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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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적이면서도 또한 비극적(p35)'이라 표현되고 있는 주인공 당편의 삶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경험했었던 산업화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화되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가 이문열의 작품 「아가(雅歌)」를 저는 이렇게 표현했었더랬지요. (바로 전에 읽었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과 같은 제목이라는 이유만으로 펼쳐보았던) 이 작품 「투명인간」을 통해 처음으로 만나보았던 작가 성석제는 「아가」보다 더 넓은 시간적 배경을 통해, 김만수라는 인물의 주변인물들에 의해 서술되는 개인 김만수의 일생,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변천사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 이처럼 비슷한 서사의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두 작품 속에서, 그 (흘러 지나간) 시간들을 이문열이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과 그리움'이라 표현하고 있었었다면, 「투명인간」의 성석제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보여/표현해내고 있을까요? (1897년의 영국 작가가 표현했던 '투명 인간'이라는 개념과 2014년의 대한민국 작가가 표현하는 개념간에는 과연 어떠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을까가 이 독서의 시작이었었습니다만, 읽어가면서는 이문열의 「아가」가 보여주었던 시선과의 다른 점에 대해서만 유독 집착을 하여 이 소설을 이해하려하게 되더군요. 이러한 저의 독서에 대해 그 방향이 옳았다거나,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다라는 것까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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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생의 작가 성석제는 ---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만수네 가족이 서울 변두리로 이사한 이후의 일상을 통해서는 저도 경험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미세한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이 소설의 독자인) 저에게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동감의 존재 여부가 일단! 이문열의 「아가」와의 첫 번째 차이점이었지요.  

국민학생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놀이터 앞에 판을 벌이고 있었던 약장수 아저씨. 기생충 약을 팔고 있었던 그는 우리 또래의 아이에게 그 약을 먹인 후, 약간의 쇼 비슷한 걸 해보였고 이후 그 아이의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서 짜장소스가 묻지 않은 면발같은 무언가를 줄줄이 뽑아내며 '이게 그 아이의 몸 속에서 나온 기생충'이라고 말했었던 걸, 마흔 일곱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아이는 잠결에 무언가 길쭉한 것을 뽑아내고 있었다. 길고 질진 쫀드기 같은 것을 자꾸만 뽑아올리고 있었다.(p67)'


제 아버지가 대학에 합격을 하셨고, 이제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거늘 등록금 마련이 안되었다는 겁니다. 시골에서 할머니께서 올라오셔서 은행의 창구 여직원에게 애원하시길, 한 달내로 꼭 나머지 반을 마련해올테니 우선 이 반 되는 돈만으로 내 아들 등록 좀 꼭 시켜달라고. --- 지금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더군요. 그 여직원이 할머니의 청을 들어주었고 (아마도 나머지 반은 그 분의 돈으로 메꾸었지 않을까라 추측만 하는) 그렇게 제 아버지는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셨다는 겁니다. 할머니께서는 진짜로 한 달안에 나머지 반의 돈을 마련해 오셨다더군요. 이후... 회사의 일 말고 다른 것에는 신경 쓰시길 정말 싫어하셨던 제 아버지가 유일하게! 대학 총동창회의 이사직만은 맡으셨더랬습니다. 훗날 왜 그 이사직만은 거절하지 않으셨었냐 여쭈었더니, 그 자리에 있으면 그 때 할머니의 청을 받아주었던, 그리하여 당신께서 대학에 입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그 은행 여직원분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였다라 말씀해주시더군요. 끝내... 그 때의 여직원분은 못찾고 돌아가셨지만. : '공부만 하고 살고 싶은데 그것마저 쉽지는 않구나.'(p114)



 지금이니까 이야기하지만 --- 음주운전을 종종 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가끔... 방금 전 집 앞에서 경찰에게 걸렸는데, 지갑에서 돈을 좀 넉넉하게 꺼내어 집어주니 집까지 에스코트도 해주더라란 말씀을 아주 기분 좋게 말씀해주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돈을 건네어 준 저희 아버지나, 그 돈을 넙죽 받았던 경찰이나 모두! 그 행위가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생성되지 않았었던 그때 그 시절... 이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겠지요. : '가장 웃긴 건 교통경찰을 보조하면서 삥땅을 쳐온 돈으로 우리들을 월세방에서 전셋집으로 옮겨가게 한 것이었다.'(p213)

제가 3학년 때 였던걸로 기억되는 일입니다. 원래 시위를 해도, 총학생회장같은 소위 거물들은 절대로 전선의 맨 앞에 나서질 않지요. 하지만 경찰들은 그 거물을 잡고 싶어 하구요. 그렇게... 총학생회장은 1년 내내 현장의 맨 뒤에서, 혹은 현장이 아닌 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고 명령하는 것으로 지내다가, 자신의 임기가 끝날 때 쯤 되면 갑자기! 시위의 최전방에 스스로 나가섭니다. 그리곤 예의 경찰에게 잡히지요. 그때 들리던 말 하나 --- 저렇게 잡혀 가고, 그래서 군대 안가는 거고, 경찰들도 그걸 다 알고 있으며, 하지만 그 체포 역시 자신들의 실적이었기에 그렇게 진실같지 않은 진실은 영원히 묻히게 되는 거라고. :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 시합에서 쌀알만 한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 있다 치자. 레이스가 진행될수록 쌀알은 자갈로, 자갈에서 바위로 변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계속 뛸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내게 군대 문제가 그랬다.'(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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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단지 불편함일 뿐이다'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진짜... 그런/그 뿐인 걸까요? --- '가난'이라는 조건하의 누군가는, '풍족함'이라는 조건을 지닌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다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엔 없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의 가치관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그 반대로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다라 말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지요. 여기서!!! --- 작가 성석제는 단언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다'의 편에 서 있습니다. :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p215)

이러한 특정 조건, 말하자면 '가난'이라는 조건에 속해 있는 개인/집단/사회에게는 그렇지 않는 개인/집단/사회는 겪지 않는, 심지어는 알 지도 못하는 환경에 처해지게 됩니다. 물론 그 환경은 매우 열악한 모습을 띠고 있지요. 엎친 데 덮친 격, 그렇게 말이죠. --;;



몸이 작고 마른 아이, 집이 가난한 아이, 시골 아이일수록 이가 많았다. 먹을 게 뭐 있다고(p64) …… 베트남에서 한국군에게 고엽제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주의사항이나 지시가 별달리 전달되지 않았던 까닭에 일부 병사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공중살포할 때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하여 고엽제가 쏟아지는 곳을 쫒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맞으려 했습니다.(p128)


이처럼 가난이 단지 불편함의 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걸 이 소설은 낱낱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 '가난은 결코 단순히 불편함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전달하고자 하는 이 소설의 메세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님 세대들이 겪었었던 그 시절들의 (조건과 환경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의) 현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reality라는 의미로의) 현실이 아닌 것으로만 바라보아지는 그 '(조건과 환경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의)현실'에 대해 우리는 기껏 '정말 불편했겠다!'라 말할 수 있을 뿐일지라해도 당신들에게는 이겨낼 수 없을 거라고만 받아들여졌던 '(reality라는 의미로의) 현실'이었다라는 거,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긴 하나) 마치 '공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듯, 그러한 과거가 있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의미 모두로서의)현실'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이해가 성석제라는 작가를, 소위 말하여지는 '보수적'이라는 카테고리에 넣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오빠는 내가 국민학생일 때부터 대학생이 되고 나서 가출을 할 때까지 엄마처럼 주부처럼 살림을 다 했다. 아버지처럼 가장처럼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왔고 식구를 부양했다. 오빠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냥 관성적으로 지나쳤다. 나는 그저 내 생각, 내 할 일에만 골몰했다.(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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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돠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만수는 약하고 보기 싫기까지 한 들소였다. 곧 도태되고 말 운명이었다.(pp147-148)

주인공 김만수는 타인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나는 우리 형제들이 나를 디디고 밑거름으로 삼아서 훌륭하게 되기를 바랐지. 혹시 나중에 뭔가 잘 안되어서 높은 자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든 떠받쳐서 재기하도록 도울 생각'(p267)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런 만수의 가족들은 이런 그를 (당연히!) 답답해 합니다. 이해도 못하지요. 저도 그가 답답했고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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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p364)

우리 부모 세대들 모두가, 소설 속 김만수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 분들 모두가 다 자랑스러운 수출역군이었노라고,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분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로만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라는 걸 분명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이제까지 제가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오며 가지게 된 하나의 다짐입니다. 역사는 피라미드를 만든 파라오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피라미드는 분명!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못한 수 많은 이집트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세워질 수 있었었듯이,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 수많은 '김만수들'이, 비록 그처럼 존재하지도 않았듯이, 결국! '투명인간'과도 같이 흔적조자 남지 않은 흔적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엔 없는 2015년의 '(reality라는 의미로의)현실'에 대해 작가 성석제 또한!!! 이 작품을 통해, 그리고 다음의 한 마디를 통해 '2015년의 우리들'마저도 그들, 수많은 '김만수들'을 투명인간으로, 「아가」속 이문열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신되지 않아 무의미해진 기호'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최소한!)안 되지 않겠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아가」를 통해 작가 이문열이 '시대'를 이야기했었다라면, 「투명인간」의 작가 성석제는 그 '시대'을 살아왔던/만들어왔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 '시대'와 '사람'의 차이 때문이 결코 아닌, 그 안에 녹아져 있는 작가의 가치관 탓에 「아가」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던 반면, 이 작품 「투명인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고딩들의 역사 교과서에 이런 작품이 실려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를 갖게 되는, 참으로 마음 시린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이었네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p370)


- <작가의 말> 중

 
   




※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는 작품 : 이문열 作, 「아가(雅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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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18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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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영국에서 발표되었던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한 인간을 선과 악을 대변하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존재로 분리시킨다라는 발상을 보여주었었지요. 그렇게 이 작품 속 '선과 악의 대비'는, 뭔가 말 그대로의 '강렬한 대비'를 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우리 인간성 속에 담겨져 있는 (그 누구도 완전한 선과 완전학 악으로만 채워져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그 두 가지의 성향이 각자만의 비율로 섞여져 있을 것이다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충격적일 정도로 솔직한 고백을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나'란 하나의 존재를 두 존재로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 같은 영국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1897년에 발표한 이 작품 「투명 인간」은 한 인간을 '타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보이지 않는 존재'로 나누었다라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1897년에는 더더욱) 충격적인 설정을 선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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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주인공 그리핀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원리로 작가는 '색소와 굴절의 일반 원리'(p148)을 들고 있습니다만, 이 작품의 존재 이유가 그러한 과학적 원리1를 설명하는 것에 있지 않다라는 건 대부분의 독자들이 (심지어는 이 작품을 읽기 이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 이 작품의 줄거리 역시나 뭔가 특별하거나 흥미로운 것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2 그저... 그리핀이라는 사람이 투명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발견해냈으나,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방법까지는 찾아내지 못하였고, 그래 좌절하다가 결국엔 죽음을 당하게 된다라는, 큰 그림만 보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전혀 다를 것이 없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가 '약품에 의한 인간 변신의 힌트'를 얻은 것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부터였다3라고 말해지기도 하는 이 작품은 단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아류에 불과한 작품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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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었을 '투명 인간'이라는 개념. ---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어떠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포함한 제 주위의 기대들은 대부분, 은행에서 돈을 마음대로 가져오겠다라거나,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 보겠다라는 것으로 대변되는 '절도와 음란'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1897년 영국의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에게는 과연 '투명 인간'의 이점이 어떻게/어떠한 것들로 보여졌었을까요?


나는 …… 불가시성(不可視性)이 인간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 - 비밀, 힘, 자유를 상상했어. 바람직하지 못한 결점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p154) ……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고, 그것의 놀라운 이점을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을 뿐이었지. 이젠 아무리 엉뚱하고 놀라운 일을 저질러도 벌을 받은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내 머리는 벌써 온갖 터무니없는 짓을 할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네.(p171) …… 눈이 보이는 사람이 발바닥에 쿠션을 대고 소리가 나지 않는 옷을 입고 장님들의 도시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지.(p172) 

​결국... 인간은 다 똑같은 겁니다. 작가가 '비밀, 힘, 자유'라 써놓고 있는 것은 단지 '절도와 음란'의 고급스런 표현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 그러한 '불가시성'이 인간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을 단지 여기까지만!으로 알고 있었던/있는 저와는 달리,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흡사 하이드Hyde로의 변신이 가져왔던 비극적 파국과도 같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궁극적 불행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분은 10분 전에 힘차게 밖으로 나왔을 때와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지. 이 불가시성이란 정말! 나는 오로지 이 궁지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네.(p174)

​'바람직 하지 못한 결점'을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던 처음관 달리 막상 투명 인간이 되고나니 단! 10분 만에 투명 인간이 되어있다라는 현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대체... 왜 그러했었을까요? 결국 문제는 굶주림과 추위. ---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어보니, '보이는 인간'은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정작 인간 본연의 욕구인 굶주림과 추위('보이는 인간'이었었을 땐 가능했었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겨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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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할수록, 춥고 더러운 날씨와 북적거리는 문명사회의 도시에서 투명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네. 이 미친 실험을 하기 전에는 수많은 이점을 꿈꾸었지. …… 나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꼽아 보았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확실히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손에 넣은 것을 즐길 수는 없어. 높은 자리에 올라도, 거기에 나타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그 때문에 나는 몸을 완전히 감싼 수수께끼, 몸을 감싸고 붕대로 감은 인간 캐리커처가 되어 버렸어!(pp202-203)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한 주인공 그리핀에게, 자신이 투명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이점은 이제 다음과 같은 단 두 개뿐이었습니다. --- '사실 이 불가시성은 두 가지 경우에만 도움이 된다네. 도망칠 때 쓸모가 있고, 남한테 접근할 때 유용하지. 따라서 사람을 죽일 때 특히 쓸모가 있어.'(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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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명 인간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원래부터 살인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에게 남겨진 선택의 여지가 점점 줄어들어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아졌을 때, 광기만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의 선택은 결국 '살인' (살인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공포 정치를 통한 지배자'가 되고 맙니다. 예의 이는 다시 한 번 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의 마지막 선택이 자살이 될 수 밖엔 없었던 것과 동일한 과정을 밟아 남겨진 것이었지요.

사실 줄거리만 보자면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이며, 이 단순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메시지 역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것만으로 감히 제가... 이 작품을 무엇의 '아류'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최소한 저에게만큼은 별 특별한 감흥/깨달음을 주지 못한 소설이었음은 감추고 싶지는 않네요. 이 작품을 가리켜 'SF의 대중화에 길을 열어 준 고전적 작품'(p268)이라 지칭하고 있는 역자의 표현은 그야말로 '문학사文學史'에서나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앞서간 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 혹!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지 않고 이 작품을 먼저 읽었었더라면 이 감상문에 쓰여져 있는 것과는 다른, 적잖이 큰 감동을 느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마저도... 예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나선 까맣게 잊혀질 무엇일 뿐이었을 거란 확신에 가리워질 뿐. --;; 

※ 훨씬 더 멋지고 의미있다라 생각하는, 비슷한 부류의 작품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作,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피에르 불 作, 「혹성탈출



 



 

  1.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이 '투명 인간'의 원리는 pp148-151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2. 심지어 <역자 해설>에서 역자 김석희는 이 '투명성 문제'를 설명하는 작가의 논리에 모순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기도 하지요.
  3. p2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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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앨리스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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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와라 히로시 作, 「내일의 기억」이란 작품을 통해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대해 처음으로 (뭔가 좀 구체적이게) 접해 보았더랬습니다. 이 작품 「스틸 앨리스」 역시 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한 사람의 이야기이며, 두 작품 모두 비교적 젊은 나이1에 그 병을 앓기 시작한 주인공들2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병을 「내일의 기억」에서는 '약년성 알츠하이머'라, 이 작품 「스틸 앨리스」에선 '조발성 알츠하이머'라 표기하고 있는데, 의학적으로는 뭔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독해에로서 보자면 단순히 번역의 차이 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두 작품은 일단 비슷한 줄거리와 전개 양상을 가지고는 있게 됩니다만! --- 일단 일본 작가와 미국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허나 이것을 섣불리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는 없겠는) 것, 주인공의 성별이 남자와 여자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반응의 차이가 매우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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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때, 그러니까 1년여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서 뉴런들이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 그것이 분자 살해였든 세포 자살이었든, 뉴런들은 죽기 전에 그녀에게 그런 상황에 대해 경고할 수가 없었다.(p7)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심리언어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앨리스. 그녀의 남편 역시 같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며 자녀들 역시 각자의 영역에서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마디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녀입니다. 헌데... 그런 그녀에게, 그저 단순한 건망증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자주, 게다가 심각하기까지한 '정신적 딸국질'(p10)들이 어느 날엔가부터 나타났지요. 비록 앨리스가 의사를 찾아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긴 했지만, 내심 그녀 스스로는 이미! 자신의 기억 장애가 '사소하고, 흔하고, 무해하며 심지어 합당한 것'(p58)일꺼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뭇 이런 상황 자체가 믿겨지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았던 거지요. --- 이하에선 제가 읽어본 이 두 작품, 「내일의 기억」과 「스틸 앨리스」에서 보여진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며 이 감상문을 써볼까 합니다. (초록색 박스 안의 글은 「내일의 기억」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

 

남편 존은, 자신의 아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라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병일 것이라 추측하며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만 결국엔... 자신의 아내, 앨리스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엔 없게 됩니다. 여기서!!! 이 작품과 「내일의 기억」사이의 첫 번째 차이점이 나타나지요.

  

(의사의 처방에 따은 의학적 치료를 해나감과 동시에) 사에키의 아내 메이코는 남편의 발병을 알게 된 이후, 알츠하이머병에 좋다는 식단만을 차려냅니다. 당사자인 사에키 역시, 평소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호박마저도 기꺼이/억지로라도 먹어내지요. : '내가, 내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어떤 일이든 참아낼 수 있다. 나는 두 개째 호박을 입 안 가득 넣었다.' VS 이에 반해 앨리스와 존 부부가 선택한 방법은 철저히 (심지어는 스스로 찾아내기까지 한) 현대 의학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가 하버드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이 병의 최신 치료법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지요. 그 과정에서! 앨리스의 남편 존은, 심지어 의사의 치료 방법에 반기를 들기까지 합니다. 각종 치료법들을 동시에 병행하여 (최소한 병의 악화만이라도 막아보는 처치를) 진행해보자 했던 의사완 달리, 남편 존은 (비록 아직 그 확실성이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병으로부터의 회복을 도모할 수도 있다라 믿어지는/믿어볼 만한) 최신의 특정 치료법을 고집합니다. : '연발총이냐, 총알 한 알이냐.'(p201)

 


【 나의 존재 】

 

새로운 노트북이 왔다. …… 자리만 차지하고 말썽만 일으킨다며 평판이 나빴던 나의 데스크톱 컴퓨터는 '폐품'이라는 쪽지가 붙여져 통로에 내놓아져 있었다. 누가 썼는지 쪽지 구석에 이런 낙서가 적혀 있다. 'good-for-nothing' - '쓸모없음'

평상시의 생활에 점점 더 많은 지장이 오고, 결국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까지 진행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일의 기억」 속,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에키는, 회사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점점 위태로워진다라는 걸 깨닫고는, (실제론 그 자신과 특별한 연관성이 없는 컴퓨터 한 대를 보고도) 자신이 '폐품'이 되어간다라 생각하게 되지요. 반면!!!

  

앨리스는 평생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실패 없는 길을 걸어왔었던, 성공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무려! 종신교수였었던) 그녀에게 자신의 무대인 하버드대학을 떠나야한다라는 사실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것이었지요. 하지만 역시나 --- 그녀 또한 (사에키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하나하나가 전부 자신의 병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우려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남편 존에 대해서마저도 '아내 없는 미래의 삶에 대비해 미리 연습하는 걸까?'(p132)란 의심/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내 나이조차 잊어먹기 일쑤다. 어쩌다 나이를 기입할 일이 생기면 펜을 멈추고 생각할 때가 있다. …… 알츠아이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언어나 사고에 이어 몸의 기능마저 앗아가버린다. 몸이, 살아가는 방법, 삶 자체를 잊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이 점점 더 악화되자 사에키는 이러한 자신의 변화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극복해낼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결국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앨리스 역시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을 이겨낼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두 작품 속 주인공의 그 '받아들임'에 관한 표현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하지요.

  

차라리 암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츠하이머병을 암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리라. …… 암이라면 적어도 싸울 상대가 있는 것이다.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 요법도 있다. 이길 수 있는 확률도 있다. …… 그리고 설령 암과의 싸움에서 패한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알아보며 작별을 고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 알츠하이머병은 암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그걸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 맹렬한 화염이 모든 걸 태워버릴 것이고 그 화염에서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pp168-169)

비록! 자신 역시 이 알츠하이머에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못내... 그러한 사실을 쉬이 인정하려 하진 않았던 거지요. --- 사에키는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매일매일 비망록을 작성해 갑니다. 자신의 기억이 온전할 때의 기억들을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앨리스의 대비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여기서 밝혀서는 안 될 것 같은, 매우 충격적인) 무엇이었던 겁니다.

  

【 남겨진 자들의 삶 】

 

​죽음을 의식하게 된 것은 (딸) 리에가 태어났을 무렵부터다. 자식이 생기면 왜 그런지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역산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 이아기 스무 살이 되면 나는 몇 살? 이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나는 몇 살까지 이 아이의 인생을 돌봐줄 수 있을까.

소설 「내일의 기억」은 사실 스토리 자체만 보자면 (쌍팔년도 감성의) '신파 이야기'라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딱히 읽는 재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구요. 하지만 그 소설은! ---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있는, 저도 포함된) 중년의 남자에겐 '나 자신'을 스스로 규정짓는 것이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동료,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점철된다라는 사뭇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점에서만큼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더랬습니다. --- 자신이 아내에게 짐이 될까봐, 곧 있을 딸의 결혼식에서 자신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마지막으론 손녀를 처음 안았을 때의 감촉을 잊지 않기위해! 라는 것만이 그저, 사에키가 알츠하이머를 이겨내야하는 이유의 모든 것이었었던 겁니다. 결국... 자신도 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었을 때에는 지금 자신의 손녀마냥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였었었으나, 이제는 '쓸모없음'의 딱지가 붙어 있는, 게다가 주변에 피해만 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 이후, 그나마 그 피해를 남들에게 안겨주지 않기 위한 노력만을 할 수 밖에 없는/해야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썅!

 

물론!!! 앨리스 역시 자신이 이러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해 가족들, 특히나 가장 처음 이 사실을 털어놓았던 남편 존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게는 됩니다.

 

그에게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존은 나의 정신을 사랑한다.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p115) …… "이런 병에 걸려서 정말 미안해, 여보. 상태가 얼마나 더 악화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언젠가는 당신을 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얼굴을 보면서도 누군지 모를 거란 사실도 견딜 수가 없어."(p145)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 이 병을 이겨내려 했던 그들답게 예의... 앨리스는 이 병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라는 걸 알게 된 후엔 자신들의 자녀들을 걱정하게 됩니다. 물론 세 명 자녀들의 유전자를 검사해보면 그들에게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변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다만, 아직 20대인 그들 중 누구는 양성반응이, 누구에게는 음성반응이 나왔다면 그들 간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양성반응을 보인 자녀의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내일의 기억」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었던) 문제를 이 작품은 짚어주고 있지요.

 

이제... 이 작품 「스틸 앨리스」가 독자에게 (독자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던 방향으로) 묻고 있는 가슴아픈 질문이 나옵니다. --- '만일 내 몸의 모든 세포에 이 유전자가, 이 운명에 들어 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자식들을 낳았을까, 아니면 임신을 피했을까?'(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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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고 보니 --- 애초에 제가 원했던 두 작품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 작품을 읽으며 느꼈었던 것만큼은 뚜렷하게 표현해내지 못한 듯 합니다...만! 당신이 직접 이 두 작품을 읽어본다면 확연하게, 때론 미묘하게 달리 표현되고 있는 차이점들이 보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작품의 제목이 왜! 이렇게 지어졌겠는가하는 걸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구절들을 인용해보는 것으로 이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의 기억」

 

"기억이 사라져도 나의 지난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기억은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낸 사람들 속에 남아 있으니..."

「내일의 기억」이란 제목은 단언컨데! 이 두 문장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확신합니다. 나의 기억은 사라져가고, 머지 않아 (누군가의 남편이었었으며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였었던) '나'란 존재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함께 했었던 이들에게 남겨질, 내가 사라진 순간 이후인 '내일'부터의 기억에 대해 가장 큰 무게의 비중이 주어져 있는 것이지요. 반면!!!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저는 어제를, 그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난날들 중 어떤 날을 기억하고 어떤 날을 지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알츠하이머란 병에 타협이란 없습니다. …… 전 다가 올 내일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내일 잠이 깨서 남편을 몰라보면 어쩌지?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면 어쩌지? 난 언제부터 내가 아니게 될까?(p354)

앨리스의 이 처절한 고백은 물론! 사에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3이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의 구절이야말로... ('철의 여인(Steel Alice)'은 아니었지만 알츠하이머가 그녀의 자존감을 앗아가지는(Steal Alice) 못하였으며, 그러하기에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로 남아 있다(Still Alice)라는, 하지만 '옆집 사는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는 아니라는... 뭐 그런 말장난도 가능해 보이는) 왜! 이 작품의 제목이 「Still Alice」가 되었어야하는지를 너무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지요.

  

저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츠하이머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최대한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p355) …… 저의 지난날들은 사라지고 있고 다가올 날들도 불확실합니다. 그럼 전 무엇을 위해 살까요? 오늘을 위해 삽니다. 저는 현재를 살아갑니다.(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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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개의 작품을 읽고 여기에서 보여지는 차이점이 바로! '동양과 서양의 관점 차이'라 말하는 건 지나친 성급함/확대 해석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두 작품 사이에서 보여지는 명확한 차이점을 만나볼 수 있었던 건... 한 독자로서는 (비록 이러한 소재의 이야기에 대해 '흥미롭다'란 표현을 쓰고는 싶지만 차마 쓰지는 못하겠기에)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다란 사실은 분명했었습니다. 이 두 작품 모두 영화로 제작되었다는데, 영화로 확인해 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나... 사뭇 흥미롭지 않을까도 싶네요.

  

  

※ 알츠하이머를 다룬 또 다른 이야기 : 오기와라 히로시 作, 「내일의 기억


 

 

 



 

  1. '일반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은 노인에게 나타나는 병으로 인식되지요. 하지만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10퍼센트는 조발성이고 발병자 평균 나이도 65세 미만이에요.'(p103)
  2. 「내일의 기억」속 주인공의 이름은 '사에키'입니다.
  3. '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 나는 열의 없이 쑤석거리던 그라탱 속에서 호박 덩어리를 파내 걸신들린 양 먹어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딸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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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뺑덕
백가흠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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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심청전」 속 인물들을 그대로 차용하여 쓰여진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요즈음엔 매우 촌스러운 이름들인 학규, 덕이, 청이가 등장하지요. 작가는 이 소설에 대해 '「심청전」이라는 모티프를 공유'(p343)하여, 그 안에 '숨겨진 사랑'을 써내었다라 쓰고 있습니다만, 제 눈에는 「심청전」의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단지 (2015년의 시선으로 보아)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름들만을 빌려놓았을 뿐. 단!!! --- 이 소설의 주제가 (여전히 「심청전」과는 관계없다 생각하는, 작가에게 보여졌던 그 '숨겨진 사랑'이라는 것 역시 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이라는 것에만큼은 털끝 만큼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소설 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란 게.... (최소한 '저'는 포함된) '인간적이라 말할 수 없으며 현실적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겠지만, 솔직함에 있어서만큼은 (이런 사랑에 공감해도, 공감한다 말해도 되는걸까싶긴 하지만 끝내) 격한 공감을 하게 된 사랑'이었었다라는 것만큼은, 40대의 중반마저 넘어선 대한민국 남자에게 과연 '사랑이라는 것'이 어떠한 현실적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란 비아냥을 감수해내고서라도 꼭 말하고 싶네요.


"​사랑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 전경린, 「물의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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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비도덕적이고 무엇보다 구질구질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작품 속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향한 오마쥬가 아닐까도 싶은 내용이기도 하지요. 열여섯 살의 나이차가 있는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만,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정말 '구질구질하다'란 표현이 더없이 들어맞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 이 소설에서 보여지고 있는, 그러니까 그것이 작가의 생각이라 해도 될 것 같은 이 (구질구질한) '사랑관'에 묘~한 매력이 있는 겁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40대의 중반조차 넘어선 저마저도, 한때 최소한 그것을 밖으로는 내보이지 못했었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엔 그러한 '사랑'에 대한 동경이 한 번쯤은 있었었노라 털어놓게 됩니다. 이 지지리도 구질구질한 '사랑'에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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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학규는 국문과 교수입니다. 근데 무지하게 바람둥이죠. 수없이 많은 여학생들과 엔조이를 했으며 동료 교수, 심지어는 친구의 아내와도 육체적 관계를 가졌었던 한 마디로 '비도덕의 끝장'인 인물이에요. 물론 그러한 '비도덕'을 학규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 예의 이에 대한 그의 상황/변명에 알 수 없이 끌린다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란 겁니다.

● 윤리 의식이라든가 도덕적인 강박이 이미 그에겐 없었다. 그런 것들은 더 어린 날 소설을 쓰며 소진한 뒤였다.(p37) 

이런 게 핑계겠지만 말이야, 문학을 하면 말이다, 살면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들게 돼.(p91)

이러한 바람둥이 학규와 순진한 시골 처녀 덕이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헌데, 두 사람의 사랑이 서로 다르지요. 아니! 다를 수밖엔 없는, 아예 동일하지 않은 별개의 감정이었던 거지요. --- 팽 마담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된 학규는 팽 마담과 그녀의 딸인 덕이 둘 다 모두 (물론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것에 즐거워합니다. (이 설정은 「롤리타」와 완벽하게 동일하지요. 물론! 그 이후의 여러 상황들도 또한 그러합니다.1) 그 우연한 만남이 결국 훗날 그 세 사람 모두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게 되는 시작이었던 걸... 당시의 세 사람은 그저 몰랐었을 뿐.


삶은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의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이라고, 불가피한 상황이 우연이라면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라고, 학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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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바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왜곡이 쉽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함께한 시간에 대한 공유는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서로 다른 기억의 충돌은 없었던 시간으로 남곤 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기억이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없었던 순간의 기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두 사람의 기억이 온전히 똑같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사랑이 온전한 시간으로 남는 것은 드물다.(p59)

【 학규를 향한 청이의 사랑 I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겁이 났다. 아버지처럼 죽어갈까 봐, 엄마처럼 불행해질까 봐 그녀는 걱정이 많았다.'(p80) --- 스무 살 덕이, 그녀의 인생엔 희망이라는 것이 이미! 없었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지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런 덕이에게 덜컥! '하나의 우연'이 주어졌지요. 그녀가 살고 있던 S읍 소재의 군립 도서관에 학규가 6개월간 강의를 하게 내려오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게다가 학규는 덕이의 집에서, 심지어! 덕이가 쓰던 방에서 하숙을 하게되지요.


그녀는 서울에서 온 똑똑한 선생님의 모든 게 그저 새롭고 멋있게만 느껴졌다.…… 덕이는 가슴속 뭔지 모를 것이 가득 차오르는 것에 들떴다. 조금 떨리기도 했다. 학규의 뒷모습에 넋을 빼앗겼다.(p77) …… 자기가 살아 있음을 깨닫는 유일한 때는 학규와 마주칠 때였다. 그녀는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실체라는 것을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p136)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첫눈에 반해버린 것뿐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그에 대한 상상을 사랑으로 마쳤다. 문간방에 하숙을 시작한 사람이 그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엄마의 애인이 된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을 숙명으로 알았다. 그를 생각하면 이유 없이 명치끝이 저렸다.(p199)

덕이가 학규를 사랑하게 된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아파진 것에 대해서조차도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요. 그냥 그런,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음'에는 틀림없었던 그런 사랑이었던 겁니다. 그 시절 덕이는 이처럼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건가보다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스스로 알아내려하지도 않았더랬습니다. 그저 --- '그녀는 혼자서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르 상상하는 게 좋았다. 사랑이 별건가 싶었다. 그의 방을 자꾸 들여자보도 싶고 궁금했다. 그녀는 그가 잠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그녀는 문득 담배 불빛에 얼굴이 잠깐 환해졌다. 어둠 속으로 사그라지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pp120-121)'


학규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이유도 없이 시작되었고, '모든 사랑은 슬픈데, 끝나고 나면 아름다워요.'(p176)라 자신이 학규에게 했던 말이, (「롤리타」를 읽고난 후엔) '결국 사랑엔 죄나 용서도 미움이나 책임도 필요 없는 것 같아. 자책만 남아요. 그게 마음에 들어, 정말.'(pp217-218)란 말 역시, 그것이 그녀가 학규를 향해 가졌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결말이 될 것이런 것도 모른 채 덕이는 학규를 사랑했던 겁니다.


 

【청이를 향한 학규의 감정


잘나가는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였던 학규의 인생이 망가진 것은 모두 다 그의 바람기 때문이었더랬습니다. 대학원생인 조교와 육체적 관계를 지속했었고, 결국 그녀가 그 사실을 학교에 공개하는 바람에 한 순간에 그의 인생이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학교에서도 쫒겨났으며, 아내와도 이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 남 탓이었다. 모든 문제는 자기로부터 시작됐고 커졌지만, 자신 말고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했지만, 그러기에 그는 너무 젊었다.(p25) …… 그는 억울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그는 한없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는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p28) …… 후회와 반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이런 상황에 내몰린 자신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와 연관된 모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p39)

소설을 읽어가며, 인용해 놓는 부분 뒤에 저의 코멘트를 적어놓는 경우가 꽤 됩니다. 이 소설의 초반부엔 암튼 그 대부분의 코멘트들이 '뭐 이런 새끼가... / 사람이 개냐?'류의 것들이었었지요. (아무리 좋게, 인간의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뭐 이렇게 이해하려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덕이의 젊고 매혹적인 몸매에 반해 그녀와의 불장난을 시작했었을 뿐, 그에겐 덕이를 향한 '사랑'이란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자꾸만 과감해지고 가까와지려는 덕이를 향해, 심지어 S읍을 (말도 없이) 떠나버린 학규를 찾아온 덕이를 향해 그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쏘아주었죠. : "네가 사랑이 처음이라 그런 거야. 곧 괜찮아질 거야. 다른 남자 만나면 금방 잊게 돼."(p58)


하지만!!! 그런 학규가 알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었으니 그건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은 증오라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사랑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어떤 반대 감정도 알지 못했다.(p71) …… 그는 연인과의 사랑이나 공감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감정은 촌스러운 사람들이나 열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글을 쓰며 이미 그런 감정을 소진해버렸고 … 이미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갖고 싶어 하는 마음과 기대감, 그리고 가져야만 충족되고 다시 비어버리는 욕망의 순환만을 간직하고 있었다.(p197)


 

【 학규를 향한 청이의 사랑 II


세월이 흘렀고, 변해버린 학규의 모습에 덕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에 대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지나간 사랑의 다른 이름은 복수다. 그것은 원래 한 몸이어서 변화하는 과정이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계기가 필요한 것뿐이었다.(p141) …… 사랑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이 아니라 상처뿐이었다. 무뎌진 감정의 자학 뿐이었다.(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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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작품 속에 나타나있는 학규의 육체적 사랑2과 덕이의 이유도 없이 시작되었던 사랑, 그 상반된 모습의 두 사랑에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게만 됩니다. '이런 게 핑계겠지만 말이야, 문학을 하면 말이다, 살면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들게 돼.'(p91)란 학규의 말에, 첫 대면에선 '구질구질하다'란 느낌이 들었었고, 실제로 겉으로는 학규의 생각/사랑에 동감한다라 말 할 수도 없었었지만!!! --- 계속 읽어가다보니 뭔가 사람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어야만 하는 그런 '진짜 마음'을 학규의 사랑이 자꾸만 건드린다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심지어! '그녀는 집 대문 앞에 설 때마다 남편이 죽기를 바랐다'(p118)란 팽 마담의 마음까지도 그 바람(願)이 남편과 덕이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이처럼 '사랑'이란 것에는 항상 아름다운 면만 있는 건 아니다라는 걸 이 한 마디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학규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떤 덕이의 마음이 끝내 --- '굴곡진 인생이 모두 아픈 아버지나 죽은 엄마, 자기를 버린 학규 때문에 망가진 거라고 여겼는데 아닌 것 같았다. 삶이 틀어지고 인생이 어긋난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p317)라 변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자기 때문이란거죠? 덕이의 이 독백은 결국 "​사랑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란 첫 장의 문구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작품 속에서) 증명해내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밖엔 보여지지 않습니다. 학규나 덕이를 통해 표현된 작가의 사랑관이, 그 독특함과 숨겨진 것을 보여내는 점에 있어서 정말로 황홀할 정도로 맘에 들었었거늘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180도 변해버리는 것에 정말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시 눈을 뜨게 된 학규, 그리고 그것이 덕이와 청이의 망막이었다라는 설정에선 할 말이 턱... --;;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희생이다' 혹은 '희생이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정녕 작가들이 이겨낼 수 없는 불가침의 한계인걸까요? 뭔가, 뻔뻔한데다가 심지어! 성공까지 하게되는 '불륜'을 그려내는 소설은... 정녕 찾아볼 수 없는 것일른지요...



덧 1> 작품 속에서 작가는 '시점(時點)의 변화'를 너무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독자가 자신의 머리를 굴려야하는 잇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안좋게 보자면 소위들 말하는 'grand design'을 만들어내지 못하겠는 작가의 능력 부족을 숨기기 위한 장치가 아니냐는 비난도 나름 가능할 듯도 싶. --;; 

덧 2>​ 정우성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더군요. 검색을 해보니 덕이 역을 맡은 여자 배우는 첨 보는 배우였는데, 모델 출신이랍니다. 소설 속에서 학규가 덕이의 몸매를 보고 감탄하며 성욕을 느끼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걸 보면 당연(?)... 한 캐스팅일지도 모르겠. ^^


 



 

  1. 결국 학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 '그는 종종 자기가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양딸을 사랑하게 되어 둘이 멀리 여행을 떠나는 도중 사라진 롤리타를 애타게 찾으러 다니는 여정이 자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여겼다.'(p280)
  2. 학규의 감정 역시 여러 '사랑'의 하나라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이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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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 그러나 신용은 은행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이건범 지음 / 피어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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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군이 유치원생 때, 저와 즐겨했던 놀이 중 하나가 단어 거꾸로 말하기였더랬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차'하면 종원군은 '차기'라 말해야 하는 것이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아빠'했더만 이 녀석이 '빠~압!'이라 대답을 했었어요. 왜 '빠아'라 안하고 '빠압'이라 했냐 물어보니 '압빠'라 말했으니까 '빠압'이라는겁니다. 그래 '아빠'의 제 발음을 유심히 한두 번 해보니 진짜로... '아빠'가 아닌, '압빠'라 제가 발음하고 있었더군요. (헌데 이게 저만의 발음 문제는 아닐 듯도 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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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처 사장님 중에 지난 몇 년 사이 회사를 꽤 크게 성장시킨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언젠가 그 분과 점심을 하며 서로의 지나온 이야기를 하게 되었었는데, 그 분 왈 --- 예전에 자신이 모시던 사장님이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던 분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정치한다고 --;;) 그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망해가셨노라고, 그래 자신이 그 회사를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그때 했던 단 하나의 결심이 다름 아닌 '이전 사장님이 했던 방식과 꼭 반대로만 해보자!'라는 거였다는 겁니다.


앞서 읽었던 「지식경제학 미스터리」에 수록되어 있던 다음의 구절 - "과학은 과거에 대한 장례식을 하나씩 치르며 발전해간다"라는 말이 (위 사장님의 경우에서처럼) 오로지 학문의 발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꺼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라는 뜻이 아닌, (나의/타인의 과거를 디딤돌/반면교사 삼아 미래를 설계해간다라는 관점에서 보아) '과거로부터의 배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면 이 말은... 한 개인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질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심지어는 그리 되어야 한다라고까지 말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미 성공한 자가 이야기해주는 '자신의 성공사(史)'에는 항상 어느 정도/상당 부분의 미화와 왜곡이 가미되어질 수 밖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택한 '미화와 왜곡'이란 단어가 지나치다면, 이 책 「파산」의 저자가 쓴 표현처럼 '성공담에서 사회적인, 역사적인 운(運)은 대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그들의 인간 승리만이 비춰진다'(p13)라 해도 상관 없습니다.  


「장사의 신」이란 책을 소개하면서, '이미 성공한 자의 성공스토리'에 대해 그리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와 똑같이... (예를들어) '이미 병나음을 받은 성도의 간증'이란건 어쩌면... 그렇게 병나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그렇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한 무책임한 자기자랑일 수도, 혹은 지금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당장 병원을 뛰쳐나와 기도원으로 들어가라라 충동질하는 것이 아닐까와 같은 의문들을 같고 있었었습니다만...

- 「아빠는 목사! 아들은 동자승?」의 감상문 중.

이 책의 저자 역시 '사업이든 뭐든 간에 성공한 남의 이야기에서 배울 건 그다지 많지 않다'(p13)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흡사 제가 만났던 거래처 사장님의 경우에서처럼) "과거에 대한 장례식을 하나씩 치르며 발전해간다"식으로 실패한 자의 실패담1을 보며 나의 과거/현재/미래를 진단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경매'를 통한 재테크가 은근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가봅니다. 물론! 정당하게 번 소득을 가지고 ('법이 허용하는'이란 의미에서의)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불려가겠다라는 것 자체를 욕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경매 재테크란 것이 그 다른 상대방, 그러니까 자신의 재산을 '경매'로 날려버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라는 점에서 보자면 분명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라 말하는 것에 역시나 '아니다'란 선을 명확히 그어낼 수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 위에서 언급했었던, 자신이 모시던 사장의 실패 과정을 보며 난 그 사람과는 정반대로 해야겠다라 했던 거래처 사장님의 말, 더 나아가 "과거에 대한 장례식을 하나씩 치르며 발전해간다"라는 식의 미래 설계는 사실 한 편으로 (그 대상인 이전 사장의 그것을 인지하고 있느냐와는 전혀 관계 없이) 매우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요즈음의 슬럼프를 이겨내기 위해, 옛 시절의 즐거움을 떠올려보겠노라는 의미로 「지식경제학 미스터리」라는, 말랑하지 않은 경제학 책을 골랐었노라 썼었습니다. 이처럼 왼팔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오른팔에 더한 고통을 일부러 가하는 방법이 결코! 제 정신의 의사가 환자에게 해주는 치료가 될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의 현실을 보자면 ---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으로 나의 처지에 대한 위안을 받는 일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본다면, 비록 그 '위안'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나의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한 저 스스로 그러한 '위안'은 도덕적으로도 절대 옳지 않다라 생각하고 있음에도 어쨌든! 그러한 위안을 종종 (비록 작위는 아닐지라도) 거부하지는 않았었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심지언!!!

성공한 자, 혹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자의 이야기에 부러워하게 되는 마음은 가지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reference일 뿐, 나의 롤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만 하는, 그렇게 또 다른 '실패'의 경험으로 「노인과 바다」를 읽었었던 것과는 달리 --- 오히려 (현실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권장할 수는 결코 없을)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윌리 로먼의 심리와 그의 선택에는 차라리 훨씬 더 커다란 공감을 가졌었기도 했던 겁니다. 제 몸 속에 두 개의 완전히 상반된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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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운동권 출신의, 이후 미디어 사업으로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일구워냈었던, 하지만 결국엔 '파산'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던 삶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의 저자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히 이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안을, 어떤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기 바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타산지석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타산지석, 즉 남의 경험을 보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도 잘 안다. …… 혹시나 당신이 내 파산 시점처럼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이 책에서 약간의 위안과 용기만 얻는다면 난 글쓴이로서 몹시 만족할 것이다.(p18)

제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마음 중 하나인,  '실패한 자가 보냈던 과거의 여집합으로서 나의 미래를 계획한다라는 건 너무 잔인하다'란 생각에, 이처럼 저자는 미리 '최소한 나의 과거로부터는 그리해도 괜찮다'란 말을 미리 해주고 있는 거지요. 덕분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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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아 <창업 - 성공 - 실패>의 단계를 적어내고 있는 책입니다. --- 책의 제목은 「파산」이지만 정작 '파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질 않아요. 오히려! 하나의 기업을 만들어 성공의 길을 달렸고 또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던 저자가, 현재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업을 경영해가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 - '나는 어떻게 성공했었으며, 왜 망했는가' - 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대학 졸업 후, 아는 선배가 사장으로 있던 용산의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에서 영업 일을 하는 것으로 저자는 사회 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 역시 여기저기서 들어 대략은 알고 있는 바 대로) '용산'이라는 곳의 생리는 운동권 출신의 저자에겐 결코 맞지 않았었지요. 결국 그 회사를 9개월만에 나오게 되었던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세상일이 이렇게도 풀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이런 결과를 우리 사장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난 그 결과가 다행이긴 해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는데...(p55) 

제가 종종 사용하곤 하는 문구인 '1+1=365' --- 이 등식에 대해 사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저자는 그렇게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저 역시 여전히 당연하다 받아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15년 간의 사회생활은 저에게도 역시 이 등식에 '화내지는 않고 눈 감아 버릴 수는 있게' 만들어주기는 했지요. --;;) 이에 저자는 퇴사 후 2주 만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품은 꿈을 내 방식대로 펼치고 싶었다. ……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런 즐겁고 인간적인 회사를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 '자유로운 인격체들의 민주적 결합'이 내가 직원들에게 내건 구호였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하면서 했던 말일 거다.(p59) …… 내가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그건 내가 사장이라서가 아니라 매우 열심히 일을 잘하는 선배라서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p72)

운동권 출신임이 한껏 느껴지기도 하며, 혹여는 '책에 써내기 위해 지어낸' 지극히 이상적(理想的)인 문구라 힐난받을 수도 있는 여지를 지닌 글입니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저자의 이러한 신념이 상당히 구체적이었으며 또한 철처하게 실천으로 이행되었었다라는 걸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했기에 (비록 작기는 하나) 저 역시 한 기업의 최종 책임자로서 저자에게 참으로 커다란 부러움을 가졌었던 부분입니다... 만!!! --- 사장이 생각하는 '즐겁고''인간적인'이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발현되는 모습과, 그것이 직원들에게 느껴지는 모습이 과연 일치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을, 저자가 혹여 간과한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이 부분을 읽어감에 있어 들었더랬습니다. (절대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게 중엔 '많은 급여'가 곧 '즐거움이고 인간적임'과 동일시되는 직원들도 분명 있었을 테고, 그러한 그들의 선택은 '즐거움이고 인간적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이들과 선택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동일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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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깊이 공감했었던 구절들을 정말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만, 그 중... 가장 제 마음을 아프게 했었던 것이 바로 다음의 인용구였었습니다. --- (앞서도 언급했었지만) 결코! (최소한 저로서는) 치기어린 한 이상주의자의 목표였었다라 말할 수 없는 저자의 신념은 이내 현실의 벽 앞에서 점점 무너져가게 되었죠.

나는 힘을 쌓아 내가 젊은 시절 꿈꾸던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이 생각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 힘의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몰랐다.(p17)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p114)라는 이 흔하디 흔한 표현이 결코!!! 일 개인의 수준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이 책을 읽어가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육체'가 회사라면 그 속에 속해있는 인적 자원들은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 아무리 올바르고 가치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 정신을 발현시키는 육체가 온전치 못하다면 어느 새... 그 정신마저도 결국엔 피치 못하게 변질될 수 밖엔 없지요. 그리고 그러한 변질은 그 누구에게보다 '최종 책임/결정권자'에게 가장 먼저 스며들 것이고요. 이는 저 스스로의 경험에서도 익히 체험했었던 바였기에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이라는 저자의 표현이 그토록 제 마음을 바늘로 찌르듯 찔렀었다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이 책을 읽어갔던 시간은 사실 내내... '슬픔'이었더랬다는... --;;)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행복이 오래가 무디어지는 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행복일 수 없다.(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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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닥쳤었던 외환위기와 이후의 경영난을 겪어가며 저자는 한 순간이나마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었다라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얻어낸 교훈은 '살아남아야 좋은 날도 본다'(p109)였었으며,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도 '생존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p105)라는 결심이었었죠.

하루의 절반을 안락하게 살고자 하면 나머지 절반의 시간에 사람으로서 참기 어려운 모욕과 멸시에는 눈을 감아야 하는 세상이다. 하루를 온전하게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그러면 우리는 남들이 사는 법을 부러워해선 안 된다. ……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pp94-95)  

하지만 끝내...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회사의 상황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앞에선 자신의 이상을 무너뜨릴 수 밖엔 없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예의 '정신'이라 칭해질 수 있는 '회사의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요.

'자본가'는 타락하지 않으면 몰락한다. 악독하게 판단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결단하지 않으면 어영부영하다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르던 선량한 무리마저 죽음의 계속으로 떨어뜨릴 위치에 서 있는 거다. 한데 난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회생의 기회도 놓치고 상처를 상처대로 주고받아야 할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말았다. 나를 잡아당기는 과거의 힘과 미래의 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이다.(pp156-157) …… 상반된 두 가치의 공존은 쉽지 않았다.(p153) 

……………………………………………………………………… 

​결국 저자는 회사를 청산하고 '개인파산'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이 '회피'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독자마다 다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저의 독해에 한해서만큼은 저자가 치사한 방법의 마무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라 생각합니다.) 이 '청산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어내고 있지요.


​왜 마음이란 놈은 비우면 비울수록 무거워지는가?(p168) …… 현실을 직시하려 해도 똑바로 볼 수 없는 상황. 아니 똑바로 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속의 몸부림이 계속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으리라. 우리가 모두 아득바득 흘린 땀과 나의 청춘, 주변에서 보내던 기대 어린 시선, 그리고 어렵사리 끌어온 생존의 공동체..., 이런 것들을 모두 날려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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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저자는 코닥과 후지필름의 예를 들며, 스스로에게 결코 비굴하지 않은 위로를 해주고 있습니다. --- 선도적 기술의 기업이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마저도 실행했기도 한 회사였지만 코닥은 시대의 변화를 잘못 읽어낸 탓에 결국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저자는 '어떤 기업이 망했다고 그 기업과 기업주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평가받아야만 하는가?'(p252)란 질문에 대해 자신은 '일등만 기억하겠다는 광기의 시대에 일등이 되려다 시험 출제 범위를 착각해 낙제한 바보였다고나 할까?'(p252)라는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놓은 저의 글만으로는 이러한 자위가 '어쨌든 결국엔 실패한 자'의 구차한 변명2으로 보여질 지도 모르겠으나, 이 책을 다 읽어보면 분명... 저자의 이러한 위로에 그 누구라도 '나의 작은 한 손'이나마 얹어주고 싶다란 생각을 하게 될꺼라 믿습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복지' 문제를 거론하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지으며, 진중권이 명명했던 '한국의 천민성'을 연상시키는 다음의 구절을 적고 있지요.3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은 …… 심각한 양극화와 남을 밟고서라도 앞서가야 한다는 이기심, 나보다 약한 자라면 주저 없이 무시하는 노예근성,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하지 못하는 천박함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힘이 우러름의 잣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힘을 올바름이나 멋과 똑같은 뜻으로 풀이하는 세상이 되었다.(p246)

비록 이러한 현실을 <신인간기업>이라는 변화를 통해 바꾸어보려했던 자신의 실험은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그렇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마저도 실패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기업의 경영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로 담겨져 있는 책이기는 합니다만, 다음의 구절들만으로도 충분히!!! 그 누구에게나 꼭 한 번은 읽혀져야하는 책이어야 한다라 생각하게 됩니다. 책의 본문을 너무도 많이 인용한 감상문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염려가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구절들은, 이 부분을 읽었을 때부터 꼭! 이 감상문에 인용하리라 마음먹었었기에 옮겨보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 이건범C의 책을 만나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만, 마치... 예전에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읽고 그 책의 저자 김형민C에게 홀딱! 반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오랫만에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었었네요.)


● 당신이 경영하고 있는 사업의 가치는 얼마라고 평가하는가? 아니 당신의 인생은 얼마라고 평가하는가? 누구의 삶이든 값지지 않은 삶은 없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인생일지라도 누가 당신에게 그 인생과 바꿔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쉽게 수락하기 어려울 거다. 나에게 장동건이나 노무현의 삶을 살라고 하면 난 분명 거절할 거다. 그만큼 내가 쌓아올린 내 인생의 가치는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삶을 남들이 꼭 그렇게 평가해줄 까닭은 없다. 그러니 기대보다 당신이 평가절하된다 하여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는 마라.(pp192-193)


● 살다 보면 기억하기보다는 잊고 싶은 일들이 더 많다.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내 주장을 펼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내가 유혹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드는 대목들이 우리 인생에는 즐비하다. 반대로 기억해야 할 고마움과 즐거움은 의지와 달리 쉽사리 까먹는다. …… 우리가 자라면서 몸에 입게 된 외상(外傷)의 자국은 나이가 들어도 잘 없어지지 않아 늘 거슬리지만, 몸이 성장하는 경과를 우리는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지 않는가? 남은 자국으로 그 상처는 기억하지만 몸 곳곳이 자라고 근력이 커지는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듯 잊고 싶은 기억의 상처는 깊이 패어 있게 마련이고 즐거움과 행복은 벽에 살짝 그어놓은 금에 다시 키를 재어보았을 때 느끼는 성취감처럼 아주 일순간의 가벼운 만족으로 그친다.…… 우리는 상처와 짧은 행복의 기억을 버팀목으로 삼아 삶을 살아간다. 두 가지 가운에 어느 힘이 더 클까? 사람들은 상처가 준 아픔과 분노를 잊지 말라고 채찍질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처는 그것을 입었던 상황의 기억은 남아도 그 상처를 입을 당시의 아픔이 동일한 강도로 생생하게 남지는 않는다. 반대로 즐거움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지라도 우리 몸과 마음 깊숙이 퍼져 은밀하게, 아주 은밀하게 우리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pp271-272)


● 아이들에게, 당신의 자녀에게 꿈을 물어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어보라. 우리는 그 누구나 관성적으로 막살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모두 고귀한 인간이다.(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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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 쓰여져 있는 단어를 '압빠'라 발음하고 있었다라는 걸, 저 스스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빠'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저의 목소리를 타인의 귀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발음해봄으로써야 비로소!!! 그것이 '압빠'였었다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 '성공'이 아닌, '처참한 실패'를 그 마지막 모습으로 가지고 있는 저자가 써낸,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이 이야기는 그렇게... 자신의 현재 모습을 '성공'이라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도, 혹은 '실패'라 자책하고 있는 이에게도, 혹은!!! 주위에 그러한 '실패'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이에게 '해법이 아닌 용기를 주고 싶어하는4' 당신에게도 꼭 필요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건네어주고 싶었다는)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성공했던 자의 실패'는 분명코... '실패만 하는 자의 실패'보다는 훨씬 더 많은 교훈을 안겨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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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그 '위안과 용기'를 분명 느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왜 그런 건지 알고는 있으나,차마 써내지는 못하겠는 이유로) 참, 많이, 째지는 것처럼, 아프기만 하네요. --- '우리가 성공이라 여겼던 것이 성공이 아니었듯, 우리가 실패라 여겼던 것이 실패만은 아니란 점'(p6) : 이 말이 부디... 저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를, 또한 저의 현재와 미래를 부축해줄 수 있는 한 마디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래어 봅니다.

  


 

  1. 저자는 이러한 '실패한 자의 실패담'을 정작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실패의 기록은 쓰기 어렵다. 성공의 기록은 성공한 현재가 있기 때문에 구성이 쉽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물거품을 원래 모양대로 재구성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기록을 남겨야 할 사람의 마음이 갈가리 찢긴 상태일 테니 더더욱 진도 빼기가 어렵다. 그런 이유로 실패를 기록하는 사람이 드물고, 그래서 실패의 기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무엇이든 세력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의 눈을 끌지 못하는 법이니, 실패의 기록이 많이 나오지 않는 한 실패를 다룬 책은 잘 안 팔릴 것이다. 그래서 또한 사람들은 실패를 기록하지 않는다.'(p12)
  2. 물론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 기존의 기업 경영자들에 대한 찬사와 부러움도 표하고 있습니다. --- "크기야 어떻든 회사를 꾸준히 경영하는 사람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부럽다. 그들은 분명 한 가지씩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p252)
  3. 앞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회사의 직원들에게 했다는 연설문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고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이 무슨 목표를 갖고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모든 사람이 나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한다는 착각에서만 벗어날 수 있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더라도 사람이 태어나서 오늘 날 모여 있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겪어온 역사는 그 머리 숫자만큼 다양하므로 우리가 미래에 대해 똑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고 과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는 나쁜 것은 나쁘다'는 정도의 진실만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돈만 아는 놈은 나쁘다. 자신의 개인적 욕심 때문에 남을 배신하는 놈은 나쁘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많은 것을 바라느 놈은 내 피를 빨아벅는 흡혈귀다. 책임만 내세우고 권리를 무시하든가 거꾸로 권리만 내세우고 책임을 회피한다면 훌륭한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 등등. 이런 부분에 대해서만 우리는 공유하려 하자. 내가 이렇게 소극적인 인간론을 내세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의 문화구조가 갖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어떤 정통적인 것을 사회적으로 확립해 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냉정하게 검증받을 기회가 없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은 옳다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짙다. 즉 남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듣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그래 떠들어아. 너 말 잘한다'하는 식의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태도, '나는 나대로 산다'하는 식의 이상한 주체성 등이 그득하다. 결국, 모두가 자기 머릿속에 자기만의 완결된 세계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 완결된 우주의 질서를 부인하는 사람과는 거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끝없이 피곤해진다는 경험을 이미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자 별 소득이 없고, 괜한 시간 낭비이거나 아니면 자기만 피해를 보는 경우가 숱했으니까."(pp81-83)
  4. "난 지금 너에게 용기를 주려는 거야. 해법을 주려는 게 아니라."(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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