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대처,   
조용히 바보로 취급당하는 것을 선택했던 수상의 남편

언젠가 마거릿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충실한 비서를 두었으니까요. 나는 데니스의 재력 덕분에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처음에는 재력으로 아내가 꿈을 실현하는 것을 도왔던 데니스는 점차 정치가로서 마거릿의 입지가 넓어질수록 그녀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마거릿의 심신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재력을 갖춘 충실한 비서

아내의 ‘공무’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나 의견을 낸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잘 알려진 데니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것은 1971년 마거릿이 교육장관으로 재임 중일 때였다. 당시 마거릿은 노후 학교 건물의 개선과 의무 교육 기간 연장을 위한 예산 마련을 위해 그때까지 7세~11세의 초등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던 급식 우유를 유료화했다. 그녀의 결정은 곧 사회 전체에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언론은 그녀를 ‘우유 도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강하게 비난했다. 또 유력한 잡지는 마거릿을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여성’으로 선정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거릿이 학교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에 학생들 태반이 나가버리거나 야유와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던 마거릿도 이때만큼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데니스는 너무나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사임을 권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남편으로서 그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마거릿의 반응은 보통의 여자들과 완전히 달랐다. 사임을 권하는 데니스 말을 듣자 마거릿은 눈물을 멈추고 새삼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데니스의 사임 권유는 ‘힘들면 언제라도 사임을 해도 되는 든든한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마거릿에게 확실하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이를 깨달은 마거릿은 더 이상 언론이나 대중의 태도에 상처받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결국 그녀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으며 동시에 정치적 ‘위기’도 극복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나중에 인터뷰할 기회가 생기자 자신이 이처럼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고향 그랜섬과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하며 데니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가 아내를 위해 이른 은퇴를 결심하다

1975년 마거릿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바로 보수당의 당수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유력한 후보자이자 마거릿의 친구였던 키스 조지프가 그녀에게 입후보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마거릿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데니스를 비롯한 다른 가족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당수 선거에 입후보하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은 혼자 했지만 두 번에 걸친 선거운동은 가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첫 번째 투표일인 1975년 2월 4일 아침, 마거릿은 선거 전략의 하나로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데니스를 위해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대중들에게 가정을 소중히 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선거 기간 동안 마거릿이 실제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을 알면서도 데니스는 승리를 위한 아내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마거릿은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과반수가 넘지 않아 투표는 무효가 됐다. 두 번째 투표는 일주일 후인 2월 11일로 정해졌다. 마거릿은 이 일주일간 수많은 의원들과 점심,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맹렬하게 선거 유세에 돌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당연히 가정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보수당의 당수가 된 마거릿의 활동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으며 행동 하나 하나가 화제가 되었다. 마거릿이 당수 선거에 한창이던 당시 런던대학에서 졸업시험이 한창이던 딸 캐럴의 사생활조차 매스컴에 수시로 공개되곤 했다. 이 때문에 캐럴은 졸업 후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이 ‘당수의 딸’이 아닌 ‘캐럴 대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아 호주 라디오 방송국의 리포터로 취직했다.

반면 어머니가 ‘마거릿 대처’임을 적극 활용하며 부모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아들 마크는 학업도 지지부진했을 뿐 아니라 그가 ‘마거릿 대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용하고자 한 사람들에게 휘말려 마거릿의 경력에 흠집이 날 만한 온갖 골칫거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승승장구하는 아내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식들을 지켜보면서 그때까지 사업에 종사하던 데니스는 은퇴를 결심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수십 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꾸려온 가문의 사업이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문제나 말썽이 생겼을 경우 ‘공인’의 자리에 있는 마거릿에게 화살이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였다. 은퇴하기엔 조금 이른 예순의 나이였지만 데니스는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골프와 술, 담배 등으로 소일하며 영국을 위해 너무나 바쁜 아내의 곁을 조용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지켰다.

바보 취급당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 수상의 남편
 

4년 후인 1979년 5월, 총선거가 치러졌다. 투표일 다음날 새벽 세 시, 데니스는 아내와 함께 보수당 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아내가 영국 최초로 수상이 되는 기쁨을 함께했다. 이번에도 마거릿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승리 연설에서 “내 정치적 스승은 아버지였다.”라고 거듭 말했다.

물질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30년 가까이 아내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데니스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한 마거릿의 행동과 발언은 데니스와 남은 가족들의 존재를 점점 희미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그림자’ 역할을 그 누구보다 우아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개표 당일 새벽 다섯 시, 자택으로 돌아온 데니스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마거릿은 너무 흥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의 비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가족들은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버킹엄 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좋은 날이었지만 기쁨보다는 긴장과 흥분으로 팽팽해진 공기를 완화하기 위해 데니스는 “자동차가 부서질지도 몰라.”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마거릿은 “그땐 걸으면 돼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거릿의 칼 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여기서도 데니스는 아내의 캐릭터를 빛나게 해주는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데니스는 이처럼 마거릿에게 인간미를 더해주곤 했다. 영국의 수상이라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정치가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데니스의 처신은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는 마거릿이 수상의 자리에 있었던 11년 동안 혹시라도 마거릿이 자신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단 한 번의 인터뷰도 하지 않은 현명한 남편이었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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