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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 - 선택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법
배리 슈워츠 지음, 김고명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 마이클 센델,「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수를 살 때, 콜라는 사마실지 물을 사마실지 아니면 우유를 집어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일견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동조차 "복종의 실천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반응으로, 내 갈증에 대한 복종이다" 라고, 위 문장의 주인공인 이매뉴엘 칸트는 주장합니다. 즉, 칸트가 정의하는 '자율적 행동'이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나 아니라 '완벽하게')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철학에 문외한인 저에게, 칸트의 위 주장은 일견,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하승우,「아나키즘」중 p16, 책세상, 2008.
'선택의 주체'라는 측면에 한정하여 본다면, ('무정부주의'라 번역된 용어로 인해 '이상적(idealistic)'이라기보다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사상/주의로 알려져 있는 아나키즘의 기본 철학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무식함이 낳은) 용기를 내어 칸트와 아나키즘의 공통점을 요약해보자면, --- 어떤 것을 어떠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선택하느냐 보다는/이전에, 그 선택(을 하는 행위)의 주체가 온전히 '나 자신'인가가에 대한 고찰이 우선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블로그를 통해 여러 번 적었었듯) 경제학이 "광범위한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라고 보는 관점"의 스탠스에 서있을 때라야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라 믿고 있는 저이기에, 칸트와 아나키즘의 주장을 일종의 function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학문이 바로 경제학이라 생각합니다.
"경제학은 한 마디로 '유한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경제학은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보니 경제학 역시 삶의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 넓게 보면 경제학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의 삶 전체를 다루는 학문일 수도 있다."
- 하노 벡,「경제학자의 생각법」중 pp 6~7, 알프레드, 2013.
'나의 선택'이 정녕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인가, 혹은 타의에 복종하여 이행하게 된 것인가를 떠나 --- 그러한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고려 대상의 검토에 있어서만큼은 경제학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것이죠.
경제학 이론의 예측이 현실에서 과연 그러한 결과를 낳을 것이냐/낳았느냐라는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재의 현실을 이끌어 낸 제반 요소들, 즉 그 원인에 대한 설명 또한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일 목표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 경제학은 '선택'이라는 주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선택에 관한 학문'이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 수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선택한 결과다. 도시 한가운데 고층 빌딩이 모여 있는 것도, 오늘 주가가 오른 것도, 출퇴근 시간마다 도로가 꽉 막히는 것도 모두 그렇다.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 하노 벡, 위의 책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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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선택을 하여야 하는 상황 자체의 발생이 진정 자율적인가'란 게 칸트의 관심사였다면, 아나키즘은 '특정 선택이 진정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하준 교수처럼 --- 현재의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분석하고 있는 '개인'이 과연 온전한 독립의지를 가진 존재인가라는 비판을 가하는 경제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은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하는지도 모른다."
- 장하준,「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중, 부키, 2014.
그러나 --- 이 책「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은 제목에도 쓰여있듯 점심메뉴로 무엇을 먹을까, 어떤 디자인의 청바지를 사야할까와 같이, 우리의 일상 삶 속 선택들에 대해, 또한 그러한 선택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효용의 감소)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어찌보면 (역시나) 기존 경제학(=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현실화 버젼을, 달리 말하면 일종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정색하고 응대하기보다는, 어쨌든 엄연히 우리의 일상 속 상당부분인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행동경제학적 혹은 사회학적 분석으로 읽어내는 것이 옳겠다 싶고, 그렇게 읽어낸다면,
이 책, 매우 매우 매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있게 적어낼 수 있습니다.
선택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선택이 있기에 우리는 운명을 다스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원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선택은 자율성의 필수 조건이고 자율성은 행복의 근간이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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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多多益善)'은 대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통계학에서도 '데이터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 없는 정설이지요. 그러나 --- 저자 배리 슈워츠는 적어도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만큼은 '너무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덜 행복하게, 다시 말해 비효용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의 선택이 좋다고 해서 '더 많은' 선택이 무조건 더 좋다고는 볼 수 없다.(p11) …… 선택이 폭이 넓어질수록 행복해진다는 통념,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기준을 아주 높게 설정해야 한다는 통념, 결정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없는 것보다 무조건 더 낫다는 통념 … 나는 그런 통념이 잘못됐음을, 적어도 의사결정에서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통념만큼은 분명히 잘못됐음을 보여주고 싶다.(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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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쁘다 바빠! 】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삶 역시 도처에 있다."
- 헤르타 뮐러,「숨그네」중 p341, 문학동네. 2010.
유발 하라리의「사피엔스」를 읽고 가장 흥미로웠고 놀랐던 부분이 바로 <2장 : 농업혁명>에 나오는 "우리가 밀을 길들이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라는 문장이었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확대'로 보여지는 거시적 관점의 번영이란 것이 기실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으로 대변되는, 수용소는 아니되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이 고통스럽기만 한 미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진행되어 왔었다라는 그의 주장은, 유발 하라리를 저와는 다른 류(類)의 존재로 느끼게도 해주었었죠.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중 p136, 김영사, 2015.
배리 슈워츠 또한 "우리는 최신식 시간 절약 장치가 사방에 널려 있지만 늘 시간에 쫓긴다"(p256)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History's biggest fraud'라고까지 칭했던) '농업혁명'이건, 자동차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는 수준까지 발전된 '과학혁명'이건, 그것들이 선사해 준 문명의 발전이란 게 적어도 --- 미시적 관점에서의 우리 삶의 속도 더 나아가 만족도까지를, 수렵 시대의 그것보다 더 낫게 만들어주지는 못한 겁니다.
【 더 행복해지지도 못했다? 】
우리 세대의 삶이 수백 년 전 세대의 삶보다 더 바빠졌다해도, 그 덕에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아 더 행복해졌다면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을 향유하고 있다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지는 꽤 오래됐다. 그러나 예전에는 '기본' 선택안이 워낙 강력하고 지배적이다 보니,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있다고 인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결혼 상대야 선택할 수 있었지만 결혼 적령기가 되면 당연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말이다.(p47)
선택지는 훨씬 더 다양해졌으며, '다들 그렇게 사니까'라는 사회적 강제에 의해 결혼이나 출산을 '해야 하는' 부담도 이제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익선'이란 경구와 '데이터는 많을 수록 좋다'라는 통계학의 정설과는 달리 왜 우리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행복해졌다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더 행복해지지 못한 것일까요?
인류 역사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지금처럼 다양한 선택안과 기회비용이 놓여 있지 않았다. … 결핍의 시대에는 기회가 무더기로 찾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은 접근인가 회피인가, 수용인가 거부인가다. 짐작건대 그런 분별력, 곧 좋은 것가 나쁜 것을 판별하는 능력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는 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수백만 년을 단순한 구별에 의존해 살았으니 어쩌면 우리는 현대 사회가 제시하는 무수한 선택안에 대해 아직 생물학적으로 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p168)
인류의 진화사적으로 보아 현생 인류가 과거 인류에 비해 '현격하게' 진화되었다라 말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 경제학의 이론적 발전은 (경제학에 수학 기법의 도입을 주도했던) 故 폴 사뮤엘슨 교수가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진보한 것이 사실인데, 왜 우리 삶의 행복은 극대화 되기는 커녕, 이전 보다 더 증가되지 않은 것일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자는 그와 같은 극대화를 향한 우리의 욕망이 우리가 이전보다 더 행복해지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이룩한 쾌거는 달면서도 쓰다. 인생의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달면서도 쓴맛이 나는 까닭은 뭐니뭐니해도 선택 과잉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으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더군다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 요인들도 있다. 후회, 지위에 대한 관심, 적응, 사회적 비교,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조건 최고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 곧 극대화 욕망이다.(pp256~257)
【 과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자발적 복종」중 p80, 생각정원, 2015.
과거의 우리 앞에는 그다지 많은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두부를 사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은 그저 집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두부 주세요~'라고 하면 해결되었었으나, 퇴근 길에 두부를 사다달라는 아내의 부탁은, 집 앞 GS 슈퍼의 진열대 앞에서 여지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찌개용, 부침용, 유기농, 무항생제, Non-GMO … 로 포장된 수많은 두부 중에서 뭘 사야하는지를 물어야만 해결할 수가 있게 되었죠.
"군중은 절대 자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며 압제를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비교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조지 오웰,「1984년」중 p239, 열린책들, 2009.
전화를 해서 도대체 어떤 두부를 사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귀찮아서 옛날 엄마의 심부름이 더 좋았다,라 말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엄마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에는 집 앞 가게에서 파는 두부가 모두 유기농에 무항생제에 유전자 조작이 없는 콩으로 만든 두부였었을 수도 있겠으나, 필요에 의해서건 요구에 의해서건 현재엔 이렇게) 어마무시하게 늘어난 선택지 앞에서 서있노라면 --- 뭔가, 그깟 두부 하나 고르지 못하는 사람인가하는 자괴감을 살짝 느껴보게되기도 되고, 거기에 더해, 이왕 해야하는 고민이라면 이 수많은 두부들 중에서 뭘 사야 나와 우리 가족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덜 해가 될까 검색해봐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생겨나고, 암튼...
시대적 보정을 충분히 한다 하여도, 엄마의 심부름 시절에 제가 먹었던 두부와 아내의 부탁으로 사가서 먹게되는 두부로부터 얻게 되는 저의 효용이, 두부의 질(quality)과 두부 요리로부터의 만족으로 인해 상승된 것이 확실한가라는 질문에의 답으로 '그렇다'를 선택하기는 사뭇 어렵습니다.
선택안이 늘어나면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만큼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택이 축복에서 짐으로 전락하는 이유 중 하나다.(p57) …… 온갖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냥 '적당히 좋은' 것에 만족할 수가 없다.(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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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존즈 시절에는 사정이 훨씬 더 나빴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동물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즐거이 그렇게 믿었다. 게다가 존즈 시절에는 모두가 노예였지만 지금은 누구나 다 자유롭지 않은가, 그거야 말로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 조지 오웰,「동물농장」중 p99, 민음사, 2006.
데이터나 정보(information)는,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틀림없이 더 정확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데이터나 정보의 양이 많음에도 부정확하거나 비효율적인 결과가 나오는 건 오로지 그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 학력이나 출신지 등과 같은 데이터와 정보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특정 목표를 위해 왜곡시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채용 비리에의 대응을, 아예 그러한 데이터와 정보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블라인드 면접'으로 반강제하는 현실을 못내 감당해내고 있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우리는 항상 선택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선택권이 주어지면 무조건 좋아하진 않는 것 같다.(p136)
'하지 못하는 것'의 해결책이 '하지 않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 과거에 비해 무지하게 늘어난 선택지 앞에 놓여진 이 현실, 그렇게 늘어난 선택지로 인해 우리의 행복이 오히려 줄어들게 된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저자는 선택의 기회를 포기/회피하라 말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바로,
'적당한 만족'은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로 훗날 노벨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이 1950년대에 처음으로 소개한 개념이다. 그는 모든 선택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들어가는 비용 (시간, 돈, 고통)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당한 만족이야말로 극대화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전략은 적당한 만족이란 뜻이다.(p92)
"온갖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냥 '적당히 좋은' 것에 만족할 수가 없"(p245)기에 '조금 더 좋은' 것을 계속해서 찾는 과정이 결국 '극대화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선택의 결과가 '행복'이 아닌 '불만족'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기 보다는 ---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는 만족감이 아닌, 본인의 주관적 만족을 우선시하고 그에 맞춘 선택을 하는 것이, 치열하고 지루한 극대화의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결과물보다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핵심 메시지입니다.
웬만한 사람에게 감사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우리가 다른 선택안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선택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 더 나은 인생을 그려본다. 반면에 인생이 잘 풀릴 때는 더 나쁜 인생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이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인생에서 좋은 것들이 훨씬 좋게 느껴질 것이다.(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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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12일에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을, 해가 바뀌고도 19일이 지나서야 다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이 지겨워서 독서 기간이 늘어진 것이 아닌, 온전히 연말 업무와 이어지는 술자리, 그로 인해 침대에서 하루 종일 보내야 했던 주말 등, '독서'란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지들을 선호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처럼 집중해서 7~10일만에 읽어낼 수 있었더라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그리하여 보다 더 정교한 감상문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이 포스트의 마지막을 적어가고 있는 지금에도 떨쳐지질 않네요.
'The Paradox of Choice'라는 일견 무미 건조한 영문 원제를 '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과하게 말랑말랑한 제목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 적잖이 불만으로 느껴질만큼, 이 책의 내용은 가볍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가 인용해 놓고 있는 논문이라든가 책 등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지 않다는 점, 저자의 개인적 의견이 은근 자주 표출되고 있다라는 점등이 아쉽기는 했습니다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 말랑말랑한 국문 제목과 어울려,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질 수 있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중언부언이라 할 수 있을만큼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지루하다라 느껴지기보다는 한 번 가르친 것을 다시 복습시켜 주는 친절함으로 각인될 수 있게 쓰여져 있다라는 점 또한,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라 생각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또한! ---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 실마리를 찾게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미에서 강추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