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것이 국가가 실현해야 할 정의의 첫번째 내용이다. ……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살고 싶은 곳에 살아도 된다. …… 이것은 모두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이며, 이 권리들을 묶어서 자유권적 기본권이라 한다. 이 권리를 받는 데는 인간이라는 사실 말고는 다른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라면, 자유권적 기본권을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지 않는 국가에는 정의가 없다.

- 유시민 著, 「국가란 무엇인가」 pp226-227 중 발췌

옳고 그름의 잣대, 넓게 말해 정의(正義, justice)의 개념은 (그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를 떠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불변의 것은 아니었었다라 생각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에 당연한 예절이었던 것이 현재의 잣대로는 심각한 인권 유린이 되기도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정의의 변화'는 단순히 개인간의 관계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우리가 '옳다/정의롭다'라 생각하는 국가의 체제 - 예를 들어 민주주의/자본주의같은 - 또한 몇백 년 후의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옳다/정의롭다'라는 평가를 받을꺼란 판단은 사뭇 섣부르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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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읽어보았던 소설들 중,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는 질문의 무게가 가장 무거웠던 작품으로는 단연!코 엔도 슈사큐의 「침묵」을 꼽아 왔었습니다만, 이 작품 「어떤 소송」을 통해 작가 율리 체가 독자에게 건네어주는 질문 또한 「침묵」의 그것에 못지않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작용하는 '신의 뜻'에 관해 묻고 있었던 「침묵」관 달리, 인간 세상에서 '인간됨'에 관해 묻고 있는 이 작품 「어떤 소송」이, 이런 류의 질문으로는 그야말로 second to none! 일 것이다라는 제 판단이 결코 성급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마저 들... 만큼 말이죠. 이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어주고 있는 질문은, 제 생각에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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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재 상태이며 단순히 질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란 모든 신체 부분, 장기, 세포에 생명이 막힘없이 흐르는 것,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조화 상태, 생물학적 잠재 에너지가 방해 받지 않고 발현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건강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역동적 관계이다. …… 건강은 개개인의 완성을 넘어 사회적인 더불어 살기의 완벽성으로 향한다. 건강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지의 목표이며 그렇기에 사회와 법 그리고 정치의 자연스러운 목표이다. 건강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은 병날 것이 아니라 이미 병들었다.  - <서문> 중

소설의 배경은 21세기 중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40년 후의 어느 국가 - 작가의 모국인 독일이라 하죠 - 입니다. '체제, 지배적 사상, 무오류의 규범'등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이 국가의) <방법 The Method>은 '인간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설정된 목표 자체는 거의 모든 국민들에 의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별 이의없이, 아니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지요.

 

모든 국민들의 건강에 관한 <방법>의 관리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집에서 오바이트를 했다면, 하수관에 설치된 센서가 즉각 위산의 과다분비를 감지해 그 사실을 보건당국에 알리게 되는, 말 그대로 물샐틈조차 없는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헌데 문제는 말입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즉, 사람은 대체 왜? 사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올 수 있는 수많은 대답들 중엔 '행복해지기 위해서/행복하고 싶어서'라는 게 분명 있을겁니다. 특정의 꿈/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도 결국엔 그것을 이루어냄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 본다면, 삶의 목적은 결국 '행복해지기'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행복해지기'라는 목적을 이루어내기위한 일종의 수단으로서 작용하게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건강'에 관해서도, "행복하기 위해선 - 정상적인 삶이 우선 전제되어야 하는데 - 그 정상적인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다름아닌 육체/정신의 온전함이다"라는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이) 논리에는 그 어떠한 오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이 논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육체/정신의 온전함이 전제 되어야만 -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며 - 정상적인 삶이 가능할 때에라야 - 개인의 행복은 실현 가능해진다 " - 따라서! 육체/정신의 온전함, 즉 개인의 건강함이야말로 (이 작품에서는 <방법>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사회 체제'가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며, 따라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목표이다라고 표현되어버리게 되는, 다시 말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논리의 구조에서 목표와 수단이, 혹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서로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어 가지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과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가를 독자는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렇게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정상적'이라 생각하는 구도와 180도 바뀌어) 설정된 목표와 수단이 기능하는 (작품 속의) 이 사회에서 흡연은 '독성 물질 남용'의 죄가 되며, 키스는 위생법 44조를 위반하는 행위로 처벌 받게되고, 심지어 남녀간의 사랑 또한 서로의 면역 체계가 합치될 때에라야만이 <방법> 당국의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건강'이라는 절대 가치가 그 행위의 이행을 그야말로 관리/조종/강제하는 과정을 통해 정당성의 여부를 부여해주고 있는것이지요. 따라서 2014년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식후 한 모금의 담배로부터 느끼게 되는 나른함 · 사랑하는 여인과 나누는, 서로의 혓바닥을 비벼대는 격렬한 키스의 달콤함 · 남녀간 사랑의 최종단계인 결혼을 통한 결합, 그리고 그 결과인 번식으로부터의 행복함' 등등은, 소설 속 <방법>에 따르면 모두가, '인간의 완전한 건강'이라는 목표의 달성을 방해하는 죄악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사실은 작품 속에서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지요.

 

 이 시대의 '사랑'이란 특정 면역 체계들이 서로 잘 맞는다는 말과 동의어일 뿐이다. …… 다른 모든 결합은 질병이다.

이처럼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상정하여목적합리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가치합리성에만 의존할 때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목적합리성'이라는 가치의 진정한 의미/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것을 권해주고 있다는 것이, 제가 꼽아 본 이 작품의 한 가지 주제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작품 속의 국가/체제가 제시하고 있는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크라머라는 인물이 대변하고 있는 <방법>은 보편적 복리와 개인적 복리의 일치를 '정상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단 '정상적'이라는 것이 이렇게 정의되어버리면, 공동체에겐 곤궁에 처한 개인을 돌볼 책무가 있으며,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마땅히 그런 곤궁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상호간의 의무가 '정상적'으로 발생하게 되지요. 헌데 말입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보편적 복리와 개인적 복리의 일치는 '상호간의 의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뉘앙스와는 달리 양자의 조정/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방법>에 의해 일방적으로 설정된 보편적 복리에 모든 개인적 복리를 강제적으로 일치시켜버린 것이라는 데에서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일종의 '전체주의'를 의미하고 있는 듯 보여지는, 작품 속 <방법>은 '정당한 국가'의 모습을 어디 눌리는 데가 없는 한, 사람들이 (신고 있는지조차) 느끼지도 못하는 신발 같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즉, <방법>이 설정해 놓은 보편적 복리에 자신들의 개인적 복리를 강제적으로 일치시키도록 강요당한 국민들이, 스스로조차 그 일치됨이 과정 속에서 (실제로는 존재하는) 어떠한 '강제/강요'를 느끼지 못한 채, <방법>의 설정을 그저 향유만 하게끔 만드는 것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라는 거지요. 이러한 왜곡된 상호관계에 각 개인들이 이처럼 익숙하게되어 버리면 결국엔! '인간은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기쁨을 느끼며, 원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는 <방법>하의 국민들 - 리치, 폴셰, 드리스라는 인물로 대변되고 있는 - 의 의식은 이미 이러한 국가의 '관리'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잘 기능하는 국가의 시민들은 공공복리와 개인 복리의 일치에 익숙했다."

 

'선한 독재자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있는가의 여부, 혹은 '국가가, 말도 안되는 강요를 한다. 그런데 모든 국민들이 그 말도 안되는 강요에 동의하고 어느새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그 강요는 정당성의 여부를 떠나 (최소한 현실적으로는) 공공성/절대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는가의 여부. --- 작품 속 <방법>하의 국민들은 위의 두 질문에 대해, 신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신발을 신고 있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모두 OK!라는 대답을 하게 될 겁니다...만!!!

 

소설의 주인공 미아 홀은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NO!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미아 홀의 동생 모리츠는 '反방법주의자', 쉽게 말해 체제 저항자였었습니다. 그런 그가 강간살인범으로 경찰에 잡히게 되었고, 이후 <방법>에 의해 제시된 각종 증거들은 모리츠를 강간살해범으로 판단하는 것에 1%의 과학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모리츠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었었지요. '인간의 건강'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방법>은 논리상, 아무리 큰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도 사형死刑을 언도할 수는 없기에, 동결형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동결형에 처해질 모리츠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방법>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더랬습니다.

 

인간은 자기 현존재를 경험해야 해. 고통 속에서. 도취 속에서. 좌절 속에서. 비상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충만한 힘을 느끼면서. 자기 삶과 죽음에 대해 말이야. …… 언제 결국 우리 세계가 안전해질 지 알아? 모든 인간이 시험관 안에 드러누워 영양액에 잠겨서 서로 만지지도 못할 때야! 그럼 그 안전의 목표는 뭐냔 말이야. 잘못 이해한 정상성 속에서 식물인간처럼 꾸역꾸역 사는 거? 단 하나의 관념이라도 안전이란 관념을 넘어설 때에야, 정신이 자신의 물리적 조건들을 잊고 개인적인 걸 넘어서는 영역으로 향할 때에야 비로소 유일하게 인간의 존엄에 걸맞은, 따라서 더 고차원적 의미에서 정상적인 상태가 시작돼! …… 난 자살할 수 있어. 내가 죽음 또한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삶을 선택한 결정은 가치 있어! …… 인간이 자유롭게 위해서는 죽음을 삶의 반대로 파악해서는 안 돼. 낚시줄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 …… 삶이란 하나의 제안이고 우리는 그걸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

미아 홀은 동생 모리츠가 무죄였었다라는 걸 결국 알게 됩니다. 즉, 무오류성을 자랑하던/미아 홀 자신은 신봉했던 <방법>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에 미아 홀과, 그녀의 변호가인 로젠트레터는 <방법>이 결함을 드러낸다면 그래도 그 <방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사회에 불러일으킵니다. 당연!히 <방법>의 수호자들은 그녀를 이런저런 조작된 음모를 통해 '체제저항의 우두머리'로 둔갑시켜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리지요.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일본의 관리들은 어느 순간부터 서양 신부들을 더 이상은 죽이지 않기로 합니다. 그들을 죽임으로 인해 신부들에게 순교자의 이름이 붙게되고, 그로부터 더 강렬한 믿음이 일반 신도들에게 생겨나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었죠. 미아 홀에게 음모를 씌어놓고, <방법> 당국은 그녀에게 그 모든 것들을 자백하라고, 그러면 동결형 대신 징역형으로 감형해주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합니다만, 미아 홀은 끝까지 자백하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동결형을 받아들이겠다 말합니다. 이런 미아 홀에게 <방법>의 대변자격인 크라머가 던지는 질문은, 저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었었지요.

 

"수백만 명이 의존하는 체제를 당신의 '존엄'을 위해 위태롭게 할 건가요? 자기 개인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한'가요? 당신의 존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이죠?"

 

얼핏 이해해보자면, 위에 나타난 크라머의 말은 이기적인 한 개인을 향한 사회의 책망이라 생각되어질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이 소설 속에서 '전체주의'를 상징하고 있는듯 보이는 <방법>의 입장에서만 만들어진 질문이지요. 개인의 '존엄'을 위해 체제를 위협하는 일이 부당하다면, 또한 개인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 즉 체제를 위해 개인의 '존엄'을 위협해도 된다라는 발상, 그리고 체제를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일이 '존엄한' 것이라는 발상 또한 틀렸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크라머의 마지막 질문은 그러하기에 "체제의 존엄 앞에서 개인은 무엇이죠?"라는 질문으로 되받아내는 것이야말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답변이 아닐까 싶은겁니다.

 

다시 말해, 모리츠가 외쳤던 '모든 인간이 시험관 안에 드러누워 영양액에 잠겨 있을 때 달성되는 완벽한 안전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항변은 (좀 급진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체제의 존엄'을 위해 개인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무관하다는 (크라머가 주장하는 바의) 당위 앞에서 한낱 부질없는 투정이 되어야만 하냐는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읽고 썼던 감상문에 나타나 있는 저자 노명우의 주장은 이러한 '전체주의'의 위험성과도 관련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식적인 사람들만 모여 사는 사회가 있다면, 과연 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라는, 사뭇 '상식적'이어보이는 이 물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우리의 상식관 다르게도 '아니다!'입니다. --- 나의 상식과 당신의 상식, 그렇게 상식과 상식이 만나고 서로 견제할 때 몰상식은 생겨나지 못합니다만, '단 하나의 상식'만이 사회에 존재하게 되면 그 상식은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변질되어버리며, 결국 그 사회는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 자신의 대답에 대한 저자의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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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작품 속 <방법>은 결국 미아 홀에게 내려진 동결형을 그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철회해버립니다. 하지만!!! 이는 미아 홀의 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칼을 쥐고 있는 권력'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요. 「침묵」에서 일본의 관리들이 서양의 신부를 죽임으로써 그들에게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선사하게되는 것을 중지하고, 신부들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결국 그들이 배교背敎하게 함으로써 천주교의 전파를 막았던 방법 그대로... 를 <방법> 또한 사용했던 겁니다. 미아 홀에게 사면장을 보여주며 크라머가 했던 다음의 말은 '권력의 여유/교활함/치밀함'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당신은 <방법>이 자기를 순교자로 만들어 주리라 진지하게 믿었어요. 능력 없는 집권자들만이 흥분한 인민에게 숭배할 인물을 선물하는 법이죠. 나사렛 예수, 잔 다르크처럼요. 죽음은 개별 존재에게 불사성不死性을 부여하고 저항하는 힘을 강화해주죠. 그런 일은 당신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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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제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 사적 영역 보호 같은 가치는 지상 목표인 최대한의 신체 건강을 위해서라면 침범받아도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무오류성을 자부하는 이 체제는 스스로를 <방법(Die Methode)>이라 부른다. 영역판 책 제목 「The Method」에서도 보이듯 정관사라 붙은 이 이름에는 자기들의 방식이 유일하게 좋은 궁극의 사회 질서라는, 체제의 독선적 자기 인식이 드러난다.

- <옮긴이의 말> 중

이 작품은 '건강'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하여 권력과 개인간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작품 속 '건강'이라는 주제를 우리가 처한 현실에 맞게 바꾸어본다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넓혀질 수 있으며, 그 무게 또한 단지 소설 속 이야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도 얼마든지 설득력있게 적용될 수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즉, 소설 속 '건강'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창조 경제'가 될 수도, '4대강 사업'일 수도, 혹은 더 나아가 '통일'이 될 수도 있다라는 거지요. 주인공 미아 홀의 동생인 모리츠가 남겼던 말, "삶이란 하나의 제안이고 우리는 그걸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라는 표현은 그런 점에서... '칼을 쥐고 있는 권력'이 제시/강요하는 가치에 대해 한 개인이, 혹은 일단의 개인들이 과연 저항할 수 있는가라 묻고 있는 이 작품의 문제 의식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하나의 답안이 아닐까 싶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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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라는 제목의 책이 있더군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북한 아이들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너희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거야. 감사한줄 알어!'류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작품 「어떤 소송」속 국민들은 최소한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건강'이라는 관점에서는 모두가 더할 나위 없는 궁극의 행복함을 누리고 있었었지요. 허나! 그러한  '강제된' 관리하에서 누리는 행복조차도 결국 모리츠와 같은 체제 저항자를 낳게 됩니다. "난 자살할 수 있어. 내가 죽음 또한 결정할 수 있을 때에만 삶을 선택한 결정은 가치 있어! ……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죽음을 삶의 반대로 파악해서는 안 돼. 낚시줄의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라는 모리츠의 항변을 적용시켜 본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북한 아이들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아이들인지 알겠니?'라 묻는 방식이, 나의 행복을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유추해내는 이 어처구니 없는 방식은 어쩌면 '부모'라는 혹은 '사상/이념'이라는 형식의 <방법>에 의해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행복하다라 느끼기를 강요하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와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복리'라는 것과의 부조화에 대해 "나는 문제가 무엇인가는 말하지도 않은 채 자신이 궁극적인 답이라고 하는 안전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라 외치고 있는 주인공 미아 홀의 이 선언은 어쩌면... 한 개의 글자도 바뀜 없이 2014년 8월의 대한민국에도 똑같이 적용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녕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가... '인간들로 구성되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위에 세워진 사회'가 아니라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방법>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감상문

- 엔도 슈사쿠 作, 「침묵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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