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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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올해엔 반드시 OO권의 책을 읽고야 말겠어!'란 다짐을 하는 분들은 절대 집어들지 말아야 하는 책이지요. 두꺼운 데다가 진도도 잘 안나가거든요. --;; 헌데 이놈의 독서란게 말이죠... 하다보니 내가 모르는 것을 배우게 되는것일 수도,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일일 수도, 때로는 내가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나 현실과의 만남일 수도... 뭐 이렇게 참 여러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거더군요. 그 두껍고 진도도 잘나가지 않는 책은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라 생각하고 있었던 분야를 제대로 한번 배워보는 일이었기에 중간에 '그만 읽고싶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지만 암튼... 진이 좀 빠지긴 하네요. 그러던 그 와중에 잠쉬 쉬기위해(?) 집어들었던 책이 바로 「허삼관 매혈기」였었었고, 예의... 복잡복잡한 월-금을 보낸 후 좀 편안한 독서를 위한다며 집어든 또 한 권의 책이 또한 바로 이 「불편해도 괜찮아」였었었지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내 평생에 인연을 맺을 확률 거의 제로에 가까와보이는 기관에서 기획한 책, 게다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입에 올리지 않을까 싶은 '인권'이란 단어, 자의였건 타의였건 혹은 그 둘의 조합이었었건 어쨌든 태어나서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말해지는 소위 '주류'의 집단에서 이탈해본 기억이 거의 없는, 그렇게 자라나 이제는 그냥저냥 남들고 엇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쩌면 '주류'의 또 다른 이름일꺼라 자위하고 있는 '보통'의 중년남자인 저의 삶과는 딱히 관련이 없어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러한 이유로 책꽂이에 꽂혀 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었건만, 얼마전 있었었던 동성남성들의 결혼 기사를 보자라니 문득... 이젠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기위해선 '나'의 주변만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택도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어 드디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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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제노사이드" 등 아이를 키우고 있기에 '청소년 인권'정도만이 저의 삶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여타의 문제들은 예의 그 '주류'적 청춘을 살아왔고 지금은/지금도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의 삶에 있어 주요한 문제가 될 수 없어보이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허나 <새로운 불편을 느끼기 위해>란 제목의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전체를 통해 이러한 주제들이 충분히! 당신이 주류이건 주류가 아니건 당신의 삶에 주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라 말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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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듣도보도못한 법칙을 이야기하며 아이를 키우는 한 아빠로서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은 시작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죽기 전까지는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있다는 것이 바로 이 '지랄 총량의 법칙'이랍니다. 기가 막히게 멋진 법칙이죠? 일단 이 법칙을 마음 속에 진정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 아이의 지랄도 이제 그 양이 점점 줄어가는구나... 뭐 이렇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거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 늦바람 난 쪽인듯도 싶고, 종원군은... 아직 딱히 많은 '지랄'을 소비하지는 않은듯 해 약간의 긴장감도 들더군요. --;; 

 

"부모라는 '직업'에 필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지, 기대나 닦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며 저자는 이처럼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저와 똑같은 아빠의 입장에서부터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주는데요, 이렇게 '이미 나도 알고/겪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나와는 상관 없어왔던' 문제인 성소수자의 인권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드디어 이 책은 그 진정한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먼저 그들은 그저 우리와 '다를' 뿐이고, 또한 그렇게 우리와 다르기에 그 '다름'으로부터 우리가 불편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해줍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그 '다름'이 '우리'는 별 의심없이 또한 별 제재없이 누리고 있는 권리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그들을 경멸하고 무시할 근거가 되는 것이라는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다라 말하고 있지요. 심지어는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이 치료를 필요로 할 뿐, 권리의 주체는 결코 될 수 없다라는 주장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내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최소한 이해는 해야한다"라 말하며,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편함에 비해 이성애자 위주의 세상에 살면서 그동안 그들 동성애자들이 느껴왔을 불편함은 얼마나 컸었겠냐는, 정녕! 이제껏 제가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역발상의 사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이 씌여졌을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동성간의 결혼이란 것이 전혀 없었었지만, 이 책에 나와있는 몇몇의 예를 보고나니, 얼마전의 그 '특이한 결혼'에 대해 솔직히 말해 '역겨워!'라 했었던 저의 표현을 최소한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군'의 수준까지 꽤나 나름 진일보한 사고의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게 되더군요.

 

책은 우리의 곁에도 얼마든지 이런 '다른'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난 이제껏 동성애자를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이야기해본 적은 더더욱 없어'란 무의식적 사고가 상당히 취약한 것임을 말해주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의 숫자가 유의미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부적절할 수도 있는 것이... 십여년 전, 제가 우리 나라의 장애인 숫자를 보여주는 통계수치를 보고는 '이렇게나 많다구?'하는 의문을 가졌었던 이유가 결국엔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의 앞에 나설 수 있는 현실적인 상황도 아니었었고, 우리 앞에 나선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보아줄 비장애인인 우리들의 마음 자세 또한 갖춰있질 못했었기 때문이라는, 즉 '없는'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것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상당히 놀랐었던 그때의 제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그 똑같은 이유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현실엔 유의미한 수준의 동성애자가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그러하기에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라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무의식적 편견은 부부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데, 저자는 결혼 직후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그냥 '하면'되지 뭘 '도와주냐'는 핀잔을 들었었던 경험을 이야기해주기도, 또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거론하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그 범주에 들지 않으면 못생겼다고 차별하는 우리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꼬집고 있습니다. 

 

 

책은 이처럼 한 단원 단원마다 감탄을 절로 내뱉게 해주며 진행이 되는데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와 함께 장애인의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4장은 그야말로 제 굳은 사고를 한방에 깨어뜨려주는 오르가즘스런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주고야 맙니다. 전 이 영화를 보지않았습니다만,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는 여주인공 '공주'가 남주인공인 '홍종두'와 정상적인 모습이 되어 데이트를 하는 환상이 여러번 영화속에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아마도 감독은 공주가 꿈꾸는 삶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하나, 이런 환상은 오히려 공주의 외모가 지닌 '비정상성'과 환상 속의 공주가 보여주는 '정상성'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공주의 행복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라고 비판하고 있지요. 공주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정상이고,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감독이 보여주고 있는 환상 장면들은 그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이라면 이런 꿈을 꾸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란 예의 무의식적 편견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철저하게 남성적인 시선, 그리고 철저하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만든 장애인에 관한 영화라고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저도 유학 시절, 영화속 공주와 같이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는 한 형을 기숙사에서 만났었었지요. 그 형의 지나온 인생이야 정말로 드라마였었고, 그 형 뿐아니라 그의 부모님들의 헌신과 노력에 감동에 감동을 했었었습니다만, 그때 함께 했었던 우리 모두는 그저... (이렇게 말하면 좀 낯간지럽지만 --;;) 정말 서로를 대하듯 똑같이 그 형과 마주했었었지요. 손을 몹시 떨기에 그의 손에 쥐어진 술잔에서는 항상 술이 흘러넘쳤었지만, 그 장면에서 '거 참!!! 술 아깝게 왜 흘리고 그래요!'라 말해주었던 우리가 오히려 그런 자신의 손을 잡아 입까지 잔을 가져다 주는 '전형적인 친절'(?)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고마움이었단 말을 그 형으로부터 듣기도 했었었습니다만!!! 이 책의 4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 대한 저의 이제껏 생각들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었던 것이었던가를 반성문 수 십장은 족히 써내야 할듯하게 가르쳐주더군요. 

 

 

예전에 참으로 재미있게 보았었던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청준의 1985년 작품인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용서하느냐'란 지문이 담고 있는, 또한 그 지문이 지닌 함의로부터 파생되어지는 영화인 이창동 감독의 <밀양>, 그리고 매년 600여명 이상의 청춘들이 양심과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로 교도소에 가야하는 우리의 현실 등등등... 진부하나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만, 이 책의 이후 부분은 '이 책을 꼭 읽어야만이 풀리게 되는 궁금증' 으로 남겨두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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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한 머리의 전인권C가 나타나 '인권이 라이프~'라 외치는 그 인권이 아닌, 누구나 그처럼 쉽게들 말하지만 대부분 잠시라도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 '人權'. 저자는 이를 결국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개한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그리고 장애인의 인권에서도 앞서 태어난 자의 뒤에 태어난 자에 대해 가지는 오만이 아닌, 다수의 편에 속해있는 자의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의 편견이 아닌, 또한 좀 덜 불편한 자의 좀 더 불편한 자를 향한 값싼 동정이 아닌 '그들에게서 내가 받고 싶은 모습의 대접'을 그들을 향해 먼저 베풀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人權'임을 배울 수 있었던 너무도 뜻깊은 2013년 초가을에의 독서였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한 단어와 청소년들이나 쓸 법한 용어(?) 두 개를 합쳐 마지막으로 이 책을 소개하자면 이 책은 '단언컨데... 아닥!하고 무조건 만나보아야 할 책'이라 감히 적고 싶네요...     

 

 

 

 

 

★ More "Food for Thought"

- 장 지글러 著,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또한... 우리가 심각하게 인지하지 않으며 지내왔었던 지구 어느 쪽 아이들의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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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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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 사람들을 가난 속으로 밀어넣는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 몸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 늘 그저 피상적인 말로 수박 겉핡기만 하고 있을 뿐 입니다. 강남 사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서민들의 형편이 기사에 반영되기 어렵다고 비판하지만, 강북 사는 저라고 해서 약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이런 글을 쓰면서 저의 삶을 반성해보지만, 제 기반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가능성은 없지요.

- 김두식 著, 「불편해도 괜찮아」 중

별 커다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한 문구일지도 모릅니다만, 세상의 참 많은 오해는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나지 못함', 즉 타인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함, 아니 더 근본적으론 '알지(조차) 못함'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대통령 후보로 TV토론회에 나왔던 모 정치인이 옥탑방이 뭔지 아느냐는 패널의 질문에 옥탑방을 모른다라 대답해 구설수에 올랐었듯, 그의 일생에 시내버스란걸 도대체 타보기나 했었을까 싶은 모 국회의원이 시내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걍 '안타봐서 모르겠다'라 대답하면 될 것을 굳이 <자신이 자란 배경을 벗어난> 서민 코스프레를 하다가 두 번이나 X망신을 당하기도 했었죠. 이런 점에서만 보자면 위에서처럼 '(자신의 인식 수준이)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김두식이야말로 어쩌면 맨날 '민심'이니 '준엄한 국민의 심판' 어쩌구를 외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우리'와 가까운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싶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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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앉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말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비교적 정확한 상황인식과 그에 더한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는 김두식의 반성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일생에 있어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았던' 바버라 에런라이크라는 사회운동가는 비록 일정 기간동안이었지만 그 '가난의 현장'에 자신이 직접 뛰어들었고, 그 체험을 통해 위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라 쓰게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중산층 특유의 시각으로 이들이 주거 문제를 접하는 방식을 보고 있자니 돈을 불합리하게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알고보니)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아파트를 구할 때 지불해야 하는 한 달치 집세와 한 달 집세에 상응하는 보증금이 없으니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엄청난 방세를 내야 한다. 가전제품이라고는 끽해야 전열기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살아야 한다면 콩 스튜를 잔뜩 끓여 냉동시켜 놓고 일주일 동안 먹는다는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주로 패스트푸드나 핫도그 또는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수프 같은 걸 사 먹게 된다. 의료보험에 들 형편이 안되니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약도 구할 수 없고, 그러다 결국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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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이전, 그러니까 학생의 신분으로 꽤나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었을 당시 전 삼성이나 현대, LG의 소비자로만 살아왔었을 뿐 소위 말하는 그런 대기업들이 우리 사회에서 정녕 어떠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헌데 사회생활이란걸 해보니 말이죠, 대기업으로부터 나오는 하청의 사슬이 '협력업체'라는 곱디 고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얼마나 촘촘하게 우리 사회의 곳곳에 박혀 있는가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어지더군요. 경제학에서는 최말단 영세업체로부터 대기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사슬을 '부가가치의 증식과정'이라는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아주 간단하고 중립적인 말로 표현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랫쪽의 존재를 바탕으로 윗쪽의 화려함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함에도 윗쪽은 자신의 존재근거일 수도 있는 아랫쪽에 대한 관심을 아예 무시해버리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어렴풋하게나마 제 머릿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었을 즈음... 

 

절대 다수의 빈민들이 월마트나 웬디스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을 못마땅해하고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더 이상 옳지 않다면 어떤 관점이 바람직할까? ……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이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워킹 푸어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 익명의 기증자, 이름 없는 기부자가 되는 것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제 아무리 그러한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해도 죄책감도 모자라 '수치심'까지를 언급하고 있는 위의 글에 전적인 동의까지는 힘들었었습니다. 허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의 저자 류동민이 말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24시간 휴일도 없이 철야로 일하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비판하기에 앞서, 대형 마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영업방식을 택하도록 한 요인은 다름 아닌 더욱 싸고 편하게 장을 보려는 소비자의 욕구였으며, 역설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고 작업 조건이 좋지 못한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그처럼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마트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당신'이라면 여기서 당장 익스플로어 창 오른쪽 맨 위의 X를 클릭하셔야 할 겁니다. 이 다음부터의 이야기를 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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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누군가(A)가 저에게 당시 꽤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한마디를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강남에서 태어나고, 강남에서 초·중·고 나오고, 강남애들이 많이 가는 대학을 다니는, 여전히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OOO동이나 OO동 같은데엔 개나 소만 사는 줄 안다"라는, 상당히 자신감있는 어투로 해준 말이었지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가 말한 '강남'관 어떠한 연관도 없는 저이지만, 이러이러한 성장과정을 거쳐 지금은 일산이라는 신도시에 새로 생긴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저 또한 부지불식간에 OOO동 같은데서 불편해서 어떻게 살까?하는 정도의 마음속 의문을 단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었다라고는 말할 자신이 없는겁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끌고 있나 싶은가요?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되어 사놓았던건지조차 기억나지 않는1, 그저 재생종이로 만들어진 이 책의 감촉이 좋아 몇 번이고 꺼내들어 만지작만거렸었지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이 (가난한 것 같지는 않은) 저의 마음을 끌어당길 그 어떠한 유인도, 제가 이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을 가지게 될만한 그 어떠한 계기도 없었었건만,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읽었던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또 다른 생각들이 (사회적 소수자도 아닌 듯한 저에게)어찌어찌하여 예전에 읽었었던 「노동의 배신」을 다시 뒤적이게 해주었고,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오만없이 이 사회의 무게추에서 나와 반대편의 쪽에서 서 있어주어 지금 지탱하고 있는 이(나마의) 중심을(이라도) 잡아주고 있는 쪽의 이야기 또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않을까하는, A가 몇년 전 제게 해주었던 주장의 '역'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란 생각이 드디어 이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집어 들었던 이유였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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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의 발주로 시작된, '철거 재개발이 지역 주민에 미친 영향을 실증주의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정책 보고서'의 작성이 이 책의 시원입니다. 연구팀은 1986년 6월, 사당동 철거 재개발 예정 지역에 직접 방을 얻는 것을 시작으로 '철거를 앞둔 불량 주거 지역'에 대한 현장 연구에 들어갔지요. 사당동은 1965년 충무로와 명동을 비롯한 시내 몇 군데 불량 주거지의 철거민을 여기에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주거지로서, 저자 조은은 일반적으로는 '산동네' 또는 '달동네'라 불리웠던 당시 사당동 철거 재개발 현장 연구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불량 주거지'의 모습은 여전히 미국의 '슬럼'과 같은 이미지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1986년 당시 저자 조은은 40세였었으며, 교수로 임용된지 4년차였었음.)

 

재개발지로 선정되어서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동네였지만 온 동네가 일터 같은 느낌을 주는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네"였다. …… (하지만)그들의 가난은 집안에 들어섰을 때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 그때 처음으로 배운 단어가 '칼잠'이라는 단어였다. …… 칼잠이라는 단어는 그곳에서 연구를 하는 내내 매우 상징적인 단어로 남아 있었다. …… 이 칼잠이라는 단어가 처음에 너무 생소하고 신기해서 수업 시간에 연구 현장과 칼잠 이야기를 했다가 ……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라는 표정의 학생을 보게 되었다. 고개를 외로 꼰 그 학생의 눈빛에서 "제가 그런 데 살고 있단 말이에요"라는 무언의 음성을 보았다. 밑으로부터 사회학 하기의 출발점이었다.  …… (헌데) '그런 지역'을 연구하러 다니는데 교통시간과 택시비를 줄이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차를 사야 했다.

 

저자의 조교 두 명이 (연구 조사자의 신분은 감추고 그저 대학원생의 신분만2으로) 이 지역에 직접 세를 얻고 생활하며, 우선 지역주민들과의 거리 좁히기로 연구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손으로 기록된 지역 주민들과의 하루하루의 생활들이 이 연구의 기초 자료였었던 것이지요. 저자를 비롯한 연구팀은 허나 김두식의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앉은 사람들'의 범주에서도 벗어나려는 실천적 노력의 첫 단계에서부터 연구자와 계층이나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연구할 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 "집에서 찍은 가족 사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없다"고 답했다. 왜 없느냐는 우문에 "카메라가 없어서"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당시 카메라는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것으로 …… 자기 집 앞마당에서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 사당동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여학생 조교로 방을 얻어 살게 된 혜란 조교에게 어느 날 건너편 집에 사는 열 살짜리 아이가 놀러 와서 '언니 부자야?" 그러면서 "언니는 좋겠다. 어떻게 이렇게 큰 방을 혼자 쓸 수 있냐"고 했다.  …… 계급 계층별 언어사용의 차이도 생각보다 컸다. ……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우물우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학력 때문인가 했는데 자신있게 의견을 말하고 살아 본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언어의 계급적 차이(로 인해) …… 긴 인터뷰나 생애사를 화면에 잡았을 때 계층이 다른 청중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은 놀아야 된다"(라는 말이 담긴 영상물을) …… 처음에 녹취를 푼 대학생은 3개월로 이해(했었다) …… 이는 단순히 오청의 문제라기보다 삶의 경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에게 실직이라는 것은 그 단위가 3개월인데 빈곤층 청소년들에게 놀면 안 되는 날수는 사흘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이 연구는 1년이라는 애초의 계획된 기간을 넘겨 약 2년 반동안 진행되게되는데, 애초에 '1년 안에 철거가 예정되어져 있'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던 사당동의 철거가 계속 지연되어왔었기 때문이었지요. 어쨌든 2년 반 동안 진행되었던 사당동의 철거 과정을 지켜 보고 난 뒤, 연구의 관심은 강제 철거로 쫓겨난 가족들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래 22가구를 선정하여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사당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한 사당동에서의 살아온 이야기들, 그리고는 훗날엔 그 중 3대로 구성되어 있었던 '금선 할머니' 가족에 집중하여 넓게는 빈곤의 세대 재생산, 좁게는 '가난한 가족에게 주거공간이 제공되면 빈곤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지요. 당시 서민들의 주거지였던 산동네,달동네가 재개발 사업의 대상이 되면서 다수의 무주택 영세민의 주거 문제가 심각해지자 '영구 임대 아파트'라는 카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할머니의 가족이 당시의 사례 연구 가족들 중 유일하게 영구 임대 아파트를 얻은 가족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저자는 이렇게 시작되었었던 지난 25년간의 연구 기간 동안 이 가족을 따라다니면서 연구자라는 입장에서 그들과의 거리 조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지키기'가 쉽지 않은 과제였었노라 밝히고도 있습니다. 허나 이들이 25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연구를 진행해 오며, 참으로 여러 분야에서 '연구자로서의 이율 배반성'과 맞닥뜨리게 되었었는데, 그 중 다음의 두 가지에 정말로 커다란 유혹과 고민을 하여야 했었다라고, 과연 어떤 사회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낸 책에서 이런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의 아주 인간적인 고백을 하고도 있습니다.

 

● 연구 프로젝트 기간으로 1년 반을 계약했는데 그 기간 안에 철거가 이루어져야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철거 재개발이 제 시간에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을 위해 철거가 미루어져야 할 것 같은 이중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 (또한) 달마다 오르는 철거 아파트 딱지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 빈곤에 대한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에 구색 맞춰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는 것 보단 차라리 철거 재개발 딱지 몇 장만 사면 독립적으로 빈곤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도 차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딱지값'은 치솟고 있었다. …… 연구 프로젝트 보고서를 쓸 때 연구 조교들이 '(도시 빈민)운동'에 뛰어들지도 않고 '딱지'를 사지도 않은 데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또한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 연구자로서 이율배반적 고민과 기대를 사실상 25년간의 연구 기간 내내  …… 금선 할머니 가족이 별일 없이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뭔가 사건이 안 생기면 이 가족에 대한 관심이 느슨해지고 사건이 생겼다 하면 달려가면서 '참 흥미로운 사례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 문화기술지란 자기의 연구 주제(예를 들면 가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주제의 사람들(즉 가난한 사람들) 로부터 '뭔가 배워 가는 것'이라는 기본을 때로 잊어버리거나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2년 6개월의 현장 연구 보고서를 인쇄소로 넘긴 날, 조사 지역이었던 바로 그 곳이 "재개발 철거반의 주민 폭행"으로 일부 신문의 뉴스를 장식하게 되는데, '훗날' 철거의 '그날'을 주민들에게 물으며 "저는무서워서 못 왔어요. 차마 못 오겠더라구요"라는 말했던 자신의 목소리를 영상자료에서 발견하고는 "(이렇게) 나는 사당동 철거 재개발 지역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현장에 있기는 했지만 정말 위험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그 현장에 부재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다"며, 이 연구의 시원이었던 유니세프의 보고서 서두에 "우리는 조사 기간 동안 연구자라는 국외자의 입장에서 이 지역의 불안정한 일상생활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면서... "라 썼었던 말이 사실은 되돌아보니 그 '객관적'이란 단어를 빌어 위험한 현장 연구에서 비켜선 연구자 자신들의 알리바이로 사용했었(을 수도 있었)음까지를 토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에 대해 저자는 다시 한번 사회학자로서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도 있지요.

 

어느 날 불현듯 금선 할머니와 연구자의 어머니가 불과 세 살 차이의 같은 세대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 어느 순간 연구자의 가족과 할머니 가족을 같이 놓고 비교라도 해 보게 된 것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할머니 집 아이들'이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쯤인 것 같다. 청소년기 때는 '우리 집'과 '그 집'의 아이들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해서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같은 세대라는 생각을 못했다. …… 중산층 아이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두렵고 무서운 곳이 바로 철거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사당동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은 온 동네가 놀이터가 된 듯이 놀고 있었다. …… 할머니가 이사간 상계동 임대아파트 단지 …… 는 노동인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기가 없고 뭔가 낙오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듯한 데서 오는 방어적 느낌이 있었다. …… 연구자에게 연구자가 속한 일상과 다른 일상을 경험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

연구 도중에 저자는 다시한번 '사생활'의 중산층적 시각의 편향성을 실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중산층에게는 내밀한 '사생활'이 이들에게는 이웃이 다 아는 일상사였었으며, 어쩌면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여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할 기회를 갖는 것인 듯 했다며 '이때 난 처음으로 사생활이라는 것이 어쩌면 학술적으로 창안한 근대의 중산층적 개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노동의 배신」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글이 등장하는데, 그 책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우리(그녀가 속해있는 중산층)는 늘 계획을 세우거나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의 목록 정도는 미리 작성해 놓아야 안심이 된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에 대처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 번 살아본 것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하지만 빈곤층은 그러하지 못한다)'라 쓰고 있지요.

 

이처럼 국적이 다른 두 연구자는 '자신이 자라난 배경'을 벗어나서야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에 대해 비로소 실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조은은 상계동 임대아파트 옆 단지에 사는 어느 주민이 했던 '임대아파트에서 짜장면을 훨씬 더 많이 시켜먹는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그것은 그들의 소비성향이 높아서가 아니라 짜장면 이외의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 즉 임대아파트의 가정에는 아이들에게 식사를 차려줄 그 아무도 없다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그 비판에 대해 다시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노동의 배신」와 이 책에는 이처럼 빈곤층에 대한 중산층의 삐뚤어진 시각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중산층의 생각에 그들은 인내심이 없기에 직장을 자주 옮기며 청결하지 않은 생활습관 탓에 우리 중산층은 잘 안걸리는 병에 자주 걸린다라 말하지만, 이들 빈곤층이 주로 종사하는 직업 자체가 노동 강도가 센 경우가 많기에 직업의 안정성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으며, 청결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상태나 주거 조건 자체가 열악하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기 십상인 것이라는, 또한 먹는 것도 부실해서 영양실조로 얼굴색이 좋지 않은 아이들도 많을 수 밖에 없는, 결국 믿을 데라고는 '맨몸'밖에 없는 이들이 병에 걸리면 빚더미에 빠지게 되고 그러한 상황은 다시 앞의 상황을 재생산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 오스카 루이스가 1961년 발표한, 멕시코의 한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인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빈곤 문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뒤 빈곤 문화는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정치적 학문적 논쟁을 촉발했다. 그가 찾아낸 빈곤 문화의 속성은 …… 잦은 폭력, 역사의식의 결여,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 낮은 동기 부여, 약한 직업윤리, 약물, 알코올 중독, 혼전 동거, 성 문란, 도박 등등 …… 그리고 이러한 속성들은 빈곤 재생산을 설명하는 변수가 된다. ……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 …… (당시 서울시 무상 급식 논쟁이 한창 벌어졌었었는데) 어렸을 때 무상 급식을 받고 학교 다녔다는 것의 상처가 얼마나 클 수 있는가는 그런 환경에 처래 본 경험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든 것인 듯하다. '가난함'의 경험을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뿐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 금선 할머니 가족이 빈곤 문화 때문에 빈곤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 가족의 빈곤의 출발선은 아니다. 빈곤의 출발선을 할머니로 삼을 경우 할머니의 생활 양식에는 빈곤 문화로 꼽히는 절제 없음, 알코올 중독, 게으름 …… 심지어 성적 문란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당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빈곤의 시작은 한국 전쟁이었고 월남해서 집도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세 살, 여덟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혼자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스물여덟 살의 여성 가장에게 아무런 '과부대책'이 없었을 뿐이다. ……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을 모울 수 없었다. 할머니 자녀들은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지도 요령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빈곤 문화'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생활양식이 나타났다. 이들은 부모 대에 왜 월남해야 했는지에 대해 물어 본 적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 이를 역사의식의 결여라고 한다면 역사의식의 결여다. …… 결혼할 나이가 되어 여자를 보았는데 결혼식 올릴 돈이 없어 동거부터 했다. 혼전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이른바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이라는 '빈곤 문화'는 이들 계층에서는 일상적이다. 즉각적인 욕망을 지연할 동기 부여에 약하다고 빈곤 문화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당연히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가출, 성적 문란은 일상화되고 알코올 중독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타난 빈곤 문화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할머니 가족뿐 아니라 사당동과 상계동에서 만난 가난한 가족들의 생활양식은 모두 가난의 원인이라기보다 가난의 결과였다. …… 이러한 빈곤 문화가 이들 가족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난의 조건에 대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들 가족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현하고 있다. ……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의 서문에 "가난이란 어떤 적극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어서 빈민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이자, 방어 기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난의 문화는 유난히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대대로 전수되는 생활양식이다." (저자는 이를 '가난이 낳은 가난'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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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철거 지역에서 상계동의 임대 아파트 단지가지 서울 빈민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특히 한 가난한 가족을 25년간 계속 따라다니면서 '가난함'이란 무엇일까, '빈곤 문화'란 어떤 것일까, 이들에게 빈곤의 출구는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저자 스스로 끊임없이 던져 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당동이나 상계동에서 만난 일용 노동자들의 꿈은 언제나 장사나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꿈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들의 또 다른 소망은 '가출하지 않은'엄마, '살림 잘하는 아내'와 '착실한 아빠'인데, 이는 "엄마만 가출하지 않았어도","여자가 있었으면" 또는 "아빠가 그러지만 않았어도"등 이들의 가족사를 채록할 때마다 듣는 이들 인생에서 회한의 지점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나 저자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딱 잡아 말하기 힘들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남편이고 자식이고 징그럽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래도 믿을 데라고는 가족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그들의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지난한 삶때문이었지요.

 

  

이 책은 한 가난한 가족에 대한 심층적인 기록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가난을 들여다보는 사회학자의 입장, 연구 과정의 변화, 연구자와 연구 대상간의 관계의 움직임, 그리고 연구자의 자기 성찰 지점에 대한 기록이다. 빈곤하지도 않고 지독한 빈곤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사회학자가 가난한 한 가족을 중심에 놓고 빈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기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자문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 사당동 철거 개재발 프로젝트를 끝내고 보고서를 낼 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 기록'이 연구자, 정책 입안자,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런데 이제는 연구자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라 우리들이 가난함을 이해하고 가난의 조건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내'가 왜 '가난함을 이해하고 가난의 조건을 이해'해야하느냐는 질문은 이 책을 다 읽고난 후의 저에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신들의 젊은 시절을 그러하게 보내었었라는 사실이 새삼 기억났기 때문이 아니었지요. 저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들게끔 했던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오만없이 이 사회의 무게추에서 나와 반대편의 쪽에서 서 있어주어 지금 지탱하고 있는 이(나마의) 중심을(이라도) 잡아주고 있는 쪽의 이야기 또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않을까하는, A가 몇년 전 제게 해주었던 주장의 '역'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란 생각'도 '그 어떠한 오만'이 사실 내재되어 있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무어라... 정리된 한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나마 저자가 어느 복지시설에서 발행했던 신문에서 보았다는 시의 마지막 문구가 어쩌면... '너 또한 군림한 적 없었다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무거움을 날카롭게 정리해주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 어떠한 것을 한다하여도 결코 '짧다'라 표현되어질 수 없는 시간, 25년동안 한 주제에 대해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신 저자와 그의 연구팀에 끝없는 존경의 마음을 드리며, '가난하지는 않다고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수많은 당신들에게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달동네.

시계하나도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달을 보고 시간을 압니다.

달을 보고 일터로 나가고 달을 보며 돌아왔습니다.

동사무소에 갔었습니다.

'달라는게 많아서 달동네지'

직원이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보다 더 꼭대기에 사는 이들은 달도 보이지 않아

별을 보며 시간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별동네 사람들이라 합니다.

'별난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별동네지'

동사무소 직원은 또 그렇게 얘기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고등학교는 시켜서 뭐해요 아주머니'

'공부 많이 시켜서 우리 아들도 당신처럼 동사무소 직원 시킬라요'

 

한 하늘 아래, 흩어져 쓰러짐과

솟아서 군림함이 함께 있다니...

 

 

 

 

 

 

★ More "Food for Thought"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비록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니나, '가난이 낳은 가난'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 상당히 유쾌한 문체로 씌어진 보석같은 책.

- 김두식 著, 「불편해도 괜찮아」 : '내가 속해있지 않은' 다른 쪽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관해 말해주고 있는 책.

- 장 지글러 著,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가난하다'라는 것이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슴 좀 아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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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미스터리 소설 부분 최초 3관왕 수상>을 기록했다는 이 소설의 명성,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천재 수학자 VS 그것을 파헤치는 천재 물리학자"라 붙어있는 수식어... 이 모두가 결코 틀리다거나 과장되었다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없.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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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란 중국 작가 위화의 문학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최소한 이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을 추리소설로만 한정지어버린다면 결코 옳은 말이 될 수 없을겁니다. 

 

……………

 

수학의 문제에서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간단할까? 또는 그 어려움은 어느 정도일까.

●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려울까? 단, 해답은 반드시 있어. 어때, 재미있지 않나?

수학이란 학문이 기본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라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고등학교 수학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와 그와 동문으로서 역시 천재 물리학자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유가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사고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시가미는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가 낸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시가미가 알려준 그 문제의 해답에 대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제대로 판단해내지 못하지요. 이시가미는 틀린 해답을 알려주었지만, 그 '틀림'에조차도 어떠한 논리적 오류는 없었었고,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그의 해답을 '옳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요. 그러던 와중에 이시가미의 대학동창인 또 하나의 천재 유가와가 등장하게 되고,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단연코 만드는 쪽이 더 어렵다'라 대답했던 유가와는 예의 이시가미가 낸 문제를 드디어 풀어냅니다.(풀어내는 게 더 쉽다고 한 사람이니까요. 허나, 이러한 문제를 '만드는 쪽이 더 어렵다'란 유가와의 말은 여전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 유가와가 아닌 이시가미임을 지탱해주고 있지요.) 유가와의 등장 초반부에 이시가미는 이러한 결말을 예감이라도 하듯 그의 등장을 "절대로 완벽하다고 믿고 있던 수식이 예상하지 못한 미지수 때문에 서서히 흐트러져갈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라 표현하고 있지요.

 

소설은 천재적이란 수식어가 붙어 마땅한 두 사내의 한마디 한마디조차를 그냥 흘러보내어서는 안되게끔 짜여져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아스코에게 유가와는 자신의 옛 친구인 이시가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는데, 읽을 당시엔 저도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습니다만, 소설의 결말을 다 알고난 후에 되돌아보는 이 말은 이미 "작가가 독자에게 이 소설의 결말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더군요.

 

순수하지요. 이시가미라는 사내 말입니다. 그가 구하는 해답은 늘 단순합니다. 몇 가지를 한꺼번에 구하지 않아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 또한 단순해요. 그래서 망설임이 없지요. 사소한 일에 발목이 잡히거나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겁니다. 얻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늘 그런 위험과 같이 하지요.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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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소설을 그저 '엄청나게 훌륭한 추리소설'로 한정짓는 것은 위에 언급된 위화의 문학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는, 아주 가슴아픈 사랑이야기, 바로 그 '사랑'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때문이지요. 저의 해석이 맞다면... '기하학 문제인 듯이 보이는, 사실은 함수에 관한 문제를 낸다'란 이시가미의 말을,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정확한 핵심을 이해한 유가와가 이를 '위장전술의 문제'라고 파악했었듯, '힌트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범인의 술수에 말려드고 마는 그런 장치'는 단순히 소설의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에서도 사용된 것이 되는거지요.

 

물론... 이 소설에서 '사랑'을 빼낸다하여도 정말 훌륭한 추리소설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전에 읽었던 존 그리샴의 「사기꾼」에서 작가 스스로, 또한 주인공마저도 자인했던 헛점들이 거의 없는, 「사기꾼」에서 '반전'이라 표현되어졌던 사건들은 이 소설의 결말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유치원애들의 코묻은 장난일뿐이라는 걸, 아마도 두 소설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실꺼라 생각이 될만큼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제가 이 소설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말한다는 것이 예의가 아닐꺼라 생각되기에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제가 쓴 이 글이 당췌 뭔 소리를 하는건지 어쩌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소설의 이야기속에서 '사랑'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너무도 크기에, 소설의 주인공 이시가미의 심정을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란 위화의 설명을 더해 이해했던 당신이라면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란 이시가미의 말이 그 역으로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음에, 유가와가 말했던 '(이시가미는) 얻는게 아무것도 없어요'란 말이 기어이 실현되었음에 너무 아쉬워 차마 책의 뒷표지를 덮어버릴 수 없었었다고, 이 소설의 '사랑'이 그토록 마음아파 '헌신'이란 단어를 빼고는 그 어떠한 제목도 성립될 수 없을꺼란 말로 당신으로 하여금 이 소설을 꼭 읽어보고싶다.란 욕망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시가미의 사랑... 문득 김장훈의 '그대로 있어주면 돼'란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오르더군요. "니가 매일 다니는 골목 그곳만 그대로 있어 주면 돼. 니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날 위해 울지는 마." 하지만... 야스코는 결국 웁니다. --;;

 

책이란거... 읽으면 읽을수록 이제껏 이 좋은 책들을 읽지못한채 "이미"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어버렸.다라는게 너무도 아쉽게 느껴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더군요. 그 샘이 대충이라도 마를때까지 가고 싶다면... 대체 몇 살까지 살아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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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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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들 하지요. 이 말은 최소한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틀린 말이 됩니다. 그 어떤 대상에 관한 욕심도 그 욕심을 채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론적으로는 '한계효용체감'에 의해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엔 사라지는 것이어야 하니까요. (단, '돈'이라는 재화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돈은 다른 재화/서비스와의 교환을 통해 자신의 형태를 무한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고유의 성질로 인해 그에 대한 욕심은 무한하다고 말해지곤 하지요1.)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은, 그 책을 읽음으로 인해 또 다른 책/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주는 그런 책입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저의 독서이력은 이러한 욕심이 '체감'되지 않고 여전히 샘솟듯 솟아만 나고 있거늘, '책 읽는 것'이 직업이 아닌 이상에는 그렇게 솟아나는 독서에의 욕심을 결코 채워낼 수가 없을 듯 하다라는걸 못내 아쉬워만 하고 있지요.

 

이러한 현실과 욕심과의 괴리를 채워주는 일 방편으로 책 몇 권씩의 요약본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서비스라든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두꺼운 두께의 그런 류의 책들, 이름하여 '책에 관한 책', 즉 직접 책을 읽지 않는다해도 그 책의 대강의 내용과 교훈 정도는 그 책을 읽음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긴 하였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겠죠. 이런 '책에 관한 책'과 (목차만 보는 걸로도 이미 내용의 절반은 다 알게되는)'자기계발서'는 읽지 않겠다했었었거늘,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집어들었어야했던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는 이러했던 저의 생각을 일 순간에 바꾸어주었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제가 읽지 못한 책들에 관한 소개를 읽었다라기보다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하며, 책으로부터 어떠한 것들을 끄집어 내 배워야하는가'에 대해서 거의 교과서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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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서가라 할지라도 모든 분야의 책을 두루 망라해서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필독할 만한 고전에 한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서 길잡이가 될 만한 가이드북이 필요하고 로드맵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시간을 좀 더 유익한 독서에 할애하기 위한 방도이고 곁눈질이지요. '나는 이렇게 읽는다'라는 독서의 시범은 그런 용도로서의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타일의 독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이죠.

이 책 「아주 사적인 독서」의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어떻게 책을 읽어야하며, 책으로부터 어떠한 것들을 끄집어 내 배워야하는가'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일곱 편의 고전에 대한 강의를 엮은 책으로, 그 고전들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그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이 곁들여져 있는 책입니다.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사적인"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독서, 즉 독자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교양으로서의 독서는 서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채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다룬 작품은 「햄릿」부터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 손님」, 「마담 보봐리」, 「주홍 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까지 일곱 편입니다. 모두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만 모아놓은 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 이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 고전이라는 말이 그래서 농담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나타난 저자의 예상은 물론!!! 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더 심각한 문제는 위 일곱 편의 고전 중 단 하나의 작품도 제가 읽어보지 않았다라는 데 있다는 거였죠. 그나마...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란 농담에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고나 할까요? (한가지 더 고백하자면,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되고 있는 14권의 책들 중에도 제가 읽어본 건 역시나 단 한 권도 없었었어요. --;;)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열네 권의 책들을 <삶에서 이정표가 되었던 책들, 갈림길과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도움을 받았던 ‘낡은 지도'>라 표현했었습니다. 사회과학서적보다는 이러한 고전 읽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라 고백했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이 사회과학의 렌즈를 통해 서술되고 있었다라면, 이 책 「아주 사적인 독서」은 예의 전형적인 문학도의 렌즈로 위의 고전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물론 사회과학적 해석도 적잖게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 책은 '소설/소설읽기에 관한 대중을 위한 일반론'이라 해도 될만큼 문학 자체의 관점에서 위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

 

<용서받지 못한 죄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는 「주홍 글자」는 저자의 사회과학적 관점이 유난히 돋보였던 장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이 저지른 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형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네요. --;;) 여기서 저자는 작가 너대니얼 호손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응당한 사회적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어떤 행위를 사회적으로 처벌하기 때문에 그게 죄라고 간주된다' 즉, 어떤 사회적인 규범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 작품의 시작을 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 이현우는 이 작품을 흔히들 말해지는 것처럼 '간통 혹은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죄와 벌,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해석하고 있지요. 그런 면에서 이 장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정말로 인상적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실은 다 가슴속에 주홍 글자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안에 어떤 금지된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헤스터  프린에게 형벌이 관대하다며 악담을 퍼붓지요. 그 이면은 뭔가요? 왜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건가요? 자기 안에도 그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죄를 짓고 고작 저 정도 처벌이라니, 그렇다면 나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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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 읽기"란 부제를 그야말로 충실히 따르고 있는 책입니다. '욕망'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만을 선정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욕망'이라는 한 주제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으며 내내 일곱 편의 작품들을 해석해내는 저자의 문학적 소양이 그것을 가능케하였다라는 생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들었으며, 무엇보다!!! 저자의 글쓰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라는, 내가 과연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많은 감상문을 써본다 한들 이 책에 담겨져 있는 글들의 단 한 단락만이라도 써볼 수 있게될까하는 (또 다른 유형의) 좌절감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보게 되었었네요.

 

단순히 기인스러운 한 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작품 「돈키호테」가 지니고 있는 실제의 의미를 배울 수 있어 좋았던, 실비아 크리스탈로 대변되는 중·고삐리 시절에의 '에로 영화'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가지고 있는 '시대의 상징성'을 새로이 알게 되어 또한 좋았던, 「햄릿」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보며 이처럼 전투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세상엔 있구나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도 되어 좋았던 책이었습니다만, 무엇보다!!!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란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는 「파우스트」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소개되고 있는 「석상 손님」, 이 두 개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장이 가장 인상적이더군요. 

 

 

「파우스트」중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은 나이가 중년이라면 …… 이대로 늙기엔 뭔가 억울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 싶은 중년이 「파우스트를 읽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돈키호테」중

 

일상의 안락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불쌍한 몰골'로 비칠 때 우리는 다시금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해가는 이 방랑기사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다면요.

 

 

 

 

「청춘의 독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책들 중, 네 권의 책을 샀더랬습니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읽어 보고 싶어'란 마음을 제게 주었기 때문이었지요. 허나...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책들 중에는 '내가 직접 읽어보고 싶어'란 생각이 든 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너무도 자세하기도 했지만, '너무 옛날 소설들이잖아'란 쉬운 핑계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혹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란 고전에 대한 농담을 몸소 실천하겠노라는 다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똑같은 작품을 읽고도 저자 이현우C와 같은 해석은 도저히 해낼 수 없을거라는 '즐거운 좌절감'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 고백하는게 맞을 듯 합니다. 이 책은... 자고로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려면 이 쯤은 되어야한다'의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 More "Food for Thought"  

 - 유시민 著, 「청춘의 독서: 유시민의 독서쯤 되면 '나의 독서'는 한없이 초라해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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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특정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의 첫 대상은 제 기억엔 이문열 작가였었습니다. (할일 별로 없었던 --;;) 야간 경계병의 방위 시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시작되었던 그 탐독은 「레테의 연가」, 「젊은날의 초상」,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사람의 아들」, 「영웅시대」, 「시인」, 그리고 「변경」 등 아직 제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해도 꽤 되지요.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후 두 번인가를 더 읽었었었고, 1부까지만 읽었던 「변경」 시리즈는 얼마전 알라딘 중고서점과 헌 책방 두 군데를 흝어 겨우 그 시리즈를 완성해 놓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다시 읽어보았던  「사람의 아들」 또한 첫 독서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독교 신자인 제게 일말의 충격을 선사해주기도 하였지요.

 

이 책 「황제를 위하여」도 처음 읽어보는 독서는 아니었기에 몇 페이지 채 넘기지 않아 어렴풋이 처음 이 책을 읽었었던 그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문역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아마도 시작되었을,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책을 읽는 버릇과 함께 다시금 그의 책을 이렇게 중년의 나이가 되어 읽어보니 역시... 책은 처음 읽을 때와 그 이후, 그리고 젊은 날에 읽었었던 기억과 나이 들어서의 느낌이 사뭇 다른듯 하네요. 그러하기에... 책은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소장하고 보는 것이어야할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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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인 이야기는 보통 목격자에게서 직접 듣지 못한다. 우리에게 말해준 사람은 다른 이에게 들었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들었고, 그는 또 다른 이의 아내의 친구의 사촌에게 들었고. …… 어떤 이야기든 충분히 많은 사람을 거치면 왜곡되기 마련이다. 애초의 이야기는 워낙 오래전에 시작된 소문인데다가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하도 왜곡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낸 실제 사건이 무엇인지 (실제 사건이 있기는 있었는지) 짐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소문이 충분히 오래되면, 이제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전통'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더 굳게 믿는다.

- 리처드 도킨스 著,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 중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에서와 같이 다시 한번 더 도킨스 교수의 서술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문맥이 좀 다르죠. 종교적 신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도킨스 교수는 이처럼 종교도 또한 일종의 '소문'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말합니다. "소문이 오래되면, 결국 전통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더 굳게 믿는다"란 말은 결국 종교도... 일종의 소문으로 시작된 허황된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책 「황제를 위하여」는 오래전 부터 일종의 '소문'처럼 전해져온 <정감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말기, 이씨 왕조가 무너질 것이고 그 다음에는 정씨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게 이 <정감록>의 주요 뼈대이고, 이 소설에서 지칭되는 '황제'는 바로 그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씨 성을 가진 왕이 을사조약 즈음이었던 당시 조선의 현실에 드디어 나타났다는 이야기이지요. 

  

………………

 

정 처사라는 인물이 몇몇 신비한 경험을 겪고는 이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곧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정감록>에서의 '정 진인'이라 믿게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신념으로 길러진 소년이 그의 일생동안 황제의 길을 걸어간다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을사조약 즈음을 시작으로 하여 5·16을 지나 1972년 세상을 떠난 황제의 일생을 살펴보며 또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완전히 다른 각도, 즉 황제의 시각에서 보게해주기는 재미도 더해져 있지요.

 

소설을 많이 읽어보았다라 말할 수 있는 독서이력은 아직 아니지만, '도대체 소설을 왜 읽는거야?'의 수준에서는 나름 벗어나 있다라 믿는 지금, 이 '소설'이라는 문학장르에 대해 가지게 된 생각은 "작가가 펼쳐놓는 이야기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이야기를 빌어 정녕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가를 발견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설읽기의 진정한 재미가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이 소설 「황제를 위하여」도 또한 그저 한때 그런 사람이, 그랬던 시절이 있었었노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통해 (시간은 항상 흘러왔지만 그것이 언제이건 읽는 그 '당시') 작가가 현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도 있게해준다라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느 아버지들과는 달리, 황제에게 있어서 정 처사는 영광스럼 삶의 지표를 설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삶 자체를 함께 살아준 사람이었다. …… 정 처사의 꿈이 곧 황제의 꿈이었으며, 그 의지가 곧 황제의 의지였다. 흰돌머리에서는 물론 만주로 온 후에도 황제의 생각 한 갈래, 몸짓 하나가 정 처사가 설정한 삶의 범위를 넘어선 것은 없었다.

제가 꼽아본 이 소설의 핵심이 될만한 문장입니다. 황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 모든 것은 아버지인 정 처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정 처사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황제를 위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또한 나의 아이에게 정 처사와 같은 존재가 되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더군요. 초등학교때는 좀 놀게해주어도 되지않을까?했던 저의 말에, 조교수가 들려주었던 강남 아이들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학교를 마치고 오면 학원에 가고, 주말에도 쉬지않고 그의 '스펙'에 도움이 될만한 가외활동으로 보내다보면, '아... 인생이란 원래 이런건가부다'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거였지요. 소설 속 황제도 또한 아버지의 계획대로 성장하여,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즉, 자신은 하늘이 내린 황제라는 것을 단 한번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되었던 거였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노년에 '제왕인 내가 천민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천민인 내가 제왕의 꿈을 꾼 것이냐?'와 같은 탄식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는 자신의 삶을 마칠때까지도 유언을 통해 자신이 황제임을 믿어의심치 않았지요.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만약 황제가 아직 뱃속의 태아였었을 적에 아버지 정 처사에게 생겼던 몇몇 기이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혹 있었더라도 정 처사의 대응이 소설관 달랐었더라면, 그렇다면... 황제의 일생도 많이 달라졌었겠지요. 이 소설은 그렇기에 은근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겁니다. 내 아이의 인생을 그의 유년 시절에 부모인 내가 정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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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일생을 비록 '원인 모를 행운'의 연속이었다라 비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의 곁에 요샛말로 하면 매우 훌륭한 과외선생님들이 계셨었었고, 그의 일생을 황제의 그것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여 모셔준 충직한 사람들 또한 곁에 있었었지만, 어쩌면... 어릴 적 그를 가르치다가 그의 곁을 떠난 '큰 선생'이 떠나면서 정 처사에 남겨주었던 다음의 말을 정 처사가 심각하게 받아들였었더라면, 아들의 인생은 분명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망상으로 깊은 해독을 입'는 나의 아이가 될 수도 있다라는 말이 부모가 된 지금의 제가 또한 새겨들어야할 교훈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것이 설혹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했던 메세지가 아니었다할지라도 말이죠. 

 

주인장이 맨 처음 얻었다는 옛 거울부터 일이 잘못된 것 같소이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고, 설령 주인장이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윗대의 광기 어린 몽상가나 야심가의 위작일 따름이오. …… 백보 물러서서 하늘의 뜻이라 한들 저 말없는 하늘이 무엇을 해줄 것 같소? …… 만국 정치의 대세는 왕을 폐하거나 있어도 통치하지 않는 형태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하오. 그런데 우리만 허황된 비기를 따라 무슨 성(姓) 어디 몇 년, 무슨 성 어디 몇 년, 하는 식으로 구태의연한 왕조가 이어가겠소? 인구 십만도 먹일 물이 없는 이 계룡산 골짜기가 도읍이 되겠소? ……  확실이 아드님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용모도 수려하오. 천성도 순수하며 대범하오. 그러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왕자의 재목은 아니오. 난세를 헤쳐나갈 간흉계독이 없고, 모사는 치밀하지 못하며, 판단은 무디고, 때에 당하여 대처함이 느리오. 뿐만 아니라 주인장의 망상으로 깊은 해독을 입어, 그릇된 신념이 종종 원래의 장처마저 가리고 있소.

 

작품 이외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작가의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 지난 몇 년이었습니다만, 작가로서의 이문열은 분명 그만의 힘이 있고, 그만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대중성'이라는 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라면, '자국민의 태반의 그의 시를 모르는데'라는 안타까운 멍에(?)를 쓰고 있는 고은 시인보다는 이문열 작가야말로 어쩌면 그 상에 더 근접해 있는 문학가가 아닐까하는 저만의 생각도 드네요. 24년전의 그 때처럼 다시 한번... 작가 이문열에게 빠져들지도 모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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