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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난 오래 전부터 밤마다 당신이 나타나는 악몽을 꾸었어. 당신이 내 삶을 망가뜨린 그 날부터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p96)
눈을 떠보니 낯선 장소, 그것도 어느 지하실의 철창 속이고, 나를 그곳에 가두어 둔 여인은 다름아닌 어젯 밤 처음 만나 술 한잔 같이 걸쳤던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입에서 위와 같은 증오 어린 말을 듣게 된다면? ---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형사 브누이는 퇴근길, 길에 정차해 있던 고장난 차를 발견하고는 그 차주가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이라는 이유로 좀 도와 주는 척 하다가 수작을 부렸고 에 또... 암튼 그의 타고난 바람기는 결국 그녀의 집으로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으며 결국엔 약을 탄 술을 마시곤 다음 날 아침, 느닷없이 지하실에 있는 철창 속에서 깨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근데 더 큰 문제는!!!
리디아라는 이름의 그녀가 다짜고자 자신을 향해 "당신이 오렐라이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어. …… 넌 살인자야! 악질적인 살인마지! 미성년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추악한 인간이지!(pp124-125)"라 외친다라는 거였죠. 하지만 브누이 경감 또한 이에 지지않고 맞섭니다. "당신은 단단히 미친 여자야. 난 오렐리아가 누군지도 몰라. 평생 단 한 번도 강간같은 건 하지 않았어.(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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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만의 한 분야라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암튼) 한 분야인 <게임이론>을 처음 배울 때 만나게 되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용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죠. --- 길동이와 꺽정이가 어떤 범죄의 공범 용의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이 둘을 각기 다른 방에서 따로 취조하면서 경찰은 다음과 같은 오퍼를 합니다. : 만약 너희 둘이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면 증거가 없는 우리로서는 너희를 풀어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둘 다 자백을 하면 정상참작을 해 각 2년씩의 감옥살이만 시키겠다. 근데, 만약 한 놈은 자백을 하고, 한 놈은 끝까지 부인하다면 자백한 놈은 1년만, 부인한 놈은 괘씸죄로 3년의 감옥살이를 시키겠다. 이를 표로 만들어보면, .
| 꺽정이가 자백했을 때 | 꺽정이가 끝까지 부인했을 때 |
길동이가 자백을 했을 때 | -2,-2 | -1,-3 |
길동이가 끝까지 부인했을 때 | -3.-1 | 0,0 |
길동이의 입장을 먼저 보죠. --- 최고의 결과는 길동이와 꺽정이가 끝까지 의리를 지켜 둘 다 범행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명 모두 곧장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0,0) 헌데 만약에, 길동이는 의리를 지켜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거늘, 꺽정이 녀석이 배신이건 마음이 약해서건 어떤 이유로 만약 범행 사실을 털어놓기라도 한다면, 졸지에 길동이만 미운털이 박혀 3년의 최고형을 받게 되는 겁니다.(-3,-1) 하지만 길동이가 (꺽정이의 행동과 관계 없이) 무조건 자백을 해버리면! : 꺽정이가 의리를 지켜 끝까지 부인했다면 차선인 1년형을(-1,-3), 꺽정이도 자백을 했다해도 법정 최고형은 면한 2년의 형(-2,-2)을 선고 받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추론은 꺽정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고 그 결과!!! --- 길동이와 꺽정이는 둘 다 끝까지 범행 사실을 부인하면 곧장 석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둘 다 자백을 하여 각각 2년의 옥살이를 하게 되는, 둘 다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둘 다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게 바로 이 '용의자의 딜레마'의 결론입니다. 아니... 소설 한 권 읽고 쓰는 감상문에 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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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임을 하자는 거요?", "당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임이죠."(p16)
'프랑스 심리 스릴러의 아이콘(p351)'이라 불리운다는 작가 카린 지에벨을 처음 알게 해준 이 작품 「너는 모른다」의 전체적인 구도는 바로 위와 같은 '딜레마의 연속' 혹은 '여러 딜레마의 등장'을 띠고 있습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브누이 경감에게 리디아는 "당신은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 있어요. ……최대한 오래도록 당신을 그 안에 가두고 지켜볼 생각이에요. 물론 당신에게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겠죠(p36)"라는 대답만을 해줍니다. 브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쳐 환장할 노릇인거죠.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오직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라는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리디아는 결국 브누이에게 왜 그가 철창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줍니다. 자신의 쌍동이 자매인 오렐리아를 브누이가 15년전에 강간하고 살해했다라는 겁니다. 브누이는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며 펄쩍 뛰었고, 이후의 육체적·정신적 고문에도 끝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지요. 여기서 이 소설에 담겨 있는 첫 번째 게임이 나옵니다.
① 리디아는 브누이가 이 지하실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어서 빨리 자신에게 자백하고, "오렐라이를 살해하고 묻은 장소를 실토하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죽도록 해(p162)"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브누이 또한 알고 있었죠. "거짓으로라도 오렐리아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p150)"걸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브누이는 이후 (죽음보다는 나은 선택으로서) 리디아의 무자비한 육체적·정신적 고문들을 당하게 됩니다.
② 리디아 입장에서도 고민은 있습니다. 비록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당신이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뿐이야.(p83)"라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오렐라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브누이로부터 알아내는 것이지, 브누이의 목숨이나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니었었죠. 즉, 리디아 입장에서는 브누이가 죽어버리면 자신이 원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브누이를 극한까지 고문하는 선택권은 쥐고 있어도, 죽여버리는 선택권까지는 원하지 않는 이 상황을 그녀/작가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p197)"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이렇게만 보면, 자신이 (그것이 거짓이건 진심이건에 상관없이) 자백을 하는 순간 죽게 될 것이라는 브누이의 예상/패는 정확했습니다...만!!! 그 선택의 대가로 그가 받아야 했던 이후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너무도 처절했었었지요. 여기서 하나!!!
<게임이론>은 두 플레이어(길동이와 꺽정)가 과거와 현재, 심지어 미래에 대한 완벽한 정보까지를 모두 가지고/알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즉, 내가 A라는 선택을 하면(A) 너는 B를 선택할 것이고(B), 이 사실을 너 또한 알고 있으며(B'), 나는 또한 A-B-B'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 서로의 '알고 있음'은 이후로도 무한히 유지된다는 (약간은 비현실적인) 상황이지요.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누이에게 철창 밖 리디아를 잡아 목을 조르고 있는, 그러니까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브누이는 리디아에게 철창 열쇠를 내놓으라 말했지만, 당시 리디아의 몸에는 열쇠가 없었었지요. 즉! 그 순간, 브누이가 열쇠가 없는 리디아를 죽여버린다면 자신 또한 그 철장 밖으로 나갈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마는겁니다. 그 생각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리디아는 브누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브누이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더욱 처참하고 가혹한 고문을 리디아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렇게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란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하지만, (여차저차한 이야기의 전개 뒤에) 결국 브누이는 자신이 오렐리아를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자백을 하고 말지요.
이후의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문득!!! --- 브누이가 리디아의 목을 조르고 있던 그 상황에서 만약 자신이 철창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죽였더라면, 그러니까 자신의 탈출 가능성마저 포기하는 대가로 이후 자신에게 가해질 극악한 고문을 면하려 했었다면 과연 이 소설은 어떻게 흘러갔었을까하는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보게 되지요. 헌데 말입니다...
이 소설을 쭉 읽어가다보면, 작가가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데 정말로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상황을 아~주 야금야금 진행시켜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 벌어지는 (약간은 짜장스럽게 생겨났던) 돌발상황 이후 결국! 위의 '과연 이 소설은 어떻게 흘러갔었을까하는 의문'에 대한 결말까지를 기어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독자를 향해 작가가 (마치,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두 플레이어는 그 게임의 시작에서 각자의 전략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게임의 결말에 대해선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지적 관점의 인물은 그 결말까지를 모두 알고, 그 두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지켜보고 있는 식의)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너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니가 무슨 생각/예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라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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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는 브누이 경감은 상황의 진행에서 내내 리디아와의 심리 게임을 벌입니다. 리디아에게 때로는 저자세로, 때로는 '너무 고분고분 온순하게 굴면 가지고 노는 게 재미없다며 죽일 수도 있을(p65)'지 모른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지요. 결과적으로 브누이 경감의 전략을 성공을 하게 되나, 상황 자체가 성공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이게 뭔 말인가 싶겠지만, 이 소설의 재미가 바로 이 점에 있기에 그걸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암튼!
브누이 경감과 리디아의 게임은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되며, 이로 인해 리디아에게는 새로운 딜레마가 생겨나게 되지요. --- "브누아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하지만 그를 내보내면 나는 즉시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끌려가야 하겠지. …… 브누아를 살려야 할까? 아니면 나를?(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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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딜레마'에서 길동이와 꺽정이에게 가장 좋은 결과는 물론 둘 다 끝까지 범행을 부인해 (0,0)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게임의 디자이너는 그 둘의 최종 선택이 (-2,-2)가 될 수 밖에 없도록 게임을 설계해 놓았습니다. --- 이 소설에도 리디아와 브누아의 게임이 분명! (0,0)이라는 최상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국엔! (-2,-2)도 아닌, (-1,-3) 혹은 (-3,-1)이라는 비합리적인 선택이 도출될 수 밖에 없도록 설계해 놓은 한 사람의 게임 디자이너가 숨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작가는 (위에서 언급했던 짜장스럽게 생겨난) 돌발적인 어떤 상황을 동원해 결국... 이 게임이 (-3,-3)이라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끝맺음을 하도록 만들어놓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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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중반부까지를 읽어내면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대박이겠다. 단! 그 감독은 <올드보이> 정서의 박찬욱 감독이어야만 한다'라 생각했더랬거늘!!! --- '복수'라는 짧은 한 단어,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고백」, 「방황하는 칼날」, 「천사의 나이프」, 「13계단」, 「뫼비우스의 띠」, 「사망추정시각」 등등등, 제가 읽어본 소설들에서만도 제각기 다른 면모들을 볼 수 있었듯, 매우 복잡다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허나, 제가 가장 통쾌!하고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생각하는 건 단연코 원신역 감독의 <세븐 데이즈>라는 영화였지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 소설의 이야기가 결국은 '복수'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올드보이> 정서의 박찬욱 감독이 아닌 원신연 감독이어야겠다라 마음이 바뀌더군요. 물론 <올드보이> 또한 '복수'를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고, 그 '복수'의 방식 역시 매우 극단적이라는 면에서는 <세븐 데이즈>와 동일합니다만!
<세븐 데이즈>에서 그 게임의 설계자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 가운데 최고의 고통은 산 채로 불에 타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복수를 실현시킵니다. 이 작품 「너는 모른다」 또한! 바로 그와 똑같은 정서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정 자체도 너무나 흡사한 소설이기 때문!에 만약 이 작품이 영화화된다면 그 감독은 원신연 감독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하게 된 거지요. (써놓고 보니, 별 이유 없이 괜한 변덕만 부린 것 같기도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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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불륜'에 관한 소설을 한 권 읽고 싶었습니다. 단! 어찌어찌하여 서로의 가정을 찾아간다는 교훈적 결말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불륜'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리하여 결말 또한 불륜의 당사자들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진정 원하는 것, 가급적이면 가정을 깨고 둘의 사랑을 이어간다라든다 하는 식으로 끝맺음되어지는 그런 소설 말이죠. --- 「방황하는 칼날」이나 「천사의 나이프」에서처럼, 이 소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놓음으로써 독자들에게 흔치않은 생각할꺼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무슨 심오한 메세지가 있었다거나, 엄청난 감동을 선사해주는... 그런 소설은 분명 아닙니다만! <세븐 데이즈>식의 결말에 지극한 환호성을 올렸던 정서를 가진 저로서는 (비록 몇몇 불필요하다라 생각되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소설의 끝맺음에도 똑같은 환호를 하게만 됩니다. '복수'란 것에 아무리 복잡한 심리적인 면들이 내재되어 있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복수'란건 (이 소설의 결말을 '통쾌하다'라 표현하기엔 약!간 미진한 면이 없지않아 있긴 합니다만) 통쾌!해야만 한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비정한 살인인가? 복수의 완성인가?"라는 질문에 전 지체없이 '복수의 완성'이라 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과연... 어떠할른지요.
※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들.
- 히가시노 게이고 作, 「방황하는 칼날」
- 미나토 가나에 作, 「고백」
- 야쿠마루 가쿠 作, 「천사의 나이프」
- 조세희 作, 「뫼비우스의 띠」
- 다카노 가즈아키 作, 「13계단」
- 사쿠 다쓰키 作, 「사망추정시각」
- 'prisoner'라는 영단어를 죄수로 번역하느냐 용의자로 번역하느냐의 문제는 이 예화의 본질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니 제 맘대로 선택했습니다.
- 이 오퍼에 제시되는 형량은 교과서마다 거의 다 다릅니다만, 중요한 건 형량의 절대치가 아니라 경우에 따른 경중이므로 여기에서의 숫자는 가장 간단한 경우로 적용시켰습니다
- 징역형으로 표현한다면 (-)부호가 붙으면 안되겠지만, 쉬운 이해를 위해 (-)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여전히 절대값이 커질수록 더 안좋은 결과라는 핵심은 유지되지요. 앞쪽 값이 길동이 것이고 뒤쪽 값이 꺽정이 것입니다.
-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리디아의 증요대상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알 수만 있어도 이토록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 무엇이 리디아를 복수심에 불타는 악녀로 만들었을까? 리디아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단지 굴욕감만 안겨 주고 끝낼까? 아니면 정말 죽일 수도 있을까?(p93)"
- 리디아와 브누아 경감 사이의 게임 이외에도, 이 소설에는 또 하나의 '두 사람간의 게임'이 등장합니다. 평생의 수치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냐를 선택해야하는 일종의 '치킨게임'과도 같은 구조인데, 이 게임의 당사자와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이것의 가장 간단한 예는, 가위바위보 직전 A가 '난 가위를 낼꺼야!'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B는 그럼 난 주먹을 내볼까?라 생각할 것이고, 그런 예상을 하는 A는 생각을 바꿔 보자기를 낼 수도, 또한 B는 이를 예상해 가위를 낼 수도 …… 이런 상대방의 행동에 따른 반응의 변화가 정해진 횟수 모두에서 모두 (혹은 무한히) 반복된다라는 거지요.
- 브누이 경감은 소설의 끝까지 "아직 자살할 용기는 없었다.(p320)"에서 알 수 있듯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자신의 선택지에 넣어놓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해놓고 있지요. : '브누아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참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여전히 죽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태초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p237)
-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을 한 번 읽기 시작하니, 어지간해서는 끊지를 못하겠더군요.
- 물론! 이 책의 제목에서의 '너는 모른다'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 실제로 --- "시종일관 밀고 당기는 팽팽한 신경전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허를 찌르는 반전과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 되는 이 소설은 프랑스 현지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p351)
- 게다가 <올드보이>에 등장했던 두 개의 섹스씬이 보여주었던 (물론 정서적 거부감이야 대단했지만) 야릇한 낯설음 또한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반드시 들어가야할 요소라고도 생각합니다. ^^;;
- "그 개자식이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조만간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릴 거야. 아주 영원히!"(p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