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쪽에서 시작되어 93쪽에서 마무리되는 얇은, 게다가 사이즈마저 작은 책입니다. 이 책을 펼쳤던 지난 8월 26일 이후 저의 일상이,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이란 수식어를 사용해도 충분할만큼 바빴었으며, 또한 '이제까기 겪어보지 못했던'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었다는 사실이 분명, 이 책을 이제서야 다 읽어낼 수 있게 했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만, ---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또한, 다 읽고 나서 과연 어떻게 나의 감상을 정리하여 적어낼 수 있을까, 9월 7일에 쓰기 시작한 이 글은 언제가 되어야 마무리될까라는 더 큰 염려를 가지게 되는, 그만큼 작정하고 읽어야 하며, 또한 여러 번 읽어야만 그 진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녹록치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감상문은, 이 책에 대한 저의 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또한 그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각종 인용문들을 등장시켰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저의 오독(誤讀)으로부터 기인한 논리의 오류가 담겨져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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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은 나쁜 것인가 】
평등주의에 대한 옹호는 대부분 논증이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은 나쁜 것 같다는 막연한 도덕적 직관을 바탕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수가 많은 돈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를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본다.(p48) ……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p70) ………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p71)
한 사실에 대해 A와 B라는 상반된 판단이 존재할 때, '명백하게 A는 틀렸다'라는 주장이 곧 'B가 옳다'라는 것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 역시, 경제적 불평등이 나쁘다라는 것이 곧 '평등이 바람직하다'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동치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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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불평등의 현상 자체를 문제 삼는 것보다는, 그러한 불평등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결과된 것인가를 보여주었던 피케티와는 달리, 이 책의 저자 프랭크퍼트가 바라보는 불평등에 대한 시선은 그러한 '불평등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 자체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바람직 하지 않은 이유는 용납하기 힘든 다른 불평등을 유발하는 불가피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충실한 의지를 거의 뿌리까지 침식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적절한 입법적·사법적·행정적 감시를 통해 통제하거나 예방해야 한다.(p8)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의 소득 분배는 그야말로 기술적(technical) 차원에서만 논의 됩니다. 각 생산요소의 생산성에 의해 해당 생산요소의 가격(노동의 경우, 임금)이 결정된다는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따라서, 능력의 차이로 인하여 결과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암묵적으로) 일종의 정당성까지를 부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인 까닭은 능력주의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질 때 힘있는 이가 힘없는 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움직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류동민·주상영,「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중 p73, 한길사, 2015.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사회·정치 체제의 유지에까지 채택된 능력주의가 본래의 의미와 의도와는 달리 적용되어버리게 됩니다. 각 생산요소의 생산성에 근거를 둔 분배로 요약되는 애초의 '능력주의' 속 '능력'의 의미가 각 자본주의의 단계를 거쳐 현재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결국 --- "이러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자며 판을 짤 수 있는 힘"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제, 위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능력주의의 붕괴에 대한 염려'가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능력주의의 약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 이유는 능력주의가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주의 쇠퇴는 궁극적으로는 불평등한 분배를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 이왕휘,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부활 아닌 불평등한 자본이 고민을 요구한 것이다" 중, DBR 167호, 2014.12.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정의(define)한 '능력'이 아닌, '판을 짜는 힘'으로서의 '능력'으로 변질된 사회는 그같은 '능력'의 차이로 귀결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더 이상은 쉴드를 쳐줄 수 없게 된 겁니다. (정유라의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다'라는 류의 발언이 바로 '판을 짜는 힘'으로서의 '능력'을 뜻하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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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교수인 해리 프랭크퍼트가 쓴 이 책,「평등은 없다」는 위에서 인용해놓은 경제학자들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논의를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제 의견을 글로 밝히자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헌데 어찌보면 지나치게 '근본적이어 사뭇 과격하다'라 느껴질 수도 있는 방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경제적 평등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양의 소득과 부(한마디로 '돈')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칙이다. (p17)
저자가 의미하는 '평등'의 의미를 먼저 확실하게 각인하고 이 책,「평등은 없다」를 읽어야합니다. 저자는 오로지! '경제적 평등'의 의미에 국한하여서만 '평등이 도덕적으로 선(善)인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요. (재독과 삼독을 거쳐 더 확인하여야 할 부분이겠습니다만) 따라서 --- 장하준이 말했던 '기회의 평등'과 같은 의미는 (적어도 제 이해의 한도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가 상정하고 있는 '평등'의 의미는 위와 같은 범주에서만 논의되고 있다라는 점을 잊지 않고, 이 책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라는 것이죠.
이같은 범주 하에서,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 상대적 개념의 '불평등'이 아닌, 절대적 개념에서의 '빈곤'입니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기본적으로 빈곤과 과도한 풍요를 모두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 결과는 분명 불평등의 축소일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의 축소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다. 경제적 평등은 반드시 실현해야 할 도덕적 이상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충분한 수준 이상의 부를 소유함으로써 안락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다수의 구성원은 가진 것이 너무 적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다. (p16)
'충분한 수준 이상'과 '너무 적은'이라는 이같은 일종의 주관적인 판단의 기준 하에서 현 상황을 개선하는 이상(ideal)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개념은 '충분성의 원칙'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동일한 몫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덕의 관점에서는 각자가 충분한 몫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나는 평등주의에 대한 이 대안적 원칙을 '충분성의 원칙' - 돈과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가지는 것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는 원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pp18~19)
이 책의 핵심은 이같은 '충분성의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며, '화폐에 대한 충분한 소유'라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내용에 공감 혹은 반감을 갖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키가 된다라 생각합니다.
【 충분함은 가능한가 】
홍기빈은「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서, "수단의 양은 목적에 의해 제한되지만 목적의 추구는 무한하다"라는 명제를 통해, 화폐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목적의 추구는 무한'이라는 표현이 화폐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수단의 양은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라는 표현은, 이 책의 저자 프랭크퍼트가 주장하는 '충분성의 원칙'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라 이해됩니다.
충분성의 원리에서 '충분'이라는 개념은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보다는 기준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어떤 사람이 충분한 돈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가 많든 적든 지금 가진 돈에 만족한다는 의미 혹은 지금 가진 돈에 만족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미이다. 즉 그가 무엇이든 자신의 삶에서 고통이나 불만을 느낄 경우 그것이 자신이 돈을 너무 적게 가진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p55)
이같은 '목적의 추구는 무한'이라는 표현과 '수단의 양은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라는 두 가지 개념을 한데 섞는 것에서 우리의 일반적인 오류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돈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근근이 살아가거나 가까스로 버틸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이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 충분성의 원칙의 핵심은 돈의 분배와 관련된 유일한 도덕적 고려 사항이 사람들이 경제적 궁핍을 면할 만큼의 돈을 갖고 있는 하는 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정도의 돈을 가진 사람은 충분성의 원칙에 따르면 결코 충분히 가졌다고 할 수 없다.(p56)
즉, 저자가 제시하는 '충분성의 원칙'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의 자산이 빌 게이츠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하여 두 사람간에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라 말할 수 없다는 점, 더 중요하게는!!! --- 우리 일반 민중의 삶을 위로함에 있어, 이건희 회장이나 빌 게이츠처럼 돈이 많다하여 그 사람들이 행복하기만 할 것 같으냐류의 '얼치기 설교'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건희 회장이나 빌 게이츠에게 '수단의 양은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라는 명제는 그들이 그들의 자산(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의 부족함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다라는 것이 아닌, 비경제적 재화의 존재로 말미암아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것에 사용되어야 하지, 경제적 재화의 부족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민중에게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의 삶에 만족하여라'라는 결론은 민중들에게 '목적의 추구는 무한'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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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충분한 양 이하를 갖거나 충분한 양 이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타당해 보이는 것은 이 주장이 전제하는 가정 때문이다. 그 가정은 충분한 양 이하를 가진 사람들은 자원을 더 받게 되면 반드시 처지가 나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거짓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의 조건 개선보다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조건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충분한 양 이하를 갖고 있어서 형편이 무척 어려운 사람들에게 추가적 자원을 제공해봤자 그들의 조건은 사실상 조금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특정한 효용 문턱 이하에 있는 사람들이 추가적 자원을 제공받음으로써 효용 문턱이 더 가까이 가는 것이 그들에게 반드시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문턱을 넘는 것이다. 문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pp46~47)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보아도, 허무함 같은 것이 채워지지 않는 구절이었습니다. 굳이, 위 주장이 타당성을 보이는 예를 찾자면 '이산가족 상봉'쯤이 되지 않을까 싶지요. 헤어져 살아 온 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은 삶을 함께 (혹은 자유롭게 만나며) 사는 것일진데,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면 2~3일의 짧은 만남이 오히려 독이 되지 않겠냐란 저의 생각이 위 구절이 표현해줄 수 있다고나 할까요?
평등 혹은 불평등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보려 합니다. 마침(?) 법무장관 후보자의 과거가 우리 사회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종의 '평등'에 대한 재고라는 이슈를 가져왔기에, 그저 신문 기사에 나오는 표피적인 사항들로만 '불평등함'에 열받아하는 것이 아닌, 뭔가 더 근본적인 부분에의 앎이 필요하다 생각되기도 했구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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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도덕적 관심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다. 진정한 도덕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지이, 어떤 사람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해 어떠한가가 아니다.(p76) …… 어떤 사람들의 삶이 나쁘다는 사실이 악이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쁜 삶은 나쁘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 악인 것이다.(pp77~78)
어떤 발언이,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 비난 받는 것이 아닌, 그 발언과 그 행위를 누가 했느냐에 의해 지지와 비난이 결정되는, 정말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생각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이상함'은 결국 '(상대적) 비교'를 기본으로 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저만의)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절한 화폐량을 판단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문제를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와 비교할 때 자신의 경제적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중요한 도덕적 관심사라도 되는 양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렇듯 평등의 원칙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피상성에 기여하고 있다.(pp23~24)
이 책의 저자도 또한(?) '평등은 바람직하다'라는 일반적/잘못된 인식이 그와 같은 '비교'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되기도 하지요.
단 한 번의 독서로 이 얇은 책의 내용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저 스스로의 이해력과 집중력에 큰 아쉬움을 느꼈던 독서였었습니다. 불평등에 관한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본 후, 거의 100%의 확률로 다시 이 책의 내용을 음미해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단지 초독(初讀)의 결과물로서 이 어설픈 감상문을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