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3
오스카 와일드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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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사실 모든 기쁨에는 쾌락과 마찬가지로 잔인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p175)

●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천국과 지옥을 함께 갖고 있어요.(p209)

1886년에 발표되었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통해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한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과 악의 성향'을 분리해 냈었었지요. 제가 그 작품을 읽고 대단하다!라 느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 '개인'이 가분(可分)의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던 당시에 처음으로, 한 인간의 본성과 하비투스를 분리해 보려는 시도를 했었었다라는 것 때문이었더랬습니다. 이후 1897년, 허버트 조지 웰스는 「투명 인간」을 통해 한 개인을 아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분리해낸다는 발상을 선보여주었었으나, 아쉽게도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커다란 우산을 벗어나지는 못했다라는 느낌만을 저에게 주었었지요.


역시나 이들과 같은 영국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1는, (그 두 작품의 중간 시기인) 1891년에 발표한 이 작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한 개인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한다라는, 또 다른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 자체가 새롭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겠습니다만!2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특징을 '스토리 텔링에의 집중'으로 잡을 수 있다라면, 「투명 인간」은 (스토리 텔링 보다는) 뭔가 철학적 함의를 독자들에게 안겨주려 한 듯 싶으나, (최소한 저의 독해로는) 매우 설익은 내용일 뿐이었었다라면 --- 이 작품은 (위 두 소설의 중간 시점에 발표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작품의 특징을 적절하게 잘 조합해 내고 있다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 두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에는 작가의 개입이 너무도 많다는 단점이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더군요. ('헨리 워튼'이라는 등장 인물을 앞세워, 자신의 지식을 담아내리라 아주 작정이라도 한 듯한 현란한 서술과 묘사들은3 이 작품의 <서문>에서부터 정말로 무시무시한(!) 전조를 보여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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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아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었습니다. 그런 그를 본 화가 바질 홀워드는 사뭇 '숭배'의 경지로까지 도리언에게 매혹되어 그의 전신 초상화를 그려냈지요. 바질은 자신의 친구인 헨리 워튼에게는 도리언을 소개해주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 이유는 헨리의 독특한 사고가 도리언의 맑고 깨끗한 정신에 때를 묻여 자칫 그의 외모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해서였었습니다...만!!!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라는 노랫말처럼 헨리와 도리언은 서로를 알게 되었고 심지어 도리언은 헨리를 매우 좋아하게까지 되버립니다.

헨리 역시 도리언의 매력적인 외모와 젊음에 감탄을 하며 부러움을 표합니다만, 도리언의 젊음 역시 유한한 것이며 젋었을 때 그 젊음을 한껏 즐기라, 순진하기만한 도리언에게 충고해줍니다. 그리고는... 훗날 도리언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결정적 두 마디를 건네 주지요.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거예요. 유혹에 저항하려 들면, 당신 영혼은 스스로 금지한 것에 대한 갈망과 기이하고 비합법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병이 들 겁니다.(p32)

지킬 박사는 하비투스로부터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었지요. 그러했기에 스스로 금지한 것들에 대한 갈망과 욕망에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하이드'로의 변신을 꾀하게 되었던 겁니다. 「투명 인간」의 주인공 그리핀 역시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되어 얻게 되는 불가시성(不可視性)으로부터 얻게 될 '비밀, 힘, 자유'로 인해 자신이 어떤 죄악을 저지른다 해도 벌 받을 염려가 없다라는 점에 뿅갔었었지요.

도리언 역시 세월이 흐르면 인간의 외모는 추하게 변할 수 밖에 없다는 헨리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라는 것에, 단순한 아쉬움의 차원이 아닌 사뭇 두려움까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매우 흥미롭고도, 작품 전반에 걸쳐 매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 바질 홀워드가 도리언과 헨리 워튼이 서로 알게 되지 않기를 바랬었다라 했지요. 바질 홀워드는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말게. 자네가 끼는 영향은 좋은 게 없거든"(p26)이라며 헨리 워튼에게 부탁까지 했었습니다만, 이에 대한 헨리 워튼의 대답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좋은 영향이란 없는 거예요. 영향이란 게 모두 부도덕한 것이지. ……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주는 것과 비슷하단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게 되고, 자신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도 못 한다는 겁니다. 선함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닌 것이고 죄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혹시 죄라는 게 있다면요."(pp30-31)


​헨리 워튼의 그 몇 마디의 말에 도리언 그레이는 '늙어간다'라는 것에 전에 없던 충격을 받게 되고4, 무심결에 다음과 같은 기원을 뱉어버리게 됩니다. 뭐 그냥... '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수준의 그런 바램 말이죠.


"오직 젊음만이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나는 내가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예요.(p42) …… 저는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는 모든 것에 질투를 느껴요. 당신이 그린 내 초상화에도 질투를 느껴요. 내가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을 이 초상화는 간직하고 있잖아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점점 잃어버릴 텐데 이 초상화는 계속 가지고 있겠죠. 아, 반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을 나는 항상 그대로 젊음을 간직하고 이 그림이 변한다면!"(p43)

예의 소설은 도리언 그레이의 그러한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 그러한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가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하는 '만약 그런 일이 내게 생긴다면!'이라는 간접적 경험의 맥락으로 보아) 그러한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도리언 그레이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그럼으로 하여 어떻게 변화하여 가는가를 보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메세지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반응과 변화'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나 「투명 인간」에서도 모두 볼 수 있었던 내용들입니다만, 두 작품들은 그 '반응과 변화'에 보다는 '원상 회복의 가능성'에 더 큰 강조점을 둠으로써, 애초 그러한 '바램'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었다라는 메세지5​ 보여주고 있었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원상 회복'을 원치 않지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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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젊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설정이 비록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어가주는 핵심적 모멘텀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는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수많은 '비현실적 소망들' 중 하나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나의 외모가 젊음을 ('영원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램은 한 번쯤 다 가져보는 거니까요. 고로, 이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점은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는) '젊음의 유지'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며, 그러하기에 세상과 점점 더 많이/오랫동안 접촉을 하게되면서 변화해가는 나 자신의 변화 과정을 마치! 제 3자인것처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 바로 핵심이 아닐까 싶은 겁니다. 예를 들어, '나'는 매일 '나의 얼굴/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기에 하루 상관에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알아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들이 쌓여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 때! 정작 '나 스스로'는 나의 (미세한 변화 뿐 아니라 결정적) 변화마저 알아채지 못하거늘, 오랫만에 만나 본 나의 친구는 그러한 나의 변화를 쉽게 알아보곤 합니다. 바로 이 점! --- 단순한 의미에서의 외모 뿐 아니라, 나의 변화된 내면과 그 내면을 반영하는 외모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제 3자적 거울'을 도리언 그레이는 획득하였다는 겁니다.7 물론, 현실의 도리언 그레이의 외모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즉!!! 도리언 그레이의 내면과 외모는 분명 변화하고 있는데, 더욱이 그 내면의 변화는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는데! 그런 변화를 반영하는 외모의 두 가지 변화, 즉 죄악의 흔적과 노화의 흔적들은 전적으로 현실의 도리언 그레이가 아닌 초상화 속 도리언 그레이에게로만 반영되어 나타난다라는 겁니다. --- 이거... 꽤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설정 아닙니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경제학의 대명제는 경제학 교과서에서만 위세를 떨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도 그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헨리 경이 처음으로 도리언의 마음 속에 불어넣었던 인생에 대한 호기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점점 더 커져 가는 것만 같았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욕망에 괴로웠으며 채우면 채울수록 허기는 커져 갔다.(p176)

​위와 같은 도리언 그레이의 심리는 사실 지금의 우리들 모두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현실에서는 경제적인, 도덕적인 제약들이 우리의 무한히 뻗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붙잡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소설 속의 도리언 그레이에게는 그러한 제약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과 자신의 초상화! --- 이 두 가지로 인해 그의 욕망은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속도를 점점 더 높여만 가게 되었고, 예의 더 많은/강한 쾌락을 원하게 되었지요. 여기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러한 '쾌락주의'에 단지 하나의 제약을 얹어놓음으로써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쾌락주의의 오명을 간단히 벗겨 주고 있습니다. : '새로운 쾌락주의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 부활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청교도주의로부터 삶을 구해 내야 한다. …… 쾌락주의는 인간에게, 그 자체가 한 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의 매 순간순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p178) ---  즉! 일시적 쾌락을 그저 아무 생각없이 즐기겠다다라 생각하지만 말고, 그 순간의 쾌락마저도 '최선을 다해' 즐겨야 한다라는 책무를 가져야 한다라는 거지요.

이러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서술이 직설화법인 것인지, 혹은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의 「롤리타」에서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보여주었던) 역설과 같은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릴 능력은 없습니다만 --- i) '성공한 불륜'같은, 뭔가 인간의 본성에 힘을 실어주는(?) 투의 스토리를 원하는 저에게는 부디! 이것이 작가의 직설화법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보기는 하지만, ii) 당시의 시대를 고려해 본다면 역설적인 서술, 그러니까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라는 방향을 결론내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어쨌든!!!


 

"스스로가 주인인 사람은 기쁨을 만들어 내는 것만큼 슬픔도 금방 끝내는 거라고요. 나는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감정을 이용하고, 즐기고, 지배할 것입니다!"(p151)

도리언 그레이는 아편의 도움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을 '이용하고, 즐기고, 지배'하려 했었으나, 오랫만에 들춰 본 초상화 속 자신의 일그러지고 흉측해진 얼굴을 보고는 극적인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지요. 단! 지킬 박사나 그리핀이 다시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가 '현재의 모습에 대한 불안/불만' 때문이었다라면, 도리언 그레이에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는 여기에 '현재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 더해져 있다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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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박사와 하이드」와 「투명 인간」, 그리고 이 작품에서 보여지고 있는 각기 다른 '분리'의 모습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 2015년을 살아가고/내고 있는 '박OO'라는 실제의 인물과, 네이버 상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가살가죽'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캐릭터 간의 간격이 바로!!! '저의 본성과 하비투스의 분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분리' 역시, 실제의 제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현실의 저와 네이버 상의 저를 거의 완벽하게 분리시켜놓았기도 할 뿐 아니라,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는 변명을 앞세워 보기는 하겠지만) 결과적으론!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만들어진/만들어낸, 일종의 '이런 사람이, 이런 남편이, 이런 아빠가 되고싶다!'라는 저의 바람(願)들을 이 블로그에 조금씩 쌓아왔던, 그리하여! 어느덧 만 11년을 넘긴 현재엔 사뭇, '가살가죽'이란 캐릭터를 이제와 '실제의 제 모습'으로 돌려놓고 싶다한들, 이미 엄청나게 쌓여진 퇴적들이 그것을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을 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은근 심각하게 해보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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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마지막 결말은 지금의 시대적 상상력에 비추어 본다면 사뭇 허망하다 말해질 수도, 뭔가 끝장을 보아주길 항상 기대하고 있는 저에겐 적잖이 아쉬웠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지 않은 무언가를 바라고, 그것이 가능해졌음으로 얻어졌을 때, 결국엔 인생이 불행으로 끝맺음될 수 밖에 없다'라는 19세기적 교훈을, 왜 신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그러한 삶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금처럼 '마음 속에 이루어질 수 없는/이루어지지 않는 각자의 바람(願)들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만드신건지에 대해, 그처럼 '채워질 수 없는 부족함'이야말로 삶을 '행복'이라 느끼게 만들어주는 원천임을, 21세기의 우리들이 여전히 배워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다라 생각됩니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는 매우 유치한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의미에서 다음의 문장이 어쩌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헨리 워튼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말하고자 했던 '그 자체가 한 순간에 불과한 우리 인생의 매 순간순간에 전념'해야 한다는 '새로운 쾌락주의'의 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언젠가 헨리 경이 흰 장미와 같다고 했던 자신의 소년 시절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너무나 그리웠다. 도리언은 스스로를 더럽혔고 마음을 타락으로 채우고 공상에는 공포감만을 심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쁜 영향만 주었고, 그렇게 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쾌락을 경험했음을 깨달았다. …… 그 모든 일은 돌이킬 수없는 것일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 차라리 살아가면서 죄지을 때마다 확실한 처벌을 바로바로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처벌은 영혼을 정화해 주기 때문이다. 대단히 공정한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기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가 아니라 '우리 죄악을 벌하여 주시고'가 되어야 했다.(p293)

※ 동일한 설정의 작품들 : 지킬박사와 하이드」 · 「투명 인간


 

 


 

 

 

 

 

 



 

  1. 정확하게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2.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 이 작품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주제를 따르고 있다라 밝히고, 하지만 자신이 (그 주제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했다라 말했다고 합니다.
  3. 이러한 서술과 묘사는 <11장>에서 절정의 보여주고 있는데, 2015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에게는 매우 지겨운 부분이기만 했었습니다.
  4. 물론! 헨리 워튼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도리언 그레이에게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러한 도리언 그레이의 변화와 충격을 지켜본 헨리 워튼은 '영향이란 게 모두 부도덕한 것이지'라는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 '넓은 의미에서는 이 젊은이가 자신의 피조물인 셈이었다. 헨리 경이 그를 조숙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게 중요한 점이었다.'(p84)

  5. 이는 결국 인간을 창조한 신이 옳았다!라는 것이겠지요.
  6. 물론 순간순간 애초의 바램을 후회하기도 하나 모두 일시적인 것들이었지요.
  7. 사실 현실의 우리에게도 그러한 '제 3자적 거울'이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이라든가 종종 만나는 친구들, 직장의 동료들 모두 '나의 언행들' 그리고 그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나의 변화'들에 대해 (거울처럼 즉각적이지는 못할지라도) 반응을 표현해주곤 하니까요. 이처럼 작가는 '우리도 타인의 반응들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게 된다'라는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는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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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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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유시민이 피력했던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라는 그의 개인적 소망은, (글쓰는 이로서의 유시민을 좋아하는) 독자인 저에게는 적잖이 충격적이었더랬습니다. 그 구절을 읽기 이전까지 '나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었거니와, 더욱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구는 이제까지의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만들어지지 못한 조합의 문장이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구사카베 요 作, 「A 케어」는 그보다 훨씬 더 쎈 강도의 놀라움을 저에게, 소위 말하는 '경악'까지를 불러일으켜 주었었었다랄까요? ---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는 시점에서의 우리 육신이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현재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 기대/예상/믿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유시민과는 달리, 구사카베 요는 그러한 기대/예상/믿음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그 극한의 한계로까지 몰고 가 '너의 사지 중 일부, 심지어는 사지 전부를 잘라내어야만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그러니까/그렇게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지극히 간단하게 표현해 보자면 '합리성의 추구'와 '의료 윤리'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의사의 갈등을 통해'생명의 유지'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과연 어느 선까지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정말로 '생명의 유지', 더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내 신체의 절단까지도 진정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더 넓게 보아, 저는/당신은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위해 과연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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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삶이 의미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p364)  ……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p227) ……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것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p380)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아주 오래 전에 (아마도 이어령 교수님의 말이었던 듯 싶은) 들었던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소유의 상실 때문이다'라는 말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유'라는 것을 그저 물질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었기에,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만 --- 그 '소유'라는 것이 결코! 물질적 개념만을 내포하고 있음이 아니라, 그보다는 우정을 나눈 친구다른가 나의 가족이라든가, 더 넓게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p94) 전체를 의미한다라는 걸 깨닫게 된 지금엔, '소유의 상실' 단계 이전에 제가 경험하여야만 할 '늙어감'에 대해 벌써부터 조바심마저를 갖게도 됩니다. 물론!


'삶의 중지'를 의미하는 죽음이란 것이 반드시 기나긴 상실의 과정을 지나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존 내쉬처럼, '삶의 중지'란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p239)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건 일반적으로 보아 비교적 예외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지요.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는다.(p242)

​사실, 이 말은 매우 비관적인 시선의 표현입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 누군가는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된 현대 의학의 보살핌을 끝까지 받다가 죽음을 맞는다'라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으로 말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자 아툴 가완디 역시 '물론 우리는 결국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이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 준 것만은 분명하다'(p61)라는 (비교적) 낙관적인 쪽의 시선 역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1」라는 제목의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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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 이러한 현실이 대체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진국에서도 노화와 죽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겪는 일이 됐다.(pp15-16) 

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은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 아툴 가완디2는 현대 의학이 (그리고 그 현대 의학에 종사하는 의료인들이) '생명 연장'이라는 의료 행위의 근본적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p394)에는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라 적고 있습니다. 그 결과 --- 대장암이나 고혈압, 무릎 관절염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질환을 치료하는 데는 매우 능숙한 현대 의학은 하지만! (고혈압에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다가 대장암에 걸려) '자신이 영위해 온 삶의 방식을 보두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많은 경우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 버린다'(p75)라는 치명적 헛점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서 저자 홍기빈은 마취과 의사의 예를 들며 '목적 합리성'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 '마취'라는 의료 행위는 '수술'이라는 더 궁극적인 의료 행위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헌데! 마취과 의사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시험/자랑해 보이겠노라며 필요 이상의 마취 행위를 시행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려는 '수술'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 환자의 목숨까지를 위협할 위험성을 가지게 될 겁니다. --- 아툴 가완디는 이 책에서, 현대의 의료 행위가 흡사! 그러한 마취과 의사처럼 '목적 합리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의학은 죽음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시각도 있다. 물론 그것이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 그러나 죽음이 적이라고 한다면3, 그 적은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아군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장군을 원치 않는다. …… 모든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생이 끝이 나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 줄 의사와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 … 아무도 원치 않는 '죽음을 기다리는 창고'같은 시설에서 잊혀 갈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pp 286-287)

'목적 합리성'을 망각하고 있는 (혹은 너무 한 쪽에만 치우쳐 있는) 현대 의학은 그러하기에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다하지 않는 실수를 가장 두려워'(p335)하게 되었고, 이는 자동적으로 거의 모든 경우에서 뭔가를 더 많이 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노력을 너무 적게 하는 것만큼이나 너무 많이 하는 것도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p335)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거지요. 그리하여...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춰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p238)


이처럼 '너무 많은 노력과 너무 적은 노력 사이'의 적절한 지점,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p232)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선택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연장시켜 나가다 보면 결국엔 '안락사(Assisted Suicide)/존엄사(death with dignity)'의 문제에 이르르게 됩니다. ---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은 최초의 안락사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삼페드로의 "기쁨이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 달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지극히 경제학스러운 결론인) '삶의 지속여부는 본인 스스로에게 맡겨져야 한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었지요. 현직 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일관된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어렵다는 난관에 부닥쳐 있다. …… 근본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고통을 연장시키는 실수와 가치 있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실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문제라는 의미다. …… 그럼에도 나는 의료 행위의 지평을 넓혀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걸 돕는 일에까지 손을 뻗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 안락사에 의존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pp37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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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의사로서 저자는 현대의 의료 시설과 제도는 인간에게 죽음이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줌으로써 그 사회적 목적은 달성해내었지만4, 보다 근본적일 수 있는 문제인 '우리가 병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도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p124)에는 실패했다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시설과 제도'가 실패했다면 '우리'가 스스로 극복해내야 한다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 준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결국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라는, 즉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분명 유한한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5라고,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는 겁니다. 단!!!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그 답변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라는 전제가 충족된다면 말이죠.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pp43-44)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pp355-356)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생전 장례식'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6. 아툴 가완디 역시 이와 동일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라 말해주고 있더군요. --- 한 개인의 일생에 걸친 삶의 목표였던 '독립'이라는 것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시점'(p384)이 도래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자신의 선택이 작동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그 선택을 미리 자신의 가족 등에게 명확히 밝혀두기를 저자는 권하고 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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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는 기간에 대해 강력한 선호 체계를 갖고 있다. 고통을 짧게, 기쁨은 길게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고통이나 기쁨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정점)과 이야기가 끝났을 때의 감정을 가장 뚜렷이 기억하도록 진화해 왔다."(p365)8

(저의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전제를 강조하며!) 저자는 죽음을 앞둔 이에게 행해지는 현대 의학의 각종 치료들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으로, 이의 대안으로 등장한 '호스피스' 제도는 외려 '질병이 허락한 좁은 틈에서나마 살아 낼 여지를 찾아내, 오늘을 최선의 상태로 살게 해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저자의 견해가 그러한지 아닌지와는 상관 없이) 이러한 관점은 예의 리사 제노바 作, 「스틸 앨리스」에서도 볼 수 있었었지요.9


이 책의 마지막에 기술되어 있는 저자 아버지와 저자의 이별 과정10은, 그러하지 못했던 이별을 했어야 했던 저에게 정말로 '눈물 날 정도로'라는 표현을 쓰게 될 만큼 애잔하게 다가왔었습니다. ---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라는 뒷 표지의 문구. 나의 아버지에겐 그러한 죽음을 맞이할 현실적 준비/여유가 없었었지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저만큼은, 피할 수 없을 그 순간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정말로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기회였었다라 생각합니다. : 내가 만일 불치의 질환에 걸리게 되었다라면, 그리하여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 지극히 짧게만 남아 있다라면 그때에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려운 것은 무엇이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꺼이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p395)라는, 삶의 거의 마지막 시점에 이르러 주어질, 내 인생에 있어 마지막 질문에의 답변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라는 점, 이점이 제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그리고 더없이 소중한 배움이었음을, 그러하기에 다시 읽어 본 유시민의 다음 글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라는 걸 끝으로 이 책의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 유시민 著,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현명하게 지구를 떠나는 방법> 중



 

 

※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들 :

- 유시민 著, 「어떻게 살 것인가

- 구사카베 요 作, 「A케어

- 리사 제노바 作, 「스틸 앨리스

- 오기와라 히로시 作, 「내일의 기억


 


 

 

 

 

 

 

 

 

 



 

  1. 이 책의 원제는 「Being Mortal」 인데, 저 개인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 더 정확하게 이 책의 내용을 보여주는 번역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성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의학적 지식의 바탕에 윤리적·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내용의 책을 쓸 수 있었겠지요.
  3.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른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p18)
  4.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저자의 견해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은 듯 합니다. : '의학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보수하고 기워 가셔 유지를 하다가 신체 기능이 종합적으로 무너지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궤적은 길고도 느린 과정이 됐다.(pp53-54) --- 이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실로 꿰메어져 있는 나뭇잎'은 바로 이 문장을 표현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5. 이에 대해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사뭇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은 살 날이 무한정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청년들에게 시간은 아직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조금쯤은 낭비해도 괜찮다. 방황과 시행작오를 겪어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다. 이것을 가리켜 '청춘의 특권'이라고 한다."
  6. 물론 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라 유시민은 적고 있습니다.
  7.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러한 '죽는 자의 역할'(p380)을 준비시켜드렸고, 결과적으로 '인공호흡기도, 고통도 원하지 않았으며,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졌었다가 적혀 있습니다.
  8. 대니얼 카너먼 著, 「생각에 관한 생각 Thinking, Fast and Slow」에 나오는 문구.
  9. "저의 지난날들은 사라지고 있고 다가올 날들도 불확실합니다. 그럼 전 무엇을 위해 살까요? 오늘을 위해 삽니다. 저는 현재를 살아갑니다."(p357)
  10. pp39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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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 - 남보다 내가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한 치유의 심리학
제럴드 J. 크리스먼.할 스트라우스 지음, 공민희 옮김 / 센추리원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라노 게이치로 作, 「나란 무엇인가」는 다 읽고나서도 여전히, 그리고 종종 이처럼 그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을 읽을 때면 여지없이 항상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서는 제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단순하게 표현해보자면 --- '나'란 사람 A는 수많은 분인(dividual)들로 이루어져 있는, 즉 그저 A ={A1, A2, A3, … An}의 집합개념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혹은 장소나 시간에 따라 나(A)의 수많은 분인들 중 한 모습(Ai)이 보여진다라는, 그러하기에 '진정한 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그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었지요. 하지만!!!


그 책을 읽을 당시엔 '아!'하며 무릎을 탁 치는 공감을 했었더랬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의 주장에 자꾸만 의문이 생겨나는 겁니다. --- '진정한 나'는 없고 단지 수많은 Ai들 모두가 다 '진정한 나'이다!라하지만, 그 수많은 Ai들을 A라는 하나의 집합 안에 묶여져 있도록 만드는 무언가! (수학적 개념으로 보아도) 반드시 있어야 할텐데, 그렇다면 그 A란 건, 그것을 '진정한 나'라 지칭하지 않는다해도, 그 A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의문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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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무수한 감정에 시달리는 게 인간이다. 작은 상처에도 좌절하고 분노하며, 까닭 모를 우울함과 외로움으로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의존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후회할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기분이 좋다가도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슬퍼하기도 하고 무기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좌절하기도 한다. 내 속에 나도 모르는 내가 많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경우가 많다. 이는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다. 문제는 감정이라는 녀석이 정상의 궤도를 벗어나 경계를 넘어설 때 일어난다.(p6)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인, '내 속에는 나도 모르는 내가 많다'로 시작되는 책이었습니다. 정신의학과 교수와 심리 전문 기자가 함께 쓴 이 책은 그러했기에, 비전문가라 할 수 있겠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경험으로부터의 인식'이 아닌, '사실에 기인한 인식'을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저에게 주었었었죠.


이 책의 저자들은 예전에 비해 각 개인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의 변화'때문이라 주장합니다. --- "과거에 비해 사람들 사이의 접촉면은 넓어졌지만 그 뿌리는 약한 시대에 사고 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질 수 있지만, 사랑이든 우정이든 신뢰든 오래가는 관계는 얻기 어려워졌다. 우리의 감정만 롤러코스터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가 언제 돌변할지 모를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형국이다."(pp9-10) : 온라인 서점의 미리보기로 이 부분을 읽어 본 순간,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기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를 모르니 이상화시킨 내 모습이나 남이 제시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반대다. 우리는 누구나 넘어지고, 실수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산다. 그것이 인간이다.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때 행복은 찾아온다. 내 안의 나를 온전히 직시해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모순되고 변덕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p11)

'이상화시킨 내 모습이나 남이 제시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제 가슴을 확!하고 후벼팠었고, '맞아! 내가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왔던 거야!!!'란 인식을 부인할 수 없게 해주었으며, 이는 예의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했던 '분인의 상대성'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지적이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헌데 말이죠... --- 이 책의 저자들은 곧이어 '내 안의 나를 온전히 직시해야 한다'라는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즉, '진정한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라는 거지요. 뭔가... 이제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후의 논지가 과연 어떻게 전개가 될까하는 궁금증이 마구마구 샘솟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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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위 말하는 '정상인'에 대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경계성 장애(BPD : Borderline Personaliy Disorder)'라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경계인'에 대한 책입니다. 그러하기에 최소한 지금 저의 판단으로는 저이건 제 주위의 누구이건 그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가 없기에, 이 책에 나오는, 예를 들어 '경계인'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등의 부분에서는 전혀 몰입 할 수가 없었다라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다만!!! 이 책의 일부 설명들 중에는 「나란 무엇인가」와 비교해가며 읽어가기엔 매우 유용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계인에게 분리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비상구 구실을 한다. 이들은 친한 친구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 한 사람을 각기 다른 시간대에 놓인 두 명의 개별 인물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조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BPD 환자는 완전히 선한 사람으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착한 조'를 꼽는다. 온갖 나쁜 점들은 모두 '나쁜 조'에게만 있으므로 '착한 조'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다.(pp33-34)

정상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 개념은 '타인과의 상대성'을 매우 중시합니다. 즉! 내가 조를 대할 때 A(조)라는 모습(의 분인)을 보이게 되는 것은 조와의 양방향에 걸친 feedback의 결과이기 때문인 것이지, 결코 미리 '조를 만날 때에는 수많은 Ai들 중 A(조)의 모습을 드러내보이겠다'라 (나 혼자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 (감정 기복이 아주 빠르고 폭발적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분출하도록 해주는 응고 체계가 결여되어 있는1) 경계인은 타인 뿐 아니라 자신의 성격마저도 조각조각 나누어 재배열 시킴으로써,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했던 '상대성'이라는 것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즉! 타인과의 상대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임의의 분인을 (상대방인) 조 앞에서 내어보이며, 한 발 더 나아가 (상대방인) 조의 분인 마저도 예의 자신과의 상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채 자신의 임의대로 자신 앞에 등장시켜놓는다라는 거지요.2 그러하기에 저자들은 '경계인과 소통하는 일은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p103)라 말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이 책의 제목이 <I Hate You, Don't Leave Me>라는, 책의 내용을 알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반된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유를 추측하게 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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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것이 새로운 지식의 배움 또는 감정의 공유, 아니면 잠시간의 유쾌함 등 무언가의 습득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일진데, 사실 이 책의 독서는 그 어떤 특별한 습득을 저에게 남겨주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포복절도하며 보는 '웃찾사'의 <서울의 달> 코너에서 보여지는, 남자의 그 어떠한 대답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들의 반응들이 혹!.. 다음의 설명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매우 생뚱맞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는 점이, 하지만!!! ---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계인'이 아닌 (혹 어쩌면 적게나마 경계인의 특성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다음에 등장하는 글로리아와 같은 면이, 또 다른 때에는 알렉스와 같은 상황에 놓여지는 삶의 모습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싶네요. (다음의 내용은 본문 pp110-112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럴 때 알렉스는 과연 글로리아에게 어떠한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좀 더 확장시켜본다면, <서울의 달>에서 '영재 선배'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수락이'가 어떠한 대답을 해야할지에 대한 해답은 pp112-116에 쓰여져 있습니다. 궁금... 하시죠? ^^)


글로리아는 남편 알렉스에게 자신이 쓸쓸하고 우울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살한 계획이지만 자신을 절대 도와줘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 상황에서 알렉스는 두 가지 모순되는 메시지를 받았다.


1. 글로리아의 공공연한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날 걱정한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운명을 내가 만들 수 있는 자율성에 도전하지 말아요. 그 선택이 심지어 죽음일지라도."

2. 이와 반대되는 메시지로 실질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말한다. "세상아, 날 걱정한다면 도와줘. 날 죽게 내버려두지 마."


왜 글로리아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책임질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렉스에게 이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한 것이다. 글로리아는 알렉스를 자신의 딜레마 속으로 끌어들여 그를 자신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알렉스가 자기 대신 불확실한 마무리를 해결해주기 바란다. 결국 글로리아는 자살에 대한 자신의 양면적인 태도를 알렉스에게 떠넘겨 그녀의 운명을 책임지게 했다.

게다가 글로리아는 선택이 지닌 부정적인 부분을 분리한 뒤 알렉스에게 투영해 자신은 모호함의 긍정적인 측면을 유지한다. 알렉스가 어떻게 반응하든 간게 그는 비난받을 것이다. 알렉스가 적극적으로 글로리아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심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그녀는 '비극적으로 이해받지 못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알렉스가 글로리아의 자살 시도를 멈추려고하면 그는 지배적이고 둔감한 사람이 되고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는 인물이 된다. 어느 쪽이든 글로리아는 자신을 무력하고 독선적인 순교자로 투영해 스스로를 희생자로 둔답시켜버린다. 알렉스의 경우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도 큰일이고 안 해도 큰일이다!


※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 : 히라노 게이치로作작, 「나란 무엇인가

 



 

  1. 저자들은 이를 '감정 혈우병'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저자들은 이에 대해 경계인들에게는 '대상항상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라 적고 있는데, 이 '대상항상성'이란 상대를 다양한 면을 지닌 인격체로 이해하면서도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을 일관적인 기준으로 연관해 받아들이는 능력을 일컫는다 합니다. (정신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는 전제하에)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A1,…,An의 여러 분인들을 A라는 한 개인의 것으로 묶어놓는 (위에서 언급했었던) 그 무언가!, 다시 말해 '진정한 나'란 것이 분명 존재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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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 - 삶의 근원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황석공 지음, 문이원 엮음, 신연우 감수 / 동아일보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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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황석공은 진나라 때 은거했던 군자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가 없는 까닭에 실존 인물인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 황석공은 이 책 「소서(素書)」를 장량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에게 건네주었으며2, 이후 장량이 이 책의 일부만을 활용해 유방을 도와주었을 뿐인데도 유방이 결국 한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었다라는 후대의 전언은 이 책 「소서」가 지니고 있는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 편저자들은 적고 있지요. 이처럼 실존 인물인 장량과 설화 속 인물인 황석공을 연결짓고 있는 이 책은 고작 1,336자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임에도 그 안에 인간 심리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p15)을 담고 있다라 편저자들은 말합니다. 이처럼 으다다한 수식어로 시작되고 있는 이 책엔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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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마다 생각이야 다르겠지만, 저는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 '사주(四柱)'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 '사주'란 것은 (사뭇 그 어떤 상상조차 뛰어넘을지도 모를)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통계, 즉 요즘 말로 하면 '특정 시점에 태어난 사람들의 일생을 관찰한 미시사(微視史)에의 빅 데이터'쯤 되는 것인데, 그 모집단이라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에 그러한 모집단으로부터 추출된 통계 결과를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저의 일생과 연관시켜야 할 하등의 연결고리가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옛 중국 성현들의 가르침 역시 '사주'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를 딱히 찾아내지 못한 채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더랬습니다. 


편저자들이 정리해놓고 있는 「소서」의 내용은 일단 다음과 같습니다. : '「소서」에는 처세에 대한 철학과 사람을 쓰는 원칙,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할 때 개인의 수양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 사회를 안정시키고 다스리는 방법이 가득 담겨 있다.'(p21) ---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편저자들의 이러한 설명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사회의 리더가 구성원을 대할 때 모든 절차를 예로써 처리한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분명 예를 다해 리더를 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스리는 자가 정의를 따라 행한다면 다스림을 받는 자도 작은 이익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다스리는 자가 자애로운 마음으로 품는다면 다스림을 받는 자 역시 타자(他者)를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pp38-39)


상대를 진정으로 복종시키고 싶으면 우선 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신념, 문화, 종교, 철학을 가진 자라도 그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하고 헤아려주는 것이다. 안하무인 오만불손한 상대를 만나면 달래서 품고 천방지축 기준 미달의 하수를 만나면 위로하며 품는다.(p51) 

선(善)은 일반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예를 들어 맹자가 말했던 '측은지심'은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에도 여전히, 또한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난다하더라도 그것이 '선(善)'임이 부정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선(善)'의 여집합을 (대체적으로) 모두 '악(惡)'이라 규정하는 (하지만 그 반대는 또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국 고서(古書)들의 사고 방식/인식으로는 현대 사회를 설명해내기 쉽지 않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선은 불변하나, 악은 진화하며 심지어 진보마저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즉!

①에서 서술되어 지고 있는 'If~, then~'의 반응구조가 (적어도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2015년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일반적으로 성립된다!'라 말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며, ②에서 말해지고 있는 '안하무인 오만불손한 상대'를 만났을 때의 대처방식 역시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라는 의문이 제게는 너무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라는 겁니다.

(「소서」 자체가 아니라, 「소서」를 해설해주고 있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아쉬움은 이런 맥락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 '여성의 알현이 공공연히 행해지면 어지럽다'라는 경구를 해설해 놓은 부분을 보죠. 편저자들은 '고대 중국의 질서에 따르면, 여성의 본분은 집안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붕 아래 놓여 있는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편안하다(安)'라는 글자를 통해서도 당대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바람직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p192)라 부연하고 있는데, 이는 중학교 한문 시간에서 '안(安)'이라는 글자를 설명하는 데에서나, 그것도 요즘 시대에는 '성적 차별'이라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한 설명일 뿐입니다. 내심 이 다음에 이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 이어지길 기대했더랬습니다만, 아쉽게도 '이 문구는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라는 뜻'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더군요. 이처럼!

<동의보감>에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이 실려 있다 하여, <동의보감> 전체를 터무니없는 개소리라 치부해버릴 수 없겠으나, 「소서」에 실려 있는 1,336자의 가르침들 중에는 이미 그 유효기간이 끝나도 오래 전에 끝나버린 것들이 분명 있음에도, 편저자들은 그 모두를 전부 안고 가려했다라는 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 아쉬움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하... 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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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렵지 않게 발견되어지는 이유로도 반박당하는 책에 '삶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부제를 달아놓을만큼 단순무식함이 그 전부는 결코! 아니었던겁니다.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 일을 짚어보면 얽매이지 않는다>


​옛것이라고 해서 그저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고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있을 것이다. 관자(管子)는 "오늘날의 일에 의아함이 있으면 옛일을 살펴보고, 훗날의 일을 모르겠으면 과거를 돌이켜보라"고 했다. 과거는 시대를 초월해 현재의 미래의 물음에 지표를 제시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야 한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강조되었던 바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과 교훈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며 모든 경우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황석공은 옛일을 모조건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옛일을 헤아리되(推古) 오늘날의 상황에 맞는지 따져 물어볼(驗今) 것을 강조하였다. 과거의 경험을 더듬어보아 오늘날에 적용이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작은 것에 얾매이지 않을 수 있다. …… 과거의 경험과 교훈은 참고가 될 뿐이지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과거에 눈을 돌려보면 무수히 쌓여 있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만나게 된다.(pp102-103)

중국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해 기본적으로 '사주'를 이해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받아들인 채, 이 책을 읽어내려오던 저에게 황석공은 이처럼 단칼에 그러한 저의 생각을 뒤집어놓을 준비를 해놓고 있었더군요. 여기에 더해! 이 책의 감수자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은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데 필요한 배의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배를 어떻게 작동할지는 스스로 분투하며 배워나가야할 것이다.'(p13)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사뭇! 이 책을, 더 나아가 옛 경구(警句)들의 (현대적) 의미를 (그저 탑승하기만하면 알아서 작동되어지는) '자동항법장치가 달려 있는 배'로 이해했던 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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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에 대해 딱히 시비를 걸 용기를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그 말의 유효성에 대해 적잖은 의심을 가지게 되었기는 합니다. --- 이 책에는 이처럼 '당연한 말'들이 담겨져 있기에, 예의 곳곳에서 그 당연함에 대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기에 사뭇 지루함을, 또는 '2015년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 대입해 보았을 때의 유효함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습니다만!!!


인간만이 단순한 '진화'가 아닌 '진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옛 지혜들을 기록하여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상기해본다라면, '옛일을 헤아리되(推古) 오늘날의 상황에 맞는지 따져 물어볼(驗今) 것'이라는 말이 뜻하고 있는 '보편적 특수성'이 지니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벼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은 잔잔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알려주고 있다라는 걸, 책을 다 덮고나니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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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요,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그들 앞에서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3(p254)

'후회'라는 건 기본적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생겨나는/깨닫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라는 것이, 저에겐 단순한 아쉬움을 넘어서는 크나큰 '후회'로 다가왔지만 혹!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차가운 얼음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칼날의 끝으로 제 가슴 한 가운데를 찔린 듯한 느낌을 주었었던, 그리하여 이 책의 독서를 끝내 (저의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로만 남게하지 않았던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감상문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리고 여전히! 저에게도 카이로스의 뒷머리만이 보이는 건 아닐꺼라 생각하며/바래어보며 말이죠.

내가 감동할 만큼 내 스스로 정성을 다했는가? 하늘이 감동할 만큼 내 정성이 지극했는가? 정성이 지극해 진심으로 내가 감동하고 또 하늘이 감동할 정도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을 것이다. 설사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정성을 다했다면 결과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후회란 게 남아 있을 리 없다. 자신의 부족함에 좌절하지 않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도전하면서 그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나 자신이 탄복할 만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원하는 결과를 덤으로 얻으면서 말이다.(pp137-138)

 

 

 



 

  1. 문이원(文而遠) : 옛 교훈을 성찰하고 이를 현대적인 그릇에 담아 대중에게 전하려는 문학과 어학 전공자들의 인문연구모임이다. 일찍이 공자는 무문이불원(無文而不遠)이라고 했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멀리 가지 못한다, 즉 글로 남겨서 뜻이 멀리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문이원은 여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한데 모여 고전을 연구하며 한중 문화의 동시대성을 발견해내고,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적인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2. 이 책의 겉장에 "신성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하지 말라.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이를 전하지 않는 사람 또한 하늘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p5)라 쓰여져 있었었는데, 이후 장량은 이 책을 전할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자신의 무덤에 묻었었으며, 이후 동진 시대에 도굴꾼이 장량의 무덤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3. 이탈리아의 토리노 박물관 앞에 있는 카이로스(Kairos) 부조상에 있는 시 구절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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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45
펄 S.벅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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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다라 기억되는, 암튼 무쟈게 오래 전, 무려! 세로로 쓰여져 있는 「대지」를 읽었더랬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이 작품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왕룽'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만큼은 매우 선명하게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왕룽의 아내 '오란'의 이름과 당시의 '무척 재미는 있는데, 너무 두껍네!1'라는 잔상까지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전부였었습니다. --- 이처럼, 마흔일곱이 되어 (거의 처음인듯) 다시 읽어 본 이 작품 「대지」는 과연 어떻게 읽혀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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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잣대로 보자면, ('잘 읽힌다'는 말을 할 수는 있겠으나 차마) '재미있는' 작품이라 표현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무쟈게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 약간의 농사지을 수 있는 땅만을 소유하고 있었던 가난한 왕룽이 오란과 결혼을 했고, 부부가 열심히 뼈 빠지게 일을 해 돈을 좀 모았거늘, (예의 빠지지않고 등장해주는) 그들의 삶에 뜻하지 않은 고난도 닥쳤왔으나 용케 이겨내었고, (여기에 역시나 숟가락을 아니올려놓을 수 없겠는) '우연한 행운'의 도움이 있어 큰 부자가 됩니다. 또 다시, 마치 여기저기서 보여지는 드라마의 각본마냥 돈 맛을 알게 된 주인공 왕룽의 방탕이 나오며, (돈 많은 아버지를 모시는) 자식들간의 반목 역시 짜장면 옆에 놓이는 단무지처럼 놓여져 있기도 하지요. 그러다 그의 말년에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는 후회의 부분과 만족의 부분을 느끼게 된다는, 그야말로 뻔하디 뻔한!이라는 수식어를 피할 수는 없을 줄거리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체 무엇!때문에, 이 작품에 '고전classic'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는 것이며, 작가 펄 벅으로 하여금 퓰리처상과 무려 노벨 문학상까지의 영예를 누리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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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시작

마치 농부가 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듯한 사람인 왕룽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변환점이 되었던 오란과의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단순한 이유로 그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여자가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늦도록 누워 있을 수가 있다. 그도 침대에서 아버지와 같이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p11)라 생각했던 왕룽이나, '우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도 낳고 밭에 나가 일도 해야 하는 여자를 구해야 하는데, 예쁘장하게 생겨 먹은 계집년이 그런 것을 할 줄 알겠느냐? …… 우리 같은 가난한 살림에는 그 따위 예쁜 계집은 안 돼.'(pp17-18)라 생각하는 그의 아버지 모두 철저하게 아내와 며느리가 아닌 '식모와 노동력 한 단위'로서만의 효용을 그 결혼으로부터 기대했던 것이었죠. 그런데!!!

오란이 두 사람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그 '식모와 노동력 한 단위'로서의 역할을 이행해 냈던 겁니다. 게다가, 대번에 아들까지 낳아주지요. 천성이 농사꾼인 왕룽과 '슈퍼 파워의 식모 겸 노동력 한 단위'였던 오란의 결합은 오래지 않아 그들에게 작으나마 '부(富)의 축적'이라는 기쁨을 안겨주게 됩니다. : '삶이 이토록 호사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의 생활에도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p38) --- 아침에 조금 더 늦잠을 잘 수 있으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라는 사실, 때마침 찾아온 풍년으로 인해 얻게 된, (예전관 다르게) 사라지지 않고 그들의 손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는 돈 몇 푼, 이러한 것들은 왕룽과 오란에게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안겨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었었지요. 최소한 이 시기에는 말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매일 쉬지 않고 무엇이든 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 제법 풍족한 살림 같아졌다(p42) ……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정을 형성해 주고 그들을 먹여 주고 그들의 신을 이루는 이 흙, 그들의 소유인 이 흙이 거듭거듭 햇빛을 받도록 파헤치는 이 완벽한 움직임의 일치감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p43)


행복의 성장과 몰락 

결혼 전의 오란은 성 내에 있는 황 부잣집의 여종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오란과 왕룽은 황 부잣집 마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만, 그 집의 가세가 예전같지 않고 차츰 기울어가기 시작한다라는 걸 알게되었죠. 아들들은 물쓰듯 돈을 써대고, 황 영감은 수많은 첩들을 들였다 보냈다 하고, 마나님은 아편에 빠져 있고... 뭐 망할 집안의 전형을 전부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황 부잣집에서 곧있을 셋째 딸의 혼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좋은 땅 한 곳을 팔려 내놓았다라는 소식을 들은 왕룽은 그 땅을 사기로 결심합니다. 딱 일 년 전, 그 집의 여종이었던 오란... 의 남편 왕룽이 일 년만에 그 집 소유의 땅을 사게 된 거지요.  


그들 부부의 노력에 하늘은 좋은 날씨로 화답을 해주어 또다시 풍년의 수확을 거두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이 사는 집의 벽 속 구덩이에는 차곡차곡 은화가 쌓여갔습니다... 만! '희망은 대부분 허사가 되는 법2'이란 것을 예의 왕룽이라고 비켜갈 수는 없었더랬지요.


부모에게 속하는 자식이 아니라 다른 집안을 위해 태어나는 딸, 그런 딸이 자기 집안에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무거웠다.(p84)

(셋째 아이가 딸이었다라는 게 사실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일종의 선행적 징표라도 되었다는 듯) 곧이어, 처참한 흉년이 찾아왔고 왕룽이라 해서 그 흉년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남방 지역으로 먹을 것을 찾아 떠난 왕룽 일가는 거지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만, 여전히 그에게는 고향에 남겨놓고 온 '땅'이라는 희망이 남아있었었지요.

뜻하지 않은 행운과 함께 마침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왕룽 일가는 다시 피땀나는 노력을 하여, 예전보다 더 큰 부(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왕룽은 황 부잣집의 몰락을 떠올리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아들들은 모두 농사일을 시키겠노라 결심했지요. : '그는 어디까지나 농토에 속해 있는 인간인 것이다.'(pp149-150) --- 하지만 그의 그런 희망은 다시 또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행복의 변화 

왕룽은 자신이 가난한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가난한 원인은 다만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지 않거나 비가 몇 달 동안 계속 내려서 홍수가 나기 때문이니 나쁜 것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다.(p154)

작품 속에 중국의 시대적 배경/상황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당시 중국의 지배층/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몰락이나 극심한 빈부격차 등에 대해 왕룽은 사회나 다른 이의 탓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천성적으로 자신을 '농토에 속해 있는 인간'(p149)으로 인식했던 왕룽은 모든 길흉화복이 오로지 하늘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 생각은 그가 적지않은 부(富)를 이룬 후에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 하늘이 다시 한 번, 큰 홍수를 내렸습니다만! 이번에만큼은 왕룽이 하늘에 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한두 해 쯤은 농사를 망쳐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만큼의 곡식과 은화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신!!! --- 농사를 지을 수 없게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왕룽에게 이전에 없던 잡생각이 끼어들고 맙니다. 이러한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해주었던,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현재의 왕룽'을 있게 해준 근본인 아내 오란에 대해 이성으로서도, 가족의 일원으로서도 싫증이 나기 시작한겁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전의 왕룽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인 쾌락이라는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왕룽이 옛날처럼 가난한 농사꾼이었거나 이번 홍수로 그의 논밭이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는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돈이야 얼마가 들든 자신이 혈기왕성한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못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에 가득했다.(pp206-207)


행복과 불행의 반복 

쾌락에 내내 빠져있던 왕룽, 그리고 그렇게 변해버린 모습의 남편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오란 --- 하지만 이내 왕룽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예전처럼 농사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의 세 아들들을 각각 학자, 상인, 그리고 농부로 키워내리라 마음 먹습니다. 다시 별 걱정없는 행복의 시간이 지속될 것 같던 순간! '이젠 내가 나서야 할 시점이구만!'이라 말하듯 새로운 불행이 닥쳤었으니, 바로 그의 아내 오란이 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 겁니다. 한때, 마냥 빠져있었던 애첩 롄화에 대한 욕정도 세월 앞에선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었구요. 게다가 자식 놈들은 이래저래 다투기나 하며, 왕룽이 옛날 세워놓았던 자식들에 대한 계획을 선뜻 따라주지 않습니다. 


왕룽의 아들들은 한 사람도 마음 편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맏아들은 쓸 돈이 넉넉하지 않아 사람들 눈에 하찮은 존재로 보일까 봐, 그리고 성내에서 찾아온 사람이 방문하고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커다른 대문으로 걸어 들어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식구들이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둘째는 이와 반대로 돈을 헤프게 쓰지 않나 근심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농가의 자식으로 허송한 세월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p372) ……"도대체 자식놈들은 왜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단 말이냐!"(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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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행복과 불행이 연신 엇갈려 등장하게 되는 이야기는, 그 전개만으로는 스릴/재미를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반복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사실 이내 짜증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그러하기에 중삐리 시절의 제가 이 작품을 읽고 '재미있다'란 느낌을 남겨두었다라는 게 일견 신기하기도 합니다.) 마흔일곱의 나이가 되어 읽어 본 이 작품은 다행히도 그 반복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슬슬 짜증이 좀 올라왔을 수도 있었을 시점에서 결국 왕룽의 삶이 마감되는 것으로 읽혀지더군요. 그런데/그렇다면!!! 이 작품은 대체 어떤 메세지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 작품이 비록 특별한 설정이나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 도드라지지 않는 평범함 속에 인간의 거의 모든 욕망 (가족 관계 내외를 망라한) 인간관계에서의 사적 정치, 한 인물의 반평생을 통해 보여지는 (집단으로서의) 인간 내면/심리 - 이 완벽하게 다 들어있다라 생각합니다. --- 이 작품의 작가 펄 벅은 미국인이지만, 생후 4개월 때부터 중국에서 생활했었던, 말 그대로 서양과 동양의 정서를 모두 다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정서 모두를 거의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배경으로부터도 자유로운/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배경 모두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정서를, 특정한 시대적 배경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보여줄 있었었으며, 이것이 바로 2015년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라는 일 독자에게도 이 작품을 '고전classic'으로 읽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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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이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변해 버린다. 그들도 지금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일해 이 대지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침내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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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의 삶(토지에 대한 애착)이 모든 인간의 삶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삶의 한 유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p428)

'땅'에 대한 왕룽의 평생에 걸친 집착을, 한때 대한민국을 미쳐있도록 했었던 부동산 투기와 연관짓는다는 건 코미디스런 발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 '누구나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삶의 한 유형'이었다라는 관점/수준에서 그 광풍을 바라본다면 예의... 세상에 등장한지 어느덧 80여 년이 넘은, 대한민국과는 다른 공간적·정서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결국엔 '인간의 삶이란 여전히 다들 그렇고 그렇게 비슷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그러하기에 '코미디스런 발상'을 향해서도 마냥 코웃음을 지을 수는 없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부인할 수 없는 '고전classic'이 라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흡사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을 '직원'이라 표기하던 '스태프'라 표기하던, 이탈리언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이를 '주방장'이라 하던 '쉐프'라 하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이 작품 「대지」에 이어 작가는 「아들들」과 「분열한 집」의 후속작들을 발표했다하는데, 제가 당시 읽었던 책은 그 3부를 모두 담고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 라오서 作, 「낙타샹즈」 황소자리 刊,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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