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카펠
: 재능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의 기술을 가르쳐준 샤넬의 연인

2009년, 샤넬의 창시자인 가브리엘 샤넬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이 개봉하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샤넬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그리고 사랑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샤넬의 사랑 이야기였다. 영화 속에서 샤넬의 사랑을 독차지한 남자의 이름은 바로 ‘아서 카펠’이었다. 



↑ 영화 속 아서 카펠과 가브리엘 샤넬



출생의 아픈 비밀을 간직한 남자 

샤넬의 연인으로 알려진 아서 카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샤넬처럼 카펠 또한 ‘보이’라는 다소 귀여운 별명이 있었다. 샤넬과 만나기 전 카펠은 런던에서 최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렸고, 당시에 가장 인기 있는 귀족 스포츠였던 폴로 선수였다. 

하지만 그가 귀족 출신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고 카펠 자신도 출생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신을 몹시 따지는 상류 사교계는 그를 받아들였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뉴캐슬에 석탄 수송 화물선을 보유한 재벌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우수 어린 눈동자의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귀족적인 성품이 상류층의 취향에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펠이 학비가 비쌀 뿐 아니라 영국에서 귀족들만 다니는 엘리트 학교를 다녔다는 점 또한 재산에 예민한 귀족들의 관심을 자극했다. 

출생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덕분에 카펠은 사교계에서 항상 소문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족의 사생아나 재벌의 숨겨진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무수한 소문 중 그의 아버지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인물은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1.9.~1910.5.6. 영국 윈저왕가의 왕으로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재위했다)와 페레르 형제(에밀 페레르와 이사크 페레르. 철도 사업을 비롯해 운송 사업, 보험, 부동산 개발 등 각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제2제정기 프랑스의 최대 사업가. 최초의 산업은행인 ‘크레디 모빌리에’를 설립했다) 등이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카펠에게도 출생의 비밀은 언제나 상처였다.  


샤넬과의 우연한 만남

카펠이 샤넬과 처음 만난 것은 1908년 프랑스 피레네 지방에 있는 ‘포’라는 곳에서였다. 샤넬은 당시 에티엔 발장과 함께 몰이사냥을 위해 그곳에 방문했다. 에티엔과 샤넬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었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샤넬이 에티엔에게 적당히 빌붙어 살고 있는 관계였다. 

비록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은 훌륭한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강력한 후원자나 튼튼한 배경이 있는 양갓집의 얌전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젊음과 여성이라는 점을 애매하게 무기로 삼아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반면 에티엔은 일종의 신흥 부르주아로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특별한 직업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던 나이 지긋한 독신남자였다. 성격이 쾌활하고 친구들을 좋아하던 에티엔은 경주용 말을 키우며 지냈고, 남는 시간은 친구들과 함께 주로 파티를 하면서 보냈다. 말(馬)을 너무나 좋아하는 에티엔은 경마 일정에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포에서 우연히 산책을 하던 중 카펠과 만난 것이었다. 

폴로 선수였던 카펠은 말을 다루는 데 뛰어났고, 이 점은 즉시 에티엔의 흥미를 끌었다. 에티엔은 카펠을 콩피에뉴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루아얄리외’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에티엔과 함께 지내고 있던 샤넬은 첫눈에 카펠에게 반했다. 카펠은 서른 살, 샤넬은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샤넬은 카펠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남자(카펠)는 정말 미남이고 매력적이었어. 단순히 잘생기고 멋진 것 이상의 남자였지. 그 무관심한 태도와 초록빛 눈이 얼마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고집 센 말에 올라타곤 했는데, 아주 강한 남자였어. 나는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지.” 


과거를 감추고 싶어하는 연인을 이해하다

성공에 대한 야심이 큰 카펠은 사업을 위해 뉴캐슬이나 파리, 런던 등을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루아얄리외 저택을 자주 찾았다. 에티엔과의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샤넬 때문이었다. 카펠은 변변치 못한 성장 과정을 애써 숨기고 싶어 하는 자존심 강한 여인에게 관심이 생겼다. 얼마 후, 카펠은 샤넬과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고 연인이 된 후 그녀를 훨씬 농밀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샤넬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고 가난했다. 아버지는 장돌뱅이였고, 늘 바깥을 떠돌며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일편단심 사랑하며 뒷바라지하다가 과로 끝에 병으로 죽었다. 그 후 샤넬의 아버지는 그녀와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겼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샤넬은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죽는 날까지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샤넬은 평생 동안 카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카펠은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그녀의 ‘거짓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공을 갈망하는 샤넬을 정식 비즈니스의 세계로 이끌다

샤넬은 당시 루아얄리외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주문에 맞춰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에티엔이 보기에 샤넬이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자를 만드는 것은 샤넬에게는 절박한 일거리였다. 그녀는 결혼 가능성도 없고 뜨거운 애정도 없는 에티엔에게 계속 얹혀살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카펠은 그처럼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샤넬의 속마음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카펠과 사랑에 빠진 샤넬은 더욱 에티엔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랐지만 그렇다고 카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에티엔이 심심풀이로 생각하던 모자 디자인 작업이 샤넬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주문이 늘어났다. 샤넬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에티엔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에티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샤넬이 비록 에티엔의 정식 정부(情婦)가 아니라 해도 그녀가 돈을 벌게 내버려두는 것은 에티엔의 입장에서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카펠이 나섰다. 그는 샤넬이 은행 대출을 받아 가게를 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보증까지 섰다. 그는 샤넬의 감각과 재능에서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신했다. 1910년, 샤넬은 카펠의 도움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캉봉 거리 21번지 2층에 있는 커다란 작업실을 빌렸다. ‘샤넬 모드’의 첫 시작이었다. ‘샤넬 모드’가 오픈한 후 샤넬은 에티엔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카펠의 연인이 되었다. 샤넬의 첫 상점이자 샤넬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곳, ‘샤넬 모드’는 카펠과 샤넬의 사랑의 증거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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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사라진 열정, 사라진 재능

이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존과 요코의 사랑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요코를 향해 뜨겁게 불타올랐던 존의 사랑은 5년쯤 지나면서부터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요코를 비난하는 세상에 맞서 싸웠던 존이 지쳐갔던 것이다. 사회성과 정치성을 띤 시위를 계속해 온 탓에 당국으로부터 집요하게 감시를 당하는 것 역시 존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 했다.

언제나 주류에 속하는 것을 거부했던 존은 세상을 비웃기 위해 시작한 ‘비틀즈’를 통해 자신이 거대한 주류가 되자 당황했다. 철저하게 비주류인 요코와의 삶에 끌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코와의 하루하루는 점차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가까웠고, 이것은 존의 창작욕과 감수성을 바싹 말려버렸다. 요코와 함께 하면서 주류 사회의 속성이나 습성을 통쾌하게 꼬집어내는 것에 희열도 점차 사라졌고, 창작 의욕과 영감이 사라진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존에게 기쁨이나 위안이 되지 않았다. 존은 눈앞이 캄캄했다. 


별거, 잃어버린 주말 

존이 점점 지쳐갔던 반면 요코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모든 분야에 도전했고,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모든 분야에 존이 관여해 주기를 원했다. 결국 존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육체적인 것으로 해소했다. 존과 요코의 비서로 일하던 젊은 중국계 여성 메이 팡이 그 대상이었다.
요코는 누구보다 빨리 이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존의 불륜까지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요코는 메이 팡에게 존의 요구에 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대범하게 대처했다. 존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코의 생각과는 달리 한 번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1973년 10월, 존과 요코는 별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요코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 제작에 매달렸다. 존은 별거 중이었지만 요코의 예술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두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요코는 존 레논이란 부록이 없는 한 자신의 예술 활동은 대중성이나 상업성 그리고 화제성에서 타격을 입을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했다.  

 




되찾은 주말, 아들 ‘션’의 탄생

앨범이 실패한 후 요코가 선택한 새로운 일은 바로 사업이었다. 존의 절대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도 매번 예술가로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했던 요코는 마침내 자신이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저작권과 부동산 등 ‘재산 증식’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많은 수익을 올렸다. 수년에 걸쳐 줄기차게 적자를 기록해온 요코는 예술이 아닌 사업을 통해 적어도 투자에 대한 감각만큼은 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 

홍보 담당이자 경쟁자인 존이 곁에 없는 동안 요코가 예술에 대한 욕심을 잠시 접고 사업에 열중해 있는 사이 존은 메이 팡과 18개월 동안의 밀월을 마치고 요코에게 돌아갔다. 존은 요코와 떨어져 지낸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표현하며 용서를 빌었고 요코는 받아들였다. 요코와 존은 평소처럼 별거 전과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세상을 향한 전투적인 공격성만큼은 다소 줄어들었다. 요코의 임신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유산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이도 적지 않았던 요코는 존과 재결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특별히 조심했다. 아홉 달 동안 거의 아무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지냈던 요코는 1975년 10월 11일 새벽 제왕절개로 아들 션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요코는 “나는 9개월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보냈어요. 이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신 차례예요.”라고 말하며 존에게 아이의 육아를 일임했다. 첫 아들 줄리안을 낳았을 때도 육아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존은 요코의 결정을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요코는 계속해서 사업에 몰두했다. 사실 존은 음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능력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그런 점 때문에 요코의 예술에 그처럼 무모한 투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예술가로써는 수익이 전무했던 요코는 사업가로써 탁월했다. 원래부터 충분했던 존의 재산은 요코의 손을 한 번씩 거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존은 결국 요코의 뜻에 따라 그녀를 자신의 공식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의 동상이몽,〈Double Fantasy〉

1980년 6월, 존과 요코는 아들 션과 함께 팜비치로 여행을 떠났다. 온 가족과 함께 간 이 여행에서 존은 심한 풍랑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존은 길고 긴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다시 살려냈다.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존은 5년간의 전업 주부 생활을 끝내고 오랜만에 다시 창작 활동에 들어갔다.

존이 의욕을 되찾자 요코도 앨범 작업에 동참했다. 예술에 대한 욕심을 접었던 요코가 갑자기 다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자취는 확연했다. 11월 16일 발표한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는 곡의 순서가 ‘존-요코-존-요코’ 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매우 평등했지만 새로운 영감으로 충만한 존의 곡들과 달리 요코의 곡 중에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이 엿보이는 노래도 있어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대중들과 평론가들 역시 이 불편함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Double Fantasy〉가 세간의 비난을 받자 섬세한 존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양한 음악 활동을 기획했다. 다시 슬럼프로 움츠러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980년 12월 8일 밤, 앨범 홍보 활동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존은 한 남자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의 이름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 25세의 그는 존의 열성 팬이었다. 


죽음 그리고 요코에게 남긴 것

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엄청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존의 시신이 화장된 날, 요코는 공식 성명을 내고 자신의 ‘남편’인 존을 위한 묵념을 제안했다. 12월 14일 일요일, 전 세계적으로 10분간 묵념이 거행되었다. 팬들이 요코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존의 아까운 죽음은 요코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날 밤 녹음한 요코의 〈Walking on Thin Ice〉는 성공을 거뒀다. 이 노래는 요코의 곡들 중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곡이 되었다. 존이 살아 있을 때 요코를 무조건 적대시하던 대중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요코의 작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존의 그림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요코의 작품과 활동들은 천천히 대중들 사이로 스며들었고, 존은 세상을 떠나서도 매개자 역할을 했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2월 8일이 되자 세계 곳곳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이날은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 팬들은 함께 모여 밤을 새우며 추모 의식을 가졌다. 

같은 날, 뉴욕 저팬소사이어티에서 〈예스 오노 요코〉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존 레논의 미망인인 오노 요코 단독 주연, 감독, 각본의 〈예스 오노 요코〉는 뉴욕을 시작으로 미니애폴리스, 휴스턴, 케임브리지, 토론토,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를 순회하며 열렸다. 전시회에서는 오노 요코의 전기 형식의 수필과 비평 그리고 요코의 새 음반 CD가 들어 있는 아트 북 〈예스 오노 요코〉를 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요코는 자신의 작품에 기여한 존의 영향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제는 일흔이 넘은 요코는 존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존 레논 재단을 운영하며 남편을 추모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예술가로 언론 앞에 설 때면 “존 레논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긴 하지만 존과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작품들을 포함한 예술 활동이 계속되는 한 그녀는 언제나 존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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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예술가의 남편

1969년 3월 20일 존은 마침내 요코와 결혼했다. 존과 결혼한 이후 항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신시아와는 달리 요코는 돈과 명성 그리고 세계 최고의 광고 효과를 가진 남자의 아내라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이 특권 속에서 요코는 새롭게 활기를 찾았고 예술가로서도 많은 것들을 성취했다. 

결혼식 이틀 후, 존과 요코는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의 스위트룸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에 열두 시간씩 1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통해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사회운동을 섹슈얼리티와 결합시킨, 다분히 정치적이었던 이 기상천외한 베드인 시위는 전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요코는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원하는 것 이상의 주목을 받는다는 데, 그리고 레논은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과 기대를 역이용했다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한때 예술가로서 성공의 길이 보이지 않자 우울증에 걸려 입원까지 했던 요코는 이제 ‘존 레논’이라는 충성스러운 홍보 담당자를 대동한 초호화 전위 예술가이자 창의적인 작가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존은 또 그동안 요코가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누적해온 빚을 한 번에 갚아주었다. 

음악으로 엄청난 돈과 인기를 얻은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던 존은 오노 요코라는 훌륭한 예술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돈과 명예 그리고 유명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는 그것이 교활하고 이기적인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요코와 예술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해 4월 22일 존은 요코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공증인을 세우고 29년 동안 사용해온 ‘존 윈스턴 레논’이라는 이름을 요코의 성이 들어간 ‘존 오노 레논’으로 개명을 하기에 이른다. 

 

 


뉴욕에서의 생활과 음악 활동 

“영국에서는 나를 한몫 잡은 운 좋은 놈 정도로 취급한다. 요코는 그 한 몫 잡은 놈이랑 결혼한 운 좋은 일본 여자고. 하지만 미국에서 우리는 둘 다 예술가 대접을 받는다. 뉴욕은 천국이다.”

같은 해 12월, 요코와 함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존이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요코도 예술가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뉴욕에서 이들은 영화를 찍었다. 천국과도 같은 뉴욕에서 두 사람이 찍은 영화를〈존과 요코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상영했다. 경제적인 여유에 매스컴의 관심이 더해진 덕분에 요코의 경력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1971년 7월 존은 〈Imagine〉을 녹음했다. 미국에서 9월에, 영국에서는 10월에 발표된 이 앨범은 미국에서 30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영국에서는 18주 동안 톱 텐을 차지했다. 그 즈음 요코 역시 자신의 앨범 〈Approximately Universe〉를 발표했다. 하지만 요코의 앨범에 대한 반응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에 존은 대중성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한 요코의 명예를 위해 요코가 〈Imagine〉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존의 노력으로 결국 소책자에 가까운 요코의 〈그레이프프루트〉가 정식으로 재 발매되었다. 플럭서스 예술가가 쓴 책이 재발매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고, 또 출판 기념 기자회견을 연 것도 요코가 처음이었다. 이 밖에도 요코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을 때조차 정기적으로 공식 석상에 존을 대동해 자신을 확실하게 홍보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생일 선물

같은 해 존과 요코는 다시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 시러큐스의 에버슨 미술관이 요코의 개인 전시회를 대규모로 기획했던 것이다. 요코에게 이 전시회는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그녀의 경력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정식 기회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요구사항을 내놓았고 결국 총 기획을 지휘하던 요코의 친구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두 손을 번쩍 들 만큼 예산이 초과되었다. 

요코의 의지대로 전시회를 진행하기 위해 결국 존은 엄청난 사비를 털어 이 초과된 예산을 채워 넣었다. 요코는 존에게 이 전시회가 그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말하며 그를 초대 예술가로 참여시켰다. 존이 전시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비틀즈의 팬들이 몰려들어 전시회는 오픈 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71년 10월 9일, 마침내 전시회가 오픈했을 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전시회를 제일 먼저 체험하기 위해 차가운 비를 맞으며 건물 밖에서 야영을 했다. 플럭서스 전시회의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명의 팬들이 밖에서 밤새 야영을 한 것은 전시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번도 대중적인 흥행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요코는 이 이례적인 사건이 마침내 자신의 예술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을 새워 전시회 오픈을 기다린 수천 명의 팬들 중에는 오노 요코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보다 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 전시회에서 비틀즈가 다시 뭉쳐 공동 콘서트를 열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믿고 찾아온 비틀즈의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팬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요코는 예술가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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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
: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


비틀즈를 모르는 무명 예술가, 오노 요코와의 만남

당시 오노 요코는 10년 넘게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었지만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실패한 예술가에 가까웠다. 적지 않은 나이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성공을 갈망했지만 돈도 인기도 유명세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존과 만나게 되었다. 런던으로 돌아와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존이 우연히 다음 날 오픈 예정인 인디카 갤러리에 들러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오노 요코의 <예스>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훗날 요코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엔 비틀즈는 물론 존 레논이라는 사람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고 존은 항상 그녀를 두둔했다. 당시 오노 요코가 비틀즈와 존 레논을 정말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매스컴과 팬들을 몰고 다니는 ‘존 레논’이라는 슈퍼스타가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요코는 자주 존의 집 밖에서 그를 무작정 기다리기도 하고 비틀즈 전원이 참석한 런던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마하리시의 초월 명상 공개 강연이 끝난 후에는 존과 신시아 부부의 롤스로이스 앞에 뛰어들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존 레논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으며 그가 단지 자신의 작품을 무척 잘 이해하는 낯선 ‘관객’이었다고 주장한 것치고 요코의 행동은 가히 스토킹에 가까웠다. 하지만 수년 동안 비틀즈의 각종 ‘험한’ 팬들을 자주 접했을 뿐 아니라 천성이 얌전했던 신시아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존 레논은 ‘비틀즈를 모르는 예술가’가 마치 열혈 팬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에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비틀즈의 또 다른 반쪽,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1967년 8월 27일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존은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 여파로 밴드자체에 대한 의욕과 관심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경험해 온 존에게 브라이언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이모부가 세상을 떠났을 땐 어머니 줄리아가 곁에 있어주었고 줄리아가 세상을 떠났을 땐 신시아와 브라이언이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존의 이런 심정을 잘 아는 폴은 그를 달래며 비틀즈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존은 오히려 엇나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음악에 몰두하여 치유했던 사춘기 이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존이 생각하기에 비틀즈는 더 이상 순수한 밴드가 아니었다. 존에게는 깊은 상실감을 달랠 음악이나 밴드가 아닌 색다른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존의 정신이 극도로 심약해졌던 1967년 9월, 요코는 리슨의 한 지하 갤러리에서 침대, 화장대, 의자, 세면대 등을 반쪽만 놓아둔 전시회를 기획했다. 요코의 예술은 비틀즈의 반쪽이나 다름없던 브라이언을 잃은 채 방황하던 존의 마음을 흔들었다. 존은 이 전시회에 5천 파운드를 지원하며 요코에게 나머지 반쪽들을 병에 넣어 선반에 진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요코는 존의 의견을 냉큼 받아들였다. 그리고 존의 생일 이틀 뒤인 10월 11일에 전시회를 열어 그에게 후원의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과 존의 관계를 대중들에게 의미심장하게 전달했다. 

존은 요코의 전시회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상업적이지 않은 ‘순수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기쁨을 느꼈다. 존의 아이디어가 첨가된 〈Half Window Show〉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요코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남편

전시회를 통해 존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요코는 존이 가족과 또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인도에 가 있는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이미 온갖 좌절과 시련, 실패를 맛보며 두둑한 배짱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의지력을 키워온 요코의 빈틈없는 에너지는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섬세하고 여린 존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1968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온 존은 신시아가 그리스로 여행을 간 틈을 타서 요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존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동안 요코는 두 번째 남편인 앤터니 콕스와 이혼하고 존에게 운명을 걸 결심을 굳힌 뒤였다. 하지만 막상 요코가 집 앞에 도착하자 존은 당황했다. 그러나 요코는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녀는 음악을 화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한 후, 〈Two Virgins〉를 녹음하고 존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 요코는 계속 존의 집에 머물며 생활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거리낌이 없는 존과 요코의 모습에 기겁을 한 채 도망치듯 친구의 집으로 갔다. 존은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내 신시아에게 상처를 주며 요코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요코와의 사랑을 합법화하기 위해 신시아와의 이혼을 결심했다.
1968년 10월 28일 존과 요코는 마약류의 불법 소지 및 경찰 수색 의도적 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바로 다음날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존은 요코를 보호하고 외국인인 그녀가 영국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요코와 만난 이후 존은 아내 신시아와 아들 줄리안에게 최악의, 이기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다. 


지독하게 이타적인 연인

1968년 11월 29일 앨범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가 발표되었다. 앨범의 재킷은 두 사람이 처음 밤을 보냈던 날을 기념하며 찍은 나체 사진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요코’라는 불순물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던 팬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코는 비틀즈의 음반 작업에도 동참했다. 결성 이래 비틀즈가 음악 작업을 할 때에는 그 어떤 사적인 인물도 끼어들었던 적이 없었고 이것은 오랜, 당연한 불문율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비틀즈의 음악은 네 명의 멤버들만이 마법처럼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는 비틀즈가 수년에 걸쳐 만들어온 이 마법의 힘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재능이 음악 쪽으로 풍부하다고 믿었다. 존도 요코의 생각에 열렬하게 동의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다른 멤버들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의 동참을 환영했다. 존의 곁에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요코는 매일같이 존과 함께 녹음실에 왔다. 존의 이러한 태도에 비틀즈를 사랑해온 팬들과 대중들은 크게 분노하며 실망했고, 이 실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요코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요코가 언론의 표적이 되자 존은 요코의 충실한 대변인이자 변호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 달리 요코는 언론의 공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이 그토록 염증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매스컴에 굴하지 않는 요코의 강한 정신력에 새삼 감탄하며 더욱 큰 사랑을 느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해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는 실망을 주는 것과 비례하여 존은 오직 요코에게만 한없이 이타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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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꽃미남을 찾아서 - 온고지신(溫故知新) 편

일 년 중 딱 한번뿐인 장마가 올해는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덕분에 한여름 무더위도 훨씬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산이라는 짐이 하나 더해짐으로써 훨씬 번거로워진 출퇴근 전쟁과 비온 후에 찾아오는 축축하고 후끈거리는 공기 때문에 불쾌지수가 저절로 상승하지만, “비의 계절”인 장마기간도 조금은 즐겁게 보내기 위해 약간의 낭만을 더해보고자 한다.

시대의 이슈메이커, 정지상(鄭知常)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새로운 해석에 해석을 거듭한 사극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옛날 옛적은 더 이상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배경이 될 수 있음을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항상 있어왔던 것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비가 오는 날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가 오는 날은 흔하지만 화창한 날과는 또 다른 매력을 담뿍 가지고 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은 이별을 소제로 지은 한편의 시에서 잠시 비를 언급하였다. 그 시인의 이름은 정지상, 그가 이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낸 그 시의 제목은 ‘송인(送人)’이다. 고려시대의 정치인으로써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민감하기 그지없던 당시,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정지상은 당대 최고의 이슈메이커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시재(詩才)를 자랑하는 시인으로써 명성도 높아 후세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을 남겼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개인 강둑에는 풀빛이 짙어 오는데,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니 슬픈 노래가 나오네.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푸른 물결에 보태는데.  



천년을 관통하는 한 편의 시(詩)

한 편의 시가 수많은 시대와 시대를 거듭하며 사랑받으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반만년 역사 위에 오롯하게 생명력을 가지고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은 오늘날 감상하더라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빈틈없이 갖추고 있어 앞으로 다시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고전 중의 메가 히트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 관리로써의 정지상은 비록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세상을 떠났지만 시인으로써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오늘날 매년 학생들은 국사책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써 정지상을 대면한다. 특히 장마가 시작되면 더욱 정지상의 시(詩)가 생각난다. ‘송인(送人)’의 첫 구절에서 단 일곱 개의 문자로 표현한 풍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가 말한 대로 비가 오고난 뒤의 온갖 식물들은 더욱 짙은 빛을 발한다. 이러한 감수성을 문자로 멋지게 남길 줄 알았던 조상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공유할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을 만끽하자

훌륭한 고전(古典)은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멋진 유산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시절 ‘입시’라는 압박 속에서 억지로 머릿속에 넣은 지식이었기 때문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기억 속에서 자동 삭제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종종 사회에 나와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고전들을 다시 볼 때면 반가우면서 생경한 느낌이 들곤 한다. 밑줄 치며 암기했던 시인의 감정, 시적 기교, 기승전결의 순서, 시대적 배경 등을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련한 익숙함과 놀랍도록 새롭게 다만 사랑, 이별, 우정, 고독 등의 감정만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작품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만약 교과서를 통해 배우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고전(古典)을 접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작품 자체만으로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있는 고전(古典)에 대한 무심한 시선과 두껍고 딱딱한 선입견이다.

고전(古典)은 우리 조상의 생생히 살아 숨 쉬던 가장 뜨거운 시절의 한 조각

문학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우리의 고전(古典)을 남긴 작가들 대부분은 정치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출퇴근 시간이 엄격한 중앙 정치인으로 살아가면서 권력이 있을 때 부귀영화를 축적하고, 그 부귀영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좌천되지 않기 위해 연줄을 만들고, 아부를 하며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갔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거침없이 몸을 던지기도 하고,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하고, 여자 문제로 골치를 앓기도 하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사랑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가 없다. 그들도 몸이 고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숱한 야근도 불사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바쁜 일과 중에서도 승부근성을 불태우며 서로 문장을 겨루고 보다 좋은 작품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열심과 최선의 아주 작은 결과물이 바로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다.

우연하게, 혹은 의무적으로 우리 앞에 고전(古典)이 나타난다면 외면하거나 지루해하기보다는 살짝 흥미를 가져보는 것을 어떨까. 단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 하나의 작품은 생명력을 갖게 되고 우리의 감성은 훨씬 씩씩해 질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자신만의 기쁨이자 경쟁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긴 장마의 빈틈이 생길 때,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감상하는 것이 그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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