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등의 실현?
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가 '평등'일진데, 그 '평등의 실현'이 참으로 애잔한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군 훈련소에서였지요. ---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취급/대우를 받았었으며 똑같은 일들을 해야만 했었던,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던 시간 4주였었습니다. 허나, 그곳 또한 나름의 한 '사회'인지라 그 '사회'내의 고유한 판단기준에 의한 개개인에의 평가 역시 바깥의 사회와 다름없이 내려졌지요. 물론, '훈련소'라는 사회 내의 평가 기준은 바깥 사회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서울대 대학원 출신의 동기가 동작이 빠릿하지 못하다며 연신 구박을 받았던 반면, 지하술집 주방보조로 있다왔다는 동기는 허접한 과도 하나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과일접시를 만들어 내, 소대장들의 찬탄(!)을 받았던,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학벌'로부터의(free from) 평등을 훈련소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 과연 그 현상을 가리켜 '학벌로부터의 불평등'이 사라졌다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잠시나마 사라져버린 듯 했던 '학벌로부터의 불평등'은 (우리 소대 내의) 구성원들 모두의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와 해소되고 끝내 평등을 이루어낸 것이 아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 안에서 한 개인의 '쓰임새'의 유용성에 따른 재평가, 즉 엄연히 말해 그 또한 다른 버젼의 '불평등'이었을 뿐인 것이죠. 그렇다면,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었던 동기와, 지하 술집의 주방 보조라는 사회 생활은 선택했던 동기, 그 둘의 선택은 --- 어떠한 사회에 속해 있는가에 따른 순간적 '불평등'만을 초래할 뿐, 전체적으로는 '평등함'의 조건 하에서 도출된 결과였었다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2. 선택의 결과?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개인의 선택에 대해, 그 선택이 해당 경제 주체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그 선택이 그에게 가장 선호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
- 마이클 센델,「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가정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나의 노동력을 이렇게라도 시장에 공급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상황 하에서 결정된 선택은 결코,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없겠죠. 이런 점에서, 장하준 교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선택이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 장하준,「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중, 부키, 2014.
이 책,「20 VS 80의 사회」를 통해 저자는 바로 이 부분, '현재와 같은 불평등의 상황을 용인할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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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가 규정하고 있는 '중상류층'이라는 범주는 "넓게 보아 상위 20퍼센트"(p15), 혹은 "연간 소득 11만 2천달러 이상"(p16)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다룬 기존의 연구가 주로 '상위 1퍼센트'에 집중하였었다라면, 이 책은 상위 20퍼센트와 나머지 80퍼센트 간의 불평등을 다루고 있지요.
책의 제목이 자아내는 무거울 것 같은 선입관과는 달리, 이 책은 기본적으로 유쾌한 서술체로 쓰여져 있을 뿐 아니라, 저자의 주장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져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펼칠 주장의 내용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 전체를 다 읽지는 못할 독자들을 위해"(p20)) 깔끔하게 알려주고 있지요.
이 책에서 펴고자 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 중상류층은 나머지 대중으로부터 확연하게 분리되고 있다.(2장) 불평등은 어린 시절에 시작되며(3장)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4장). 이러한 계급 분리는 노동 시장에서 가치가 인정되는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가 중상류층에 압도적으로 많이 때문에 발생한다(5장). 하지만 중상류층이 불공정하게 기회를 '사재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6장).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며 이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은 중상류층이 부담해야 한다(7장). 이런 변화가 가능하려면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중상류층의 각성이 그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8장)."(pp19~20)
'(7장은 제외하더라도) 책 전체를 꼭 한 번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라 생각하기에, 위의 내용들을 구구절절이 요약하여 옮기지는 않겠으나,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불평등(의 해소)에 대한 새로운 관점/제안'만큼은 제가 이해한 한도 내에서 정리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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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은 돈으로 구분되지만 돈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 격차는 학력, 안전 및 안정성, 가족 구성, 건강 상태 등 삶의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물론 각각에 나름의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돈, 교육, 부, 직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평등 요인들이 서로 단단히 결합해 하나만으로도 누가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때 불평등은 계급 격차가 된다. 그리고 계급적 특권과 지위가 세대를 이어 지속될 때 계급 격차는 고착된 계급 체제가 된다. (pp38~39)
이 책에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은 단지 '계급의 분화'가 아니라, 그러한 계급 분화가 세대를 이어 영속화 되어간다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영속화를 가능케 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자가 꼽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역시나 '교육 문제'이지요.
【 능력 본위주의 】
현재 미국의 중상류층 사이에는 '나는 이만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중상류층이 1퍼센트를 비난하며 '우리가 99퍼센트'라고 외칠 때처럼,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기 마련이라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의 지위는 나의 능력(학력, 두뇌, 노력) 덕분이므로 마땅히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p18)
장하준 교수가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비판하였던 지점 중 하나가 바로, '기회의 평등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였었죠. 물론 그와 같은 '정당성의 부여'를 주장하는 측은 모두가 동일한 규칙을 적용받는 경쟁을 치뤄내었으니, 그 결과 또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을 '경쟁의 회피'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 특히 근자의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비판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주어진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하여, 정보 자체를 없애는 것이 과연 효율적이며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능력 본위'가 자동적으로 '공정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p120) …… 롤스는 단지 열린 경쟁만이 아니라 그 경쟁을 준비하기 위한 기회도 평등한 상태를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모든 이에게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질 것을 요구한다. … 시장에서의 성과는 우리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발달시킬 평등한 기회를 가졌을 때에만 공정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p125)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여) A와 B가 동일한 규칙을 적용받는 동일한 게임을 하고 있다지만, A는 타자석에서부터 출발하여 홈까지 와야하고, B는 3루에서부터 출발하여 홈까지 와야하는 시작점이 다르다면 그 경쟁을 가리켜 결코 공정한 경쟁이라 말할 수는 없다라는 비판에 대해서까지 적절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같은, '경쟁의 준비를 위한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 하에서의 '평등하다라 일컫어지는 경쟁'이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와 같은 실질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경쟁으로부터의 결과가 그 경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클레어 챔버스가 말했듯이 '각각에서의 결과는 그 다음에서의 기회'다. … 좋은 고등학교에 가면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잡기 위한 경쟁에 더 잘 준비할 수 있다.(p124)
물론, 그 이전 단계의 결과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개인의 노력 - 좋은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대학에 간 것 - 까지를 부인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러한 개인의 노력에 대한 인정이 곧,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사안이 됩니다. 더 나아가, 애초에 우리가 상정했던 '능력 본위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또한 후대에 물려주게 될 사회의 역동성에 어떠한 폐해를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 역시 함께 요구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지요.
시장에서의 경쟁은 경제 성장과 번영에도 필수적이지만, 능력 본위 원칙에 따른 계층 이동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장이 보상하는 종류의 능력을 키울 기회가 모두에게 공정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계층 이동성 없는 능력 본위주의'다.(p27)
이제, 우리가 의도적이든 혹은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기듯 소위 말하는 '대세'라는 것에 편승을 하여왔건 --- 이와 같은 잘못된 '능력 본위주의'가 어떻게 계급의 고착화와 대물림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 교육에 대한 인식 】
앞서 읽었던 몇 권의 책들에서, 현 금융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정의(define)되는 '능력'이란 것이, 아예 '판을 짜거나 바꾸어버릴 수 있는 힘'으로 변질된 것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노동 시장에서 인적 자본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져 왔다. … 그에 따라 교육은 중상류층 지위를 대물림해 재생산하는 주요 메커니즘이 되었다.(p26)
최순실의 딸인 정유라의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발언은, 결국 '교육'이라는 인적 자본을 향상시키는 사회적 시스템이 부모나 자식 세대에게만 달콤한 결과물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 세대 간의 대물림을 재생산해내어 '판을 짜거나 바꾸어버릴 수 있는 힘'을 내내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라는 점에서, 현 시점의 횡단면의 측면에서만 바라본 '능력 본위주의'라는 것이 시계열적으로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죠.
현 세대에서의 소득 격차가 다음 세대에서의 기회의 격차가 된다면, 경제적 불평등은 영속적인 계급 격차로 고착된다.(p27)
앞서, '능력 본위주의'라는 것이 일 개인 혹은 한 세대 내에서의 실질적으로 불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정당화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면, 저자는 이제 이에 더해, 교육이라는 일종의 유산(inheritance)을 통해 그러한 결과가 대물림되며 심지어 그러한 대물림이 정당화(justification)까지 되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급이 인위적인 형태의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재생산될 때, 승리자들은 그 결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쉽니다. 패배자들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123)
저자는 이와 같은 계급의 대물림에 현 시대의 교육이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교육을 통한 계급의 대물림은 (적어도 미국의 현실에서는)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그러한 의도적 행위의 일례로 '기회 사재기'를 들고 있지요.
계급의 영속성에 일조하는 또 다른 요인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바로 '기회 사재기'다. 이는 중상류층이 실력을 갖춰서가 아니라 경쟁의 판을 조작해서 승자가 될 때 발생한다.(p146)
이 문장은 어쩔 수 없이, 현 법무장관을 떠올려 줍니다. 그(혹은 그의 배우자)가 자녀에게 제공하였던 여러 기회들이, 그 불법성의 여부를 떠나 결국엔 현재의 계급을 자녀의 대에까지 이어주고자 한 의도로부터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앞으로 그는 더 이상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득 분포 사다리의 아래 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커서 위쪽 칸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면 위쪽 칸 아이들이 커서 아래 칸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더 많아져야 한다.(p93)
그가 했었다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줄었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면,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데 힘을 쏟자"란 발언이, 좋게 보면 좋게 보여지겠으나,
전체 인구 중 소득 분포의 상위 20퍼센트에는 언제나 전체 인구 중 20퍼센트만 속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수학적 사실이다. '상대적' 계층 이동성은 필연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한 명이 소득 분포 사다리에서 위로 올라가면 누군가는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이 내 아이일 수도 있다.(p25)
개천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때, 필연적으로 하늘에서 탈락되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녀는 아니기를 바라는 은연 중의 바람(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고백과는 달리 결코 '사회주의자'일 수 없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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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루려면 중상류층처럼 강력한 유권자 집단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더 작거나 더 먼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문제는 가난한 사람이나 이민자라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진보주의자들은, 슈퍼 리치가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 구도에서는 우리의 정치 성향이 어느 쪽이든 우리(중상류층)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p229)
상위 1퍼센트가 문제,라며 그들을 비난했었던 것이 (저자가 표현하고 있는) '우리(중상류층)'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언론과 정치가 만들어 낸, 고의적인 렌즈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책,「20 VS 80의 사회」를 읽고 났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희생'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킴에 있어 나(와 내 자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 희생에 동참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한 우리 사회의 (제가 참 싫어하는 단어들 중 하나인)지도층이라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잣대를 수용할 수 있는가,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들의 적격성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중상류층이 조금 더 고밀도의 주택단지를 짓도록 택지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우리의 집 값에 약간의 피해가 오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기를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 중상류층이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동질적인 학생들로만 배타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기를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 중상류층이 자녀가 명문 대학에 갈 기회가 줄어들더라도 동문 자녀 우대를 없애는 데 기꺼이 동의하기를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 … 나는 우리 중상류층이 자신의 자녀보다 운이 좋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세금을 더 내는 것이 기꺼이 동의하기를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pp222~223)
저자가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는다'라 표현한 구절에 대해, 이제까지의 그리고 지금의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자신있게 '그렇다'란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의 과거 행적을 볼 때 매우 회의적이기만 합니다. (마침,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 책에 대해 본인의 트위터에 짧은 글을 남기셨더군요. 미국인이 쓴, 미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이 책이 정녕, '미국 사회만'을 진단하고 처방한 책이라 생각하셨는지 사뭇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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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아이가 잘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권리를 갖지만 아이에게 '경쟁 우위'를 부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권리는 없다. 내 아이가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잘사는 것을 도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원이 유한한 사회에서는 한 아이의 상황이 향상되면 불가피하게 다른 아이의 상황이 (적어도 상대적으로라도) 악화되기 때문이다.(p150)
이런 류의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문을 쓸 때면, 항상 자신이 없어집니다. 책의 내용에 공감되는 내용들이 있다 한들, 과연 나의 삶이 그러한 주장들과 합치되느냐라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죠. --- 저 스스로에게 커다란 한 방의 망치를 맞은 듯한 느낌을 주었던 위 인용문에 대해 조 장관은, 또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지, 참 궁금합니다.
※ 함께 읽기를 권하여 드리는 책들 :「평등은 없다」,「팩트풀니스」,「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