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민음사에서 나온 「이방인」을 사놓기했었습니다만, 출간과 동시에 마케팅의 일환인지 아니면 진짜 번역상의 신기원인지 일반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매우 도발적인 문구에 혹해, 세움출판사에서 펴낸 이 '새로운 「이방인」'을 구입해 읽어본거지요. (일단... 마케팅의 힘으로 저 한 명의 독자는 꼬신 셈입니다. 민음사 판은 채 한 번도 펼쳐지지도 못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의 품으로... --;;)

…………………………… 

​이제껏 읽어본 소설들 중 <1부>,<2부>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제 기억에 아마도 유일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그러한 구분이 내용상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라는 걸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만, 이 작품 「이방인」은 그리 길지도 않은 작품임에도 「롤리타」보다 더 확실.히 내용의 구성상, 그러한 구분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더군요.

.

.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친모의 부고장을 받고도 최소한 작품 속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휴가를 신청하는 순간에도 사장의 심기를 살피며, 어머니가 계시던 양로원에 도착해서도 모친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덤덤함을 보여주지요. 그는 심지어 관 속에 모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겠냐는 원장의 권유조차 사양합니다. 그리곤 밤새 어머니의 관 앞에 앉아 생전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있는 양로원의 다른 노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느꼈던 감정의 '특이함'은 다음의 표현에서 그 모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어머니의 관 앞에서 앉아있던 뫼르소) 아늑했다. 커피에 몸이 따듯해졌고, 열려진 문으로 꽃향기가 밤공기에 실려 들어왔다. 나는 반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나는 더 이상 졸리지는 않았지만, 피곤하고 허리가 아팠다. 이제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 채광창으로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여기까지 소금 내음을 실어 날랐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교외에 나와 본 것이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나는 만약 엄마 일만 아니었더라면 산책을 하면서 얼마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우리가 짐작하게 되는... 어머니의 사망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아들의 심정은 결코 아니지요. 어머니의 장례식을 그렇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뫼르소의 감정은 놀랍게도 '이제는 드러누워 열두 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의 나의 기쁨'이라 표현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인 토요일, 옛 직장 동료이자, 한때 호감을 가지기도 했었던 여인인 마리와 함께 해변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에는 코미디 영화를 보기도 했으며, 그렇게 보낸 주말의 끝에서는 '언제나처럼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 속에 묻혔으며, 나는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독백을 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주인공 뫼르소의 감정과 행동들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들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작가가 직접적으로 뫼르소가 어떠한 사람이며 왜 이런 생각과 행동들을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주인공이 항상 '피곤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웬지 무기력함이 몸에 완전히 베어 있는 인물일 것 같다는 추측뿐이며, 그 '피곤함'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기인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또한 하게 해준다라는 것 뿐이지요.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될대로, 나는 되는대로 살아가고 싶다'라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그러자 그녀는 결혼은 진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처럼 뫼르소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조차도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결혼을 할 수도 있다라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일단 그 진행 과정이 그려지고 있는 부분에서 뫼르소의 행동들이 쉽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무덤덤한/특이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를 '꼭 그래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꼭 그랬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 모두는 궁금해할 수밖에 없지만, 작품 속에는 그 이유가 제 기준에서는 뚜렷하게 보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주인공 뫼르소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1부>의 마지막에 서술되고 있는 뫼르소의 회상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사건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었다라는 걸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는 있습니다.

 

…… (전략) …… ★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노크 같은 것이었다.

.

.

.

 

<2부>는 이후 뫼르소가 받는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자의 말>에서 옮긴이는 이 작품에 관해 '앞에 한 어떠한 한 마디 말도 뒤로 가면 어김없이 연결이 되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다 읽고나서야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더군요. 즉, '앞'을 의미하는 <1부>에서 독자로서는 별다른 특별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던 뫼르소에 관한 (그의 특이한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행동과 사건들이 '뒤'에 해당되는 <2부>에서 펼쳐지는 재판 과정속에서 어떻게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작용하게 되는가를 가르키고 있는 표현이었던겁니다.

뫼르소의 행적을 조사한 변호사는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물었습니다만, 그가 뫼르소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예의 <1부>에서 보여졌던 그 모습 그대로였었습었지요.

​확실히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많이든 적게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 나는 그에게, 내 육체적 필요는 종종 내 감정을 방해하는 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엄마를 묻던 그날, 나는 몹시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이제 작품은 재판 과정을 통해 이처럼 매우 특이한 인물 뫼르소의 행위를, (그의 특이함에 비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들인 판사,검사,변호사 그리고 배심원들이 판단하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재판의 말미에 검사는 배심원들을 향해,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그다음 날 참으로 수치스러운 방탕 행위에 몸을 맡겼던 바로 그 사내가 하찮은 이유로,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라는 선고를 내리지요, 사건의 전개 과정을 거의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선고문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뫼르소를 변호해낼 뚜렷한 다른 무언가를 이 작품을 읽어온 독자가 가지고 있기는 한/있을 수 있는 걸까요?

.

.

.

​피고석에서일지라도,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검사와 내 변호사가 변론을 펴는 동안 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아마도 내 죄에 관한 것보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일이 나의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 박스 안의 구절들이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 이유를 좀 나눠서 보자면 :  

① '내 죄에 관한 것보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접견 신부에게 "나는 그에게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단지 내가 죄인이라는 것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죄가 있어서 그 값을 치르고 있으며, 내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 '죄인'이라는 단어가 '죄를 지은 사람'을 뜻한다면, 누군가를 죄인으로 칭하기 위해선 반드시 '죄'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선행되어야하는거죠.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건 검사와 판사는 '살인'이라는 (죄가 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기보다는 배심원들을 향해 뫼르소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설명해내는 것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한다는 점입니다. 즉, 뫼르소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살인이라는 그의 행위보다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듯 보인다라는 거지요. 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런이런 사람이니까 살인을 저지른 것이고 그러니까 죄인이다라는 논리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의 식민 지배 역사를 고려해본다면 당시 프랑스에서 프랑스 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아닌 '아랍인'이 '살해당했다'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리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까지 해보게도 되더군요. 만약 그렇다라면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뫼르소의 말은 드디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을 총으로 다섯 방이나 쏴서 죽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거겠죠. 뫼르소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물론 그는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나름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지요.)    

②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 확실히 뫼르소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또한 단지 '특이한' 인물일 뿐이지요. '나를 제외하고'라는 표현이 그저 법정에서의 관행상 피고인이 제외된다라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뫼르소는 '특이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를 '특이하다'라 생각하는 특이하지 않은 검사와 판사, 심지어 그의 변호사에게서까지도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겁니다. 일반적 사회 관계에서 겪게 되는 '무시'가 아닌,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의 '무시'라는 것. 그 이유가 오로지 '특이함'때문이라는 거지요. 

① 아랍인의 죽음이 그리 큰 문제꺼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저의 가정이 맞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이방인The Stranger '임을 상기해볼 때, 이 때의 이방인은 바로 살해당한 아랍인이 될 수 있으며, ②​ 뫼르소의 죄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이유가 오로지 그의 성격이 남들 - 판사,검사, 배심원, 변호사 등등 - 과 달랐기 때문이라 본다면 이 때의 이방인은 ①번에서의 이방인이었던 아랍인을 살해한 뫼르소가 되는 거겠지요. 물론 ②번으로서의 '이방인'의 의미가 이 작품의 제목을 「이방인」으로 만들어 낸 더 결정적인 이유일꺼같구요.

.

.

.

 

이 책의 후반부에는 소설 본문보다 더 두껍게 되어 있는 <역자노트>가 있습니다. 전문 번역가의 입장에서 보는 '번역'이라는 작업과 그 작업의 결과물인 번역서를 접하는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역자노트>에 실려있는 대부분이 번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지는 것들이지, 일반 독자가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같은 작품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다 해서) 결정적으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해주는 요인들은 아닌듯하다는 인상이 더 짙었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이 번역서를 통해 처음이자 유일하게 접해본 저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결정적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엔 '태양 때문'이라 대답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 햇볕이 내 뺨을 불태웠고,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햇볕은 엄마를 묻던 날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특히나 그때처럼 나는 이마가 지근거렸고, 피부 밑에서 모든 정맥이 울려 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칼을 뽑아서 태양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번쩍 반사되며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내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동시에 눈썹이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 내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마에서 울려 대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정면의 단검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번쩍이는 빛의 칼날뿐이었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 ★

​<1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인용문의 바로 앞 -(전략)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 에 있는 위의 구절들을 볼 때, 뫼르소가 총을 쏜 동기가 '태양 때문'이 아니라 '칼날 때문'이었다라 주장하는 역자 이정서의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게됩니다. 역자는 뫼르소가 쏜 다섯 발의 총알에 대해 '정당한 이유로서의 한 발과, 위장된 도덕·종교·권위·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무의식적인 발사'라 쓰고 있는데, '표현의 자유'를 빌어본다면 이는 '나가도 너무 나간 발걸음'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한 떨쳐버릴 수 없구말이죠. 뫼르소는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사고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살해동기가 '태양 때문'이었다라는 건, 문맥을 잘못 집어낸 오역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뫼르소의 특이함에서만이 이해되어질 수 있다라는거지요. (다시 한번... 이 작품의 제목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더더욱!) 역자 이정서는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정당방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 당시 아랍인은 해변에 누워있었습니다. 누워서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뫼르소를 향해 (오히려 그가 정당방위의 행동으로) 칼을 겨누었던/겨누기만 했던겁니다. 당시 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다가간 것은 그를 해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분명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태양의) 뜨거움' 때문이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스스로 법정에서 살해동기를 묻는 질문에 전후좌우의 사정을 다 생략한 채 '태양 때문'이라는 대답을 했던 것이지요. (그가 법정에서 매우 당황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자의 설명은 오히려 '전후좌우의 사정을 다 생략한 채'라는 설명을 넣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이 작품 자체가 '대단하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1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뫼르소가 <2부>에 가서는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다...라는 정도? --- 한 작품의 번역본이 이미 시중에 여러 권 나와있고, 또한 그 중 한 권이 독보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면, 후발주자로서는 그저 자신의 번역이 '이전 것들과는 다르다'라는 것만으로는 쉽게 어필되지 않겠지요. (역자노트를 통해서만 접해본 한에서) 민음사 판의 번역이 이 책의 번역보다 부자연스럽게 읽히는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역자가 지적한 1/3정도는 거의 공감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논쟁이 뜨거웠었던듯 하고, 어쨌!든 (이미 민음사 판을 가지고 있었던) 저같은 독자도 이 책을 한 권 더 구입했었으니 (그 의도가 역자의 아이디어인지, 출판사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의도했었던 마케팅의 효과는 나름 있었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이 책에서도 (비록 많지는 않지만) 카뮈의 문체와는 상관없는, 오로지 역자의 번역으로부터 기인하는 몇몇 어색한 표현들을 볼 수 있었었으며, 결정적으로!!!

<1부> 2장의 시작에서 뫼르소가 '내가 그렇게 일요일까지 도합 사흘 동안 쉬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라는 표현에서 '사흘'은 <민음사>와 <더클래식>에서 나온 「이방인」​에는 '나흘'로 나와있는데, 앞뒤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이건 '나흘'이 맞는겁니다. 물론 '오역'이 아닌 '오타'라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번역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내세우고 있는 번역이라면 혹시 있을지 모를 자신의 실수에 훨씬 더 철저했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는 되지요.

이 책을 통해 번역의 중요성... 에 대해 그저 개인적 감感​의 수준이 아니라, 원작의 이해를 다르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라는점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참 좋았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의 방식이 너무 과격하지않나.라는 독자들의 의견 또한 역자가 받아들여야할 몫일듯.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VS Rest of the World'의 구도로만 본다면, 제가 읽는 소설들 중 한국 소설의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별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 독서에서 차지하고 있는 꽤나 높은 일본 소설의 비중은 또한 그런 구도로는 설명될 수 없기도 하지요. (이런 것에도 '원인'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그 원인을 따져보자면 아마도... 제가 독서 초기에 접했었던 한국 소설들이 제게 크나큰 실망만을 안겨주었던 반면 (「오빠가 돌아왔다」와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결정!적이었죠),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처음 접했었던 일본 소설은 그 이후 별 커다란 편차없이 제게 상당한 만족감을 주어왔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는 됩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게 아직까지는 질리질 않기에, 우리나라의 작가가 쓴 미스테리 소설로 '정말 재미있다!'​란 평을 받는 이 책, 「궁극의 아이」를 사놓은 건 꽤 오래전입니다만, 그간 매번 뒤로만 밀려오던 중... 이웃 핑키님께서 올리시는 서평들이 죄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이어 차마 서평 자체는 읽지 않고, '나중에 이 책 읽고 와서 서평 읽어보겠습니다'란 덧글만 쓰는 게 더 이상 민망스러웠다라는 것이... 한국 작가가 쓴 추리 소설류를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해보게된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만, 처음 몇 장을 넘기는데 오...!!!

…………………………………​

​신가야라는 한국인 남자와 엘리스라는 미국인 여자가 십 년 전, 어찌어찌 만나 사랑을 하게 됩니다. 엘리스는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는, 이걸 병이라 불러야 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그녀가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그 상대인 신가야 또한 비범한 인물이어서 일명 '궁극의 아이'라 불리우는 사람으로, 이 '궁극의 아이'는 자신의 모든 미래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헌데 신가야는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의 미래까지도 기억해 낼 수 있는 '진정한 궁극의 아이'로 설정되어 있지요. 소설은 이처럼 두 인물이 각각 가지고 있는 과거와 미래에 관한 특별한 능력들을 사용해 개인적 차원의 문제들을 풀어가다가 결국엔 이 세상을 '지켜내게 된다'는 사뭇 거대한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헌데 표현이 좀 어색하죠? '미래를 본다'라는 말은 들어봤을 수 있지만, '미래기억한다'라는 말은 당췌 두 단어의 정의상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조합이니까요. --- '미래를 기억한다'라는 이 특이한 표현에 대해 소설은 "궁극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기억을 갖고 태어나오. 인생 전체를 뇌 속에 이미 저장한 채 세상에 나오는거지"라는 대답을 해주며, '미래를 본다'라는 일반적(?) 표현에 대해선 작품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래를 본다는 건 강물에 흩어진 책을 모으는 것과 흡사한 일이야. 어떤 부분은 휩쓸려 가고, 어떤 부분은 번져서 읽을 수가 없지. 중요한 건 클라이맥스를 찾았다고 섣불리 결말을 예상했다간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거야.

즉, 주인공 신가야는 위와 같은 '확률분포를 지닌 예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100%의 확률을 지닌 확실한 예언'을 하는 인물라는거지요. (문득 '찢어진 백과사전'이란 말이 생각나더군요. 아는 건 확실하게 아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게 꽤 많기도 한데... 모르는 건 또 아예 모른다는 상황을 말할 때 쓰이는 표현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신가야의 예언은 틀리는 적도, 빗나가는 적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식의 애매모호함조차 없는, 한마디로... '살아있는 신'의 말이 되는겁니다. 이러한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할 때, 세상은 당연히 그를 원할 것이고 또 그를 이용해 부와 권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된다라는 건... 굳이 '작가적 상상력'을 필요로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예상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겠지요.

이 작품은 예의 그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만들어 낸 시나리오는 (실제 존재했었던 '로쉴드 가문'의 이야기를 차용한 듯 보이는) 호크쉴드 가문이 그 '궁극의 아이'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예의 주인공인 신가야를 중심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연결되고 있는데, 그 연결 고리들 모두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 '치밀한 연결 고리들'은 이 소설을 '너무너무 재미있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결정적 바탕을 이루어주기도 하지요. 또한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에 다음과 같은 윤리적(?) 질문을 깔아놓음으로써 이 작품을 그저 '재미만 있는' 소설이 아니기를 바라고도 있습니다...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첫 번째는 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에 현혹되어 폭탄이 잔뜩 실린 자동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는 사람이에요. 두 번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지한 부하들에게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폭탄이 든 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는 이들에게는 폭탄을, 반대편에는 이들을 찾아 없앨 수 있는 미사일을 팔아요. 뿐만 아니라 무기를 팔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요. 그리고 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샴페인을 마셔요. 자, 이 세 종류의 사람 중 누가 최고의 악당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독자는 당연히 세 번째 인물을 최고의 악당으로 지목할 수 밖엔 없으며, 작가는 이 뻔하디 뻔한 '윤리적 상식'을... 방대한 스토리를 지닌 이 소설의 결말을 이끌어 내는 '출구 전략'으로 삼고 있는겁니다. (모든 소설에 반전이 있어야하는건 아니겠습니다만) 이처럼 이 작품은 누가 결국 승리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손쉬운 예상을 허용하고 있으며, 작가 또한 자신이 허용했던 그 손쉬운 예상을 예의 어김없이 자기충족(self-fulfilling) 해주고 있는거지요.

 

 

.

.

.

 

나에게 글쓰기는 집을 직는 것과 흡사하다. 누구가 꿈꾸는 집 한 채쯤은 있을 것이다. 한적한 교외에 백일홍나무가 있는 아담한 정원이 있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는 나만의 집. 겨울에는 장작을 땔 수 있는 벽난로가 있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는 시원한 숲이 뒤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집을 가슴에 품고 힘든 하루하루를 이겨 나갈 것이다. 나에게 소설을 쓴다는 건 그런 집을 내 손으로 한 채씩 지어 가는 것이다.   - <작가의 말>중

정말로 훌륭하게 지어진 한 채의 집을 보았습니다. 작가가 위에서 말한 그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 있다고 독자 스스로 의심의 여지없이 느끼게 되는 집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내가 꿈꾸는 집'이 갖추고 있었으면 하는 거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해도, 아담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일 하루 종일 땀흘려 유지보수를 해야한다면, 집 앞의 강과 집 뒤의 시원한 숲으로 말미암아 한 여름에는 그 집이 모기와 날파리들의 지상낙원이 되어버린다라면, 게다가 너무도 한적한 곳이어서 쌀 한 봉지 사려해도 한 시간 이상을 차몰고 나가야만 하는 곳의 집이라면 아마도 우린... '집에 대한 나의 꿈' 자체를 즉각 바꾸게 되지 않을까요?

대학 1학년 때, 소개팅해 만났던 여학생을 두 번째로 만났던 날이었었습니다. 어디서 뭘 했었던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나름 즐겁게 있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죠. 삐삐조차 없었던 시절이라 다음 언제, 어디서 만날 것이냐를 그 자리에서 정해야했던 순간! 저보다 꽤나 작았던 그녀의 가르마에서 뭔가 비듬스러워보이는 것들이 몇 개나! 보이는겁니다. 결국 '또 연락할께요~'란 말과 함께 그녀는 그렇게 저에게서 지워졌었지요.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하니, 여자 선배들은 '그게 비듬이 아니라 스프레이를 과하게 뿌려 생긴 것일 수도 있다'라며 그녀를 옹호해주기도 했었습니다만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가르마 사이의 그 무언가로 인해, 심지어 뒤돌아선 그녀의 올나간 스타킹을 보는 것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 정말로 재미있게 읽어 내려간 책이었습니다만, 책을 다 덮고 나니 이처럼... 꽤 괜찮게 생각했었던 그녀의 가르마 사이에서 무언가를 본 듯한, 뭔가 '미완성의 마감'이라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더군요. 솔직하게 말한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소설에 대한 취향'과 이 작품과 딱히 코드가 맞지 않았다라 말하는 게 옳은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냥... 무지하게 속도감 있고 재미 만땅인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품이라 말할 수 밖엔 없으며, "이번 소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다. 누구나 꿈꾸지만 마음으로 그릴 수밖에 없는 애절한 사랑. 가슴 깊이 흉터로 남았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 이것이 이번 소설의 대들보이다. 거기에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설계가가 디자인한 멋진 외양을 덧붙이려고 했다."라는 작가의 말에선 오히려! 죄송스럽게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이 떠올랐다는 말을 또 하지않을 수 없기도 하고 말이죠.

…………………………………​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정말로 재미있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보다 훨씬 더 높은 평점을 받을 수도 있겠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런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도 한 작품이기도 하구 말이죠. 제 취향을 바탕으로 그리하여/그렇게... 이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표현해 본다면, (책의 무게도, 그리고 책의 주제도 무겁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를 내포하고 있는) <휴가지에(서 행여라도 책을 읽게 된다면) 가지고 가도 괜찮을 책>의 리스트에서 '원 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책 정도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뭐... 제 현실은 집에서 맥주와 함께한 독서.였었지만서도.

(읽어본 작품들 중) 휴가지에 가지고 가 읽어도 괜찮을 듯한 소설들

- 미치오 슈스케 作, 「외눈박이 원숭이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용의자 X의 헌신

- 오기와라 히로시 作, 「소문 
- 아비코 다케마루 作, 「살육에 이르는 병 
- 위화 作, 「 허삼관 매혈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요악(必要惡, necessary evil) :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사회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악. /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조직 따위의 운영 상, 또는 사회 생활 상, 부득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물.                                                                                                                          - 출처 : 네이버 사전

내가 직접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서 내가 직접 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 꼭 나 대신 해주었으면 참 좋기는 하겠는 --- 마치 너무너무 갖고는 싶지만 웬지 내 돈 주고 사기엔 끝내 꺼려만지는, 근데 그걸 난데 없이 생일 선물로 받게 되는 순간의 기쁨과도 같을 --- '그것/그 현상'이 우리 집에,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있어도 된다고는 차마 주장하지는 못하겠지만, 있으면 참 좋기는 하겠는, 그리고 결국엔 있을 수 밖엔 없게 된다는 (것을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또한 알고 있는) 그런 무엇을 우리는 필요악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의 단어로 지칭한다... 라고 해보겠습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만의 '해보겠다'는 아니고, 이것이 일반적인 '필요악'에의 설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제가 모르고 있는 영역이 있을 수 있으니, 일단은 '……라고 해보겠습니다'라고 씁니다.) ​ --- 이 정의definition를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필요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며, 주인공 판토하 대위는 기꺼이 그 '나 대신의 그 누군가'의 역할을 완수해 낸 인물이고, 판토하 대위의 상관들은 '있어야 한다/있어도 된다'를 외쳤었던, 하지만 직접 그 일을 하기는 꺼려했던 사람들이라고, 아마존 유역의 국경 수비대 군인들은 '있으면 참 좋기는 하겠는'의 희망의 실현을 몸소 경험했었던 행운을 얻은 집단이며, 판토하 대위가 이끌었었던 <특별봉사대>는 진짜.로 '있을 수 밖엔 없었던' 존재가 된다"... 라는 저의 이해를 부정하는 분은 아마.도 별로 없을 꺼라 생각해 봅니다.

………………………………​

​아마존 밀림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여자가 부족해서'라는 이유로 성욕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인근 부락의 부녀자들을 강간한다거나 그것조차 힘든 지역에서는 동성애, 심지어 수간까지도 행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페루의 군 지도부는 결국 '굶주린 인간들에겐 먹을 것을 줘야 한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몸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들로 구성될, 이름하야 <특별봉사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국경 수비대 군인들의 성욕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맡기기로 합니다. --- 예전에 읽었던 진화론에 관한 책에서 보았던, 여전히 진화론이 명확한 답을 내리기 힘들어 하고 있는 '동성애'에 관해 진화론자들이 제시한 여러 가설들 중... 남자들이 사냥을 나갈 때 남아 있는 여자들와 아이들을 지킬 '또 다른 남자'가 필요하긴 했는데, 혹시 그 남아 있는 '남자'가 딴 맘을 먹고 자신만의 씨를 집단의 모든 여성들에게 뿌려 놓을지 모른다라는 걱정을 했었었고, 그들이 그 걱정의 해답(?)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동성애적 기질'이 있는 남자들을 찾아,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냥을 나갔을 때 여자들과 함께 남아 그녀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겼었던 것일 수도 있다... 라는 사뭇 억지스럽게만 느껴졌던 이야기가 있는데... 페루의 군 수뇌부가 혹 그러한 '동성애의 유전'에 관한 필요성을 알고라도 있었던 것 마냥, 그들은 그 <특별봉사대>를 조직하고 유지하고 운영해 갈 인물로 가장 모범적이며,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정보 보고서의 주인공인 판토하 대위를 선택합니다. 만약 그 반대의 인물을 <특별봉사대>의 수장으로 임명한다면 그들의 '봉사'는 그야말로 그 수장만을 향한 '봉사'가 될지도 모르는거니까요. 어... 쨌든!!!

판토하 대위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임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부여받은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군인 정신에 따라 최선을 다해 그 임무를 수행해 갑니다. ​군 지도부는 사실... 걍 밀림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에게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조직하여 데리고 다니는 정도의 임무를 판토하 대위에게 맡겼던 겁니다만, 판토하 대위는 정말... 최선을 다해, 그리고 그의 뛰어난 능력 모두를 발휘해 그 일을 이행해 가게 되지요. 그는 자신의 부대를 '수국초특 - 수비대와 국경 및 인근 초소를 위한 특별봉사대'라 명하고, 그 시작을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배적 성 윤리과 수국초특의 제한된 예산을 고려하여, 본인은 협력자들에게 요구할 수 있고 따라서 이용자들이 희망할 수 있는 봉사를 '단순하고 정상적인 봉사'로 한정하면서, 앞서 열거한 모든 일탈행위뿐만 아니라 일탈적인 정신과 관련된 모든 성행위를 배제하기로 결정함. …… 이 특별봉사대가 양적인 면에서 수요를 만족시키고, 재정이 확충되고 국가의 도덕적 기준이 관대해질 경우, 특별한 경우나 특별한 요구, 그리고 특수한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 봉사의 질적 다양화 원칙 도입을 고려할 수 있음. …… 본인은 상부에서 적절하다고 판단할 경우 이론과 실천 부문에서 남성과 여성의 모든 성행위와 관련된 전문 서적을 선별하여 리마에서 이곳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함.

​꽤나 진지!하지요? --- 판토하 대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가정 생활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수국초특'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아마존 유역에 널리 퍼져 있던 미신 중 하나인, 분홍돌고래 기름이 남성의 성적 충동을 증가시킨다는 걸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아내에게 일주일 동안 집에서 조리하는 모든 음식에 분홍돌고래 기름만을 사용해보게 했고, 그 결과... 실제로 엄청난 성욕의 증가를 경험하게 되지요. 다음이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그가 쓴 보고서의 일부입니다.

본인은 상관들에게 위임받은 임무를 가장 완벽하게 완수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본인의 육체적 건강에 피해를 입고 가정의 평화가 깨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씀. 그런 소망으로 본인은 남성성의 회복이나 강화를 위해 로레토의 민간요법과 민간주술이 제안하는 몇몇 처방을 손수 시험함. ​이런 남성성 회복이나 강화는 이곳에서 사용되는 속어로 '죽은 사람 깨우기' 혹은 보다 더 저속하게 '음경 치료'라고 부름. …… 말 그대로 이런 종류의 처방은 수천 가지를 상회하며 …… 따라서 수비대와 국경 및 인근 초소의 모든 사병 및 하사관들에게 제공되는 음식 제조 과정중에 분홍돌고래 기름을 사용하는 행위 …… 를 절대 금지할 것을 요구함. 또한 각종 민간 요법상의 정력제 복용도 금지 시켜달라 요청함.

군 수뇌부 내에서는 애초서부터 판토하 대위와 그의 '수국초특'에 대해 찬반의 의견이 나눠져 있었습니다만, 현실에선 아마존의 각 부대 사이에서 '수국초특'이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고, 사병들에게만 허용된 '봉사받을 수 있는' 권한을 하사관 및 장교들에게까지도 확대 허용해 달라는 청원과, 심지어는 부대 인근의 주민들로부터도 자신들도 동일한 가격에 '수국초특'의 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민원까지 받게 된 상황이 벌어지자 '수국초특'과 판토하 대위를 일단!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보아갑니다. 헌데!!!

애초부터 이 '수국초특'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길 원했던 군 수뇌부는 그러한 이유로 이들의 존재가 비공식적이지만 세상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수국초특'의 배후에 군부가 있다는 것이 비밀이었었을 때엔 '필요악'중 '필요'에 해당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유리함을 누릴 수 있었었지만, 이제 자신들이 그 배후임이 알려지게 되면 '필요악' 중 '필요'의 나름 긍정적인 면은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악'에 해당하는 부분만 남게 되어, 그에 대한 모든 비난을 군부가 받아야 한다는 상황이 발생되는 건 또 받아들이기 싫은 거지요. 이런 시점에서 그동안 어쨌든 '수국초특'이 군부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그 어떤 공식적 빌미도 제공하지 않아왔었던 판토하 대위가 임무 수행중 사망한 <특별봉사대> 대원의 장례식에 갑자기 대위 정복을 입고 등장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장례식을 군장 의례로 치뤄줌으로써 시중의 의혹을 드디어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페루 군부는 '빌어먹을, 하찮은 일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어'라는 그간의 불만을 드디어 밖으로 터뜨리게 됩니다. 물론! 판토하 대위는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군 수뇌부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 장례식에서 낭독했었던, 직접 쓴 송덕문의 내용을 보면 그의 그런 결정에 일견 감동까지도 섞인 동감을 할 수밖엔 없습니다. 판토하 대위에게만큼은 <특별봉사대> 대원들 또한 국가를 위해 충성한, 자신과 똑같은 군인이었던거지요.

저는 지상에서 당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이곳에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페루 육군 장교의 숭고한 정복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떳떳이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우리 조국 페루를 위해 봉사한 용감한 병사 자격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공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

.

.

​그냥 대충 '필요악' 중 '필요'의 부분만을 적당히 충족시켜주길 원했던 군 수뇌부과, '필요악'을 최종적으론 오로지 '필요'로서만 인식하게 된 판토하 대위간의 간극은 결국... 이렇게 터지게 되어 판토하 대위는 장례식 사건을 빌미로 군 수뇌부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 포마타라는 오지로 발령을 받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 <특별봉사대>는 예의 이 글의 맨 처음에 쓰여진 그대로의 의미의 '필요악'이었었고, '필요+악'으로 구성된 그 '필요악'중 '필요'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원했던 군 수뇌부는 결국 '악'의 부분이 드러나자 아예 '필요악으로서의 특별봉사대' 자체를 없애 버린거지요.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소설에서 페루의 군 수뇌부를 '악'으로, 판토하 대위는 일종의 '희생양'으로 보아도 되는 걸까요? ----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윗사람이 필요해. 그들이 없으면 난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되면 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아." --- '수국초특'이 해체되자, 함께 일했었던 민간인들이 판토하 대위에게 전역을 권하는 장면에서 나온 판토하 대위의 대답입니다. 내가 하기는 싫은데, 나 대신의 누군가가 꼭 해주었으면 좋겠기는 한 일, 그 일을 선뜻/마지못해/어쨌든 '하겠노라'라 했던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은 나와는 선호체계가 완전히 달라 내가 하기 꺼려하는 그 일이 그에게는 하고 싶어 죽겠는! 일이 되어서일 수도, 혹은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부탁/명령을 한다면 아무런 불만없이, 혹은 아주 약간의 무시할 만한 수준의 불만만으로 그 일을 기꺼이 해내기는 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를 때, 그 사람을 과연 우리가.... '선' 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러하기에 판토하 대위의 마지막 호칭이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또한 선뜻 그렇다.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빌어먹을 운명 같으니.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라는 판토하 대위의 독백을 들어 그가 분명 희생양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곧이어 결국 "난 내 의무를 한 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어. 난 내 이런 팔자를 저주해."라 말해버림으로써, 어쨌!!!든 수국초특의 책임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 강요가 아닌 그의 자발적 의지였었음을 고백하고 있기에 역시 그를... '희생양'으로 보아질 수는 없다라고 밖에는 결론내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

이 작품을 '재미있다'라 표현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진짜 정색하고 접근하는 판토하 대위의 진지한 언행들이 진짜/오히려 '웃기기'도 합니다만... '빌어먹을 멍청이들. 전에는 군대가 자기 아내를 덮친다고 항의하더니, 이제는 자기들이 덮칠 여자가 없다고 지랄이야.'라 불만을 터뜨리는 페루 군 수뇌부의 대응도 보기에 따라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만, 웬지 '재미있다'는 표현보다는... (판토하 대위를 '희생양'이라 생각지 않는 저의 시선에서는) 뜻밖에도 '후련하다'라는 표현이 책을 덮는 순간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 어쨌.든... 윤리적인 면에서의 강조점은 '악'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구성된 '필요악'. 하지만! 이제까지 존재했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필요악'들의 대부분은... 현실적으론 '필요'에 더 많은 강조점이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으며, 이젠 솔직하게 그 존재의 필요성, 그걸 인정해도 된다.라 말해준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니었나.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이제껏 '필요+악' 중 '필요'란 부분에 어쩔 수 없이/가끔은 의도적으로 기대어 저의 삶을 구성해 왔었고,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속으로는 앞으로도 또한... 그럴 수밖엔 없을꺼란 걸 알고 있기에, ①이제부턴 굳이...'악'을 향한 지나친/과장된 혐오를 드러내는 액션으로 이제까지 내가 '필요'의 유용성을 누려왔던 것에 면죄부를 주려는 창피한 시도는 아니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②좀 더 뻔뻔하게는 남들을 향해 최소한 이러한 내 행동에 대한 방패로 '노벨 문학상'을 거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뭐 그런... 현실적 유용함을 얻었다.라는 비윤리적 안도감, 하지만 그보다는... ③'필요악'의 반대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는 '필요악'의 반대되는 개념일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사회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라져가는 선',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들 또한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라는 거, 그리고 그들 덕분에 우리가 라면을 끓여내는 양은냄비를 그런 싼 가격에도 쉬이 구할 수 있다라는 걸! 우리가 걷는 도로가 그러한 이유로 오늘도 깨끗하다라는 걸! 다시 한번 새삼 깨달을 수 있었었.다... 식의 교훈적 스토리.를 '얻었습니다'로 어찌해서든 마치고 싶은, 암튼!!! 은근... 애매모호함 가득한 작품이었었네요.

남미의 유머 코드,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서술 방식... 그리고 어쨌!든 우리에겐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어두운 소재일 수밖에 없는 '군대 & 성욕'의 문제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 --- 이 모든 것들을 한껏 즐겨볼 수 있었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라는... 또한 애매모호한 이 끝맺음은 또 어쩔. --;;​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책이건... 대부분은 그 한 권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어떠한 형식으로 쓸 것인가'에 대해 결정하곤 합니다. (물론 책을 읽는 목적이 감상문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만, 작년의 결심?이후부턴 그걸 쓰지않으면 뭔가... '읽었다'란 행위를 제대로 끝마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더군요.) 예를 들어 이 책과 같은 한 편의 소설을 읽었다 한다라면, 소설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까지 풀어 낼 것인가, 혹은 소설의 줄거리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작가가 그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할 것인가 등은 결국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결정짓게 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2/3쯤 읽었었을 때 이미 제 머릿속에서 이러이러한 형식으로 감상문을 쓸 수 밖엔 없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었거늘 결국.엔... 

​…………………………………

엄청난 반전이 있다는 힌트를 어디선가 보았더랬습니다. 이 책의 뒷표지에도 또한 '충격적인 결말을 확인한 순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문구가 있기도 하구 말이죠. 그렇게... 뭔가를 각오(?)하고 읽어 내려가는, 이처럼 '이 소설에는 반전이 숨어있다'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소설을 읽는다라는 것이 어쩌면 독자에겐 양날의 검같은 역할을 하게되는건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해봤더랬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다니까, 그것도 엄청난 게 있다니까... '하지만 난 안 넘어가봐야지!'하는 얄팍한 자존심(?)으로부터 비롯된, 아주 작은 힌트가 될만한 것들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한 가열찬 노력은 매우 꼼꼼한 독서를 하게도 해주지만, 반대로 그런 꼼꼼한 독서를 통해 스스로가 이해하게 되어가는/추리해가게 되는 소설의 결말을 결국엔 마지막에 등장할 꺼라는 미지의 '반전의 존재'로 인해, 뭔가 자꾸 믿지 않으려하게만 되는 상반된 심리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에 말이죠.

결과적으로... 진짜!로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의 엄청난 반전 - 사실 이걸 반전이라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생길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작가는 말 그대로 이미 모든 패를 다 보여주고 독자와 마주앉아 맞고를 치기 시작했지만, 독자 스스로 자기 최면에 속아 작가가 보여주었던 패들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이니까요. - 은 제가 머릿속에 계획했었던 그 모든 것을 책을 덮는 순간 포기할 수밖에는 없도록 만들어주었으며, 그 포기는 그야말로 책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저에게 다가온 강요(!)이었기도 했더랬습니다. 세 명의 등장인물의 시점을 왔다갔다하며 전개되고 있는 이 소설을, 그러하기에 각 등장인물들에 관해 따로 설명해 놓은 다음, 그들 각각의 행동들이 마지막에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며, 어떤 작용으로/왜 소설 속 사건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쓰려했었던 이 감상문의 외양을 (이 소설을 읽어본 분은 이해하시겠지만) 그 '그런 식으로'를 알게되자마자 결.국.엔. 포기할... 수밖엔 없네!란 생각을 가장 먼저 하게되더란 말인거죠.

.

.

.

​히구치는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 속에 웃으며 지나가는 젊은이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너무도 다른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캠퍼스 한구석의 곰팡내 나는 한 방에선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정신을 앓는 남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걸 듣는 우리도 앓고 있다. 구제할 수도 없을 지경으로 앓고 있다.

​이 소설에는 특이하게도 <19금>의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네이버에서 이 소설을 검색하려 하면 반드시 성인인증을 받아야하지요. 소설을 읽기 전, 예의 그 <19금>이라는 딱지는... 이 소설이 무지하게 야하거나, 혹은 심할 정도로 잔인하다는 걸 뜻할 꺼라는 예상을 하게 해주었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야해봐야 얼마나 야하다고, 또한 잔인하다 한들 제 생각엔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설정/등장인물들이 훨씬 더 잔인한데 그건 <19금>이 아니었는데.... 하는 의문들을 가지고는 있었더랬지요. 헌데 결과적으로... 다 읽고나서 '정신을 앓는 남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소설에 대해 '너는 이 소설에 <19금>의 딱지를 붙이는 것에 동의하느냐?'라 누군가 묻는다면 '7:3'정도로 '찬성!'에 한 표를 던지지 않을까 싶게 되기는 하더군요. 사실 주제나 서술 자체가 <19금>이 되어야할만큼 쎄!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상황의 설정 자체가 아무래도 고삐리들에게 보여주기엔 쫌, 더욱이 그 고삐리가 만약 내 아들이라면 한사코! 이 책을 침대 밑에 숨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암튼... 일본 사람들의 변태기질은 정말 쩌네요. --;;) 

​…………………………………

   

​미치오 슈스케의 「외눈박이 원숭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작품에 대해 전... '선입견의 파괴'라는 표현을 했었더랬습니다. 이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 역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구성하게되는 그 '선입견'을 마지막에 가서 한방에 박살내주고 있지요. --- 「외눈박이 원숭이」를 다 읽은 독자는 그 작품을 처음부터 읽어오며 자신이 가지게 되었던 (그것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상관없이) 선입견이 마지막에 박살이 났어도 허탈하다거나 하지는 않을꺼라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 작품에서 박살나게되는 '선입견'은 작가가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라기보다는 이제껏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미 가지고 있었던 (이 또한 저만의 선입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선입견이었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뭐... '작가에게 보기좋게/기분좋게 당했다'쯤이랄까? 그러하기에 또한 그 소설에 '반전이 숨어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사뭇 주저하게 됩니다만... 그에 반해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를 완벽하게/의도적으로 '속이고' 있으며, 독자가 이 작품에서 작가에게 '속았다'라는 표현, 근데 더 나아가 그걸 또 결국엔 '놀라운 반전'이라 써낼 수 밖에 없는 건... 독자가 가지고 있는 그 '선입견'이라는 게 독자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 현실과는 관계 없는, 그야말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야 새로이 만들어진 '선입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작가가 독자를 속일 수 있었던 그 핵심은... 알고보면 그런 간단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갔다는 게 일견 쪽팔릴 수도 있을 수 있는 뭐 그런, 엄청나게 허망!하기만 한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산 사람을 3등분 해버리는 마술도 그 숨겨진 트릭을 알게되면 에라이~란 말을 절로 하게되는 걸 생각해보면... 사람이 '속는다'라는 게 매번 영화 <The Bank Job>에서 같이 항상 어마어마한 트릭을 필요로 하는 것만은 또 아닌거 같기도 하죠.)

 

.

.

.​

참으로... 오랫만에 짧은(?) 길이의 감상문을 쓴듯 하네요.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암튼! 꽤 재미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휴가지에 가지고 갈 책> 같은 매년 여름마다 반복되는 흔하디 흔한,  결국 '책의 무게도, 그리고 책의 주제도' 가벼워야한다는 암묵적 강요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이 저에게 주어진다면 아마... 이 책을 빼놓지는 않지않을까 싶을만큼 말이죠. 말미의 <해설>에 나와있는 '현대 일본의 가정 황폐화'같은 건 그야말로 '말 그대로 해설을 위한 해설'에 동원된 수사일 뿐이라고, 설혹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살육에 이르는 병」이라 지은 이유가 그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저... 독자를 한번 멋지게 속여보겠다라 맘먹은 작가의 의도에 100이면 100!의 모든 독자가 그렇게 속아 넘어가게 되는 한 마디로 '걍 재미진' 소설일 뿐이라 받아들이는 게... 더 알맞지 않을까 싶네요.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한 요즈음, 그렇지 않아도 땀많이 흘리는 어느 중년 남자의 독서에... 이런, 좀 비록 <19금>의 딱지가 붙어있기는 하나 가벼운  책이 있다한들 누가 뭐라 하지는 않을테고 말이죠... 험.험! ^^;;  

※ 말 그대로 '허를 찌르는 반전'이 있는 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용의자 X의 헌신

 - 오기와라 히로시 作, 「소문

※ 독자가 작가에게 보기좋게 속아 넘어가게 되는 소설​

 - 미치오 슈스케 作, 「외눈박이 원숭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 본래 학자는 사유의 대리인이다. …… 사유의 대리인으로 위임장을 받았기에, 학자의 전문성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조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 (저자 자신인) 사회학자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세속으로의 잠행을 통해 채집한, 이미 자신도 모르게 '자전적 사회학자'였던 사람들의 세상 경험을 각각 씨실과 날실로 삼고 사회학 이론의 도움을 받아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테피스트리를 짜는 제작자이고자 했다.   -- <머리말> 중.

'무엇'에 관한 책이라 설명해야 할지, 있는 없는 솜씨를 죄다 발휘해 그 '무엇'을 어찌어찌해 골라내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책의 저자가 그 '무엇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를 과연 내가 정리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이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 '명품, 프랜차이즈, 열광, 해외여행'등의 일상에서부터 '자살, 죽음, 수치심'등의 어두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섹스, 취미, 가족, 명예, 수치심'등의 매우 개인적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모두 스물 다섯개의 키워드에 대해 각각의 키워드와 관련된 책들에 등장하는 이론에서부터 결국엔 그 키워드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까지를 그야말로 콕콕! 집어 설명해주고 있는, 실제의 두께를 훨씬 뛰어넘는 그런...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이 될지 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자가 나누어 놓은 스물 다섯개의 키워드들 중 몇몇을 제 임의대로 한데 묶어 어줍잖은 감상문을 써보려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겸손함의 표현이 아닌, 그야말로 제 진심.임을 이렇게 미리 밝히고...서말이죠.

……………………………

'상식적인 사람들만 모여 사는 사회가 있다면, 과연 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라는, 사뭇 '상식적'이어보이는 이 물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우리의 상식관 다르게도 '아니다!'입니다. --- 나의 상식과 당신의 상식, 그렇게 상식과 상식이 만나고 서로 견제할 때 몰상식은 생겨나지 못합니다만, '단 하나의 상식'만이 사회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상식은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변질되어버리며, 결국 그 사회는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 자신의 대답에 대한 저자의 설명입니다. 이 '단 하나의 상식'의 일례로 저자는 대한민국에 퍼져 있는 '부자 되기 욕망'을 들고 있는데, 다른 상식을 모두 먹어 치우고 유일한 상식으로 사회 구성의 모두의 뇌리 속에 자리잡게 된 '부자 되기'는 부동산 거품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내가 사둔 아파트의 가격만큼은 하락해서는 안 된다는 자폐적 사유를 만들어 내었으며, 이러한 사유는 그 지배적인 상식이라는 괴물에게 자신 스스로가 바쳐질 제물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모든 상식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준다는 겁니다. 

각 개인들은 각자의 상식에 근거를 둔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독립 가게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표준화된 프랜차이즈를 선택하는 건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합리적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들의 결과로 깁밥천국 옆에 있는 김가네 김밥집을,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나란히 영업을 하고 있는 어이없는 풍경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지요. 저자는 이를 두고 '하나하나의 합리성이 모여 비합리성을 연출하는 순간'​이라 표현하며, 이처럼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은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 듯 비슷해져 있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냈고, 결국 우리가 이러한 풍경 속에서 읽어내게 되는 건 오로지 자본의 축적과 유동뿐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적 다수에 근거한 보편성인 상식이라는 것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낳는 것과 연관해, '성장'과 '성숙'에 관한 저자의 설명 또한 매우 흥미롭습니다. --- 성숙이란 성장통을 겪은 후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성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과도 같다라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장이 성숙을 낳고 배움이 인격을 낳는 비율을 성숙률이라 정의한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성숙률은 출산율과 더불어 OECD 국가 최저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유식'과 '교양'이, '성장'과 성숙'이 결합하지 않은 얼치기 배움이 판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에 부과한 '성장'이 '성숙'을 대체하여 삶의 목표가 되어 있기에, 외양적으로는 지식 사회인듯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저자는 상식이 바람직함까지를 갖추었을때 비로소 양식良識이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사회는 상식을 그러한 양식으로까지 아직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문득 진중권의 '한국의 천민성'을 떠올려 주는데, 이와 관련하여 저자 노명우는 <명예>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이 사회에선 돈이 곧 명예이고, 명예 또한 돈으로 환산되는데, '아너스'클럽이 명예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명예박사는 영리를 위해 살지 않았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재벌 충수가 챙기는 전리품으로 전락해 버려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제 우리 사회에서의 명예는 일종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승리자가 받는 표식'이 되어있다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부자는 이제 돈만이 아니라 명예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질투의 대상이 아닌 일종의 '현대적 위인'이 되어 있는데,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 '현대적 위인'들의 일상을 부러워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모방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을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이를 '허구적 욕망'이라, 김찬호는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차이에의 집착'이라 각각 표현했지요. 하지만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경제력의 발목에 잡혀 부자인 척 보이고 싶어하는 이러한 욕망을 실현할 수 없게되었고, 결국 '짝퉁'이라는 사회적 용어를 만들어내는데, 저자 노명우는 여기서 '진품'과 '짝퉁'의 차이는 오직 경제력 밖에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창출되는 현상은 소비 사회의 일반적 모습이긴하지만, 김찬호는 이에 대해 '한국 사회처럼 일면적인 근대화가 급속하게 추진된 결과 물질적인 조건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반면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획일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회일수록 더 심각하고 왜곡된 양상으로 드러'날 수밖엔 없다고 지적했지요. 

 

진품의 명품은 타인들에게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며, 이 메시지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사회의 대다수인 중산층입니다. 자신의 소비 수준이 곧 '체면'이 되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경쟁으로붙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이러한 명품에 아예 관심도 없을 수 있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은 명품이라는 잡힐듯 말듯한 그 훈장이 너무도 탐날 수 밖엔 없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의 설명이라면 이 책이 그냥 꽤 잘 쓴 매력적인 사회학 책으로만 머물러 있었겠습니다만, 이러한 현실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켜 놓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사뭇 섬뜩하기까지도 한 해석은 저로 하여금 이 책을 '대한민국의 현실에 무언가 불만/아쉬움/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승리하지 못했으나 승리가 부러운 사람 …… 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층의 과시적 소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 …… 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 …… (그렇게)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법이다.

이를 진중권은 "'개인'이란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이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되듯이, 이처럼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라고 서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여러 면에서 앞서 읽었던 진중권과 김찬호의 책에서 다루었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천민성'으로 표현되었던 것과 관련한 저자의 주장과 진중권의 주장은 다음에서 보여지듯이 그 표현만이 다를 뿐,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주장을 담고 있기도 하지요. 

●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고 묻는다. …… 상대가 대답을 하면 이제 머릿속에 당장 그 나라의 1인당 GDP가 떠오른다. 모든 문화적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돈 내고 돈 먹는 사회의 '시장주의 코드'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좌변에 그 나라의 GDP, 우변에 우리나라의 GDP를 놓는다.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좌변과 우변 사이에 들어올 부등호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보다 GDP가 많으면 괜히 그가 존경스러워진다. 우리보다 적으면 은근히 무시하면서 괜히 그에게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을 늘 위아래로 놓고 보는 '보수주의 코드'다.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중.​

● ​서양에 다녀왔기에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사회 지도층이 될 수 있는 이른바 유학생의 전성시대는 <서유견문>과 함께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소위 '사회 지도층'은 서양이라는 본래 모호한 지리적 개념을 우리가 있는 '이곳'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시킨다. …… 선진국 타령은 내치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보수주의자들이 단골로 사용하는 무기이다. 노동조합이 생존권을 지키겠다고 파업을 해도, 복지를 확대하자고 주장해도, 그 어떤 주장이나 요구도 모두 잠재우는 만병통치약은 "선진국이 될 것이냐 여기서 주저않을 것이냐"라는 협박성 구호이다. 유길준의 안경을 변조한 박정희의 선글라스를 여전히 쓰고 있는 사람들은 이 협박에 쉽게 굴복당한다. 이 협박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나라와 나라의 수평적 관계 따위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상식 속 나라 사이의 관계는 …… 수직적이기만 하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 없이 깔보기 일쑤다. …… 그래서 입만 열면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미국에서는…"이나 "선진국에서는요"를 들먹여야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아적인 사고방식이 전문가의 식견으로 둔갑하고, 미디어는 정체불명의 유령 기호인 '선진국'을 들먹이며 외국에 대한 열패감을 조장하느라 바쁘다.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중

.

.

.

 

이 책은 제가 위에 적어놓은 것보다 최소한 100배는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제 능력의 수준에서는 여기까지 정리해오는 것도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결국! 저자가 이 책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몇몇 구절들을 짜집기하여 인용하는 것이 차라리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더 온전히 담아내지 않을까, 최소한 깎아먹지는 않지않을까 싶네요. 각각 <개인>,<자살> 그리고 <죽음>의 제목하에 있는 글들로부터 추려왔습니다.

 

개인에 대한 관심이 "나는 소중하다"는 광고의 수사학과 이기심의 배양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주목은 개인을 침탈하는 전체주의의 고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전체주의는 개인을 궤멸시킨다.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되어야 마땅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주목은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개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 개인의  개인 구원의 최종적인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책임을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 물어야 한다. ……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 사람이 유한한 존재였다는 증거이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 사람이 속한 계급을 알려준다. 죽음이라는 삶의 마감 앞에서도 그 사람이 속했던 계급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인류학적 장례식은 의례이지만, 사회학적 의미의 장례식은 그 사람의 계급적 성분을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는 전시장이다. …… 1998년 이후 요지부동인 자살률은 병든 사회가 진단과 처방을 간절히 바라며 사회에 보내는 알람이다. 하지만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사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성장을 향해 앞으로 돌격!'만을 소리친다. 국가는 청진기를 들고 병든 사회가 뱉어 내는 고통의 소리를 경청해야 함에도, '경쟁 또 경쟁!'을 확성기를 동원해 세뇌시키기에 바쁘다. 국가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사실'을 해석할 의무를 지고 있다. 학자는 자살률을 설명하지만,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몫이다. 만약 이들이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살방조죄로 기소되어야 하며, 또한 그들을 기소하지 않은 사회는 범인은닉죄로 고발되어야 한다. 

 

 

…………………………………​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까지는 저 개인만의 영역이기에 그것에 대한 애로 또한 완전히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만, 물론 순전히 훗날에의 '개인적' 기억을 위한 '개인적' 기록이라고는 하나,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감상문을 쓴다는 건 제가 이 포스트를 다 쓰고 '확인'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이후부터는 개인적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거겠지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에서 자라고 나이들어 온, 여전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이기에 김찬호, 진중권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노명우가 지적했던 대로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저 또한 자유스러울 수 없습니다. 이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의 저자가 <에필로그>에 써놓은 글 일부를 다시 한번 그대로 인용해 놓는 것으로 그러한 시선들로부터의 부담감에 대한 일종의 면피용 방패를 삼아보는 것으로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써놓은 이 감상문은 이 책이 전해주고 있는 깨우침의 1/100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 그러하기에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 나아가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원하신다면 부디 일독을 권해봅니다.

 

 

시장은 범죄율을 숨기고 여자 의원은 주저하고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정작 투표일을 까먹고

일기 예보관은 맑은 날을 예고했는데 비가 온다고 투덜대고

모두가 저항하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지 말라 하고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없고, 여자들도 보호받지 못하고

정치인들은 이용당하는 사람들을 써먹고

오염된 강물처럼 마피아 세력은 커져만 가고

당신은 이게 현실이나 내게 말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는 지끈거리고

침대에서 흘러나오며 내던졌던 옷들을 끼어 입고

창을 열고 뉴스를 들어도 지배층들의 블루스만 들을 수 있을 뿐이고

총은 불티나게 팔리고, 주부들은 삶이 따분하고

이혼만이 해법이고, 흡연은 암을 유발하고

열 받아 있는 젊은이들의 노래 속에서 이 따위 체제는 곧 망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구체적인 냉혹한 사실일 뿐이고.

- 로드리게스, "이것은 노래가 아니고 분노야", <콜드 팩트> 앨범 중에서.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 ……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 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콜드 팩트'라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 …… 나의 불행의 근원이 모두 기구한 팔자 때문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등상의 불을 끄고 그 어둠 속에서 세속의 리얼리티와 마주칠 때 그리고 '콜드 팩트'를 찾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힐링의 대상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 있는 사회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개인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로운 시도이다. 모두가 리얼리티에서 눈을 돌리고 위안을 찾기 위해 위안의 노래만을 듣는 시대에 사회학자는 '콜드 팩트'를 혼자 부르고 있다. 그 외로운 노래가 합창이 될 때, 상처받은 사회는 비로소 자기 치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