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 사이를 걷다 - 망우리 비명(碑銘)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김영식 지음 / 골든에이지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망우리공원이라는 작은 공간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다 간 인물들의 비명(碑銘)을 통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작지만 크고, 유일한 공간이다.(p11)

소파 방정환, 만해 한용운, 도산 안창호 등의 무덤이 망우리공원에 있었었고, 지금도 있다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야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과 대표적인 업적 등은 알고 있지만, 그들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까지는 알고 있지 못했다라는 것이 창피해하여야 한다거나, 최소한 가책 정도는 느껴야 하는 일일까요? --- 이 책의 저자는 이에 대해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발걸음이 닿게 마련이다."(p211)이라 답하고 있네요. 그러게요. 저 역시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해 '몰라서 잊었고, 알고도 잊었었던' 한 사람이었었고, 저의 지식과 가치관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그 과거를 만들어내었던 앞서 살았던 분들의 행적을 판단했었었지요. 그저 "우리는 근대 민족사 또는 근대 문화사에 관련된 인간론이 늘 변절과 고절의 극단으로 분류해서 민족의 편에 서 있는 자를 신격화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폄하하는 경향이 농후한 사회에서 살아왔다."(p128)라는 시인 고은의 주장에 지독히 공감하며, 제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러하다라는 것이 너무도 싫다라는 견해만을 가지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이러하 사회의 분위기를 싫어하기만 했을 뿐,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어왔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지요. 반만년 어쩌구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자랑하는 나라가, 자신 역사에 있어 최후의 황비인 명성황후의 사진조차 분간해 내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란 게 대체 말이나 되냐, 뭐 이러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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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개인이 단순히 관심이 유난하다라는 것만으로 이러한 책을 펴냈다라는 게 더더욱 쪽팔려지는 대한민국 사회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가 이 곳 망우리공원에 있었다가 현재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된 내막은 정녕 이것이 대한민국의 수준일까?라는 한심함마저 느껴지게 하더군요.


"유상규군이 눕어있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주오."(p209)


도산 안창호 선생은 유언은 이러했다 합니다. 자신의 비서이자 아들 역할까지 했었던 유상규의 무덤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것이었지요. 실제, 안창호 선생은 그의 유언대로 유상규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었습니다. 그리고...


도산이 망우리에 묻힌 후 수주일간 양주경찰서는 묘지 입구에서 방문객을 일일이 심문했고, 그 후 1년간이나 묘지기에게 도산의 묘를 묻는 자의 주소오 이름을 적게 했다고 한다. 일제는 죽은 도산을 무서워했고, 도산을 찾는 국민의 마음을 두려워했다. …… 도산의 묘를 지키던 일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묘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합해지면 무서운 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pp210-211)

하지만! --- "1973년 정부는 서울 강남에 새로 닦은 큰 길에 도산의 이름을 붙이고, 도산공원도 만들어 도산의 묘를 망우리묘지에서 이장"(p209)해버립니다. 이에 대해 쏟아놓고 있는 저자의 다음 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수준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지금 우리는... 이러했었던 정부의 통치하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느냐 마느냐로 다투는 수준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는 사회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도산은 그가 원해서 망우리묘지에 묻힌 후 30년 만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장됐다. 그러나 그의 넋만은 강남으로 이장되지 않았으리라. 죽은 도산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장을 거부했거나 사랑했던 유상규도 함께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은 도산대로를 장식할 도산의 유해가 중요했지, 도산의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도산은 민중과 같이, 독립운동의 동지와 함께, 평범한 국민들과 함께하는 공동묘지에 묻히기를 원했다. 세상은 산 자들의 것, 고인의 말은 세인의 필요에 따라 인용되고 때로는 묵살된다.(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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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1(p221)


앞서 읽었던 두 권의 책에 대한 감상문에 적었었던, 일제하 친일 행적을 보였던 인물들에 대한 저의 이제까지 생각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살펴보도록 만들어준 구절이었습니다. 역사란 것이, 그리고 현재란 것이 오로지 교과서에 등장하는 위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각인시켜주어야 할 진짜 '역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이처럼 --- 우리보다 앞서 살다 돌아가신 분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만들어 낸 대한민국  현실이란 그저...


"역사는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의 권력은 언제나 기억을 독점하고자 하며, 그래서 기억을 둘러싼 현재의 투쟁은 계속된다."2



▶ 짧은 한두 마디 : "기억되지 못한 기억엔 기억해선 안 되는 ‘역사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3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김형민 著,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역사채널e 著, 「역사e 


덧> 사놓은지 정확히 2년만에 읽어보았거늘, 얼마 전 개정판이 나왔더군요. 이젠... 책 사놓고 빨랑빨랑 좀 읽어야 할 듯. --;;



 

  1. 죽산 조봉암 선생의 연보비에 쓰여있는 글귀.
  2.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5, 페이퍼로드 刊, 2011.
  3. 김진혁, 前 EBS 《지식채널ⓔ》PD가 쓴 「역사e」의 추천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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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 다림 청소년 문학
김은국 지음 / 다림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일제하의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이란 게 특성상 재미있을 수 없겠지만, 예의 이 작품도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 작품의 맨 마지막 장(章)을 읽기 전까지는, 뭔가 등장인물들의 배경에 은근 불만도 가지고 있었던지라, 이걸 읽고 대체 어떤 감상문을 써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마저 들었었지요.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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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45"로 끝맺음되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의 (출생연도1, 출생지 등으로 보아) 자전적 소설이라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작가 김은국은 그렇게, 우리의 부모님 세대를 자신이 대표하여 저희 세대에게, 혹은 종원군의 세대에게 '자신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저의) 할아버지 세대의 변명' 역시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담아내고 있지요. 그러하기에!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시대와 싸워야 했던 소년의 분투기"2로 이 작품을 읽어내기 보다는 --- 자신 세대와 그 윗 세대의 솔직한 변명,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의 당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라고, 또 그리해야만 작가가 영문 제목 「Lost Names」의 이 작품에 <빼앗긴 이름>이 아닌 「잃어버린 이름」으로 번역되기를 원했3었던 이유가 설명이 된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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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은 죽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이 잔인한 계절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p136)

1932년에 태어난 한 소년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시간동안 성장해 가며 겪어온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입니다만, 일제의 핍박상이 그리 자세하게/절절하게 그려지고 있다고는 읽히지 않았더랬습니다.4 단지 --- '창씨개명'이라는 특정 사건만을 일제하 조선이 겪어야 했던 치욕의 상징으로 부각시켜놓고 있으며, 그 사건을 일컫는 「잃어버린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과도 어울리듯, 이 작품에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미야모토'로 창씨개명을 한다는 부분만 빼고는)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질 않습니다. 그 창씨개명을 당하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참배하며 울고 원통해합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따지듯이 묻지요.


"이런다고 뭐가 되나요? 다들 이런다고 무슨 수가 생기나요? 이런다고 이미 끝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어요?"(p175)


이 질문에 대해 아버지는 "네 눈을 대하기가 부끄럽구나. 장차 너희들의 세대가 되면 우릴 용서해줘야 할 거야."5(p169)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章)에 가서야, 이 때의 이 대답 속 '용서'에 대한 숨겨진 의미를 모두 밝혀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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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의 다음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 지금 대한민국에서 주류(主流)로 자리하고 있는 '친일'에 대한 생각에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헌데! 술자리에서 친구에게는 얼마든지 말해낼 수 있었습니다만, 뭔가 뚜렷한 언어로 그러한 저의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해낼 수가 없었던 저에게! 이 소설은 그 실체적 해답을 아주 뚜렷하게 안겨주고 있습니다.6  


제가 정말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해방이 그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이에요. 그걸 뭐 우리가 쟁취했나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 선물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건 그거예요.(p279)

물론! 해방 자체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했다는 결과로 발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투쟁도 있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투쟁'이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지만 --- 예의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은 단지 거기까지만이었다라는, 그러했기에 '투쟁'으로 쟁취해 낼 '해방'을 맞이할 자체적인 준비와 계획은 거의 전무했었다라는 재반론에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7 주인공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변명이 차라리 그 솔직함에서나마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네 말이 맞아. 우리의 해방은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선물 같은 거지.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려. 우리 어른들이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어쩔 줄 모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모두 우리의 생존, 더 정확히 말한다면 개인적 생존에만 급급해서 해방이나 독립 같은 궁극적인 사태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거지.(p282)

​이러한 변명에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개인적 생존'이라는 가치에 대해 절대로 가벼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는 저이기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란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제 치하를 살아남아내기 위해 취했던 행동들에 대해 지금 현재의 잣대로 '친일'이네 뭐네 재단한다라는 것이 심히 맘에 들지 않는 저이기에 !!!


네 할아버지 세대는 대체로 산만하고 일의 처리 능력이 없었다. 목표가 없었을뿐더러 여러 가지로 어리석기도 했지. … 그러다 나라 꼴을 개망신시키고 마침내 강산을 팔아넘기기까지 한 거야. 그러고 나서는 '이렇게 돼서 미안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달리 나라를 구해낼 길은 없었다'면서 나의 세대로 바통을 넘긴 거야.(282) …… 그렇게 해서 우리 차례가 됐을 땐 이미 늦었단 말야. 일본은 이미 우리나라를 합병한 뒤였고, 그들의 통치는 막강하여 항거할 방법이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때 벌써, 이른바 국제 정치의 흐름은 조선 합병을 하나의 기정 사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야. 하기야 해외에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다닌 사람도 있었지만, 국내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한 일이란 건 거의 없어. 나라 안에 남아서 버텨야 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 정신만을 굳세게 가지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또 기대해 온 거야. 생존이지. 그야말로 생존, 살아남는 일이었어. … 살아남았다는 것만이 우리 세대의 업적이야. 그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pp283-284)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살아남는 일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었다'란 아버지의 이 말에 물론! --- 혹자는 "그 세대에 '해방'이 주어졌으니까 성립되는 변명이다"라는 결과론적 비난을 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들'이 어쨌든 살아남아 주었기에 그들의 후손인 저와 종원군 세대가 이런 해방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결과론적 주장이 오히려, '지금 이 시점의 현재'에선 훨씬 더 합리적이고 온당하다라 생각합니다.8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세대와는 달라서 우린 훨씬 강하고 자신만만한 세대가 될 거예요. 저희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갖지 못했던 해방과 자유를 갖고 출발하니까요. 그게 상당한 차이를 내고 말 거예요.…… 아무도 아버지의 세대가 나빴고, 누구의 세대는 훌륭했다는 식의 얘긴 못할 거예요. 우린 다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아버지? (pp284-285)

​라는, 제가 이 작품의 핵심적 부분이라 생각하는 위 구절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무소불위적 '절대적 선(善)'이라 자칭하고 있는) '친일 단죄'의 기준과 사고에 대해 정확하고 날카롭게 반박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 해방 정국을 바라보는 강준만 교수의 다음 시각이야말로, 현재 '친일 단죄'라는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자들에겐, 그들이 쥐고 있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칼을 겨누고 있지 않나 싶네요. 

"상호 타협하지 못할 원수는 없다. 우리가 오늘의 시점에서 해방정국의 극렬한 대립구도를 개탄한다면, 훗날의 사람들이 지금의 극렬한 대립구도에 대해서도 개탄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전투적 극단주의를 그대로 방임하는 걸 다시 생각해 볼 때다. 해방정국의 역사가 잘 말해 주듯이 중간에 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중간파'가 겪어야 했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화끈하고 '앗쌀'한 걸 너무 좋아하는 탓인지 여전희 '극단주의 미학'에 심취돼 있다. 이제는 이걸 자제하고 극복해야 한다. 역사에서 무슨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망정, 그것이 40년대 후반의 역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일 것이다."9


▶ 짧은 한두 마디 : "이름만 바꾸면 그 얘기는 당신에 관한 것이다."10 


※ 읽어본, 작가 김은국의 다른 작품 :  순교자」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 이광수 作, 「무정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1. 1932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황해도에서 보냈다. - <작가 소개> 중.
  2. 이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문구입니다.
  3. "작가는 영어로 'Lost'라고 쓴 것을 '빼앗기다'라고 번역되기보다 '잃다'라고 번역되기를 원했습니다. - p311, <작품 해설>중.
  4. 이는 주인공의 친가와 외가 모두 부유층이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5. 아버지의 이 말은 사실 다른 곳에서 등장했던 것입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상 주인공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라 이해해도 무방하다라 생각합니다.
  6. 그러했기에, 이 재미없는 소설에, 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족도가 생겨난 것이기도 합니다.
  7. 함석헌 옹의 '뜻밖에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라는 표현 역시 해방 자체가 우리 민족이 벌여왔던 '투쟁의 산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 강준만 교수는 '솔직하자. 너와 내가 다 몰랐느니라. 다 자고 있었으니라'라는 또 다른 함석헌의 표현과 함께 그의 진의(眞意)는 반가움의 표현이 아닌 조선인,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질책이었었다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8. '과연 일제의 지배가 끝이 나게 될까?'에 대해 여하히 부정적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일제 치하의 시절 속에서, "'역사의 불가항력'을 이유로 일본 군국주의에 거부할 수 없는 협력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라했던 윤치호의 주장이나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지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신탁통치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는 이영희 교수의 회고처럼, 당시의 친일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의 미숙이었을 뿐, 그것이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단죄되어야만하는 사상의 문제'였다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9.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인물과사상사 刊, 2009, 중.
  10. 복거일 作, 「비명(碑銘)을 찾아서」, p87, 문학과지성사 刊,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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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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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피에르 불은 그의 작품 「혹성탈출」을 통해, 인간이 유인원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다라는 엄청난 반전도 원숭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보려 했던,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정을 보여주었더랬습니다. 영화 <Back to the Future> 역시, 비프를 향한 아버지 맥플라이의 주먹 한 방이 이후 양 쪽의 가세(家勢)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었지요. 이처럼 --- 과거의 한 지점에 결정적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후의 전개, 즉 (그 '과거의 한 지점'이 이끌어 낸) '현재'의 '현재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상상해 보는 것을, 이 책 「비명을 찾아서」의 작가 복거일은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합이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씌어진 이른바 '대체 역사'이다. (상권, p9) …… 대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났다는 가정을 하고 그 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을 삼는 기법으로...(상권,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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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인가? 】


이 작품은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라는 사실(史實)을, 그 반대의 가정을 가해볼 만한 과거의 미묘한 한 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작가 복거일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서술해 놓고 있는 다음의 구절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일본 정계에 있어서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일본에 언제나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상권, pp9-10)

​우리에게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지만1, 사실 그는 조선에 대해 회유2적인 노선을 펼친 인물이었다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토는 안중근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후 응급처치를 받으며 자신을 쏜 사람이 누구냐 물었고,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듣고는 "바카나야쓰3!"라 중얼거렸다 하더군요. 왜 그가 뱉은 최후의 일성이 '바카나야쓰'였을까요? --- '아마도 대한국 정책에서 온건파를 대표했던 자신이 한국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 것이다.'4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로 넘어갔으며,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의미했습니다.5 실제 이토가 죽은 지 일곱 달만에 일본은 합병조약을 체결시켰지요.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합니다. : "이렇게 보면 온건파 이토의 죽음이 한일병합을 앞당긴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 때문에 일본의 일부 논자들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을 '자충수'라고 평가한다."6


어쨌든! 역사학계(의 일부)가 바라보는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미인 "이토 히로부미의 부재로 인한 무단통치의 가속화를 불러오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7" 이란 해석을 작가 복거일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 보입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하여 부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였었다면 --- 무단통치의 가속화도 없었을 것이고, 이토의 문화적 식민통치의 결과, 한국인의 식민지배 내면화는 더욱 확산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식 역시 강화되지 못하지 않았겠느냐8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작가가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또우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강력히 추친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 1980년대9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이 되었고, 자신들이 내지인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권, pp11-12)

 


 

​【 문제의식의 발로 】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상권, P54)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는 직업군인이었다 제대한 후, 금속 회사의 무역파트에서 근무하며, 시(詩)를 쓰기도 하는 조선인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예의 모르고 있었었던 그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완전히 똑같은 사고를 하고 있는 인물이지요.


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이 일본 제국의 변두리에 자리잡은 데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상권, p45)

하지만! 조선에서 보여지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서만큼은 억울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 땅에 있는 그 많은 불평등을 내지인과 조선인 사이의 선천적인 능력의 차이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 조선인들은 다만 악순환에 시달리는 것이다. 차별과 무지와 빈곤의 악순환에."(상권, p131)


이랬던 히데요의 사고(思考)는, 우연히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두 권의 책을 읽은 후, 그러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자신의 시(詩)를 통해 작게나마 자신의 힘을 더하여야겠다는 것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지요. : "나는 앞으로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조선인을 대변하는 시를 쓰려고 해."(상권,p144)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도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무언가 자신이 이제까지 '진실'이라 굳게 믿어왔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라 의심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에도 무려!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가 있었었으며, 그것들이 사라지고 잊혀진 것 역시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 여전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특히나 젊은 세대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실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히데요의 의문과 고민이 시작됩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진실을 알아야 하는가?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당구장으로 들어간 학생들이 조선에 관한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그들의 길이 어두운가? 내가 그 진실을 안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는 길이 더 밝아지는가? …… 그래도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다. 왜? 왜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가? …… 이처럼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인가? (상권, pp284-285)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기까지의 고민은 --- 김은국의 「순교자」에 등장하는 인물인 '장 대령'의 일성(一聲),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10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게다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존재했었던 조선의 말과 글이었기에, 누군가는 아직도 그 조선의 말과 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히데요는 뜻밖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조선의 말와 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의 고민은 한 단계 더 깊어지게 되지요. 헌데 말이죠! ---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히데요의 이 고민란 게 기실 새로운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1차적으로, 그리고 작가 복거일이 그 고민을 작품 속에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란 게 저의 생각관 맞지 않더란 점에서 다시 한 번 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만족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장사에 관한한 중요한 건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이 국가라는 집단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일이야. …… 자네가 그 군복을 차려입고서 사람들에게 한다는 얘기가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 …… 사람들이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

- 김은국 作, 「순교자」, p174, 문학동네 刊, 2010.

이 작품 속에도, 주인공 히데요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해주는 이가 등장합니다. (소위 말하는) 불온 서적 소지죄로 갱생교육을 받게 된 히데요의 담당 교사 하꾸야마가 바로 '장대령'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꾸야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일본에 의한 조선 역사의 말살·왜곡은 이젠 거의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칠십 년이 넘는 세월이 이끼를 얹어서, 그 가공의 역사가 이젠 진실처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과연 조선 사람들이 지금 노력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p227) …… 이젠 조선 사람들에겐, 좋으나 싫으나, 일본 사람들이 되는 길밖엔 없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조선 사람들은 원통하지만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 살아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분명히 우리11는 그들12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위해 하는 짓입니다.(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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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 주장 자체에 지체 없이 반대의 뜻을 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13 하지만! --- 이 표현이, 친일 작가라 불리우는 춘원 이광수의 작품 「무정」에 나오는 구절이라면, 이는 충분히 다른 방향 -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차라리 난 친일이라도 하여 작가로서 살 길을 이어가겠노라 - 으로 이해될 수 밖엔 없을 겁니다. 전 그렇게 이해했었었지요.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살 길을 조선인이 아님에 있다'라는 하꾸야마의 논지 속에 ---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라 말했던 「순교자」 속 장 대령의 뜻깊은(!) 속내가 들어있었었다면? 더 나아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속 어느 제사장의 다음과 같은 (이타주의적?) 의도가 (혹은 변명이) 들어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하꾸야마의 주장은 여전히 그리고 당연하게 '친일'이라는 멍에를 벗어낼 수 없는 걸까요?


●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作, 「사람의 아들」 중 어느 제사장의 말

 

장대령이나 제사장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저로서는 예의,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하꾸야마의 논리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 (이 작품의 배경을 잊지 않고 온전히 대입시켜 본다해도) 하꾸야마의 논리 자체가 선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논리를 깨뜨려 내겠다 펼쳐지는 주인공 히데요의 논리가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었다라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작가의 선택 】


"독립은 과연 지고(至高)의 가치이며 언제나 반드시 그러하여야 하는가?"


이 당위에의 의문에 대한 작가 복거일의 대답이 만약 이 작품이라면, 그리하여 작가가 '그렇다! 그러하여야 한다!'라 대답하는 것이라면 --- 제 개인적 의견으로 작가의 논리로는 그 누구도 설득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구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우리 조선인들이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몇십 년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자신의 나라를 가졌었다는 사실을.(하권, p129)

이렇게 시작된 히데요의 의문은 이내 하꾸야마의 논리에 부딪히게 되지요. 여기서 히데요는 겨우! "하꾸야마 선생이 전개한 논리의 어느 고린가에 오류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제가 잘못되었거나."(하권,p233)이라는 빈약한 저항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아간 한 발이라는 게 고작


조선적인 것을 다 버렸을 때,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조선인이 아닐 따름이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존재. …… 조선인은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 그 자명한 이치를 생각하기가 왜 그렇게도 힘들었던가? 조선인이 조선적인 것을 버리면, 그는 그만큼 왜소해지고 불완전해지는 것이다. 병들어 뿌리와 가지가 시든 나무처럼. 조선인은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본적인 것까지도 조선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섭취해야 한다. 그것이 조선인이 살 수 있는 길이다. (하권, pp275-277)     

이건 마치! --- 'A=C 이고, B=C이기도 하지만, A=B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라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을 뿐인 겁니다. --- 히데요의 위와 같은 사고(思考)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이라면 얼마든지 성립 가능한, 어쩌면 반드시 성립되어야 하는 논리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죽지 않았고, 그리하여 식민지배의 내면화가 거의 완전히 이루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전 절대 그렇지 못하다라 생각합니다. (가요의 가사를 빌어보자면) 이는 이미 폐차된 차에 새 타이어 갈아끼우자란 소리 밖엔 안되는 거 아닐까요?


주인공의 고민이 여기에서 그쳤었다면, 이 작품이 이처럼 알려져 있지도 않겠죠. 히데요의 저항은 이제 한 발을 더 나아가 확신의 수준에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연적으로 내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 설령 세상이 바뀌어 내지인들의 조선 통치가 너그럽고 공정하고 현명한 것이 될지라도,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보다 더 공정하고 현명한 통치가 될지라도, 조선은 꼭 독립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를 다르시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닌 것이다. (하권, p284)

​소설의 이 지점에서 막 헷갈려집니다. 독자 뿐만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말이죠. --- 아니!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라는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가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어떻게 느닷없이 가져와 쓸 수 있는 것일까요?15이건 작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전제 자체를 소설의 끝에 와서는 완전히 갈아 뒤엎자란 소리 밖엔 안되잖습니까.

이런 식의 결과를 작가가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 '당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작가 역시 '당위'로만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에 생겨났다라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였습니다. 쉽게 말해, '왜 1+1의 답은 2가 되어야 하나요?'란 학생의 질문에 '1+1은 2니까!'라 답해주는 선생 격이라고나 할까요? 차라리!!!

「순교자」에서,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열 두명의 목사들 모두가, 실제로는 모두 순교자적 죽음을 맞이했던 건 아니었지만, 장 대령 역시 그걸 알고는 있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라 외칠 수 밖에 없었었던 그의 거짓 당위가 안겨주었던 공감같은 것으로 (애초부터 '대체 역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선언했던) 이 작품을 마무리지어낼 수는 없었을까요? 혹 --- "길이 보이는 한, 난 망명객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이다."(하권, p328)라는, 심히 생뚱맞은 이 작품의 결말이 품고 있는 뭔가가, 제가 이해해내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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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설의 구조 자체는 매우 탄탄합니다.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부터는 사실(事實)인지, 소설을 쭉 읽다보면 어느 순간엔 잘 구분이 되지 않을만큼 이야기 자체는 훌륭하게 짜여져 있다 생각합니다... 만!


이렇게만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①일본의 명문가 출신인 젊은 여성과의 뭔가 불륜스런 러브라인은 그것에 '애틋한'이나 '가슴 아픈'이란 형용사를 붙이기엔 지나치게 싸구려스럽기만 하며, ②잊혀질만하면 잊지 말라는 듯 짜잔!하고 등장하는 '아랫배에서 묵직한 욕정이 솟았다'(하권,p214)류의 표현들은 분명! 이 작품의 격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고 있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③주인공 히데요의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망명'의 실질적 이유라는 게 고작 살인죄로부터의 도피였다라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를 잠재적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혹은 작가는) 이 마지막 상황에 대해 '식민지배 계급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 뭐 이딴 식으로 둘러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의 '갑 of 갑'이죠. 만약!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작가는 과연 이 작품의 마무리를 어떻게 만들어냈었을까요?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받았던 제 느낌은 --- 작가 스스로도 하꾸야마의 논리에 맞설 히데요의 대응논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했기에 급작스럽게 '망명'이란 그래도 뭔가 애국적 향(香)을 조금이나마 풍겨낼 수 있는 마무리를 대충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만 합니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다른 분들은 과연 이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덧> '대체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중요했던 한 순간의 결말을 뒤집어봄으로써, 우리의 '현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그렇다면! --- 이제 머지않은 시간 후면, '이산가족'이라는 단어마저 사어(死語)가 될 우리에게 과연 '통일'이란 여전히 '우리의 소원'으로 남아 있게 될른지, '통일'은 끝까지 '무조건 되어야 하는' 당위의 개념으로 인식될른지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사실, 아직까지는 '통일'이 당위의 개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꽤 오래전 부터 '통일의 경제적 효과'류의 논의들이 '통일'이란 개념을 야금야금 '당위'의 수준이 아닌 일개 '(수단을 동원해 이뤄내야 할) 목적'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왔기는 했었습니다만, 이젠 아예 대통령이 나서서 '통일은 대박!'이라 발언해 버림으로써 '통일'에 대한 개념 자체를 더 이상 '당위'의 차원이 아닌, 그저 "자본주의의 체제 하에서만 유용한 무엇"으로 확정지어버렸었지요. 이건 어쩌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 짧은 한두 마디 : 이 작품이 진정 '역사 소설'로 불리우길 원했었다면, 현재 분량의 딱! 절반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었지 않나 싶.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김은국 作, 「순교자」 : '당위'에 대한 진지한 의문.

- 이광수 作, 「무정 : '친일'에 대한 작가의 사전적 변명?

- 피에르 불 作, 혹성탈출」 : 인류의 역사에 대해 가정해 보는 대체 역사.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신의 善意은 절대적인 것이다'란 당위에 대한 충격적 반론. 

 

 

 

 

 

 

 

 

 


 

  1. "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2. 회유(懷柔) : 어루만지고 잘 달래서 시키는 말을 듣도록 함. - <네이버 국어사전>
  3. "바보같은 놈!"
  4.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4, 페이퍼로드 刊, 2011.
  5.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6.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6, 페이퍼로드 刊, 2011.
  7.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32, 페이퍼로드 刊, 2011.
  8. 이 가정의 상황이 지니고 있는 논리전개에는 동의하지만, 그 역(실제의 史實에 대한 해석)도 과연 성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즉 --- <각주 6>의 저자들처럼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이라 보는 것은 혹,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간의 관계에서와 같이, 반대방향으로의 역(易)이 항상 성립되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미처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 아닐까 싶다라는 거지요.
  9. 이 작품의 부제인 '쇼우와 61년'은 1987년을 가리킵니다.
  10. 김은국 作, 「순교자」, pp152-153, 문학동네 刊, 2010.
  11. 조선인 문학가들.
  12. 조선인 대중들.
  13. 일본작가 구사카베 요의 소설 「A케어」가 딱!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소설이지요.
  14.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썼던 저의 감상문에 다음과 같은 덧글도 달려 있습니다. --- "친일파가 쓴 소설이 무슨 문학 가치가 있으며 왜 궂이 그걸 친송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설령 문학적 가치가 있다해도 지금까지 이런 소설이 읽혀지고 있다는거 자체가 잘못된거 같아요."
  15. 물론, 이 '다른 사람'이란 문구에 대해서는 히데요의 다음 독백을 설명으로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도 작가는 예의 '그래도 찾아야 했다'라는, 이유 없는 단순한 당위만을 내밀고 있지요. --- '한 사람이 자기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실체가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실체의 상당한 부분이 허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큰 충격일 터였다. 그리고 그 허구로 밝혀진 것을 대신해서 채울 실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리고 두려운 일이었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일는지 모른다는 것은 반생을 넘게 살은 사람에겐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하권,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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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8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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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아니었다면 "Back to the Future"라는 구문 자체가 아예 태어날 수 없었을 것처럼, '개가'라는 주어부와 '삐약거렸다'란 서술부는 하나의 문장 안에선 서로 결합될 수 없다라 보는 것이 정상적인 언어 체계의 결론일 겁니다... 만! --- 발칙하기 짝이 없는 이 소설은 무려!!! (my ex-와 같은 접두어조차 없이) '아내가 결혼했다'란, 쉬이 이해될 수 없는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소설 중 불륜에 관한 작품 좀 골라주세요'란 부탁에, 제가 좋아하는 동네 책방 사장님께서 권해주셨던 이 책, 대체 뭔 내용일까요?   


………………………………………………………………………

【 당연한 것에의 의문 】

제가 읽어본, 불륜에 관한 다섯 작품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이라는 불륜의 정의(定義)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더랬습니다. 즉, '사람의 도리'가 일반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라는 거지요. 이처럼 자신이 행하고 있는 '불륜'의 행위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것'임을 인정하였기에, 새로운 상대방과의 만남이 행복했던 만큼, 현재의 배우자에 대한 미안함이 그 (새로이 추가된 항목으로부터의) 행복에 예외없이 마이너스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에 의문을 한 번 제기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쉽게 말해, 한 여자를 사랑해 그녀와 결혼을 했는데, 뒤늦게 '더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녀, 새로운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새로운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싶다라는 욕망까지를 가지게 되었다라는 게 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냐라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당신은 무어라 대답해주시겠습니까? (솔직히 저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답이 정말 궁금하긴 해요.)


20대 시절, 저의 가치관을 shaping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한 인물을 꼽으라면, 그는 단연코 작가 이문열이어야 합니다. 그 분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질문들에 대해 저만의 대답을 만들어 가며 그렇게 --- 그러한 바탕위에서 지금의 '저'가 만들어졌었기 때문이지요. 

어느 작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이문열의 작품 중 바로 위와 같은 질문이 등장하는 소설이 있었더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헌데 '뒤늦게 나타난 더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나는 지금 내 아내와 한 이불 속에 누워있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다른 여자가 자리잡고 있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정녕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져주었던 작품이었죠. --- 20대 초반의 청춘에게는 사실 거의 와닿지 않는 문제였더랬습니다만! 

'결혼이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연애가 이벤트라면 결혼은 일상이다(p140)'라는 지극히 당연한/당연해보이는 문구는 이내 '아주 짧은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 정작 사랑했던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p282)라는 종착점에,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이르르게 되는, 이 사회의/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쯤되면, 이걸 일부의 일탈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는, 혹여 '인간 본성의 하나/일부'라 인식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바로 여기 --- '인간 본성의 하나/일부'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두 본질적 문제가 서로 충돌하게 되는 지점을 이 작품 「아내가 결혼했다」가 포인트로 잡아내고 있는 겁니다. (앞서의 불륜에 관한 소설들의 감상문에서 썼었던 'feasible set'의 개념을 사용해보자면 - 결혼이라는 시점 이후에는 각자의 feasible set이 많이 축소된다라는, 사뭇 당연시되었던 점에 이 소설은 "결혼 이전의 feasible set을 결혼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해나가면 대체 왜 안되는거냐?"라 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부부간 금실이 좋다는 게 왜 자랑이겠으며 왜 감탄의 대상이 되겠어? 금실 좋은 부부로 살기 어렵다는 걸 다들 아니까 그렇겠지.(p94)


【 사랑 VS 결혼 】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러면서도 나와 이혼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역시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그런 아내와 헤어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놈은 남편이 버젓이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그 또한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체 사랑이 뭐길래.(p205)

이 소설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란 질문에 관한 작품... 같아 보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결혼 제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일단!!! --- 작가는, 남자 주인공인 덕훈을 통해서는 기존의 '사랑관'을, 여자 주인공인 '인아'를 통해선 파격적인(이란 단어조차 모자랄만큼의) '사랑관'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시작을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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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의 합목적성'이란 것에 대해 두어 번 정도 썼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더 적어보자면 --- 예를 들어, 맹장 수술같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에도 마취라는 사전 작업은 필수적입니다만, 이때의 '마취'라는 작업은 단지 성공적인 '수술'을 위한 수단일/이어야 할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헌데 마취과 의사가 갑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취 지식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며 수술에 필요한 시간 (예를 들어 2-3시간 정도)을 훨씬 넘어 48시간 동안 환자를 마취시켜놓는다면 그건 분명 '수단의 합목적성'에의 심각한 위반이 되는 행위가 되는거지요.1 또 다른 예로 :

'당신의 단기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돈을 버는 겁니다.'

 '이후 당신의 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한 10억쯤 모아놓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10억으로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그건 뭐... 일단 10억을 모아놓고 생각해보려구요.'

이런 식으로 연이어지는 질문은 결국 '개인의 목표에 대한 본질2'을 묻게 됩니다. 자신의 목표에 대한 본질을 알고 있지 못한 이는 결국 '목적'과 '수단'을 명확하게 구분지어내지 못하며, 많은 경우 그 양자의 위치를 바꾸어 놓게도 되지요.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목적과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이 자리바꿈을 하게 되고3, 그 수단에만 내내 매달려 있게 되다보면, 결국 그 둘을 원위치시켜 놓지 못한 채 끝내 '10억'이 그의 '인생 목표'로 남게 되는 겁니다.  

​자! '사랑'이란 게 대체 뭘까요? (온전히 저의 독해로는) 이 작품은, 앞에도 적었듯 '사랑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4 즉, '본질'에 대한 질문은 생략한 채, 오로지 '수단'과 '목적'에 관해서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거지요.

남자 주인공 덕훈의 사랑관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사랑에서 낭만을 빼면 남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p32)라 말하는 그였기에, 당연히 자신의 애인은 자신과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라 생각했었었지요.  이에 반해, 덕훈이 사랑하는 여자 인아는 '나는 ……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도 같이 잘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이상해?5'(p73)라 되묻는 인물입니다. 


이런 상반된 두 인물을 통해 작가가 결국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질문은 바로 '사랑의 도착점이 반드시 결혼이 되어야 하는 거야?'라는,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혹은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혼이란 게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어졌다와 같은) '사랑의 목적/결과'인가, 아니면 글자 그대로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제도적 수단//원인'이느냐를 독자에게 묻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의 두 인용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도라는 거, 인간이 만드는 거잖습니까.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질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p181) ……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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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에 대한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뭐 그게 사랑의 종류가 많아서가 아닌, 오로지 '남녀간의 사랑'에만 국한시켜 이 질문을 생각해본다 해도 쉽사리 한두 개의 문장으로 그 대답을 만들어내기는 쉽지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해'란 말을 연신 내뱉었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우리는 정녕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한다'라 말하고 있다라는 걸까요?


한 마디로 된 '사랑의 정의(定義)'를 말해낼 수 없다면, 현실 또는 문학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사랑의 모습'들을 통해 그것을 거꾸로 유추해낼 수 있다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선택과 유추의 과정에는 다분히 한 개인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반영되겠지요. (40대 중반의,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아이도 있는) 저의 가치관이 선택한 남녀 간 '사랑의 정의'는 바로!!! ---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보여지는 사랑이야말로 그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사랑은 놀이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들 심각하게 사랑와 연애와 결혼을 규정하고, 억압하고, 비판하지 말고, 이 모든 사랑의 산전수전을 신명나는 놀이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p422)

​라는, <해설>6을 쓴 작가 정여울의 견해에는 전적인 반대의 뜻을 표하게 됩니다. --- (일반적으로!) '사랑'의 진행이라는 것이 '결혼'으로 끝맺음되지만, 이내 '결혼이란 연애의 무덤이다'(p90)라는 것이 별 거부감없이 모두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이 현실을 '사랑와 연애와 결혼에 대한 규정과 억압, 그리고 비판'이라 표현하는 정여울의 견해를 정면으로/매우 간략하게 반박하고 있는 '낚시줄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7'라는 물음에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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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것들. ……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열정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p29)

'단 한번뿐인 열정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는, 그러하기에 결혼 이후에 다른 배우자와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란 생각에 대해 이 작품은 '폴리아모리(polyamory) : 다자간 사랑'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반박하며, 그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의 이에 대해 동의할 수는 없지만!


결혼해서 더 좋아진 사람을 못 봤는데 어떻게 그래. 결과가 너무 뻔해. ……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행복하게 사는 게 좋잖아.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거야.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작은 피해와 내 행복이 부딪치게 된다면 나는 내 행복을 택할 거야. …… 그 반대로 나 자신의 작은 피해와 다른 사람의 행복이 부딪치면 나도 그 피해를 감수할 거야.(p97)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라는 대전제하에 전개되는 여자 주인공 인아의 이하 논리에 딱히 반박해낼 수 있는 말이 저에게는 선뜻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작품 전반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식의 질문을 연신 해대는 덕훈을 향해, "사랑이 꼭 한 가지 모습일 수만은 없잖아요"(p29)라 대답하는 인아의 논리는 사뭇 짜증이 날만큼 빈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 정여울은 <해설>을 통해 --- '덕훈에게 행복은 독점이지만, 인아에게 행복이란 타자와의 만남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라 정리해 주고 있거늘, 우리에게 있어 '사랑'이란 감정이 내포하고 있는 소유욕이란 게 독점이 아닌 확장을 통한 행복을 과연 용인할 수 있는 걸까요? '소유'라는 단어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배타성'을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확장을 통한 행복'이란 개념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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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새로운 각도에서 '불륜'을 그려내 이 작품. 그 '새로움'에는 찬탄의 박수를 보냅니다만, 이야기의 설정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아쉬움이 많습니다. 바로 --- '사랑이 무엇이길래'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성의없는 답변이 그 아쉬움의 이유이지요. 소설에서 덕훈이 인아를 끝내 떠나지 못하는, 즉 '사랑하니까'라는 이 상황에 대해 작가는 단지 '그녀와의 황홀한 섹스' 이외에는 그 어떤 이유도 제시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섹스로부터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해 중혼(重婚)이라는 천지개벽할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 설정에 공감할 수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기만 하네요.


'불륜'에 관한 소설 읽기를 마치고, 이 작품이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사랑이 무엇이길래'에 관한 소설들을 읽으려 뽑아 놓았습니다만, 뭔가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 (이게 진짜 온 국민을 둘로 갈라놓고, 여당과 야당이 핏대 높여 싸울만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문학의 해석'으로 다음의 소설읽기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뭐... 길어지면 꽤 길어질 수도, 재미없으면 단번에 끝내질 수도 있겠죠? 


▶ 짧은 한두 마디 : 과연 작가 박현욱은 자신이 쓴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감당해낼 수 있는 걸까요? 


※ 읽어본, '불륜'에 관한 소설

- 이문열 作, 「레테의 연가

- 옌렌 커 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새벽 거리에서

- 파울로 코엘료 作, 불륜

- 다니자키 준이치로 作, 열쇠



 

  1. 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 등장하는 예입니다.
  2. 이때의 '본질'이란 --- 이것이 <왜> 자신 인생의 목표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저자들은 전통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오로지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화폐의 근원적 기능을 '가치의 척도'와 '교환의 수단'으로 적고 있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화폐는 엄연히! 인간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음을 전통경제학이 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일 년에 한 국가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한 수치'인 국내총생산(GDP)는 분명 국가 경제의 활동 수준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인데, 현재에는 이 <수단>이 국가 경제활동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매년 '목표 경제성장률'이라는 게 발표되지요. 심지어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도 등장하는. --;; )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열대우림의 파괴, 공해, 범죄 등을 경제성장의 대가로 치러야하는 부작용들을 (그 이름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외부효과'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제외시켜버리는 반면, 이러한 부작용들을 교정하기 위한 경제활동들 - 예를 들어 농약, 총기류 등의 제조 - 은 오히려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 상정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낳게합니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의 감상문 중.
  4.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약점이라 생각합니다.
  5. 이 소설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인아의 이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 '그건 안돼!'가 당신의 대답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6. 이 작품의 말미에 있는 작가 정여울의 <해설>은 뭔가 억지로 '나는 이 작품을 옹호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에 맞게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더군요.
  7. 율리 체 作, 「어떤 소송」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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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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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 번 적었었지만 --- C를 이야기하기 위해 친구를 만났는데 (혹은, 친구를 만났는데 C를 이야기하고 싶어졌거늘) , C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B를 먼저 이야기해야한다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B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A로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면, (이건 일방적 독백이 아닌 둘 사이의 대화2가 주메뉴인 술자리이기에, 친구로부터의 반응을 곁들이다보면) 그 A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덧 A'으로, 또 A"로 곁가지를 치게되어 결국! C근처에는 이르러보지도 못하고 그날의 술자리가 끝맺음되는 경우가 대부분인게 저의 화법입니다. 그러한! 저이기에, 이 독특하기 짝이 없는 작품 「열쇠」에 대한 감상문을 어찌, 옆길로 새지 않고 적어내야할 지 꽤나 난감하네요.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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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의 사회과학들도 그러하겠지만) 경제학 교과서의 시작은 매우매우 전형적(typical)인 설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많이 갖고 싶고, 많이 먹으면 배불러지고, 아픈 건 싫어하고 등등의 매우 일반적(standard)인 인물이 분석의 대상이지요. 이런 설정은 사실 학부의 과정 내내 유지되고 있으며, 대학원에서도 딱히 큰 이탈(deviation)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3라는, ('사회학'에게만 지워진 짐이 아닌)  전체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는 그처럼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대상들(만)을 설명해냈다하여 너의 임무가 끝났노라!라 절대 말해주지 않습니다. 고로, 이제 경제학은 '전형적이고 일반적'이라는 표현의 반대말로서인 '특별한/독특한/이상한/이해되지 않는/변종·변태'의 대상들까지도 경제학의 렌즈로 설명해내야 하는 역할4 (내지는 의무/임무)까지도 가지게 되는겁니다. 물론, 그들 중 특정 대상에 대해서는 굳이 경제학이 이런 것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하느냐 (혹은 설명해야하느냐)라는 불만이 생겨날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연구자가/만이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이듯! --- 독특한 작품, 「열쇠」에 대해, 뭐 이렇게 하고싶은 말이 많냐?라는 (어처구니 없다는 뉘앙스의) 의문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독자로서 전, 이 작품을 읽고 쓰게 될 감상문을 통해, 이 소설로부터도 (저같은) 누군가는 어처구니5스러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라는 걸 뭔가 좀 설득력있게 보여내고 싶다라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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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기본 관심/숙제는 간단합니다. ①주어진 제약조건하에서 효용6함수를 최대화하는 것이지요. ①개인마다 처해있는/지니고 있는 제약조건은 (각 개인의 통장잔고가 그러하듯 거의) 모두 다 다릅니다. 그러하기에 이 '최대화' 문제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다 다른 것처럼) 개인마다 각기 다른 해답을 내놓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답의 상이(相異)함은 예의 ②효용함수의 차이로부터도 기인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조건을 제시받은 두 사람의 선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효용함수의 차이 때문인 경우7이지요. ---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주요인물들 - 남편, 부인, 딸, 그리고 사윗감(키무라) - 의 효용함수는 '우리들'의 효용함수와는 많이 다를 뿐 아니라, (아무리 '일반적'의 범위를 넓게 잡는다해도) '일반적'이지도 않습니다. 위에서 사용했던 '일반적'의 반대말들인 '특별한/독특한/이상한/이해되지 않는/변종·변태'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가장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변태'를 꼽게 될 정도로 말이죠. (이 감상문에서는 작품의 줄거리를 가급적 보여내지 않겠습니다. 모든 등장인물과 설정들이 독특해서이지만, 특히!나 맨 마지막 문장의 설정은 「롤리타」를 우습게 능가할만큼 '변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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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이론 】

"나라는 사람의 마음은 단지 한 사람 나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p194)

이 작품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그의 말년에 쓴 어느 수필에 실려있는 문구라고 합니다. 이 말을 '사실이 아니다'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게임이론>에서는 (최소한 모형 내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이 됩니다. <게임이론>은 '나는 너의 다음 선택을 알고 있고(A), 너도 A를 또한 알고 있으며(B), 나 역시 B를 알고 있는데(C), 너는 C도 알고 있고 ……'라는, 사뭇 현실적이지 않은 듯한, 하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현실에서 보여지고 있는8 '완전한 지식(perfect knowledge)'을 가정하고 있기에 '나의 마음은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라는 위의 문장은 (예의 '이론적으로는') 틀린 것이 된다라는 거지요. 

 


 "결혼이 가진 매력 중에 하나는 서로를 속이는 생활이 부부 사이에 필요하다는 거야.9"(p13)

-오스카 와일드 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더클래식 刊, 2012.

5년만 지나면 배우자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결혼 생활에서, 정녕 '나의 마음은 나만 알고있지'라 자신할 수 있을까요? 전 그럴 수 없다라 생각합니다만 --- 이 소설은 위 두 인용문장들이 절묘하게 결합된 한 부부 사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 '나는 내 배우자를 속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내 속내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다10'라는 거지요. 

이 작품 「열쇠」는 남편과 아내의 일기장이 번갈아 나오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속내를 가지고 일기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각자의 일기장에는 '내 배우자가 나의 이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라는 표면적 선언이 들어있기는 합니다만, 둘의 속내는 '부디 읽어달라!'라는 것이며11, 실제로 '읽고 있을 것이다'라 확신하고 있기도 합니다. <게임이론>에서의 '완전한 지식'이 완벽하게 가미된 일기장이라는 거지요. --- 이런 속내를 지닌 채 기록되어지는 각자의 일기장에 담겨져 있는 속마음이란 것이!!!   ​


【 성공하는 불륜


'나는 여러 번 오르가슴에 이른다.'(p44)

- 파울료 코엘료 作, 「불륜」, 문학동네 刊, 2014.

「불륜」의 여주인공 린다가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야코프와 첫 신체적 유희를 즐긴 날 저녁, 남편과의 섹스를 한 후 느꼈던 감정을 적어낸 부분입니다. 이후 그녀는 아코프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향후 자신의 결혼생활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지요. 솔직히 말해,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겠!'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라 생각합니다... 만!

「열쇠」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남편은 여기서 더 나아가 본인이 아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다라는 상상으로부터 성적 쾌락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런 취향을 '일반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예의 '변태'라는 수준의 '일반적임의 반대말'이 선택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 다음의 문구를 잘 읽어보면, 이러한 남편의 성적 취향 덕분(?)에, 제가 꽤나 찾아 읽고 싶어했던 '성공하는 불륜'의 이야기가 펼쳐질 가능성이 엿보인다라는 게 저를 확!!! 하고 끄집어 당기는 겁니다.

나는 질투를 남몰래 즐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원래 나는 질투를 느끼면 그 방면의 충동이 일어난다. …… 그날 밤 나는 키무라에 대한 질투를 이용해서 아내를 즐겁게 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앞으로 우리 부부의 성생활을 계속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키무라라는 자극제의 존재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주의를 주고 싶은 점은, …… 자극제로서의 이용범위12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가 상당히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가도 좋다. 아슬아슬하면 할수록 좋다.(p25)

남편은 (비록 자신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성공하는 불륜'의 조건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켰었지요. 결혼한 사람으로서의 feasible set을 절대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라는 점말이죠. 그 조건만 지켜진다면 아내의 (육체적이건 혹은 정신적인 것만이건) 외도는 자신이 일 당사자인 이 '부부라는 관계'를 깨뜨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효용함수에 (+)의 영향을 미치니, 굳이 그것을 막거나 화를 낼 필요조차 없다는 이 설정은 사실 --- 제가 그토록 읽어보고싶었던 '성공하는 불륜'의 소설이었기에, 그러나! 제가 어렴풋이라도 그려보았던 '성공하는 불륜'의 방식은 아니었다라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전개로 인해 이 소설에 대해 제가 구구절절 하고픈 말이 많아진 겁니다. (「불륜」에서 린다의 남편 역시 아내의 불륜을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끝내 모른척하며 린다를 품어냄으로써 그녀를 불륜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었죠. 하지만 그 소설에선 린다와 야코프가 결국 헤어지게 되므로 제 기준에서의 '성공한 불륜'은 되지못했습니다.) 과연 그의 아내는 (그녀의 불륜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이 특이한) 남편이 용인한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을까요? 혹 벗어났었다 하더라도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남편을 믿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리하여 이 사랑은 결국 '성공하는 불륜'이 되었을까요?

「불륜」에서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불륜을 '마약'에 비유했더랬습니다. 이 소설 「열쇠」 역시, 이와같은 '성공하는 불륜'에 알맞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예의 '불륜'에는 마약의 부작용과 똑같은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남편 --- 나는 처음에는 상당한 간격을 두고 키무라를 아내와 접촉하게 했다. 그런데 차츰 두 사람에게서 받는 자극에 익숙해지면서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되자 키무라와 아내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도록 만들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의 질투는 증가했고 질투가 증가할수록 쾌감을 느껴 마지막 목표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아내도 그것을 바라고 있고 나 자신도 그것을 희망해서 멈출 수가 없다.(p94)


● 아내 --- 남편이 질투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자극하는 일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 나는 키무라 씨를 사랑하는 그런 경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랑할 수도 있다. …… 지금까지는 여기에 엄중한 선을 긋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노력해왔지만, 이제부터는 자칫 발을 헛디뎌서 관계가 깊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pp83-84)

 

【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와 변질 】


저자들은 전통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오로지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말하고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일 년에 한 국가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한 수치'인 국내총생산(GDP)는 분명 국가 경제의 활동 수준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인데, 현재에는 이 <수단>이 국가 경제활동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매년 '목표 경제성장률'이라는 게 발표되지요. 심지어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도 등장하는. --;; )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열대우림의 파괴, 공해, 범죄 등을 경제성장의 대가로 치러야하는 부작용들을 (그 이름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외부효과'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제외시켜버리는 반면, 이러한 부작용들을 교정하기 위한 경제활동들 - 예를 들어 농약, 총기류 등의 제조 - 은 오히려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 상정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낳게합니다. 이런 기준의 '경제성장'은 결코 발전이 아니며, 오히려 (전통경제학자들이 변화 혹은 진보라 칭하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삶의 질은 ,어떤 면에서는 실질적 소득마저도, 더 저하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 데이비드 보일 · 앤드류 심스 共著,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의 감상문 중. 

'일기장을 작성한다'의 목표는, 일기장의 사전(事典)적 정의가 어찌되었건, 나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활자로 표현하고 정리해보는 행위이거늘, 이 소설 속 남편과 아내는 모두! 상대방이 '나의 일기를 몰래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었'(p178)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하고픈 말을 간접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삐뚤어진 '일기장의 목표'는 결국 다음과 같은 기이한 상황마저 초래하게 되지요. 하지만!


​남편이나 나는 서로가 일기를 훔쳐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중에 몇 개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장벽을 만드는 등 가능한 한 번거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대가 과연 표적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의 취미였다.(p179)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더 큰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바로! --- '부부라는 관계(relation)'와 '부부관계(sex)'사이에 발생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결혼 적령기의 두 남녀는 '이 여자/남자와의 섹스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이란 걸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제 가치관에서의) '부부관계'는 그저 '부부라는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일정 기간동안만큼은 '가장 커다란'으로 작용하는) 부수적 효용이지요. 헌데! --- 이 작품 속 남편은 '부부라는 관계'가 지니고 있는 feasible set의 가장 바깥쪽 경계로까지 자신의 아내를 밀어냄으로써 (아내가 아닌) 자신의 효용, 즉 자기 만족/행복의 증대를 추구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그러한 남편의 기질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시작된 이 (기혼자인 자신이 지니고 있는 feasible set을 넘나드는) 불륜의 관계를 끝까지 'feasible set을 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진행중'으로 보여지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다시 말해!!!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각자가 상대를 향해 설정해놓고 있는 '수단과 목적'이란 것이, 서로가 보여지기 위해 쓰는 일기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완벽한 지식'을 교묘히 이용해낸 결과 어느덧 --- 서로의 '수단과 목적'이 애초의 자리를 이탈하여, 뒤엉키고 서로 뒤바뀌게 되어 끝내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버렸다라는 거지요. 여기서!!!  


이 소설이 설정해 놓고 있는 '애초의 수단과 목적'이라는 것이 놀라웠던 것 이상으로, '변질된 수단과 목적'의 모습은 더더욱 충격적입니다. 그 와중에 독자는 ​(비록 이 작품 속에서 쓰여진 구절은 아니나) "나라는 사람의 마음은 단지 한 사람 나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는 작가의 말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가 예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엔 바로 이 점이 ---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왜! '열쇠'로 하였을까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다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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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듯 말듯한 반투명의 유리로 만들어져있는, 그래서 더더욱 열어보고 싶어 죽겠는 상자가 내 앞에 있는데, 내겐 열쇠가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때 만약! 아예 이 상자 자체가 사라진다면, 그 궁금증은 더욱 커지는 걸까요? 아님 사라지게 될까요? --- 당사자인 나의 궁금증은 더욱 커지겠지만, 열쇠가 없어 발을 동동구르던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3자의 궁금증은 이내 곧 사라지게 되겠죠. 단!!!

일반적 예상과는 달리, '수단과 목적의 전이'라는 설정처럼, 독자가 '나'가 되며, '제3자'는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이라 표현될 수 있는 이 소설! 그 불륜은 과연... 성공했을까요? --- 제가 생각했었던 개념의 '성공'은 아니지만, 이 소설 속 불륜은 당연히 '성공하였다'라 말해져야한다라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요.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 매우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 짧은 한두 마디 : 하지만... 이런 방식의 '성공'은 너무도 당황스럽. --;; 

 


 

 

 

※ 읽어본, '불륜'에 관한 소설

- 이문열 作, 「레테의 연가

- 옌렌 커 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새벽 거리에서

- 파울로 코엘료 作, 불륜

 

 

 

 

 



 

  1. <창비>에서 출판된 이 책에는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라 저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이 포스트에선 알라딘 서점의 표기를 사용했습니다.
  2. 제 술자리의 99%는 두 명 정원이에요.
  3.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刊, 2013. 의 <머리말>중.
  4. 사실, 요즘 세상은 경제학에게 '세상을 구해내야하는 임무'같은 걸 요구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경제학의 참 매력은 '세상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 가장 빛을 발한다라 생각합니다.
  5.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 -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6. 쉽게 말해 '행복'이라 생각하면 될 듯. ⁠
  7. 가장 흔한 예가 바로, '당신이 무인도에 가야할 때 가져가고 싶은 것 다섯 가지를 꼽는다면?'류의 질문이지요.
  8. 가위바위보를 할 때 상대방이 먼저 '나는 가위를 낼께!'라 선언하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진짜 상대방이 가위를 낸다면 나는 바위를, 그걸 상대방이 아니까 보를 낼 것이고, 그럼 나는 가위를?'과 같은, 혹은 바둑이나 장기에서의 수싸움 등은 예의 위 '완전한 지식'의 현실적 예이므로, 이를 '현실적이지 않은 가정'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9. "One charm of marriage is that it makes a life of deception absolutely necessary for both parties." - 영문판 p12.
  10. 혹은 '내 진짜 속내를 감춘 채 다른 가상의 속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게 배우자를 속일 수 있다.'
  11. ●남편 - '앞으로 나는 그녀가 이것을 실제로 훔쳐보든 그러지 않든 개의치 않고 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는 느낌으로 이 일기를 쓰겠다.'(p10)
    ●아내 - '내가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첫번째 이유는, 나는 남편의 일기장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반면, 남편은 내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그 우월감이 더할나위 없이 즐겁기 때문이다.(p15) …… 지금부터는 이런 방법으로 남편에게 간접적으로 말을 하려고 한다. 직접적으로는 부끄러워서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이런 방식으로라면 할 수 있다.'(p59)
  12. 이 범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습니다만, 「새벽 거리에서」의 '개방적 정의'가 말하고 있는 '섹스를 하느냐의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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