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커다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한 문구일지도 모릅니다만, 세상의 참 많은 오해는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나지 못함', 즉 타인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함, 아니 더 근본적으론 '알지(조차) 못함'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대통령 후보로 TV토론회에 나왔던 모 정치인이 옥탑방이 뭔지 아느냐는 패널의 질문에 옥탑방을 모른다라 대답해 구설수에 올랐었듯, 그의 일생에 시내버스란걸 도대체 타보기나 했었을까 싶은 모 국회의원이 시내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걍 '안타봐서 모르겠다'라 대답하면 될 것을 굳이 <자신이 자란 배경을 벗어난> 서민 코스프레를 하다가 두 번이나 X망신을 당하기도 했었죠. 이런 점에서만 보자면 위에서처럼 '(자신의 인식 수준이)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김두식이야말로 어쩌면 맨날 '민심'이니 '준엄한 국민의 심판' 어쩌구를 외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우리'와 가까운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싶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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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앉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말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비교적 정확한 상황인식과 그에 더한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는 김두식의 반성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일생에 있어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았던' 바버라 에런라이크라는 사회운동가는 비록 일정 기간동안이었지만 그 '가난의 현장'에 자신이 직접 뛰어들었고, 그 체험을 통해 위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라 쓰게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중산층 특유의 시각으로 이들이 주거 문제를 접하는 방식을 보고 있자니 돈을 불합리하게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알고보니)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아파트를 구할 때 지불해야 하는 한 달치 집세와 한 달 집세에 상응하는 보증금이 없으니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엄청난 방세를 내야 한다. 가전제품이라고는 끽해야 전열기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살아야 한다면 콩 스튜를 잔뜩 끓여 냉동시켜 놓고 일주일 동안 먹는다는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주로 패스트푸드나 핫도그 또는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수프 같은 걸 사 먹게 된다. 의료보험에 들 형편이 안되니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약도 구할 수 없고, 그러다 결국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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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이전, 그러니까 학생의 신분으로 꽤나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었을 당시 전 삼성이나 현대, LG의 소비자로만 살아왔었을 뿐 소위 말하는 그런 대기업들이 우리 사회에서 정녕 어떠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헌데 사회생활이란걸 해보니 말이죠, 대기업으로부터 나오는 하청의 사슬이 '협력업체'라는 곱디 고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얼마나 촘촘하게 우리 사회의 곳곳에 박혀 있는가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어지더군요. 경제학에서는 최말단 영세업체로부터 대기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사슬을 '부가가치의 증식과정'이라는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아주 간단하고 중립적인 말로 표현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랫쪽의 존재를 바탕으로 윗쪽의 화려함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함에도 윗쪽은 자신의 존재근거일 수도 있는 아랫쪽에 대한 관심을 아예 무시해버리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어렴풋하게나마 제 머릿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었을 즈음...
절대 다수의 빈민들이 월마트나 웬디스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을 못마땅해하고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더 이상 옳지 않다면 어떤 관점이 바람직할까? ……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워킹 푸어'라고 불리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이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워킹 푸어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 익명의 기증자, 이름 없는 기부자가 되는 것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중
제 아무리 그러한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해도 죄책감도 모자라 '수치심'까지를 언급하고 있는 위의 글에 전적인 동의까지는 힘들었었습니다. 허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의 저자 류동민이 말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24시간 휴일도 없이 철야로 일하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비판하기에 앞서, 대형 마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영업방식을 택하도록 한 요인은 다름 아닌 더욱 싸고 편하게 장을 보려는 소비자의 욕구였으며, 역설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고 작업 조건이 좋지 못한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그처럼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마트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당신'이라면 여기서 당장 익스플로어 창 오른쪽 맨 위의 X를 클릭하셔야 할 겁니다. 이 다음부터의 이야기를 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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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누군가(A)가 저에게 당시 꽤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한마디를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강남에서 태어나고, 강남에서 초·중·고 나오고, 강남애들이 많이 가는 대학을 다니는, 여전히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OOO동이나 OO동 같은데엔 개나 소만 사는 줄 안다"라는, 상당히 자신감있는 어투로 해준 말이었지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가 말한 '강남'관 어떠한 연관도 없는 저이지만, 이러이러한 성장과정을 거쳐 지금은 일산이라는 신도시에 새로 생긴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저 또한 부지불식간에 OOO동 같은데서 불편해서 어떻게 살까?하는 정도의 마음속 의문을 단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었다라고는 말할 자신이 없는겁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끌고 있나 싶은가요?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되어 사놓았던건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저 재생종이로 만들어진 이 책의 감촉이 좋아 몇 번이고 꺼내들어 만지작만거렸었지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이 (가난한 것 같지는 않은) 저의 마음을 끌어당길 그 어떠한 유인도, 제가 이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을 가지게 될만한 그 어떠한 계기도 없었었건만,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읽었던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또 다른 생각들이 (사회적 소수자도 아닌 듯한 저에게)어찌어찌하여 예전에 읽었었던 「노동의 배신」을 다시 뒤적이게 해주었고,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오만없이 이 사회의 무게추에서 나와 반대편의 쪽에서 서 있어주어 지금 지탱하고 있는 이(나마의) 중심을(이라도) 잡아주고 있는 쪽의 이야기 또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않을까하는, A가 몇년 전 제게 해주었던 주장의 '역'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란 생각이 드디어 이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집어 들었던 이유였던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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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의 발주로 시작된, '철거 재개발이 지역 주민에 미친 영향을 실증주의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정책 보고서'의 작성이 이 책의 시원입니다. 연구팀은 1986년 6월, 사당동 철거 재개발 예정 지역에 직접 방을 얻는 것을 시작으로 '철거를 앞둔 불량 주거 지역'에 대한 현장 연구에 들어갔지요. 사당동은 1965년 충무로와 명동을 비롯한 시내 몇 군데 불량 주거지의 철거민을 여기에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주거지로서, 저자 조은은 일반적으로는 '산동네' 또는 '달동네'라 불리웠던 당시 사당동 철거 재개발 현장 연구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불량 주거지'의 모습은 여전히 미국의 '슬럼'과 같은 이미지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1986년 당시 저자 조은은 40세였었으며, 교수로 임용된지 4년차였었음.)
재개발지로 선정되어서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동네였지만 온 동네가 일터 같은 느낌을 주는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네"였다. …… (하지만)그들의 가난은 집안에 들어섰을 때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 그때 처음으로 배운 단어가 '칼잠'이라는 단어였다. …… 칼잠이라는 단어는 그곳에서 연구를 하는 내내 매우 상징적인 단어로 남아 있었다. …… 이 칼잠이라는 단어가 처음에 너무 생소하고 신기해서 수업 시간에 연구 현장과 칼잠 이야기를 했다가 ……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라는 표정의 학생을 보게 되었다. 고개를 외로 꼰 그 학생의 눈빛에서 "제가 그런 데 살고 있단 말이에요"라는 무언의 음성을 보았다. 밑으로부터 사회학 하기의 출발점이었다. …… (헌데) '그런 지역'을 연구하러 다니는데 교통시간과 택시비를 줄이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차를 사야 했다.
저자의 조교 두 명이 (연구 조사자의 신분은 감추고 그저 대학원생의 신분만으로) 이 지역에 직접 세를 얻고 생활하며, 우선 지역주민들과의 거리 좁히기로 연구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손으로 기록된 지역 주민들과의 하루하루의 생활들이 이 연구의 기초 자료였었던 것이지요. 저자를 비롯한 연구팀은 허나 김두식의 '자기가 자란 배경을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앉은 사람들'의 범주에서도 벗어나려는 실천적 노력의 첫 단계에서부터 연구자와 계층이나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연구할 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 "집에서 찍은 가족 사진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없다"고 답했다. 왜 없느냐는 우문에 "카메라가 없어서"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당시 카메라는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것으로 …… 자기 집 앞마당에서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 사당동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여학생 조교로 방을 얻어 살게 된 혜란 조교에게 어느 날 건너편 집에 사는 열 살짜리 아이가 놀러 와서 '언니 부자야?" 그러면서 "언니는 좋겠다. 어떻게 이렇게 큰 방을 혼자 쓸 수 있냐"고 했다. …… 계급 계층별 언어사용의 차이도 생각보다 컸다. ……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우물우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학력 때문인가 했는데 자신있게 의견을 말하고 살아 본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언어의 계급적 차이(로 인해) …… 긴 인터뷰나 생애사를 화면에 잡았을 때 계층이 다른 청중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은 놀아야 된다"(라는 말이 담긴 영상물을) …… 처음에 녹취를 푼 대학생은 3개월로 이해(했었다) …… 이는 단순히 오청의 문제라기보다 삶의 경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에게 실직이라는 것은 그 단위가 3개월인데 빈곤층 청소년들에게 놀면 안 되는 날수는 사흘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이 연구는 1년이라는 애초의 계획된 기간을 넘겨 약 2년 반동안 진행되게되는데, 애초에 '1년 안에 철거가 예정되어져 있'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던 사당동의 철거가 계속 지연되어왔었기 때문이었지요. 어쨌든 2년 반 동안 진행되었던 사당동의 철거 과정을 지켜 보고 난 뒤, 연구의 관심은 강제 철거로 쫓겨난 가족들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래 22가구를 선정하여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사당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한 사당동에서의 살아온 이야기들, 그리고는 훗날엔 그 중 3대로 구성되어 있었던 '금선 할머니' 가족에 집중하여 넓게는 빈곤의 세대 재생산, 좁게는 '가난한 가족에게 주거공간이 제공되면 빈곤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지요. 당시 서민들의 주거지였던 산동네,달동네가 재개발 사업의 대상이 되면서 다수의 무주택 영세민의 주거 문제가 심각해지자 '영구 임대 아파트'라는 카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할머니의 가족이 당시의 사례 연구 가족들 중 유일하게 영구 임대 아파트를 얻은 가족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저자는 이렇게 시작되었었던 지난 25년간의 연구 기간 동안 이 가족을 따라다니면서 연구자라는 입장에서 그들과의 거리 조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지키기'가 쉽지 않은 과제였었노라 밝히고도 있습니다. 허나 이들이 25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연구를 진행해 오며, 참으로 여러 분야에서 '연구자로서의 이율 배반성'과 맞닥뜨리게 되었었는데, 그 중 다음의 두 가지에 정말로 커다란 유혹과 고민을 하여야 했었다라고, 과연 어떤 사회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낸 책에서 이런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의 아주 인간적인 고백을 하고도 있습니다.
● 연구 프로젝트 기간으로 1년 반을 계약했는데 그 기간 안에 철거가 이루어져야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철거 재개발이 제 시간에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을 위해 철거가 미루어져야 할 것 같은 이중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 (또한) 달마다 오르는 철거 아파트 딱지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 빈곤에 대한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에 구색 맞춰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는 것 보단 차라리 철거 재개발 딱지 몇 장만 사면 독립적으로 빈곤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도 차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딱지값'은 치솟고 있었다. …… 연구 프로젝트 보고서를 쓸 때 연구 조교들이 '(도시 빈민)운동'에 뛰어들지도 않고 '딱지'를 사지도 않은 데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또한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 연구자로서 이율배반적 고민과 기대를 사실상 25년간의 연구 기간 내내 …… 금선 할머니 가족이 별일 없이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뭔가 사건이 안 생기면 이 가족에 대한 관심이 느슨해지고 사건이 생겼다 하면 달려가면서 '참 흥미로운 사례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 문화기술지란 자기의 연구 주제(예를 들면 가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주제의 사람들(즉 가난한 사람들) 로부터 '뭔가 배워 가는 것'이라는 기본을 때로 잊어버리거나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2년 6개월의 현장 연구 보고서를 인쇄소로 넘긴 날, 조사 지역이었던 바로 그 곳이 "재개발 철거반의 주민 폭행"으로 일부 신문의 뉴스를 장식하게 되는데, '훗날' 철거의 '그날'을 주민들에게 물으며 "저는무서워서 못 왔어요. 차마 못 오겠더라구요"라는 말했던 자신의 목소리를 영상자료에서 발견하고는 "(이렇게) 나는 사당동 철거 재개발 지역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현장에 있기는 했지만 정말 위험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그 현장에 부재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다"며, 이 연구의 시원이었던 유니세프의 보고서 서두에 "우리는 조사 기간 동안 연구자라는 국외자의 입장에서 이 지역의 불안정한 일상생활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면서... "라 썼었던 말이 사실은 되돌아보니 그 '객관적'이란 단어를 빌어 위험한 현장 연구에서 비켜선 연구자 자신들의 알리바이로 사용했었(을 수도 있었)음까지를 토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에 대해 저자는 다시 한번 사회학자로서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도 있지요.
어느 날 불현듯 금선 할머니와 연구자의 어머니가 불과 세 살 차이의 같은 세대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 어느 순간 연구자의 가족과 할머니 가족을 같이 놓고 비교라도 해 보게 된 것은 '우리 집 아이들'과 '할머니 집 아이들'이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쯤인 것 같다. 청소년기 때는 '우리 집'과 '그 집'의 아이들이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해서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같은 세대라는 생각을 못했다. …… 중산층 아이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두렵고 무서운 곳이 바로 철거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사당동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은 온 동네가 놀이터가 된 듯이 놀고 있었다. …… 할머니가 이사간 상계동 임대아파트 단지 …… 는 노동인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기가 없고 뭔가 낙오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듯한 데서 오는 방어적 느낌이 있었다. …… 연구자에게 연구자가 속한 일상과 다른 일상을 경험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수시로 자문해야 했다.
연구 도중에 저자는 다시한번 '사생활'의 중산층적 시각의 편향성을 실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중산층에게는 내밀한 '사생활'이 이들에게는 이웃이 다 아는 일상사였었으며, 어쩌면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여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할 기회를 갖는 것인 듯 했다며 '이때 난 처음으로 사생활이라는 것이 어쩌면 학술적으로 창안한 근대의 중산층적 개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노동의 배신」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글이 등장하는데, 그 책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우리(그녀가 속해있는 중산층)는 늘 계획을 세우거나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의 목록 정도는 미리 작성해 놓아야 안심이 된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에 대처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 번 살아본 것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하지만 빈곤층은 그러하지 못한다)'라 쓰고 있지요.
이처럼 국적이 다른 두 연구자는 '자신이 자라난 배경'을 벗어나서야 '사회의 계급·계층적 차이'에 대해 비로소 실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조은은 상계동 임대아파트 옆 단지에 사는 어느 주민이 했던 '임대아파트에서 짜장면을 훨씬 더 많이 시켜먹는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그것은 그들의 소비성향이 높아서가 아니라 짜장면 이외의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 즉 임대아파트의 가정에는 아이들에게 식사를 차려줄 그 아무도 없다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그 비판에 대해 다시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노동의 배신」와 이 책에는 이처럼 빈곤층에 대한 중산층의 삐뚤어진 시각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중산층의 생각에 그들은 인내심이 없기에 직장을 자주 옮기며 청결하지 않은 생활습관 탓에 우리 중산층은 잘 안걸리는 병에 자주 걸린다라 말하지만, 이들 빈곤층이 주로 종사하는 직업 자체가 노동 강도가 센 경우가 많기에 직업의 안정성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으며, 청결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상태나 주거 조건 자체가 열악하기 때문에 질병에 걸리기 십상인 것이라는, 또한 먹는 것도 부실해서 영양실조로 얼굴색이 좋지 않은 아이들도 많을 수 밖에 없는, 결국 믿을 데라고는 '맨몸'밖에 없는 이들이 병에 걸리면 빚더미에 빠지게 되고 그러한 상황은 다시 앞의 상황을 재생산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 오스카 루이스가 1961년 발표한, 멕시코의 한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인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빈곤 문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뒤 빈곤 문화는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정치적 학문적 논쟁을 촉발했다. 그가 찾아낸 빈곤 문화의 속성은 …… 잦은 폭력, 역사의식의 결여,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 낮은 동기 부여, 약한 직업윤리, 약물, 알코올 중독, 혼전 동거, 성 문란, 도박 등등 …… 그리고 이러한 속성들은 빈곤 재생산을 설명하는 변수가 된다. ……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 …… (당시 서울시 무상 급식 논쟁이 한창 벌어졌었었는데) 어렸을 때 무상 급식을 받고 학교 다녔다는 것의 상처가 얼마나 클 수 있는가는 그런 환경에 처래 본 경험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든 것인 듯하다. '가난함'의 경험을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뿐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 금선 할머니 가족이 빈곤 문화 때문에 빈곤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 가족의 빈곤의 출발선은 아니다. 빈곤의 출발선을 할머니로 삼을 경우 할머니의 생활 양식에는 빈곤 문화로 꼽히는 절제 없음, 알코올 중독, 게으름 …… 심지어 성적 문란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당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빈곤의 시작은 한국 전쟁이었고 월남해서 집도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세 살, 여덟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혼자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스물여덟 살의 여성 가장에게 아무런 '과부대책'이 없었을 뿐이다. ……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을 모울 수 없었다. 할머니 자녀들은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지도 요령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빈곤 문화'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생활양식이 나타났다. 이들은 부모 대에 왜 월남해야 했는지에 대해 물어 본 적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 이를 역사의식의 결여라고 한다면 역사의식의 결여다. …… 결혼할 나이가 되어 여자를 보았는데 결혼식 올릴 돈이 없어 동거부터 했다. 혼전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이른바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이라는 '빈곤 문화'는 이들 계층에서는 일상적이다. 즉각적인 욕망을 지연할 동기 부여에 약하다고 빈곤 문화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당연히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가출, 성적 문란은 일상화되고 알코올 중독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타난 빈곤 문화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할머니 가족뿐 아니라 사당동과 상계동에서 만난 가난한 가족들의 생활양식은 모두 가난의 원인이라기보다 가난의 결과였다. …… 이러한 빈곤 문화가 이들 가족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난의 조건에 대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들 가족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현하고 있다. ……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의 서문에 "가난이란 어떤 적극적 의미까지 가지고 있어서 빈민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이자, 방어 기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난의 문화는 유난히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대대로 전수되는 생활양식이다." (저자는 이를 '가난이 낳은 가난'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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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철거 지역에서 상계동의 임대 아파트 단지가지 서울 빈민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특히 한 가난한 가족을 25년간 계속 따라다니면서 '가난함'이란 무엇일까, '빈곤 문화'란 어떤 것일까, 이들에게 빈곤의 출구는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저자 스스로 끊임없이 던져 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당동이나 상계동에서 만난 일용 노동자들의 꿈은 언제나 장사나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꿈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들의 또 다른 소망은 '가출하지 않은'엄마, '살림 잘하는 아내'와 '착실한 아빠'인데, 이는 "엄마만 가출하지 않았어도","여자가 있었으면" 또는 "아빠가 그러지만 않았어도"등 이들의 가족사를 채록할 때마다 듣는 이들 인생에서 회한의 지점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나 저자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딱 잡아 말하기 힘들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남편이고 자식이고 징그럽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래도 믿을 데라고는 가족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그들의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지난한 삶때문이었지요.
이 책은 한 가난한 가족에 대한 심층적인 기록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가난을 들여다보는 사회학자의 입장, 연구 과정의 변화, 연구자와 연구 대상간의 관계의 움직임, 그리고 연구자의 자기 성찰 지점에 대한 기록이다. 빈곤하지도 않고 지독한 빈곤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사회학자가 가난한 한 가족을 중심에 놓고 빈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기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자문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 사당동 철거 개재발 프로젝트를 끝내고 보고서를 낼 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 기록'이 연구자, 정책 입안자,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런데 이제는 연구자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라 우리들이 가난함을 이해하고 가난의 조건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내'가 왜 '가난함을 이해하고 가난의 조건을 이해'해야하느냐는 질문은 이 책을 다 읽고난 후의 저에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신들의 젊은 시절을 그러하게 보내었었라는 사실이 새삼 기억났기 때문이 아니었지요. 저로 하여금 이 책을 집어들게끔 했던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오만없이 이 사회의 무게추에서 나와 반대편의 쪽에서 서 있어주어 지금 지탱하고 있는 이(나마의) 중심을(이라도) 잡아주고 있는 쪽의 이야기 또한 알고는 있어야 하지않을까하는, A가 몇년 전 제게 해주었던 주장의 '역'을 한번 배워보고 싶다란 생각'도 '그 어떠한 오만'이 사실 내재되어 있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무어라... 정리된 한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나마 저자가 어느 복지시설에서 발행했던 신문에서 보았다는 시의 마지막 문구가 어쩌면... '너 또한 군림한 적 없었다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무거움을 날카롭게 정리해주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 어떠한 것을 한다하여도 결코 '짧다'라 표현되어질 수 없는 시간, 25년동안 한 주제에 대해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신 저자와 그의 연구팀에 끝없는 존경의 마음을 드리며, '가난하지는 않다고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수많은 당신들에게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달동네.
시계하나도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달을 보고 시간을 압니다.
달을 보고 일터로 나가고 달을 보며 돌아왔습니다.
동사무소에 갔었습니다.
'달라는게 많아서 달동네지'
직원이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보다 더 꼭대기에 사는 이들은 달도 보이지 않아
별을 보며 시간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별동네 사람들이라 합니다.
'별난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별동네지'
동사무소 직원은 또 그렇게 얘기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고등학교는 시켜서 뭐해요 아주머니'
'공부 많이 시켜서 우리 아들도 당신처럼 동사무소 직원 시킬라요'
한 하늘 아래, 흩어져 쓰러짐과
솟아서 군림함이 함께 있다니...
★ More "Food for Thought"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비록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니나, '가난이 낳은 가난'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 상당히 유쾌한 문체로 씌어진 보석같은 책.
- 김두식 著, 「불편해도 괜찮아」 : '내가 속해있지 않은' 다른 쪽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관해 말해주고 있는 책.
- 장 지글러 著,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가난하다'라는 것이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슴 좀 아픈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