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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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였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를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었겠죠. 제 머릿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의문입니다. 이때의 '나'는 과연 죄를 지은 것인가라는 문제 말이죠.
미국은 '그'이고, 중동권의 몇몇 국가들은 어쩌면 '나'의 입장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겠더라구요. 이 책의 저자는... 이 경우 '나' 또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죄를 지은 것이다라 말하고 있더군요.

아주 흔할꺼 같은 복수 영화의 스토리를 한번 만들어보죠. 일단 이 영화의 제목은 제 마음대로 <누가 죄 지었는가>라 지어보겠습니다. : 이 영화는 한밤 중, 행복한 가정에 괴한이 침입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괴한의 침입을 감지한 부부는 급히 어린 아들인 김개똥을 침대 밑으로 숨겼으나 안타깝게도 그 부부는 괴한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당하게 되지요. 이 모든 과정을 침대밑에 숨어 숨죽이고 지켜보았던 어린 김개똥은 부모의 복수를 꿈꾸며(?) 자라나, 결국 통쾌한 방법으로 그 괴한들에게 처절한 최후를 맞게 해줍니다. 이 모든 과정을 스크린을 통해 본 관객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마음 속에서는 김개똥과 같이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이유가 없는)통쾌함을 느끼게도 되겠지요. 김개똥은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부모의 복수를 모두 마치고, '이제 법의 심판을 받겠다'라며 경찰에 자수를 합니다. 그러면 이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 개인의 비극적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로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마지막에 사형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 흘리고 있는 주인공 김개똥의 모습으로 이 영화가 꼭 마무리되었어야 했느냐하며 진한 아쉬움을 안주삼을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세븐데이즈>라는 영화가 제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걸 몇 번 이야기한 기억이 나네요. 그 영화의 핵심은 바로 위와같은 '사적(私的) 복수'입니다.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사적 복수를 위해 '사법 체계'라는 합법적 응징 시스템을 이용해, 응징 대상자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도록 만듭니다. 이처럼 영화의 핵심이 '사적 복수'에 있기에, 그 과정으로서 다루어지는 '재판'이라는 공적 과정에 (법을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선"을 강제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수단이라 강하게 믿고 있는 저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목에 걸린 가시'같은 부분은 아니었지요. 

 

이러한 '사적 복수'이외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궁금증 하나가 바로 「세계는 왜 싸우는가?」의 감상문에 달아주셨던 어느 이웃분의 댓글에 답했던 (위 박스에 있는) 저의 덧글로 표현되는 의문입니다.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였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 사실 이게 충동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대응이라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읽었었던)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하느냐'란 지문이 담고 있는 바, 즉 국가의 명령에 의해 내려진 처벌이 과연 피해자의 용서를 대신 할 수 있느냐에 관한 피해자의 저항(?)은 분명히, 그리고 충분히 인간의 본성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라는 사실이 오로지 비난의 대상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 차마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위에 있는 답글에서처럼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를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었을'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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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목전에 둔) 교도관(난고)과 이제 막 가석방된 살해범(준이치), 이 두 명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이제 사형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사형수(사카키바라)의 무고함을 풀어준다라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제외하고는, 제가 읽어 본 다른 일본작가의 첫 소설이기도 하구요. 제목에 쓰인 '13계단'은 단기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카키바라가 기억해 낸 '계단을 오르고 있던 장면'에서의 그 계단 층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본의 사형제도가 '13단계'의 결재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는 것에 더 큰 무게가 주어져 있는 듯 보입니다. 

 

추리 소설이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예의 독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원한 관계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 충분히 생길 여지가 있는 의문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추리 소설로서의 이 작품은 예의 그 화려한 수상경력처럼 상당히 매력적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무엇보다!!! 사카키바라의 죄가 과연 억울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정당한 판결이었으냐의 결론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과연 사형이란 제도에 어떠한 문제점들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해보길 원하는 작가의 메세지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법률 체계가 똑같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일본의 사형제도와 그에 대한 (등장 인물들을 통해 표현되는) 작가의 시선을 제 주관대로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도 살인의 경우 피해자가 한 명이면 절대로 사형당할 일은 없습니다. 무기징역이 최고의 형벌이지요. 그런데 피해자가 세 명 이상이 되면 거의 틀림없이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작품에서처럼 피해자가 두 명인 경우인데, 이 때엔 사형이건 무기징역이건 그 어느 쪽의 판결이 나오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형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지만, 형을 내리는 자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사람이 사람을 정의라는 이름하에 심판하려 할 때에 그 정의에 보편적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커다란 맹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 또한 재판관이 사형 판결을 피하는 첫 번째 이유로 '개전의 정'을 들 수 있는데, 우선 이 '개전의 정'이라는 것을 정녕 남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죄를 범한 인간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를 과연 겉으로 보아서만 알 수 있는 겁니까? 또한 형벌의 존재 이유로 범죄자에 대한 보복이라는 '응보형 사상'과 '범죄자를 교육·개화하여 사회적 위협을 제거한다는 '목적형 사상'이 있는데, ('개전의 정'을 판단하는 정당성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개전의 정'을 충분히 보인 사형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사형수가 죄를 참회하였다 해도, 이는 그가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일 뿐,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참회가 유인되었다라는 공교로운 모순은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사형당하는 놈들은 자신이 잡히면 사형 판결을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러다고밖에는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자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이미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잡히고 나서 울고 불고 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피해자의 유족들이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라면? 그렇다면 그 처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진행되어야하는 것이죠?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는 아닐까요? 사형 직전 신부에게 고백 성사를 한 범죄자는 신부로부터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신'도 용서한 죄를, 피해자의 유족도 처벌을 원치않는 죄를 과연 (그 범죄와는 아무런 사적 연관이 없는) 다른 '인간'이 용서할 수 없다는 건 어떤 근거에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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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만으로도 이 소설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란 것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본 적도 없고, 그러하기에 위와 같은 질문들 또한 제 머리속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이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제가 진짜 이 소설을 읽으며 짜릿!했던 순간은 맨 위에 적혀있는 저의 의문, 즉 '사적 복수'에 대한 두 주인공, 난고와 준이치의 다음과 같은 독백을 들었을 때 였었습니다.

 

난고의 독백을 먼저 한 번 들어볼까요? : 만약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눈앞에 있었다는 나는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보복을 인정하면 사회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가 된다. 국가라는 제삼자가 형벌권을 발동시켜 대신 해 줘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복수심이 있고, 그 복수심이 이 세상을 떠난 타인애 대한 애정이며, 그리고 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한 사형(死形)을 포함한 응보형 사상은 용인되지 않을까.

 

난고가 교도관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예상되어질 수 있었던 결말이라 할 수도 있지요. 헌데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인 저)마저도 준이치에게는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나) 그의 실제 살해 장면은 사실 정당방위잖아!라 소리치고 싶었던 것이었었음에도 준이치의 입에서 나온 그의 독백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 제가 사무라 교스케를 죽인 행위는 죄일까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는 저는 구제 불능의 극악인일까요? …… 다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사형(私刑)을 허용해 버리면, 복수가 복수를 부르며 끝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대신 해줘야 하는 거죠. 

토요일의 저녁을 끝내 그 새벽까지 이끌어주었던 이 작품의 결말은 내심 불만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작가가 대놓고 '사적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를 써낼 수 없다는 현실을 충분히 감안한다하여도 '복수가 복수를 부르며 끝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라는 지극히 도덕 교과서의 문구스런 표현으로 저의 의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이 책을 다 읽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첫 이야기를 읽었더랬습니다. 동명의 영화가 여기저기의 책들에서 많이 언급되었었기에 그 원작 소설을 오래전부터 한 번 읽어보고 싶었거든요. 헌데 정작 그 영화의 이야기는 이 책에 실려있는 다른 이야기이고, 그저 제목과 몇 모티브만이 '라쇼몽'이란 단편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더군요. 어쨌든!!! 그 길지 않은 '라쇼몽'이란 소설은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혹은 저지르고자 마음 먹은 죄에 대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당성'에 관해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것을 말해주더군요. 그러고 나니 문득!!! <누가 죄 지었는가>의 스토리가 제 머리속에서 만들어졌던 겁니다. 영화는 분명 괴한의 침입으로 시작되지요. 그런데 만약, 그 괴한이 침실에서 자고 있던 부부에 의해 자신의 부모가 똑같이 살해당했었었고, 그 복수를 위해 들어선 것이었다면, 그러한 스토리의 프리퀄이 있다라는 것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렇다라면 김개똥을 향해 아낌없이 쳐댔었던 관객들의 박수는 다시 거둬들여져야 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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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죠"란 대답을 저 또한 하게 되었다라는 게, 이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렇게 '사적 복수'가 지닌 커다란 모순점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게 이 작품을 통해 제가 얻었던 가장 커다란 소득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어쩔 수 없지만 더 나은 논리를 알게되기이전까지는) 사형(私形)엔 반대하지만 사형(死形)제도에는 찬성할 수밖에 없다쯤이 저의 결론이랄까요?  '소설을 도대체 왜 읽는거지?'의 수준이었던 제가 요즘... 그 소설들을 통해 참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들... 그들이 쓴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는 무한한 가지들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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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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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감상을 적어내는 것에, 그 소설의 줄거리는 굳이 적지 않아도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더랬습니다. --- '상투적인 것'을 무척 싫어한다 말하는 한 젊은 여교수가 종교위원의 자격으로 남자 사형수를 만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어찌어찌하여 그 사형수는 그녀의 도움으로 아주 모범적인 갱생을 하게되고, 그렇게 그가 새 사람이 되자마자 존나 무정한 이 놈의 세상은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그간 미루어져왔던 사형집행선고를 내리고... - 네!!! 지나칠정도로 상투적이고 진부한, 하도 많이 여기저기서 보고들어 이젠 작가들도 짜증을 낼만도 한 뻔한 스토리의 소설이기에, 그 줄거리를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이 소설에 대한 저의 애정을 보여주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싶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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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자"... 뭔가 섬뜩한, 어쩌면 애처로운, 그런 말인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사실은 모두 '죽음을 앞둔 자'입니다. 다만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 뿐,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으니까요. 이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 뿐,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사실>은 기실 사형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의 '언젠가'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들의 '언젠가'는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다라는 게 우리와 다르다한다면 다를 뿐인 거겠죠. (전 사실 이게 '다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와 사형수의 차이가 무엇이냐?란 스스로의 질문을 막아낼만한 답이 없기에 '다르다'라고 쓸 수 밖에 없네요.) 이 알듯 말듯한 미묘한 차이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어내고 있습니다.  

 

그해 봄날에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와 나와의 만남은 언제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서로 괄호를 쳐놓고 우리는 만났지만 한 번도 그 괄호 속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무언가에 관해 그것을 제대로 알고있지 못한 사람에게 그 무언가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에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예로 들어보자면, "진화론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려할 때, 우선 다윈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해 간단히 알려준 후, 점차 쉬운 수준에서부터 그 진화론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알려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그 사람이 진화론에 대해 적게나마 알고 있는 잘못된 상식들을 하나하나 깨우쳐주면서 그 진화론에 대해 설명해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 그 첫 번째의 방법으로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어쩌면 그 두 번째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형제도에 관해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한 「13계단」이 끝까지 나름 논리적인 추론을 유지한 채 사형제도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예의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사형제도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형수가 죄를 참회하였다 해도, 이는 그가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일 뿐,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참회가 유인된 것"이란 무미건조하나 이성적인 「13계단」에서의 서술이, 이 작품에서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언제고 자기네들 죽는다니 무서운 모양이지. 자기네가 다른 사람 죽일 때는 안 무서웠는데 이제 자기네들 죽인다니까 무서워서 얼른 착해지나보지. …… 그렇다면 사형제는 참 좋은 거네. ……최고의 교화잖아?"와 같이 한 개인의 감정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지요.  .

 

상투적인 줄거리이기에, 그 '상투적'인 것을 싫어한다 말하는 주인공을 내세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 속에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당신도 그런 행동을 했었을지 모르잖아'라는 상투적인 가정법에, '그런 상황에 닥친 사람 모두가 다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않느냐'라는 또한 상투적일 수 밖에 없는 역공을 하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을만큼 소설은 이런 상투적인 가정과 결말의 테두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건 정말 부질없는 논쟁'이라는 도장을 찍어도 될 법한 <성선설 VS 성악설>의 이야기도 얼핏 스며들어 있지요. 거기에 더해 이 사형수는 사실 공범의 죄를 자기가 모두 뒤집어 쓰고 있는, 말하자면 이 사람이 지은 죄는 거의 없는 데도 사형수가 된거고, 두 주인공의 환경 또한 한 쪽은 '스스로가 외롭고 가엾고 고립된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만큼 너무도 많은 것들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쪽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사회에 대한 증오와 그에 대한 복수'만이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요.  

 

우범지대라는 거. 그게 가난한 동네를 말하는 거잖아. 부자 동네엔 경비들이 보초 서잖아. …… 그 경비 서는 사람들도 이런 데서 살 거 아냐? 그래서 그 사람들이 부자들 경비 서주는 동안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밤늦게 일하고 오는 지네 마누라, 딸들이 당하는 거잖아.

이런 예를 들며 사회의 부조리가 어쩌구하는 거, 처음 접했었을 적엔 적잖이 공감할 수 있었었거늘,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 처음 만났던 때의 공감조차 말라비틀어져 버린, '그들의 마누라와 딸들이 당하는 것'과 그의 직업이 '부자 동네의 경비'인 것과 연관되어야하는 이유는, 또한 그것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단 하나의 논리적 근거도 없다란 짜증 섞인 반론까지도 불러와주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진부, 상투적' 이런 단어들이 결코 아깝지 않은 이 소설 왜 읽었나, 했을 듯 하지요. 헌데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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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와 '틀리다'가 다른 말이라 말하는 건 이젠 초딩들도 알법한 말이 되었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있건만, 정작 그 비판의 대상이 내가 되어있을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둘의 차이를 혼동하고야 맙니다. '난 김태희보다 전지현이 더 이쁘던데?' 하는건 제 미적 취향을 말하는 것일 뿐, '김태희가 이쁘지않다'라 말하고 있는건 결코 아니지요. 「황제를 위하여」에 달아주신 이웃분들의 덧글을 보며 솔직히 많이 당황했었더랬습니다. 저 또한 이문열 작가의 정치적 행보가 적절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그것을 이유로 그의 작품까지도 그러한 판단의 범주안에 들어가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었기 때문이지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분리시킬 수 있느냐하시겠지만, 저 또한 그것이 가능할 것같지는 않네요라 답할 수밖엔 없지만...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다들 왜 이러는거야. 내 정치적 성향은 빨간색의 1번인데!!!'라는 답을 하고 싶은데, 왜 이문열 작가의 그런 행동이 그의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쳐야하는 건지 묻고 싶었는데!!! 라는 이유로 말이죠.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제 책장에 「고등어」란 책이 꽂혀있었던 걸 보면, 적어도 한 번은 작가 공지영을 작품을 통해 만났었었나봅니다. 허나, 작품 이외의 것들로 신문지상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들은 딱! 제가 싫어할 만한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더군요. 「13계단」을 그토록 인상깊게 읽지 않았었더라면, 그래 사형제도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더라면 여전히 그녀 작가 공지영은 저에게 그런 이미지로 남아있었을 겁니다. 어디선가 이 작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또한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보고는, 작가에 대한 불호를 떠나 우리나라 작가가 쓴 우리나라의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궁금해 이 소설을 읽게되었던거지요. '내가 이 소설을 읽긴하겠지만, 그래도 공지영은 여전히 싫어!' 막 이러면서, 나의 미적 취향이 단지 전지현의 외모에 더 끌리듯이, 나의 정치적 성향은 작가 공지영보다는 작가 이문열을 차라리 더 선호하겠다라 말을 하는건... 나의 미적 취향이 결코 김태희가 이쁘지않다라 말하는 것이 아니듯, 작가 공지영이 작가로서 형편없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건 아니니까!란 나름의 변명을 위한 안전장치까지를 모두 갖추어놓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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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 일 부분을 인용하여 작가는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 적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관점, 즉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의 의미에서만 「13계단」을 읽었었지요.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사형당하는 놈들은 자신이 잡히면 사형 판결을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밖에는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자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이미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잡히고 나서 울고 불고 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이지요.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13계단」에 나오는 위 문장은 단 하나의 단어에조차 반박할 수 없게 됩니다. 私刑에 대한 거의 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 '백번의 양보'를 통해 국가라는 제 3자가 피해자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것으로의 死刑이라는 것조차도 여전히 합리적이다.가 저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었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이 소설을 다 읽어내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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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을 만들어낸 게 진짜 사실인데 사람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실은 행위 전에 이미 행위의 의미가 생겨난 것인데. 내가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칼로 찔렀는데 하필이면 그의 목을 감고 있던 밧줄을 잘라서 그가 살아나온 경우와, 내가 어떤 사람의 목을 감고 있는 밧줄을 자르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목을 찔러버리는 거... 이건 너무나도 다른데, 앞의 사람은 상장을 받고 뒤의 사람은 처형을 당하겠죠. 세상은 행위만을 판단하니까요. 생각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도 없고 들여다볼 수도 없는 거니까, 죄와 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 타당한 것일까.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 내가 그 자식은 인간쓰레기니까,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 자식 목을 매달아 놓으면, 그건 살인이고, 그렇게 살인한 나를 데려다, 살인자라고 목을 매달면 그건 정의인가? 똑같이 인간이 인간을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똑같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데, …… 하나는 살인이 되고, 하나는 집행이 되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어 그 죄 값으로 죽고, 하나는 승진을 하는거... 그게 정의인가?

그다지 대단한 참신함이 들어있는 문장들도 아닐 것 같은데, 어디선가는 한두 번쯤 들어보았음직도 한 내용들일텐데, 위에서 심할 정도로 반복하여 썼었던 '상투적'이라는 단어를 위의 두 인용문들에 다시 한번 더 사용된다해도 큰 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이 두 인용문들을 읽게 되면서 「13계단」에서 인용된 바로 위의 인용문과 제 머릿속에서 뭔가가 막 충돌을 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죽여야한다라 말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만약 '행위 이전의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 '행위 이전의 진실'이란 것이 없을 수도 있고, 설혹 '결과로서의 행위'와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거지만, 그래서 그는 정말로 '죽어 마땅한' 사람인걸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정말 한 사람의 생명을 강제로 종료시킬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에 관해 작가 공지영이 '상투적'인 설정과 문장들을 통해 저에게 던져준 이 질문은 정말이지!!! 정치적 성향의 '다름'을 극복하고서라도 '작가로서의 공지영(만큼)은 괜한 허명이 아니었네'하는 고백을 아니할 수 없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소위 '작가의 문제의식'이라고 하나요? 최소한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 공지영의 그 문제의식은 사형제도의 근본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고, 작품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고 있다 (제가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말하고 싶네요. 

 

뭔가... 좀 더 멋있고(?), 뭔가... 좀 더 체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고 싶었었는데... 잘 안되네요. 지극히 '상투적'인 말로 마무리를 할 수 밖엔... --;;  

 

생각할 꺼리들을 한 무더기 던져내주는 이 소설...은 심지어 상투적인 설정을 읽어가면서도, 내가 이 상투적인 설정을 읽고 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또 다시!!! 끝내 마음속에서 울컥한 슬픔이 올라오게 만들어줍니다. 사형제도에 관심이 없는 당신에게라면, 이 소설을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하겠습니다. 사랑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는 당신이라면, 이 소설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자신을 불행하다 생각하고 있는 한 가여운 여인에 관한 이야기'라 다소 막연한 소개라도 하고 싶네요. 

 

 

 

이 소설은... 그 어떠.한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된다하여도 그 모든 것을 다 훌륭하게 보상해줄 수 있는 작품.일 것이기에 말이죠.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 모니카 수녀님의 말씀 중

 

 

  

 

★ More "Food for Thought"  

 - 다카노 가즈아키 作,13계단: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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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추정 시각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예전 언젠가... 고등학교 선배였던지 아니면 어떤 관계였었든 최소한 일면식정도는 뛰어넘었던 사이였었을, 제 앞에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어느 변호사에게, '이거 정말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라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만일 당신의 의뢰인이 유죄라는 생각이 변론을 준비하는 과정에 자신에게마저 들게 되었다라거나, 더 심하게는 이 사람은 유죄인걸 처음부터 알았고 어찌해서든 형량을 낮춰만 달라는 것이 목적인 상황, 더 극단적으로 가선 당신의 의뢰인이 그야말로 비도덕의 화신격쯤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엔... 어떤 심정으로 변호를 하게 되나요? 상황의 변화가 심경의 변화를 불러오고 그로인해 변호를 중단할 수도 있나요?' --- 안타깝게도... 이 질문을 했던 상대가 누구였던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의 그 질문에 대한 변호사의 대답 또한 저의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 (혹시... 이 글 읽고 있는 당신이 변호사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가족이 겪어야하는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새로움이었으며,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에서는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 즉 사적 복수가 지니는 더 큰 위험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었고...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서는 사형제도 자체에 대한 정당성에의 의문을 가져도 보게 되었었지요. 

 

이 책 「사망 추정시각」의 작가 '사쿠 다쓰키'는 작가의 필명으로서 그/그녀는 '일본 법조계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저명한 형사변호사'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합니다. 네... 이 책은 현직 변호사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일본 사법체계에 대한 비판을, 그리고 핵심적으로는 역시.나 사형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는 책입니다. 문득, '내가 굳이 이렇게 사형제도에 관해 궁금해하거나, 찬반에 대한 명확한 나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더랬습니다만...  

 

자신 있게 사형 제도를 지지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할 마음도 없는 그저 침묵하는 다수 중 한 사람이었던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사형이라는 제도가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 얼마만큼 도움을 줄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형은 국가의 힘을 빌려 피해자의 '복수심'을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제도에 불과할 뿐, 혹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은 아닐까? 폭력을 응징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혹시 우리는 묵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는 다수의 편에 서 있다. '사형','누명','거짓 자백'과 같은 단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어떠한 사안이든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바꾸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방법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 <옮긴이의 글> 중

책의 마지막에 있는 <옮긴이의 글>, 그 중에서도 또 거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위 인용한 글을 읽으며, 이 재미있고 진지한 책을 읽어야했던 이유를 저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경제학을 오랫동안 배워서일까요? 아님 지금도 어쨌든 '장사'란 걸 하고 있어서일까요? 이떤 한 주제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읽게되노라면 도대체 왜?의 이유를 종종 (거의 무의식적으로) 떠올려보곤 하게만 됩니다. 진화론? 기독교인으로서의 호기심 때문에, 역사? 현재의 모습이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와 같이 되어있는가를 알고 싶어서... 완 달리 사형제도? 글쎄... 뭐... 의 단계에 아직은 머물러 있던 저에게 이 책을 옮긴이는 그것이 어쩌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바꾸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라 말해줍니다. '그래! 사형제도에 관한 책을 좀 더 읽어보는거야!' 가 되어버린 바로 그 장면...

 

………………………

 

엄청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와타나베 쓰네조. 그는 자신과 스무 살 차이가 나는(설마 연상일리야... ^^;;) 두번째 부인인 미키코와의 사이에서 난 딸 미카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아끼지않으며 무한에 가까운 사랑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입니다만, 돈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의 딸 미카가 유괴되었고, 유괴범은 현금 1억엔을 요구합니다. 쓰네조는 단 반나절만에 현금 (그것도 구권만으로!!!) 1억엔을 마련했고, 그 돈을 그저 유괴범을 유인하는 미끼로만 사용하려는 경찰의 의도와는 달리 실제로 그 돈을 범인에게 주고 딸 미카를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요. 경찰의 예상대로 범인은 접선 장소를 몇 번씩 바꿔가다 결정적 지점에서 돈을 받으려 했으나 경찰의 작전은 그 돈을 범인에게 건네어지는 것을 끝내 허용하지 않습니다. 결국 미카는 실종 이틀후, 사체로 발견되었고 미카의 아버지 쓰네조는 경찰의 잘못된 작전이 자신의 딸을 죽인 것이라 생각하게 되지요. 

 

'사망 추정시각'이란 책의 제목은 바로 이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즉, 미카의 사망시각이 돈을 건네려던 장면의 이전이었느냐, 아님 이후였느냐... 만약 그 이전에 미카가 이미 살해되어있었다라면 (범인에게 돈을 건네주지 않으려했던) 경찰의 작전은 미카 부모의 비난을 벗어날 수 있게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범인이 돈을 건네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짜 미카를 죽인 것이라면 '실제로 범인에게 1억 엔을 주려했었던' 쓰네조가 그 돈을 건네주지 못하게 했던 경찰을 뭐라 비난하던 그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게 되는거니깐요.

 

● 경찰 입장에서 볼 때 몸값 수수는 범인 체포를 위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경찰은 당연히 부정하겠지만. 체포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때, 1억 엔을 투하하라는 지령을 내릴 경찰 간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건 경찰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몸값이 목적인 유괴범의 체포율은 97.3퍼센트나 된다. 몸값 수수를 최대한 미루며 장소는 몇 번이나 지정하게 만드는 것은, 통화를 할 때마다 범인에 대한 정보를 늘림과 동시에 장소를 한 차례 지정할 때마다 경찰이 체포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단 한 차례의 장소 지정으로 몸값을 투하한다는 것은 경찰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대응이다. ……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런 경찰이 상식이 부정당했다.

 

●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건가! 나는 1억엔을 범인한테 줄 생각으로 내줬어. 그런데 누구 허락을 받고 도로 가지고 온 건가! 내 돈이고, 내 딸이야. 당신들은 내 딸의 목숨보다 체포가 더 중요한가! 경찰 성적이 더 중요하냔 말이야. 이제 미카를 어쩔 셈이야! - <경찰 본부장 모리타에게 퍼부은 와타나베 쓰네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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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않아 경찰은 고바야시 쇼지라는 단순 절도 전과 3범의 별 볼일 없는 백수 청년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쇼지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다 보여주었었습니다. '산에 두릅나물을 캐러 갔던 쇼지는 산 속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발견하게 되고, 그 가방 속에 있던 지갑에서 돈 몇천 엔을 꺼냅니다. 그리고나서 주위를 둘러보다 좀 떨어진 곳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고, 다가가 살았나죽었나 보려고 다리를 만져보았고, 얼굴에 덮혀있던 옷을 들춰보니 그것이 사람의 시체였었고, 그 시체는 다름아닌, 얼마 전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다 쫒겨난 골프장 사장인 쓰네조의 딸 미카라는 걸 알고는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친 것'이 전부인... 이 상황이 결국 쇼지가 미카를 살해한 범인으로 재판정에 서게 되고 1심에서 사형판결을 받게되는 과정을 소설은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 '사망 추정시각'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이 책의 저자가 현직 변호사, 그것도 형사전문 변호사라는 점은, 그러니까 작가가 전문적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작가가 이 이야기를 소설의 형태로 써내긴 했으나, 아주 많은 부분에서 흡사 '실례로 공부하는 형사법 개론'을 떠오르게 만드는 듯한 내용들을 통해 금새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경제학 교수가 쓴  소설 「아담스미스 구하기」에서도 똑같이 보여졌던 것이기도 하지요)

 

 '접견금지'는 재판관의 결정이 필요한 사항이다. 고바야시 쇼지의 경우는 그로부터 3일 후 재판소에서 '구류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때 재판소가 '구류결정'을 내리면 그 시점부터 접견금지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때는 아직 접견이 금지된 상태는 아니었다. …… 하지만 그런 걸 이 여자가 알 턱이 없었다. 면회를 할 수 없다고 하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쇼지를 찾아와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쇼지 어머니에게 경찰이 면회를 불허하는 장면>

 

● 옷에서는 지문이 검출되지 않는다. 지문은 손바닥이나 손가락의 땀샘에서 분비되는 땀과 오물이 섞인 것이 지분의 융기 부분에 의해 부착되어 생긴다. 접촉한 대상물이 평평하고 매끄러운 물건이라면 잘 부착되지만, 표면이 불균형할수록 부착이 어려워 지문의 동일성을 판정할 수 없다. …… 그러나 일반인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지문은 어떤 물건에라도 묻을 수 있고, 또 채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리작가 중에도 옷에 묻은 지문 때문에 범인이 검거되는 이야기를 쓴 사람도 있을 정도다. - <사체의 옷에서 쇼지의 지문이 발견되었다라고 떠본 형사의 질문에 쇼지의 눈이 흔들리는 장면> 

능력은 있었었으나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돈과 정의를 바꾸는 일을 밥먹듯 하던 형사가/변호사가/(심지어) 조폭 깡패가!!!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정의의 화신이 되었고, 그간 완전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그의 능력이 다시 무한폭발하여 불가능할 것 같던 정의의 구현을 해내고 만다는 식의... "슈퍼맨 리턴즈"라 불리울 만한 스토리를 우리는 어디에서였든가 한두 번은 접해보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자신의 무고함을 그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쇼지에게 드디어 그 '슈퍼맨'이 나타납니다. (다시 한번) 어디에서였었든 볼품없고 능력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의욕마저도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는 그... 이름하여 '국선 변호사'가 바로 쇼지의 '돌아온 슈퍼맨'이었죠. 1심 재판기록을 살펴본 후 가지게 된 몇 가지의 의문때문에 시작된 이 국선 변호사 가와이 도모아키는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가는 도중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그를 마치 자신이 쇼지(의 가족)인 듯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해 쇼지의 무죄를 밝혀어야겠다라 결심하게 됩니다.  

 

"이건 저의.... 뭐랄까, 오기 같은 것입니다. …… 이런 불합리한 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없애고도 태연한 사람들, 그런 세상이랄까, 사법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한 제 오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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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으로 끝맺음 되는 소설은 아닙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가 등장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  (날카로운독자라면 이미 소설의 중반부에서 눈치챌 수도 있을) 범인을 밝혀주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온당하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요. 소설 속 변호사인 가와이의 말 "피고인의 생명이 걸린 사형사건의 변호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직업이다"로 이 책의 무게감을 대신할 수도, "'숨 쉴 틈 없는 박력으로 이 두께를 끝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역작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어쩐지 상투적이기도 하고 무슨 광고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말이 딱 어울릴만한 책이 바로 이 책"라는 해설자의 말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읽는 재미를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론 「13계단」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어 (제가 아는 한 '제가 아는' 그 누구도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없슴에도) 사형제도라는 것에 대해 더 많은 관심,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이란 사전적 의미로서의 단순한 관심이 아닌, 정말 좀 심각한 의미로서의 '관심'을 만들어준 책.이라 이 책을 소개하고 싶네요. 

 

………………………

 

<뫼비우스의 띠>라는 작가 조세희의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꼽추인 한 사람, 그리고 앉은뱅이인 또 한 사람. 이 둘의 집은 철거대상지였고 예정대로 철거가 되었지요. 헌데 철거되기 전, 자신들로부터 그 집에 대한 딱지를 사간 악덕 부동산업자가 그 딱지로 자신들이 받은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라는 걸 알게 된 꼽추와 앉은뱅이는 서로(의 신체적 결함을)를 도와 그 부동산업자를 결국 죽여버립니다. 사적복수에 대해 여전히 찬성하는 얼마전까지의 (또한 <뫼비우스의 띠>를 읽었던 당시의)저였다라면 위의 이야기에는 별 문제가 없다했었을꺼에요. 누가봐도 그 부동산업자는 나쁜 사람이었고,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약자인 꼽추와 앉은뱅이는 결국 부동산업자에게 입은 손해를 보상받았을 뿐 아니라 복수까지 완료한... 나름 해피엔딩의 스토리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라 다시 <뫼비우스의 띠>를 읽어봤습니다. 다시... 찬찬히 보니 (다시 한번 더) 문득!!! 꼽추와 앉은뱅이가 부동산업자를 죽인 상황, 바로 그 시점 이후부터는... 이제 꼽추와 앉은뱅이는 그저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남게되는 게 아닌게 되더라는겁니다. 그 둘도 엄연히 살해당한 피해자가 존재하게되는 '살인'이란 죄를 저지를 '가해자/범죄자'가 되어버린 거지요. 작가 조세희는 아마도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굴뚝 청소한 두 아이'의 예화와 더불어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를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맞... 나는 자신 없. --;;) 

 

【C라는 상황을 만들어낸 원인인 A와 B】 

 

① 이게 정말 '이건 A, 저건 B' 이런 식의 구별이 가능하긴 한 거냐.

② 아니! A나 B라는 특정 원인을 진짜 꼬집어낼 수나 있겠냐.

③ 더 헷갈리게는 C가 결론이 맞기는 한거냐, 혹 A와 C 또는 B와 C가 원인이고 B/A는 결론인거 아니냐.  

이 소설 「사망 추정시각」에서는 이 비슷한 상황을 '꼬아놓은 새끼줄'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말이 아닐까도 싶은 이 '인생의 화와 복은 마치 꼬아놓은 새끼줄 같다'... 에 대한 소설속 어느 노 법률가의 소회를 이 감상문의 마지막으로 적어봅니다. 이 책... 어쩌면 당시 일본 사법고시 준비생들엔 필독의 참고서가 아니었을까, 더 나가선 범죄를 계획하고 있던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보석같은 지침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더랬네요. 마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만약 작정하고 진짜로 살인사건을 계획해본다면?'같은 얼토당토않은 상상처럼... ^^;;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 원죄(억울한 누명을 쓴 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얽히고설켜, 그것이 어떨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거... 그걸 항상 통감해."

 

 
 

- 마쓰키 기요시의 말 중 

 

 

 

 

★ More "Food for Thought"  

 

 - 다카노 가즈아키 作,13계단: '私刑을 대신하는 제도로서의 死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 공지영 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사형이란 형벌은 정말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감성적 질문.  

 - 히가시노 게이고 作,편지: 살인범의 가족에게 살인죄가 지어주는 또 다른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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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란 말이 있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빨리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는 방법은 파발마나 봉화를 통해 건네진 후 방을 붙이거나 알음알음으로 인해 전달되는 구전이었을 것이다. 이 중 방의 경우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지만 당시 상당수 여성, 평민, 노비 계층은 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국민 전체의 생활양상에서 구전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이런 설명이 곁들어 있더군요. 이를 두고 '부즈 마케팅'이란 용어도 있나봅니다. 예전 TV프로그램에도 맨 처음 사람이 글자로 본 단어를 행동만으로 다음 사람에게 설명하고... 그렇게 대여섯 명만 건너가고 나면 완전히 다른 단어가 답으로 등장하곤 하는 걸 보여주는 게 있었었지요. '발없는 말'이 천리만 가는게 아니라, 천리 만리를 가고 나면 몸에 날개까지 돋아있게되는, '구전'의 위력(?)을 쉽게 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하지만 매우 전형적인 실례가 될 수 있을겁니다. 

 

구전, 부즈마케팅, 바이럴 마케팅, 혹은 이 책에서처럼 WOM(Word of Mouth) 등 그것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우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소문>이란 한 단어로 바꾸어도 별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한 성인남자의 여생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도 있었던 실제의 예를 한번 볼까요? (이 기사를 보고 해당 부분만 카피를 해놓았었기에, 아쉽지만 어느 날짜에 어느 신문에 실려있던 기사인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

 

오씨는 지난해 11월 학교 계단을 올라가면서 앞서가던 이모(13)양과 친구들을 앞질러 갔다. 이양은 오씨가 이 과정에서 자신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졌다고 주장하며 그를 고소했다. 이양은 또 오씨가 이전에도 브래지어 끈 부분을 쓰다듬는 등 여러 명의 학생을 상습적으로 추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양의 친구들 역시 수사과정에서 성추행 장면을 직접 봤다고 진술했고, 오씨는 결국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목격자로 지목된 이양의 친구들은 법정에서 "이양에게 추행 사실을 전해 듣고 진술한 것일 뿐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재판부는 "사건이 점심시간에 사람이 붐비는 식당 부근에서 발생했고, 목격자들이 진술을 번복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오씨가 피해자들을 지나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신체접촉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오씨에게 추행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이런 의도하지 않았던 신체접촉이 여학생들 사이에 대화를 통해 의도적이고 상습적인 추행이 있었던 것처럼 확대 재생산됐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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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이야기 들었니?"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소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 시장에 첫 진출을 앞둔 향수 브랜드 '뮈리엘'은 자신들의 주 타겟인 (좀 노는) 여고생들을 상대로 WOM 마케팅을 하기로 하고는, 제품 설명회에 참석한 서른 세명의 모니터 요원들 (모두 좀 노는 여고생들)에게 '이것도 들은 이야기인데, 얼마 전 뉴욕 공원에 강간범이 출몰한 일이 있대요. 맑은 날에도 시커먼 레인코트를 입고서 십대 아이들만 노린다더군요. 수법도 아주 잔혹해서 도망치지 모하게 여자애의 발목을 잘라버린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뮈리엘 향수를 뿌린 아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죠. 그래서 뉴욕에 사는 여자애들은 모두 뮈리엘 로즈를 쓴다고. ……  (우리나라의 바바리맨과 같은)레인맨이 얼마 전 일본으로 왔다네요.'라는 내용을, 오직 서른 세명의 여고생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만, 이는 곧 마케팅 회사의 예상대로 강력한 날개를 단 소문이 되어 세포분열이 반복되듯 각종 버젼의 각색을 만들어내며 삽시간에 (좀 놀든, 많이 놀든, 아예 안 놀든 그 모든)여고생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지요. (여기서 제가 '좀 노는"이라 쓴 표현을 소설 속 등장인물인 고구레 형사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어른이 되어버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아이들'이라고 아주 멋지게 표현하고 있더군요. 이런 표현력...은 언제쯤 겟!할 수 있을지. --;;) 

 

우리도 그러하듯, 이런 소문에의 첫 반응들은 거의 모두 '거짓말, 그럴 리가'였지만 발없는 말에 점점 날개가 달리기까지 하는 그 과정을 지나다보면 어느 학교 누가 그렇게 당했고, 어느 학교 누구는 뮈리엘 향수덕분에 살아났다라는 둥의 각색을 거쳐 그 소문은 점점 '진실'인양 믿어지게 되지요. 이는 단지 동양권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만, 또는 특정 내용에 관해서만 이러한 위력이 발휘되는 건 아닙니다. (약간은 다른 쪽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 또한 '소문의 위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써놓고도 있지요. 

 

기적적인 이야기는 보통 목격자에게서 직접 듣지 못한다. 우리에게 말해준 사람은 다른 이에게 들었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들었고, 그는 또 다른 이의 아내의 친구의 사촌에게 들었고. …… 어떤 이야기든 충분히 많은 사람을 거치면 왜곡되기 마련이다. 애초의 이야기는 워낙 오래전에 시작된 소문인데다가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하도 왜곡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낸 실제 사건이 무엇인지 (실제 사건이 있기는 있었는지) 짐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소문이 충분히 오래되면, 이제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전통'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더 굳게 믿는다.

- 리처드 도킨스 著,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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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충분히 오래되면, 이제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전통'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더 굳게 믿는다"는 도킨스의 말은 정말일까요? 어느 날, 정말로 두 발목이 잘려진 채로 버려진 여고생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한 명뿐이 아니에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세 번째의 희생자까지가 발견됩니다. 예의 모두 두 발목이 잘린채였죠. 소설은 희생자들과 똑같은 나이대의 딸을 둔 형사 고구레와 경시청에서 파견나온 여형사 나지마, 이 둘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감히 독자가 그의 추리과정에 개입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만큼 정교합니다만, 이 소설은 정말 평범하게 진행이 되지요. 이런 평범한 서술과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붙잡아 놓고마는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그 능력이 그저 놀라울 뿐인.

 

'소문'의 위력은 이처럼 살인 사건의 결과만을 내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혹시 용의자가 누구라는 정보가 한 번 흘러나가면 탐문수사는 엉망이 된다. 만나는 사람들이 예단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불확실한 소문이 어느 틈엔가 확신으로 바뀌고, 검은 까마귀가 흰 까마귀로 변하고 만다'라 표현되었듯, 이웃들로부터 소외되었거나 기분 나쁘게 여기는 주민은 바로 범인으로 취급되어 버리고, 행여라도 그런 사람들을 경찰이 방문하면 소문은 부풀어 곧 체포될 거라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하는 등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13계단」에서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추리 소설의 형태를 빌어 '사형 제도'에 담겨 있는 각종 모순과 의문들을 독자들에게 생각해보도록 해주었듯, 이 작품도 뒷담화 수준에서부터 WOM이란 정식 용어의 형태까지를 띠고 있는 '소문'이란 사회 현상에 대해 최소한 이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바라고 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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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자체가 심히 꼬여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건의 해결과정이 딱히 난해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추리 소설 좀 읽어본 분이라면 나름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소설에 등장하는 두 형사들보다 더 먼저 얼핏 알아챌 수도 있지요. 헌데... 재미있어요. 그것도 너무너무!!! 사실 스토리 자체에는 별 반전이 없습니다. 예상되었던 범인이 예상대로 잡혔고, 단지 그의 살해 동기가 한국적 정서에선 좀 독특했다랄까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반전에 이르는 마지막 한 문장의 충격. 상상도 못한 결말에 보기 좋게 배반당하는 묘미> 

 

책의 표지에는 여전히(?) '놀라운 반전'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옮긴이도 또한 "이 작품은 맨 마지막 한 줄을 향해 달려와 마지막 한 마디 대사로 완성된다"라 말하고 있지요. 일본의 고딩들도 요즘의 우리나라 중고딩들 마냥 말을 줄여서 하는 모습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고구레 형사의 딸인 나쓰미가 자신이 만들었는데, 아무도 써주질 않는다라 했던 '기나오싹'이란 은어가 등장합니다. '기분 나쁘고 게다가 오싹하다'는 문장을 줄인 것인데, 아무도 써주질 않는다는 형사 딸의 푸념관 달리 은근 제 입엔 착착 달라붙더군요. 네!!! 이 '기나오싹'이 바로 그 '놀라운 반전'입니다. 추리소설의 반전을 이렇게 미리 말하면 어떡하느냐고요? 두 소녀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책의 마지막 장, 그 대화들을 체크하면서, 그러니까 화자 A와 B를 구분해가며 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되지 않을 반전이고 배반입니다. 즉... 이 책을 모두 다 읽지 않는 한 도대체 이게 왜 반전이고 배반의 묘미인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거죠.

 

책의 마지막 문장,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는 그 문장이 뜻하는 바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야 마는 소설 「소문」. 적지않은 이런저런 생각할 꺼리들(ex.가족이란? 세대간의 소통? 성공의 의미? 등등등)을 담고도 있는 이 소설... 그야말로 기나오싹!!!

 

아 참! 게다가 소설의 본문은 444 페이지에서 끝이 나는데 이도 웬지 기나오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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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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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이 아주 중요한 날, 그러니까 내가 죽은 첫째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호민의 「신과 함께 : 저승편」과 매우 흡사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시작'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호민의 상상과는 또 다른 어떠한 '죽음의 끝'을 보여주게 될까요? 또한 책의 겉표지에 나와있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영원한 인연을 다시 찾은 7일간의 이야기", 글쎄요... '영원한 인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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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양페이는 그의 친모가 예정일을 20여일 앞두고 달리는 기차의 화장실에서 낳게 된 남자입니다. 그곳은... 웬지 여전히 지금도 중국 어느 곳을 달리고 있을듯한, 그저 아래 구멍이 철로로 곧장 뚫려져 있는 화장실이었었고, 그녀의 배가 아팠던 이유는 다름아닌 양페이가 세상 빛을 보려했었기 때문이었던거죠. 그렇게 그의 친모는 그것이 출산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역에 정차했던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그 화장실에서 힘을 주어 버렸고... 

 

바로 그렇게, 기차 한 대가 지나간 뒤 다른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내게 아버지가 생겼다. 며칠 뒤에는 양페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아버지의 이름은 진뱌오였다.

그렇게... 주인공 양페이는 피라곤 단 한방울도 섞여있지 않은, 철도 선로원인 양아버지와 친절한 옆집 부부의 도움에 의해 길러지게 됩니다. 소설은 이전에 읽었었던 위화의 작품 「허삼관 매혈기」에서와 같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 어떠한 수사적 기교의 표현 없이도 그렇게 읽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웃음을 짓게도, 또 때로는 가슴 아파 하게도 할 것임을 이처럼 길지 않은 위 세 문장에 담긴 그의 출생 이야기로부터 미리 알려주고 있지요.   

 

아버지가 스물한 살 때 갑자기 아버지 삶으로 뛰어든 나는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땅히 누려야 했던 행복은 아버지 삶에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 나의 어린 시절은 웃음소리처럼 마냥 즐거워, 나는 내가 아버지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철로 위로 떨어진 뒤 아버지의 인생길은 순식간에 좁아졌다. 결혼은 커녕 여자 친구도 사귈 수가 없었다.

비록 배운 것이 많지 않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양아버지 진뱌오이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철로위에서 얻은 양아들 양페이를 길러냅니다. 옆 집 부부인 리 아주머니와 하오 아저씨의 도움도 그의 성장에 커다란 도움이 되어주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양페이를 길러준, 하지만 이젠 림프암에 걸려 자신의 일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양아버지 진뱌오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양페이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그의 곁을 홀연히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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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해 '난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너무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자신이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눈을 떠 내일 하루도 살아가야/살아내야 하며, 그러한 행위는 그 끝을 상상할 수 없을 때까지 무조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 또한 몇이나 될까요? 직전에 읽었던 이광수의 「무정」에 나왔던 하숙집 노파를 향한 형식의 독백처럼 우리는 어쨌든, 어떤 이유에서든, 심지어 이유를 알 수 조차 없다해도 살아.는 가야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는 무엇하러 세상에 났으며 세상에 나서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낙을 보았는고. 그렇지마는 그 노파는 아직도 살아간다. 병이 나면 약을 먹고 겨울이 되면 솜옷을 입어 가면서 아직도 죽을 생각은 아니 하는 것 같다. 내일이나 내년에 무슨 새로운 낙이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마는 그는 밤이 새고 아침이 되면 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수의 등장 인물들의 현실, 즉 살아 있었을 때의 삶은 거의 대부분 살아가는 낙도 없는, 심지어 '내일이나 내년에 무슨 새로운 낙이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마는' 그렇게 그저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 고단한 삶이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어서 죽어버리고 싶다'라거나하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지요. (비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명의 등장 인물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의 자살 역시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연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이승 때 삶이 얼마나 고달팠느냐는, 죽어서도 자신의 유체를 화장해주거나, 혹은 묻혀질 묘지조차 없는, 그리하여 죽어서조차도 '영원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도 표현되고 있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이 정녕 현재의 중국에서 씌여진 것이 맞을까?하는 의문을 저 스스로 가져보게 될 만큼 중국의 사회상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 소설의 전반적 특성인지, 아니면 작가 위화만의 독특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까지 읽어본 중국 소설은 위화의 것, 단 한 권이었기에) 작가는 읽는 이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것에서 뿐 아니라 이처럼 사회상을 비판적으로 기술함에 있어서도 그저 담담하게, 마치 「허삼관 매혈기」에서 사뭇 우습기까지도 한 표현으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기를 묘사했었듯, 별 꾸밈없이 평이한 문장으로, 허나 읽는 이의 마음은 결코 평안하지 않게되는 마법같은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아! 그 와중에도 작가의 유머는 잊지않고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선사되어지기도 하지요. 

 

아버지는 아이처럼 웃더니 아무래도 내가 기형아인 것 같다면, 몸에 꼬리가 나 있는데 심지어 앞쪽에 있다고 걱정했다. - 진뱌오가 철길에서 갓 태어난 양페이를 안고와 옆집 리 아주머니에게 젖을 물리고 난 후 (탯줄을 이해하지 못해)했다는 말.

 

"나중에 내가 아이폰 4S 사줄께", "밥 먹을 돈도 없는데, 네가 사 줄 때면 아이폰 40S가 나왔겠다." - 돈이 없어 밤업소에 나가겠다고 하는 류메이에게 남자친구인 우차오가 반대를 하자, 자신에게 밤업소를 소개해 준 후배는 새 아이폰이 나오면 항상 바꾼다고 류메이가 투덜대는 장면에서의 대화.

 

리 씨는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내 불알을 돌려달라'고 적힌 팻말을 든 채 공안국 대문 앞에 서 있었다. …… 어떤 사람이 팻말에 쓴 '불알'이라는 단어가 저속하다고 하자 그는 겸허하게 받아들여 '내 고환을 돌려달라'고 고친 다음 행인들에게 말했다. "점잖은 표현을 썼습니다". - 경찰인 장강의 발길질에 자신의 고환이 터졌다고 주장하는 전직 매춘업자 리 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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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위화 소설의 백미는 「허삼관 매혈기」에처럼, 예의 별다른 특별한 단어의 구사 없이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찡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그만의 표현이 담겨진 문장들이 있는게 아닐까 싶지요. 제가 '아빠를 너무너무 사랑해요'라 오늘 아침에도 말했었었던 아들을 가진 아버지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렇게 담담하게 써내려진 양아버지 진뱌오와 그의 아들 양페이, 부자간의 사랑은 이 소설의 다른 사랑들을 다 덮어버릴만큼의 감동을 전해줍니다.   

 

 

● "시간 나면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해라. 잘 지내는지 알려주렴. 내 걱정은 말고" …… 온갖 고생을 참고 견디며 (철로위에서 주워) 나를 길러낸 그 아버지를 나는 나도 모르게 플랫폼에 내버린 것이다. - 자신을 찾아온 친부모의 집으로 떠나는 날, 하오 아저씨에게 돈까지 빌려 양페이의 겨울옷을 사서 보내주는 아버지와의 이별장면

  

● 그렇게 새로운 집에서 27일을 보낸 뒤 기차를 타고 옛집으로 돌아왔다. …… 나는 떠났던 그대로 돌아왔다. "아버지, 저 왔어요." ……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가방을 들려 했지만 아버지의 왼팔이 강력하게 저지했다. 마치 내가 아직 아이라서 그렇게 큰 여행 가방은 들 수 없다는 듯이. …… 아버지는 나의 갑작스러운 귀향에도 무척 담담해 보였다. …… 나중에 하오 아저씨가, 그날 저녁 내가 잠든 다음 아버지가 찾아왔었다고,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과 아줌마에게 "양페이가 돌아왔어, 내 아들이 돌아왔어."라고 말했다고 알려주었다. 

 

● 침대에 누워 …… 내가 헤헤 웃자 아버지도 헤헤 웃었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조금도 두렵지 않단다. 내가 두려운 건 다시는 너를 못 보는 거야." 다음 날 나의 아버지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쪽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끌고 나를 떠나버렸다.

 

● 네 아버지가 오셨었단다. …… 기차를 타고 예전에 너를 버렸던 곳에 갔었대. …… 아버지는 아줌마에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 고른 호흡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중간에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면 걱정하며 손을 뻗어 내 얼굴과 목을 쓰다듬었다고, 내가 놀라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면 눈을 감고 잠든 척했노라고 말했다. 내가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몸을 더듬고 조심스럽게 당신의 팔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고도 했다. …… '왜 거기에 갔어요?' 아줌마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바위에 좀 앉아 쉬고 싶었거든요'

 

● 내가 힘들까 봐 걱정하신 거에요? 그래서 가셨죠? / 그냥 거기에 가보고 싶었어. 나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거길 가보고 싶었어. / 왜 거길 가야했는데요? / 마음이 아팠거든. 너를 버렸던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 아버지... 아버지는 날 버린 적이 없어요. / 그 바위를 찾아서 그 위에 잠깐 앉아 있고 싶었어. 늘 그곳에 가고 싶었지. 날이 어두워지면 거길 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날이 밝아 너를 보면 또 가게 되질 않더라. 널 떠나는게 싫어서. / 아버지, 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럼 모시고 갔을 텐데. / 너한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여러 번. / 그런데 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 모르겠구나. / 내가 속상할까 봐요? / 아니... 역시 혼자 가고 싶더라고. / 그래서 작별 인사도 없이 가셨군요. / 아니야, 저녁 기차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어. / 하지만 안 오셨잖아요. / 돌아갔어. (아버지는 죽은 다음에 돌아왔다) 가게 맞은편에 며칠을 서 있었는데 안에서 다른 사람이 나오더라. / 아버지를 찾으러 갔으니까요. / …… 여기서 매일 너를 그리워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정말 몰랐구나. / 아버지, 이제 또 함께에요.

  

나와 아버지는 영원한 이별 뒤에 다시 만났다. 이제 체온도 없고 숨결도 없지만 우리는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 아버지가 뼈만 남은 두 손에 낡은 하얀색 장갑을 낀 다음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텅 빈 아버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나보다 먼저 왔는데도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보낼 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아버지는 아줌마에게 …… 내가 보고 싶다고, 정말 너무 보고 싶다고, 멀리서라도 한 번 볼 수 있다면 만족할 거라고 말했다. …… (나를 찾아 빈의관까지 갔던 아버지는) …… 그곳에서 30년, 40년, 50년... 기다리기만 하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 나는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알았다. 빈의관 대기실에서 파란 옷에 하얀 장갑을 끼고 있던 사람, 얼굴에서 살이 사라지고 해골만 남은 사람, 목소리가 지치고 슬폈던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

 

 

마치... 여러 단편 소설들을 모아놓은 듯한 이 작품에게는 어쩌면 딱히 별다르게 특정지을 만한 스토리가 없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다 읽고 나니 문득, '왜 세상은 이처럼 우리에게 둘 중 반드시 하나만을 선택해야한다 강요하는 것일까'란 의문이 경제학을 공부했던 저에게 생기더군요. 그 선택은 '내 인생'이냐 '아이의 인생'이냐일수도, 또는 '사랑'이냐 '현실'이냐일수도, 그리고 심지어는 결국 어떠한 모습의 '삶'이냐 '죽음'이냐까지일수도 있음을 위화는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평등하지 않은 조건들이 모여있는 이승에서의 삶 속에서 살았어야 했던 자들이 결국 죽고 나서야, 비록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나마 비로소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는,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는' 평등함을 얻게된 저승에서의 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통해 '저승보다도 못한 (반드시 중국이란 특정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바로 당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잊지말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영원한 인연'이란게 어떠한 것인지... 가슴 저릿하게 느껴지네요. 그건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만은 아닐.

 

 

★ 위화의 다른 작품 :  허삼관 매혈기

★ More 'Food for Thought'  : 주호민 작, 「신과 함께 : 저승편」 - 저승 세계에 대한 우리나라 전래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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