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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평점 :
작가 피에르 불은 그의 작품 「혹성탈출」을 통해, 인간이 유인원에게 지배를 당하게 된다라는 엄청난 반전도 원숭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보려 했던,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시도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정을 보여주었더랬습니다. 영화 <Back to the Future> 역시, 비프를 향한 아버지 맥플라이의 주먹 한 방이 이후 양 쪽의 가세(家勢)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었지요. 이처럼 --- 과거의 한 지점에 결정적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후의 전개, 즉 (그 '과거의 한 지점'이 이끌어 낸) '현재'의 '현재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상상해 보는 것을, 이 책 「비명을 찾아서」의 작가 복거일은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추밀원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 공작이 1909년 10월 26일 합이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에서 부상만을 입었다는 가정 아래에서 씌어진 이른바 '대체 역사'이다. (상권, p9) …… 대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건의 결말이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났다는 가정을 하고 그 뒤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작품의 배경을 삼는 기법으로...(상권,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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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인가? 】
이 작품은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라는 사실(史實)을, 그 반대의 가정을 가해볼 만한 과거의 미묘한 한 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작가 복거일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서술해 놓고 있는 다음의 구절 속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일본 정계에 있어서 온건파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일본에 언제나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상권, pp9-10)
우리에게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조선에 대해 회유적인 노선을 펼친 인물이었다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토는 안중근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후 응급처치를 받으며 자신을 쏜 사람이 누구냐 물었고,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듣고는 "바카나야쓰!"라 중얼거렸다 하더군요. 왜 그가 뱉은 최후의 일성이 '바카나야쓰'였을까요? --- '아마도 대한국 정책에서 온건파를 대표했던 자신이 한국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 것이다.'
이토가 죽으면서 공석이 된 통감 자리는 일본의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로 넘어갔으며, 문관 출신인 이토의 후임으로 군 출신 인물이 부임했다는 것은 곧 조선의 식민지화가 임박했음을 의미했습니다. 실제 이토가 죽은 지 일곱 달만에 일본은 합병조약을 체결시켰지요.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합니다. : "이렇게 보면 온건파 이토의 죽음이 한일병합을 앞당긴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 때문에 일본의 일부 논자들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을 '자충수'라고 평가한다."
어쨌든! 역사학계(의 일부)가 바라보는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미인 "이토 히로부미의 부재로 인한 무단통치의 가속화를 불러오고,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 이란 해석을 작가 복거일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 보입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하여 부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였었다면 --- 무단통치의 가속화도 없었을 것이고, 이토의 문화적 식민통치의 결과, 한국인의 식민지배 내면화는 더욱 확산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식 역시 강화되지 못하지 않았겠느냐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작가가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또우 히로부미 초대 총독에 의해 강력히 추친된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 1980년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이 되었고, 자신들이 내지인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권, pp11-12)
【 문제의식의 발로 】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상권, P54)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는 직업군인이었다 제대한 후, 금속 회사의 무역파트에서 근무하며, 시(詩)를 쓰기도 하는 조선인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조차 예의 모르고 있었었던 그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완전히 똑같은 사고를 하고 있는 인물이지요.
조선인들이 내지인들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이 일본 제국의 변두리에 자리잡은 데 근본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상권, p45)
하지만! 조선에서 보여지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서만큼은 억울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 땅에 있는 그 많은 불평등을 내지인과 조선인 사이의 선천적인 능력의 차이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 조선인들은 다만 악순환에 시달리는 것이다. 차별과 무지와 빈곤의 악순환에."(상권, p131)
이랬던 히데요의 사고(思考)는, 우연히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두 권의 책을 읽은 후, 그러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자신의 시(詩)를 통해 작게나마 자신의 힘을 더하여야겠다는 것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지요. : "나는 앞으로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조선인을 대변하는 시를 쓰려고 해."(상권,p144)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도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무언가 자신이 이제까지 '진실'이라 굳게 믿어왔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라 의심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에도 무려! 독자적인 언어와 역사가 있었었으며, 그것들이 사라지고 잊혀진 것 역시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 여전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특히나 젊은 세대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실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히데요의 의문과 고민이 시작됩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진실을 알아야 하는가?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당구장으로 들어간 학생들이 조선에 관한 진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그들의 길이 어두운가? 내가 그 진실을 안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는 길이 더 밝아지는가? …… 그래도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다. 왜? 왜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가? …… 이처럼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인가? (상권, pp284-285)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기까지의 고민은 --- 김은국의 「순교자」에 등장하는 인물인 '장 대령'의 일성(一聲), "왜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게다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존재했었던 조선의 말과 글이었기에, 누군가는 아직도 그 조선의 말과 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히데요는 뜻밖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조선의 말와 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의 고민은 한 단계 더 깊어지게 되지요. 헌데 말이죠! ---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히데요의 이 고민란 게 기실 새로운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1차적으로, 그리고 작가 복거일이 그 고민을 작품 속에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란 게 저의 생각관 맞지 않더란 점에서 다시 한 번 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만족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장사에 관한한 중요한 건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이 국가라는 집단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일이야. …… 자네가 그 군복을 차려입고서 사람들에게 한다는 얘기가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 …… 사람들이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들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나?
- 김은국 作, 「순교자」, p174, 문학동네 刊, 2010.
이 작품 속에도, 주인공 히데요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해주는 이가 등장합니다. (소위 말하는) 불온 서적 소지죄로 갱생교육을 받게 된 히데요의 담당 교사 하꾸야마가 바로 '장대령'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꾸야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일본에 의한 조선 역사의 말살·왜곡은 이젠 거의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칠십 년이 넘는 세월이 이끼를 얹어서, 그 가공의 역사가 이젠 진실처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과연 조선 사람들이 지금 노력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p227) …… 이젠 조선 사람들에겐, 좋으나 싫으나, 일본 사람들이 되는 길밖엔 없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조선 사람들은 원통하지만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 살아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분명히 우리는 그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위해 하는 짓입니다.(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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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 주장 자체에 지체 없이 반대의 뜻을 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 이 표현이, 친일 작가라 불리우는 춘원 이광수의 작품 「무정」에 나오는 구절이라면, 이는 충분히 다른 방향 -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차라리 난 친일이라도 하여 작가로서 살 길을 이어가겠노라 - 으로 이해될 수 밖엔 없을 겁니다. 전 그렇게 이해했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살 길을 조선인이 아님에 있다'라는 하꾸야마의 논지 속에 --- '안 그래도 비참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는 것들뿐이라면 문제는 곤란해'라 말했던 「순교자」 속 장 대령의 뜻깊은(!) 속내가 들어있었었다면? 더 나아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속 어느 제사장의 다음과 같은 (이타주의적?) 의도가 (혹은 변명이) 들어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하꾸야마의 주장은 여전히 그리고 당연하게 '친일'이라는 멍에를 벗어낼 수 없는 걸까요?
●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作, 「사람의 아들」 중 어느 제사장의 말
장대령이나 제사장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저로서는 예의,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하꾸야마의 논리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 (이 작품의 배경을 잊지 않고 온전히 대입시켜 본다해도) 하꾸야마의 논리 자체가 선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논리를 깨뜨려 내겠다 펼쳐지는 주인공 히데요의 논리가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이었다라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작가의 선택 】
"독립은 과연 지고(至高)의 가치이며 언제나 반드시 그러하여야 하는가?"
이 당위에의 의문에 대한 작가 복거일의 대답이 만약 이 작품이라면, 그리하여 작가가 '그렇다! 그러하여야 한다!'라 대답하는 것이라면 --- 제 개인적 의견으로 작가의 논리로는 그 누구도 설득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구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우리 조선인들이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몇십 년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자신의 나라를 가졌었다는 사실을.(하권, p129)
이렇게 시작된 히데요의 의문은 이내 하꾸야마의 논리에 부딪히게 되지요. 여기서 히데요는 겨우! "하꾸야마 선생이 전개한 논리의 어느 고린가에 오류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제가 잘못되었거나."(하권,p233)이라는 빈약한 저항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아간 한 발이라는 게 고작
조선적인 것을 다 버렸을 때,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조선인이 아닐 따름이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존재. …… 조선인은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 그 자명한 이치를 생각하기가 왜 그렇게도 힘들었던가? 조선인이 조선적인 것을 버리면, 그는 그만큼 왜소해지고 불완전해지는 것이다. 병들어 뿌리와 가지가 시든 나무처럼. 조선인은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본적인 것까지도 조선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섭취해야 한다. 그것이 조선인이 살 수 있는 길이다. (하권, pp275-277)
이건 마치! --- 'A=C 이고, B=C이기도 하지만, A=B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라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을 뿐인 겁니다. --- 히데요의 위와 같은 사고(思考)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이라면 얼마든지 성립 가능한, 어쩌면 반드시 성립되어야 하는 논리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죽지 않았고, 그리하여 식민지배의 내면화가 거의 완전히 이루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전 절대 그렇지 못하다라 생각합니다. (가요의 가사를 빌어보자면) 이는 이미 폐차된 차에 새 타이어 갈아끼우자란 소리 밖엔 안되는 거 아닐까요?
주인공의 고민이 여기에서 그쳤었다면, 이 작품이 이처럼 알려져 있지도 않겠죠. 히데요의 저항은 이제 한 발을 더 나아가 확신의 수준에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조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연적으로 내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 설령 세상이 바뀌어 내지인들의 조선 통치가 너그럽고 공정하고 현명한 것이 될지라도,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보다 더 공정하고 현명한 통치가 될지라도, 조선은 꼭 독립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를 다르시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닌 것이다. (하권, p284)
소설의 이 지점에서 막 헷갈려집니다. 독자 뿐만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말이죠. --- 아니! '조선의 내지화 정책이 역대 총독들에 의해 충실히 계승되어,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라는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가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어떻게 느닷없이 가져와 쓸 수 있는 것일까요?이건 작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전제 자체를 소설의 끝에 와서는 완전히 갈아 뒤엎자란 소리 밖엔 안되잖습니까.
이런 식의 결과를 작가가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 '당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작가 역시 '당위'로만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에 생겨났다라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저의 이해였습니다. 쉽게 말해, '왜 1+1의 답은 2가 되어야 하나요?'란 학생의 질문에 '1+1은 2니까!'라 답해주는 선생 격이라고나 할까요? 차라리!!!
「순교자」에서,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열 두명의 목사들 모두가, 실제로는 모두 순교자적 죽음을 맞이했던 건 아니었지만, 장 대령 역시 그걸 알고는 있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라 외칠 수 밖에 없었었던 그의 거짓 당위가 안겨주었던 공감같은 것으로 (애초부터 '대체 역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선언했던) 이 작품을 마무리지어낼 수는 없었을까요? 혹 --- "길이 보이는 한, 난 망명객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망명객이다."(하권, p328)라는, 심히 생뚱맞은 이 작품의 결말이 품고 있는 뭔가가, 제가 이해해내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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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설의 구조 자체는 매우 탄탄합니다.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부터는 사실(事實)인지, 소설을 쭉 읽다보면 어느 순간엔 잘 구분이 되지 않을만큼 이야기 자체는 훌륭하게 짜여져 있다 생각합니다... 만!
이렇게만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①일본의 명문가 출신인 젊은 여성과의 뭔가 불륜스런 러브라인은 그것에 '애틋한'이나 '가슴 아픈'이란 형용사를 붙이기엔 지나치게 싸구려스럽기만 하며, ②잊혀질만하면 잊지 말라는 듯 짜잔!하고 등장하는 '아랫배에서 묵직한 욕정이 솟았다'(하권,p214)류의 표현들은 분명! 이 작품의 격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고 있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③주인공 히데요의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망명'의 실질적 이유라는 게 고작 살인죄로부터의 도피였다라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를 잠재적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혹은 작가는) 이 마지막 상황에 대해 '식민지배 계급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 뭐 이딴 식으로 둘러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의 '갑 of 갑'이죠. 만약!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작가는 과연 이 작품의 마무리를 어떻게 만들어냈었을까요?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받았던 제 느낌은 --- 작가 스스로도 하꾸야마의 논리에 맞설 히데요의 대응논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했기에 급작스럽게 '망명'이란 그래도 뭔가 애국적 향(香)을 조금이나마 풍겨낼 수 있는 마무리를 대충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만 합니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다른 분들은 과연 이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덧> '대체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중요했던 한 순간의 결말을 뒤집어봄으로써, 우리의 '현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그렇다면! --- 이제 머지않은 시간 후면, '이산가족'이라는 단어마저 사어(死語)가 될 우리에게 과연 '통일'이란 여전히 '우리의 소원'으로 남아 있게 될른지, '통일'은 끝까지 '무조건 되어야 하는' 당위의 개념으로 인식될른지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사실, 아직까지는 '통일'이 당위의 개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꽤 오래전 부터 '통일의 경제적 효과'류의 논의들이 '통일'이란 개념을 야금야금 '당위'의 수준이 아닌 일개 '(수단을 동원해 이뤄내야 할) 목적'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왔기는 했었습니다만, 이젠 아예 대통령이 나서서 '통일은 대박!'이라 발언해 버림으로써 '통일'에 대한 개념 자체를 더 이상 '당위'의 차원이 아닌, 그저 "자본주의의 체제 하에서만 유용한 무엇"으로 확정지어버렸었지요. 이건 어쩌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 짧은 한두 마디 : 이 작품이 진정 '역사 소설'로 불리우길 원했었다면, 현재 분량의 딱! 절반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었지 않나 싶. --;;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김은국 作, 「순교자」 : '당위'에 대한 진지한 의문.
- 이광수 作, 「무정」 : '친일'에 대한 작가의 사전적 변명?
- 피에르 불 作, 「혹성탈출」 : 인류의 역사에 대해 가정해 보는 대체 역사.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신의 善意은 절대적인 것이다'란 당위에 대한 충격적 반론.
- "실제로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 회유(懷柔) : 어루만지고 잘 달래서 시키는 말을 듣도록 함. - <네이버 국어사전>
- "바보같은 놈!"
-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4, 페이퍼로드 刊, 2011.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26, 페이퍼로드 刊, 2011.
- 김연철 외 共著, 「만약에 한국사」, p32, 페이퍼로드 刊, 2011.
- 이 가정의 상황이 지니고 있는 논리전개에는 동의하지만, 그 역(실제의 史實에 대한 해석)도 과연 성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즉 --- <각주 6>의 저자들처럼 안중근의 투쟁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강화했던 것'이라 보는 것은 혹,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간의 관계에서와 같이, 반대방향으로의 역(易)이 항상 성립되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미처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 아닐까 싶다라는 거지요.
- 이 작품의 부제인 '쇼우와 61년'은 1987년을 가리킵니다.
- 김은국 作, 「순교자」, pp152-153, 문학동네 刊, 2010.
- 조선인 문학가들.
- 조선인 대중들.
- 일본작가 구사카베 요의 소설 「A케어」가 딱!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소설이지요.
-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썼던 저의 감상문에 다음과 같은 덧글도 달려 있습니다. --- "친일파가 쓴 소설이 무슨 문학 가치가 있으며 왜 궂이 그걸 친송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설령 문학적 가치가 있다해도 지금까지 이런 소설이 읽혀지고 있다는거 자체가 잘못된거 같아요."
- 물론, 이 '다른 사람'이란 문구에 대해서는 히데요의 다음 독백을 설명으로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도 작가는 예의 '그래도 찾아야 했다'라는, 이유 없는 단순한 당위만을 내밀고 있지요. --- '한 사람이 자기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실체가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실체의 상당한 부분이 허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큰 충격일 터였다. 그리고 그 허구로 밝혀진 것을 대신해서 채울 실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리고 두려운 일이었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일는지 모른다는 것은 반생을 넘게 살은 사람에겐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하권,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