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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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 학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수많은 금지의 규범과 그보다 더 많은 강제 규범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규범들의 공통점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규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지고 규범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의 예를 들었던 2001년 김찬호의 지적이 최소한 이 책이 세상에 나왔던 2011년까지는 현실의 교육 현장에서 그 굳건한 지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라는 걸 우리는 이렇게 알게되는겁니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해온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의 가르침과 <세계 명작 동화>가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존의 명제에 대해 '(이제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을만큼 커진 합리성에의 의문'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고 있듯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더 이상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화 속 주인공들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독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그 동화 속 주인공들에 씌어져 있는 오해와 비합리를 풀어보겠노라 말하고도 있지요.  네! 이 책은 그렇게... 우리 모두가 어릴 적 한두 번쯤은 보았던 총 열네 편의 이야기들 속 주인공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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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도 않은 여러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며, 한 사람의 저자가 쓴 책에 대해 그 단락별로 동의함, 동의할 수 없음, 그리고 때로는 꽤나 심한 거부감까지를 느꼈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아마도 제가 독서를 취미로 삼고난 이후 처음이 아니었나 싶네요.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듯이, 어쩔 수 없이 이보다 먼저/바로 직전게 읽었었던, 제가 상당한 정도로 공감했었던 진중권과 김찬호의 책들로부터의 영향/책들과의 연관성이 이 책을 이해해감에도 작용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김찬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존엄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찾는다"라 말했으며,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은 이의 한 예로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을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로부터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주로 남성인)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여성인) 피해자가 되곤 하는데, ​이는 우리의 사회/개인 윤리가 거의 전적으로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되어 있기에,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한 것이 되며,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당신이 대접받고 싶으면 상대방을 배려하라'라는 교훈으로 상징되는 동화 <여우와 두루미>로부터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으며, 용서하고 싶지 않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가 있다라는 것에 대해 이제까지 배워본 적이 없는 '우리'이기에,​ (그러한 '우리'중 한 사람일) 직장의 남자 상사의 성희롱을 당한 (또한 '우리'중 한 사람일) 부하직원인 여성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가해자도 충분히 사과 했으니 이제 이 문제는 그만 마무리 짓는걸로 하자'라는 화해의 강요를 받아들여야만 해왔던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해자는 용서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이를 넘어 더군다나 오히려 당당해지기까지 했었었다는 겁니다. ---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각각의 동화에 저자 자신만의 '가정'을 대입해 해석하고 있는데) 자신 특유의 '가정'을 더해 이 이야기를 해석한 저자는 이 <여우와 두루미>라는 동화로부터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이 과연 합당한 가르침인가'라는 질문까지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신의 대답으로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문제를 계속 유발시킨다. …… 윤봉길과 전태일의 삶이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화해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웠으며, 또한 상당한 공감을 아니할 수 없었어요.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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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사인 저자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책 전반을 통해 인용하고 있는데, 동화 <분홍신>에 관한 부분은 제게 공감과 동시에 혼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동화들 중 유일하게 낯선 것이었기에 우선 저자가 요약해 놓은 <분홍신>의 줄거리를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소녀는 분홍신을 신고 싶어 한다.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낙이다. 분홍신에 대한 소녀의 꿈은 소녀가 숨 막히는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가난한 그 소녀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뜻한 저녁 식사와 포근한 침대, 추위를 막아줄 외투, 포근히 어루만져 줄 애정 어린 손길 ……. 그런데도 소녀는 분홍신만을 원한다. 드디어 소녀는 분홍신을 갖게 되었다.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최고의 행복을 맛보면서 춤을 추는 소녀 …….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계속해서 끝도 없이 춤을 춘다. 분홍신은 절대로 벗겨지지 않고 신을 신고 있는 동안은 춤을 추어야만 한다. 결국 소녀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춘다. - pp103-104​

​저자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아마도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쉬 더러워지지도 않고, 남들로부터의 유난한 시선을 끌어들이지도 않는 검정색이나 갈색의 신발이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하기에 동화 속 소녀가 원했던 '분홍신'은 그 사회의 일반적 규범과는 한참을 동떨어진 신발이었던 것이고, 결국 이처럼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욕망은 아예 가지려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이 동화로부터 배웠었노라/배워야했었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동화의 작가인 안데르센이 역설적으로 혹시 '소녀가 분홍신을 탐낸 것이 그리도 잘못한 일이냐'라 묻고 있는걸지도 모른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실은 폭력을 수반했었던 '근대화 자체를 비판'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우익은 그의 말을 '서양도 그러했는데 우리라고 뭘!'이란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안데르센의 참뜻을 오해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이죠.) 「사회를 보는 논리」의 저자 김찬호가 지적했듯이, 우리 대한민국 사회도 이처럼 '일반적 규범과 동떨어진 것'에 대해 '비정상/일탈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 있으며,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그 사회적 경향은 예의 학교라고 예외는 아닌겁니다.

​(체벌이 사라지고 벌점이 체벌을 대신하고 있는) 학교는 일체의 분홍신을 금지한다. …… 사실 분홍신을 신으면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금지될 뿐이다. …… 왜 학교는 이런저런 분홍신을 금지하는 데 그토록 열을 올리는 것일까? ……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이 학교에 바라는 것이라면, 학교는 복장 규제등을 통해 세상의 요구에 답하고 있다. 부당한 규제를 별다른 불만 없이, 혹은 불만이 있더라도 속으로 삭이며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 기업의 부당한 방침에도 묵묵히 일만 하는 노동자로 최적화될 것이다. 이때 규제가 부당한 것일수록, 그리고 강제하는 방식이 억압적일수록 효과는 더 커진다. ​…… 그러므로 학교에서 분홍신을 금지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또한 생물적인 필요가 뒤섞여 만들어진 문화의 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두를 교육이라 부른다. 정말 학교에는 교육도 아니면서 교육인 척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 pp 105-106, 115-116

사실 저 또한 그러한 부당한/강제적인 규제들을 중고등학교 시절 받았었습니다만, 다행히도?/아쉽게도? 그러한 규제들이 부당한 것이었으며 그 속에 자본주의의 교활한 노림수가 있었다라는 걸 전혀 알지는 못했었지요.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있는) 그러한 무지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홍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학교에서의 규제 - 두발, 복장, 심지어 신발에까지 - 들에 대해 저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는 또한 저자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분홍신>이라는 동화가 만들어진 당시, (안데르센의 실제 의도가 어떠했었는가를 떠나) 풍족하다 말할 수 없었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도출된 사회적 합의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검정색이나 갈색의 신을 신는 것이 결국엔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면... 그렇다해도 저자의 위와 같은 비판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걸까요? '꿈같은 이상'말고 '눈앞의 현실'... 이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해도 말이죠.

바로 위에서 저는 '일반적 규범'이란 문구를 '사회적 합의'라는 문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바로 이 부분에서 저자는 저와 (조금 쎈 표현으로 쓰자면) 180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일반적 규범'을 누가 만들었느냐, 그리고 그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것은 '사회적 합의'가 될 수도, 혹은 '폭력으로 강요된 굴복'이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모든 사회가, 그리고 한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시간에 걸쳐 그 과정이 똑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대체적으로 그러한 '일반적 규범'이 '사회적 합의'가 되는 과정 속에 '선의가 더 많은 지도자'를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저자는 그 대부분의 과정에 '불의가 더 많은 권력자'를 상정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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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처럼 옛날에 제가 아무런 걸러냄없이 이해했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만 기억해내고 있는 동화들에 대해 새롭고도 의미있는 해석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만, 다음의 두 이야기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아기 돼지 삼형제>는 우리에게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자라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더디가도 제대로 가기'를 권한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OK! 동의합니다. 헌데 저자는 여기서... (물론 제 의견!!!입니다) 무리한 비약을 하고 있지요.

​'좋은 집 = 견고한 집 = 벽돌로 지은집'이라는 공식 …… 단단한 벽돌집을 짓고 사는 서유럽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탓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 (늑대의 공격)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 p 58

이처럼 서양인에 의해 쓰여진 이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가 그 기저에 서양의 동양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저자의 해석에 당신은 동의하실 수 있으신가요? 이거야말로 흔히들 말하는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모습'이 아닐까요? 저자가 비록 자신을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은 올바른 방향설정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어느 부분에선가는 자신의 꼬리를 과감히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라 생각하기에, 이 동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제겐 방향도 틀리고, 꼬리를 잘라냈어야하는 시기도 너무 오래전에 놓쳐버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이게 다가 아니라!!!

​이러한 동의할 수 없는 저자의 해석은 <늑대와 양치기 소년>에서 절정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읽다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할지에 대해 약간의 고민을 하기도 했었었지요) 이 동화를 통해 저자는 '양치기 소년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는데,  예의 자신만의 가정을 대입시켜보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결국 다음과 같은 서술로 양치기 소년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 동화 속의 양치기 소년은 어린 나이에 양치기라는 힘든 노동에 투입되어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채 생활하는 삶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소년에 대한 학대가 마을 사람들의 묵인 아래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여기에 심지어 <어린이 · 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21조 1항>까지 인용해, 이 이야기를 아동 학대와 연관지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이 너무도 외롭고 심심해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소년의 거짓말만 문제 삼는 것은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나무라는 처사가 아니겠는가'라는, 당췌 이걸 '진보적'이라 해야하는건지 아니면 '파격적'이라 해야하는건지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랄 옆차기'라 표현하고 싶습니다만  고민같지 않은 고민을하게 만드는 과잉변호를 더하고, 이들도 모자라 이 동화가 말 잘듣는 아이들을 만들려는 어른들, 더 나아가!!! 백성들이 말을 잘 듣게 하려는 통치자들에게 특히나 더 사랑받았었을꺼라는 과감한 추측으로 결론맺고 있습니다. (저자가 '불의가 더 많은 권력자'를 일반적인 지도자상으로 보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리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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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글>에 나오는 다음의 표현이 어쩌면 '동화'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그래서 (이들 동화의 속뜻을 알지 못했던) 무식한 너의 부모는 이러한 동화책들을 너에게 사주고 읽으라 했던 것이고, 외로웠을 뿐만 아니라 노동착취에 인권 침해까지 당하고 있었던 양치기 소년을 '나쁜 거짓말장이'로만 기억하며 자라난 너는 결국 영문도 모른채... 교묘한 자본의 논리에 그저 조종당하기만 하고 있는 1단위의 '노동력'뿐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었으니 너의 자녀에게는 이런 <세계 명작 동화>는 보여주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한다. ---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런 건 결코! 아닐겁니다. 근데... 그럼 뭔데?를 잘 모르겠긴 합니다. 이럴 때 기억해내라고... 「죽음의 중지」를 옮긴 번역가 정영목C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신건지도 모르겠네요. 롯데의 야구 두 게임 시청을 포기한 시간동안, 어렵지 않게/나름 흥미롭게 읽어냈던, 그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독서로는 후회스럽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던 책의,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써낼 수 있었었던 독서 감상문의 마지막으로도 좋을 이 표현. --- "정색을 하지 않은 소설에 정색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하지말고 그저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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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논리 - 개정판 문지푸른책 밝은눈 3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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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빨리 변화하고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세계관으로 삶을 영위하고 사회를 운영하는 데 한계가 드러날 때 …… 당연시되어온 명제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나타날 때 …… 우리는 확고하게 지탱되어온 신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나의 사고방식에 허점은 없는가? 우리들 사이에 통용되어온 상식에 어떤 모순이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는 거기에 일정한 틀을 제공하는 지식의 체계가 암묵적으로 깔려있는데, 그러한 체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왔으며 그 변화의 속도는 또한 (개인의 삶이나 사회의 변화에 비하여) 매우 느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지식 체계를 일종의 삶에 주어진 변할 수 없는 조건, 즉 '환경'으로서 인식하게 되고 그러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보통 때에는 의식의 대상으로조차 떠오르지 않게 만든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뭔 소리냐구요? 

​저자는 이러한 상황의 단적인 예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우화를 들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 우화가 '열심히 노력한 자가 결국엔 보상을 받는다'는 교훈을 가르친다라 배웠었습니다. 그 가르침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 우화는 이러한 교훈을 담고 있다. 질문 사절. 끝!'이라 말해주었고, 그 결과 '열심히 노력한 자는 결국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라는 교훈은 우리의 머리속에서 이미 하나의 '변함없는 객관적 사실'로 각인되어 버림과 동시에, 이 경주가 왜 애초부터 꼭 땅에서 치루어지는 걸 전제로 했어야했나, 즉 만약 똑같은 경주가 물에서 이루어졌다면 어떠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느냐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아예 생겨날 수조차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은 이러한 '당연시되어온 명제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나타나'고 있기에 그러한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이 상황에 그저 우왕좌왕할 수밖엔 없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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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여기서 정보사회로.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유난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서구에서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비교적 큰 시간차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 시간대가 공존한다. 근대화의 급속함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를 좁혀 한국인 몸속에 강한 전근대성을 남겼고, 뒤처졌던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특유의 성급함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거리를 좁혀 한국을 그 어느 곳보다 미래주의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20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몇백만 년 동안 겪은 변화를 능가한다. …… 그러한 변화가 가져다 주는 충격과 혼란은 한국 사회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산업화의 대열에 갑자기 뛰어든 사회일수록 훨씬 증폭되어 나타난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체험 속에는 보릿고개의 처절한 기억과 공업화의 힘찬 약진,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이 공존하고 있다. …… (이러한)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은 우리 삶의 뚜렷한 발자국이다.

- 김찬호 著 「사회를 보는 논리」 중​

 

이 책 「사회를 보는 논리」는 여러 면에서 「호모 코레아니쿠스」와 같은 상황인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저자 김찬호 역시 우리나라가 지금 처해있는 문제적 상황의 근본적 원인의 가장 주된 요인으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로부터의 가르침으로 대변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잘못된 교육'을 꼽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 진화의 비결을 '질문할 수 있는 능력'으로 들고 있는데, 인간은 주어진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지요. 헌데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미 정해진 물음과 정답의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회로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지식의 주체가 되어볼 기회를 아예 가져보지도 못했었다는 겁니다. 그런 교육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에 과연 답할 가치가 있는가?'와 같은 주체적 의문은 아예 생겨날 수도 없었었으며, 주입되어진 수많은 지식들조차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그저 단순히 잡다한 지식의 나열에만 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지요.

이미 축적되어 있는 굳은 지식을 암기하는 쪽으로 치중하고 있는 지금의 학습은 근본적으로 궤도 수정되어야 한다. 그 기능은 기계가 더 훌륭하게 수행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이터는 지금 기술로 조그만 침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칩 수천만 개로도 못 해내는 창의력이다.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이 '창의력의 부재'와 관련하여 --- 70-80년대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그 대한민국이 결코 당시의 '기술강국'일 수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기능'과 '기술'의 차이로부터 연유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술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지만, 기능공은 그저 깎으라는 것만 선반으로 깎을 수 있을 뿐, 왜 이런 모양으로 깎아야하는지 혹은 이것이 나중에 전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게될지를 전혀 그려낼 수 없다는 거지요. 김찬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주력해서 연마해온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을 본뜨는 복제 능력이었다. 그것은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그 능력을 키우는 데 교육의 모든 힘을 집중시켰고, 그 능력에 따라 자리가 배분되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매우 숙달되어 있다. …… 말하자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 자신의 발전 모델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바깥에 의지해온 것이다. ……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 …… 더 이상 '봐주지 않는' 환경에서 각자가 자기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지금까지 우리가 연마한 실력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요구되는 것은 목표 그 자체를 스스로 설정하는 안목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마인드이다.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그럴듯하게 외형만 부풀려 온 교육 시스템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문득 이번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을 통해 현재의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제 더 이상은 미뤄질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위에서 서술해 놓은 대한민국의 교육 패러다임은 여전히 현재에까지도 지속되어와, 아이들은 선생님 혹은 부모님들이 '하라는 것만 열심히 그리고 잘'하는 것만을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상과제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어져왔고 그 결과, 고등학생이나 되는 아이들마저도 배가 현저히 기우는 상황에서조차 탈출해야겠다는 본능까지를 억누른 채 "제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지시에 따랐었다라는 상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한 그러하기에 그들의 죽음이 결국엔 대한민국의 교육때문이었다라는 비판을 극복해낼 수 있는 대응논리가 과연 있을수 있을지... 와 같은 의문들, 그리고 그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러한 교육 자체를 바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나하는 생각말이죠. 

2001년에 발간된 이 책의 주장이 지난 십몇 년간 지속적으로 무시되어왔기에 우리는 결국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을 막지 않은 것이 아닐까싶기도 한 뒤늦은 아쉬움과 함께, '하라는 대로만 하면'이라는 당연시되어온 명제가 무너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나타난 이제, 대한민국의 교육이 과연 변화되기는 할 것인지, 또 변화된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될 것인지는... 또한 앞으로 그 대한민국의 교육에 제 아이를 맡겨야하는 부모된 입장에서는 정말로 고민해 보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과연 대한민국의 교육관료들도 이러한 고민을 하고는 계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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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대학에서 교양과목의 교재로 사용되기 위해 쓰여진 듯한) 이 책은 이 밖에도 문화, 환경문제, 건강, 도시 계획 등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제가 특별히 관심있게 읽었었던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문화의 상대성을 먼저 거론하는데, 이는 사회에 따라 중시되거나 혹은 하찮게 여겨지는 문화의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벤다이어그램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벤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자면, 서구에서 개인들 간의 관계는 서로 접한 원들로 표시할 수 있다. 서로 접한 원들은 하나의 점만을 공유한다. 반면 공동체 정서가 강한 동양에서 원들은 종종 서로 겹쳐 교집합을 이룬다. 이 겹쳐진 부분이 인간미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교집합에서 또한 남의 옷차림에 간섭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야단치거나, 트인 장소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들어낼 권리가 나오기도 한다. ……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은 내가 내리는 결정에 주위 사람들이 개입할 권리를 의미하며, 내 삶에 주위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자격을 의미하며, 내가 하는 행동에 주위 사람의 눈이 감시할 권한을 의미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남에게 양도하는 이 권리만큼 남도 나에게 같은 양의 권리를 양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세상 너 혼자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은 바로 이 원칙의 단호한 표명이다.

​저자 김찬호는 이 책에서 '노처녀 히스테리'를 바로 이 교집합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말을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것이 결혼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욕구 불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정 부분 그러한 면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독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사회의 눈이 그들의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하고 그것이 누적되어 심리적인 '비정상'으로 굳어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는 (개인/집단간 문화의 상대성을 고려하지 않는 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를 거부하고 간단하게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들을 '비정상' 혹은 '일탈자'로 규정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려하지 않게 되며, 그러한 사회 분위기의 결과로 나타난 내면 세계를 개성적으로 가꿔가면서 그것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역량의 부족은 결국 한국인으로 하여금 외면적인 것에 집착하게되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아주느냐에 따라서만 자기를 규정하게 되는, 즉 자기 존엄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찾게 만들었다는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한국 사회의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이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죄책감이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지만, 수치심은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 타인들에게 드러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 분이 자신의 형에게 뇌물을 주었던 대기업 사장을 향해 "배울만큼 배운 분이 촌로를 찾아가 뭐하는 짓이냐"는 발언을 했고, 그 발언을 들은 날 그 대기업 사장이 자살을 한 일을 진중권은 그의 자살을 뇌물을 주었다는 '죄책감'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 자신의 스타일이 구겨진 데서 오는 '수치심'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더군요. (저 또한 이 시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찬호는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보편적 욕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체면 문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있게 된 근본적 원인을 저자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빈곤함때문이라 지적하고 있는데, 진중권 또한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옥정호의 2001년 작품 <꿈의 궁전 - 봄클 웨딩홀>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빈곤함이 초래한 도시 건축의 천박함을 한국인의 삶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꼬집어주었지요.  

 

장식성을 갖고 싶어 안달하는 건물 …… 생명 없는 회색 시멘트 건물들 틈에서 요란하게 양식적 파격을 자랑하는 한국의 예식장 건물들. 중세의 궁전이고 싶어하는 예식장을 배경으로 은발의 왕자와 금발의 공주가 드라마를 연출한다. 유치원 꼬마들을 위한 동화극을 연상시킨다. 백마 탄 왕자와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결혼의 '이상'이요, 저 뒤에서 무뚝뚝하게 빨래는 걷는 여인은 한바탕 꿈을 꾸고 난 왕자와 공주들 앞에 닥칠 결혼의 '현실'이고 …… 또한 이것이 한국식 포스트모던의 도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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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와 「사회를 보는 논리」,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우울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않느냐'라는 반론 또한 충분히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만, "역사는 삶의 시간적 축적이고 그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축적은 연속적인 과정인 만큼 오늘 나의 삶으로도 이어지는 고리들이 있다"라는 김찬호의 말을 빌어, 우리의 역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현재의 문제점들을 정확히 알고 그것들을 극복해낼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은 분명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 개별성/배타성'을 지니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인정한다면... 결국 그러한 반론이 가지는 무게는 현저히 줄어들 수 밖엔 없지않을까 싶네요. ---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분명... 저에게서도 발견되는 것들일겁니다. 사회를 바꾸어 간다라는 건 그렇게 작고 작은 개인의 문제점들을 스스로 고쳐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겠지요. 나는 과연 내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있는가하는 자책, 또 나는... 김찬호가 지적한 '문화적 빈곤함', 그리고 진중권이 지적한 '한국인의 천민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하는 반성... 모두 저를 고개 숙이게 만들어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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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제가 태어난 이 곳 대한민국을 떠나 생활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건 그야말로 '생활해보고 싶다'의 수준이었지 결코 '살고싶다'는 아니었지요. (술 좋아하는 제 나이 부근의 남자에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천국!이니까요. ^^;;) 헌데 어젠가...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자하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50%에 근접하는 학생들이 이 나라를 떠나살고 싶다라는 응답을 했다더군요. 물론 '세월호 참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여론조사였었음을 감안해야겠지만, '외국에서 한 번쯤 생활해보고도 싶다'라는 욕망이 저의 20-30대엔 '외국이 더 좋을 것 같기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었다면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여기 대한민국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아예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라는 건 그야말로... 상당한 놀라움이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각종 추악한 모습들, 그리고 집단적 추모를 뛰어넘어 결국엔 '국가적 우울증'을 걱정하고 있는 이 나라. ------ 사건 이후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되어 나타난 여러가지 사회적 현상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느냐를 떠나... '왜! 우리나라는 이럴까?'라는, 제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매우 무책임할 수도 있는 자조적 의문,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아 지금의 나이에까지 이르러 있는 제가... 과연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문득 들더군요. 여기서의 '얼마나'에는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도 포함되어야하겠습니다만, 당장은... 제가 살아온 시간내에서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래서 해봤더랬습니다. 그때 그때 '언젠간 읽겠지'라는 생각으로 사놓았던 책들 중 다행히 이에 관한 책들이 몇 권 되더군요. 그렇게 하여 정해 본...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사뭇 포괄적이고 주관적이기도할 선택이 가능한 "ring book"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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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성'이나 '정체성'이라는 단어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인의 몸에서 그 '구성된' 층위를,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하비투스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작년에 1950년대와 1960년대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참으로 슬프다'라는 감정을 가졌었더랬습니다. 물론 '외부/내부로부터의 침략'이라는 불행이 그 슬픔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만, 한 순간의 쓰라린 기억이 이후 그의 일생에 걸쳐 어쩌면 삶 자체를 변질시키기도 하는 일 개인의 경우에서처럼 '침략'으로 인해 그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주체가 걸어가게될 길이 달라져야했다라는 게 사실 훨씬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불행스런 대한민국의 운명이었기 때문이지요. 

 

저자 진중권 교수는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라는 미셀 푸코의 말대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근대화 또한 '전태일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잔인한 폭력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 말로 '근대화 자체를 비판'했던 푸코완 달리 대한민국의 우익은 푸코의 그말을 자의적으로 인용해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라는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시켜버렸다는 것이지요. 

 

'박정희'라는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노동력의 시간적 이동' 즉, 농경사회의 자연적 리듬을 따르던 신체들을 공장의 시간과 기계의 속도에 강제로 뜯어맞추는 과정을 통해 농민들을 일종의 '산업전사'로 변모시켰고, 어느덧 이러한 산업화 과정을 일정 정도 마친 대한민국은 이 땅의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은 리듬을 요구하게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경사회의 자연적 속도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 이주노동자들은 이 땅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사회는 이를 곧바로 '게으름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아예 그 게으름(?)을 그들이 살다온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으로 확정지어버립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인간을 배려하고 삶의 질을 고려할 의사가 전혀 없다'라 사뭇 서슬퍼렇게 해석해버리지요. 

 

이제 세상이 바뀌어 대한민국의 권력이 국가로부터 시장으로 전이되면서 과거엔 국가를 향했던 공적 충성의 의무가 고스란히 회사를 향한 사적 충성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기업에로의 인력공급원으로 전락해버린 대한민국의 대학, 그리고 대학생들은 과거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치고 있다는 것인데, 언뜻 자발적으로 보이는 이 '존재미학'이 사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석입니다. 새로운 한류라고까지 불리우기도 한다는 우리나라의 성형열풍을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들기를 포기한, 바야흐로 자신의 신체까지를 예술의 재료로 만들어버리는 현상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은 그에 동의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왜 (다양한 관점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저에게 일깨워주기도 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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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가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주제를 놓고 정녕 알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었고, (다행히도!!!) 저자 진중권 교수 또한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분석보다는 '한국, 그리고 한국인의 의식/문화'에 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부르주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궁정에서 귀족문화를 접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고, 몇 세대에 걸쳐 완벽하게 자신의 몸에 체화시킬 수 있었었지만, 급속한 근대화를 보내야했던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옛 양반들의 교양과 예법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었다는 차이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상민(부르주아)들이 막대한 돈을 주고 양반신분을 사려했던 주요한 이유는 양반들의 교양이나 격조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차별해도 되고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높은 신분 그 자체였었었고, 일단 그러한 신분을 획득한 상민들은 그 이전에 자신들이 당해야했었던 차별의 한을 풀기위해 더 필사적인 차별을 했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그렇지않아도 앙상해져버려 그저 관혼상제 의식의 화려함이라는 껍데기정도만 남아있었던 양반문화라는 것은 결국 '신분제 의식'이라는 형태로 현재에까지 계승이 되었다는 거지요.  

 

저자는 이를 '한국의 천민성'이라는 사뭇 드러내놓기 꺼려들 하는 표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로 인해 현재에도 판사와 같은 일부 직업을 (판사를 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판사 스스로조차도)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신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실이 생겨났으며,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비정상적인 정도로 (양반의 또 다른 버젼인) '사회적 지위'를 욕망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일반 대중과 뚜렷하게 선긋고 싶어하는 엘리트층이 만들어 낸 명품이라는 아이콘에 대해 결국 한국의 대중은 짝퉁을 통해 그러한 선을 지우고 상류층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허구적으로나마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가지!!! --- 이 책 전반을 통해 진중권 교수는 내내 황우석 박사를 '까고 '있는데, 저자는 황우석 사건 역시도 과학기술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싶은 대중적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허구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국의 천민성'이 그럼 과연 오로지 과거로부터의 아름답지 못한 유산이기만한 것일까?라는 저의 의문에 대해 저자는 '절대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지요. 가정에서 아이를 사회로 내보낼 때부터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하게 더불어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남들의 위에 서느냐'를 중시하는 것, 한마디로 아이가 사회화라는 것을 공공의 규칙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의 문제로 사고하게끔 부모가 앞장서서 만들고 있는, 엄연한 현재진행형의 현상이라는 거지요. 시험문제는 하나라도 틀리면 세상이 무너질듯 난리를 치면서도, 내 아이가 공공의 규칙을 깨는 데서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부모들로 인해 이러한 천민성은 여전히 꾸준하게 재생산되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은 규칙을 따르는 것을 '융통성 없는 것' 심지어는 '무능한 것'으로까지 여기고도 있고, '떵떵거리며 살기'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규칙정도는 위반해도 괜찮은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무난히 자리잡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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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유시민을 이길 사람이 없고, 글로는 진중권을 이길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저자 스스로 이 책에 인용해놓고 있더군요. 가끔 인터넷에서 보이는 그의 짧은 트위터 글을 보면서 저 또한 종종 (전부는 아니었지만, 50%는 훨씬 넘는 빈도로) 그가 적어놓은 촌철살인의 비유에 감탄을 하기도 했었었습니다만, 처음 읽어본 그의 호흡 긴 문장들, 그리고 그보다는 저자의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들은 저로 하여금 이 책을 읽었다라는 것을 매우 유익한 독서였다라 느끼게는 해주었습니다. 심지어 황우석 사건에 대해 책 전반을 통해 '기-승-전-황까'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조차에도, 저자가 펼치고 있는 주장/논리의 과정에 동의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최소한 '누군가/무언가를 비판하려면' 이 정도의 논리 자체는 가지고 있어야한다라는 것을 속시원히 보여주고 있는 걸 보며 그가 '글로는 진중권을 이길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만한 넘치도록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걸 저 또한 확실하게 깨닫기도 했구말이죠.

  

우리의 아버지/어머니 세대들이 시대적 환경때문에 지금의 세대들이 당연한듯 누리고 있는 교육받을 권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그 세대 분들이 대중앞에 적어내는 이력의 마지막이 'OO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라고 적혀 있는 것에는 (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처로움 또는 촌스러움... 을 넘어 결국엔 '한국의 천민성'이라는 저자의 표현을 아니떠올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천민성이 단지 우리의 윗 세대들만을 향해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거지요. 비근한 예로 얼마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인문학 열풍' 또한 그것이 과연 스스로의 내적 요구에 의해 생겨난 것일지, 아니면 밖으로/남에게 보여지는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 그것이 어쩌면 그러한 천민성을 가진 주체가 이 대한민국 사회에 세대를 뛰어넘어 얼마만큼 널리 퍼져 있는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저의 생각에 당신이 만약 동감해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또 이렇게 얄팍한 감상문마저 적고 나니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문제는 죄다 과거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고, 그처럼 어쩔 수 없는 원죄를 물려받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슬프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사실... 저자가 이런 뉘앙스 - 모든 것이 과거때문이다 - 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 (이 책을 그리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뭔가 뚜렷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있지도 않지요. ------ 어쨌든!!!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주제에 관한 첫 발걸음으로서의 이 책 자체는 꽤나 만족스러운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에 쫒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하리만큼) 급하게 적어내려간 이 감상문이 마음에 안들기는 하네요. (앞으로 당분간 읽어야 할) 이런 류의 책이 확실히 (이젠 나름 익숙해져있는) 소설보다는 정리해내기 훨씬 어렵다라는 궁색한 핑계를 꼭 적어놓아야 할만큼...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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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33
제인 오스틴 지음, 김유미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호텔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신호가 바뀌어 급정거한 Mercedez S600을 소나타 차량이 뒤에서 받은 사고였지요. 큰 충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두 차량의 외관이 찌그러졌다거나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소나타 운전자는 (뒷차니까) 당연히 그리고 정중하게 몸에 이상이 없는지를 먼저 물은 후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보험처리를 약속했습니다...만, S600 운전자는 이 차가 얼마짜린지 알기나 하냐, 당신 차를 판다해도 수리비의 절반도 안될거라는 둥,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재수가 없다는 둥... 의 소리를 혼자서 마구 지껄이다, 길바닥 위에 크윽~하는 소리와 함께 가래침을 내뱉으며 '별 그지같은 놈 때문에...'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 고등학교 중퇴 후, 건달 비슷한 생활을 계속해오다, 돈을 벌기 위해 술집 웨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었고 약간의 노력과 엄청난 우연등에 힘입어 현재 서울과 일산에서 가장 커다란 주류도매업자가 되어 있는 S600의 운전자, '나꼬장' 사장은 그로부터 대략 20여 분 후, 자신의 못배운 한을 풀어준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의 대학원 은사이자 박사학위논문의 지도교수, 그리고 한 달후 그 소중한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시게 될 분을 미리 그 자리에 와 있었던 아들로부터 소개받게 됩니다. 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소나타 차량의 운전자이자, 얼마 전 박사학위를 받은 자기 아들의 이후 학계에서의 자리를 결정지어줄 수 있는... 대한민국 경제학계의 최고 빅샷인 '왕뒤끝' 교수였지요.】 

​분명 뭔가 좀 더 멋진 예화를 만들어내고는 싶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밖에는 만들어낼 능력이 되지않는다는 이유로 써놓은 이 유치한 설정의 이야기를, (이런 타이틀이 정말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되는건지 궁금하기만한) '<가디언>지가 선정한 어른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30선' 중 한 권이라는 「오만과 편견」에의 감상문 첫머리에 놓은 이유가 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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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기 때문이다.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프롤로그' 중.​

1813년 영국에서 발표된 게다가 여성 작가가 쓴 이 작품이 2014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어느덧 중년 남성이 되어 있는 --;; 저에게 '공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해 줄꺼라고는, 제 아무리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고전을 읽어본다'라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했었던 이 작품을 다 읽고나니, 바로 위에 인용해놓은 진중권 교수의 서술에 대해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최대치의 표현으로 쓰여져 있는, 그리고 그 이야기로부터 또한 독자에게도 그가 지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여 이 이야기로부터 각자만의 해석을 만들어내보게 해주는 작품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도대체, 과연... 무슨 이야기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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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건 혹은 드라마나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통해서건... 우리가 흔히 보게되는 여러가지 버젼의 전형적 특징들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결혼'을 둘러싼 개인적 감정의 변화, 그리고 그 당사자들의 가족으로 인해 생겨나는 일종의 politics. 이 별 특별할 것 없는 주제를 가지고 이 기나긴 이야기를 제인 오스틴은 만들어냈고 결국... 그 이야기를 가지고 읽는이들을 훅~ 가게 만들어 준거지요.

<작품 해설>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이 작품은 다아시로 대변되는 '오만'과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편견'이라는 두 세계가 대립하고, 화합하고, 공존을 이뤄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당시 영국에서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존재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결혼관이란 건 '결혼 생활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혼만이 그녀의 목표였다. 지체 높은 집안의 여자들에게 재산이 별로 없을 경우,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방편이 되었고, 그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이 아무리 불확실한 것이라 해도 궁핍한 생활을 모면할 수 있는 최상의 방지책이었다'라 고백하는 샬럿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작동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친구인 샬럿이 위와 같은 이유로 남성으로서 아무런 매력도 가지고 있지 않는 콜린스와 결혼하기로 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기 중심적이고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평소에 결혼에 대한 샬럿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똑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샬럿이 막상 결혼을 결정하는 순간에 세속적인 유익을 위해 그보다 중요한 모든 감정을 희생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콜린스의 아내가 된 샬럿의 모습은 너무도 굴욕적인 그림이었다. 그녀는 친구가 수치스러운 선택을 해서 자신을 실망시킨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샬럿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을 행복하게 살아 낼 수 없을 거라는 우울한 확신이었다.

이런 엘리자베스 앞에 다아시라는, 잘 생기고 돈도 많은, 하지만 심히 건방져 보이는 귀족 남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안에 불명예가 될 엘리자베스의 열등한 신분이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향한 그의 애정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었으나, 결국엔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제 감정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흠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는 프로포즈를 엘리자베스에게 하게 되지요. 물론 다아시의 오만함을 싫어했던 엘리자베스는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만,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아시에게 강렬한 애정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던 (자뻑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결혼할 때 돈만 추구하는 것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신중함이 끝나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또한 어디쯤 되는 걸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져 마음 속 방황을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외삼촌 부부와 함께 다아시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방문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그 집을 구경하며 '내가 이 집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었어. 그랬다면 지금쯤 이 방들이 이렇게 낯설지 않고 익숙했겠지. 손님 자격으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주인으로서 느긋하게 삼촌과 숙모를 손님으로 대접할 수 있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다아시의 하녀가 집안을 구경시키며 주인인 다아시에 대해 극찬을 늘어놓자 드디어 마음속에 다아시와 가깝게 지낼 때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며 점차 흔들리게 되지요.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심이 애정의 기반이 될 수 있다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의 변화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란 감정이 상대방을 처음 만나 두 마디 말을 채 건네기도 전에 생기는 그런 감정이라면, 감사나 존중에서 비롯되 감정이 자연스럽고 진정한 애정이 아니라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적인 변화는 한 가지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위컴에 대한 편파적인 호감에서 비롯된 자연 발생적인 애정의 방편을 모색하다가 실패하자, 그보다는 무미건조한 감정이지만 인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애정의 방편을 택하게 되었다는 변론밖에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 엘리자베스는 점점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다아시든 위컴이든 생각하면 할수록 맹목적이고 편파적이고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해 후회와 자책이 몰려들었다. "내가 너무 경솔하고 천박하게 행동했어. 내 판단력을 너무 과신했어. 내 지성을 너무 과대평가했어. …… 내 어리석음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허영심 때문이었어. 두 남자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난 너무 분별력이 없었어. 한 사람이 내게 호감을 표시하는 데 기분이 우쭐했고, 다른 한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게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두 사람의 일에 관해서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어. 이 순간까지도 나는 자신을 너무 몰랐어" ……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해 품었던 불손한 감정과 그에게 퍼부었던 건방진 말들을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을 느겼고, 다아시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과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181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현대의 소설들도 보여주기 힘든 반전의 연속과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지나 결국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사랑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으로 끝맺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위와 같이 극복이 되며, 다아시의 또한 스스로의 반성으로 자신의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요. 작가 제인 오스틴은 자신이 보여준 이 이야기로부터 이제 독자 자신만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과연 다아시를 '오만'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편견'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작가의 질문에 대한 독자의 해답이 바로... 그 해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가져보게 되는 겁니다.

사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가졌던 '오만과 편견'은 2014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유적 특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 역사적으로 구성되어온 층위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단 이러한 저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면) 그러하기에 그 층위가 점점 더 세분화되어 나누어질수록, 그리고 그 세분화된 층위가 여러 상징물들을 통해 누구나에게 다 보여질수록 우리가 가지게 되는/받게 되는 '오만과 편견'들은 점점 더 굳건하게 사람들의 머리속에 자리잡게 되겠지요. 이런 이유로 'S600'이라는 상징물의 소유자 나꼬장씨는 '소나타'라는 상징물로 보여지는 왕뒤끝씨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이고, 잠시 후 각자의 사회적 지위/역할을 보여주는 '명함'이라는 새로운 상징물이 각각 나꼬장씨와 왕뒤끝씨를 표현하게 되는 순간에는 또한  주류업자와 대학교수라는 새로운 모습의 position을 둘 사이에서 각자가 점유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나게 되는 걸겁니다. 물론 (저도 물론 포함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꼬장씨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게 될겁니다만, 솔직하게 말해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나꼬장씨의 오만을 가져보지 않았노라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소나타 운전자'로서 규정받게되는 '대학교수' 왕뒤끝씨의 억울함을 경험한 적이 적지않게 있었노라고, 그래서 내가 왕뒤끝 '교수님'의 position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 억울함을 더해 더 커다래져 있는 '오만'을 취했었노라... 말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자기 반성류의 감정을 가지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느꼈던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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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아시를 '오만'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편견'이라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하는, 약간은 낯설 수도 있는 의문. 이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제가 이 작품을 '대단하다!'라 생각하게 된 결정적 이유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없다라는 이유로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쌍꺼풀이 서양인의 눈에는 모두 다 있기에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될 수 없듯이,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소설에서는 '오만과 편견'이라 표현되어 있는 것들이 2014년에도 정녕 '오만과 편견'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사실 다아시에게도 '편견'이 있었으며, 엘리자베스에게도 '오만'이 있었었다라 말할 수 있는 이 이야기로부터 가져보게 되는 이 의문. ------ 어쩌면... 이 의문을 읽는 이에게 가지게 만들어내고, 또 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라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 「오만과 편견」을 우리가 말 그대로 '진정한 고전'이라 불러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 롯데를 응원하는 팬들은 아웃이라 말하고, 상대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세이프라 말하게 되는...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나 의문에 대해서는 야구에서완 달리 아웃과 세이프를 결정지어주는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또한...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이 아닐까도 싶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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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그거 어쨌지? 거기 두었을 텐데." "자동차 키요? 아까 식탁 위에 지갑하고 같이 있던데.' …… 잔소리가 좀 많긴 해도 아내는 고마운 존재다. '그거' 혹은 '거기' 하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통한다.

마흔아홉 살의 광고회사 영업부장 사에키는 요즘 들어 이처럼... 뭔가를 깜빡!하고 잊어버리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아내하고야 이처럼 '그거' 혹은 '거기'만으로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기에 별 문제가 없지만, 회사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종종 커다란 실수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중요한 거래처와의 약속... 그 날짜가 바뀐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적도, 심지어는... 업무상 나누었던 대화내용까지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일들이 생기자 사에키는 매우 당황하게 됩니다.

그저 과로로 인한 단순하고도 일시적인 스트레스성 질환이라 생각하였으나, 병원 진찰 결과​ '약년성 알츠하이머'의 초기상태라는 판명을 받게 되지요. 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생하는 알츠하이머 병을 일컫는 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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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내 나이조차 잊어먹기 일쑤다. 어쩌다 나이를 기입할 일이 생기면 펜을 멈추고 생각할 때가 있다. …… (또한) 요즘에는 휴일에 어떤 차림으로 외출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할 때가 많다. 티셔츠의 아랫단을 바지 속에 넣고 다닐 만큼 아저씨는 아니지만 …… 깃 달린 셔츠를 바지 밖으로 꺼내 입는 젊은이 스타일에는 영 적응이 안 된다. ……그래서 휴일에도 나는 양복을 꺼내입는다. 나한테는 가장 마음 편한 옷이다. …… 회사에 갓 취직했을 무렵에는 넥타이를 푸는 순간 본래의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 (그리고) 언제부터일까. 리모컨을 쥔 손등에 늙은이의 상징인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물론 알츠하이머에 걸리기에는 젊은 나이겠지만) 적지 않은 나이의 중년 남성이라는 것을 그렇게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어떤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생활의 모든 것이 '그것'때문이라 생각하게 되듯이, 그 또한 그가 이제껏 회사에서 써오던 데스크톱이 수명을 다해 새로운 노트북으로 교체되었을 때, 자신이 이제껏 써왔던, 하지만 지금은 버려진 그 데스크톱을 보며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인생인양...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되지요.

새로운 노트북이 왔다. …… 자리만 차지하고 말썽만 일으킨다며 평판이 나빴던 나의 데스크톱 컴퓨터는 '폐품'이라는 쪽지가 붙여져 통로에 내놓아져 있었다. 누가 썼는지 쪽지 구석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다. 'good-for-nothing' - '쓸모없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기억력의 감퇴에 그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꼼꼼하게 적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내, 바로 며칠 전 자신이 그 비망록에 써놓았던 것까지도, 심지어는 비망록에 기록했다라는 사실 자체까지도 잊게 되는 지경에 이른 사에키와 그의 아내 에미코는 생활의 모든 것을 알츠하이머의 치료에 도움되는 쪽으로 바꾸어 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에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에의 공포가 다가오지요.

​알츠아이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 다. 언어나 사고에 이어 몸의 기능마저 앗아가버린다. 몸이, 살아가는 방법, 삶 자체를 잊어가는 것이다. …… 밤이 오는 게 두려웠다. …… 어둠이 두렵기 때문이다. …… 정적마저도 두려웠다. 어둠과 정적은 내게 죽음을 연상시켰다. …… 지금껏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없었던 것 같다. 젊을 때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운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까지의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내 앞에 가로놓인,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던 인생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 죽음을 의식하게 된 것은 (딸) 리에가 태어났을 무렵부터다. 자식이 생기면 왜 그런지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역산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이아기 스무 살이 되면 나는 몇 살? 이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나는 몇 살까지 이 아이의 인생을 돌봐줄 수 있을까.

​딸 리에는 결혼을 곧 앞두고 있는데, 사에키는 자신의 발병을 딸에게 감춥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 공포까지는 감출 수 없어, '내일 아침이 되면 딸의 얼굴을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에 마주앉은 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며, 자신의 손주가 여자아이라는 것까지도 혹시나 잊을까 하여 수첩에 적어놓아야만 하는 지경이 되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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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진행은 이제 사뭇 '뻔한' 과정을 밟아갑니다. 딸의 결혼식때까지만이라도 남들에게 자신의 발병 사실을 숨긴 채 회사에 남아 있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마음,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점점 심해지는 기억상실에 대비해 딸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주인공의 행동... 그런 것들을 보며 함께 가슴 아파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가져야 할 유일한 예의어린 준비물일 뿐.

……………………………………

 

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 나는 열의 없이 쑤석거리던 그라탱 속에서 호박 덩어리를 파내 걸신들린 양 먹어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딸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호박만 전부  골라 먹고, 입가에 미역을 질질 흘리며 개펄 냄새나는 해초 샐러드를 볼이 미어져라 입에 넣었다.

결국... 주인공이 부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로 끝맺음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렇게... 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더 솔직하게는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 말할 수도 없는 소설이었습니다만 문득...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난, - 주인공이 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이 효력이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호박을, 그리고 해초를 먹는 장면을 묘사한 위의 부분을 읽으며 - '난 과연 무엇을 얼마나 그런 (타인과의 관계로 존재하는) 나를 지켜내기위해 노력했었었던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만들어주더군요. 

이처럼 자신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회사에 피해를 주게 될까봐, 아내에게 짐이 될까봐, 또한 딸의 결혼식에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론 손녀의 얼굴, 그리고 손녀를 처음 안았을 때의 감촉을 잊지 않기 위해... 서였었지요. 결국... 자신도 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었을 때에는 지금 자신의 손녀마냥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였었었으나, 이제는 '쓸모없음'의 딱지가 붙어 있는, 게다가 주변에 피해만 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이후, 그나마 그 피해를 남들에게 안겨주지 않기 위한 노력들일 뿐인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자신 스스로로부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 로 더 먼저 규정짓게 되는 40-50대의 남자. 그런 그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간다라는 것조차에서도 결국엔 자신에게 주어져있는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라는 거. 그게... 정녕 남의 일로만 보이지는 않...더군요. 어느덧! 50이란 나이가 40이란 나이보다 더 가까워져 있는 지금, 말이죠. --;;

두려웠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기억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구체적인 공포였다. …… 두려웠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잃어가고 있는 나는 뼈저리게 실감한다. 기억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소중한 약속이 되기도 한다.

 

 

 

 

 

 

(읽어본) 오기와라 히로시의 다른 작품들 :   소문」 · 타임 슬립」 · 「네 번째 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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