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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미스터리 소설 부분 최초 3관왕 수상>을 기록했다는 이 소설의 명성,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천재 수학자 VS 그것을 파헤치는 천재 물리학자"라 붙어있는 수식어... 이 모두가 결코 틀리다거나 과장되었다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없.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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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란 중국 작가 위화의 문학작품이 가지는 의의는 최소한 이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을 추리소설로만 한정지어버린다면 결코 옳은 말이 될 수 없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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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의 문제에서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간단할까? 또는 그 어려움은 어느 정도일까.
●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려울까? 단, 해답은 반드시 있어. 어때, 재미있지 않나?
수학이란 학문이 기본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라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고등학교 수학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와 그와 동문으로서 역시 천재 물리학자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유가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사고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시가미는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가 낸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시가미가 알려준 그 문제의 해답에 대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제대로 판단해내지 못하지요. 이시가미는 틀린 해답을 알려주었지만, 그 '틀림'에조차도 어떠한 논리적 오류는 없었었고,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그의 해답을 '옳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거지요. 그러던 와중에 이시가미의 대학동창인 또 하나의 천재 유가와가 등장하게 되고,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단연코 만드는 쪽이 더 어렵다'라 대답했던 유가와는 예의 이시가미가 낸 문제를 드디어 풀어냅니다.(풀어내는 게 더 쉽다고 한 사람이니까요. 허나, 이러한 문제를 '만드는 쪽이 더 어렵다'란 유가와의 말은 여전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 유가와가 아닌 이시가미임을 지탱해주고 있지요.) 유가와의 등장 초반부에 이시가미는 이러한 결말을 예감이라도 하듯 그의 등장을 "절대로 완벽하다고 믿고 있던 수식이 예상하지 못한 미지수 때문에 서서히 흐트러져갈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라 표현하고 있지요.
소설은 천재적이란 수식어가 붙어 마땅한 두 사내의 한마디 한마디조차를 그냥 흘러보내어서는 안되게끔 짜여져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아스코에게 유가와는 자신의 옛 친구인 이시가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는데, 읽을 당시엔 저도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습니다만, 소설의 결말을 다 알고난 후에 되돌아보는 이 말은 이미 "작가가 독자에게 이 소설의 결말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더군요.
순수하지요. 이시가미라는 사내 말입니다. 그가 구하는 해답은 늘 단순합니다. 몇 가지를 한꺼번에 구하지 않아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 또한 단순해요. 그래서 망설임이 없지요. 사소한 일에 발목이 잡히거나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겁니다. 얻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늘 그런 위험과 같이 하지요.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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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소설을 그저 '엄청나게 훌륭한 추리소설'로 한정짓는 것은 위에 언급된 위화의 문학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는, 아주 가슴아픈 사랑이야기, 바로 그 '사랑'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때문이지요. 저의 해석이 맞다면... '기하학 문제인 듯이 보이는, 사실은 함수에 관한 문제를 낸다'란 이시가미의 말을,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정확한 핵심을 이해한 유가와가 이를 '위장전술의 문제'라고 파악했었듯, '힌트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범인의 술수에 말려드고 마는 그런 장치'는 단순히 소설의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에서도 사용된 것이 되는거지요.
물론... 이 소설에서 '사랑'을 빼낸다하여도 정말 훌륭한 추리소설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전에 읽었던 존 그리샴의 「사기꾼」에서 작가 스스로, 또한 주인공마저도 자인했던 헛점들이 거의 없는, 「사기꾼」에서 '반전'이라 표현되어졌던 사건들은 이 소설의 결말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유치원애들의 코묻은 장난일뿐이라는 걸, 아마도 두 소설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실꺼라 생각이 될만큼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제가 이 소설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말한다는 것이 예의가 아닐꺼라 생각되기에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제가 쓴 이 글이 당췌 뭔 소리를 하는건지 어쩌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소설의 이야기속에서 '사랑'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너무도 크기에, 소설의 주인공 이시가미의 심정을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란 위화의 설명을 더해 이해했던 당신이라면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란 이시가미의 말이 그 역으로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음에, 유가와가 말했던 '(이시가미는) 얻는게 아무것도 없어요'란 말이 기어이 실현되었음에 너무 아쉬워 차마 책의 뒷표지를 덮어버릴 수 없었었다고, 이 소설의 '사랑'이 그토록 마음아파 '헌신'이란 단어를 빼고는 그 어떠한 제목도 성립될 수 없을꺼란 말로 당신으로 하여금 이 소설을 꼭 읽어보고싶다.란 욕망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시가미의 사랑... 문득 김장훈의 '그대로 있어주면 돼'란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오르더군요. "니가 매일 다니는 골목 그곳만 그대로 있어 주면 돼. 니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날 위해 울지는 마." 하지만... 야스코는 결국 웁니다. --;;
책이란거... 읽으면 읽을수록 이제껏 이 좋은 책들을 읽지못한채 "이미"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어버렸.다라는게 너무도 아쉽게 느껴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더군요. 그 샘이 대충이라도 마를때까지 가고 싶다면... 대체 몇 살까지 살아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