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위화와 더불어 현재 '중국의 3대 작가'라 불리운다는 쑤퉁을 만나본 첫 작품입니다. '3대 작가'라는 타이틀의 정당성이 어떻게 성립된건지는 알 수 없지만, 류전윈의 책을 읽고 쓴 감상문에 이웃분께서 쑤퉁이라는 작가을 언급해주셨는데, 난생... 첨 들어보는 작가라 검색을 해보니 그렇다더라,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암튼!!! 이 작품이 쑤퉁의 대표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알라딘 중고서점에 그의 작품으로는 이것뿐이었다라는 이유로 읽어보게 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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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역사가 아닌, 가상의 역사를 다룬 소설입니다. 섭국이라는 나라의 왕이 죽었고, 그는 장자가 아닌 다섯 째 아들 단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유언장을 남깁니다. 이는 단백 자신에게는 물론 모두에게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었지요. 어쨌든!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왕위 계승자 단백은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니, 예의 할머니 황보부인과 엄마인 맹부인의 섭정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맹부인은 자신이 왕의 친모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할머니인 황보부인이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게 되지요. 그 사이에서 나이 어린 제왕만 그저 휘둘리게 될 뿐.

제왕의 스승인 각공은 그렇게 일국의 군주같지 않은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제왕에게 '제왕의 생애란 그렇듯 하잘것 없는 말들을 견디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가운데 흘러가는 거'라는 말을 해줍니다. 이복형제들과의 갈등은 결국 제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로 표출되었고, 섭왕은 그들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싶어하나 할머니인 황보부인의 반대로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 항의하는 섭왕에게 실권자인 황보부인은 "섭국의 궁중에서는 왕으로 세워지기도 쉽지만 쫒겨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 말을 절대 잊지 말거라"라는 반협박성 멘트로 일순간에 그의 불만을 잠재워버리지요.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그가 제왕이라는 칭호로 불리우되, 그에 걸맞는 실권은 가지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겁니다.  ​

이웃 나라인 팽국의 빈번한 침략으로 국운이 쇠퇴해져가기 시작한 섭국은 결국 생존을 위해 팽국의 공주를 섭국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결정 또한 예의 황보부인에 의해 내려진 것이었지요. 팽국의 공주와 결혼을 했으나,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섭왕은 오히려 혜빈이라는 후궁에게 점점 더 빠져들며, 국사를 멀리하게 됩니다. ​섭국의 운명은... 그렇게 제왕의 지위가 약해진 것에 발맞추어 점점 위태로와지기 시작하지요.

내가 무슨 빌어먹을 개 방귀만도 못한 왕이란 말이야?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며, 또한 가장 가련한 제왕이로다. 어릴 때는 유모와 환관, 궁녀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글을 깨우칠 무렵에는 승려 각공이 하라는 대로 했으며, 왕이 되어서는 황보부인과 맹부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이제 나라의 정세가 크게 변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모두 다 늦었구나. 한 자루 칼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저 여기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 …… 내가 무슨 빌어먹을 왕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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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부인은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이 선대 왕의 유언장을 바꿔치기 하였었으며, 선왕은 사실 장자 단문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었다는 것을 단백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저... "이건 내가 너희 사내놈들과 즐긴 한바탕의 농담이니라. 나는 가짜 섭왕을 만들었다. 너를 조종하는 게 더 쉬웠기 때문이지."였었다라고 말이지요. 

 

​왕의 자리에 아무런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가, 결국 장자 단문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는 것은 이처럼... 원래 일어났었어야 했던 일이 단지 뒤늦게 일어난 것일뿐이었던 겁니다. 왕위를 빼앗기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궁을 떠나 평민의 삶을 살게 된 폐왕 단백은 옛날부터 꿈꿔왔었던 줄타는 광대가 되었고, "나는 시골 객잔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일찍이 나는 이 나라의 지고무상한 제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행복과 즐거움은 그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소설은... 결국 섭국이 패망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떠올랐었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스토리는 두 작품이 많이 비슷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어거지(?)를 부려 굳이 이 작품만의 메세지를 끄집어 내본다라면 「나, 제왕의 생애」를 통해 작가는, 결국 행복이란 건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하는 느낌정도였다랄까요? 다시 말해!!!

자신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도/순탄하지도 않으며, 어쩌면... '행복'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어야 할 달콤함조차, 그 '행복'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이처럼 자신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 삶의 행복이라 정의되는 것이 전혀 달콤하지 않은 것들로만 이루어져있을 수도 있지만, 또한 그 반대로 달콤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행복하지 않음'은 오히려!!! 최소한 타인들에게는 여전히 행복함!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지기도 한다라는, '구경거리로는 남의 운명을 들여다 보는 것만한 것이 없다'라는 타인들의 심리와의 그 괴리를... 작가 쑤퉁이 언급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하기만한 저의 추측으로 이 작품을 표현할 수 밖엔 없을 듯 싶습니다. 술술 읽혀가긴 했습니다만, 임팩트도 재미도 느낄 수 없었던, 그렇다고 뭔가 작가만의 메세지가 뚜렷이 나타나 있지도 않아보이는, 그런 소설이었었기에,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네요. 읽고싶은 책들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저의 '생애'는 이미 충분히 부족해진 듯 싶어서 말이죠. --;;

 

 

(읽어본) 중국 작가의 책들

 

- 위화 作 :허삼관 매혈기」 · 「제7일」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 「인생」 · 「형제 1·2·3

- 모옌 作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류전윈 作 :  「닭털같은 나날」 · 「나는 유약진이다

- Ji Li Jiang 著 :  「Red Scarf Girl

- 장안거 著 : 「붉은 땅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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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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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외삼촌」에서 이주인 시즈카가 그려낸 아버지는 굉장히 강인한 인물이었습니다(사실 '아버지'로서 강했다기 보다는 '남편'으로서 강했던거지만).  「나는 아버지입니다」속 아버지는 (결과적으로는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작업이 약간은 결부되어있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야말로 '희생의 아이콘' 그 자체였었었지요. 이 두 작품 속 아버지들은 말 그대로 우리가 본받아야한다라 말해지는 '교과서적인 이미지'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만!!!

 

위화의 「인생」에서 그려졌던 아버지 푸구이 옹은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어쨌든 결국엔 그의 삶이란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독자들은 알게 됩니다. 오히려 박범신의 「소금」에 등장하는 아버지야말로 이 표현,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란 말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었지요.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을 위해 가족을 등지는, 감히 정상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는 모습의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나보았더랬습니다만!!!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무능력한 아버지, 그와 대비되는 「아버지와 외삼촌」, 「나는 아버지입니다」속의 강한/희생하는 아버지들. ---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려보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양극단의 아버지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래 어중간하면 기억되지 않는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만) 이는 그만큼 우리가, 현실적이지 않은 아버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세상엔! 이런, 엄청 강인한/희생적인/무능력한 아버지보다는 (저를 포함하여) 그냥... 그냥저냥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러다보면 때론 강한/희생적인 아버지가 되기도, 다른 때엔 무능력한 아버지가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어중간한' 아버지들이 대부분 아닐까요? (안... 그런가요? --;;)

 

그런, 여러가지 모습의 아버지의 이미지에 비해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비교적 일정합니다. 어느 영화건 소설이건, 심지어 현실의 뉴스에서 마저도 어머니란 단어는 대부분 '희생'이란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곤하지요. 아마도... 우리나라 소설 중에서 '엄마'에 관해서만큼은 가장 유명한 듯 보이는 이 작품 「엄마를 부탁해」는 그렇다면, 과연... 어떤 모습의 '엄마'를 그려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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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엄마의 실종을 계기로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 본문과 <해설> 중

이 작품은 '대상의 부재를 통한 그 대상에 대한 존재의 깨달음'이라는, 비교적 흔한 방식을 통해 '엄마'이고 '아내'인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다라는 사실을 통해 '잊고'있었던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딸의 시선으로, 아들(장남)의 시선, 마지막으로 남편의 시선으로 '엄마이고 아내'인 한 여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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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벗어난, '사회'라는 곳에서의 모습관 상관없이,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 '딸'이라는 위치에 있는 이가 바라보는 '엄마'라는 존재는 특이할 수 밖엔 없을겁니다. 그녀 또한... ('일반적'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언젠간 그 '엄마'가 될 테니까말이죠. 소설 속 화자는 '모녀 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라는 말로써 엄마와 딸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가는 '너'라는, 소설의 주인공을 지칭하기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 작품을 '바로 당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기에 어쩌면 이 작품이 여성을 주대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긴 했더랬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를 떠나,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만큼은 그보다 더 상위의 개념인 '자식'된 입장에서 본다라면 말이죠...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라는 호소가 배어있다. 혼만 내지 말고 ……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줘,라는 …… 엄마를 잃어버린 지금까지도, 엄마라고 부를 때의 너의 마음에는 엄마가 건강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엄마는 힘이 세다고, 엄마는 무엇이든 거칠 게 없으며 엄마는 이 도시에서 네가 무언가에 좌절을 겪을 때마다 수화기 저편에 있는 존재라고. ……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 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벗어난, '사회'라는 곳에서의 모습관 상관없이,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 '장남'이라는 위치에 있는 이가, 특히나 어쩌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의 '장남'이란 위치에서 바라보는 '엄마'라는 존재 또한, 특이할 수 밖엔 없습니다.

그날 밤 둘이 누워 서울 처음 보니 어떠세요?라 물었고, 엄마는 별것 아니구나,라 대답했었다. …… 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너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꼭 지금 너였다. 눈도 안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  …… 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뻤다던디 난 슬폈던 것 같어. 이 갓난애를 내가 낳았나, 이제 어째야 하나, 왈칵 두렵기도 해서 첨엔 고물고물한 네 손가락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어야. 그렇게나 작은 손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하나하나 펴주면 방싯방싯 웃는 것이, 하두 작아 자꾸 만지면 없어질 것두 같구.  …… 난중엔 나날이 니 손가락이 커지고 발가락이 커지는디 참 기뻤어야. 고단헐 때면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는 니 작은 손가락을 펼쳐보군 했어. 발가락두 맨져보고. 그러구 나면 힘이 나곤 했어. 신발을 처음 신길 때 정말 신바람이 났었다. 니가 아장아장 걸어서 나한티 올 땐 어찌나 웃음이 터지는지 금은보화를 내 앞에 쏟아놔도 그같이 웃진 않았을 게다. 학교 보낼 때는 또 어땠게? 네 이름표를 손수건이랑 함께 니 가슴에 달아주는데 왜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는지. 니 종아리 굵어지는 거 보는 재미를 어디다 비교하겄니. 어서어서 자라라 내 새끼야, 매일 노랠 불렀네. 그러다 언제 보니 이젠 니가 나보다 더 크더구나. …… 어서어서 자라라, 했음서도 막상 니가 나보다 더 커버리니까는 니가 자식인데도 두렵데. …… 봐라, 너 아니믄 이 서울에 내가 언제 와보겄냐.

​물론! 위의 모든 감정들은 첫 아이를 대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똑같을겁니다만, 아무래도... 열 달간 그 자식을 자신의 몸 안에서 품고 있던 엄마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에는 다다르지 못할 꺼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엄마가 자신이 낳은 첫 아이, 그것도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에게까지는 거의 '필사적 의무'이기까지도 했었던) '장남'에 대해 가지게 되는 기대는 그녀가 학식이 많건적건, 돈이 많건적건을 떠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은 '절박한 무언가'를 의미했었겠지요. 소설 속 '장남'에게 엄마는 그로 하여금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결의를 품게 하는 존재였다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훗날 장남은 자신에게 그러한 결의를, 더 먼저는, 그러한 꿈을 가지게 해주었던 동인이 다름아닌 엄마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 엄마는 그에게 니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는 그것이 엄마의 꿈이기도 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청년시절에 꾼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의 엄마의 꿈을 좌절시킨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개인적으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당신들의 자식들에게 가졌던 꿈과, 현재 초··고딩들의 엄마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가지고 있는 꿈이, 겉으로는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확연하게 다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당신들이 '할 수 없었던 것들' 을 자식들이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었던 것이지만, 현재의 엄마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식들이 해주기를, 그것도 남의 자식들보다 더 많이! 더 잘! 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 생각에 대한 동의를 굳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까지 구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부분을 읽으며, 저 또한, 결국엔 '제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장남'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더랬습니다. 그리곤 가만 되돌아보니, 그 시작은 저만의 꿈이었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의 꿈이 되었었었고, 마지막으론 내 아내가 될 사람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었다라는 걸, 하지만! 비록 '타의 반'이라는 상황이 저의 손 밖에서 일어나긴 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 절반은 여전히 '자의 반'이었었다라는 사실, 하지만 어느새 제가 그 '자의 반'에 대한 책임까지도 모두 '타의 반'에게 떠넘긴 채, 내 부모와 내 아내에게도 전이되어 있는 그, 이루어지지 못한 꿈을, 제가 가장 먼저 잊으려 노력했었었고 결국엔 잊은 채...로! 그 이후를 살아왔었었다라는 사실 또한 다시금 깨달았구 말이죠.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엄마는 어느덧 일흔을 훌쩍 넘기신 연세가 되어있는 지금!에야 말입니다. --;;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벗어난, '사회'라는 곳에서의 모습관 상관없이,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 '남편'은, '아내'라는 존재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특별해질 수 밖엔 없는 사람입니다. 각기 '남남'으로서 따로 떨어져, 그저 '남자'와 '여자'로 살아왔던 두 사람이 '부부'라는 관계를 통해 드디어 '그저'가 아닌, '세상에 유일한!' 남자와 여자가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지극히 국민윤리적인 시각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유일한!'이라니요. --;;) 즉, 한 여자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나서야 엄마가 될 수 있기에, 엄마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시선과,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비록 한 사람을 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많은 점에서 다를 수 밖엔 없을겁니다. 하지만 작가 신경숙은 이 작품에서... 이 또한 (그녀의) 실종을 계기로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닫는다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소설의 제목은 「엄마를 부탁해」이지만, 웬지... 저에게는 '아내'로서 묘사되는 '엄마'의 장면들이 훨씬 더 가슴을 찌르더군요. 겉으로 보여지기엔 다정한 남편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었기 때문인가요?

아내를 지하철 서울역에서 잃어버리기 전까지 당신에게 아내는 형철 엄마였다. 아내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당신에게 형철 엄마는 언제가 그 자리에 있는 나무였다. 베어지거나 뽑히기 전에는 어딘가로 떠날 줄 모르는 나무. 형철 엄마를 잃어버리고 당신은 형철 엄마가 아니라 아내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오십년 전부터 지금까지 대체로 잊고 지낸 아내가 당신의 마음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고 난 뒤에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육감적으로 다가왔다. …… 당신은 이 집을 내키는 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면서도 아내가 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당신은 헛간에 놓여 있는 빈 평상을 향해 웅얼거렸다. …… 그때는 왜 그것이 평화롭고 복된 일이란 걸 몰랐을까. 아내한테 미역국 한번 끓여본 적 없으면서 아내가 해주는 모든 것은 어찌 그리 당연하게 받기만 했을까. …… (아내의) 투박한 손을 볼 적마다 당신도 아내가 당신보다 하루라도 오래 살기를 바랐다. 당신이 죽은 뒤에 아내의 손이 마지막으로 당신의 눈을 쓸어주고, 자식들 앞에서 당신의 식어가는 몸을 닦아주고 그 손으로 수의를 입혀주기를. …… 당신은 아내가 당신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라던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를 이제야 깨닫는다. …… 언제나 아픈 사람은 당신이었고 그런 당신을 보살피는 사람이 아내였다. 어쩌다가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당신은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아프면 아내는 이마를 짚어보고 배를 쓸어보고 약국에서 약을 사오고 녹두죽을 끓이고 하였으나 당신은 약 지어다 먹으라고 하곤 그만이었다. 당신은 이제야 아내가 장에 탈이 나 며칠씩 입에 곡기를 끊을 때조차 따뜻한 물 한 대접 아내 앞에 가져다줘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평생을 당신은 늘 아내보다 앞서서 걸었다. 어느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기도 했다. 뒤처져서 아내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왜 그리 걸음이 늦느냐고 타박했다. 그러는 사이 오십년이 흘렀다. 아내는 걸음이 늦긴 했어도 당신이 얼마간 기다려주면 뺨이 붉어진 채로 곁으로 다가와서는 여전히 좀 천천히 가면 좋겄네,하며 웃었다.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아갈 줄 알았다.  ……당신은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를 깨닫는다. 당신의 아내에게 그 상처를 죄다 떠넘기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아내였건만 함구해버림으로써 아내를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것도.

………………………………

 

관객에게서 눈물을 짜내겠다,라 작정하고 만든 영화들이 있지요. 제가 본 가장 최근의 그런 영화는 바로 <7번방의 선물>이었습니다. 저 또한 물론! (예의상?) 그러한 감독의 작정대로 눈시울이 시큰해졌었더랬습니다만... 그처럼 작정에 의해 나오는 눈물은 양이 많지도 않거니와 금새 말라버리곤 하죠. 이 작품 「엄마를 부탁해」에도 또한 그런 류의 의도가 있을거라 생각했었더랬습니다...만! 다 읽고난 지금에도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작가 신경숙은 딸에게의 엄마를, 아들(장남)에게의 엄마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식들의 엄마이자 자신에게는 아내인 남편으로 각기 나누어 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나는 상관없음!'이란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그저 제 3자로서만 볼 수 밖엔 없었던 영화 <7번방의 선물>의 감독과는 차원이 다른, '작정'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처럼 특정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부디 저의 誤譯이 아니길 바라며...) 특정한 행위를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딱히 새롭지는 않은, 또한 '대상의 부재를 통해 대상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이끌어낸다라는, 역시나 새롭지도 않은 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를 향한 그러한 새롭지 않음에 대한 불평보다는, 이 작품을 제가 너무도 늦게 읽었기 때문이라는, 독자로서의 게으름에 대한 자책만을 가져보게 되는, 참으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엄마'라는 대상에 대한 감정 - 사랑, 애틋함, 심지어 증오일 수도 있을, 그 어떤 모습이든 - 이라는 게,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단 몇 시간만 흐르고 나면 다시 허기짐을 느끼게 되는 인간의 본성관 달리, 아무리 반복된다한들 지겹다,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는, 그런...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작품 속의) 아들, 딸, 그리고 남편... 이 말하는, 이젠 더 이상 그들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아내에 대한 후회어린 표현들을 한데 적어보는 것으로... 이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입에 넣을 때는 조그마했던 것이 뱃속에서 점점 불어나 꽤나 오랫동안의 포만감을 주는 그 무엇처럼... 뭔가, 엄청나게 뭉클!할 꺼라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던 이 소설은, 엄청!이라는 표현대신 참으로 오랫동안!이라는 말로써 제게 남게 될 듯 하네요.

 

엄마의 실종은 그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 속의 일들을 죄다 불러들였다. 그는 언제부턴가 대체로 엄마를 잊고 지냈다. ……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난 어떻게 엄마의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까. 나는 엄마처럼 못 하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말히란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 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겄거니 하며 살았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 부탁헌다. 니 엄마, 니 엄마를 말이다.

 

※ 본문에서 인용되었던 포스트들 : 아버지와 외삼촌」 · 「나는 아버지입니다」 · 「인생」 · 「소금」 · 「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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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외삼촌 - 한국전쟁 속 재일교포 가족의 감동과 기적의 이야기
이주인 시즈카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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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이라 불리우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감각/경로를 통해서든 바라보게 되는 '과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과도 같은 감정을 갖게되곤 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그저 사용하는 자의 입장에서 가져보게되는, '이렇게 편한 게 없었을 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하는 의문이 그 단적인 예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게 없었을 땐'의 다음에 '대체 어떻게들 살았었을까?'라는 의문이 아닌, '이런 걸 만들어낼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었을까?'라는 감탄을 가지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가셨던 그 모든 분들을 향해 가져야할 합당한/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성공한 사업가 소지로의 아들 다다​하루는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가업을 이어받지 않으려 한다. --- 이 소설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는 소지로라는 사람이 현재(에도 살아있는) 성공한 사업가이고, 그의 아들 다다하루가 청년이 되어있는 지금까지도 그의 사업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채!... 아버지 소지로의 최측근이었던, 지금은 은퇴한 ​시미즈 겐조라는 사람에게서 다다하루가 (또한 독자가) 듣게되는 아버지의 옛 이야기들이 바로,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겁니다. 현재를 만들어낸 프리퀄을 펼쳐내보이는 일종의 액자소설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극적 긴장감을 저해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알아서... 독자가 가져야할 합당한/당연한 예의를 알아서 구비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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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2세인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의 실제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전쟁 속 재일교포 가족의 감동과 기적의 이야기'라는 표지의 문구는, 게다가 '아버지와 외삼촌'이라는 이 작품의 제목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간에, 누가누가 더 안 어울리나 시합이라도 하는듯한 느낌을 얼핏 같게도 해주지요. 한국전쟁과 재일교포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게다가 어머니와 외삼촌도 아니고 '아버지와 외삼촌'이라니!!!

<주요 등장인물>​

소지로 (아버지) : 일제시대에 가난을 못이겨 일본으로 넘어 온 조선인

요코 : 소지로의 부인. 그녀의 부모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다다하루 : 소지로와 요코 사이에서 낳은 아들

​고로 (외삼촌) : 요코의 남동생

가네코 마사히로 : 요코와 고로의 아버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 사장 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매우 인간적인 인물​

'처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위험까지 감수하며 일본에서 밀항선을 타고 한국의 전쟁터로 향한 아버지의 이야기' --- 출판사에서 적어놓은, 이 작품의 줄거리이며, 무려 633 페이지가 되어서야 끝이 나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또한 이것이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줄거리 자체가 별 것 아니라는 말은 아니구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흥미있는 줄거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재일교포 2세라는, 즉 최소한 그에게 대한민국의 피가 섞여는 있다!라는, 되도 않는 동류의식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지는 않겠다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이 작가가 '나오키 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굳이 모른다 할지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무척이나 잘 읽히는 소설이라는 건 아마도 이 작품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대부분 선뜻 동의할 거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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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는 맨 처음 이도령을 보았을 땐 별로 맘에 들지 않았었어요.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춘향이의 눈에 보이는 이도령의 행동이나 말투는 춘향이로 하여금 이도령을 싫어하게까지 만들기도 했었었지요. 한편 이도령은 춘향이의 외모에 한 눈에 반하기는 했지만, 기생의 딸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짐짓 마음에 걸렸더랬어요. 그랬던 그 둘이... 어떠어떠한 일들을 겪어가며, 결국엔 서로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답니다! :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간단하게 표현해보자면 딱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투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상투적이기만 한 내용을 가진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건 다름아닌 '어떠어떠한 일들을 겪어가며'라는 그 (사랑의) 진행과정에 있는거지요. 춘향이가 기생의 딸이고, 이도령은 엄친아라는 설정은 그저 그 진행과정에 필요한/사용되어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겁니다. --- 이런 관점으로 이 작품 「아버지와 외삼촌」을 걸러내어보면, 제 생각에, 결국 남게 되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네요.

● 주인공 소지로는 장인,장모 그리고 처남을 일본으로 데려오기 위해, 6·25 전쟁 와중에 일본에서 남한으로 혼자 몰래 밀입국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처가집을 찾아간 소지로는 현실적으로 그들을 일본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방법을 제외한 최상의 방안이라 생각되는 것을 결국 힘겹게 모두 실행에 옮겨내지요. 여기서 자신의 목숨까지를 내던졌던 그의 행동은 '가족의 강한 인연과 사랑' 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지요. 또한 책의 뒷표지에도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듯이, (최소한) 출판사는 이 작품을 그 '가족의 강한 인연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듯 합니다만, 물론 그러한 의미가 충분히 작품 속에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만!!!

​사실... 주인공 소지로가 자신의 목숨까지를 걸어가며 처가 식구들을 일본으로 데려오기 위해 한국으로 갔던 이유를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적 감성에 기반을 둔다면) 자신의 엄마가 살아계심에도, 친모를 제쳐두고 장인·장모·처남만을 전쟁 중이었던 한국땅으로부터 탈출시키려 한다는 설정은 더더욱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한 번쯤 읽어볼 만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게 되는 건,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작가가 ('가족애'보다 훨씬 더 무거운) '조국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나아가서는 '사상이란 사람의 삶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까지도 (그 '가족애'와 연관지어져) 읽는 이로 하여금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일본이 미국에 항복을 하고 나자, 일본이 통치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 대만인, 중국인 등이 일본 전역에서 독립과 관련된 조직을 만듭니다. 물론 일본은 어수선해졌지요.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요코는 "국가가 패전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라 말합니다. '국가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던, 즉 국가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녀를 통해 이렇게 작가는 독자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요'라는 첫 질문을 던져주지요.

 

이 '전형적인 스토리의 이민사'는... 이것이 실제 오래전이지도 않은 우리의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었었으며,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어야 했던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이 기쁨으로, 슬픔이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 이전의 상태.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사는 체념의 모습"으로 살아갔던 그들 멕시코의 조선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갈구하며, 자신들을 먼 이국 땅으로 보냈던 그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길 꿈꾸었지요. 도대체... '조국'라는 게 무엇이기에 그들은 떠날 때의 마음과 달리 자신들의 나라, 조선으로 되돌아가고가 했었을까요. 

「에네껜 아이들」이라는 책을 읽고 썼었던 감상문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변형시켜 '조국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됩니다. 다음에 인용해 놓은 ① 요코의 아버지인 마사히로를 통해, 그리고  ②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 살아야했던 국민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일반 민초들이 가졌었던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지요.

① ​"처음에는 속국의 국민이었지만 새로운 법 덕분에 우리는 신 국민으로 받아들여졌어. 나는 조국을 버리고 복종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냐. 일본은 동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야. 이곳에는 조국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가족도 구성할 수 있고,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본의 교육도 받을 수 있어. 우리는 새로운 국민이야."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실천해왔다. 요코와 고로도 일본인으로서 교육을 받게 했고 일본식 생활습과도 자진해서 가정에 도입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버지의 긍지이기까지 했다.

②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서울 시민들의 대응은 여전히 마치 일제시대의 그것마냥 '대한민국이 옳으냐, 인민공화국이 바르냐', 따라서 '대한민국을 따르느냐, 인민공화국을 좆느냐'하는 확고부동한 태도가 서 있지 않고 결국은 어느 쪽이 이길 것이냐, 그럼 어느 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냐, 그보다는 당장 어느 쪽인 척해두는 것이 우선 위험도 모면하고 나중에 가서도 말썽이 없을 것이냐였었다고 저자는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목숨앞에선 이념 자체의 선택이 아닌 생존 선택에의 도구로서 이념이란 것이 작용했었다는 것이죠. 이는 '어느 쪽 이념은 인간을 살리고 어느 쪽 이념은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기에 무지렁이 민중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자의던 타의던) 선택된 체제에 길들여지기 마련이었다'란 문구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의 감상문 중

대한민국 진보의 가장 큰 약점은 '종북'이고, 대한민국 보수의 가장 아픈 곳은 '친일'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종북은 진보에 몸담고 있는 정치·문화 권력들의 약점인 것이고, 친일 또한 보수에 몸담고 있는 정치·문화·경제 권력들의 아픈 곳인 것이지, 위의 두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결코! 자신을 진보던 보수이던 그 어느 편도 아니라 말하던간에 일반 민중에게는 약점도, 아픈 곳도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제시대 당시, 그 상황이 언젠간 끝이 나리라 생각했었던 무지렁이 민중이 있었을까요? 당장 내가 먹고 살 일이 걱정인데, 창씨개명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는 판국에 국제정세와 국내정치를 분석해 일제 치하가 언젠가는, 어쩌면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요구할 권리가 그 누구에게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아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당위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 당위의 문제가 결코 일반 민중들의 몫은 아니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①에 나와있는 마사히로의 생각과 말을 저는 비난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또한 그러하기에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고로가 보여주었던 행동들 또한 ②번의 이유로 하여 비난할 수 없었었지요.

오덕은 북한군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전쟁을 시작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주장이 진실인지, 이 나라 사람들을 정말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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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다르다는 이유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보이는/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는 같은 민족끼리도 서로를 죽이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이쯤 되면... 도대체 조국이란 것이 무엇인지, 사상이란 건 또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저 또한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해 완성된 해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차원을 떠나, 그 누구에게든 '한 번쯤 읽어볼 만한'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던거지요. 결국! 이 작품 또한 '소설'이라는 외피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끄집어 내야 할 것은 '소설의 줄거리'가 아닌, '작가의 질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 블로그에 제가 쓴 감상문이기에 이는 전적으로 저만의 생각입니다.)

 

이승만도 김일성도 사람의 아들일 거예요. 아버지도 있을 테고 어머니도 있겠지요. 부모님이 있는 사람들이 왜 우리 민중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 것일까요.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에 있던 한 한국인 노파의 탄식입니다. 사상, 제도, 정치... 이 모든 것들은 사실 민중, 더 나아가 만인의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임에도, 민중들은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있는 거지요. ---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야 모두 같은 '조국'을 가지고 있으니 그 문제야 그렇다쳐도,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사상'을 가진 채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도대체 사상이란 게 무엇이기에'라는 질문 한 번 가져보지 않은 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라는 게 문득... 많이 창피해지더군요. 진보이건 보수이건, 그런 사상들이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주장하는 나는 진보이다, 나는 보수다라는 말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하는, 이 근본적 질문을 늦어도 너무 늦게, 이제서야 가져보게 된겁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는 메세지가 '조국이란, 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될 수 없겠습니다만,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하게 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지금 당장엔... 이 이야기보다 더 설득력있는 것을 저 스스로 생각해낼 수 없다라는 고백으로 이 소설의 감상문을 마치겠습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결국엔... 그 돈으로 인해 불행해지게 된다라는, 그 모순과도 같이 어쩌면... '사회'의 일원로서의 개개인이 선택하게 되는 '사회적 합의' 혹은 그 '사회적 합의로서의 사상'으로부터 발생되는 갈등 또한... '사상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가장 상위의 의문에 대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네요.

(왜 일본으로 건너갔었느냐 묻는 고로의 질문에 대한 소지로의 대답) 그 이유는 간단해. 살기 위해서야. …… 그것밖에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장인어른도, 그 염전에서 일하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거야. 살기 위해 새로운 세계가 필요했던 거야. …… 나는 그렇게 생각해. 살아 있으면 희망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 나는 어려운 말은 몰라. 공산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 미국이 가지고 온 민주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어. 하지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사실은 알아. 전쟁터에서 자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사람의 손에 죽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냐.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 그것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닐까...

 

※ 본문에서 인용되었던 포스트들

- 문영숙 作, 「에네껜 아이들」​ : 구한말, 멕시코로 팔려갔던 조선인들의 이야기

-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관한 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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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거짓말 : 성서 편 명화의 거짓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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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기묘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이 책의 앞 표지, 그리고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위의 두 문장들이, 이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해도 될겁니다. 책의 전반에 걸쳐 내내 자신을 이교도라 칭하고 있는 저자는, 물론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을 그린 '명화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긴 합니다만, 근본적으로 저자가 '이교도임'이라는 사실은, (그리 신실하지도 못한) 기독교인인 제가 보기에도 이 책 자체를 매우 독특!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지요. '독특'이라는 게 - 출판사의 표현은 '색다른 시각'으로 되어 있지요 -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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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는 확실히 성경 가르침의 본질은 알 수 없습니다. ……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 혹은 종교화를 통해 성경과 역사와 화가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교도가 보는 성경에는 ……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기묘한 이야기를 과연 화가는 이런 식으로 궁리해서 표현했던 것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면 갑자기 그 그림은 매력이 더 커질 것입니다. …… '종교화도 신화화神話畵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로 즐기면 된다'라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매일 참배하는 우리 동포에 대해 이교도인 외국인이 '여우 따위에 손을 모으다니'하고 코웃음을 쳤다지만 우리는 누구 한 사람 크게 화내지 않습니다. 여우를 모시는 데 이른 민중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비웃는 상대를 이론으로 굴복시켜 여우 신앙을 전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서양 문화사 전문가인 저자이지만, 이 책은 이처럼 자신이 이교도임과 일본인임을 또한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이기도 합니다. '여우를 모시는 데 이른 민중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비웃는 상대를 이론으로 굴복시켜 여우 신앙을 전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라는 저자의 표현에, 저 또한 기독교의 전도라는 것도 그러해야 한다라는 동의를 표하게도 합니다만, 그 안에 숨어 있는(듯 느껴졌던), '너네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잖아? 성서는 지금의 이치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도 말이야!'라는 조롱이 웬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귀에 들려왔었다라는 것 또한 꼭 밝히고 싶네요. 저자 개인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는 부분의 서술들은 뭔가 알듯 말듯하게 시니컬했다고나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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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상대방에게 전해 주고 싶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우선! 그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들어보는 것이 옳바른 순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다보면, 내가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이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진실)을 전달해야겠구나,를 깨닫게 될 수도, 어쩌면 내가 속해 있던 세상이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들을 들어볼 수 있게 될지도, 심하게는 내가 말하려 했던 이야기(진실)의 '진실됨'에까지 의문을 가져보게도 될 지 모르니까 말이죠. 나 스스로 '진실됨'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진실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책의 저자가 대놓고! '이교도'의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이 비록 (저처럼) 기독교 신자일지라도, 그 사실을 잠시 내려놓고 이 책을 읽어가는 것이, 최소한 싸지도 않는 가격의 이 책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몇몇 흥미로운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요.

정말로 아담이 흙덩이에서 생겨났다면 과연 아담에게 배꼽이 있어도 좋은 걸까?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은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져 있는 <아담의 창조>를 통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이 있었음을 승인한 것이라 보아도 되지 않을까?

②​ 성서에는 어디에도 선악과가 사과라고 적혀 있지 않지만 :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 회화에서는 선악과가 관례적으로 사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자 이제... 기독교인인 제 관점에서, 기분 나빴다!라기보다는, 아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 느꼈던 몇몇 부분들을 (약간의 편집을 가미해) 옮겨 놓는 것으로 이 책의 감상문을 대신해 볼까 합니다. (저자의 개인적 의견일 수도, 또는 미술사에서 거론되고 있는 일종의 학설일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미술을 다루고 있는 책의 감상문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미술 성적이 '美'였던 제가 가타부타한다라는 것 자체가 또 한 편의 코미디가 될 수도 있을테니 말이죠.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인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낱알을 얻어먹으리라."에 대한 해석 : 서양 남자들이 '행복한 은퇴'에 집착하는 것은 노동의 형벌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라는 주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이브가 어쩌면 뱀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 바보인 채로 낙원에 갇혀서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불사를 잃었지만 자아에 눈을 뜨고 지식욕과 성욕을 갖게 되었으며 인생의 고난에 맞서 희로애락을 느끼게 되었다. 실러는 말했다. 이 타락이야말로 인류에게는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 애초에 아브라함은 갈등을 하기나 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와 아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마침내 신앙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에게 축복받는다는 '이삭의 희생'장면만을 보면 제법 감동적이지만 앞서 그가 해왔던 일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그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내를 왕에게 바칠 때도, 애인과 자식을 황야로 내쫒을 때도, 뒤를 이을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으니 고민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이 모든 시련을 아브라함이 겪는 것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항상 쓰라린 일을 겪거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나 첩이나 아들이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수태고지>에서 천사가 들고 있는 백합에는 수술과 암술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그려져 있다. 이것은 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스스로가 처녀 수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건 아닐까? 또한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의 <주님의 여종을 보라!>에 나타나 있는 전체적인 장면은, 신이 없는 세상인 19세기 중반, 대천사에게서 수태고지를 받아 '나는 하나님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라고 진지하게 주장한 여인이 있을 곳은 오로지 정신병원뿐일지도 모른다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오늘날의 점성가들과 달리 당시의 점성술사는 최첨단의 천문학자였다. 그런 대단한 외국의 학자들까지 예수 탄생을 축복하고 예배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성서는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박사와 칼 세이건이 핼리 혜성의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교도의 땅에 있는 오두막까지 선물을 들고 인사를 하러 찾아간 것이다.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박사의 의미 자체도 점차 거창해졌다. 처음에는 세 사람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윽고 노년기, 장년기, 청년기의 마기 세 사람으로 정해지면서 예수가 모든 연령대의 사람에게 축복받았다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여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자르 같은 이름을 얻었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을 대표하는 존재하게 되었다.

● 일반적으로 일본인에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느는 난해하고 두 교회를 구별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다. …… 가톨릭 국가(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음식이 대체로 맛있는 반면,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미국, 영국, 북유럽 각국 등)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여, 황송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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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가톨릭, 개신교를 신봉하는 분들로서는 화가 날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러이 여겨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저자는 이 책의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읽고 ​'화'는 전혀 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는 부분이 더 많았었지요. --- '화'보다는 '재미'를 느꼈다라는 것이, 어쩌면 저의 신앙심이 부족해서 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이 정도의 이야기엔 제 신앙심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 더 맞는 듯/더 있어 보이는 듯(^^;;) 할 꺼 같네요.

 

상당히 많은 그림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만, 그들 중 '브뤼헐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한 설명을 압권이었다!라 꼽고 싶습니다. 다만!!! 두 페이지에 걸쳐 그림이 인쇄되어 있는 경우, 가운데 부분이 심하게 겹쳐 그 부분을 살펴볼 수 없었다는 점, 혹은 그림 자체가 너무 작은 사이즈로 인쇄되어 있었다는 점 등이 많이 아쉬웠다는 말을 꼭 적고 싶습니다. 싸지도 않은 가격인데... 그런 그림들은 간지 형태의 한 장으로 인쇄해주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어린 바램을 가져보게도 되더군요.

그나저나...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아마도 처음으로 읽어본 듯 한데 이 출판사, 카피 문구 하나만큼은 참 잘/그럴 듯 하게 뽑아냈네요.

"권위와 편견을 버려라, 그리고 즐겨라!" ​

 

 

(읽어본) '성경'에 관한 책들 : 유쾌한 성경책 · 가장 오래된 교양」​ · 공병호의 성경공부」​

(읽어본) '미술'에 관한 책들 :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 그림값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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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밤새읽는 수학 이야기 재밌밤 시리즈
사쿠라이 스스무 지음, 조미량 옮김, 계영희 감수 / 더숲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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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일본어 원 제목이 무언지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최소한 '재밌어서 밤새읽는' 일은 없을 책입니다. 재미있느냐의 여부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 자리잡고 앉아 두어 시간이면 다 읽어낼 수 있는 내용과 분량의 책이거든요.

한때... 인도 베다수학이라는 게 초딩 엄마들 사이에서 잠시 유행했던 적이 있었었지요. 주로 계산의 신속성을 도와준다는 건데, 그게 사실 알고보면 특정 조건하에서만 성립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그 특정 조건 외우고 계산방식 외우느니 그 시간에 그냥... 종이와 연필로 계산해내는 게 훨씬 '경제적'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울꺼 많은 아이들에겐 말이죠.

이 책 ​「재밌어서 밤새읽는 수학」에도 그런 계산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몇몇 방법들이 나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우리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수학의 원리들을 이야기해주는, 다시 말해 수학이란 게 단지 대학입시에만 중요한 건 아니란다!를 보여주는, 일종의 수학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

​「수학, 철학에 미치다」에서 수학의 발전에 '철학'의 도움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철학'의 도움을 받아 성장해 온 수학은 이제 우리의 일상 생활 구석구석에서 우리의 삶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어디 새롭게 자신이 끼어들 구석이라도 없나... 계속 살펴보고 있다는거지요.

'베버-페히너 법칙'은 인간의 감각마저도 수數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터넷 보안 기술에는 우리가 중학교 때 배웠던 인수분해의 원리가 숨어 있지요. 신용카드의 번호 또한 무작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룬(Luhn) 공식'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책은 알려줍니다. 요즘 자동차마다 거의 모두 달려 있는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탐색하는 로직은 '4색 문제'의 그래프 이론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었다고도 하네요.

저자는 이처럼, 무작정 수학의 각종 원리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숨어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지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아이들이 '내가 왜?' 이 어려운 수학을 공부해야하는가라는 회의를 가지지 않게하는 것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수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조용하게, 조심스럽게 우리 생활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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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황금비'라는 것이 있답니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직사각형의 가로 대 세로의 비율이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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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라는 게 좀 아쉽긴합니다만, 어쨌든 인간이 이 황금비로 균형을 맞춘 형태에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에 명함이나 카드, 정오각형 등은 모두 이 황금비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황금비를 통해 우리가 왜! 루트라는 것을 배워야하는지를 알게 되지요.

​② 이 책을 읽기 이전까지도 저는 '원의 둘레 = 원의 지름 × 원주율(π)'라 알고 있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건 틀린 것이더군요. 우리는 원주율 π의 값을, 무조건 3.14로 외웠었기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사실... 앞의 공식은 '원주율 π는 원의 둘레를 원의 지름으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를 뒤집어 놓은 것이었던 겁니다. 즉, 원래 '원주율 ≡ 원의 둘레/원의 지름'의 정의definition를 저는 원의 둘레를 구하는 '공식'인 것으로 알고있었던 거지요. 이 원주율(π)에 얽혀있는 다음의 이야기들도 참 재미있더군요.

- 기원전 250년 경, 아르키메데스는 이 원주율의 값을 22/7이라는 분수값으로 계산해내었답니다. 그런 연유로 7월 22일은 '원주율의 날'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 미국에서는 3월 14일을 '파이(π) 데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엔 애플파이를 먹으며 π를 축복하는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 일본에서는 '원주율의 날'인 7월 22일로부터 8월 22일까지의 한 달간을 '수학의 달'로 지정해놓고 있답니다. 8월 22일은 '22/8 = 2.7…… = 상용로그 e의 값'이기 때문이라는군요.

- 중국에서는 12월 21일이 '원주율의 날'이라고 합니다. 1월 1일부터 세어 355일째가 되는 날이 바로 12월 21일인데, '335/113 = 3.141592……'로서 소수점 이하 여섯 자리까지​ 원주율과 일치하는 값을 가진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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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의 반대말.을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라는 라디오 DJ의 질문에, 가장 먼저 제 머리에서 떠오른 답은 집토끼였었습니다만 그게... 가장 저급한 답안이라 하더군요. 그 바로 위가 바다토끼, 또 그 하나 위가 죽은토끼, 그 위는 판토끼.라 합니다. 가장! 최고 수준의 반대말이라며 알려준건... 바로 '알칼리토끼'!!! --- '1+1 = □' 라는 문제의 답을 여러분은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정답은 '2'이지요. 하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인 수학은 이것만을 유일한 정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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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답은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야말로 '무한히' 많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만약 우리나라 초등학교 답안지에 1+1=?의 문제에 대한 답을 누군가 '3-1'이라 적어냈다면 과연 그 답은 정답처리를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있습니다. 당신이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창의력에는 칭찬을 해주겠지만, 시험의 문제가 요구하는 정답으로서는 '틀렸다'라고 말할 듯. --;;)

 

이것이 바로 '수학은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이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요. 인도의 수학자 라마누잔은 1729란 수가 '세제곱수의 두 개의 합으로,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소의 수'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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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또한 실제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직각 삼각형의 변의 길이에 관한 '파티고라스의 법칙'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수학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었다라는 걸 떠올려 본다면... '어떤한 수 a와 b에 대해서도 성립'한다는 다음의 '라마누잔의 항등식'에 대해서 그 유용성을 따져본다라는 게 자칫 나의 무·용함(무식해서 용감함)을 떠벌리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그냥... 이런 공식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까?라고 감탄해보는 게 저같은 일반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예의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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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연속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물론 이 책 「재밌어서 밤새읽는 수학이야기」가 가장 쉬운 난이도의 책이었습니다만, 뜻밖에도!!! 집합론의 창시자라는 조지 칸토가 등장하는 부분은 세 권 중 가장 직관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기도 하더군요. '일대일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칸토의 논리를 설명했었던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무한한 수는 개수가 아니라 농도를 비교한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제게는 이 설명이 가장 확!하고 와닿더군요.

제가 머릿속으로 무언가에 대한 계산을 하지 않더라도, 이처럼 수학은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고 있었으며, 그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라는 것이 제게 다시금 '수학의 아름다움'을, '수학의 위대함'을 일깨워주었더랬습니다. 종원군이 중학생이 되어, '아빠! 도대체 수학은 왜 배워야하는지 모르겠어요!!!'란 불평을 말할 때, 아빠로서... 완벽하지는 않겠으나,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대답을 이 책으로부터 배웠다라는 것이 이 책으로부터의 소득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책에 나와있는, 간단하지만 꽤 재미있는 문제 하나 소개해보겠습니다. --- '연속하는 자연수 10개의 합을 1초만에 계산하는 방법'이라는 건데, 연속된 10개의 숫자들 중 작은 순서에서부터 세어 다섯 번째 수 뒤에 5를 나란히 놓으면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군요.

777+778+779+780+781+782+783+784+785+786 = ​?

이 문제의 해답을 위에서 제시된 방법대로 구해보면 : 작은 순서로부터 세어 다섯번 째의 수는 781이므로 그 781 다음에 5를 놓으면, 즉 7815가 이 덧셈의 해답이 됩니다. 놀랍죠?

해설> 다섯 번째의 수를 x 라고 하면 , 첫 번째 수는 'x-4', 두 번째의 수는 'x-3', …… 열 번째의 수는 'x+5'이 되므로, 이 10개의 수를 모두 더하면 '10x+5'가 되지요. 즉 다섯 번째 수를 10배해서 5를 더하면 문제의 정답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걸 간단히 표현한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수 뒤에 5를 나란히 놓으면 정답이 된다'가 되겠지요. 과연... 이것을 '단순한 트릭'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요?

※ 수학에 관한 읽어본 다른 책 :문명과 수학」 · 「수학, 철학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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