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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유시민이 피력했던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라는 그의 개인적 소망은, (글쓰는 이로서의 유시민을 좋아하는) 독자인 저에게는 적잖이 충격적이었더랬습니다. 그 구절을 읽기 이전까지 '나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었거니와, 더욱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구는 이제까지의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만들어지지 못한 조합의 문장이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구사카베 요 作, 「A 케어」는 그보다 훨씬 더 쎈 강도의 놀라움을 저에게, 소위 말하는 '경악'까지를 불러일으켜 주었었었다랄까요? ---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는 시점에서의 우리 육신이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현재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 기대/예상/믿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유시민과는 달리, 구사카베 요는 그러한 기대/예상/믿음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그 극한의 한계로까지 몰고 가 '너의 사지 중 일부, 심지어는 사지 전부를 잘라내어야만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그러니까/그렇게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지극히 간단하게 표현해 보자면 '합리성의 추구'와 '의료 윤리'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의사의 갈등을 통해) '생명의 유지'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과연 어느 선까지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정말로 '생명의 유지', 더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내 신체의 절단까지도 진정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더 넓게 보아, 저는/당신은 '인간다운 삶의 유지'를 위해 과연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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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삶이 의미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p364) ……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p227) ……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것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p380)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아주 오래 전에 (아마도 이어령 교수님의 말이었던 듯 싶은) 들었던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소유의 상실 때문이다'라는 말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유'라는 것을 그저 물질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었기에,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만 --- 그 '소유'라는 것이 결코! 물질적 개념만을 내포하고 있음이 아니라, 그보다는 우정을 나눈 친구다른가 나의 가족이라든가, 더 넓게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p94) 전체를 의미한다라는 걸 깨닫게 된 지금엔, '소유의 상실' 단계 이전에 제가 경험하여야만 할 '늙어감'에 대해 벌써부터 조바심마저를 갖게도 됩니다. 물론!
'삶의 중지'를 의미하는 죽음이란 것이 반드시 기나긴 상실의 과정을 지나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존 내쉬처럼, '삶의 중지'란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p239)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건 일반적으로 보아 비교적 예외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지요.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는다.(p242)
사실, 이 말은 매우 비관적인 시선의 표현입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 누군가는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된 현대 의학의 보살핌을 끝까지 받다가 죽음을 맞는다'라 비교적 호의적인 관점으로 말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자 아툴 가완디 역시 '물론 우리는 결국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이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 준 것만은 분명하다'(p61)라는 (비교적) 낙관적인 쪽의 시선 역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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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 이러한 현실이 대체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진국에서도 노화와 죽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겪는 일이 됐다.(pp15-16)
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은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 아툴 가완디는 현대 의학이 (그리고 그 현대 의학에 종사하는 의료인들이) '생명 연장'이라는 의료 행위의 근본적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p394)에는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라 적고 있습니다. 그 결과 --- 대장암이나 고혈압, 무릎 관절염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질환을 치료하는 데는 매우 능숙한 현대 의학은 하지만! (고혈압에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다가 대장암에 걸려) '자신이 영위해 온 삶의 방식을 보두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많은 경우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 버린다'(p75)라는 치명적 헛점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서 저자 홍기빈은 마취과 의사의 예를 들며 '목적 합리성'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 '마취'라는 의료 행위는 '수술'이라는 더 궁극적인 의료 행위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헌데! 마취과 의사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시험/자랑해 보이겠노라며 필요 이상의 마취 행위를 시행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려는 '수술'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 환자의 목숨까지를 위협할 위험성을 가지게 될 겁니다. --- 아툴 가완디는 이 책에서, 현대의 의료 행위가 흡사! 그러한 마취과 의사처럼 '목적 합리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의학은 죽음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시각도 있다. 물론 그것이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 그러나 죽음이 적이라고 한다면, 그 적은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아군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장군을 원치 않는다. …… 모든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생이 끝이 나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 줄 의사와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 …… 아무도 원치 않는 '죽음을 기다리는 창고'같은 시설에서 잊혀 갈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pp 286-287)
'목적 합리성'을 망각하고 있는 (혹은 너무 한 쪽에만 치우쳐 있는) 현대 의학은 그러하기에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다하지 않는 실수를 가장 두려워'(p335)하게 되었고, 이는 자동적으로 거의 모든 경우에서 뭔가를 더 많이 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노력을 너무 적게 하는 것만큼이나 너무 많이 하는 것도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p335)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거지요. 그리하여...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춰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p238)
이처럼 '너무 많은 노력과 너무 적은 노력 사이'의 적절한 지점,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p232)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선택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연장시켜 나가다 보면 결국엔 '안락사(Assisted Suicide)/존엄사(death with dignity)'의 문제에 이르르게 됩니다. ---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은 최초의 안락사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삼페드로의 "기쁨이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 달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지극히 경제학스러운 결론인) '삶의 지속여부는 본인 스스로에게 맡겨져야 한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었지요. 현직 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일관된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어렵다는 난관에 부닥쳐 있다. …… 근본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고통을 연장시키는 실수와 가치 있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실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문제라는 의미다. …… 그럼에도 나는 의료 행위의 지평을 넓혀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걸 돕는 일에까지 손을 뻗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 안락사에 의존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pp37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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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의사로서 저자는 현대의 의료 시설과 제도는 인간에게 죽음이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줌으로써 그 사회적 목적은 달성해내었지만, 보다 근본적일 수 있는 문제인 '우리가 병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도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p124)에는 실패했다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시설과 제도'가 실패했다면 '우리'가 스스로 극복해내야 한다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춰 준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결국 어떤 이유로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라는, 즉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분명 유한한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라고,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는 겁니다. 단!!!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그 답변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라는 전제가 충족된다면 말이죠.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pp43-44)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pp355-356)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생전 장례식'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아툴 가완디 역시 이와 동일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라 말해주고 있더군요. --- 한 개인의 일생에 걸친 삶의 목표였던 '독립'이라는 것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시점'(p384)이 도래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자신의 선택이 작동될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그 선택을 미리 자신의 가족 등에게 명확히 밝혀두기를 저자는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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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는 기간에 대해 강력한 선호 체계를 갖고 있다. 고통을 짧게, 기쁨은 길게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고통이나 기쁨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정점)과 이야기가 끝났을 때의 감정을 가장 뚜렷이 기억하도록 진화해 왔다."(p365)
(저의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전제를 강조하며!) 저자는 죽음을 앞둔 이에게 행해지는 현대 의학의 각종 치료들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으로, 이의 대안으로 등장한 '호스피스' 제도는 외려 '질병이 허락한 좁은 틈에서나마 살아 낼 여지를 찾아내, 오늘을 최선의 상태로 살게 해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저자의 견해가 그러한지 아닌지와는 상관 없이) 이러한 관점은 예의 리사 제노바 作, 「스틸 앨리스」에서도 볼 수 있었었지요.
이 책의 마지막에 기술되어 있는 저자 아버지와 저자의 이별 과정은, 그러하지 못했던 이별을 했어야 했던 저에게 정말로 '눈물 날 정도로'라는 표현을 쓰게 될 만큼 애잔하게 다가왔었습니다. ---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라는 뒷 표지의 문구. 나의 아버지에겐 그러한 죽음을 맞이할 현실적 준비/여유가 없었었지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저만큼은, 피할 수 없을 그 순간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정말로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기회였었다라 생각합니다. : 내가 만일 불치의 질환에 걸리게 되었다라면, 그리하여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 지극히 짧게만 남아 있다라면 그때에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려운 것은 무엇이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꺼이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p395)라는, 삶의 거의 마지막 시점에 이르러 주어질, 내 인생에 있어 마지막 질문에의 답변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라는 점, 이점이 제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그리고 더없이 소중한 배움이었음을, 그러하기에 다시 읽어 본 유시민의 다음 글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라는 걸 끝으로 이 책의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 유시민 著,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현명하게 지구를 떠나는 방법> 중
※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들 :
- 유시민 著, 「어떻게 살 것인가」
- 구사카베 요 作, 「A케어」
- 리사 제노바 作, 「스틸 앨리스」
- 오기와라 히로시 作, 「내일의 기억」
- 이 책의 원제는 「Being Mortal」 인데, 저 개인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 더 정확하게 이 책의 내용을 보여주는 번역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성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의학적 지식의 바탕에 윤리적·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내용의 책을 쓸 수 있었겠지요.
-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른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p18)
-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저자의 견해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은 듯 합니다. : '의학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보수하고 기워 가셔 유지를 하다가 신체 기능이 종합적으로 무너지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궤적은 길고도 느린 과정이 됐다.(pp53-54) --- 이 책의 표지에 그려져 있는 '실로 꿰메어져 있는 나뭇잎'은 바로 이 문장을 표현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이에 대해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사뭇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은 살 날이 무한정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청년들에게 시간은 아직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조금쯤은 낭비해도 괜찮다. 방황과 시행작오를 겪어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다. 이것을 가리켜 '청춘의 특권'이라고 한다."
- 물론 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라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라 유시민은 적고 있습니다.
-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러한 '죽는 자의 역할'(p380)을 준비시켜드렸고, 결과적으로 '인공호흡기도, 고통도 원하지 않았으며,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졌었다가 적혀 있습니다.
- 대니얼 카너먼 著, 「생각에 관한 생각 Thinking, Fast and Slow」에 나오는 문구.
- "저의 지난날들은 사라지고 있고 다가올 날들도 불확실합니다. 그럼 전 무엇을 위해 살까요? 오늘을 위해 삽니다. 저는 현재를 살아갑니다."(p357)
- pp396-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