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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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각 단어들이 - 박사, 사랑, 수식 - 작품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간단하게 적어 볼까 합니다. 가능한 한, 책을 안읽으신 분들에게 이 책을 읽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는 한도까지만....요.



① 박사


나는 미혼모이고, 나의 아들은 초등학생, 나의 직업은 파출부입니다. 비록 나이는 많지 않지만, 역시나 남편 없이 나를 키워야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던지라 어릴 적부터 집안 일에는 도가 텄었기에, 파출부 소개소에서 꽤나 알아주는 고참급에 속하지요. 어느 날, 이전에 9명의 파출부가 퇴짜를 맞았다는 꽤나 까다로워 보이는 곳으로 소장이 나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까다로운 주인들이기에 9명의 파출부를 바꾸었을까요?


한 노부인이 나를 맞아주었는데, 그녀의 집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 별채에 있는, 예순 네살 노신사의 일을 담당하는 것이었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노신사의 형수였던) 노부인의 주문은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만, 그 노신사분이... 별다르시더군요. 노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 분은 말이죠...


딱! 80분간만의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는 그 분은 17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뇌에 손상을 입었고, 그 이후로 그 분의 기억은 멈춰버렸다더군요. 즉, 30년전에 자신이 발견한 수학적 정리는 온전히 그 분의 머리속에 간직되어 있지만, 81분전에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을 할 수 없으시다는거지요.   

 

뇌 속에 80분짜리 테이프 딱 한 개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새로운 것을 녹화하면 이전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집니다. 도련님의 기억은 80분밖에 가지 않아요. 정확하게 1시간 20분. 

나를 처음 본 순간, 그 분의 질문은 이름도, 나이도 아닌... "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였었답니다. 24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 분은 "실로 청결한 숫자로군. 4의 계승이야. 1에서 4까지의 자연수를 모두 곱하면 24가 되지"라는 말씀을 하셨었지요. 이 뿐 아니라 우리집 전화번호도 물으시길래, '576에 1455예요'라 대답했더니 글쎄 말이죠!!! "5761455라구? 정말 멋진 수가 아닌가?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와 정확히 일치하는군." ---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 대신 숫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그 분의 버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그 분이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고안해 낸, 그 분만의 방법이었던 거였죠.  

 

그 분의 기억이 80분 밖엔 유효하지 않다라는 사실 때문에... 전 시장을 보러 가서도 가능한 한 '1시간 20분' 내에 돌아올 수 있도록 애를 쎠야했었죠. "다녀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1시간 20분 내에 돌아오면 그 분은 저에게 "어서 오게, 수고했어"라며 맞아주셨지만, 예를 들어 1시간 22분이 걸렸을 때 그 분의 첫 마디는 "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였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제가 그 분을 모시는 데 어떤 불편함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답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계셨던 그 분은, 그 분 나름대로의 대처 방법을 가지고 계셨었지요. 자신이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 모두를... 조그마한 메모지에 적어, 자신이 입고 있는 양복 곳곳에 클립으로 꽂아둠으로써,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자신의 머리 속이 아닌 곳에 보관해 두셨었답니다. --- 하지만 말이에요, 저를.... 참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던 건 다름아닌 :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박사의 기억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미망인(노부인)은 그의 기억이 1975년에 멈춰 있다고 했는데, 가령 그에게 어제는 언제인지, 내일이 있다는 것은 아는지, 그 부자유스러움이 그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분은 나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내가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혼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내 아들을 방과 후에 이 집으로 오게 하라고, 거의 강제적으로 말씀하셨었지요. 그렇게... 내 아들을 본 그 분은, 내 아들의 머리가 평평하다며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든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라시며, 소맷자락에 있는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적으셨었지요. '내 파출부... 와 그 아들 열 살 √.'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박사'라 부르기로 했답니다.  



② 사랑

​'박사'와 파출부, 그리고 그녀의 아들 '루트',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 에로틱, 플라토닉, 뭐 이런 거 말고, 그냥 우리가 살아가면서 머리 속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 말이죠...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내 아이를, 내 부모와 내 형제를 또한 '사랑'합니다. 정말로 친한 친구와 술마시고 헤어질 때에도 '사랑한다, OO아!'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저는 또한 술을 참으로 '사랑'하며, 담배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에 또...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상상해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랑'의 대상/관계중엔 아마도... 이 작품 속, 제 인물들이 나누는 '사랑'은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파출부가, 자신이 일하는 집의 주인(정확히 '주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쉽게 표현해보자면)을, 거기에 자신의 아들도 또한 그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건, 일반적으론 쉽게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랑이 분명 아니니까요.물론! 이 '사랑'은 남녀간의 뭐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박사가 가지고 있는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가급적 혼란의 여지를 안겨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자의 '사랑', 자신과는 아무런 혈연적 관계도 아닌, 그저 금전적으로 맺어진 고용의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는 '루트'를 향한 박사의 진심이 담긴 '사랑'은, 말 그대로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들이었습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루트가 박사의 강력한 권유/요구로 (엄마가 일하고 있는 곳인) 박사의 집으로 하교했던 첫 날의 다음 모습이 루트를 향한 박사의 사랑을, 또한 박사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그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보려했고 진심으로 걱정했었던 파출부의 마음이... 이들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 가방을 멘 아들의 모습이 현관에 나타났을 때,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아들을 포옹했다.…… 나의 아들이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 "이렇게 먼 곳까지 잘 왔다. 고맙다, 고마워." 박사는 말했다. 매일 아침 처음 보는 것처럼 되풀이되는 질문은 없었다. …… 루트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는 박사의 모습은 더 이상 맥없는 노인도, 생각에 사로잡힌 수학자도 아닌, 어린아이에게 한없이 애정을 쏟는 할아버지 같았다.  

 

매일 아침, 박사는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을 때마다 제 손으로 쓴 메모를 읽으면서 자신의 병을 깨닫는다. 어젯밤에 꾼 꿈은 어젯밤의 꿈이 아니라 먼 옛날,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밤에 꾼 꿈이라는 것을 안다. …… 매일매일, 그가 홀로 침대 위에서 그런 잔인한 선고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서로를 향한 이 아름다운 사랑은 과연... 어떠한 끝맺음을 맞이하게 될까요?

 


③ 수식

 

제게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코!!! 수학의 용어들이 정말로 아름다운 언어들로 표현/설명되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파출부의 아들에게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박사가 하셨던 표현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라든가, (파출부의 생일인 2월 20일에서 나온) 220과 (자신의 손목 시계에 새겨져 있는 일련 번호인) 284로부터는, (자기 자신은 빼고) 각자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상대방이 되는, 즉 220의 약수 모두를 더하면 284가 되고, 284의 약수 모두를 더하면 또한 220이 되는 '우애수'라는 개념으로 박사와 파출부의 인연을 만들어내는 장면. 그리고 야구장에 갔을  때, 자신의 좌석 번호인 '7-14'와 루트의 좌석번호인 '7-15'로부터 '루스-아론 쌍'을 떠올려내는 장면 등은, 이런 개념들을 모른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수학을 싫어하는 분들일지라도 틀림없이 뭔가 찌릿!해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714는 베이브 루스가 1935년에 작성한 통산 홈런 기록이고, 1974년 4월 8일 행크 아론은 …… 이 기록을 깨는 715호 홈런을 기록했지. 714와 715의 곱은 제일 작은 소수 일곱 개의 곱과 같고, 또 714의 소인수의 합과 715의 소인수의 합은 같아. 이런 성직을 지닌, 연속하는 정수의 쌍은 그리 흔하지 않아. 20000이하에는 스물여섯 쌍밖에 존재하지 않지. …… 중요한 것은 내가 7-14고 루트가 7-15에 앉는다는 거야. 그 반대면 절대 안 되지. 옛 기록을 새로이 나타난 자가 깬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야.

하지만, 정말!로 이 소설에서 의미를 갖고 있는 수학적 개념은, '박사'가 좋아했던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인 에나쓰 선수의 등번호인 28이 가지고 있는 성질인 '완전수', 그리고 '오일러의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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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오일러의 공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만, 박사의 형수인 노부인이 파출부와 루트를 의심하며 몰아가고 있을 때 박사는 이 오일러의 공식이 적혀져 있는 메모지 한 장을 형수 앞에 내밈으로써 그 순간을 마무리지었더랬고, 그래서 이 공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자 도서관에서 알아보았던 파출부가 표현한 다음의 문장은 그야말로 '더 이상 아름다운 언어로 오일러의 공식을 표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란 말을 서슴없이 제 입에서 나오게끔 만들어줍니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 e 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 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참으로... 재미있는 수학의 여러 내용들을 이 소설 속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수학적 내용들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하등의 도움을 줄 수 없는 것들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수학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빠져 수학을 연구하는 소설 속 박사가 수학에 대해 해주는 다음의 말은, 덧셈과 곱셈만이 수학의 전부라고 생각할 초등 6학년인 종원군에게도 반드시... 들려주여야겠을만큼,가슴 뭉클해지기까지 했었었네요.

 

문제를 만든 사람은 답을 알고 있지.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 일수도 있고. …… 수학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먼 옛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존재해왔던 정리를 파헤쳐내는 거야. 신의 수첩에만 기록돼 있는 진리를 한 줄씩 베껴 쓰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 수첩이 어디에 있고, 언제 펼쳐질지는 아무도 몰라.      

………………………………… 

 

시간이 흘렀고... 엄마보다 20센티미터나 키가 크고 수염이 숭숭 나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박사에게 루트는 보호해주어야 마땅한 어린애였다고 회상되어지고 있습니다. 박사가 그 모자에게 남겨주었던 마지막 수업은,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에 그리고 지금도 매달리고 있는 '소수'에 관한 것이었고, 그리고... 루트는 결국 수학 선생님이 되었.지요.  


(다시 한번) 그들의, 서로를 향한 이 아름다운 사랑은 과연... 어떠한 끝맺음을 맞이하게 될까요? --- 그 끝맺음은 뭔가 참... 제겐 아쉬움과 안타까운 여운이 동시에 남는, 상당히 독특했던 한 편의 소설이었네요. 그나저나... 참... 책도 잘 안읽히지만, 독후감도 지지리 안써지는 요즈음입니다. --;;



※ '수학'에 관한, 읽어본 책들

- EBS 제작팀 著, 문명과 수학

- 장우석 著,수학, 철학에 미치다

- 사쿠라이 스스무 著, 「재밌어서 밤새 읽는 수학이야기

- 실비아 네이사 著, 「뷰티풀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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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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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실,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듯한,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나보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꽤나, 진짜 꽤나! 여러 권, 이 작가의 책을 사놓기는 했는데 어지간히들 두꺼워야 읽을 엄두를 내죠.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같은 책들은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엄청나게 두껍건만 무려... 각 3권 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니 말입니다. 암튼... 뭐 좀 가벼운 소설을 읽으려던 중, 그나마 얇은, 게다가 길지 않은 단락들로 이루어져, 진득하게 책 붙잡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은 요즘에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이 책 「나는 지갑이다」를 골랐습니다. 지갑이란 것이... 이전에 읽었던 작가 류전윈의 「핸드폰」처럼, 뭔가 개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것을 담고 있는 소지품이 아닐까 싶은 공통점도 있었었구요. 


…………………………………………………… 


한 남자가, 모리모토 류이치라는 평범한 한 남자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헌데, 그 사고 장면을 목격했었던 목격자의 증언부터 이 나름 장대!한 스토리는 꼬여가기 시작하지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라는 것이, 게다가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의 정체가 남들에게 밝혀지면 안 되는 - 불륜이었기에 --;; -  이 목격자는 거짓 증언부터 시작해 경찰을 매수하려는 시도까지를 했으니까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의 화자는 모두 '지갑'입니다. 근데 각 단락마다 지갑의 주인이 바뀌지요. 그러면서 류이치가 당한 뺑소니 교통사고의 진실/전모를 밝혀내는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입니다. 한국 소설에라도, 등장인물이 한 20명쯤 되면 은근 헷갈릴텐데, 익숙치도 않은 일본 이름 - 게다가 성과 이름이 가끔 번갈아가며 쓰이는 - 의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20명쯤 나오는, 암튼! 책의 분량에 비해서는 상당히 넓은 반경의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느낌입니다.


경찰과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명백한 추리 소설이고. 그러하기에 이 작품의 줄거리를 적어낸다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소설의 줄거리는 배제하고, 그저 이 작품을 읽고 느낀 점만을 적어보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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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단락마다 지갑의 주인이 바뀐다고 했지요. 그렇기에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많아질 수 밖엔 없습니다. 지갑의 주인뿐 아니라 그 주변인물들까지 더해지고, 뭔가 포인트가 될만한 것들은 모두 적어가며 독서를 하는 저에게는 그들 중 누가 후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인물이 될지 모르기에 일단 모두 다 적어놓을 수 밖엔 없었기에, 읽혀지는 빠른 속도에 비해 제 독서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었지요.


암튼!!! 등장인물이 많다라는 건 그만큼 이야기가 현란하다는 것이고, 이 현란함은 어느 수준까지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만,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자칫 현란함이 지겨움 혹은 지침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그 경계를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잘 요리해 내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별 연관 없을 듯한 인물들이지만, 오래지 않아 그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를 독자에게 하나하나씩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떻게 이런 설정을 생각해 냈을까!하는 감탄을 절로 하게만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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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다. …… 하지만 그는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 그걸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때문에 그런 짓을 해왔다. 모든 상황이 ……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소설의 핵심은 결국 위의 문장들로 정리될 수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작가는 범인이 누구냐에 초점이 맞혀져 있는 듯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고, 당연히! 독자도 또한 그런 작가의 의도에 충실하게 따라가게 됩니다만, 결국!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의 동기가 돈때문일 수도, 불륜으로 인한 치정에 얽힌 것일 수도, 혹은 복수일 수도 있겠지만, 그 모두 살인이라는 그 범죄를 저지른 자는 자신의 그 행위 자체가 충분히 나쁜 것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만약! 그런 행위가 나쁜 것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라면? 그리고 그런 인지 불능이 정신적 질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삐뚤어진 욕망'쯤 될? 뭐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과연 그 행위의 죄를, 현실에서의 법적 잣대완 별개로, 궁극적으로 그 행위자에게 지울 수 있겠느냐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침묵」이나... 「방황하는 칼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3계단」, 「사망추정시각」 또는 가장 최근에 읽었던 「어떤 소송」등과 같이, 뭔가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굳이! 뭔가 하나를 끄집어 내보자면 그렇다라는 거지요.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읽고 나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이끌어내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능력에 그저 감탄을 했었다라는 것이 가장 솔직한 감상입니다. 다 지나간... 휴가 때,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기에 좋은 그런, 또 한 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열 개의 지갑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범인을 추리해내는 데 그다지 결정적인 장면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하지만 결국 범인을 알고 나면 다시금 읽혀지기도 하는... <옛 친구의 지갑>이 전 가장 인상 깊었었습니다. 그 장을 읽으면서 '짜릿하다!'라고까지 적어놓았었을 만큼요. 이 책을 읽어본 분들은 과연... 어떤 이의 지갑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을지 궁금하네요.


그나저나... 「핸드폰」도 '불륜'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였었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또한 그 '불륜'은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네요. 진짜... 작정!하고 그 '불륜'을 다루고 있는 소설, 뭐가 있나요? 문득 그런 이야기가 좀 읽고 싶어졌어요. 추천 좀 부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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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류진운 지음, 김태성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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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겨울이었지요. 대학원 준비한다고, 고시 준비를 하던 친구따라 고딩때 다녔었던 독서실에 등록해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고시 공부하던 제 친구는 2차 준비하느라 그야말로 정신없이 공부를 했었었지만, 그에 비해 시간이 많았던 전, 그렇게 공부만 죽어라 하는 제 친구와 노닥거릴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었지요. 그래, CPA 준비한다했던 친구 하나를 꼬셔 그 독서실에 등록을 하게 했는데, 이 친구가... 그때 한창 연애란 걸 하고 있을 때였던겁니다. 제 친구보다 꽤 나이가 어렸던 그 여친은 삐삐를 쳤는데 연락이 없으면 막 화를 낸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공부를 하다가 그 친구의 삐삐가 또 울렸고, 전 담배라도 한 대 피려 같이 공중전화 앞으로 나갔었어요. 헌데 이 녀석... 제가 봐도 지나칠정도로 오랫동안 전화를 하더군요. 급기야 그 뒤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화를 냈고, 그랬는데도 제 친구는 전화부스안에서 연신 쩔쩔 매며 계속 통화를 하는겁니다. 한참 후에 통화를 끊고 나온 친구에게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느라 뒤에서 빽빽거리는데도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느냐 물었더만 그 녀석 대답이란게 글쎄... : 그 여친에게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끊어야겠다 말하니, "뒤에 있는 사람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라고 묻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 (그 둘은 그 후 오래지 않아 깨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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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의 원래 사용가치는 어느 곳에서나 이동중에도 누군가와 통화할 수 있다는 물리적 속성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용가치가 가져다주는 유용함을 깨닫고 원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기술이 개발되면서, 휴대폰은 상품이 되었고 가치관계 속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휴대폰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진화발전한다. 마침내 가치관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관계 속에 들어오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질 정도가 되었다. ……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만물의 상품화'를 현실화하면서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 류동민 著,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p89

경제학자는 이처럼 핸드폰 하나로부터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떠올려내기도 합니다만, 모든 이가 다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닐겁니다. 단 두 권의 소설로 제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중국의 작가 류전윈은 그렇다면 핸드폰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을까요?

 

제 방에 따로 전화를 놓았던 날의 흥분을 아직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밤늦도록 부모님의 눈치 받지 않고 여친과 통화를 할 수 있게되었으니 어찌 아니 흥분되겠습니까. 그리고 얼마 후, 별 중요한 통화도 없는 전화기에 자동응답기란 것을 달아놓고는, 이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한국통신'은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되었군!하는 나름 경제학도다운 분석(?)을 하며 저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던 때도 기억이 납니다. (안받으면 통화료가 부과되지 않지만, 자동응답기라도 일단 전화를 받게 되면 기본료는 발생하게 되니 한국통신에게는 자동응답기란 것이 그야말로 효자중의 효자인거라는 논리였었었. ^^;;)

 

허나, 여친에게 밤 늦은 시각에 제가 전화를 걸 수는 없었었지요. 혹여라도 부모님이 받으신다면 좀 그렇잖아요. 그렇게 내가 원할 때 여친과 통화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어느새 삐삐라는 녀석의 등장이 해결해주었고, 하지만 그 삐삐란 녀석은 금새, 버스안에라도 있을 때면 당장 그 삐삐의 호출에 응답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을 낳게 해주더군요. '재화의 공급은 그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세이의 법칙은 예의 1990년대 중반에도 적용되는 것이어, 삐삐의 등장으로 인해 생겨난 답답함은 곧 핸드폰의 등장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동중의 통화'라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낸 핸드폰은 이내 카메라 기능까지를 탑재하게 되었고, 이젠 뭐... 핸드폰 없으면 아침에 기상도 못하는 시절이 되어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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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의 공급이 그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해낸 것까지는 생활의 편리함이 증대되었다라는, 좋은 면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창출된 수요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것의 공급'을 만들어냄으로써 증대된 생활의 편리함은 이제 오히려! 생활의 구속이 되어버리기도 했지요. 핸드폰 말입니다!

 

마을에 해가 높이 뜨고 날이 길어져도 하루 종일 옌씨의 말은 열 마디를 넘지 않았다. 열 마디 가운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 여섯 마디였고 그나마도 전부 단어였다. …… 나머지 네 마디는 전부 감탄사였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핸드폰의 등장 이전 우리의 생활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반드시 해야할 말이 아니면 굳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소위 말하는 '씨잘데기 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는 않았었으니까요. 하지만 핸드폰의 등장 이후 우리는 그 기계 자체가 신기해서도, 혹은 어찌어찌 없던 이유라도 굳이 만들어 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지요. 류동민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가치관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관계 속에 들어오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질 정도가 되'어 버린거지요. 그렇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많아지다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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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을 마친 후, ②'안해도 될 말'까지를 하게 되면, 그러다 결국 ③'하지말았어야 할 말'까지를 내뱉고 나게 되면, 이제 우리에게 남게 되는 건 결국 ④'거짓말'밖엔 없게 됩니다. 류전윈의 이 작품 「핸드폰」은 주인공 옌셔우이,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할머니, 이렇게 3대에 걸친 '말의 역사'를 통해 ①-④의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가장 마지막 세대인 옌셔우이에 이르러서는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렇게 연이은 거짓말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맺음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주인공 옌셔우이는 유명 TV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소위 스타급 대접/환호를 받는, 마흔즈음의 남성입니다.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완 달리 그는 말로써 먹고 사는 사람이었던거지요. 암튼! 그런 옌셔우이는 우유에라는, 부인 위원쥐엔과는 180도 다른 스타일의 매력적인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핸드폰!때문에 그 숨겨왔던 불륜관계가 부인 위원쥐엔에게 들통이 나, 결국 이혼을 당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핸드폰을 통해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말하기도 혹은 문자로 보내기도 하지요. (아... 닌가요? --;;) 그렇게 수많은 '누군가'와 '또다른 누군가'들에게 가려져 있는 비밀들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 나 자신과 핸드폰! 뿐인겁니다. 소설은 옌셔우이가 그의 핸드폰을 통해 쏟아내었던 수많은 거짓말들이 결국엔 그 핸드폰을 통해 밝혀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말의 역사'라는 것이 핸드폰을 통해 단지 밖으로 쏟아내는 말의 양이 늘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다양 - 진실에서부터 새빨간 거짓말까지 - 해져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설의 거의 모든 갈등은 핸드폰을 통해 발생되는데, 핸드폰을 통하지 않는, 즉 직접적인 대면의 관계에서는 정작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라는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라 작가는 생각하고 있는듯 보입니다.  

 

옌셔우이과 위원쥐엔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부부간의 대화가 사라져있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단지 서로 할 말이 별로 없었다라는 이유때문이었지요. 이처럼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과는 점점 대화가 없어졌지만, 핸드폰은 그러한 물리적 거리가 먼 사람과는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리적 거리가 멀다라는 사실은 그만큼 거짓말을 하게 되는 유인/유혹을 더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는 결국 '마음의 병'을 만들어내게 되지요.

 

사람의 마음속에 왜 병이 들까요? 페이모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원래 매우 단순한데 우리가 그것을 지나치가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삶이 매우 복잡한데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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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에서 뒷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면서도 선뜻 전화를 끊지 못했었던, 그때의  제 친구에게는 아마 지금의 핸드폰이 매우 필요했었을겁니다. 반면, 너무도 많이 울려대는 핸드폰때문에 주말만이라도 핸드폰을 꺼놓고 싶다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공중전화에서 뒷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전화를 하곤했었던 그 시절이 하나의 '이상향'으로 자리잡고 있을지 모르지요. 이처럼 원래 단순한 삶을 우리가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우리를 더 괴롭게 하는건지, 아니면 매우 복잡한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더 괴로운지... 사실 전 선뜻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마 이 소설을 쓴 작가 류전윈조차도 이에 대한, 누구나 납득할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만! 작품 속 등장인물 중 하나인 페이모가 내뱉는 다음의 탄식은, 저/여러분 각자의 그 판단에 관계없이 반드시 한번쯤은 현재 시점 이전에 우리에게 쿵! 하고 다가왔던 적이 있었었지 않을까 싶네요. 비록... 작품 속의 이 탄식이 (어쨌든!) 불륜의 발각이라는, 아름답지 않은 상황 후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농경사회가 좋았던 것 같아. …… 그때는 걸어 다니는 방법밖에 없었잖아. 그러니 과거 보러 갔다가 몇 년 뒤에 고향에 돌아와서 어떤 핑계를 대도 그대로 다 먹혔지 …… 지금은... 가까워. 너무 가까워. 너무 가까워서 숨을 못 쉬겠어.

이 책이 출판되고, 영화로 만들어져 방영된 이후 중국의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었다고 저자가 밝히고 있더군요. (물론!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라는 말과,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더라도 한국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램까지 함께!!!) 이처럼 소설이 비록(?) 불륜관계를 통해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발생시키는 폐해를 다루고는 있습니다만, 그런 불륜이란 걸 떠나서라도, 또한 핸드폰이라는 범위를 넘어서까지도 과연 우리에게 '문명의 발전'이란 것이, 우리의 현실, 인간의 본성과 어우러져 최종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남겨주게 될 것인가에 관해 생각해보는 일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강렬한 삽화의 이 책 표지가 상징하고 있듯이, 핸드폰이라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현실과 밀접한, 또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명의 발전'이겠지요. 

 

P.S. 소설의 주제를 떠나... 역시 작가 류전윈의 글은 저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이네요. 

 

 

 

(읽어본) 중국 작가의 책들

 

- 류전윈 作 :  「닭털같은 나날」 · 「나는 유약진이다

- 위화 作 :허삼관 매혈기」 · 「제7일」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 「인생」 · 「형제 1·2·3

- 모옌 作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옌렌커 作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쑤퉁 作 : 「나, 제왕의 생애」 

- Ji Li Jiang 著 :  「Red Scarf Girl

- 장안거 著 : 「붉은 땅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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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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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에서 보면 발효도 부패에 포함되며, 이 두 가지 모두 미생물에 의한 유기물의 분해현상이지만, 인간에게 유용한 경우에는 발효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부패라고 부른다. …… 천연균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재료를 부패시킬지 발효시킬지, 그것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재료가 사람의 생명을 키우는 힘을 갖추고 있으면, 균은 빵이나 와인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음식으로 그것을 변화시킨다. 이런 재료에 균의 작용이 일어나면 음식은 더 맛있어지고 영양가와 보존성이 높아진다.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도 한다. 이것이 바로 발효 작용이다. 한편 생명을 키우는 힘이 없는 재료라면, 균은 그것을 안 먹는 게 좋다는 신호를 사람에게 보낸다. 말하자면 재료를 무참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때는 사람이 먹으면 해가 되는데 '부패' 작용이 바로 그것이다. …… 그런데 이스트처럼 인공적으로 배양된 균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억지로 일정 기간 썩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균은 균인데 자연의 섭리를 일탈한 '부패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균인 것이다.  …… 이 같은 부패하지 않는 음식이 먹거리의 가격을 낮추고 일자리를 값싸게 만든다. 나아가 싸구려 먹거리는 먹거리의 안전을 희생시키고 사용가치를 위장함으로써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귀속되어야할 기술과 존엄을 빼앗아간다. …… 시간에 의한 변화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다. 돈은 시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패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금없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부어나는 성질마저 있다. …… 바로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는 내용이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 책의 원 제목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접할 수 있게될 거란 기대 혹은 두려움!은 버려도/안 해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이 '경제학'과 관련된 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경/생명중시'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라 말하는 것이 더 옳은 분류가 아닐까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 (결코 비난이나 폄하는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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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청춘을 보내었던, 늦은 나이인 서른에야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저자는 원래부터 '시골생활'에의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직장에서의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너는 빵을 만들어보렴'이란 한 마디에 끌려 제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빵집에서 노동착취, 비양심적 제빵과정 등등을 겪게 된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다라 생각하고, 그 자본주의 '시스템의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의 뜻이 올곧게 반영되는 자신만의 빵집을 시골에 차려보겠노라 결심했었다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탈출하고자 했던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 이것의 묘사를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부터 가져오고 있고, 그러하기에 이 책의 제목에 '자본론을 굽다'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어렵거나 철학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제목에 '자본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다소 민망하지 않나라 느껴지기도 했었을만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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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사회 상황을 향한 슬픔과 분노야말로 마르크스가 생애를 걸고 「자본론」을 쓴 동기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나 사회는 확실히 편리해지고 물자가 넘치게 되었다. 그래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강요되는 가혹한 환경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가?  

저자의 문제 의식은 이처럼 매우 단순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마르크스로부터 얻은 답변은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단지)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맣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는 것이었지요. --- '교환가치'에 의해 설정된 임금으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렇게 고용한 노동력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어 낸 자본가는 또한 그 상품의 '교환가치'에 의해 설정된 가격에 의해 시장에 그 상품을 판매/제공합니다. 이 와중에 기술혁신이 발생하게 되면 생산성이 향상되게 되고, 이는 결국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어 자본가에게 종국적으로 기술혁신 이전보다 더 많은 이윤을 안겨주게 되지요.

 

뭐 여기까지는 상황을 나쁘게 만드는 요소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이후부터 생겨나지요. :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이나 자본가가 시장에 제공하는 '상품' 모두 '교환가치'에 기반을 두고 가격이 책정됩니다. 기술혁신은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점점 낮추게 됩니다. 이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구성하고 있는 생활비와 양육비 등등도 결국 낮아지게 만들어주며, 결국 이로 인해 노동력의 교환가치 또한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즉, 자본가는 (시작과 끝만 본다면) 기술혁신으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을 더 깎을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다'라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작용할 뿐이라 마르크스는 주장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결과가 자본가 계급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자본가조차도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 구조에 편입되어 노동자를 학대한다는 것이라는 (일종의) 배려 또한 잊지 않았었지요.

 

뿐만 아니라, 기술혁신은 대부분 노동을 단순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노동은 '누구나 가능한' 일로 전락하게 되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부속물로서의 그에게는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자신의 빵집을 통해 실현하려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마르크스주의자라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을 듯 싶습니다만...)

 

이스트를 사용해 누구라도 쉽게 빵을 만들 수 있게 되면 빵 값이 싸지고 빵집 노동자는 싼 값에 계속 혹사당하게 된다. 또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단순해져서 빵집 노동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일해도 빵집 고유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엄선한 재료를 사용해 정성과 수고를 들여 빵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당한 가격을 매겨야 한다. 제빵사는 본인의 기술을 살린 빵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런 모든 것이 우리 빵집 '다루마리'가 지향하는 바이며 우리는 그것을 실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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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균'들의 작용을 인용해, '부패하는 경제'라는 아리송한 개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락했다는 의미의 부패가 아니라 썩는다는 의미의 부패)

 

이 책을 통해 '자연재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농약이 가장 옳바른 농법이고 그렇게 생산된 곡식이나 야채, 과일등이 최고의 것으라 생각해왔더랬습니다만, '자연재배'는 무농약뿐만 아니라, 무비료라는 개념까지가 더해진 농법이라는군요. 즉, 자연에서 '알아서' 투쟁의 과정을 겪어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한 작물들이야말로, 진정 자연의 섭리를 따른, 자연이 우리에게 내어주는 선물이라는 거지요. 저자는 이를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다음과 같이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해 경제를 뒤룩뒤룩 살찌게 한다. 내용물이야 어떻든 이윤만 늘면 된다. GDP만 키우면 된다, 주가가 오르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비만이라는 병에 결린 경제는 거품을 낳고, 그 거품이 터지면 공황(대불황)이 찾아온다. 거품붕괴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살쪄서 비정상이 되어버린 경제가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다.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출동이나 제로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

이 부분이 아마도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부패하는 경제'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사실... 이에 대해 선뜻 동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보여지는 현상에 대한 비판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렇게나마 보여지는/보여질 수 있게 된 현상을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현상에 대한 (제 3자의) 비판은 항상 필요한 것이긴 합니다만, 또한 비판에는 언제나 대안이 따라붙어야 한다라는 전제조건에도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저자는 '부패하는 경제'의 실천으로 '이윤을 남기지 않는 장사'를 들고 있는데, 이 기묘!한 개념을 저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데...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 즉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올바르게 쓰고, 상품을 정당하게 '비싼' 가격에 팔 것이다. 착취 없는 경영이야말로 돈이 새끼를 치지 않는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 …… '다음번 투자를 위해 이윤은 꼭 필요하다'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결국 생산구모를 키워서 자본을 늘리려는 목적 때문에 나온 말이다. 동일한 규모로 경영을 지속하는 데에는 이윤이 필요치 않다.

'자본가의 혁신'을 주창했던 슘페터 옹께서 읽으면 급격히 오른 혈압으로 인해 뒤로 자빠지실 내용이지요. 또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경제학의 기본 전제,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화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듯 보이는 저자의 주장에, 경제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심정적으로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저자의 주장이 경영자의 입장에서 과연 옳바른 것인가라는 의문 또한 가져보았습니다만, 저자가 책에 나와 있듯이 실제로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실천해가고 있다고 하니, 어쨌든 그저 '역시 세상은 칠천만 빛 무지개'라는, 제가 종종 쓰곤 하는 표현을 다시 한번 써볼 수 밖에요. (관련 기사 : "일본 시골빵집의 '행복한 자본론' 실험' , 한겨레 신문 201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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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으로 알게 된 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한창 신문 지상에 오르내릴 때였었습니다. 피케티의 책보다 더 일찍, 그리고 훨씬 더 쉽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뭐 이런 글을 읽고 이 책을 샀었었지요. 류동민 교수님의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을 읽고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 한껏 흥미를 가졌었던 기억도 다시금 떠올랐었구요. 헌데... 솔직히 말해 이 책이 담고 있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내용이라는 게, 마르크스의 경제학이라 말하기조차 다소 민망할만큼 지극히 단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먹는 빵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그리고 저자의 삶에 대한 투철함과 집념이 훨씬 더 돋보였다는. --;; (최소한 편의점에서 파는 기성품 빵은 단연코! 먹어선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했!!!) 어쨌든/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도 이 책에 지불해야해던 '교환가치'는 최소한 저에게는 정당한 것이었다라고는 생각됩니다.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라는 책의 소개말에 가장 잘 어울린다 생각되는 문장들을 인용해보는 것으로 이상... 마르크스 경제학을 알고 싶다는 분에게는 추천하지 못하겠지만, 먹거리에 관심 많은 분들에게는, 특히나! 빵집 사장님들에게는 꼭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감상문 끝!

 

 

 

   
 

우리는 작아도 진짜인 일을 하는 시골빵집의 미래상을 마음에 그리고 조금씩 채우고, 조합해가면서 자잘한 시행작오를 거듭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

당장에 무언가를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될 턱이 없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려고 뜨겁게 도전하다보면 각자가 가진 능력과 개성, 자기 안의 힘이 크게 꽃피는 날이 반드시 온다.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류동민 著,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마르크스 경제학에 관한 입문서. 경제학적 내용을 떠나서라도 읽어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

- 한윤형 외 著,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내는 노동의 좌절.

- 류동민 저,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아카데믹 버젼.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우리에게 노동은 무엇이며, 그 노동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지불되어 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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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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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것이 국가가 실현해야 할 정의의 첫번째 내용이다. ……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살고 싶은 곳에 살아도 된다. …… 이것은 모두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이며, 이 권리들을 묶어서 자유권적 기본권이라 한다. 이 권리를 받는 데는 인간이라는 사실 말고는 다른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라면, 자유권적 기본권을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지 않는 국가에는 정의가 없다.

- 유시민 著, 「국가란 무엇인가」 pp226-227 중 발췌

옳고 그름의 잣대, 넓게 말해 정의(正義, justice)의 개념은 (그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를 떠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불변의 것은 아니었었다라 생각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에 당연한 예절이었던 것이 현재의 잣대로는 심각한 인권 유린이 되기도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정의의 변화'는 단순히 개인간의 관계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우리가 '옳다/정의롭다'라 생각하는 국가의 체제 - 예를 들어 민주주의/자본주의같은 - 또한 몇백 년 후의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옳다/정의롭다'라는 평가를 받을꺼란 판단은 사뭇 섣부르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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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읽어보았던 소설들 중,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는 질문의 무게가 가장 무거웠던 작품으로는 단연!코 엔도 슈사큐의 「침묵」을 꼽아 왔었습니다만, 이 작품 「어떤 소송」을 통해 작가 율리 체가 독자에게 건네어주는 질문 또한 「침묵」의 그것에 못지않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작용하는 '신의 뜻'에 관해 묻고 있었던 「침묵」관 달리, 인간 세상에서 '인간됨'에 관해 묻고 있는 이 작품 「어떤 소송」이, 이런 류의 질문으로는 그야말로 second to none! 일 것이다라는 제 판단이 결코 성급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마저 들... 만큼 말이죠. 이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어주고 있는 질문은, 제 생각에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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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재 상태이며 단순히 질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란 모든 신체 부분, 장기, 세포에 생명이 막힘없이 흐르는 것,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조화 상태, 생물학적 잠재 에너지가 방해 받지 않고 발현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건강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역동적 관계이다. …… 건강은 개개인의 완성을 넘어 사회적인 더불어 살기의 완벽성으로 향한다. 건강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지의 목표이며 그렇기에 사회와 법 그리고 정치의 자연스러운 목표이다. 건강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은 병날 것이 아니라 이미 병들었다.  - <서문> 중

소설의 배경은 21세기 중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40년 후의 어느 국가 - 작가의 모국인 독일이라 하죠 - 입니다. '체제, 지배적 사상, 무오류의 규범'등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이 국가의) <방법 The Method>은 '인간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설정된 목표 자체는 거의 모든 국민들에 의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별 이의없이, 아니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지요.

 

모든 국민들의 건강에 관한 <방법>의 관리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집에서 오바이트를 했다면, 하수관에 설치된 센서가 즉각 위산의 과다분비를 감지해 그 사실을 보건당국에 알리게 되는, 말 그대로 물샐틈조차 없는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헌데 문제는 말입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즉, 사람은 대체 왜? 사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올 수 있는 수많은 대답들 중엔 '행복해지기 위해서/행복하고 싶어서'라는 게 분명 있을겁니다. 특정의 꿈/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도 결국엔 그것을 이루어냄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 본다면, 삶의 목적은 결국 '행복해지기'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행복해지기'라는 목적을 이루어내기위한 일종의 수단으로서 작용하게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건강'에 관해서도, "행복하기 위해선 - 정상적인 삶이 우선 전제되어야 하는데 - 그 정상적인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다름아닌 육체/정신의 온전함이다"라는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이) 논리에는 그 어떠한 오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이 논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육체/정신의 온전함이 전제 되어야만 -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며 - 정상적인 삶이 가능할 때에라야 - 개인의 행복은 실현 가능해진다 " - 따라서! 육체/정신의 온전함, 즉 개인의 건강함이야말로 (이 작품에서는 <방법>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사회 체제'가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며, 따라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목표이다라고 표현되어버리게 되는, 다시 말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논리의 구조에서 목표와 수단이, 혹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서로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어 가지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과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가를 독자는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정상적'이라 생각하는 구도와 180도 바뀌어) 설정된 목표와 수단이 기능하는 (작품 속의) 이 사회에서 흡연은 '독성 물질 남용'의 죄가 되며, 키스는 위생법 44조를 위반하는 행위로 처벌 받게되고, 심지어 남녀간의 사랑 또한 서로의 면역 체계가 합치될 때에라야만이 <방법> 당국의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건강'이라는 절대 가치가 그 행위의 이행을 그야말로 관리/조종/강제하는 과정을 통해 정당성의 여부를 부여해주고 있는것이지요. 따라서 2014년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식후 한 모금의 담배로부터 느끼게 되는 나른함 · 사랑하는 여인과 나누는, 서로의 혓바닥을 비벼대는 격렬한 키스의 달콤함 · 남녀간 사랑의 최종단계인 결혼을 통한 결합, 그리고 그 결과인 번식으로부터의 행복함' 등등은, 소설 속 <방법>에 따르면 모두가, '인간의 완전한 건강'이라는 목표의 달성을 방해하는 죄악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사실은 작품 속에서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지요.

 

 이 시대의 '사랑'이란 특정 면역 체계들이 서로 잘 맞는다는 말과 동의어일 뿐이다. …… 다른 모든 결합은 질병이다.

이처럼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상정하여목적합리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가치합리성에만 의존할 때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목적합리성'이라는 가치의 진정한 의미/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것을 권해주고 있다는 것이, 제가 꼽아 본 이 작품의 한 가지 주제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작품 속의 국가/체제가 제시하고 있는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크라머라는 인물이 대변하고 있는 <방법>은 보편적 복리와 개인적 복리의 일치를 '정상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단 '정상적'이라는 것이 이렇게 정의되어버리면, 공동체에겐 곤궁에 처한 개인을 돌볼 책무가 있으며,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마땅히 그런 곤궁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상호간의 의무가 '정상적'으로 발생하게 되지요. 헌데 말입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보편적 복리와 개인적 복리의 일치는 '상호간의 의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뉘앙스와는 달리 양자의 조정/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방법>에 의해 일방적으로 설정된 보편적 복리에 모든 개인적 복리를 강제적으로 일치시켜버린 것이라는 데에서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일종의 '전체주의'를 의미하고 있는 듯 보여지는, 작품 속 <방법>은 '정당한 국가'의 모습을 어디 눌리는 데가 없는 한, 사람들이 (신고 있는지조차) 느끼지도 못하는 신발 같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즉, <방법>이 설정해 놓은 보편적 복리에 자신들의 개인적 복리를 강제적으로 일치시키도록 강요당한 국민들이, 스스로조차 그 일치됨이 과정 속에서 (실제로는 존재하는) 어떠한 '강제/강요'를 느끼지 못한 채, <방법>의 설정을 그저 향유만 하게끔 만드는 것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라는 거지요. 이러한 왜곡된 상호관계에 각 개인들이 이처럼 익숙하게되어 버리면 결국엔! '인간은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기쁨을 느끼며, 원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는 <방법>하의 국민들 - 리치, 폴셰, 드리스라는 인물로 대변되고 있는 - 의 의식은 이미 이러한 국가의 '관리'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잘 기능하는 국가의 시민들은 공공복리와 개인 복리의 일치에 익숙했다."

 

'선한 독재자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있는가의 여부, 혹은 '국가가, 말도 안되는 강요를 한다. 그런데 모든 국민들이 그 말도 안되는 강요에 동의하고 어느새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그 강요는 정당성의 여부를 떠나 (최소한 현실적으로는) 공공성/절대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는가의 여부. --- 작품 속 <방법>하의 국민들은 위의 두 질문에 대해, 신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신발을 신고 있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모두 OK!라는 대답을 하게 될 겁니다...만!!!

 

소설의 주인공 미아 홀은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NO!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미아 홀의 동생 모리츠는 '反방법주의자', 쉽게 말해 체제 저항자였었습니다. 그런 그가 강간살인범으로 경찰에 잡히게 되었고, 이후 <방법>에 의해 제시된 각종 증거들은 모리츠를 강간살해범으로 판단하는 것에 1%의 과학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모리츠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었었지요. '인간의 건강'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방법>은 논리상, 아무리 큰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도 사형死刑을 언도할 수는 없기에, 동결형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동결형에 처해질 모리츠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방법>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더랬습니다.

 

인간은 자기 현존재를 경험해야 해. 고통 속에서. 도취 속에서. 좌절 속에서. 비상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충만한 힘을 느끼면서. 자기 삶과 죽음에 대해 말이야. …… 언제 결국 우리 세계가 안전해질 지 알아? 모든 인간이 시험관 안에 드러누워 영양액에 잠겨서 서로 만지지도 못할 때야! 그럼 그 안전의 목표는 뭐냔 말이야. 잘못 이해한 정상성 속에서 식물인간처럼 꾸역꾸역 사는 거? 단 하나의 관념이라도 안전이란 관념을 넘어설 때에야, 정신이 자신의 물리적 조건들을 잊고 개인적인 걸 넘어서는 영역으로 향할 때에야 비로소 유일하게 인간의 존엄에 걸맞은, 따라서 더 고차원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상태가 시작돼! …… 난 자살할 수 있어. 내가 죽음 또한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삶을 선택한 결정은 가치 있어! …… 인간이 자유롭게 위해서는 죽음을 삶의 반대로 파악해서는 안 돼. 낚시줄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 …… 삶이란 하나의 제안이고 우리는 그걸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

미아 홀은 동생 모리츠가 무죄였었다라는 걸 결국 알게 됩니다. 즉, 무오류성을 자랑하던/미아 홀 자신은 신봉했던 <방법>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에 미아 홀과, 그녀의 변호가인 로젠트레터는 <방법>이 결함을 드러낸다면 그래도 그 <방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사회에 불러일으킵니다. 당연!히 <방법>의 수호자들은 그녀를 이런저런 조작된 음모를 통해 '체제저항의 우두머리'로 둔갑시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리지요.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일본의 관리들은 어느 순간부터 서양 신부들을 더 이상은 죽이지 않기로 합니다. 그들을 죽임으로 인해 신부들에게 순교자의 이름이 붙게되고, 그로부터 더 강렬한 믿음이 일반 신도들에게 생겨나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었죠. 미아 홀에게 음모를 씌어놓고, <방법> 당국은 그녀에게 그 모든 것들을 자백하라고, 그러면 동결형 대신 징역형으로 감형해주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합니다만, 미아 홀은 끝까지 자백하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동결형을 받아들이겠다 말합니다. 이런 미아 홀에게 <방법>의 대변자격인 크라머가 던지는 질문은, 저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었었지요.

 

"수백만 명이 의존하는 체제를 당신의 '존엄'을 위해 위태롭게 할 건가요? 자기 개인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한'가요? 당신의 존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이죠?"

 

얼핏 이해해보자면, 위에 나타난 크라머의 말은 이기적인 한 개인을 향한 사회의 책망이라 생각되어질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이 소설 속에서 '전체주의'를 상징하고 있는듯 보이는 <방법>의 입장에서만 만들어진 질문이지요. 개인의 '존엄'을 위해 체제를 위협하는 일이 부당하다면, 또한 개인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 즉 체제를 위해 개인의 '존엄'을 위협해도 된다라는 발상, 그리고 체제를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한' 것이라는 발상 또한 틀렸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크라머의 마지막 질문은 그러하기에 "체제의 존엄 앞에서 개인은 무엇이죠?"라는 질문으로 되받아내는 것이야말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답변이 아닐까 싶은겁니다.

 

다시 말해, 모리츠가 외쳤던 '모든 인간이 시험관 안에 드러누워 영양액에 잠겨 있을 때 달성되는 완벽한 안전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항변은 (좀 급진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체제의 존엄'을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무관하다는 (크라머가 주장하는 바의) 당위 앞에서 한낱 부질없는 투정이 되어야만 하냐는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읽고 썼던 감상문에 나타나 있는 저자 노명우의 주장은 이러한 '전체주의'의 위험성과도 관련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식적인 사람들만 모여 사는 사회가 있다면, 과연 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라는, 사뭇 '상식적'이어보이는 이 물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우리의 상식관 다르게도 '아니다!'입니다. --- 나의 상식과 당신의 상식, 그렇게 상식과 상식이 만나고 서로 견제할 때 몰상식은 생겨나지 못합니다만, '단 하나의 상식'만이 사회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상식은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변질되어버리며, 결국 그 사회는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 자신의 대답에 대한 저자의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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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작품 속 <방법>은 결국 미아 홀에게 내려진 동결형을 그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철회해버립니다. 하지만!!! 이는 미아 홀의 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칼을 쥐고 있는 권력'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요. 「침묵」에서 일본의 관리들이 서양의 신부를 죽임으로써 그들에게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선사하게되는 것을 중지하고, 신부들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결국 그들이 배교背敎하게 함으로써 천주교의 전파를 막았던 방법 그대로... 를 <방법> 또한 사용했던 겁니다. 미아 홀에게 사면장을 보여주며 크라머가 했던 다음의 말은 '권력의 여유/교활함/치밀함'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당신은 <방법>이 자기를 순교자로 만들어 주리라 진지하게 믿었어요. 능력 없는 집권자들만이 흥분한 인민에게 숭배할 인물을 선물하는 법이죠. 나사렛 예수, 잔 다르크처럼요. 죽음은 개별 존재에게 불사성不死性을 부여하고 저항하는 힘을 강화해주죠. 그런 일은 당신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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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제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 사적 영역 보호 같은 가치는 지상 목표인 최대한의 신체 건강을 위해서라면 침범받아도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무오류성을 자부하는 이 체제는 스스로를 <방법(Die Methode)>이라 부른다. 영역판 책 제목 「The Method」에서도 보이듯 정관사라 붙은 이 이름에는 자기들의 방식이 유일하게 좋은 궁극의 사회 질서라는, 체제의 독선적 자기 인식이 드러난다.

- <옮긴이의 말> 중

이 작품은 '건강'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하여 권력과 개인간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작품 속 '건강'이라는 주제를 우리가 처한 현실에 맞게 바꾸어본다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넓혀질 수 있으며, 그 무게 또한 단지 소설 속 이야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도 얼마든지 설득력있게 적용될 수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즉, 소설 속 '건강'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창조 경제'가 될 수도, '4대강 사업'일 수도, 혹은 더 나아가 '통일'이 될 수도 있다라는 거지요. 주인공 미아 홀의 동생인 모리츠가 남겼던 말, "삶이란 하나의 제안이고 우리는 그걸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라는 표현은 그런 점에서... '칼을 쥐고 있는 권력'이 제시/강요하는 가치에 대해 한 개인이, 혹은 일단의 개인들이 과연 저항할 수 있는가라 묻고 있는 이 작품의 문제 의식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하나의 답안이 아닐까 싶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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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라는 제목의 책이 있더군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북한 아이들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너희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거야. 감사한줄 알어!'류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작품 「어떤 소송」속 국민들은 최소한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건강'이라는 관점에서는 모두가 더할 나위 없는 궁극의 행복함을 누리고 있었었지요. 허나! 그러한  '강제된' 관리하에서 누리는 행복조차도 결국 모리츠와 같은 체제 저항자를 낳게 됩니다. "난 자살할 수 있어. 내가 죽음 또한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삶을 선택한 결정은 가치 있어! ……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죽음을 삶의 반대로 파악해서는 안 돼. 낚시줄의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라는 모리츠의 항변을 적용시켜 본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북한 아이들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아이들인지 알겠니?'라 묻는 방식이, 나의 행복을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유추해내는 이 어처구니 없는 방식은 어쩌면 '부모'라는 혹은 '사상/이념'이라는 형식의 <방법>에 의해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행복하다라 느끼기를 강요하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와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복리'라는 것과의 부조화에 대해 "나는 문제가 무엇인가는 말하지도 않은 채 자신이 궁극적인 답이라고 하는 안전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라 외치고 있는 주인공 미아 홀의 이 선언은 어쩌면... 한 개의 글자도 바뀜 없이 2014년 8월의 대한민국에도 똑같이 적용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녕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가... '인간들로 구성되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위에 세워진 사회'가 아니라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방법>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감상문

- 엔도 슈사쿠 作, 「침묵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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