사다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것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천장에 그림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까만 캔버스처럼 보이는 그 끄트머리에 사슬로 확대경을 달아놓았더군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죠. 확대경을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예스(Yes)’로 보이더군요. 사다리를 올라가서 확대경을 들여다봤는데 ‘노’, ‘퍽 유’ 같은 것이 아니라 ‘예스’였다고요. 얼마나 마음이 놓였겠어요.”
 

 

 

 

살아생전 수많은 인터뷰에서 요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강조하기 위해 존이 했던 이야기였다. 요코에 대해 전혀 몰랐던 1966년 인디카 갤러리에서 그녀의 작품 <예스>와 먼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로맨틱한 사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요코의 작품 〈예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섬세한 감수성의 구제불능 말썽쟁이 존

1940년 10월 9일, 영국의 항구 도시 리버풀에서 알프레드 레논과 줄리아 스탠리의 아들 존 윈스턴 레논이 태어났다. 한창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시 줄리아는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과 비슷한 ‘존 윈스턴’이란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었다. 줄리아와 알프레드의 결혼은 오래지 않아 끝났고 얼마 후 줄리아는 존을 아이가 없는 언니 부부에게 맡기고 존 디킨즈라는 남성과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존의 이모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반면 이모부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이런 상반된 성격을 지닌, 절대적인 애정을 쏟아주는 부모가 아닌 보호자와 함께 성장하면서 존은 가정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한 심리 상태를 자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반항아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존은 이내 ‘반항’에 일가견을 드러내며 또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주먹싸움에서는 난폭했고 말싸움에서는 어른들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철학적인 말들을 내뱉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존은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글을 통해 감정을 곧잘 분출했는데, 그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 선생님들도 존의 예술적 재능만은 높이 샀다.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 그리고 밴드 쿼리맨 결성

이 무렵 존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이모부의 죽음과 생모 줄리아와의 만남이었다. 존은 이모부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지만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이런 감정을 정상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마냥 웃기만 했다. 이때 존을 달래준 것은 친어머니 줄리아였다. 

딱딱한 이모와 달리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에서 줄리아와 존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존은 그녀와 친구처럼 지내며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당시 존은 영국을 강타한 로큰롤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자 벤조(기타와 비슷한 악기) 연주에 능했던 줄리아는 존에게 기타를 사 주고 벤조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음악은 순식간에 존을 사로잡았고 그는 학교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의 이름은 ‘쿼리맨’으로 존이 다니던 학교의 이름(쿼리뱅크 고등학교)을 딴 것이었다. 쿼리맨의 리더로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존은 1956년 6월 15일, 최초의 공식 무대인 ‘월튼 빌리지 축제’에서 두 살 아래인 폴 매카트니를 만났다. 

두 사람은 로큰롤에 푹 빠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공통점이 전혀 없었지만 이내 친구가 되었고 같은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이미 자작곡을 만들며 음악을 하고 있었던 폴의 집에서 존은 기타 연습과 작곡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얼마 후,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이 ‘쿼리맨’에 들어오면서 밴드는 차츰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슬픔을 이겨내다

1957년 9월, 존은 리버풀의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존은 교장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이 상태로 계속 가면 틀림없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문제아에 졸업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할 만큼 성적도 형편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적 재능만을 높이 평가했던 선생님들의 권유 덕분이었다. 

물론 존은 예술학교에 들어간 후로도 늘 그렇듯 학교생활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가 존이 예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엄마인 줄리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만난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짤막하게 행복을 느꼈던 존은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같은 밴드의 멤버이자 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는 폴은 존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는 존을 위로했고 두 사람은 깊은 유대감으로 남다른 우정을 쌓아갔다. 

그렇게 폴의 위로로 괴로움에서 조금씩 벗어난 존은 음악과 연애를 통해 슬픔을 극복해 나갔는데, 훗날 그와 결혼한 신시아 파웰이 존의 여자 친구가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신시아 파웰은 성격이나 성장 배경이 존과 전혀 다른,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존은 그녀와 진지하게 연애를 하는 한편 그림을 전공한 스튜어트에게 밴드의 기타를 치도록 설득해 밴드에 끌어들였다. 폴의 우정과 신시아와의 사랑, 스튜어트와의 만남으로 존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고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서서히 치유해 나갔다. 


비틀즈의 탄생 그리고 함부르크 진출

줄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15개월 후, 존은 마침내 무대에 다시 섰다. 스튜어트가 합류한 후 스쿨밴드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밴드의 이름은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바꿔 프로다운 면모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매니저를 구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비틀즈의 첫 매니저는 그들이 가끔 출연했던 나이트클럽의 주인이었다. 그는 비틀즈가 리버풀 인근의 여러 클럽에 출연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독일의 함부르크 클럽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함부르크는 리버풀 인근에서만 활동하던 비틀즈가 지역 밴드의 이미지를 벗고 프로로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60년, 비틀즈는 열정을 가득 품고 함부르크로 향했다. 함부르크의 클럽은 선원, 창녀, 포주, 갱, 스트립 걸, 좀도둑, 알코올 중독자, 싸움꾼 등 온갖 시끄러운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이었다. 비틀즈는 이에 지지 않는 패기로 매일 8시간씩 격렬한 공연을 하며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연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의 인기가 높아질 때쯤 미성년자였던 조리 해리슨의 나이가 문제가 되어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랑에 빠진 스튜어트를 제외한 멤버 전원은 리버풀로 쫓겨나듯 돌아왔다. 하지만 리버풀로 돌아온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비틀즈가 리버풀에서 다시 무대에 서자 관객들은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피부로 느끼며 열광했고, 이내 지역 최고의 인기 밴드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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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십대제자 이야기 서문  

  

 

의심할 바 없이 잘 생긴 정우성이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던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기 위해 달마의 시신을 차지하려는 강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 뜻밖에도 부처님의 제자이자 시자인 ‘아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익숙한 이름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아난’의 이야기는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검우강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가 된다.

이야기는 이렇다. 조정 대신 일가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달마의 시신을 차지한 여자 살수(킬러)가 돌다리 위를 지나다 죽은 줄 알았던 대신의 아들과 맞닥뜨린다. 살수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남자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남자가 다리 위에서 떨어지고 살수가 다시 길을 가려는 순간 난데없이 뒤에서 스님 한 분이 나타난다. 절세의 무공을 지닌 살수는 기척조차 없이 다가온 스님을 보며 깜짝 놀란다.

그 후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절에서 밤낮으로 무술을 겨루지만 수일이 지나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3개월 가까이 승부를 겨루던 어느 날, 스님은 살수에게 오늘 이후 그녀를 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며칠 후 정식으로 출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출가 후에는 부처님과 경전에 귀의하여 그녀가 모든 고통과 번민을 잊고 피안에 이르기를 빌겠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오기가 난 여자 살수는 만약 이대로 승부를 내지 않고 출가를 한다면 그 절의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스님은 오늘로 모든 업을 지우겠다는 말과 함께 철로 된 젓가락 한 짝을 들고 살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빠름을 특기로 하는 살수의 검법은 매서웠지만 4개의 초식에 허점이 있었고, 한 조각의 살의도 없지만 정확하게 허점을 노리는 공격으로 스님은 살수를 이긴다. 처음 겪는 패배에 살수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스님은 승리를 거두고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스님은 훗날 살수가 진정한 고수를 만났을 때 목숨을 잃을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그 말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곧바로 몸을 날려 공격을 하고, 살수는 본능에 따라 망설임 없이 스님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칼이 꽂히는 순간 살수는 깜짝 놀라지만 스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스님은 도저히 살인을 멈추지 못하는, 살기(殺氣)를 버리지 못하는 살수를 위해 승부와 상관없이 그녀의 검에 맞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칼을 맞기 전, 그녀의 검법이 지닌 허점을 알려주기 위해 승부를 청한 것이었다.

스님은 목에 걸려있던 염주를 풀어 자신을 찌른 살수의 검에 걸어주며 말한다. 오늘 이후 검을 버린다면 자신이 그녀가 죽이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신을 멈추게 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스님의 자비에 살수는 처음으로 살인을 후회한다. 당황과 후회 속에서 스님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킨 살수는 그 후 정말로 검과 얼굴을 버리고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님의 스승을 찾아가 달마의 시신과 제자의 유품을 전하며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스님이 눈을 감기 전 남긴 유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님의 마지막 말은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오백년 동안 비를 맞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노스님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난’이 출가 전 길을 가다가 한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아난에게 부처님이 물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그러자 아난은 자신이 돌다리가 되어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오백년 동안 비를 맞으며 다만 그녀가 다리를 안전하게 건너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난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그러했다. 오백년 동안 바람을 맞고 비를 맞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다. <검우강호>에 등장한 스님은 이러한 아난의 말과 마음을 빌려 피와 복수로 얼룩진 살인자를 감화시켰다.

아난은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경전의 화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수많은 경전 속에는 아난을 비롯한 십대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또 그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공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제자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십대제자의 이름은 왠지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친근한 마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각기 다른 출가 사연과 수행 스타일을 지닌 십대 제자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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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였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외조 - 성공한 여자를 만든 남자의 비결>가 있으며 현재 세계일보에 <꽃미남 중독>과 <외조의 기술>을 연재중이다.

한 사람의 불자(佛子)이자 여자로써 또 꽃미남 애호가이자 전문가로써 2500여년 불교 역사에 존재해 왔던 멋진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발원 끝에 좋은 인연을 만나 조계사 홈페이지에 <경전 속 꽃미남>을 연재하게 되었다.

<경전 속 꽃미남>은 21세기 재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를 초월하는 멋진 남성에 대한 이야기로 불자(佛子)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긍정적이고도 즐거운 귀감을 줄 것이다. 
 

 글 : 조민기(작가) gora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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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툰치 소크멘 
: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천생연분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강수진의 남편이자 매니저인 툰치는 오직 발레밖에 모르는 수진을 위해 수진의 스케줄을 조절하고,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해 비즈니스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인터뷰를 할 때도 툰치의 역할은 매우 크다. 발레리나로써 무언가 특별함을 기대하는 기자들에게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 대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는 발레단으로 출근해 연습을 하고, 점심으로는 샌드위치를 먹고, 평소에는 오후 여섯 시 반까지 연습을 하고 공연 준비를 할 때는 밤 열한 시까지 춤을 추는 밋밋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천진하게 털어놓는 강수진을 위해 툰치는 종종 ‘슬쩍 끼어들기’ 작전을 쓰곤 한다.   

예를 들어 “강수진은 니진스키 상을 빼면 발레 무용수로서 모든 상을 받았지만 일과는 지극히 지루하다”는 등의 보충설명이 그렇다. 이 짧은 말 속에는 수진의 자랑스러운 수상 경력이 통째로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수상한 다음 날도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성실함까지 포함돼 있다. 이 절묘한 과정 속에서 최고의 매니저다운 모습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헌신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의 역할을 정한 뒤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툰치와 수진은 경쟁 관계에 있는 예술가 커플 특유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부부이다. 수진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시간이 있다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수진에게 이 ‘특별함’을 선사하기 위해 툰치는 손수 요리를 해서 맛있고 건강하며 행복한 식탁을 만든다. 또한 그는 저녁 식사 시간이 아내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때이기에 자신에게도 특별하다고 말한다. 

연습을 거르지 않기 위해 신혼여행조차 마다했던 수진의 여가는 툰치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툰치와 수진은 이 소박한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들이 진짜로 행복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함께하고 있다는 충족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 행복과 충족감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강수진은 불혹의 나이에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외면은 물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더욱 원숙하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강수진이 말하는 툰치

세계적인 유명 인사 중에서 강수진처럼 남편에 대한 애정을 천진난만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강수진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지닌 놀라운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남자, 툰치 소크멘을 알게 된다. 강수진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말하는 툰치는 아내를 빛내는 자리가 아니면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강수진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틈만 나면 남편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발레밖에 모르고 살아온 강수진에게 툰치의 존재는 그녀가 아는 세계의 전부나 다름없을 만큼 크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정상의 발레리나이지만 한국 여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질문, 즉 ‘주부로서 살림 실력은 어떤지’라는 물음에도 수진은 웃으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살림이요? 잘해요. 그런데 저희 신랑이 너무 많이 도와줘요. 저도 요리할 줄 알고 아는데 신랑은 제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싫어해요. 자기가 요리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니까요. 신랑은 자기가 요리사가 되었으면 너무 좋았을 거라고 할 정도예요. 요리도 진짜 요리사처럼 만들어요.” 역시 남편 툰치에 대한 자랑이 빠지지 않았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아내 곁에 있던 툰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리는 양보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남편 겸 매니저로서의 완벽한 자세 

2007년 독일 뷔템베르크 주 정부는 강수진을 ‘궁정무용수(Kammertanzerin)’로 인증했다. 툰치도 덩달아 궁정무용수의 남편이 되었다. 이를 기념해 한국에서는 <강수진과 친구들>이라는 초청 공연을 열었고, 강수진은 언제나처럼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 인터뷰에서 툰치에게 강수진의 매니저로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수진의 건강!”이라고 대답했다.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며 산다는 강수진을 위해 툰치는 수진이 ‘아픈 것을 참지 않도록 하는 것’ 혹은 ‘아픈 것을 참더라도 빨리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툰치는 그녀가 발레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세계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수진에게 전달한다. 툰치의 말은 수진에게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수진이 혹시라도 지치지 않도록 툰치는 그녀가 ‘사랑받고 있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유쾌하고 즐겁게 일깨워준다. 툰치가 주는 행복은 고스란히 수진의 에너지가 되고, 수진의 에너지는 툰치의 말대로 세계 모두에게 좋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매니저가 보는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이고, 남편이 보는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툰치가 있는 한 우리는 ‘세계 모두를 위해 좋은’ 강수진을 계속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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