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삼바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말리'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삼바 시세 --- 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작업 도중 크게 다쳤으나 적절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한 채, (말리의 병원에서 가장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돌아갔(p89)던 장례 절차를 통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만약 유럽에 있었더라 목숨은 지킬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결국 그는 정의롭지 않은 자기 나라를 혐오했고, 다른 나라, 프랑스를 꿈꾸(p89)게 되었죠. --- 이것이 삼바 시세가 그의 나이 열아홉 살때 프랑스에 밀입국을 하게 된 계기였었습니다.


삼바는 임시 체류허가증을 계속 갱신해가며 지난 10여 년동안 프랑스에서 일해왔습니다만, 지연되고 있는 정식 체류증의 발급상황을 알아보러 경찰서에 갔다가 느닷없이 불법체류자로 체포를 당하게 되지요. --- 이 소설은 이후 주인공 삼바 시세가 프랑스에서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약간의 읽는 재미를 빼면) 스토리 자체만으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마저도 쌍팔년도 스타일의 감성이라 느꼈었던 감성의 소유자인) 저에게 울컥~한 감동같은 감정적 변화를 딱히 주지는 못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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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라는 책에서 저자 마틴 자크는 1800년 무렵까지만 해도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다라 말할 수는 없던 서구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갑자기 앞서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석탄의 집약적 사용과 식민지의 존재'라는 두 가지의 매우 우연적 요소 덕택이었다 주장했습니다. 그 중 '식민지의 존재'는 노예로 대표되는 값싼 노동력과 원재료 획득을 가능케 해주었고, 이로 인해 서유럽에서의 '산업화'가 가능해졌었다라는 거지요.  

 

 

②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저는 이 소설의 핵심주제를 '필요악'이라 읽었더랬습니다.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사회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악 /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조직 따위의 운영 상, 또는 사회 생활 상, 부득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물1"로 정의되는 이 필요악(이었던 매춘)을 놓고 군부와 판토하 대위 사이에 벌어졌던 인식/시각의 차이가 그 소설의 주요 흐름이었다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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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삼바의 조국 말리도 포함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했었던 프랑스에게 아프리카로부터 밀입국해 들어오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존재 - 이것이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기인되는 업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가 매우 심각한 사회·경제2적 문제가 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제는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로 인해 여전히! 값싼 노동력이라는 이득을 보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다른 한 쪽의 사실이지요. 한 마디로 프랑스에게 불법이민자들은 '필요악'의 정의(definition)에 거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서른 개의 직종에 한해서는 이민자들에게 공식 체류증을 발급해주겠다는 프랑스의 정책3은 이러한 역설적/상반된 입장 -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VS 부득이 필요한 - 에서 내놓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을 겁니다. 그러나/또한! --- '더 크게 되고 싶었고, 더 탄탄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p6)' 프랑스에 왔었었던, 하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청소부일 밖에 없었기에 공식 체류증조차 발급받을 수 없게된 삼바 시세에게 이 정책은 여전히 그로 하여금 '필요악'의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죠. 


그는 함께 쓰레기를 분류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공식적으로는 채용이 안 되는 그들이 비공식적으로 프랑스 경제 전체가 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쓰기 편하고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들은 지하 프랑스에서 거리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분류하고, 노인네의 똥을 닦아 주고, 밤에 사무실 바닥을 청소했다. 낮이 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게, 마치 때, 노쇠, 쓰레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그들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pp282-283)

소설은 삼바 시세와 그의 삼촌인 라무나를 통해 프랑스의 이러한 (프랑스에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부득이 필요한' 필요악'중 '필요'에 해당하는 일부분을 채워주고 있는) 불법이민자 추방정책에 대해 불만/비판의 목소리를/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 프랑스에 온 이유 중 하나가 프랑스의 정의를 믿기 때문이었다라 말하는 삼바 시세와 자유·혁명·문화·인권의 나라(p196)인 프랑스가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해줄 거라 믿었던 그라시외즈.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생활했었던 라무나가 깨닫게 된,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더 이상 인권의 나라 프랑스가 아닌 눅눅해져 곰팡이가 슨 프랑스(p268)일 뿐인 현실이었다라는 걸 통해서 말이죠.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삼바 시세는 (그리고 작가의 흐름을 따라 온 독자 또한 어쩌면) 결국 '곰팡이가 슨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다'라는 삼촌 라무나의 말을 나중에야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이 나라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낸다고 생각했다. …… 이 나라에서 그의 삶은 현실로 볼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부정적으로만 정의되었다. 그에게는 신분증이 <없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의 부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울이기도 했다. 그를 보면 프랑스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잇었다.(p284)

이처럼 이 소설에 나타나 있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 정책,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여전히 불법이민자들의 값싼 노동력이라는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한 채 암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현실적인 면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며 심지어 합당하기도 하다라 생각합니다. '낮이 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게, 마치 때, 노쇠, 쓰레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그들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pp282-283)' 살아야 하는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내 '부정否定으로만 정의'되는 존재이어야만 하는 상황은 굳이 프랑스를 '인권의 나라'라 칭하지 않는다해도 얼마든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좋은 소재를 오히려 자신의 결정적 약점으로 만드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 프랑스의 이민자 정책을 오로지! 이민자들, 그것도 합법이 아닌 불법 이민자들의 시선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에 있다라는 점이지요.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프랑스인은 문화와 근본적인 가치들에 충실합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가치들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고 살아가며, 평등한 권리를 갖습니다4(p300)'라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프랑스가 왜! 1년에 2만 8천명이나 되는 불법이민자들을 추방시켜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프랑스 내에 얼마나 많은 수의 불법이민자들이 있다라는 건가... 등에 대한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은 채5, 그런 -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는 - 프랑스를 향해 '더 이상 공동의 정의를 믿지 않았다. 나란히 붙어 있는 <정의>와 <프랑스>라는 두 낱말을 떠올리면 이제는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p275)'라 말하는 (타인의 체류증을 빌리거나 훔친, 고로 두 번 더!의 불법의 저지른) 삼바 시세에게 은근히 응원의 박수를 쳐주기 바라고/유도하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을 더 가려버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에서의 군부와 판토하 대위의 갈등을 유발시켰던 '필요악', 바로 그 필요악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 소설의 핵심으로 밀고 나갔어야 하지 않나 전 생각합니다.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에서의 필요악이 오로지 군부의 필요에 의해서만 발생된 것이었다면, 이 작품 「웰컴, 삼바」에서는 양 측이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는 어떻게/왜 다른 결말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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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하는지도 모른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장하준 교수는 이처럼 (주로 열악한 작업·경제적 조건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이 진정 자발적인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자발적 선택'이라도 여타의 선택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비록 그 선택이 노동자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자발적'이 될 수 없다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삼바 시세와 라무나 등,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선택 또한 이런 '강요된 자발'이었던 것일까요?


삼바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 말리를 떠난 이후 닥쳤던 모든 고난들을 '프랑스에 거주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p247)'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이겨내왔었습니다. 이 고난들을 잘 이겨내기만 하면 언젠가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죠. 또한! 그가 애초에 말리를 떠나 프랑스로 오기로 했었던 이유 - 정의롭지 않은 자기 나라를 혐오했고, 다른 나라, 프랑스를 꿈꾸(p89)기 시작하였었으며, 프랑스의 정의를 믿었기에 그곳에서 더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꺼라는 결심은 오로지 삼바 시세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었더랬습니다. 심지어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십 년 전부터 그6의 나라는 프랑스였다. …… 창살 뒤에 갇혀 있어도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어도, 그는 프랑스를 사랑했다(pp25-26)'라 말하며,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난 장소에 의해 정의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은 다른 곳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벌 받을 수 없었다(p47)'라 생각하는 그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불법이민자로 체포되어 그가 '태어난 나라'로 '자발적' 귀환뿐이었지요. 이미! 마음 속에선 자신을 프랑스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삼바 시세에게 말입니다.


유치소에 억류된 사람에게는, 도무지 거부할 방도가 없는 <자발적 귀환>을 받아들일 권리만 있었다. 이 경우에 <자발적인>이라는 낱말은 도대체 뭘 뜻하는 것일까? ……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는 그런 식으로 갇히게 되었을까? 다른 곳을 꿈꿨기 때문에? 꿈도 범죄일까? …… 그곳에서는 나라 이름이 사람 이름이 되었고, <자발적인>이나 <꿈>처럼 간단한 낱말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 낱말의 의미가 바뀐다면, 인간은 똑같은 인간으로 남아 있을까?(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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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라무이의 체류증을 빌려, 삼바 시세가 아닌 라무이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삼바는, 검문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타인의 체류증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온도 잠시 뿐, 삼촌 라무이마저 직장에서 해고되고 그의 체류증이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니게 되자 삼바는 다시 절망하게 됩니다.


그가 장장 십 년 동안 일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그에게는 체류증도 일거리도 없었다. 그곳에 머물 권리도 없었다. 그는 이제 불법 체류자였다.(p112) …… 그에게는 더 이상 외출할 권리가 없었다. 일할 권리도 없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모든 것을 제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p113) …… 가끔 그는 자신이 이 도시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p116)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어도 삼바가 끝내 자신의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마쿰바의 사내'로 상징되는, 실패한 귀향자라는 이미지가 자신에게 씌어지는 것이 두려웠다라는 거, 그리고 10년 여의 생활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프랑스인이라 생각하게 된 동화(同化)7가 제가 찾아낼 수 있었던 유이!한 이유들이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실제로 그 전부라면) 뭔가... 많이 약하죠. 이어지는 삼바 시세의 자조어린 반복되는 한탄에 선뜻 공감의 감정을 가지게 되기엔 말입니다.

● 그의 미래는 아득했다. …… 그에제 정말 중요한 모든 것은(어머니,누이들, 집, 그의 나라) 거기에 없었다. 그의 삶이 텅 빈 가짜처럼 보였다.(p118)

●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신분증도,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 거처마저 잃게 될 것이다. 신분증이 없는 그에게는 삶도 없었다.(p270)

● 그는 죄수처럼 일을 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잠을 자러 돌아갔다.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p282)

● 그는 ……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다. …… 그 시절에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는 분명히 누군가였다. 그 시절에 그는 사람이 아무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p289)


더욱 중요한 점은 --- 프랑스에서의 삶에 결국 지쳐, 가족들이 있는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는 삼촌 라무나의 선택, 그리고 그와는 다른 삼바의 선택. 정녕 우리가 그들의 선택이 '자발적'이 아니었었노라고, 한 발 더 나아가 '강요된 자발적 선택' 또한  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말해도 되는 걸까요? 전 절대 아니라 생각합니다.


프랑스 사회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법이 요구하는 체류증이고, 그들이 가진 노동력(p349)일 뿐이니까요. (이것이 가혹하다라 생각하느냐의 차이가 어쩌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면 삼바는 이름까지 바꾸어 '내가 나임'을 부정해가면서까지 지내야 한다라는 것에 심적 동요를 일으키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이 곳 프랑스에서 사는 것을 견딜 만은 하다8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프랑스에게 불법이민자들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값싼 노동력 또한 필요한 '필요악'이다라면, 삼바에게도 프랑스는 자신이 수행해야하는 '필요악'의 역할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는 것 --- 이보다는 차라리! 프랑스에 머무는 것이 나은, 엄연한 그 스스로의 (의지가 곁들어 있는) 자발적 선택이었던 것이며, 이 선택을 '강요된 자발'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삼바 시세에게 주어진 것이 전적으로 '프랑스'의 책임9이라는 걸  역시 이 작품은 딱히 보여주고 있지 않/못하기 때문이지요.10 비록! 


"여기 계속 있다가는 우린 사라지고 말 거다. 우리가 지금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는 걸 모르겠니?"(p269)


라는 삼촌 라무나의 말에서처럼, 그들이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없었고, 나중에는 그것이 증명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까지를 맞이했을 때 갖게 되는 자괴감을 가벼이 생각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되겠으나, 바로 이 점에서 이 소설을 아쉽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생각합니다. --- 프랑스의 불법이민자 추방정책으로부터만 소설의 감동/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했다보니 정작! i)프랑스와 불법이민자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필요악'의 각 역할을 (최소한 어느 한 쪽은 비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라는 점,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어진 ii)'나는 무엇이다(something)'라는 방식이 아닌, '나는 무엇이 아니다(not something)'라는 방식11으로밖에는 정의될 수 없는, 그러다 마지막엔 '나는 무엇도 아니다(not anything)'까지 가야만하는 삼바 시세의 삶의 변화 과정 등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일 수 있었던) 감동을 거의/최소한으로 밖에는 뽑아내지 못했다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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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왜 먹잇감이 그토록 풍부한 대양을 떠났을까? 왜 그토록 힘들게 강들을 거슬러 올라갔을까? 왜 자신이 태어난 장소를 늘 꿈꿔야만 했을까."(p253)


글쎄요, 그 답이 이 책에 나와 있기는 한 걸까요? 전... 못찾겠더군요. --- 사실 이 부분에서 전 이 소설의 한국어판 제목 「웰컴, 삼바」가 의미하는 바가 i)삼바가 그의 <태어난 나라>에서 환대를 받는다라거나 ii)극적으로 프랑스 사회가 그를 자신들과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받아준다라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했었었거늘,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 깃든 대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랬거늘... 결국 이 두 가지는 아닌 결론으로 끝나고 있더군요. 그럼 대체 제목의 '웰컴'은 어떤 의미로 쓰여진 걸까요? 

삼바의 마지막 선택이 정녕 어떤 모습의 끝맺음을 하게 될까라는 의문에 전... 아마도 그 역시 삼촌 라무나의 선택과 다르지 않을거라 추측해봅니다. 결국... '웰컴'이란 단어는 삼바에게는 주어지지 않게 되는 그런 결말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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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이러한 문제제기가 되었다라는 것 자체까지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고, 그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또한 폄하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이 소설은 뭐랄까...일을 저질렀는데, 제대로 저지른 것도 아니고 게다가 뒷수습마저도 해놓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랄까요? --- 행여 이러한 문제제기가 제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었던/글이나 말로 표현해낼 수 없었었던, 하지만 듣고보니 머리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었다라면 저 스스로라도 어떤 이후의 생각을 이어가보려는 독서를 하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말한대로 이 소설의 문제제기 방식이 지극히 편파적이었다라는, 좀 심하게 말해도 된다면 일종의 쌍팔년도식 '감성팔이'일 뿐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는 저로서는 글쎄요...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동명의 영화12도 곧 개봉된다더군요. 영화를 보지 않고 내리는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 영화가 그려내는 삼바가 지극히 순박하고 착한 인물이고, 그를 추방하려는 프랑스 경찰/관리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악한 경찰'이라면 그 편파성은... 어쩌면 작가의 문제제기보다 더 커다란 문제제기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도 싶네요.



※ 본문과 각주에 등장하는 책들의 감상문

- 마틴 자크 著,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장하준 著,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박민규 作, 지구영웅전설


 


  1. 네이버 국어사전.
  2. 사실 이 부분은 엄밀하게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과거 자신들의 경제 부흥이 일정 부분 (주로 아프리카로부터 유입되었던) 값싼 노동력 덕택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유럽의 전반적인 고실업률 때문에 이민자들이 자국의 일자리를 어느 정도는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유럽 각국의 정부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유럽의 고실업율이 과연 이민자들 때문에 발생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유럽인들의 취업 기피 직종만을 이민자들에 메꾸어 주고 있는지의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고실업율의 문제를 단순히 이민자들 때문이라 말해서는 안될겁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식당들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중국 동포분들 때문에 우리나라 여성의 취업율이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그 직종에 누구도 취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동포분들이 들어오게 된 것인지를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3. 2008년 12월에 체류증이 발급되는 서른 개 직종의 목록이 발표되었다.(p32)
  4. 그저/단지 '선언적 문장'의 수준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마지막 문장이 보편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어야한다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선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않은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게 아닌, 결코 성립될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현실이 그렇지 않다'라는 겁니다.
  5. 이러한 점을 무마(?)시키기 위함인지, 작가는 추방당할 처지에 놓인 불법이민자들 중 매우 안타까운 사연들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들이 '원칙의 존재 이유'를 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 이 소설의 화자는 약간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나'로 지칭되는 무명(無名)의 화자가 있긴 합니다만, 그 '나'가 등장하는 부분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소설이 '나'로 지칭되는 사람의 기록물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라면 마지못해 이러한 '화자의 애매함'을 넘어가줄 수 있겠으나, 딱히 그렇다라는 설명이 없기에 차라리 소설의 화자가 '전지자'이다라는 생각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가 애매하다'라는 거지요. 여기서의 '그'는 물론 삼바 시세입니다.
  7.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에서 '바나나맨'으로 상징되어 보여지는 동화(同化)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8. 이 표현은 '사는 게 견딜만 해?(p295)'라는 조르제트의 질문에 대한 삼바의 대답입니다. 이걸 그저 단순한 인사치레의 대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왠지 전... 글자 그대로 (아직은) '견딜만 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9. 전 이 점 - 삼바 시세가 조국을 떠나려했던 결심을 했었고, 그가 합법적으로는 프랑스로 들어올 수 없었던 환경에 있었다라는 것에 '프랑스'는 어떠한 관련/책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삼바 시세에게 주어진 (과거와 현재 모두를 포함한) 환경이 '용인되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으로부터 (최소한 이 소설이 제공하고 있는 프레임 안에서만큼은) 프랑스는 완전!하게 자유스럽다라는 겁니다.
  10.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라는 장하준 교수의 물음을 이 상황에서 프랑스가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마저도 없다라 저는 생각합니다. 장하준 교수의 이 질문은 남겨진 선택이란 것이 '차악'만이 존재하고 있을 때 유효한 것이지, 삼바 시세의 경우처럼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까지 유효한 것은 아닌겁니다. 그에게는 '말리로의 귀향'이라는 결코! '차악'일 수 없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었음에도 자신의 의지로 프랑스에 계속 남아있겠다라 했었으며,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할지라도 범법 행위로 인해 얻어진 결과물로라도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겠다고까지 결심하였으니까요.
  11. 삼바가 자신의 조국 말리를 떠나 프랑스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된 계기 자체부터가 사실 논리적이었다기보다는 감정적/젊음의 혈기적인 면이 많았다 생각합니다. 소위 일컬어지는 위인들의 경우라면, '이런 내 조국을 바꾸어보겠다'란 결심을 하지요. 우리가 삼바 시세에게 그렇게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그가 조국을 떠나려 마음 먹었던 이유 자체가 바로 '부정(否定)'이었기에, 이후 그의 존재 역시 그렇게 정의되는 것에 대해 과연 그가 프랑스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나 싶기도 합니다.
  12. 예고편만으로는 원작 소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원작에서 삼바 시세와 (영화 속 여주인공인) '나'와의 관계는 지극히 업무적인 것이 국한되어 있는 걸로 나오며, 러브 라인은 오히려 그라시외즈라는 여성과 그려지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영화 예고편에서는 '특별한 우정이 시작됩니다'라는 카피처럼 삼바 시세와 '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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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원군을 데리고 정말로 오랫만에 노래방엘 갔었는데 '이거 내가 키우는 아들 맞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로 이 녀석... 랩을 꽤! 잘하는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랩을 잘하고 오로지! 랩이 있는 노래만 부르더군요. 아빠인 저에겐 그 많은 가사를 다 외우고, 박자 맞게 다 따라한다라는 게 정말로 신기해 보일 따름이었지만, (예전 누군가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자면) 이 녀석에겐 태어나서 접해온 '노래'라는 유희가 온전히/거의 랩으로만 되어있어왔으니, 그가 '노래란 원.래. 이런 거야!'라 생각하게 된 것이 이상할 것도없겠지요. --- 범위를 좀 더 넓혀보자면, 종원군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TV라는 것이, 컴퓨터라는 것이, 또한 인터넷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사물들이었기에 그것들이 없었던 시절이란 걸 (아직은) 상상해볼 수 없는 게 당연한 걸 겁니다. 이는 아빠인 저의 세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던 것이기도 해,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말씀해주셨었던, 당신께서는 버스가 없어 몇십 리 길을 걸어 등하교를 해야했었다라는 상황 또한 당시의 제가 이해하기엔 사뭇 쉽지 않은 이야기였었었지요.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저희 아버지(세대)에게도 또한 당신(들)께서 이해 할 수 없었던 과거의 상황들이란 게 분명 있었을거라 추측해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라는 건, (종원군과 저, 그리고 저의 아버지에게도 적용되는 시간으로서의)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우리의 선조들은 분명 (성공적으로) 살아내었었던 덕택임 또한 분명하지요.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갈/낼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단지 약간/매우/지극히 불편한 삶을 살았었다라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단지 '삶이 불편하다'라는 수준은 여차저차하여 이겨낼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삶의 지속'이 불가능해져버릴 수도 있는 꽤나 심각한 상황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로 인해 발생될 수도 있었다라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러한 시대를 살았었던 선조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될/가져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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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라는 등식1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가져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A≡A'라는 항등식으로 표현해도 무방하겠죠.) 이 등식은 「나란 무엇인가」에서 보았던 분인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해도 여전히 성립되는 항등식입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대로 분인이란 그저 A={A1, A2, A3, … An}의 집합개념일 뿐이니까요.  그 어떠한 경우라도 A가 그 자신인 A와 같지 않게되는 상황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겁니다. 또한, 만약 'A=B'가 성립하고, 'B=C' 또한 성립된다면 우리는 'A=C'임을 확인할 수 있다라 배웠더랬습니다. 이 역시 부인할 수 없는 논리적 추론의 결과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어느 지역에서 이 '논리적 추론의 결과'를 놓고 화제의 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우선 이 재판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놓은 개요를 보자면... 


1540년대 랑그독에서 (마르탱 게르라는 이름의) 한 부유한 농민이 아내와 아이, 재산을 버리고 떠나 수년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왔지만 - 또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 삼사년간의 평온한 결혼 생활 후에, 그의 아내가 자신이 사기꾼에게 속았다면서 그를 재판에 회부했다. 남자는 자신이 마르탱 게르임을 법정에서 납득시키는 데 거의 성공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났다.(p4)

​그러니까! 'A=B' 이고 'C=B'라고 하는데 'A=C'는 또 성립되지 않는, 아예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두 명의 사람이 자신이 진짜 마르탱 게르라 주장하는 이 기이한 일은 대체 왜/어떻게 생겨나게 된 걸까요?  

【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함 】

도장이 아닌 싸인만이 등록되어 있는 통장만 들고 은행에 가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내 통장이고 내 싸인이니 돈을 내주시오라 하면 현행법상 그는 100% 그 돈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은행은 그 통장의 주인이 나임을 그의 말만으로는 인정해주지 않으니까요. 이처럼 '내가 나임'을 증명해주는 수단은 '지금'의 시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신분증 이외에도 지문을 확인해 본다거나 심지어 유전자 확인을 동원해볼 수도 있으니까요. 자! 이제... 시계를 한 번 거꾸로 돌려보죠. : 유전자 확인이라는 기술이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 지문 인식이 존재하기 이전, 더 거슬러 올라가 사진으로 나의 모습을 보존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다면 '내가 나임'을 과연 어떻게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2015년을 '지금'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겐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내가 나임'의 항등식에 관한 역사서입니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이라는 책에서 처음 만나보았던 학문 분야인 '미시사微視史' 전공의 사학자인 저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당시 기록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구성하였으며, 그럼에도 비어있는 약간의 공간에는 예의 엄밀성을 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의 상상을 더해놓고 있지요.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중


【 겉으로 보여지는 사건의 전모 】


갑돌이2가 열너댓 살쯤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이 녀석, 짬지에 털도 났으니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어'라며 마땅한 신부감을 찾습니다. 마침 그 때 '첫 생리를 했으니 이제 시집 보내야겠네'라 생각하고 있었던 갑순이의 부모가 한 동네에 살고 있었으니 그렇게 갑돌이와 갑순이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니! 결국 보자면 그들의 의지에 반했던 결혼을 하게 되었었지요. 뭐 암튼 그렇게 식을 올리고 합방을 하고보니 갑돌이 이 자식이 글쎄... 성 불능. --;; 

뭐... 아직 어리니까 그런걸지도 몰라,하며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렸거늘 --- 어느덧 아리따운 한 송이의 만개한 꽃다운 처녀가 된 갑순이와의 사이에 여전히 아이가 없자, 갑돌이의 성 불능이 회복되길 기다리기 포기한 갑순이의 부모와 친척들은 그녀에게 어서 이혼하라 재촉을 합니다. 당시의 법은 결혼 후 3년 이내에 아이가 없을 경우엔 결혼 자체를 취소할 수 있었고, 당연히 갑순이는 재혼을 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③자신의 평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모로부터의 독립심이 컸었던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직은 섹스를 즐기려는 욕망 자체가 없었던 갑순이는 그러한 주위의 재촉을 모두 뿌리쳤고 --- 드디어 결혼한 지 8년 만에 삼신할매의 점지를 받아 떡두꺼비같은 아들이 둘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이제 갑돌이와 갑순이 앞에는 행복한 미래만이 펼쳐질 것 같았거늘 ④갑돌이 이 자식이 글쎄... 어느 날 느닷없이 덜컥 어디 간다 말도 없이 도망가듯 가출을 해버리지요.


갑돌이로부터 소식이 끊어진 지 8년 후 어느 날, 개똥이란 녀석이 '내가 갑돌이요~'하고 갑순이 앞에 떡하니 나타납니다. 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던 갑돌이의 누나들과 삼촌은 갑돌이의 외모가 좀 변해 있는 것에 의아해했었지만, 이내 개똥이가 자신의 이야기인 양 늘어놓는 갑돌이의 과거사들을 들어보고는 '내 동생/조카 갑돌이 맞구나!'를 외칩니다. 하지만 (비록 함께 살았던 기간보다 헤어져 있는 기간이 더 길었다해도) 부인인 갑순이마저도 그렇게 간단하게 갑돌이라 자칭하는 개똥이를 정말 자신의 남편 갑돌이라고 믿었을까요?


암튼... 그렇게 3년이 좀 넘는 시간동안 개똥이와 갑순이는 부부로 살며 애까지 둘 씩이나 낳고 나름 잘 살아가고 있었던 어느 날. 갑돌이와 갑돌이 삼촌인 길동 사이에 재산을 놓고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그간 갑돌이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길동이는 이때다 싶게 '이 녀석은 가짜 갑돌이다!'라며 소송을 겁니다. --- ⑦1심에서 재판부는 삼촌 길동의 손을 들어, 개똥이에게 '너는 가짜 갑돌이다'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만, 더 많은 증인들과 정황 증거들을 검토해 본 2심에서는 삼촌인 길동이가 집안의 재산에 욕심이 나 조카의 정체를 의심하였노라고, 그러니까 개똥이가 '진짜 갑돌이'라는 내부결론을 잠정적으로 정해놓습니다.그런데 이때!!! 난데없이 '내가 진짜 갑돌이요!'라는 한 사람이 등장하지요. --- 재판부는 이 사건을 다시 원점에서부터 조사하였고 결국! 그간 갑돌이 행세를 했던 사람이 사실은 개똥이라는 인물이었음을 밝혀냅니다. 결국 개똥이는 '사기, 이름과 신원의 사칭, 간음'의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답니다.



【 사건에 대한 역사가의 이해3


 

갑돌이가 성 불능이라는 것을 갑돌이의 아버지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최소한 그가 그 사실이 갑돌이의 결혼을 완성4하는 데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즉 곧 갑돌이의 성 불능이 치유되리라 기대했을 것(p38)이라 저자는 적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들에게 구애 의식을 받아보기도 전에 부모의 강요로 결혼을 해야했던 갑순이에게도 또한, 신랑 갑돌이의 성 불능으로 인해 자신들이 당분간은 (일종의 의무인듯한) 성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어느 정도 그녀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작용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요.5


갑돌이의 성 불능을 이유로 부모와 친척들이 계속 이혼 권유를 했어도, 갑순이가 이를 거절한 것을 두고 저자는 갑순이의 성격상 특징을 '여자로서의 평판에 대한 관심, 확고한 독립심, 자신의 성(性)에 대한 재빠른 현실 감각(p49)'이라 파악하고 있는데 --- 저자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여 낯선 집으로 옮겨와야했던 그녀 또한 성 불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않은 성적 불안을 경험(p48)했었을 것이라 추측하면서, 만약 그녀가 결혼의 무효화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따랐더라면 이내 곧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을 것이지만, - 따라서 또 다시 (부부간에는 반드시 섹스를  해야 한다는) 성적 불안에 시달려야했을지도 모를 -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아내의 특정한 의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정조를 지킨다는 평판까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pp48-49)라 적고 있습니다.

갑돌이네는 사실 이 지역으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더랬습니다. 이전에 살았던 곳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비하면 한적한 시골 같은 곳이었지요. ---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었던 갑돌이라는 이름마저도, 새로 이사해 온 이 곳에서는 매우 촌스러운 이름이 되는 겁니다. 게다가 갑돌이가 원래부터 좋아했었던 칼 싸움이나 곡예 말고는 그의 흥미를 끌만한 것들이 이 지역에는 전혀 없었었지요. 이내 갑돌이는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 농사일, 기와 공장, 결혼 - 너머의 생활을 동경하게 됩니다. 예전에 살던 곳이라면 이러한 속박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전무한 이 곳에서 결국 갑돌이는 유학이나 군입대 등을 일종의 탈출구로 아버지에게 제시하나 그마저도 단칼에 거절당하게 되지요.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 갑돌이가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의 법률로는 처벌의 대상이었기에 결국 갑돌이는 아버지의 가혹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p43)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자신의 부모, 아들, 아내로부터 떠나버리고6맙니다. 이후 갑돌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인 갑돌이를 용서하고 자신의 재산을 갑돌이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요.

당시의 법7에 따르면 남편이 부재한 경우 그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 아내는 자유롭게 재혼할 수 없(p56)었었는데, 갑순이가 갑돌이의 오랜 부재라는 이 상황에서 재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 굳이 이 법 때문이 아닌, 유산 상속과 자신의 평판등을 고려했을 때 차라리 정조를 지키며 정숙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 저자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짜장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 갑순이 아빠가 사망하자 갑순이의 엄마가 갑돌이의 작은 아버지와 결혼을 해버린 겁니다. 가장이었던 갑돌이 아버지의 사망과 가장이 되어야 할 갑돌이의 부재로 인해 임시적으로나마 집안의 가장이 된 갑돌이 작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 갑순이는 졸지에 숙모님이 되어버린 자신의 어머니와 다시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거죠. --;;)    


'내가 갑돌이요'하고 나타난 개똥이를 본 갑순이는 처음에는 그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쳤다(p6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내 갑돌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항들을 술술 이야기하는 그를 보고 결국 그를 갑돌이라 믿게 되지요. 초상화 한 점 없었던 당시, 여러 해 동안의 군 생활로 살이 찌고 모습이 변한 것이라 말하는 개똥이의 변명에,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갑돌이의 누이들과 삼촌은 일말의 의심을 의식적으로 감추었고, 그러는 사이 개똥이는 성공적으로 갑돌이로의 변신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닮았다 한들, 갑순이가 그렇게 쉽게 개똥이를 자신의 남편인 갑돌이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었을까요? 이에 대한 저자의 추측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즉 그가 도착해 자신의 표시들과 증거를 제시하던 그때에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 그를 침대에 받아들였을 때쯤 그녀는 분명히 차이를 깨달았을 것이다. …… "아내에 대한 남편의 손길"을 착각할 수는 없다. 명백한 동의에 의해서든 암묵적인 도의에 의해서든, 그녀는 그가 남편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갑순이가 (갑돌이라 주장하는) 개똥이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16세기의 가치를 인용하자면) 평화롭고 화목하게,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함게 살 수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18년 전 자신의 결혼처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것도 ……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것도 아닌, 창안된 결혼(invented marriage)이었다. 그것은 거짓말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갑순이가 묘사했던 것처럼 그들은 "진짜 결혼한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함께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pp69-70)

이 '창안된 결혼', 좀 더 풀어쓰자면 둘 사이의 합의하에 둘 이외의 모든 사람들 속이기로 한 결혼 생활이 지속되자, 어느덧 개똥이는 연극이 아닌 진심으로 갑순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갑순이 또한 자신을 불시에 차지해 버린 남편에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됩니다. (둘의 속마음까지를 알 수는 없으나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수없이 많다라며, 그 일례로) 둘 사이에서는 3년 만에 두 딸이 태어나기도 했지요.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저자는 그들이 이 '창안된 결혼'을 지속시키기로 결심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법 또한 결혼을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당사자들의 동의였고 오직 그들의 동의만이 필요했(pp72-73)었었기에, 개똥이와 갑순이가 서로의 합의를 깨지만 않는다면 둘은 법적으로도 완벽히 인정받는 부부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거가 살기에 매우 불편했었음은 틀림없겠으나, 과거 사람들의 이성마저도 그들의 일상처럼 낡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고가 진짜 갑돌이다 아니다를 놓고 양측의 증언이 서로 팽팽한 상황에서 2심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법논리로 개똥이에게 무죄를, 즉 그가 진짜 갑돌이임을 선언한다는 내부적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다음 부분의 법철학이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었습니다.)


법정이 어떤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범죄가 실제로 저질러졌고 피고가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자백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이 두 가지 사실을입증하는 데 충분치 못했다.(p113) ……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무고한 한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을 벌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이 낫다"는 로마법의 원칙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 16세기 프랑스의 법정이 매우 중요시하는 민법상의 정신을 강화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혼과 그 산물인 자녀들을 보호할 것이었다. 재판에 참여했던 한 판사에 따르면)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상황에서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결혼이나 자녀들에 대한 보호이다." 갑순이는 남편을, 철수8와 영희9는 아버지를 갖게 될 것이었다.(pp117-118)

저자는 지난 12년간 종적을 감췄던 갑돌이가 왜 그 먼 길을 걸어 다시 옛 생활로의 복귀를 선택했었을까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미스테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갑돌이가 이런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귀향을 결심한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라 적고 있지만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즉,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미 이러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어디에선가 미리 들었었을꺼라는 거지요.


다른 남자가 내가 남겨둔 삶을 살아 왔고, 내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내 아내의 남편이며 내 아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그는 자문했을 것이다. 진짜 갑돌이는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정체, 자신의 자아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을 것이다.(p121)

결국 갑돌이는 누이들과 삼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내 갑순이의 증언으로 인해 그가 진짜 갑돌이임을 증명해 냅니다. 이 과정을 읽어보면,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데 있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극히 제한적이었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즉 그저 '내가 진짜 나, 갑돌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거지요. 어쨌든 이후 개똥이는 '사기, 이름과 신원의 사칭, 간음'의 죄로 사형에 처해진 후, 그토록 파렴치하고 혐오스러운 사람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도록(p127) 시신이 불태워지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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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보았듯, '지금'은 너무도 간단하게 당연하다라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 언젠가의 과거에는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서 입증해내었어야 하는, 혹은 타인에 의해 입증되어지는 일들이었다라는 걸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간단하게 증명해낼 수 있다라 생각하고 있는 당연한 것이 정말로 간단하게 증명해낼 수 있는 것인가라는 느닷없는 반문에 대해 과연 우리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걸까요? ---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는 무엇인가」에서도 지적했었듯, 인터넷 상의 나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기억과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보여졌을 때 접하게 되는 흔한 반응, '알고보니 저 녀석 원래는 이런 놈이었구나'라는 그들/세간의 시선이야말로 '내가 나임'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낸다는 것이 사실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드리아누스 :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에픽테투스 :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입니다.(p145)


이 말은 곧, 내가 다른 사람이 마음과 생각을 볼 수 없듯이, 나의 마음과 생각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없는 것이며, 보여줄 수도 없다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외양만으로 '내가 나임'을 충분히 증명해낼 수 있다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은행에서 돈을 찾거나 인감증명서를 발급하는 등의 기계적 일상 이외의 상황에서 '내가 나임'을 증명해내는 것은 (그것이 갑돌이에게 그러했듯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위의 짤막한 대화에 온전히 담겨져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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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갑돌이는 자신의 죄를 눈물로 뉘우치는 갑순이를 용서하지 않았다10고 합니다. --- 법정은 갑돌이가 여러 해동안 가족을 버린 것에 대해서 그의 안에서 들끓고 있던 젊음의 열기와 경솔함(p129) 때문이었다 판단하고, 어쨌든 그간 그의 다리, 재산, 아내에게 일어난 일들로 판단하건데 이미 충분히 벌을 받은 것(p129)이라 결론 내립니다. 법정은 또한 갑순이에 대해서도 따로 죄를 묻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가 사뭇 놀랍기만 하지요. "결국 여성은 약한 존재이다"라는 단 한 마디만으로 그녀의 (돌아온 갑돌이에게 그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것에 대한) 진실됨을 믿어주겠다라는 겁니다. 그리곤 두 사람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충고하면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애를 쓰기도 했지요. 이후 갑돌이와 갑순이는 다시 본래의 부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저자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서 불구가 된 자신을 돌보아 줄 아내가 필요했던 갑돌이와 남편과 아이들의 아버지가 필요했던 갑순이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서로의 과거에 대한 암묵적 망각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상의 이야기가 별 대단치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서적들이 탄생한 것에 대해 저자는 이 사건이 '놀랄 만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p173)'이라 적고 있습니다. --- 경제학에서도 '거시'보다는 '미시 경제학'을 훨씬 더 재미있어 했던, 그래서 이후의 전공도 그쪽으로 정했던 저로서는,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으로 처음 접했보았던, 그리고 이 책으로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이 '미시사微視史'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한 흥미를 아니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한 사건에 대한 기록과 해석 뿐 아니라 그 미시사의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지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는, '역사 연구의 일 방법'에 관한 책으로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와 재미를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특히 오래전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면 항상 제 머리에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구절이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의 이야기인 이 책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모든 내용을 너무도 정확하게 대변해 주고 있더군요. 정말... (아래 인용문에서와는 다른 의미의) '경탄'을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著, 「곰브리치 세계사」 중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

- 히라노 게이치로 著, 「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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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무엇인가 - 진정한 나를 깨우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철학 에세이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나는 누구인가 > 


"나... 나는 누구죠?" --- 이물음은, 잠에서 깨어난 기억상실증 환자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듯한 말이죠. 이런 경우 그에게 '자기 자신'이란 그저 육신적인 의미밖에는 없을 겁니다. 살을 꼬집었더니 아픔이 느껴지더라,라는 사실만이 이 육신이 자기 자신임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줄 뿐인거니까요. ① 만약 그가 깨어난 상황이 그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라면, - 예를 들어, 한국의 누군가가 아마존의 원시부족들이 둘러보고 있는 가운데 눈을 떴다라든가 - 이 상황에서는 그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규정지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질 않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나는 누구죠?'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지요. 다행히 그가 기억을 잃기 이전과 동일한 환경에서 깨어났다해도, 그 스스로는 '나는 누구죠?'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혼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를 알고 있는, 하지만 그는 처음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누군가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되는 것이지요.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부분 뇌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을 받은 사람입니다. 수술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는 '자기 자신'이 수술 이전의 자기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소설의 결말은 그런 변화가 그 사람에게 이식된 뇌의 부분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부분 이식이 아닌 뇌를 통째로 이식받았다면, 그 사람의 기억은, 감정 등등은 그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원래 뇌 주인의 것일까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최근 돼지 등 동물의 장기를 인간 장기의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머지않아 "마치 구형 가정제품을 신형으로 교체하듯 신체 장기를 기능이 좋은 새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著,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pp 67-69  

뇌 과/의학자가 보기엔 허무맹랑한 의문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질문은 엄연!히 우리의 현재와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몸 속에 돼지의 간과 신장, 심지어 심장마저도, 그렇게 내 몸의 (예를 들어) 80%의 장기들이 의료용 동물들로부터 이식된 것이라면, 그렇다라면... 나의 이 육신은 정녕 인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느냐란 의문을 우리는 결코 '허무맹랑'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테니까요. 반면!!! (완독을 하지 않아 저의 이해가 완전하다고는 자신할 수 없으나 읽어본 한도내에서 말하자면)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육체를 단지 '유전자의 carrier'로 보고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 즉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란 것이 불분명해지는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아마도! --- 이제껏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들어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질문 하나를 마주치게 됩니다. 'Who am I?' 가 아닌, 'Who is I?'도 아닌...

  


< 나는 무엇인가 >


individual의 구성은 in+dividual이며, divide(나누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dividual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은 단어다. individual의 어원은 직역하면 '불가분不可分',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이 말이 오늘날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정착된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에 접어든 후였다. (p10)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진중권의 책 「호모 코레아니쿠스」로부터 읽었던 내용이니까요. 허나,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대로, '개인'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걸 책을 통해 알게 된 건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당연히! 더 이상 나뉘어질 수가 없으니까요. (나뉘어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마니 아무런 쓸모가 없죠.)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개인'에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처럼 '개인'이라는 존재를 '나뉠 수 없는 존재'로 보게 된 것이 서양의 그리스도교적 전통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유일신이었으므로, 그와 마주하려는 개인 또한 분할 불가능하며 일절 감추는 것이 없는 하나뿐인 존재이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1886년에 쓰여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정말로 다시 보여지는 작품인 겁니다. --- 극적 대비를 위하여서는 하이드라는 인물이 (완벽에 가까운 지킬 박사와 대비되는) '악의 화신'이 되었어야 했겠지만, 지킬 박사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의 선천적 본능인 '향락에 빠지기 쉬운 기질'로부터 시작된 하이드란 인물이 왜 반드시! '악의 화신'이어야만 했느냐는 의문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위 설명으로 충분히 접어버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며, 독자는 오히려 놀라게 되죠. 그 당시에 그런 발상 인간은 두 개의 자아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그 두 개의 자아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이며 그로부터 인간의 참기 어려운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 을 했었었다라는 것에 말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이처럼 (인간이 아닌) '개인'을 선천적 본성과 하비투스, 두 개의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된) 부분으로 나누었지만,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책에서 (선천적 본성은 일단 논외로 해놓고) '개인'의 하비투스를 더 잘게 나누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 individual'과 대비되는 개념인) '분인 分人 dividual' 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후 진행되는 이 '분인' 개념의 핵심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다음고 같지 않을까 싶네요.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 이 책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한다. 부정접두사 'in'을 떼어버리고, 인간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분인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애인과의 부인, 부모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취미 동아리의 분인... 그것들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분인은 상대와의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자기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패턴으로서의 인격이다. …… 개인을 정수 整數 '1'이라고 한다면, 분인은 일단 분수라고 떠올려주기 바란다. 나라는 인간은 대인 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pp13-15)

나는 ①분인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②타자와의 만남의 산물이며,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다. 타자가 없다면 나의 다양한 분인도 없고, 요컨대 지금의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흔히 말하는데, 그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자체가 절반은 타자 덕분이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③순수하고 무구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pp127-128)

①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개인에게는 당연!히 여러 개의 얼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바뀜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의 모습 또한 바뀌게 되는 것을 절대 꺼림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는 거지요. 오히려 '어디를 가나 나는 나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나를 타인들에게 성가신 존재로 여기게 만들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절대로 유일무이한 '(분할 불가능한) 개인individual'이 아닌 복수의 '(분할 가능한) 분인dividual'(pp47-48)이며 또한 이어야한다 라는 거지요.


이러한 분인의 숫자는 나이를 먹고 인간관계가 넓어지면서 당연히 늘어가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종다양한 분인의 집합체로 존재(p109)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는 대인관계마다 모두! 그에 해당하는 분인을 만들 수는 없겠지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한 인간안에 존재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는 어느 정도의 분인 숫자를 안고 사는 게 자기 마음이 가장 편한가로 결정(p110)되어지며, 또한 역으로 그 감당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에 맞춰서 실제 사귀는 사람의 숫자로 자연스럽게 조정된다(p1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이러한 분인의 생성은 결코 의도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연기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p48)는 겁니다. 쉽게 말해, A라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에게 A를 상대하는 분인이 자연스레 생성되었던 것이지, 내가 미리 어떤 분인을 만들어/작정해 놓고 A를 만난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 사실 이 부분에서는 동의와 동의할 수 없음이 정확히 절반씩 생겨나더군요. 특정 상대(A)를 대상으로 하는 나의 분인이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A와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그 사람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되면서 A용 분인에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한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될까 걱정되어, (이제는 맞지 않게된) 그 A용 분인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지속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있는데, 이런 경우를 '의도적인 작용'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책에 나와있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논리를 따르자면, 인은 어디까지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A의 모습이 애초에 알았던 것과는 달라졌다면 그 또한 '나'를 대하는 A의 분인이 '나'에 맞춰 조정되었기 때문이라 말해야 하겠습니다만, 이걸 엄밀하게 적용해본다면 결국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겨나게만 되죠.)

③ 인터넷이 우리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가면서, 인간 관계의 범위 또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의 숫자는 일반적으로 그리 크지 않지만, 예를 들어 블로그라는 이 인터넷 상에서는 그 현실과 비교할 때 '엄청난'이라 표현할 수 있는 숫자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게만 됩니다. 저만 해도 --- '가살가죽'이라는 이 블로그의 주인공은 여러분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제 분인일 뿐입니다. 실제로 저를 만나본 분들이 저를 만나보기 이전과 만나본 후, 어떠한 생각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 (저를 실제로 만나본 B라는 사람에게 저에 대한) 그 이미지가 변화되었다라면 그건 제가 제 진짜 모습을 숨기고 블로그 상에 조작된 이미지의 저 자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닌, 블로그 상에서 집단적으로 누군가들을 상대하는 저의 분인과 B와 단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저의 분인이 서로 달라기 때문이라 (이 책의 논리를 따르자면) 말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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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수많은 분인이 '나'라는 한 개인을 구성하고 있다면, 게다가 인터넷의 발전으로 한 개인이 접하게 되는 대인 관계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다면 --- 그 수많은 나의 분인들 중 과연 어떤 분이니 '진정한 나'인가 헷갈리게 되지 않을까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수많은 가면을 바꿔가며 쓰고 있다라는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서 수많은 (일시적인 얼굴인)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내 안에는 그것을 연기하는 '진정한 나'가 숨겨져 있다라는 말인데, 그런 '진정한 나' (따위)는 없다라는 거죠. --- "복숭아는 한가운데 씨가 들어있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확고한 자아(=진정한 나)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 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가 속성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진정한 나'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p61)" 


나의 분인들은 모두 자신의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분인들 모두가 다 '진정한 나'의 모습이라고 히라노 게이치로는 주장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나'라는 건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이며, 우리는 이제까지 그 실체도 없는 환상을 찾아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부추김에 시달려 왔다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제껏 우리가 흔히 들었었었던 "꿈을 가져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를 알아야 한다. 그런 자기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직업이다."라는 직업관은 (차마 책에 이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로 개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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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한 가지의 렌즈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보려는 시도는 일관성 측면에서는 상당히 멋있어 보이는 장점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종종 '굉장히 억지스럽다'라는 인상을 띠게도 된다는 단점도 있지요.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의 성장 과정, 자아 실현으로서의 직업, 사랑과 죽음 등을 모두... 이 '분인' 개념을 통해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분인주의적 연애관'은 자칫하면 결혼 후의 불륜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로 이용되어질 수 있는 여지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p173) --- 이제까지 유지되어오던 현실적 감각이 조금씩 이처럼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는 (그 주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현실성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급격히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이제까지 분인의 개념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다가 죽음의 면에서는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에도 '죽은 자와의 분인'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를 설명하려하다보니 '영혼을 통해 저 세상의 지인과 계속 교신하는 것'이라는 무당스러운 주장까지를 해야했던 게 아닐까하는 의문만 남겨줄 정도로 말이죠.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이가 들수록 죽은 자와의 분인을 갖게 마련이다. 영혼을 통해 저세상의 지인과 계속 교신하는 것은 실은 이따금 그 죽은 자와의 분인으로 살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죽은 후에도 타자의 분인을 통해 이 세상에 살아남는다. (pp192-193)

이와는 달리, 따로 이 부분에 대해 떼어내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녀 교육에 관한 부분이 오히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 학교에서의 내 아이, 혹은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내 아이가 부모 앞에서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는 것에 대해 히라노 게이치로는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 말해줍니다. 부모가 해야할 일은 단지 나의 '아이에게 어떠한 분인 구성이 이상적인가를 고려(p152)'해 주는 것 뿐이라는 거죠. 

 "부모 앞에서와 교사 앞, 아이들끼리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아이 나름대로 전혀 다른 인간과 어떻게 하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지 모색한 결과다. …… 만약 그것을 꾸짖는다면 또다시 무익한 '진정한 나' 찾기로 내몰릴 테고, 현실의 인간관계를 거짓되고 표면적이라고 경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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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깨우는 철학 에세이'라는 출판사의 표현은 좀 오글거리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그렇다고 마냥 술술 읽어내려갈 수만은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한 책입니다. 다만 이 책의 저자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들을 제가 읽었었더라면,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네요. 이 작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作,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변신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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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5-01-2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살펴 읽어 봐야겠네요

가살가죽 2015-01-27 10:16   좋아요 0 | URL
읽고나서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책인듯 싶네요.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52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마도경 옮김 / 더클래식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 classic'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에 대해, 우리는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그 정확한/전체적인 내용은 물론, 그것이 담고 있는 진짜 메세지까지는 거의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는 아마도 - 제가 「돈키호테」를 읽고 가지게 된 생각인 - 우리가 어릴 적에 그것들을 단순한 요약본들로 접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 「지킬 박사와 하이드1」 또한, '지킬 박사가 약을 먹고 악마인 하이드로 변한다'까지는 알고 있었었지만, 대체 그러한 내용이 왜!!! 이 작품을 '고전'이라 불리우게 하는지까지는 (이해해보려 하지도 않았었기에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었지요. (아직까지의 다짐으로는) 올 2015년에는 이러한 (제 안목이 아닌, 출판사들에서 '고전/클래식'이란 타이틀을 붙여놓은) '고전 작품'들을 좀 읽어보겠노라!라는 사뭇 '있어보이고 싶은' 이유로 「위대한 유산」의 다음 독서로 이 책을 골랐었거늘 오...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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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법과 도덕, 그리고 남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욕망을 자제하고 선을 지향하는 삶을 선택할까? (p157) - <작품 해설> 중

길지 않은, 하지만 위에 인용해놓은 역자가 던져주고 있는 의문에 충실한, 상당히 임팩트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는 예상대로 간단해요. 예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지킬 박사라는 사람이 자신이 발명한 약물을 마시고 하이드라는 악인으로 변신한다라는, 그리곤 다시 또 다른 약물을 마시면 원래의 지킬 박사로 되돌아 온다는 지극히 단순한 설정이니까요. (지킬 박사가 - 혹은 작가가 - 자신이 변신한 모습의 이름을 왜 Mr. Hyde라 명명했는지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습니다만, 하이드를 찾으러 다닌 어터슨 변호사의 다음 말, '그자가 하이드(Hide)라면, 나는 시크(Seek)가 되겠다.(pp29-30) If he be Mr. Hyde, I shall be Mr. Seek.(영문판 p26)'로 미루어 보아, '숨겨진 모습'이라는 의미에서 hide란 단어를 선택했고, 그와 동음인 Hyde라는 단어로 이름을 삼은 것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우리가 이 작품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혹은 끄집어내야 하는 메세지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감상문을 적어내기 위해선 줄이고 줄여야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도 말해야 할 정도니까요. 자... 그렇다면 위 질문에 대한 독자의 대답은, 이 작품을 읽기 이전과 다 읽고 났을 때 과연 어떻게/혹은 달라지게 될까요?


가면의 고통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명석한 두뇌를 지녔던 지킬 박사는 의학박사이며 민법학 박사, 법학 박사에 왕립 학사원 회원(p23)이라는 명예까지도 지니고 있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단!!! 그는 선천적으로 향락에 쉽게 빠지는 기질의 소유자였죠. 하지만 그, 지킬 박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부와 명예로 인해 그러한 자신의 기질을 숨기며 살아와야 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선천적 기질이란 걸 숨길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던 그는 결국 분별을 가릴 줄 아는 나이에 이르러 주위를 의식하고 출세와 사회적 지위를 따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중생활에 깊이 빠져(p123) 버리고 맙니다.  


세상에는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방탕한 행위들을 오히려 떠벌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설정한 높은 기준 때문에 그런 행위를 거의 병적이라 할 정도의 수치심을 가지고 보았고 또 숨겨 왔다. …… 내가 지금의 이 모습이 된 것은 특별한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이처럼 높은 지위를 열망하는 나의 본성 때문이다. (p123)

「호모 코레아니쿠스」라는 책에서 저자 진중권은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으며, 그 구성된 층위를 '하비투스(habitus)'라 부른다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선천적인 본성후천적으로 습득된 하비투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근대 사회로 접어들며 '인간'이라는 용어 대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in+dividual)"를 의미하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가, 현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이 근대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되어 왔다라고도 했지요. 


188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해체되기 이전의 '개인' 즉, 본성과 하비투스의 결합체인 한 인간을 '개인'이라는 불가분의 존재로 간주하던 시기에 쓰여진, 그렇게 불가분의 존재이어야만 했던 '개인'에게 생길 수 있는 내적 갈등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꼬집어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 자신의 개인적 갈등 - 본성과 하비투스 사이의 괴리 - 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지킬 박사는 '인간2은 실제로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자아로 이루어진 존재(p123)'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요. (소설 속에서 그는 이것을 '진리'라고 표현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무려! 1886년에 말이죠.) 더 나아가 그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요소들이 이렇게 한 다발로 묶여 있는 것은 인류에게 재앙이 아닐 수 없다(p125)'라 생각하고 '만약 이 요소가 별개의 두 실체에 들어가 각각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인생의 모든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p125)'고 결론짓게 되지요.  


나는 무미건조한 학문 생활의 지겨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가끔씩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쾌락을 즐긴다는 것은 아주 관대하게 봐도 점잖지 못한 짓이었다.(p131) …… (하지만) 한 잔의 약을 마시기만 하면 나는 즉시 유명한 교수의 몸에서 벗어나 두꺼운 망토를 껴입듯이 에드워드 하이드의 몸으로 바뀔 수 있었다.(p132)

이 짜릿!한 두 개의 문장은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존재했었던, 그리고 실제로 시현되기도 했었던 것들이지요. 현직 지검장이 그 '점잖지 못한 짓'들을, 돈만 내면 얼마든지 사서 마실 수 있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하이드로 변신했었으니까요. 단!!! 지킬 박사의 하이드(Hyde)에게는 자신을 완벽하게 숨길(hide)수 있는 망토가 있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라는 차이점만이 있을 뿐이었었죠. ('인간은 두 개의 자아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그 두 개의 자아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이며 그로부터 인간의 참기 어려운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지킬 박사의 논리대로라면 모 지검장의 경우, 그의 행위만으로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것은 사실 온당치 않다 말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는 그저 그의 본성을 이겨내지 못했었을 뿐이니까요. 그럼 그렇다고 과연... 그에게 그 본성의 분출을 단지 숨기지(hide) 못했다는 죄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가 했다는 행위를 그 혼자 있는 장소에서 했었다면 그건 죄가 되지 않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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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본성과 제가 습득한 하비투스 사이에 아무런 괴리/충돌이 없다라고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마도... 그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것이기도 할 것 같지요. 다만! 스스로 설정한 기준 - 그것의 높낮이를 떠나 - 에 지극히 충실하게 살아왔노라고, 그러해왔기에 (이것이 지킬 박사의 표현처럼 '인생의 모든 참기 어려운 고통'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괴리/충돌로부터의 '고통'을 최소한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으며 살아올 수 있었노라까지는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모 지검장처럼 그 고통 해소의 현장이 타인의 시선에 확인되는 불상사만 없었을 뿐, 저 스스로도 겉으로 드러내놓았던 적이 적잖이 있었었을지도요. --;;)


물론! 약간씩의 일탈들이 그러한 고통을 잠시나마 가라앉혀주었기도, 혹은 그 분출을 뒤로 미루어주기도 했었었겠지요. 그러한 일탈들이 기껏해야 술마시며 지하 술집에 갔던 것들이었을 때엔, 그로 인해 제가 '안으로는 난폭한 흥분, 무질서한 관능의 환상이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줄기처럼 분출했다. 의무의 구속은 소멸되고, 뭔지 모르겠지만 순수하지 못한 영혼의 자유(pp127-128)'까지를 느꼈었던 건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 사실 이런 상황, 그러니까 일탈에의 유혹을 심각하게 받는 경우 가장 마약스러운 꼬득임은 다름 아닌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걸겁니다. 우리는 정말... 이 '한 번 사는 인생'을 굳이 이처럼 나의 타고난 본성을 꽉꽉 눌러가며 후천적으로 습득된 하비투스에 맞춰서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② 자발적 선택

옛날에도 사람들은 자객을 고용하여 죄를 저지르게 하고, 본인의 몸과 명성은 안전하게 보호했다. 하지만 쾌락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대중 앞에서는 품위 유지의 책임이라는 짐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다가 잠시 후 학생처럼 이런 빌린 옷을 벗어 버리고 자유의 바다로 뛰어든 사람도 내가 처음이었다. (p133)

학부 시절, 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오는 지하철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삐리도 안할 것 같은 유치한 장난을 하며 신촌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뭐, '군복 입으면 개 된다'라는 말을 몸소 시현해보고팠던 건 결코 아니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군복을 입고 나니 'OO대학교 OO학과 학생'이라는 나/우리들 스스로의, 그리고 타인들이 바라보아주는 시선 속 하비투스를 우리들 모두가 너무도 자연스레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짜 '나/우리들'은 그 지하철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않는다라 생각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걸 자랑스레 말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의 우리들이 벗어던질 수 있었던 하비투스는 그저 남에게 심한 폐는 끼치지 않는, 하지만 평상복에 가방을 메고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하지 않을 그런 장난스런 행동들 몇 개를 했었던 것 뿐이었던 거지요. 왜... 그래야 했던/그럴 수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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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의 인생 중 10분의 9는 노력과 미덕, 자제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악의 본성이 활동하거나 사용되는 일은 훨씬 적었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하이드가 헨리 지킬보다 훨씬 작고 홀쭉하며 젊었다고 생각된다. (p129) …… (그러나) 내 힘으로 불러낼 수 있는 사악한 부분은 최근에 활동을 많이 한 탓인지 발육이 좋아졌다. (p138)

행복... 했었을겁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때까지 최소한 저의 삶은 행복했었었구요. 그러하다보니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건, 혹은 스트레스로부터 파생된 것이건 당시의 저에게는 - 그리고 제 친구들에게도 아마 - 분출하고 싶었던 욕망이란 게, 끄집어내 보이고 싶었던 악마성이란 게 아주 작게만 있었던 걸겁니다. 평소의 모습을 군복이라는 망토로 가려냈다 한들, 굳이 '커다란 변신'이 필요하지는 않았었던 거란 거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살아가는 반경이 넓어질수록, 얽히게 되는 인간관계가 많아질수록, 그러다보니 제 눈이 보이는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 이게 제 본성의 뒤늦은 깨어남인건지 아니면 쌓여가는 스트레스로 인한 것인지 암튼!!! 분출하고 싶은 욕망이란 것도, 끄집어내 보이고 싶은 악마성이란 것도 점점 더 커져만 가더군요. 물론! 아직까지는 잘 참아내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잘 참아내고 있기에 그 탄성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도 할 정도입니다. 본성을 억누르고, 커져가는 악마성을 끝내 꾹꾹 눌러내다보니 오히려... 사람이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드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만약 이 상태가 더 지속된다면 본성의 균형이 깨져 …… 결국 에드워드 하이드의 성격이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성격으로 굳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p138)'이 아닌, 그 최소한의 (욕망이 아닌 울분의) 분출인 '눈물'까지도 저에게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아닌 걱정을 하게도 되는 요즈음의 저의 모습을 보노라니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 지검장의 경우, 그에게는 한 인간으로서는 견디어내기 힘들만큼 커다란 본성이 있었을 수도, 혹은 하비투스조차 이겨낼 수 없는 스트레스의 축적이 있었을 지 모른다라는 변명을 해줄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행동이 권장되어진다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야할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동정정도는 받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라는 거지요. 좀 과하게 나아가본다면 --- 「위대한 유산」을 읽고 제가 가졌었던, '오로지 나만 그런 건 아니었었어!'라는 심리적 도피가 주는 위로를 그 지검장에게도 '당신만 그런 건 아니에요!'로 바꾸어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어쨌든!


 

 

지킬 박사의 하이드가 되겠다는 선택도, 또한 저의 요즈음과 같은 움츠러듬도 모두... 분명 각자의 자발적인 선택3이었다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겁니다. 다만!!!


죄책감이 점점 누그러지면서 환희의 기분이 이어졌다. ……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살인범이 하이드였다라는 증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기뻐했던 것 같다. 처형의 공포 때문에 선한 쪽의 자아를 유지하려는 나의 의지가 더 강해지고 보호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킬은 이제 나의 은신처가 되었다. (p144) 

하이드가 되고 싶다는 지킬 박사의 그 자발적 선택은 이처럼 외부로부터의 압력인 '공포심'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그 종지부의 시현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을 띨 수밖엔 없었었지만!!! 저의 자발적인 선택은 여전히 저의 또 다른 자발적 선택으로 되돌려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이 다른 것이겠지요.


……………………………………………………


얼핏 생각하기에, 이 책을 읽고 나면 …… 유혹을 참으면 명성은 쌓일테지만 재미와 쾌락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이 불가피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악행과 타락을 일삼으면 궁극적으로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맥 빠진 결론밖에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p160)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결국 뻔하디 뻔한 교훈적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것을 끝맺음을 하였기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노라 적었었거늘, 이 작품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주제 또한 역자의 표현처럼 '맥빠진 결론'만을 남겨주는 것일까요? --- 절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입니다. 작가는 왜? 이 이야기를 'Strange Case'라 표현했었을까요? --- 하이드가 될 것이냐, 아니면 하이드를 버릴 것이냐의 선택에서 지킬 박사의 선택은 하이드가 되겠다라는 것이었었고, 그것은 분명!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었지요. 저의 심한 오해/오역이라는 말을 듣게된다 하더라도, 여기서 전... 지킬 박사의 하이드가 되고싶다/되겠다라는 선택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인 것이며, 단지!!! 그 스스로 그 욕망에 지나치게 탐닉했었다라는 것과 더 중요하게는! 그 종지부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내었다라는 것이 결국 'Strange Case'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만 됩니다. 즉!!!


우리가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된, 어쩌면 우리의 타고난 본성보다 더 강하게 일상의 우리를 제어하고 있는 하비투스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닉과 파멸로 우리의 삶이 끝맺음지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도와주는, 본성의 적이 아닌 본성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반면 그 둘간의 관계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었던 소설 속 주인공인 지킬 박사의 경우엔 하비투스의 조력을 끝내 그의 본성이 아예 물리쳐 사라지게 해버린 것이었구요. (이처럼 작가가 자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내는 작품으로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저의 해석이 옳다는 가정을 필요로 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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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법과 도덕, 그리고 남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욕망을 자제하고 선을 지향하는 삶을 선택할까? (p157) - <작품 해설> 중

자 이제...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을 써야겠네요. 우리의 삶이, 또 그런 우리들의 집합체인 이 세상의 흘러감이 지금과 같을 수 있는 이유는 --- 결코 'Strange Case'가 아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평범하게 이제까지 제가 살아왔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 좋게 말하자면 제가 습득한 하비투스의 조력이 저의 본성을 잘 인도해줄 수 있을만큼 훌륭하다라는 것이고,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보자면 저의 본성이 이겨내기엔 이미! 제 몸에 체화되어 있는 하비투스의 힘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역자가 건네주고 있는 위의 질문 중, '……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의 상황은 최소한 저에게는, 그리고 아마도 99%의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예 성립조차 될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물론!!!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1%가 꼭... '경제적인 수준'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기에 이 세상엔, 선과 악의 혼합체가 아닌 '모든 인류의 속성 중에서 순전히 악으로만 구성된 존재(p130)'인 하이드와 같은 인물이 1%정도는 실제로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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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집어들었던 책이었거늘, 이토록 짧고 간단한 이야기 속에 이렇게나 커다란 메세지가 담겨 있어서 놀라웠으며 이 작품의 작가가, 예의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읽었던 요약본을 통해 왠지 알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보물섬」의 작가이기도 하다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랐었습니다...만!!! 더더욱 놀라웠던 건, 한글판과 영문판이 함께 있는, 독특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이 책들이 (홈쇼핑스러운 표현을 빌자면) 단돈!4 3,960원이라는 사실이었었지요. 이 출판사에서 나온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중 총 세 권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만과 편견」, 「지킬박사와 하이드」 - 을 읽어보았는데, 번역도 (일반적으로 읽어내기엔) 깔끔하고 영문판이 함께 있어 혹 미심쩍은/궁금한 부분이 있더라도 원문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라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값이 싸서!!! 참 좋더군요. 다른 출판사들 책은... 대체 왜 그리 비싼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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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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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의 경험일... 까요? 중학생이 되고나니 국민학교 때 배웠던 것들이 시시해보였고, 심지어는 국민학교 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은 이런 거 아실까?라는, 지극히 유치한 건방져짐을 한번쯤 가져보았었던 것이, 그리고 그 건방져짐은 이후 고등학생 - 대학생 - 대학원생이 되어감에 따라 그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훨씬 더 커다란 격차로 존재했어 왔기도 하다... 라는 거 말이죠.


이처럼 거쳐야할 순서가 정해져 있는 개인의 history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 단계의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여지고 심지어는 잊혀져가기도 하거늘​!!! --- 우리나라에 로또가 처음 나왔을 때의 지하철 광고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읽고 있던 사람(배우 송강호)이 '인생 역전'의 로또에 당첨되어, 멋진 리조트에 누워 영자 신문을 읽고 있는 사진이었죠. 만원 지하철이라는 장소가 외국의 멋진 리조트로 바뀌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라 생각하지만, 로또 당첨이라는 '돈'이 그에게 영어실력까지를 가져다줄리 만무하거늘 - 물론! 그 돈으로 비싼 과외선생을 붙여 배웠을 수 있겠으나, 시간적 gap을 생각한다면. - 그 광고는 우리의 무의식에 '돈이 많아지게되면 나의 능력과 사회적 신분 모두! 다 즉각 자동적으로 수직상승하게 된다'라는 메세지를 은연중에 심어주었었으며, 그 결과 심어지게 되는 자신의 과거를 잊게 혹은 의식적으로 지워버리게 만들어주는 이런 환상... 이란 게 과연 대한민국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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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어릴적에 다 돌아가셨고, 못된 누나에 의해 길러진1, 다행히 매형이라도 좋은 사람이어 그럭저럭 살아온, 딱히 똑똑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그런 소년이었죠. 어느 날 핍은 미스 해비셤이라는 이름의, 엄청나게 부자인, 헌데 성격이나 사는 모습이 정상은 아닌, Miss이긴 하나 나이는 할머니급인 사람의 집으로 어찌어찌하여 (불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에스텔러라는 여자애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 눈에 반하게 되었지만, 곱게 자란 티가 확연한 그녀에 비해 자신의 꼬라지가 형편없다는 걸, 그 뿐 아니라 심지어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마저도 다르다라는 것으로 대변되는, 한마디로 이건 뭔가 차이가 나도 엄청나게 크게, 엄청나게 넓은 범위에서 난다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전체적으로 볼 때 내가 비천하고 불량한 존재라는 사실 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p122) 

"나는 온통 마음이 떨리는 가운데 그녀를 옷자락 끝까지 숭배하며 걸었던 반면, 그녀는 아주 차분한 가운데 나를 내 옷자락 끝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으며 걸었다."(p434)


일주일에 한번씩, 그렇게 계속 미스 해비셤의 집에 가서 에스텔러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핍의 이러한 생각, 즉 '그녀와 난 다르다'라는 열등의식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 그의 매형인 조 가저리는 대장장이였었고, 핍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핍이 매형인 조의 도제가 되어 대장장이가 될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었거늘, (아직은 '돈'의 차원으로까지는 인식하지는 않았으나) 뭔가 자신의 현실/인생과 에스텔러의 그것 사이에는 둘을 엮어낼 수 없게 작동하고 있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깨달아가는 그는 급.기.야!!!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내 작은 침실로 올라왔을 때 내 기분이 정말로 비참했으며 내가 조의 직업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걸 좋아했지만 이젠 과거의 일이었다. (p196) …… 내 장래의 전망과 바람부는 습지 풍경을 비교하여, 둘 다 얼마나 평평하고 낮은가, 그리고 둘 다 참으로 무명의 길과 어두운 안개와 바다만이 이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둘 사이의 비슷한 점을 찾아내곤 했다. …… 내 도제 생활과 관련하여 뭔가 좋게 여길 만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순박하고 만족하며 사는 조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갈망과 불만에 가득 차서 들떠 있기만 했던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잘 알고 있다.(pp198-199)

​자신과 에스텔러 사이에 존재하는 신분의 벽 - 이 신분의 차이라는 것이 왕족과 평민같은, 극복해내기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 이 너무도 높고 두껍다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핍은 꿈은! 꿔봅니다. '신사2'가 되어 그녀와 사랑을 현실로 만들게 되는 순간을 말이죠. ​하지만 핍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결코 '신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에스텔러와의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다라는 걸요.

 

​여름날 오후는 부드럽게 잦아들머 여름날 저녁으로 이어졌고,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의 생활이 …… 결국, 나에게, 훨씬 더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이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만약 내가 에스텔러는 비롯해 다른 모든 기억과 공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해야 되는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하며 그것에서 최대한의 보람을 찾을 결심으로 일터에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주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p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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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에 이은 자위로 어찌어찌 그러한 심적 갈등을 이겨내 가고 있던 어느 날... Boom!!! --- 자신의 현실과 바램 사이에서 이렇게 갈등하고 있던 핍이 말입니다!!! 난데 없이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버린겁니다. 아직은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누군가'가 핍에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유산을 남겨주었으며, 비록 그 유산의 상속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그 이전까지 핍은 당장 런던으로 가 신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며, 생활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 또한 그 '누군가'가 전부 후원할 것이라는...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로또 1등'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이제 핍은 그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신사'... 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 눈을 들어 올려다보았던 바로 그 별들조차, 그동안 내가 속해서 살아왔던 시골의 그 촌스러운 대상들을 비추어주는 하찮고 미천한 종류의 별들에 불과하다고 여겼다.3 (p267) …… 비디와 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다정하게 한 다음 내 침실로 올라갔다. 내 작은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의자에 앉아, 방을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이제 곧 높은 신분이 되어 내가 영원히 떠나가게 될, 보잘것없는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배어 있는 방이기도 했으므로, 바로 그 순간조차 나는 그 방과 앞으로 내가 가게 될 더 좋은 방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의 갈등을 느꼈다. (p269) …… 나에게 찬란한 행운이 찾아온 첫날 밤이 내가 일찍이 경험해 본 가장 외로운 밤이라는 것이 참으로 슬프고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침대는 이제 불편하게 느껴졌고, 다시는 거기서 예전처럼 달고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p270)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은 현재의 나와 출발하는 날 사이에 엿새라는 날짜가 끼어 있다는 생각이었다.4 (p271)

국민윤리 교과서라면 이러한 핍의 심정적 변화, 그러니까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정하게 되는 이 심리... 를 꾸짖는 투의 이야기를 바로 이 뒤에 붙여놓겠지만 전, 그리고 어쩌면/아마도 당신!도 또한 이런 핍의 심정적 변화를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노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전... '충분히 이럴 수 있다'라는, 핍을 위한 변명을 해주게만 됩니다. 심지어! '잘 있거라, 내 어린 시절의 지루한 친구들이여. 이제부터 나는 런던에 가서 훌륭한 신분이 될 몸이시다. 대장간의 막일이나 너희들하고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귀한 몸이시라 이 말씀이다!(p273)'과 같은, 좀 과하다 싶은 핍 혼자서의 외침까지도, 이것이야말로 꾸밈없이 표현해 낸,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냐라는 이유를 붙여주게도 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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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를 사는 심리가, '꼭 1등에 당첨되고 싶다!'라는 바램이라기보다는 '1등에 당첨된다면?'이라는 기대때문이라면, (전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로또 구입은 월요일에 하는 것의 그의 행복함을 극대화시켜줄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더군요. --- 핍의 손에 쥐어진 로또는 1등에의 기대가 아니라 1등 당첨이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허나... 그 지급기일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라는, 즉! 당첨금이 손에 쥐어지는 것은 확실하나 그것이 언제 쥐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이상한 점이 있었었던 거지요. 이처럼 당첨이 확실한 1등의 로또를 손에 쥔 핍은, 마치 그것을 월요일에 손에 넣은 것처럼 이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곤/그런데 그 행복은 이내 곧 방탕이 되고 말지요.

 

핍에게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겠노라 했던 그 '누군가'의 대리인인 재거스 변호사가 맨 처음, 핍에게 그가 결국엔 '틀림없이 어떻게든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p311)'것이라 말했었던 것처럼, 예의 핍은 런던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얼마 후부터 이내 '낭비하는 습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몇 달 전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생각했을 돈을 쉽게 써 대기 시작(p373)'하게 됩니다. 이처럼!!!


1861년에 발표된 이 작품 「위대한 유산」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현재의 대한민국 신문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걸 차마 '보편적'이라 말해야하는 건지 고민하게되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라 말하고 싶어지는, 그런 인간의 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제발! 이 시점에서 핍의 변화를 가리켜 '이러면 안된다'류의 교훈을 떠올리지는 말죠. 그저... '타인에게 충고를 할 수는 있어도, 나 스스로 그 충고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류의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게, 최소한 이 작품을 읽고난 지금의 시점에서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로또 1등 당첨자들의 삶이 모두 피폐해진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분명! 그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의 비율의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높다라는 사실은, 그러한 피폐해짐이 '개인적 특성'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닌, 그냥... '보편적'이라고 말하고만 싶어지는 그런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인' 한 측면을 충분히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그런 '인간적인 면' - 이 표현을 일반적 사용법과 같은 긍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인간'이니까 그럴/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의 '인간적인', 즉 긍정/부정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의미로 읽어주시길. - 이 이 작품 「위대한 유산」에도 담겨져 있기에, 사람들이 이들을 '고전 classic'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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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전혀 예상밖의 인물이 그 '누군가'였었다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에 핍은 충격을 받게 되고, 핍을 향한 그 '누군가'의 'Great Expectations5'는 결국 (이 책의 한국말 제목의 의미이건, 혹은 제가 생각하는 의미이건 그 어떤 의미로 보아도) 실현되지 않게 되지요. 게다가 핍의 사랑(들)마저 모두 박살이 나고 맙니다. (제가 이 작품의 핵심 문구로 꼽고 있는) '가련한 환상'이 모두 사라지고 깨져버리게 되는 거지요. 이 시점에서, 회상조의 어투로 쓰여져 있는 이 작품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읽어보게 되는 다음의 핍의 후회어린 독백으로부터, 저 스스로도 그리고 어쩌면/아마도 당신도 또한! 언젠가는 한 번쯤 해보았던 후회였노라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상당한 수준의 심정적 동조를 느끼게 되더군요. (물론, 다음의 문장은 핍의 경우처럼 부정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매우 긍정적으로도 읽혀질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기도 하겠지요.) 한 마디로 말해 --- 그 어떤 상황/생각들에서도 저는 (그리고 어쩌면/아마도 당신도 또한!) '오로지 나만 그런 건 아니었었어!'라는, 심리적 도피가 주는 안정감을 받을 수/받아도 된... 다라는 걸 확인했다라는 겁니다. (초반에 언급했던 그런 '환상'이란 것 또한 결코! 2015년의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날은 나에게 잊지 못할 중대한 날이었다. 그날을 나에게 커다른 변화를 일으킨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의 인생이든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에서 어느 선택된 하루가 빠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인생의 진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그대 독자여,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라. 철과 금, 가시와 꽃으로 된, 현재의 그 긴 쇠사슬이 당신에게 결코 묶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잊지 못할 중대한 날에 그 첫 고리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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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텔러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매형 조 가저리의 헌신적 사랑, 허버트와 핍 사이의 담백한 우정... 등을 이 작품의 포인트로 집어낼 수도 있을겁니다. 이와 더불어 펌블추크 씨나 미스 해비셤의 친척들로 대변되는 기회주의적 인간상들, 그도 아니면 예상치 못했던 정체와 가족사를 지니고 있는 그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의도를 이해하려는 노력 등등, 이 작품은 그야말로 정말로 다양한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도 있기도 하지만, 앞서 제가 말한바 대로, 핍이 가지게 되는 '가련한 환상'의 시작과 마지막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싶네요. 단! 저처럼 핍의 심정/행동 변화에 우호적(?)일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르겠지만 말이죠.


마지막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 재거스 변호사와 그의 사무장 웨믹이 보여주었던 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① pp294-299에 걸쳐 있는, 에스텔러의 출생의 비밀에 관해 답변하는 장면에서 보여지고 있는 재거스 변호사의 화법은 너무나도 능숙한, 하지만 결국엔 모든 걸 다 보여주기도 하는 완벽한 자기 방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② 실제로 나도 한 번 이렇게 해봤으면 좋겠어!라는 마음까지 들게 해주었던, pp 366-368에 걸쳐 있는 웨믹의 특별 행사 장면과 그의 능청스런 독백들은 이 작품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지요. 하지... 만!!!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찰스 디킨스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한 신문의 판매가 저조해지자 그 인기 만회를 위해 연재하기 시작했던 소설이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작가는 자신의 이 작품이 250여년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읽혀지게 될 꺼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 '읽(어내)는 재미'가 딱히 풍부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다가 201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해낼 수 없는 지극히 영국적인 장면들의 삽입 등은 이 작품의 매력을 많이 반감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얻어내는/낼 수 있는 교훈에 비해 이 작품의 분량은 너~무 길다라는 점이, 더 결정적!!!으론 로또보다는 결국 '자신의 노력이야말로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뻔하디 뻔한 결론으로 이야기가 끝맺음된다라는 것이, 이번에도/아직은 저에게 2015년 들어 멋진 독서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네요. (이 슬럼프를 어찌 끊어내야 할지... --;;)

아! 빼놓지 말고 지적하고 싶은 또 한 가지 --- 책 표지에 사용된, 아마도 영화 속 한 장면인듯한, 핍과 에스텔러라 생각되는 저 사진은 정말... 쌩뚱맞네요. --;; 




  1. 내 생각에 누나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출산 담당 경찰에게 체포된 뒤 그녀의 손에 넘겨진 소년 범죄자라는, 그래서 법의 위엄을 유린한 죄과에 합당하게 취급받아야 하는 그런 존재라는 막연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치 내가 이성과 신앙과 도덕이 명령하는 것을 거역한 채, 세상에 태어나기를 고집한 죄인인 것처럼 누나에게 취급당했다.(p45)
  2. 신사라는 개념은 귀족계급의 자질에 중산계급의 덕목을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서 적당한 교육을 받고 세련된 교양과 예의범절을 갖췄으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존경할 만한 도덕성과 인격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 p435, <작품 해설> 중
  3. 이륙하려는 비행기를 되돌리게 한 그녀에게도 아마... 이런 류의 생각이 있었지 않을까 싶네요.
  4. 차마... 그 엿새마저도 기다릴 수 없다라는 의미겠지요?
  5.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인 <Great Expectations>이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된 이유를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제 생각엔 이 'expectations'의 주체는 바로! 핍에서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려했던 그 '누군가'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데 'expectations'라는 단어에 '유산'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한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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