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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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p14)

​「롤리타」나 「이방인」 등의 작품들이 '매력적인 첫 문장/문단'으로 유명하다지만, (이 두 작품들을 포함하여) 이제까지 제가 읽어 본 그 어떤 소설도 이 작품 「마션」의, 이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쓰시는 분들의 아마도 거의 전부 다!가 빼놓지 않고 인용할 듯 싶은, 이 첫 문장/문단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쾌감을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암튼!!! --- "I'm pretty much fucked1.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2 지극히 평범한 원문에 '좆됐다'라는 특별한! 단어를 선택해 준 역자의 용기와 센스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게다가 '좆'이란 단어의 정확한 철자도 배울 수 있었음데 대한 ^^;;) 감사함마저 느끼고 있다라는 인사를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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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일련의 기막힌 사건들로 인해 죽을 뻔했다가 그보다 훨씬 더 기막힌 사건들로 인해 살아'3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화성(Mars)에서 말이죠.4 바로 앞에 읽었던 두 '로빈슨 크루소'들이 처한 상황과는 이처럼 아예 차원이 다른겁니다. 이처럼 --- '구출을 통한 생존'을 어렴풋하게나마 처음부터 기대했었던 두 로빈슨 크루소들과는 달리, 마크 와트니는 그 '구출을 통한 생존'이란 걸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저 자신이 살아 있다라는 걸 지구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다음 화성탐사선이 오기까지는 (두 '로빈슨 크루소'들이 섬에서 보냈던 시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4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며, 그 탐사선마저도 화성의 어느 곳에 착륙할지 마크 와트니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 뿐.

'마크 와트니는 화성에서 사망한 유일한 인간이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게 확실하니까.(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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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생각할 것 전혀 없는, 아예 처음부터 전체적인 왁꾸가 딱 보여지는 소설입니다. 뻔하잖아요. '죽을 게 확실'하다라 생각하는 주인공이 결국 '좆된 채' 끝맺음되는 것이 아닌, 이래저래, 물론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위기들이 닥치겠지만 그것들 역시 이래저래 다 이겨내고 결국엔 지구로 살아돌아올 꺼라는 결말은, (미국의 영화들에서 보여졌었듯) 심지어 '권장 결말'쯤으로 불릴 만큼 당연할 것이니까요. 그렇게 --- '화성에 홀로 남겨진 인간이 긴 세월을 살아남아 결국엔 지구로 귀환한다'라는, 뭔가 복잡한 설정들이 동원되어야만 말이 되게 이어지게 될 것 같은 스토리를, 작가는/소설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에게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5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사뭇 허망하리만큼 간단!하게6전개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인공에게 특정 아이덴티티를 부여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극대화되어 보여지는 소설이 바로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입니다. --- 작가 요나스 요나손은 주인공 알란 옹에게 '정치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길 극도로 꺼려한다''술을 즐겨한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두 개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해놓음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를 교묘/무사히 통과해가면서, 또한 ②'술을 즐겨한다'라는 설정을 이용해 역사적 사실들의 허구적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었었지요.7)


일단! 화성에 홀로 남겨진 마크 와트니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우선 지구와의 교신, 그리고 산소와 물, 식량과 거주할 공간의 확보등입니다. 뭐 이러한 것들이 해결된다 해서 그의 생존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 예상되는 4년이라는 시간을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어케든 반드시 살아내야겠다!라 결심한 것도, 그것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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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가 아닌,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앞서 읽었었던 두 버젼의 '로빈슨 크루소'들에게 있었었던가가 뚜렷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이 소설 속 마크 와트니  또한 '이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8라 결심은 하지만, 그 결심이 딱히 특정한 '살아야 한다!'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9 --- '자식이 뭐라고, 이게 다 자식 때문에'는 흔히 대한민국 남자들의 생존이유로 거론되곤 합니다. 이게 '터무니없는 변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면 대한민국 남자의 인생에서 '자식 (혹은 부모)'이란 변수를 제거해낸다면 과연 그들/우리는 어떠한 '살아야 한다!'의 이유를 가지게 될까요? 그런게 있기는 할까요?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것 말고, 반드시 이 삶을 '살아야 한다!'로 만들어주는/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는 한가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미혼이었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M'은 기혼에 자식까지 있는 설정이었었지요. 이 소설의 마크 와트니는 미혼남입니다.) 닥치고!!!


야자수의 나무껍질을 떼어낸 다음 나무 막대 두 개를 비벼 마찰을 일으키려고 ……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가늘게 쪼갠 막대에 순산소를 흘려보내고 스파크를 일으켰다.(p63) 

앞서의 두 '로빈슨 크루소들'이 각각 회전숫돌과 유칼리나무를 이용했었던 것과는 비교되게, 21세기 초반의 '로빈슨 크루소'는 이렇게 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네! 세월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었으며 그리하여 세상은 변해있는거니까요. 게다가 이 소설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보여졌던 신학적·철학적 고민들 같은 걸로 독자를 괴롭히고 있지도 않습니다. 제 생각에 이 소설 전체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철학적 고민(이라 불리울 수있는 것)은 단지 (「정의란 무엇인가?」의 1장에도 등장했었던) '하나는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지만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놓고, 다른 하나는 여섯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지만 목숨을 잃을 확률이 낮은 거군요. 이걸 어떻게 선택합니까?'10 뿐이지요. 그나마 주인공의 고민마저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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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렇게, 그런 상황에 처한 마크 와트니에게 철학적 고민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소설에 대한 저의 만족도를 낮춰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세상을... 맨날 철학만 하며 사는 것엔 저도 반대하니까요. 이 책은 그냥... 한 마디로!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 한 사람이 자신의 공돌이 지식을 극대로 활용11하여 '좆 된 상황들을 심하게 좆 된 건 아니도록'12 만들어 끝내 화성에서 살아남았고, 거기에 예의 '동료애 · 인류애'가 더해지는 미국 영화의 '권장 결말'이 더해져 결국엔 그를 구출해 지구로 귀환시킨다라는, 마지막 장면엔 서로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나사(NASA) 직원들과 그들 뒤에 서있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올려지는 그런 소설이고, 딱! 그런 소설로만 이해하는 것이 '권장 독서법'이라 생각합니다. 고로!!! --- 이런 건, 제 아무리 깨알같은 유머 드립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글로 되어 있는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팝콘 씹으며 영화로 보는 것이 훨 낫겠다라는 거지요. 맥가이버의 눈부신 활약상을 글로 읽어봐야 큰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건... 시각으로 즐겨야 제 맛 아니겠습니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곧 개봉된다는데, '꼭 봐아겠어!'까지는 아니기에 보게될지는 모르겠네요.) '유머 드립'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국 영화들을 보면, 무지하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주인공들이 꼭 '유머 드립'을 몇 개씩 내지르곤 하더만 그게... 저런 상황에서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문을, 저 개인적으론 매번 가지게 되더군요. 이 소설에도 그런 류의 '유머 드립'들이 꽤나 등장하는데, 그 중 마크 와트니를 구하러 다시 화성으로 되돌아간 동료 두 명 (남자 하나, 여자 하나임. 남자 둘 절대 아님!!!)이 마크 와트니와의 도킹을 앞두고, 그러니까 상당히 중요하고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누는 다음의 대화는, '과연 가능할까?'가 아니라, 사뭇 '아! 저걸 저렇게 받아치다니!!!'라는 감탄어린 부러움을 불러일으켜주더군요. 딴 건 몰라도... 이 대화만큼은 영화 속에서도 꼭 살려내면 좋겠는데 과연. (아무래도... 영화를 보게될 듯.) 


 "나 미쳤나 봐. 내가 키스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내가 그 키스 좋아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p580) 

 

▶ Make a long story short !!! :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신학도나 철학도의 이야기보다는, 화성에 홀로 남겨진 공학도의 생존기가 훨 잼나다. 내 아이에게 공과대학을 심하게 권장하고 싶어질만큼.



※ 두 가지 버젼의 '로빈슨 크루소' :

-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

- 미셸 투르니에 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1. 'F-word'라고, 차마 그 본모습으로 불려지지도 못하던 fuck이라는 단어가 요즘 우리 가요엔 심심치않게 쓰여지더군요. 김예림의 '먼저 말해'를 듣다 후반부에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로 fuck you라는 가사가 나와 정말 깜짝 놀랐었었었.
  2. 「The Martian」, Amazon Kindle edition, Broadway Books.
  3. 본문 p18.
  4. Martian : an inhabitant of Mars (화성에 살고 있는 생명체)
  5. 본문 p28.
  6. 이 과정 속엔 '복잡한 부분은 생략하고 결론만 얘기하자면'이란 문구 역시 적잖은 역할을 담당해주고 있지요.
  7. "주인공 알란이란 사람이 정치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길 극도로 꺼려한다라는 설정을 통해 소설은 애초부터 영화 <300>에서와 같이 역사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무의식중에라도) 나타내게 될 우를 범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미리 제거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또한 술을 즐겨한다라는 설정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에 대해 혹여라도 제기될 지 모를 사상적·정치적 편향성까지도 모두 excuse되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무척이나 정교/교묘한 소설이지요." -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고 쓴 감상문 중.
  8. 본문 p112.
  9. 물론 "지금쯤 두 분(부모님)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고 계실 텐데.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끝까지 살아남아 갚아드리는 수밖에.(p38)"라는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것이 '자신 자체가 생존해야한다라는 독립적 이유'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10. 본문 p335.
  11. 그 정도는 '나의 항문은 나의 두뇌 못지않게 나의 생존을 돕고 있다.'(p34)일 만큼, 정말로 '극대화'되어 있지요.
  12. '생각만큼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뭐랄까. 좆 된 건 맞다. 심하게 좆 된 건 아니라는 얘기다.' - 본문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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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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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영국인 작가 다니엘 디포에 의해 쓰여져 발표되었던 소설 「로빈슨 크루소」가 1967년, 프랑스인 작가 미셸 투르니에에 의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이라는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예전에 발표되었던 노래가 종종 다른 가수에 의해 새롭게 변모하여 발표될 때 붙곤하는, 'remake/hommage'에의 흔한 이유는 '원 가수에 대한 존경/원 곡에 대한 애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해지곤 합니다만,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작품을 탄생 시켰던 이유를 그 스스로 '원작에 대한 불만'이었다라 밝혔다 합니다. 그러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고나니! ---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에의 '불만'을 탄생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나타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 원작에의 '(불만의 표출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는) 비꼼'이었던건지, 혹은 '단순한 시대적 보정'이었었던가 판단은 완벽!하게 제 능력 밖의 영역입니다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지니고/보여주고 있는 ①보다 인간적인 로빈슨 크루소와 ②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강조라는 두 가지 점만으로도! 다니엘 디포의 원작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다라 말하게 되는, (굳이 이 글을 읽고있는 분들의 동의(同意)까지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확신이 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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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인간적인 로빈슨 크루소  

원작에서 보여졌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교과서적 청교도인'의 모습 그 자체였었습니다.2 독자가 '과연 이런 인물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라 말해도 될만큼, 원작 속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법한) 환경의 변화에,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즉각적으로 적응해가기 시작했었지요. 예를 들어, 자신이 난파선으로부터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섬이 어떠한 환경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난파된 직후부터 흘러온/가는 날짜를 세어간다라는 설정은 (저의 기준에서 보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차라리!


그는 이 섬에 장기간 머무를 리 없다고 애써 믿으려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 섬 안에서 생활을 설계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면 그것은 곧 빠른 시간 안에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라고만 여겼다.(p26) …… 어떤 배가 나타나서 닻을 내리게 될 몇 시간 동안, 아니면 내일 혹은 아무리 늦어도 모레까지는 이 바닷가에서 멀리 가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p27) …… 그는 흘러가는 날수를 헤아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 '버지니아호'가 침몰한 이후 얼마가 지났는지는 그를 구해 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pp27-28)

​'섬에서의 생존'보다 '섬으로부터의 구출'을 먼저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 (다시 한 번 더!) 저의 기준에서는 훨씬! 솔직한 인간적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 물론 1719년이라는 시대적 제약이 분명 작동된 결과였겠습니다만, 로빈슨 크루소의 청교도적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보니 원작에는 소위 말하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이 상황에서, (어쩌면!) 한 인간으로서 잠시나마 가져봄직한 일종의 '방종스러울 스 있는 자유'같은 것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기도 하지요. 이에 반해, '새로운 로빈슨 크루소(이하 <로빈슨M3>)'는 그러한 청교도적 압박에서 벗어난, 보다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자기 주위를 뒤덮는 대홍수에 보잘것없지만 자신의 몫을 보태는 것이 재미있다고 여기면서 오줌을 누었다. 그는 문득 휴가를 얻은 기분이 되어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가누지 못한 채 마치 춤을 추듯 덩실거리다가,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몰아치는 빗물을 뚫고 달려가서 나무들 밑으로 몸을 피했다.(p37)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 (다시 한 번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원작이 쓰여졌던 당시의 시대적 환경하에서는, 게다가 (다분히 종교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 작가의 집필의도에도 역시나 부합되지 않기에 묘사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를듯한 성(性)적인 면에서의 인간적 갈등마저도 1967년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사뭇 과감하게 그려놓고 있기도 하지요.


지난밤, 내가 반쯤 잠든 것 같은 상태로 웅크리고 있을 때 나의 정액이 흘러나왔다.(p139) …… 구멍 속으로 그의 성기가 들어갔다. 어떤 행복한 혼수상태가 그의 전신을 굳어지게 했다.(p148) …… 그는 여러 달 동안 킬레나무와 행복한 관계를 맺었다.(p149)

물론! 이러한 묘사에 대하여 ('행복한 관계'라는 표현까지를 사용하고 있는, 사뭇 변태적인 수준으로까지) 지나치게 인간의 본성을 부각시킨 것이라 맘에 들어하지 않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저도 물론 이 부분이 작품 전체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 좌절을 모르는 개척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맥가이버의 손재주를 지니고 있는 일종의 '생존머신'스러웠던 로빈슨 크루소와는 사뭇 대비되는 캐릭터의 <로빈슨M>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에게도 '나라면/나라도 과연?'이라는 ('소설'이라는 문학장르로부터 기대되는 독자들의 '공감/반감'을 유발시키는) 질문을 한 번쯤 이 상황에 넣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라는 점에서 보자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보다는 미셸 투르니가 변모시킨 <로빈슨M>이 훨씬 더!!! 우리들 곁에 가까이 다가와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원작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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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 아니라 --- 원작의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그야말로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었었기에, 원작 속에는 소위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질 않았(다라 저보았)었었죠. 예를 들어, 존나 고생해 나무를 베어낸 후, 하 세월이 걸려 X빠지게 일한 결과로 겨우 조그마한 카누 한 척을 만들었다라는 장면은 예의 '인간 로빈슨 크루소 스스로의 노동/노력'을 가장 부각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자신이 임의로 선택했었던 그 나무가 알고보니 배를 만들기에 매우 적합한 나무였었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 카누를 만들었다라는 사실 전체를 온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돌리어 놓는, 그리하여 이전에 기술해놓았던 '인간 로빈슨 크루소의 노동/노력'의 의미를 (이럴꺼였다면 왜 그토록 자세하게 서술해놓았느냐라는 불만마저 생겨날만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고마는, 그야말로 "우리 모두는 영원히 옹기장이 손에 쥐어진 찰흙같은 존재4"라는 (혹자들이 '겸손함'이라 표현하고 있는) 수동적 관점에만 매달리고 있었었지요. 이처럼!

원작의 역자(譯者)가 <역자 해설>을 통해 '인간 로빈슨 크루소'가 느꼈었던 공포감마저도 결국 '(신을 향한) 회개의 동인(動因)'으로 작용5하였다라 적고 있듯이,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가 배제되어 있는/배제시켜 버린 원작과는 달리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최소한 <로빈슨M>의 첫 걸음'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상황의 극복'이었음을 매우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겁니다.6


나의 승리는 절대적인 무질서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자연적 질서에 항거하여 내가 스페란차에 강요해야 마땅한 도덕적 질서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지 생명을 부지하는 것만이 아님을 나는 안다. 생명을 부지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내력을 가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건설하고 조직하고 정돈해야 한다. 일체의 중지는 일보 후퇴이며 진창을 향한 한 걸음이다.(p62)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전적으로 의지했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는 달리, 미셸 투르니에가 새로이 개조해낸 <로빈슨M>은 스스로의 성찰에 의한 환경에의 적응/극복을 해가게 되며, 이러한 주인공의 성찰이 결국 이 소설의 핵심'사회적 존재로서의/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지점으로 이끌어 내준다라는 거지요.


【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강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정녕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습성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라면, 전 '전혀 아니다'라 대답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원작과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말로!)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라 생각하는 겁니다. 우선!!! --- 프라이데이/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무인도 생활동안 로빈슨 크루소/로빈슨M을 지배했던 감정인 '공포'라는 것의 원인부터가 두 작품은 차이가 있습니다.

원작에서의 로빈슨 크루소에게 내내 자리잡고 있었던 '공포'라는 감정이 '(동물이든 인간이든, 심지어 기상 상태와 같은 환경이든) 타자(他者)'로부터 기원되는 것이었던 반면, <로빈슨M>의 '공포'는 오로지(라고 말해되 무방할만큼) '혼자임'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었었죠. 다시 말해, 로빈슨 크루소가 가졌던 공포의 원인이 '(자신 이외 누군가의) 존재로부터의 공포'였었다라면, <로빈슨M>의 공포는 '(자신 이외 누군가의) 부재로부터의 공포'였다라는 겁니다. (물론! 까고 까고 또 까들어가면, 이 둘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매우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미셸 투르니에의 설정 자체는, 예의 다니엘 디포의 원작에 비해 훨씬 더 매력적일 뿐 아니라 ('1719년의 작품'에 '2015년의 현실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라는 게 공정하다고는 물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현실적 설득력면에서도 원작을 압도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차이점은 두 작품의 결말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무인도에 홀로 존재하는 인간인 <로빈슨M>은 (원작에서도 그러했듯) 탈출을 위한 배를 만들고나서야,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그 배를 바다에까지 가져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로부터 <로빈슨M>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나' 이외의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어야 하며, 그 둘 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간의 접점이 있어야 한다라는 점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지요.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7"(p45)

뒤이어!!! ---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타인의 부재(不在)'라는 상황이 한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즉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사회'라는 것을 제거해 이젠 오로지 '개인으로서만 정의되는 인간'이 되었을 때8, 인간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른지에 대한 예시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의심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양태의 '인간성(人間性)'이란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보여줍니다.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는 땅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먹었다.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고, 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뒹굴었다.(p48)

​즉, 우리가 현재 '이것이 당연하다'라 생각하고 있는 '인간성/인간됨'이라는 것엔 사실 오로지 '사회적 존재'로서 기능할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라는, 그러하기에/그러므로 그 '인간성'이라는 건 결코 ('어느 상황에서나 통용되는'이라는 의미의) '당연'한 것이 될 수는 없다라 말해주고 있다라는 거지요.9 ---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완전한 고독'의 상황에 (난생 처음으로) 처해졌던 초기에는 '생존'에의 필요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로빈슨M> 역시 딱히 의식하지는 않았었습니다...만!!!


저수지와 배수로까지 만들어놓고 농사를 지어왔거늘,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의 그러한 모든 노동이 '그 누군가를 향한, 대답도 없는 부름이었던 것'10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스페란차'라 명명한 이 곳에는 '오직 하나의 관점, 일체의 잠재성이 배제된 나의 관점이 있을 뿐'11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거란 거죠. 그리하여!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M>의 입을 통해 내리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게 됩니다.


'존재한다(Exister)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고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나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타인 쪽으로 도망쳐 나감으로써만 존재한다.'(pp158-159)

이 작품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속 <로빈슨M>은 그리하여 '밖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냄으로써 자신 스스로를 존재하게/할 수 있게 합니다. : '헌장의 준수, 형법의 이행,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 잠시도 쉴 사이를 주지 않는 엄격한 일과 시간표의 실천 ……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자신에게 강요하는 관습과 규제의 그 모든 코르셋12'13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이처럼! '혼자임'인 상황에서는 사실 아무런 필요도 없는 사회적 제약들을 굳이 만들어 내 자신에게 강요까지 함으로써 '인간의 사회성'을 잃고싶지 않아했었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장군 제복'14으로 대변되고 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섬에 대한 절대적 권능'15이란게 기실 결국엔 '철저한 고독의 산물'16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원작의 내용이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가졌다라 비판받을 만한 요소17를 지녔다라면,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원작의 그러한 요소들을 (거의 전적이라 말해도 될만큼) '사회적 존재'로서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개인 <로빈슨M>의 노력으로 바꾸어놓는데 성공했다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유들(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의도라고도 할 수 있을)로 인해, 원작에 강하게 심어져 있던 종교적 색채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는 거의 보여지지 않기도 하구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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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도착하고 보니 나는 그곳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p379) …… 정말이지 섬에서 조용히 살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섬에서는 내가 가진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었고 내가 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p389)

-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중 발췌

혼자서 살아왔던 로빈슨 크루소/<로빈슨M>에게 프라이데이/방드르디라는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환경의 변화 역시, 두 작품 속 주인공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실 저는 --- 이 작품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끝맺음보다는 위에 언급한 <로빈슨M>의 두 가지 모습들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만, 작가에게는 어쩌면! 그 두 가지 차이점인 단지, 원작과의 다른 끝맺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사전적 설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해보게는 됩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로빈슨M> 역시, 28년 2개월 19일간의 스페란차 생활을 마치고 섬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작의 로빈슨 크루소는 당연!히 그 섬을 떠났었지요. 그리곤 자신의 모국인 영국에 도착했습니다만, 오랫만에 복귀하는 옛 '사회'에 어색함을 느끼게 되지요. 하지만, 다니엘 디포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로빈슨 크루소의 복귀가 곧 매우 순탄한 길을 걷게 되는 것으로 그려냈더랬습니다. 이에 반해! --- 미셸 투르니에는, 처음 읽어볼 때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로빈슨M>이 내리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결말에 대해 처음에는, 이전까지 읽어왔던 내용들과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었으나, 결국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해보면, <로빈슨M>의 선택 역시 이전까지의 이야기 흐름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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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원작에서 '프라이데이'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는 로빈슨 크루소가 '백인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며 기독교인이기 때문'19이기 때문이었다라 지적하고 있는데, (원작 「로빈슨 크루소」를 '제국주의'의 시선으로 비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듯) 이러한 (사실 작가에게 있어 이 작품을 쓰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특정 시기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의 보정 결여' 때문이라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이 비판이 작가 미셸 투르니에로 하여금 이 작품을 쓰게 했던 가장 커다란 동인(動因)이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독서는 그 점, '방드르디에 대한 역할의 강조'에는 별 의미를 느낄 수가 없었었네요. 이제 다음으로 읽을 '미래 버전의 로빈슨 크루소'는 좀... 다르려나요? 


덧> 이러한 나름의 무게감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 지나칠 정도로 철학적으로 쓰여져 있는 <로빈슨M>의 '항해일지' 역시 이 책에 '재미있는!'이란 수식어를 붙여줄 수는 없게 해주었으며, 그다지 성의가 보이지 않는, 심지어 고리타분함까지 느껴지게 해주었던 번역 역시 이 소설을 그리 인상깊은 작품으로 남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는 뭔가... 변화가 좀 필요할 듯 싶네요.  



※ 당연히! 이 작품을 읽기 위해 앞서 읽어보아야 할, 그러나 딱히 권하고 싶지는 않은 작품 :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

 

 

 

 

 

 

 

 

 



 

  1.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설의 원제를 문자 그대로 옮기자면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고성소>가 된다고 합니다.
  2. 그러하기에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완벽한 개인'의 모델로서 원작의 로빈슨 크루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 되기도 하지요. 실제로 모 거시경제학 교과서에는 「로빈슨 크루소」로부터의 인용문을 매 장(章)의 앞 부분에 등장시켜 놓고 있기도 했지요.
  3. 작가의 이름 첫 알파벳입니다.
  4.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p284.
  5. 다니엘 디포 作, 「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p437.
  6. 시일이 지난 뒤에는 이러했던 로빈슨N의 의지가 결국에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에 굴복하게되기는 합니다. 결국 원작과 같은 결과를 낳게는 되었습니다만, 그러한 '인간의 의지'가 존재했었느냐의 여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요. : '이제는 어둠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자신이 정복하고자하는 환경의 조건에 고분고분 굴복하는 도리밖에 없었으니 이것은 불과 몇 주일 전만해도 그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을 생각이었다.'(p125)
  7. 오로지 탈출을 위한 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만 너무 집착했던 나머지, 그 배를 바다에까지 어떻게 옮길 것인가까지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만, 만약 자신 이외의 누군가(타인)가 있었더라면 그 '운반의 문제'에 대해서도 미리 충분한 고려를 해보았었을 꺼라는 의미입니다.
  8. 이 반대의 과정, 즉 '개인으로서만 정의되는 과정'에서 시작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확장해가는 것이 바로 "macroeconomics with microeconomic foundation"의 전개방식이지요.
  9. 이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지요.
  10. 본문 p153.
  11. 본문 p66.
  12. 물론 이러한 것들이 다니엘 디포의 원작 속 로빈슨 크루소처럼 청교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라 생각합니다.
  13. 본문 p99.
  14. 본문 p112.
  15. 본문 p114.
  16. 본문 p115.
  17. 실제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지녔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딱히 그 주장에 동의가 되지는 않더군요.)
  18. 미셸 투르니에는, 원작과는 다른 <로빈슨M>의 선택을 하게 된다라 그려냄으로써,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정말로 강렬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 29년이 넘은 스페란차의 생활 동안 이미! <로빈슨M>에게 '사회'라는 것이, 이전에 살았던 영국이 아닌, 그 후로 살아온 스페란차로 변해있다라는, 즉 ​'칼레나무와의 행복한 관계'로 대변되는 적응이 결국엔, '이 엄청난 재난은 그 자신이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잘 다스려놓은 이 섬은 결국 그의 마음에 방드르디 못지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다'(p233)라는 문구에서도 보여지듯, 어느덧 '(영국이라는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사회'에의 적응되어 있는 <로빈슨M>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사회'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독자들이 살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19. 본문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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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세계문학 163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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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언제'였었는지까지는 도저히 특정지어낼 수 없습니다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이전에 분명 「로빈슨 크루소」라는 책을 읽었었던 건 확실합니다. 예의, 그 세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 채 --- 단지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이 무인도에 살게 되었고, 나중엔 프라이데이라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라는 것까지만이 남아 있는, 심지어 로빈슨 크루소가 그 무인도의 탈출에 성공했었나의 여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어느덧 사십대도 중후반이라 불리우는 나이가 되어서야 이 책의 원작을 펼쳐보았었거늘, 다 읽고나니 뭔가 참... 심란하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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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군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었다 합니다. 물론 초딩을 위한 <요약본>이었구요. 저 역시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소위 <명작> 혹은 <고전>이라 통칭되는 작품들을 '전집'으로 박아놓고 읽으라 했던 부모였었습니다만, 지금 이 시점에선 그런 저의 '생각없었던' 행동들을 무지하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뭐,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까지 이 포스트에서 말하는 건 그렇고, 이 작품 「로빈슨 크루소」에만 한정지어 보자면 --- 이 책을 자녀에게 읽히는 부모는 과연! 이 작품으로부터 자녀가 '무엇'을 얻어내길 바라는 걸까요?


​'다른 아이들도 다 읽는다니까'라는 (이겨낼 수 없는 유혹임은 분명한, 하지만) 무책임한 변명스런 이유를 제외한다면 혹! 나의 아이가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 등에 감동받고 그것들을 배우길 원하셨다면 --- 결론적으로 말해 당신의 선택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막 확성기 대고 소리쳐) 말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정녕 요즘의 우리 아이들에게 로빈슨 크루소의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 등을 가지길 원하는 건지 진지하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그런 것들보다는 100점짜리 수학과 영어 시험성적을 더욱 절실하게 원하고 있지 않나요? 전... 사실 그렇. --;;) 좀 심하게 표현해보자면, 아이들에게 이 작품은 제발 읽히지 않아야 한다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만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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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우리끼리' 의식


한 인간의 생에에서 이보다 더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늘 이 작품 속 사례들을 이용할 것이고, 또한 어떤 식으로 생겨난 것들이건 간에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온갖 상황들에 내재한 하느님의 지혜를 이 작품 속 사례들을 이용하고 정당화하고 기릴 것이다.(p5)

작가 다니엘 디포가 <서문>에서 위처럼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아주 대놓고! 기독교적 편향을 미리부터 포고해놓고 있는 내용의 책입니다. <생명의 말씀사>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작품에는 무려!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찾은 이야기"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기도 하지요. 또한, '내 이름은 어머니의 가족명을 따라 로빈슨 크로이츠나에라고 지어졌다'(p9)라는 문장에 달려 있는 역자의 주석, '십자가라는 독일어 Kreutz와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의미의 Kreutznaer가 어원. 크루소의 모험이 <영적인 여행>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p9)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온통/오로지 기독교적 신앙과 하나님2의 존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산층 집안의 둘째 아들3이었던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아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인간의 행복에 가장 적합한 신분'(p11)인 중산층4으로 계속 살아갈 것을 강하게 권유하지만, '바다에의 동경'이 너무도 강했던 십대 후반의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요. 결국 그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친구의 도움/꼬득임으로 가족을 떠나 몰래 바다로의 첫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배가 험버 강을 벗어나자마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모습의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저지른 짓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토록 못되게 떠나며 내 의무를 저버린 일에 대해 하늘이 얼마나 정당하게 심판을 내린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p16) …… 나는 진심으로 회개한 탕아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다.(p17)

​이 소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그 서술의 시점은 그로부터 한참 뒤쪽입니다. 즉,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에게 닥쳤던 엄청난 고난들이 결국엔 해피 엔딩으로 끝맺음된 이후, 자신의 과거를 차근차근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스러운 내용이라는 거지요5. 그러하기에! 로빈슨 크루소가 (거의 완벽한) 기독교적 신앙을 갖게 되기 이전의 영적갈등이 초반부에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부분도 그의 신앙관대로 해석해보자면 결국 --- '아버지'는 하나님, 로빈슨 크루소는 우리들 자신, 그리고 그에게 바다로의 여행을 도왔/꼬득였던 친구는 악마쯤이 되겠죠.


​171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을, 2015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뭔가 좀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 제 생각엔, 결과적으로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해피 엔딩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었다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과도할 정도로 여러가지 행운들을 주인공의 곁에 등장시킵니다. 아주 결정적인 곤란/위험에 처해 있을 때면 언제나 짠!하고 선량한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이 로빈슨 크루소에게 주어지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 이제 이 작품의 본론인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보죠. 그는 총 ​'28년 2개월 19일'동안, 그 중 약 24년간을 혼자서 살았었더랬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그 '28년 2개월 19일'의 매 순간이 모두 다 '하느님의 은혜'였었으며 그가 붙잡고 있었던 '나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분께서 나를 이 상황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p95)라는 믿음이 결국! (그 믿음 그대로) self-fufilling 되었다라는 식의 --- (많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라 각오하고 있는, 허나 아직까지는 결코 버리고 싶은 마음도, 버려야할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는) 전형적인 '비논리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가 덮친 이유는 스트립클럽, 디스코장, 술집, 여타 사악한 장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다>"(p234) ……… "우주는 마음이 없다. 감정도 인격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해치거나 기쁘게 하려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나쁘냐 좋으냐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238)

- 리처드 도킨스 著,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

현대 의학조차 포기한 자신의 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이 '나음받았다'라는 류의 간증들은 대한민국 교회 곳곳에 수도 없이 넘쳐날겁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라 제가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그러하기에 '기적'이라 불리우는 현상들이 그저 '우연'으로만 발생된 것은 아니라는, 그 중 일부엔 분명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고 있다라는 걸 믿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 우리 기독교는 ('나음받았다'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면 왜!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그 사람에게 일어났었던 것인지, 더 나아가 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신자들에게는 왜!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만약 그 이유를 그 특정인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로 '나음받았다'를 경험한 이후 더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기에>라 설명한다면 실제로 그러한 '더 큰 쓰임'이 분명하게 존재했었다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비기독교인들을 향해 충분히 대답해내야 한다6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해보았던 다음의 자문(自問)은, '나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지만 아직은 나음받지 못한' 수많은 기독교인들 또한, 제가 그러했었듯, 한 때나마 해볼 수 있는 생각일 겁니다.


"하느님깨서는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셨을까?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내가 저지른 걸까?"(p129)

이 상황에서 작가 다니엘 디포는 --- (마치, 한때 유행했던 <해결의 책>을 펼지는 것 마냥) 로빈슨 크루소가 아무 생각없이 펼쳤던 성경의 페이지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나를 불러라. 구해 주리라.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7"(p131)라는 말씀을 담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상황을 이끌어 갑니다. (이 소설이 회고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음에 유념한다면) '원인과 결과의 전이(轉移)8'라는 지적을, 리처드 도킨스 교수와 같은 무신론자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로부터도,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로부터조차도 받을 수 있는 전개이지요. 뭐 이런 상황은 이 작품 속에 너무나도 넘쳐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기독교


위의 내용들은 이제 말하려 하는 것들에 비하면 가볍게 눈감아줄 수 있을 겁니다. 아예 문제조차 삼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요. 무식하게 말해 '걍 너네들끼리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종교'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이지요.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라는 말이 단적인 예이지요. 이 소설에도 예의 그런 부분들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기도 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온갖 불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생긴 것 같다.(p178) …… 나는 사악하고 철면피했던 내 과거의 삶을 여러 달에 걸쳐 처절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그런 반성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며 섬에 도착한 이후 하느님께서 얼마나 특별하게 나를 보살펴 주셨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베푸셨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내 죄로 인해 내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벌보다 훨씬 적은 벌을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요롭게 많은 것들을 선물해 주시기까지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내 회개가 받아들여진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이것 말고도 더 많은 자비로운 일들을 마련해 놓고 계실 거라는 큰 희망까지 주었다.(p180)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대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으며, 심지어!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임에도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라는 반성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셨을까?(p129)라는 질문에마저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대답을 해주지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옹기장이 손에 쥐어진 찰흙같은 존재이며, 그 어떤 옹기그릇도 옹기장이에게 <당신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p284)


이런, 극단적인 '겸손함'엔 그 누구도,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 교수조차도 태클을 걸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 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겠다는 데에야 뭔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는 기독교의 모습은 매우 커다란 문제를, 과거에도 일으켰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 자신의 창조자인 유일신!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겸손해야한다라는 '당위'와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라는 '추론'은 <우리끼리>라는 범위 안에서는 얼마든지 좋은 모습을,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것이 <우리끼리>라는 범위의 확장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고 감동적인 신앙의 발로(發露)인지에 관계 없이 --- 하나님은 '유일신'이시기에, 다른 신(神)을 섬기는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교화(敎化)시켜야 한다라는 목적이 발동되는 순간, 기독교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되는 겁니다.


하느님께, 이 가엾은 야만인에게 구원이 될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이 가엾고 무지한 야만인의 가슴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빛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시고, 그가 스스로 만족하고 확신을 갖게 해주시고, 그의 눈이 뜨이게 될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빌려 그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 달라고 진지하게 기도드렸다.(p297) …… 이 가엾고 불쌍한 야만인이 나로 인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가 내게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가엾은 야만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p298) …… 이제 나는 종종 예전에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던 사실, 즉 섬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게 되었다.(p299)

​'식인(食人)'의 관습이 있을 뿐 아니라, '베나머키'라는 고유의 신(神)을 가지고 있는 종족 출신인 '프라이데이'는 처음 만났었을 때엔 충분히! 로빈슨 크루소의 관점으로 보아 '야만인'이었을 꺼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라이데이가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게 되었을 때조차도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야만인'으로만 호칭되고 있다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즉! ---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다라는 상황은, 프라이데이가 구원을 받았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가 신앙을 가졌다 해도 여전히 야만인의 지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자신이 '가엾은 야만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다'이기에 기쁜 것이고, 그러하기에 결국에는 '섬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한 마디로 선민의식(選民意識) 만땅의 '순교자(殉敎者) 코스프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기적인 양태의 끝마무리를 보이고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런 '이기적임'은 백인 포로들을 끌고 로빈슨 크루소가 살고 있는 섬으로 왔던 야만인들을 공격하는 것에조차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격 개시!'(p318)라는, 과거 십자군 전쟁을 그대로 떠올려주는, 무소불위의 이유가 되는 '종교적 이기심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

역자(譯者)는 이 작품에 대해 '제국주의적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제국주의'의 멍에를 씌우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역자가 들고 있는 근거들은 모두 지나친 확대 해석 혹은 '로빈슨 크루소 개인의 습성'을 과도하게 일반화 시킨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뭐 이건, 어차피 독자 개인의 판단 몫일 수 밖엔 없을 것이기에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처럼 --- 이 작품을 읽으면, 읽고 나니 오로지! 저에게는 '비뚤어진 기독교인'이라는 한 구절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더군요. 만약! 작가 다니엘 디포의 이 작품을 쓴 의도가 오로지 '타인의 교화'와 '하느님의 지혜'를 보이는 것에 있었다라면, (어차피 이 포스트의 모든 내용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밖엔 없겠지만) 이러한 방식의 '교화'와 '시현(示現/示顯)'은 분명 옳지 않은 것이며, (제가 좇고 있는) 다음의 두 마디야말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소위 '전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에 있어 가장 먼저! 가장 중점을 두고 따라야 할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질 뿐인겁니다.   



 

 (출처 : 엠팍 불펜게시판 중 "커쇼의 신념.jpg")

 

 

 소위 '고전' 혹은 '명작'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의 (청소년을 위한) 요약본이 대부분 그러하듯, 원작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 의도는 '요약자/출판사의 의도'에 얼마든지 가려지고 변형/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로빈슨 크루소」가 청소년들의 도전정신 고취를 위해 요약되었다라면 그건 엄연히 말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일종의 위작(僞作)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여전히 뻔한 말이기는 하지만) 다음의 (단!!!) 두 구절을 읽을 수 있었다라는 것이, 이 작품을 다 읽고난 유일한 위안이었으며, 이 작품을 먼저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이후 읽을 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유일한 만족이었네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저의 주제넘은 개인적 의견을 밝히자면 --- 우리, 이딴 책은 제발 아이들에게 읽히지 말자구요. 글찮아두 애들 읽어야 할 책 쌔고 쌨잖습니까!!!


● 무릇 성공과 번영이란 오용하면 종종 크나큰 역경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p57)

 우리는 결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진정한 본질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그 반대 상황들에 의해 입증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결핍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p191)


※ 역시나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관(觀)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 공부


 




 

  1. 출판사 <열린책들>의 표기는 '대니얼 디포'이나,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일반 표기를 따라 저자명을 '다니엘 디포'로 적었습니다.
  2. '하나님'과 '하느님'의 표기에 별다른 의미있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대한민국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기인 '하나님'을 저 개인적인 문장에서는 썼으며, 본문의 인용에서는 '하느님' 표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3. 그의 첫째 형은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셋째 동생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옵니다.
  4.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계급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중산층은 육체노동으로 먹고사는 하류층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 그들의 비참한 불행과 고생을 경험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상류층 사람들의 오만, 사치, 야망, 질투 같은 것들로 난처한 지경에 처할 필요도 전혀 없다.'(p11)
  5.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일부 상황들에 대해 중복된 서술들이 적지 않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6. 이에 대해 공병호 박사는 저서 「공병호의 성경 공부」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집착하는 신비주의는 경계해야겠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 자체에 신비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사뭇 실망스런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기독교인들 내부에서나 통하는 설명이지,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다가가기에는 택도 없지 않을까요?
  7. <시편> 50장 15절.
  8. 그러하기에, 이 책으로부터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을 배우게 하겠다는 부모의 의도는 철저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느님의 이끄심'이었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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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 신화, 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데이브 매킨 그림 / 김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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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하게 되는'가 봅니다. 페이지의 순서가 곧! 사건의 순서로만 입력되었었던, 그러했기에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때 서양에서는 뭔 일이 있었었지?'류의 문제는 100% 찍었어야 했던 제가 / 재미있는 계산놀이로 받아들여져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이 갑자기 돌변하여 장황하고 복잡한 암기과목이 되어버렸었던 대학원 시절의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왔던 제가... 부지불식간에 역사와 수학에 관한 책들에 대한 흥미를 폭포수처럼 갖게 되었었던 지난 2-3년간이 그러했었듯, 단지! 땅 속에서부터 우주까지 공부해야한다는, 즉 공부해야할 범위가 너무 넓다라는 이유로 (당시 학교에서 모든 문과생들에게 강제로 지정해주었던) 지구과학이 싫어서, (1987년의 수준에서는) 그저 아주 간단한 공식 25갠가 26개만 달달 외우면 학력고사에서 만점 받을 수 있었던 물리를 선택했던 제가  --- 그 우주에 대해 궁금해하게되었고, 심지언 땅 속과 바닷 속까지도 궁금해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만들어진 신」을 통해, 말 그대로 피 한방울 새어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철한 모습으로 자신의 믿음을 주장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 책,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을 다 읽고난 독자로서는 ---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하게 되는가 보다'라는 투의 표현을 쓰는 것에 매우 강한 주저함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대체! 어떤 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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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을까?

​● 사물은 무엇으로 만들여졌을까?

​● 왜 밤과 낮이, 겨울과 여름이 있을까?

​● 태양이란 무엇일까?

​● 무지개란 무엇일까?

​● 세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우주에는 우리뿐일까?

​● 지진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목차만 읽어 봐도 저에게 (가이노이드 지방을 향한 남자의) 성욕(性慾)을 훨씬 뛰어넘는 독서욕구를 불러일으켜주는 이 책은 예의! --- 「만들어진 신」에서 보여주었던, 종교를 향한 냉소적인 도킨스의 시선은 여전히 건재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위 목차에 나와있는 자연현상들에 대해 여러 신화들 - 특히 그는 기독교에 대해 더더욱 냉소적인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성경은 '중동 사막 히브리 부족의 창조신화'(p123)일 뿐이고, 예수는 고작 '유대인 방랑 설교자'(p247)였던 인물입니다 - 이 전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준 후 곧! '과학적 기법'이 말하는 바의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1 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고 있지요.


나는 현실 세계에도 마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현실이기에 더 마법적이고, 우리가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에 더 마법적이다. 현실이야말로 가슴 뛰는 마법이다. 진실은 어떤 신화보다, 미스터리보다, 기적보다 더 마법적이다. 마법이라는 단어가 지닐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흥미로운 의미에서 그렇다. 과학에는 고유의 마법이 있다. 현실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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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 이 책에서 정의하고 있는 '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아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오감(五感)을 써서 직접 감지할 수 있다. 아니면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특수한 도구들로 감각을 보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아니면, 그보다 더 간접적으로, 아마도 현실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모형을 창조한 다음, 그 모형이 우리가 보고 듣는 바를 성공적으로 예측하는지 시험할 수도 있다.(p19)

​이러한 '현실 지각'의 방법을 따른다면 '현실'이란 우리가 이미 아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도 존재하되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들, 더 나은 도구가 발명되어 우리의 오감을 향상시켜주는 날까지 우리가 알 수 없을 것들도 포함'(p15)되는 거지요. 하지만! --- 이처럼 '미래가 되면 바뀔 수도 있는'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현실'의 정의에서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준거는 "어떤 것의 존재를 믿어도 좋은 경우는 오직 진정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다"(p16)이라는 겁니다. 그 결과!!!

(제가 확신하고 있는) 신(神)의 존재에 대해선 '믿을 수 없다'를 뛰어넘어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과격한 결론까지를, (제가 궁금해하고 있는) 외계생명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Yes or No' 중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의 의견은 'Yes'라 하지만 과학자에게 '의견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말을 덧붙인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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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 책에 대한 감상문으로서 옳은 방향도 아닐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 다음의 인용구절에서 보여지는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가치관에 한없는 존경을 보내게 된다라는, 이건 기독교인인 저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오히려! (왜 대한민국의 보수는 유시민을, 진중권을, 노회찬과 심상정을, 이철희를 가지고 있지 못한가를 통렬히 반성해야한다라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에는 자신 버젼의 '리처드 도킨스'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그것이 혹 자체적 믿음(혹은 논리)의 불완전함 혹은 (의도되지 않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고안되었을) 잘못된 오해/오독2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정말로 근본적이고도 심각한 자문을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된 독서였었다라는 걸 밝히는 것이 그나마 초라해지지 않는, 치사해지지 않는 기독교인의 대응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초자연적 기적이라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로 여겨진다.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을 둘 중 하나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거나(목격자가 착각했거나, 거짓말을 했거나, 속임수에 넘어갔거나), 아니면 현재의 과학에서 부족한 점이 드러난 것이다. 현재의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찰이나 실험 결과에 맞닥뜨렸을 경우, 우리는 멈추지 말고 계속 과학을 개량해 끝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p264) …… 우리가 이상한 일을 보고서 틀림없이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고, 앞으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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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일반인을 대상으로는 가장 최고급의 "지구과학·생물학·화학·천문학" 책이라 확신하게 되는, 그 밖에도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정말로 멋진 설명을 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심지어 종이질까지도 죽여줍!) --- 끊임없이 보여지는 삽화들과 사진들은 그러한 과학분야에 대한, 중·고삐리들의 흥미를 자아내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기도 하지요. 물론, 제 아들에게도 당연히 이 책을 권할 겁니다. 설혹!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조롱이, "당신의 1억 8,500만 세대 전 할아버지는 물고기였다"(p40)라는 저자의 (저에게도 충격적이었던) 단언이 --- ​이제 막 피어날락말락하는 종원군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더라도, '믿음'이란 말 그대로 '믿음'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부모의 '강요된 세뇌'에 의해 세워져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저자의 책 두 권을 읽었다해서 저의 '믿음'이 흔들리거나 변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종원군의 '믿음' 또한! 흔들리고 의심되어가며 그렇게 커져가기를, 부모로서 단지 바래어만 볼 뿐.


※ 읽어본,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다른 책 : 만들어진 신


※이 포스트의 시리즈 :

- 최준식 · 지영해 共著,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 프랑수아 롤랭 著,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 

- 칼 세이건 作, 콘택트 1·2」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1. 예를 들어, "Who was the first person?"이란 제목의 1장은 각종 신화가 말해주고 있는 이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곧이어는 "Who was the first person REALLY?"라는 제목의, '과학'이 말해주고 있는 해답을 설명해 주는 식이지요.
  2. 도킨스 교수의 다음 비판은 기독교인으로서는 그야말로 가슴쓰린 대목이지요. ---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가 덮친 이유는 스트립클럽, 디스코장, 술집, 여타 사악한 장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다>"(p234) ……… "우주는 마음이 없다. 감정도 인격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해치거나 기쁘게 하려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나쁘냐 좋으냐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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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 1
칼 세이건 지음, 이상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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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는 순간, 당장 읽어봐야 겠어!란 흥분을 불러일으켜주었던 책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는 올해 출간되었으며, 바로 다음에 읽었던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는 2006년에 쓰여졌었었지요. --- 뭔가 주제를 이어가는 독서에 있어 거의 항상! 매우 운이 좋았었던 저의 경험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아, 가장 먼저인 1985년에 쓰여진 이 책 「콘택트」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두 책들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었기에, 그 두 권의 책들을 미리 읽었었다라는 것이 이 책의 독서를 훨씬 더 즐거운 유희로 만들어주었으며, 결국엔 뭔가 총정리스러운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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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술이, 우주의 아무 행성에나 직접적 - 방문하거나 무인 우주선 등을 통한 시각적 확인 등 - 인 방법으로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라면!!! --- 외계 지성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그들로부터의 (전파의 형태든 그 어떠한 것이든) 메시지 혹은 그들의 직접적 방문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게 됩니다. (이 소설에도 언급되고 있는) SETI1 프로젝트는 그렇게 외계로부터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전파를 찾아내는 인류 노력의 일환이지요. 아직까지는 SETI를 통해서건 다른 노력을 통해서건, 외계 지성체로부터의 메시지라 여길만한 그 어떠한 의미있는 전파가 없었습니다만, 만약! 우리 지구의 인류가 외계로부터 그런 메시지를 받는다면, 그렇다면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되게 될까요? ---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이 쓴 이 소설 「콘택트」는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 외계 생명체는 존재하는가? 】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우주에 우연은 없다."2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밝혀내는 것이 과학자들의 몫이라면, 그들의 탐사는 철저하게 과학적인 추론을 거쳐 이루어져야 하겠죠. 이때의 '과학적 추론'에 대해 칼 세이건은  "가정(假定)은 반드시 분명한 물리적 현상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1권, p48)라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 은하 안에서 교신이 가능한 문명(文明)의 수 N을 구하는 공식인 <드레이크의 공식3> 역시 외계 생명체와 그들의 기술 역시 (우리 인류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의) 자연의 법칙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칼 세이건도 참석했었던) 1971년 열렸던 외계 문명에 관한 학회에서 전파천문학자들은 이 N의 값이 100만 정도일 것이라 추정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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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 '외계 생명체의 탐색이란 본질적으로 관찰만이 되풀이되는 판에 박힌 작업(1권, p75)'이었었기에, 관련 과학자들 중에서조차도 '외계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혹시 존재한다 해도 너무 드물고 너무 멀리 있어 탐지가 불가능하다'(1권, p71)라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전파천문학자 엘리 애로웨이 박사는 ('드레이크 방정식'이 말하고 있는 바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들이 있었고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은하계에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인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란 어려웠다'(1권, p65)라, 설혹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음이 확인된다 해도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얼마나 귀중하고 희귀한 것인지 확인하는 의미'(1권, p85)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라 주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 "존재한다는 증거의 부재가 곧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우리 인류보다 더 높은 지능/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


'송신'이 아닌, 단지 '수신'의 단계에서만 외계 생명체를 탐색할 수 있는 지구의 인류에게 만약! 외계 문명이 전파의 형태로 어떠한 신호/메시지를 보내려 한다면?이란 의문에 대한 '과학적 추론'의 과정 --- <'바보, 멍청이와 이야기하려면 바보, 멍청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1권, p49)으로 말을 걸어올 것이다.4 → 과연 그들은 어떻게, 즉 어떤 주파수를 선택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올까? → (그런 목적의 주파수의 선택함에 있어) 양쪽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물리적 현상으로 확인된 과학적 지식은 과연 무엇인가? →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자가 무엇인지는 양측 모두 알고 있으며, 그 해답인 중성 원자 수소가 특징적으로 흡수 또는 발산하는 전파 스펙트럼은 무엇인가?> --- 을 통해 엘리가 소장으로 있는 아르고스 연구소는 중성 원자 수소의 1420 메가 헤르츠 주파수 스펙트럼을 통해 외계 생명체와의 교신이 가능할 것이라 보게 됩니다.5 하지만 여기서!!!


제일 불안한 문제는 외계 생명체가 의사소통을 시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물론 그럴 능력은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건 마치 이 개미들6 같은 거지요. 개미들 역시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요. 아주 바쁘게 살아가지요. 나름대로 주위 환경에 대해서도 잘 인식하고 있고요. 하지만 우리는 개미들과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잖아요. 아마 그래서 개미들은 사람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할 거예요.(1권, p60)

우리 인류가 외계 생명체의 존재와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고 있기에, 그 상대방 역시 우리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라는 추론을 기막힐만큼 멋지게 박살내어주는 논리 아닙니까?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저 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 인류가 아직까지 (존재는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외계 문명과의 교신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란 판단을 하게 되더군요. 암튼!!! --- 우리가 하지 못하고 있는 '송신', 그리하여 오로지 '수신'에만 의존할 뿐인 지구 문명에게, 전파의 형태로 신호/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문명이라면 그들은 분명 우리보다는 더 진화된 지능을 가지고 있다 보는 건 당연한 결론이 되는 겁니다.  



【 외계 생명체로부터의 초대 】


외계 생명체를 찾아낼 /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아직까지는 우리 인류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외계생명체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위치까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게다가 자신들을 찾아올 수 있는 방법까지를 알려준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생겨나게 될까요? --- 어느 날 갑자기, 직녀성으로부터 규칙적인 전파가 송신되어 옵니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과 난관을 뚫고 드디어 엘리는 그 전파가 직녀성으로부터의 초대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내게 되지요. 그 초대장 속에는 어떠한 수단을, 어떻게 제작해 자신들에게 와야하는지까지 담겨져 있습니다. 자! 지구는 이 초대에 응해야 하는 걸까요?


"사형선고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모양이었다."(1권, p252)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내부적으론 외계의 초대에 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만, 그들이 보내어준 설계도에 나타나있는 미지의 기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막대한 재정과 공동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했었었지요. 결국! 양국은 당시 그들이 한창 벌이고 있었던 군비 경쟁을 멈추기로 합의하고, 드디어 그 기계의 제작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 과학자의 본성과 정치인의 본성은 분명 다른 것인가 봅니다.


외계인이 보내온 그 설계도가 만약 '트로이의 목마'라면?이라는 의문에 정치인들에게서 제기됩니다. 엄청난 노력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들어 낸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순간 지구가 폭발한다던가 하는, 즉, '이제 막 발전해서 우주로 나오는 문명을 억압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방법'(1권, p261)이라면 어떡하느냐라는 것이죠. 이러한 추론 하에 일부 정치인들은 차라리 외계로부터의 메시지 수신 자체를 중단해버리자라는 의견까지도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 지구와 외계의 대립은 '서로 비슷한 처지였던 그리스와 트로이 사람들의 싸움이 아니다'(1권, p263), '이것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를 잘 보여준다'(1권, p266)라며 반론을 펼치지요. 결국엔 우리가 가지 않으면 그들이 올 것이다라는 논리의 승리로 외계가 보내온 설계도는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거늘, 여기서 또!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소련은 미국이 이 기계 제작의 주도권을 쥠으로써 어떤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을, 미국은 소련의 과학 기술이 비약적 발전을 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게다가 ---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의 분담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제작 과정의 총괄 관리는 누가 할 것인가? 제작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이냐? 등으로부터, 오로지 다섯 명만이 탑승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그 기계에 과연 어떤 구성의 인종과 성별의 조합을 하여야 하느냐, 미국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등등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게 되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기계 제작이 완성되는 순간이야말로 지구 종말의 순간이라는 사이비 종교들의 주장에서부터, '과학자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과학의 안전장치는 무엇이요?'(2권, p62)라는 보다 심오한 의문까지, 이 미지의 기계 제작에 대한 세상의 우려와 반대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과학'을 공격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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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후, 그 기계의 제작이 완료되었고 결국엔 직녀성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 '외계 문명과의 만남에 대한 여러가지 가정'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흥미진진함과 놓쳐서는 안 될 함의들을 담고 있는 1권과 달리, 기계의 발사 버튼이 눌러진 이후의 상황들을 그리고 있는 2권에서는 갑자기 뭔가 이야기의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원주율 π로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는 결말은, 좁게 보자면 <믿거나 말거나>류에서나 볼 수 있을 '고대 문명 속 외계인의 흔적'으로 해석될 수도, 가장 크게 본다면 결국엔 '창조주로서의 신은 존재한다'라는, 흡사 과학이 종교에 두 손들고 항복하는 듯한 뉘앙스를 띠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요.


우주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그 원은 말하고 있었다. 어떤 은하에 살고 있든 원의 둘레를 지름으로 나누어 충분히 계산하고나면 소수점 몇 킬로미터 아래쪽에서 또다른 원을 발견하는 기적을 만나는 것이다. …… 그건 이미 여기 있었다.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우주의 구조 속에, 물질의 본성 속에 마치 위대한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조그마하게 예술가의 서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2권,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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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219페이지부터 시작되는 '과학의 종교에 대한 반박 그리고 종교의 과학에 대한 재반박'이 어쩌면 이 소설이 단지 외계 생명체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자하는 과학의 노력을 그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더 깊고 커다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 대해 미리 암시해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다 읽고나니 해보게도 되더군요. --- 고도로 발달된 외계 지성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고 지구로 돌아온 엘리는 자신이 경험한 현실에 대해 결국 다음과 같은 종교적 해석을 내립니다.


상황은 얼마나 종교적으로 되었나. 하늘에 사는 생명체, 방대한 지식과 권력을 보유하고 우리의 생존에 대해 염려하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분명한 기대치를 가진 생명체가 여기 존재한다. 그런 역할을 부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에게는 지구상의 초라한 인류를 상대로 보상이나 처벌, 삶과 죽음 등을 결정한 능력이 충분하다. 도대체 이것이 과거의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이란 말인가?(2권, pp219-220)

예의 이 질문에 대해 칼 세이건은 '증명 가능성'을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책 속의 이 해답이 여전히 종교적인/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이 질문에 리처드 도킨스는 어떤 대답을 할까?가 궁금해졌을 뿐) 저로서는 어떤 정해진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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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造物主)로서의 '신'>과 <우리의 운명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결정지을 수 있는 '외계 문명'>이라는, 분명! (논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별개의 개념이겠으나, 피조물이며 절대 약자인 우리 인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말할 수도 있을 두 '권력'에 대해 :  "이러한 연구는 무엇보다도 우리 지구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바라건데 우리가 지구를 지키도록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의 결론이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과 '외계 문명'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라면 --- 이 책  「콘택트」(의 1권 2부의 시작)에 인용되어 있는 다음의 구절은, 아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차원의 영역에 '신'을 올려놓음으로써 결국엔 (과학자인 칼 세이건이 이러했으리라 섣불리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성의 의문' 자체를 폐기해버리는 또 다른 방식의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수준으로(까지만) 이해하게 됩니다.  


전능한 교시는 우주 구조 속에서 과학의 원칙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연구하고 흉내낼 수 있도록 했다. 그건 마치 <이 행성의 거주자들, 감히 이 행성이 자기 것이라고 떠드는 이들에게 '난 인류가 살 수 있도록 지구를 만들었고 과학과 예술을 가르치기 위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마련했다. 이제 인류는 만족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내 자비로움으로부터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라고 말하려는 것>과 같다. --- 토머스 페인의 「이성의 시대(1974)」 중.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더 나아가는 독서를 할 생각은 없었었거늘, 이 책의 (뭔가 좀 찜찜한) 결론은 '번외편'격의 책을 다음의 독서로 꼽게 만들어 주네요. ---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The Magic of Reality : How We Know What's Really True」이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의미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성의 의문'자체를 폐기시켰던 리처드 도킨스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 책을 통해 제 이해의 한계가 조금이라도 더 넓어질 수 있을까... 가 은근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 최준식 · 지영해 共著,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 프랑수아 롤랭 著,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


 


 

  1.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2. 피에르 불 作, 「혹성탈출」에서 인용.
  3.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p37.
  4. 영화 <어벤저스>를 보면 토니 스타크가 배너 박사를 향해 'Speak ENGLISH!'라 소리치는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이 말의 의미가 바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해달라라는 것이지요.
  5. 이 결론 자체도 흥미롭지만, 바로 이 추론을 이용해 만날 지점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은 사람을 엘리가 찾아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꿀잼!
  6.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최준식 교수도 '개미'의 예시를 통해 인간의 차원과 외계인의 차원을 설명하였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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