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민음사에서 나온 「이방인」을 사놓기했었습니다만, 출간과 동시에 마케팅의 일환인지 아니면 진짜 번역상의 신기원인지 일반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매우 도발적인 문구에 혹해, 세움출판사에서 펴낸 이 '새로운 「이방인」'을 구입해 읽어본거지요. (일단... 마케팅의 힘으로 저 한 명의 독자는 꼬신 셈입니다. 민음사 판은 채 한 번도 펼쳐지지도 못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의 품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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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읽어본 소설들 중 <1부>,<2부>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제 기억에 아마도 유일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그러한 구분이 내용상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라는 걸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만, 이 작품 「이방인」은 그리 길지도 않은 작품임에도 「롤리타」보다 더 확실.히 내용의 구성상, 그러한 구분이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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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친모의 부고장을 받고도 최소한 작품 속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휴가를 신청하는 순간에도 사장의 심기를 살피며, 어머니가 계시던 양로원에 도착해서도 모친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덤덤함을 보여주지요. 그는 심지어 관 속에 모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겠냐는 원장의 권유조차 사양합니다. 그리곤 밤새 어머니의 관 앞에 앉아 생전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있는 양로원의 다른 노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느꼈던 감정의 '특이함'은 다음의 표현에서 그 모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어머니의 관 앞에서 앉아있던 뫼르소) 아늑했다. 커피에 몸이 따듯해졌고, 열려진 문으로 꽃향기가 밤공기에 실려 들어왔다. 나는 반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나는 더 이상 졸리지는 않았지만, 피곤하고 허리가 아팠다. 이제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 채광창으로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여기까지 소금 내음을 실어 날랐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교외에 나와 본 것이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나는 만약 엄마 일만 아니었더라면 산책을 하면서 얼마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우리가 짐작하게 되는... 어머니의 사망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아들의 심정은 결코 아니지요. 어머니의 장례식을 그렇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뫼르소의 감정은 놀랍게도 '이제는 드러누워 열두 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의 나의 기쁨'이라 표현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인 토요일, 옛 직장 동료이자, 한때 호감을 가지기도 했었던 여인인 마리와 함께 해변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에는 코미디 영화를 보기도 했으며, 그렇게 보낸 주말의 끝에서는 '언제나처럼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 속에 묻혔으며, 나는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독백을 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주인공 뫼르소의 감정과 행동들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들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작가가 직접적으로 뫼르소가 어떠한 사람이며 왜 이런 생각과 행동들을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주인공이 항상 '피곤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웬지 무기력함이 몸에 완전히 베어 있는 인물일 것 같다는 추측뿐이며, 그 '피곤함'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기인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또한 하게 해준다라는 것 뿐이지요.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될대로, 나는 되는대로 살아가고 싶다'라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런데 왜 나랑 결혼을 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제안한 사람은 그녀였고 나는 그러자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거라고. 그러자 그녀는 결혼은 진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이처럼 뫼르소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조차도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결혼을 할 수도 있다라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일단 그 진행 과정이 그려지고 있는 부분에서 뫼르소의 행동들이 쉽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무덤덤한/특이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를 '꼭 그래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꼭 그랬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 모두는 궁금해할 수밖에 없지만, 작품 속에는 그 이유가 제 기준에서는 뚜렷하게 보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주인공 뫼르소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1부>의 마지막에 서술되고 있는 뫼르소의 회상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사건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었다라는 걸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는 있습니다.

 

…… (전략) …… ★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노크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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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 이후 뫼르소가 받는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자의 말>에서 옮긴이는 이 작품에 관해 '앞에 한 어떠한 한 마디 말도 뒤로 가면 어김없이 연결이 되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다 읽고나서야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더군요. 즉, '앞'을 의미하는 <1부>에서 독자로서는 별다른 특별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던 뫼르소에 관한 (그의 특이한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행동과 사건들이 '뒤'에 해당되는 <2부>에서 펼쳐지는 재판 과정속에서 어떻게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작용하게 되는가를 가르키고 있는 표현이었던겁니다.

뫼르소의 행적을 조사한 변호사는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물었습니다만, 그가 뫼르소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예의 <1부>에서 보여졌던 그 모습 그대로였었습었지요.

​확실히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많이든 적게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 나는 그에게, 내 육체적 필요는 종종 내 감정을 방해하는 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엄마를 묻던 그날, 나는 몹시 피곤하고 졸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이제 작품은 재판 과정을 통해 이처럼 매우 특이한 인물 뫼르소의 행위를, (그의 특이함에 비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들인 판사,검사,변호사 그리고 배심원들이 판단하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재판의 말미에 검사는 배심원들을 향해,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그다음 날 참으로 수치스러운 방탕 행위에 몸을 맡겼던 바로 그 사내가 하찮은 이유로,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라는 선고를 내리지요, 사건의 전개 과정을 거의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선고문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뫼르소를 변호해낼 뚜렷한 다른 무언가를 이 작품을 읽어온 독자가 가지고 있기는 한/있을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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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석에서일지라도,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검사와 내 변호사가 변론을 펴는 동안 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아마도 내 죄에 관한 것보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일이 나의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 박스 안의 구절들이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 이유를 좀 나눠서 보자면 :  

① '내 죄에 관한 것보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접견 신부에게 "나는 그에게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단지 내가 죄인이라는 것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죄가 있어서 그 값을 치르고 있으며, 내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 '죄인'이라는 단어가 '죄를 지은 사람'을 뜻한다면, 누군가를 죄인으로 칭하기 위해선 반드시 '죄'에 관한 명확한 설명이 선행되어야하는거죠.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건 검사와 판사는 '살인'이라는 (죄가 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기보다는 배심원들을 향해 뫼르소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설명해내는 것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한다는 점입니다. 즉, 뫼르소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살인이라는 그의 행위보다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듯 보인다라는 거지요. 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런이런 사람이니까 살인을 저지른 것이고 그러니까 죄인이다라는 논리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의 식민 지배 역사를 고려해본다면 당시 프랑스에서 프랑스 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아닌 '아랍인'이 '살해당했다'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리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까지 해보게도 되더군요. 만약 그렇다라면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뫼르소의 말은 드디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을 총으로 다섯 방이나 쏴서 죽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거겠죠. 뫼르소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물론 그는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 나름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지요.)    

②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그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 확실히 뫼르소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또한 단지 '특이한' 인물일 뿐이지요. '나를 제외하고'라는 표현이 그저 법정에서의 관행상 피고인이 제외된다라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뫼르소는 '특이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를 '특이하다'라 생각하는 특이하지 않은 검사와 판사, 심지어 그의 변호사에게서까지도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겁니다. 일반적 사회 관계에서 겪게 되는 '무시'가 아닌,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의 '무시'라는 것. 그 이유가 오로지 '특이함'때문이라는 거지요. 

① 아랍인의 죽음이 그리 큰 문제꺼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저의 가정이 맞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이방인The Stranger '임을 상기해볼 때, 이 때의 이방인은 바로 살해당한 아랍인이 될 수 있으며, ②​ 뫼르소의 죄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이유가 오로지 그의 성격이 남들 - 판사,검사, 배심원, 변호사 등등 - 과 달랐기 때문이라 본다면 이 때의 이방인은 ①번에서의 이방인이었던 아랍인을 살해한 뫼르소가 되는 거겠지요. 물론 ②번으로서의 '이방인'의 의미가 이 작품의 제목을 「이방인」으로 만들어 낸 더 결정적인 이유일꺼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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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후반부에는 소설 본문보다 더 두껍게 되어 있는 <역자노트>가 있습니다. 전문 번역가의 입장에서 보는 '번역'이라는 작업과 그 작업의 결과물인 번역서를 접하는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역자노트>에 실려있는 대부분이 번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지는 것들이지, 일반 독자가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같은 작품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다 해서) 결정적으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해주는 요인들은 아닌듯하다는 인상이 더 짙었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이 번역서를 통해 처음이자 유일하게 접해본 저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결정적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엔 '태양 때문'이라 대답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 햇볕이 내 뺨을 불태웠고,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햇볕은 엄마를 묻던 날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특히나 그때처럼 나는 이마가 지근거렸고, 피부 밑에서 모든 정맥이 울려 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칼을 뽑아서 태양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번쩍 반사되며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내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동시에 눈썹이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 내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마에서 울려 대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정면의 단검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번쩍이는 빛의 칼날뿐이었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 ★

​<1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인용문의 바로 앞 -(전략)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 에 있는 위의 구절들을 볼 때, 뫼르소가 총을 쏜 동기가 '태양 때문'이 아니라 '칼날 때문'이었다라 주장하는 역자 이정서의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게됩니다. 역자는 뫼르소가 쏜 다섯 발의 총알에 대해 '정당한 이유로서의 한 발과, 위장된 도덕·종교·권위·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무의식적인 발사'라 쓰고 있는데, '표현의 자유'를 빌어본다면 이는 '나가도 너무 나간 발걸음'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한 떨쳐버릴 수 없구말이죠. 뫼르소는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사고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살해동기가 '태양 때문'이었다라는 건, 문맥을 잘못 집어낸 오역의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뫼르소의 특이함에서만이 이해되어질 수 있다라는거지요. (다시 한번... 이 작품의 제목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더더욱!) 역자 이정서는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정당방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분명 당시 아랍인은 해변에 누워있었습니다. 누워서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뫼르소를 향해 (오히려 그가 정당방위의 행동으로) 칼을 겨누었던/겨누기만 했던겁니다. 당시 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다가간 것은 그를 해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분명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태양의) 뜨거움' 때문이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스스로 법정에서 살해동기를 묻는 질문에 전후좌우의 사정을 다 생략한 채 '태양 때문'이라는 대답을 했던 것이지요. (그가 법정에서 매우 당황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자의 설명은 오히려 '전후좌우의 사정을 다 생략한 채'라는 설명을 넣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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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자체가 '대단하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1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뫼르소가 <2부>에 가서는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다...라는 정도? --- 한 작품의 번역본이 이미 시중에 여러 권 나와있고, 또한 그 중 한 권이 독보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면, 후발주자로서는 그저 자신의 번역이 '이전 것들과는 다르다'라는 것만으로는 쉽게 어필되지 않겠지요. (역자노트를 통해서만 접해본 한에서) 민음사 판의 번역이 이 책의 번역보다 부자연스럽게 읽히는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역자가 지적한 1/3정도는 거의 공감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논쟁이 뜨거웠었던듯 하고, 어쨌!든 (이미 민음사 판을 가지고 있었던) 저같은 독자도 이 책을 한 권 더 구입했었으니 (그 의도가 역자의 아이디어인지, 출판사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의도했었던 마케팅의 효과는 나름 있었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이 책에서도 (비록 많지는 않지만) 카뮈의 문체와는 상관없는, 오로지 역자의 번역으로부터 기인하는 몇몇 어색한 표현들을 볼 수 있었었으며, 결정적으로!!!

<1부> 2장의 시작에서 뫼르소가 '내가 그렇게 일요일까지 도합 사흘 동안 쉬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라는 표현에서 '사흘'은 <민음사>와 <더클래식>에서 나온 「이방인」​에는 '나흘'로 나와있는데, 앞뒤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이건 '나흘'이 맞는겁니다. 물론 '오역'이 아닌 '오타'라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번역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내세우고 있는 번역이라면 혹시 있을지 모를 자신의 실수에 훨씬 더 철저했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는 되지요.

이 책을 통해 번역의 중요성... 에 대해 그저 개인적 감感​의 수준이 아니라, 원작의 이해를 다르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라는점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참 좋았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의 방식이 너무 과격하지않나.라는 독자들의 의견 또한 역자가 받아들여야할 몫일듯.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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