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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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 학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수많은 금지의 규범과 그보다 더 많은 강제 규범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규범들의 공통점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규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지고 규범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의 예를 들었던 2001년 김찬호의 지적이 최소한 이 책이 세상에 나왔던 2011년까지는 현실의 교육 현장에서 그 굳건한 지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라는 걸 우리는 이렇게 알게되는겁니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해온 대한민국 교육 현장에서의 가르침과 <세계 명작 동화>가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존의 명제에 대해 '(이제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을만큼 커진 합리성에의 의문'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고 있듯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더 이상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화 속 주인공들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독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그 동화 속 주인공들에 씌어져 있는 오해와 비합리를 풀어보겠노라 말하고도 있지요.  네! 이 책은 그렇게... 우리 모두가 어릴 적 한두 번쯤은 보았던 총 열네 편의 이야기들 속 주인공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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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도 않은 여러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며, 한 사람의 저자가 쓴 책에 대해 그 단락별로 동의함, 동의할 수 없음, 그리고 때로는 꽤나 심한 거부감까지를 느꼈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아마도 제가 독서를 취미로 삼고난 이후 처음이 아니었나 싶네요.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듯이, 어쩔 수 없이 이보다 먼저/바로 직전게 읽었었던, 제가 상당한 정도로 공감했었던 진중권과 김찬호의 책들로부터의 영향/책들과의 연관성이 이 책을 이해해감에도 작용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김찬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존엄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찾는다"라 말했으며,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은 이의 한 예로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을 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로부터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주로 남성인)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여성인) 피해자가 되곤 하는데, ​이는 우리의 사회/개인 윤리가 거의 전적으로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되어 있기에,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한 것이 되며,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당신이 대접받고 싶으면 상대방을 배려하라'라는 교훈으로 상징되는 동화 <여우와 두루미>로부터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으며, 용서하고 싶지 않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가 있다라는 것에 대해 이제까지 배워본 적이 없는 '우리'이기에,​ (그러한 '우리'중 한 사람일) 직장의 남자 상사의 성희롱을 당한 (또한 '우리'중 한 사람일) 부하직원인 여성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가해자도 충분히 사과 했으니 이제 이 문제는 그만 마무리 짓는걸로 하자'라는 화해의 강요를 받아들여야만 해왔던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해자는 용서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이를 넘어 더군다나 오히려 당당해지기까지 했었었다는 겁니다. ---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각각의 동화에 저자 자신만의 '가정'을 대입해 해석하고 있는데) 자신 특유의 '가정'을 더해 이 이야기를 해석한 저자는 이 <여우와 두루미>라는 동화로부터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이 과연 합당한 가르침인가'라는 질문까지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신의 대답으로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문제를 계속 유발시킨다. …… 윤봉길과 전태일의 삶이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화해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웠으며, 또한 상당한 공감을 아니할 수 없었어요.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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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사인 저자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책 전반을 통해 인용하고 있는데, 동화 <분홍신>에 관한 부분은 제게 공감과 동시에 혼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동화들 중 유일하게 낯선 것이었기에 우선 저자가 요약해 놓은 <분홍신>의 줄거리를 그대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소녀는 분홍신을 신고 싶어 한다.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낙이다. 분홍신에 대한 소녀의 꿈은 소녀가 숨 막히는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가난한 그 소녀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뜻한 저녁 식사와 포근한 침대, 추위를 막아줄 외투, 포근히 어루만져 줄 애정 어린 손길 ……. 그런데도 소녀는 분홍신만을 원한다. 드디어 소녀는 분홍신을 갖게 되었다.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최고의 행복을 맛보면서 춤을 추는 소녀 …….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계속해서 끝도 없이 춤을 춘다. 분홍신은 절대로 벗겨지지 않고 신을 신고 있는 동안은 춤을 추어야만 한다. 결국 소녀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춘다. - pp103-104​

​저자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아마도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쉬 더러워지지도 않고, 남들로부터의 유난한 시선을 끌어들이지도 않는 검정색이나 갈색의 신발이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하기에 동화 속 소녀가 원했던 '분홍신'은 그 사회의 일반적 규범과는 한참을 동떨어진 신발이었던 것이고, 결국 이처럼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욕망은 아예 가지려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이 동화로부터 배웠었노라/배워야했었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동화의 작가인 안데르센이 역설적으로 혹시 '소녀가 분홍신을 탐낸 것이 그리도 잘못한 일이냐'라 묻고 있는걸지도 모른다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실은 폭력을 수반했었던 '근대화 자체를 비판'했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우익은 그의 말을 '서양도 그러했는데 우리라고 뭘!'이란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안데르센의 참뜻을 오해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이죠.) 「사회를 보는 논리」의 저자 김찬호가 지적했듯이, 우리 대한민국 사회도 이처럼 '일반적 규범과 동떨어진 것'에 대해 '비정상/일탈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 있으며,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그 사회적 경향은 예의 학교라고 예외는 아닌겁니다.

​(체벌이 사라지고 벌점이 체벌을 대신하고 있는) 학교는 일체의 분홍신을 금지한다. …… 사실 분홍신을 신으면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금지될 뿐이다. …… 왜 학교는 이런저런 분홍신을 금지하는 데 그토록 열을 올리는 것일까? …… 부당한 규제에도 묵묵히 따르는 순종적인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이 학교에 바라는 것이라면, 학교는 복장 규제등을 통해 세상의 요구에 답하고 있다. 부당한 규제를 별다른 불만 없이, 혹은 불만이 있더라도 속으로 삭이며 참고 견디도록 길들여진 아이는 자라서 기업의 부당한 방침에도 묵묵히 일만 하는 노동자로 최적화될 것이다. 이때 규제가 부당한 것일수록, 그리고 강제하는 방식이 억압적일수록 효과는 더 커진다. ​…… 그러므로 학교에서 분홍신을 금지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또한 생물적인 필요가 뒤섞여 만들어진 문화의 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두를 교육이라 부른다. 정말 학교에는 교육도 아니면서 교육인 척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 pp 105-106, 115-116

사실 저 또한 그러한 부당한/강제적인 규제들을 중고등학교 시절 받았었습니다만, 다행히도?/아쉽게도? 그러한 규제들이 부당한 것이었으며 그 속에 자본주의의 교활한 노림수가 있었다라는 걸 전혀 알지는 못했었지요.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있는) 그러한 무지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홍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학교에서의 규제 - 두발, 복장, 심지어 신발에까지 - 들에 대해 저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는 또한 저자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분홍신>이라는 동화가 만들어진 당시, (안데르센의 실제 의도가 어떠했었는가를 떠나) 풍족하다 말할 수 없었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도출된 사회적 합의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검정색이나 갈색의 신을 신는 것이 결국엔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면... 그렇다해도 저자의 위와 같은 비판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걸까요? '꿈같은 이상'말고 '눈앞의 현실'... 이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해도 말이죠.

바로 위에서 저는 '일반적 규범'이란 문구를 '사회적 합의'라는 문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바로 이 부분에서 저자는 저와 (조금 쎈 표현으로 쓰자면) 180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일반적 규범'을 누가 만들었느냐, 그리고 그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것은 '사회적 합의'가 될 수도, 혹은 '폭력으로 강요된 굴복'이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모든 사회가, 그리고 한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시간에 걸쳐 그 과정이 똑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대체적으로 그러한 '일반적 규범'이 '사회적 합의'가 되는 과정 속에 '선의가 더 많은 지도자'를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저자는 그 대부분의 과정에 '불의가 더 많은 권력자'를 상정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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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처럼 옛날에 제가 아무런 걸러냄없이 이해했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만 기억해내고 있는 동화들에 대해 새롭고도 의미있는 해석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만, 다음의 두 이야기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아기 돼지 삼형제>는 우리에게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자라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더디가도 제대로 가기'를 권한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OK! 동의합니다. 헌데 저자는 여기서... (물론 제 의견!!!입니다) 무리한 비약을 하고 있지요.

​'좋은 집 = 견고한 집 = 벽돌로 지은집'이라는 공식 …… 단단한 벽돌집을 짓고 사는 서유럽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게으름 탓이다. 그러므로 그따위 엉성한 집을 짓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이들의 가난 혹은 '비문명'은 게으름 탓이 된다. 게으름이 외부의 침입 (늑대의 공격)을 부른다. 이들은 외부의 적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 게으른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부지런한 셋째 돼지의 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듯,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유럽인의 집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의 집으로 모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가서 유럽인의 집을 지었다. 그 이후 이어진 식민지 지배의 살벌한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 p 58

이처럼 서양인에 의해 쓰여진 이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가 그 기저에 서양의 동양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저자의 해석에 당신은 동의하실 수 있으신가요? 이거야말로 흔히들 말하는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모습'이 아닐까요? 저자가 비록 자신을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은 올바른 방향설정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어느 부분에선가는 자신의 꼬리를 과감히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라 생각하기에, 이 동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제겐 방향도 틀리고, 꼬리를 잘라냈어야하는 시기도 너무 오래전에 놓쳐버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이게 다가 아니라!!!

​이러한 동의할 수 없는 저자의 해석은 <늑대와 양치기 소년>에서 절정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읽다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할지에 대해 약간의 고민을 하기도 했었었지요) 이 동화를 통해 저자는 '양치기 소년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는데,  예의 자신만의 가정을 대입시켜보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결국 다음과 같은 서술로 양치기 소년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 동화 속의 양치기 소년은 어린 나이에 양치기라는 힘든 노동에 투입되어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채 생활하는 삶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소년에 대한 학대가 마을 사람들의 묵인 아래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여기에 심지어 <어린이 · 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21조 1항>까지 인용해, 이 이야기를 아동 학대와 연관지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이 너무도 외롭고 심심해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소년의 거짓말만 문제 삼는 것은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나무라는 처사가 아니겠는가'라는, 당췌 이걸 '진보적'이라 해야하는건지 아니면 '파격적'이라 해야하는건지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랄 옆차기'라 표현하고 싶습니다만  고민같지 않은 고민을하게 만드는 과잉변호를 더하고, 이들도 모자라 이 동화가 말 잘듣는 아이들을 만들려는 어른들, 더 나아가!!! 백성들이 말을 잘 듣게 하려는 통치자들에게 특히나 더 사랑받았었을꺼라는 과감한 추측으로 결론맺고 있습니다. (저자가 '불의가 더 많은 권력자'를 일반적인 지도자상으로 보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리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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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글>에 나오는 다음의 표현이 어쩌면 '동화'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그래서 (이들 동화의 속뜻을 알지 못했던) 무식한 너의 부모는 이러한 동화책들을 너에게 사주고 읽으라 했던 것이고, 외로웠을 뿐만 아니라 노동착취에 인권 침해까지 당하고 있었던 양치기 소년을 '나쁜 거짓말장이'로만 기억하며 자라난 너는 결국 영문도 모른채... 교묘한 자본의 논리에 그저 조종당하기만 하고 있는 1단위의 '노동력'뿐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었으니 너의 자녀에게는 이런 <세계 명작 동화>는 보여주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한다. ---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런 건 결코! 아닐겁니다. 근데... 그럼 뭔데?를 잘 모르겠긴 합니다. 이럴 때 기억해내라고... 「죽음의 중지」를 옮긴 번역가 정영목C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신건지도 모르겠네요. 롯데의 야구 두 게임 시청을 포기한 시간동안, 어렵지 않게/나름 흥미롭게 읽어냈던, 그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독서로는 후회스럽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던 책의,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써낼 수 있었었던 독서 감상문의 마지막으로도 좋을 이 표현. --- "정색을 하지 않은 소설에 정색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하지말고 그저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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