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수상이 된 후 마거릿의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며 주변을 배려할 줄 모르는 태도는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영국병’을 고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마거릿이 가진 원래 품성이기도 했다. 영국에 ‘영국병’이 있다면, ‘영국병’을 고치고자 했던 마거릿에게는 이른바 ‘대처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쌍벽을 이루는 성공 강박증이 있었다. 수상으로써 마거릿이 영국병을 매로 다스리는 수상이었다면, 남편으로서 데니스는 수상이자 아내인 마거릿의 ‘대처병’을 사랑으로 감싸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최초의 여성 수상과 그녀의 외로움을 위로한 남편 

 


마거릿은 자신이 성공한 것은 운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분과 가난이라는 물리적인 어려움을 의지와 노력으로 이겨냈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대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견디질 못하고 가차 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스케줄은 하루에 네다섯 시간 취침이면 충분한 자신의 체력에 맞췄고 부하직원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피곤에 찌든 보좌관들은 남몰래 치를 떨면서도 감히 그녀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마거릿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수상이었고 그래서 경직되고 침체된 영국 사회에 많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도저히 실현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포용하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화 등으로 풀어가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비난도 많이 받았다. 여당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와 대립한 야당은 정치적인 사안 외에 마거릿의 목소리, 말 한마디, 목소리, 표정 하나, 가벼운 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꼬투리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워낙 씩씩하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마거릿이었지만 호의적인 시선보다 적대적인 시선이 압도적인 가운데 항상 긴장 상태로 지내다 보니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데니스는 그런 외롭고 고독한 마거릿을 아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며 보호자였다.

그는 아내의 꿈과 능력이 세상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소음들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고, 자신이 마거릿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때가 언제인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데니스는 마거릿에게 용기가 필요할 때는 진심을 다해 그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지도자라고 말해주었으며 침묵이 필요할 때는 입을 다물었고, 위로가 필요할 땐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다우닝가의 안주인에서 퍼스트 젠틀맨으로

또한 데니스는 유머감각과 여유, 배려와 사교성이 부족하여 비난받는 마거릿을 위해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의 ‘안주인’ 노릇을 자처하며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소리 없이 채워주었다. 종종 마거릿이 각료들을 집으로 초대하면 데니스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부인들과 응접실에서 어울렸다. 그리고 마거릿과 그녀들의 남편인 각료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차를 마시기도 하고 다양한 화제로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살뜰하게 대접했다.

수상으로써 마거릿은 ‘사교적 모임’과 ‘회의’를 가리지 않고 어떤 자리에서든 한 번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토론을 하는,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사였다. 따라서 데니스의 이러한 배려는 ‘사적인 초대라고 해놓고 남편들을 붙들고 정치 이야기를 끝도 없이 계속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 수상’에 대한 부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마거릿이 바쁠 때면 그녀를 대신하여 수상 관저를 직접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나주곤 했다. 데니스는 단지 의례적으로 그들을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상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듣고 자세히 기록했다가 나중에 마거릿에게 전달한 후 그녀의 결정이나 대답을 다시 전해주곤 했다. 이러한 행동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만하다는 수상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데 무척 큰 효과가 있었다.

데니스에게 이런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마거릿도 그녀의 내각 참모들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다우닝가의 안주인’을 자처한 데니스가 알아서 찾아낸 역할이었다. 이처럼 데니스는 마거릿이 수상으로 재임했던 11 년 동안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외조를 계속했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영부인을 뜻하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의 의미를 정중하게 담은 ‘퍼스트 젠틀맨(First Gentleman)’이라는 칭호를 선물했다. 그 후 데니스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남편을 칭하는 롤 모델이자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박수칠 때 떠난 명예로운 퇴임

1990년 11월 20일, 마거릿은 보수당 당수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과반수 이하의 표를 얻어 패배했다. 재투표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물론 보수당 내에서도 그녀를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을 때였다. 마거릿은 남편에게 조언을 구했다. 1959년 마거릿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30년 넘도록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적이 없는 데니스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마거릿에게 명예로운 퇴임을 하기 바란다고 대답했다. 데니스의 말은 마거릿에게 남편의 조언인 동시에 국민의 의견이었다. 마거릿은 데니스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 22일 아침, 마거릿은 뉴스를 통해 당의 앞날과 융합을 위해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녀의 선택은 그동안 그녀에게 반발하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이끌어냈다. 국민들은 11년간 누려온 절대적인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마거릿의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언론 역시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명예로운 퇴임이었다. 1991년 5월, 여왕 알현을 마치고 나온 마거릿은 눈가가 붉게 물든 채 수상 관저를 떠났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데니스는 그녀의 곁을 지켰다.
 
1992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마거릿의 공을 인정해 그녀에게 여남작 작위를 수여했다. 마거릿이 남작이 되면서 남편인 데니스 또한 자연히 준 남작이 되었다. 마거릿이 정치가가 된 이후 데니스에게 무언가를 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죽음 그리고 홀로 남겨진 마거릿

명예로운 퇴임 이후 마거릿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매우 사소한 일에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고 지독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시달렸다. 30년이 훨씬 넘도록 취미도 휴식도 없이 오로지 ‘정치’라는 한 길만 전력질주해온 결과였다. 데니스는 우울증에 빠진 아내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녀가 수상이든 아니든, 권력이 있든 없든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던 데니스가 곁에 있는 한 마거릿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03년 데니스는 췌장암 및 심장병으로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마거릿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남편을 먼저 보낸 마거릿은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다. 데니스 외에는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조차 없던 마거릿은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차츰 치매 증상을 보였다. 마거릿과 데니스의 딸 캐럴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의 대화를 담은 자신의 비망록을 책으로 냈다. 딸과 대화를 하던 중 마거릿은 몇 번이나 남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캐럴은 그때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때마다 마거릿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만약 데니스가 마거릿보다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마거릿을 마지막까지 돌보았다면 그녀가 치매라는 사실은 세상에 결코 드러나지 않은 채 죽는 날까지 ‘수상’이자 ‘여남작’다운 품위를 지켰을지도 모른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