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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ㅣ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였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를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었겠죠. 제 머릿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의문입니다. 이때의 '나'는 과연 죄를 지은 것인가라는 문제 말이죠.
미국은 '그'이고, 중동권의 몇몇 국가들은 어쩌면 '나'의 입장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겠더라구요. 이 책의 저자는... 이 경우 '나' 또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죄를 지은 것이다라 말하고 있더군요.
아주 흔할꺼 같은 복수 영화의 스토리를 한번 만들어보죠. 일단 이 영화의 제목은 제 마음대로 <누가 죄 지었는가>라 지어보겠습니다. : 이 영화는 한밤 중, 행복한 가정에 괴한이 침입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괴한의 침입을 감지한 부부는 급히 어린 아들인 김개똥을 침대 밑으로 숨겼으나 안타깝게도 그 부부는 괴한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당하게 되지요. 이 모든 과정을 침대밑에 숨어 숨죽이고 지켜보았던 어린 김개똥은 부모의 복수를 꿈꾸며(?) 자라나, 결국 통쾌한 방법으로 그 괴한들에게 처절한 최후를 맞게 해줍니다. 이 모든 과정을 스크린을 통해 본 관객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마음 속에서는 김개똥과 같이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이유가 없는)통쾌함을 느끼게도 되겠지요. 김개똥은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부모의 복수를 모두 마치고, '이제 법의 심판을 받겠다'라며 경찰에 자수를 합니다. 그러면 이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 개인의 비극적 성장과정을 그린 영화로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마지막에 사형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 흘리고 있는 주인공 김개똥의 모습으로 이 영화가 꼭 마무리되었어야 했느냐하며 진한 아쉬움을 안주삼을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세븐데이즈>라는 영화가 제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걸 몇 번 이야기한 기억이 나네요. 그 영화의 핵심은 바로 위와같은 '사적(私的) 복수'입니다.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사적 복수를 위해 '사법 체계'라는 합법적 응징 시스템을 이용해, 응징 대상자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도록 만듭니다. 이처럼 영화의 핵심이 '사적 복수'에 있기에, 그 과정으로서 다루어지는 '재판'이라는 공적 과정에 (법을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선"을 강제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수단이라 강하게 믿고 있는 저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목에 걸린 가시'같은 부분은 아니었지요.
이러한 '사적 복수'이외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궁금증 하나가 바로 「세계는 왜 싸우는가?」의 감상문에 달아주셨던 어느 이웃분의 댓글에 답했던 (위 박스에 있는) 저의 덧글로 표현되는 의문입니다.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였다.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 사실 이게 충동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대응이라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읽었었던)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하느냐'란 지문이 담고 있는 바, 즉 국가의 명령에 의해 내려진 처벌이 과연 피해자의 용서를 대신 할 수 있느냐에 관한 피해자의 저항(?)은 분명히, 그리고 충분히 인간의 본성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래서 나도 그를 죽였다"라는 사실이 오로지 비난의 대상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 차마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위에 있는 답글에서처럼 '그가 내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를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었을'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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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을 목전에 둔) 교도관(난고)과 이제 막 가석방된 살해범(준이치), 이 두 명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이제 사형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사형수(사카키바라)의 무고함을 풀어준다라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제외하고는, 제가 읽어 본 다른 일본작가의 첫 소설이기도 하구요. 제목에 쓰인 '13계단'은 단기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카키바라가 기억해 낸 '계단을 오르고 있던 장면'에서의 그 계단 층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본의 사형제도가 '13단계'의 결재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는 것에 더 큰 무게가 주어져 있는 듯 보입니다.
추리 소설이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예의 독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원한 관계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 충분히 생길 여지가 있는 의문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추리 소설로서의 이 작품은 예의 그 화려한 수상경력처럼 상당히 매력적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무엇보다!!! 사카키바라의 죄가 과연 억울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정당한 판결이었으냐의 결론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과연 사형이란 제도에 어떠한 문제점들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해보길 원하는 작가의 메세지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법률 체계가 똑같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일본의 사형제도와 그에 대한 (등장 인물들을 통해 표현되는) 작가의 시선을 제 주관대로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도 살인의 경우 피해자가 한 명이면 절대로 사형당할 일은 없습니다. 무기징역이 최고의 형벌이지요. 그런데 피해자가 세 명 이상이 되면 거의 틀림없이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작품에서처럼 피해자가 두 명인 경우인데, 이 때엔 사형이건 무기징역이건 그 어느 쪽의 판결이 나오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형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지만, 형을 내리는 자의 입장을 살펴보자면 '사람이 사람을 정의라는 이름하에 심판하려 할 때에 그 정의에 보편적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커다란 맹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 또한 재판관이 사형 판결을 피하는 첫 번째 이유로 '개전의 정'을 들 수 있는데, 우선 이 '개전의 정'이라는 것을 정녕 남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죄를 범한 인간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를 과연 겉으로 보아서만 알 수 있는 겁니까? 또한 형벌의 존재 이유로 범죄자에 대한 보복이라는 '응보형 사상'과 '범죄자를 교육·개화하여 사회적 위협을 제거한다는 '목적형 사상'이 있는데, ('개전의 정'을 판단하는 정당성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개전의 정'을 충분히 보인 사형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사형수가 죄를 참회하였다 해도, 이는 그가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일 뿐,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참회가 유인되었다라는 공교로운 모순은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 죄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벌은 사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사형당하는 놈들은 자신이 잡히면 사형 판결을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러다고밖에는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자들은 누군가를 죽인 단계에서 이미 스스로를 사형대로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잡히고 나서 울고 불고 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피해자의 유족들이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라면? 그렇다면 그 처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진행되어야하는 것이죠?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는 아닐까요? 사형 직전 신부에게 고백 성사를 한 범죄자는 신부로부터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신'도 용서한 죄를, 피해자의 유족도 처벌을 원치않는 죄를 과연 (그 범죄와는 아무런 사적 연관이 없는) 다른 '인간'이 용서할 수 없다는 건 어떤 근거에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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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만으로도 이 소설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란 것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본 적도 없고, 그러하기에 위와 같은 질문들 또한 제 머리속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이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제가 진짜 이 소설을 읽으며 짜릿!했던 순간은 맨 위에 적혀있는 저의 의문, 즉 '사적 복수'에 대한 두 주인공, 난고와 준이치의 다음과 같은 독백을 들었을 때 였었습니다.
난고의 독백을 먼저 한 번 들어볼까요? : 만약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범인이 눈앞에 있었다는 나는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적인 보복을 인정하면 사회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가 된다. 국가라는 제삼자가 형벌권을 발동시켜 대신 해 줘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복수심이 있고, 그 복수심이 이 세상을 떠난 타인애 대한 애정이며, 그리고 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한 사형(死形)을 포함한 응보형 사상은 용인되지 않을까.
난고가 교도관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예상되어질 수 있었던 결말이라 할 수도 있지요. 헌데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인 저)마저도 준이치에게는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나) 그의 실제 살해 장면은 사실 정당방위잖아!라 소리치고 싶었던 것이었었음에도 준이치의 입에서 나온 그의 독백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 제가 사무라 교스케를 죽인 행위는 죄일까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는 저는 구제 불능의 극악인일까요? …… 다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사형(私刑)을 허용해 버리면, 복수가 복수를 부르며 끝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대신 해줘야 하는 거죠.
토요일의 저녁을 끝내 그 새벽까지 이끌어주었던 이 작품의 결말은 내심 불만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작가가 대놓고 '사적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를 써낼 수 없다는 현실을 충분히 감안한다하여도 '복수가 복수를 부르며 끝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라는 지극히 도덕 교과서의 문구스런 표현으로 저의 의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이 책을 다 읽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첫 이야기를 읽었더랬습니다. 동명의 영화가 여기저기의 책들에서 많이 언급되었었기에 그 원작 소설을 오래전부터 한 번 읽어보고 싶었거든요. 헌데 정작 그 영화의 이야기는 이 책에 실려있는 다른 이야기이고, 그저 제목과 몇 모티브만이 '라쇼몽'이란 단편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더군요. 어쨌든!!! 그 길지 않은 '라쇼몽'이란 소설은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혹은 저지르고자 마음 먹은 죄에 대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당성'에 관해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것을 말해주더군요. 그러고 나니 문득!!! <누가 죄 지었는가>의 스토리가 제 머리속에서 만들어졌던 겁니다. 영화는 분명 괴한의 침입으로 시작되지요. 그런데 만약, 그 괴한이 침실에서 자고 있던 부부에 의해 자신의 부모가 똑같이 살해당했었었고, 그 복수를 위해 들어선 것이었다면, 그러한 스토리의 프리퀄이 있다라는 것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렇다라면 김개똥을 향해 아낌없이 쳐댔었던 관객들의 박수는 다시 거둬들여져야 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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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죠"란 대답을 저 또한 하게 되었다라는 게, 이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렇게 '사적 복수'가 지닌 커다란 모순점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게 이 작품을 통해 제가 얻었던 가장 커다란 소득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어쩔 수 없지만 더 나은 논리를 알게되기이전까지는) 사형(私形)엔 반대하지만 사형(死形)제도에는 찬성할 수밖에 없다쯤이 저의 결론이랄까요? '소설을 도대체 왜 읽는거지?'의 수준이었던 제가 요즘... 그 소설들을 통해 참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일본 작가들... 그들이 쓴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는 무한한 가지들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많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