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열린책들 세계문학 163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것이 '언제'였었는지까지는 도저히 특정지어낼 수 없습니다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이전에 분명 「로빈슨 크루소」라는 책을 읽었었던 건 확실합니다. 예의, 그 세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 채 --- 단지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이 무인도에 살게 되었고, 나중엔 프라이데이라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라는 것까지만이 남아 있는, 심지어 로빈슨 크루소가 그 무인도의 탈출에 성공했었나의 여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어느덧 사십대도 중후반이라 불리우는 나이가 되어서야 이 책의 원작을 펼쳐보았었거늘, 다 읽고나니 뭔가 참... 심란하기만 하네요.

……………………………………………………………………

종원군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었다 합니다. 물론 초딩을 위한 <요약본>이었구요. 저 역시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소위 <명작> 혹은 <고전>이라 통칭되는 작품들을 '전집'으로 박아놓고 읽으라 했던 부모였었습니다만, 지금 이 시점에선 그런 저의 '생각없었던' 행동들을 무지하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뭐,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까지 이 포스트에서 말하는 건 그렇고, 이 작품 「로빈슨 크루소」에만 한정지어 보자면 --- 이 책을 자녀에게 읽히는 부모는 과연! 이 작품으로부터 자녀가 '무엇'을 얻어내길 바라는 걸까요?


​'다른 아이들도 다 읽는다니까'라는 (이겨낼 수 없는 유혹임은 분명한, 하지만) 무책임한 변명스런 이유를 제외한다면 혹! 나의 아이가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 등에 감동받고 그것들을 배우길 원하셨다면 --- 결론적으로 말해 당신의 선택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막 확성기 대고 소리쳐) 말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정녕 요즘의 우리 아이들에게 로빈슨 크루소의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 등을 가지길 원하는 건지 진지하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그런 것들보다는 100점짜리 수학과 영어 시험성적을 더욱 절실하게 원하고 있지 않나요? 전... 사실 그렇. --;;) 좀 심하게 표현해보자면, 아이들에게 이 작품은 제발 읽히지 않아야 한다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만큼 말이죠.


·

·

·


기독교의 '우리끼리' 의식


한 인간의 생에에서 이보다 더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늘 이 작품 속 사례들을 이용할 것이고, 또한 어떤 식으로 생겨난 것들이건 간에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온갖 상황들에 내재한 하느님의 지혜를 이 작품 속 사례들을 이용하고 정당화하고 기릴 것이다.(p5)

작가 다니엘 디포가 <서문>에서 위처럼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아주 대놓고! 기독교적 편향을 미리부터 포고해놓고 있는 내용의 책입니다. <생명의 말씀사>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작품에는 무려! "무인도에서 하나님을 찾은 이야기"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기도 하지요. 또한, '내 이름은 어머니의 가족명을 따라 로빈슨 크로이츠나에라고 지어졌다'(p9)라는 문장에 달려 있는 역자의 주석, '십자가라는 독일어 Kreutz와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의미의 Kreutznaer가 어원. 크루소의 모험이 <영적인 여행>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p9)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온통/오로지 기독교적 신앙과 하나님2의 존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산층 집안의 둘째 아들3이었던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아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인간의 행복에 가장 적합한 신분'(p11)인 중산층4으로 계속 살아갈 것을 강하게 권유하지만, '바다에의 동경'이 너무도 강했던 십대 후반의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요. 결국 그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친구의 도움/꼬득임으로 가족을 떠나 몰래 바다로의 첫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배가 험버 강을 벗어나자마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모습의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저지른 짓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토록 못되게 떠나며 내 의무를 저버린 일에 대해 하늘이 얼마나 정당하게 심판을 내린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p16) …… 나는 진심으로 회개한 탕아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다.(p17)

​이 소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그 서술의 시점은 그로부터 한참 뒤쪽입니다. 즉,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에게 닥쳤던 엄청난 고난들이 결국엔 해피 엔딩으로 끝맺음된 이후, 자신의 과거를 차근차근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스러운 내용이라는 거지요5. 그러하기에! 로빈슨 크루소가 (거의 완벽한) 기독교적 신앙을 갖게 되기 이전의 영적갈등이 초반부에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부분도 그의 신앙관대로 해석해보자면 결국 --- '아버지'는 하나님, 로빈슨 크루소는 우리들 자신, 그리고 그에게 바다로의 여행을 도왔/꼬득였던 친구는 악마쯤이 되겠죠.


​171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을, 2015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뭔가 좀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 제 생각엔, 결과적으로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의 해피 엔딩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었다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과도할 정도로 여러가지 행운들을 주인공의 곁에 등장시킵니다. 아주 결정적인 곤란/위험에 처해 있을 때면 언제나 짠!하고 선량한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이 로빈슨 크루소에게 주어지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 이제 이 작품의 본론인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보죠. 그는 총 ​'28년 2개월 19일'동안, 그 중 약 24년간을 혼자서 살았었더랬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그 '28년 2개월 19일'의 매 순간이 모두 다 '하느님의 은혜'였었으며 그가 붙잡고 있었던 '나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분께서 나를 이 상황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p95)라는 믿음이 결국! (그 믿음 그대로) self-fufilling 되었다라는 식의 --- (많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라 각오하고 있는, 허나 아직까지는 결코 버리고 싶은 마음도, 버려야할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는) 전형적인 '비논리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가 덮친 이유는 스트립클럽, 디스코장, 술집, 여타 사악한 장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다>"(p234) ……… "우주는 마음이 없다. 감정도 인격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해치거나 기쁘게 하려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나쁘냐 좋으냐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238)

- 리처드 도킨스 著,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

현대 의학조차 포기한 자신의 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이 '나음받았다'라는 류의 간증들은 대한민국 교회 곳곳에 수도 없이 넘쳐날겁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라 제가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그러하기에 '기적'이라 불리우는 현상들이 그저 '우연'으로만 발생된 것은 아니라는, 그 중 일부엔 분명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고 있다라는 걸 믿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 우리 기독교는 ('나음받았다'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면 왜!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그 사람에게 일어났었던 것인지, 더 나아가 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신자들에게는 왜!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만약 그 이유를 그 특정인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로 '나음받았다'를 경험한 이후 더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기에>라 설명한다면 실제로 그러한 '더 큰 쓰임'이 분명하게 존재했었다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비기독교인들을 향해 충분히 대답해내야 한다6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해보았던 다음의 자문(自問)은, '나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지만 아직은 나음받지 못한' 수많은 기독교인들 또한, 제가 그러했었듯, 한 때나마 해볼 수 있는 생각일 겁니다.


"하느님깨서는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셨을까?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내가 저지른 걸까?"(p129)

이 상황에서 작가 다니엘 디포는 --- (마치, 한때 유행했던 <해결의 책>을 펼지는 것 마냥) 로빈슨 크루소가 아무 생각없이 펼쳤던 성경의 페이지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나를 불러라. 구해 주리라.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7"(p131)라는 말씀을 담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상황을 이끌어 갑니다. (이 소설이 회고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음에 유념한다면) '원인과 결과의 전이(轉移)8'라는 지적을, 리처드 도킨스 교수와 같은 무신론자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로부터도,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로부터조차도 받을 수 있는 전개이지요. 뭐 이런 상황은 이 작품 속에 너무나도 넘쳐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기독교


위의 내용들은 이제 말하려 하는 것들에 비하면 가볍게 눈감아줄 수 있을 겁니다. 아예 문제조차 삼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요. 무식하게 말해 '걍 너네들끼리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종교'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이지요.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라는 말이 단적인 예이지요. 이 소설에도 예의 그런 부분들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기도 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온갖 불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생긴 것 같다.(p178) …… 나는 사악하고 철면피했던 내 과거의 삶을 여러 달에 걸쳐 처절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그런 반성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며 섬에 도착한 이후 하느님께서 얼마나 특별하게 나를 보살펴 주셨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베푸셨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내 죄로 인해 내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벌보다 훨씬 적은 벌을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요롭게 많은 것들을 선물해 주시기까지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내 회개가 받아들여진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이것 말고도 더 많은 자비로운 일들을 마련해 놓고 계실 거라는 큰 희망까지 주었다.(p180)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대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으며, 심지어!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임에도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라는 반성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내게 이런 일을 하셨을까?(p129)라는 질문에마저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대답을 해주지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옹기장이 손에 쥐어진 찰흙같은 존재이며, 그 어떤 옹기그릇도 옹기장이에게 <당신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p284)


이런, 극단적인 '겸손함'엔 그 누구도,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 교수조차도 태클을 걸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 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겠다는 데에야 뭔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는 기독교의 모습은 매우 커다란 문제를, 과거에도 일으켰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 자신의 창조자인 유일신!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겸손해야한다라는 '당위'와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라는 '추론'은 <우리끼리>라는 범위 안에서는 얼마든지 좋은 모습을,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것이 <우리끼리>라는 범위의 확장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고 감동적인 신앙의 발로(發露)인지에 관계 없이 --- 하나님은 '유일신'이시기에, 다른 신(神)을 섬기는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교화(敎化)시켜야 한다라는 목적이 발동되는 순간, 기독교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되는 겁니다.


하느님께, 이 가엾은 야만인에게 구원이 될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이 가엾고 무지한 야만인의 가슴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빛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시고, 그가 스스로 만족하고 확신을 갖게 해주시고, 그의 눈이 뜨이게 될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빌려 그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 달라고 진지하게 기도드렸다.(p297) …… 이 가엾고 불쌍한 야만인이 나로 인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가 내게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가엾은 야만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p298) …… 이제 나는 종종 예전에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던 사실, 즉 섬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게 되었다.(p299)

​'식인(食人)'의 관습이 있을 뿐 아니라, '베나머키'라는 고유의 신(神)을 가지고 있는 종족 출신인 '프라이데이'는 처음 만났었을 때엔 충분히! 로빈슨 크루소의 관점으로 보아 '야만인'이었을 꺼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라이데이가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게 되었을 때조차도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야만인'으로만 호칭되고 있다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즉! ---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다라는 상황은, 프라이데이가 구원을 받았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가 신앙을 가졌다 해도 여전히 야만인의 지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자신이 '가엾은 야만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다'이기에 기쁜 것이고, 그러하기에 결국에는 '섬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한 마디로 선민의식(選民意識) 만땅의 '순교자(殉敎者) 코스프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기적인 양태의 끝마무리를 보이고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런 '이기적임'은 백인 포로들을 끌고 로빈슨 크루소가 살고 있는 섬으로 왔던 야만인들을 공격하는 것에조차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격 개시!'(p318)라는, 과거 십자군 전쟁을 그대로 떠올려주는, 무소불위의 이유가 되는 '종교적 이기심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

역자(譯者)는 이 작품에 대해 '제국주의적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제국주의'의 멍에를 씌우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역자가 들고 있는 근거들은 모두 지나친 확대 해석 혹은 '로빈슨 크루소 개인의 습성'을 과도하게 일반화 시킨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뭐 이건, 어차피 독자 개인의 판단 몫일 수 밖엔 없을 것이기에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처럼 --- 이 작품을 읽으면, 읽고 나니 오로지! 저에게는 '비뚤어진 기독교인'이라는 한 구절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더군요. 만약! 작가 다니엘 디포의 이 작품을 쓴 의도가 오로지 '타인의 교화'와 '하느님의 지혜'를 보이는 것에 있었다라면, (어차피 이 포스트의 모든 내용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밖엔 없겠지만) 이러한 방식의 '교화'와 '시현(示現/示顯)'은 분명 옳지 않은 것이며, (제가 좇고 있는) 다음의 두 마디야말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소위 '전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에 있어 가장 먼저! 가장 중점을 두고 따라야 할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질 뿐인겁니다.   



 

 (출처 : 엠팍 불펜게시판 중 "커쇼의 신념.jpg")

 

 

 소위 '고전' 혹은 '명작'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의 (청소년을 위한) 요약본이 대부분 그러하듯, 원작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 의도는 '요약자/출판사의 의도'에 얼마든지 가려지고 변형/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로빈슨 크루소」가 청소년들의 도전정신 고취를 위해 요약되었다라면 그건 엄연히 말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일종의 위작(僞作)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여전히 뻔한 말이기는 하지만) 다음의 (단!!!) 두 구절을 읽을 수 있었다라는 것이, 이 작품을 다 읽고난 유일한 위안이었으며, 이 작품을 먼저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이후 읽을 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유일한 만족이었네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저의 주제넘은 개인적 의견을 밝히자면 --- 우리, 이딴 책은 제발 아이들에게 읽히지 말자구요. 글찮아두 애들 읽어야 할 책 쌔고 쌨잖습니까!!!


● 무릇 성공과 번영이란 오용하면 종종 크나큰 역경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p57)

 우리는 결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진정한 본질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그 반대 상황들에 의해 입증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결핍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p191)


※ 역시나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관(觀)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 공부


 




 

  1. 출판사 <열린책들>의 표기는 '대니얼 디포'이나,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일반 표기를 따라 저자명을 '다니엘 디포'로 적었습니다.
  2. '하나님'과 '하느님'의 표기에 별다른 의미있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대한민국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기인 '하나님'을 저 개인적인 문장에서는 썼으며, 본문의 인용에서는 '하느님' 표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3. 그의 첫째 형은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셋째 동생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옵니다.
  4.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계급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중산층은 육체노동으로 먹고사는 하류층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 그들의 비참한 불행과 고생을 경험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상류층 사람들의 오만, 사치, 야망, 질투 같은 것들로 난처한 지경에 처할 필요도 전혀 없다.'(p11)
  5.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일부 상황들에 대해 중복된 서술들이 적지 않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6. 이에 대해 공병호 박사는 저서 「공병호의 성경 공부」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집착하는 신비주의는 경계해야겠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 자체에 신비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사뭇 실망스런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기독교인들 내부에서나 통하는 설명이지,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다가가기에는 택도 없지 않을까요?
  7. <시편> 50장 15절.
  8. 그러하기에, 이 책으로부터 "도전정신과 꺾이지 않는 생존에의 의지, 척박한 환경을 가꾸어가는 적응력"을 배우게 하겠다는 부모의 의도는 철저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하느님의 이끄심'이었었으니까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