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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 ㅣ 다림 청소년 문학
김은국 지음 / 다림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일제하의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이란 게 특성상 재미있을 수 없겠지만, 예의 이 작품도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 작품의 맨 마지막 장(章)을 읽기 전까지는, 뭔가 등장인물들의 배경에 은근 불만도 가지고 있었던지라, 이걸 읽고 대체 어떤 감상문을 써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마저 들었었지요.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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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45"로 끝맺음되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의 (출생연도, 출생지 등으로 보아) 자전적 소설이라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작가 김은국은 그렇게, 우리의 부모님 세대를 자신이 대표하여 저희 세대에게, 혹은 종원군의 세대에게 '자신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저의) 할아버지 세대의 변명' 역시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담아내고 있지요. 그러하기에!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시대와 싸워야 했던 소년의 분투기"로 이 작품을 읽어내기 보다는 --- 자신 세대와 그 윗 세대의 솔직한 변명,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의 당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라고, 또 그리해야만 작가가 영문 제목 「Lost Names」의 이 작품에 <빼앗긴 이름>이 아닌 「잃어버린 이름」으로 번역되기를 원했었던 이유가 설명이 된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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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죽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이 잔인한 계절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p136)
1932년에 태어난 한 소년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시간동안 성장해 가며 겪어온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입니다만, 일제의 핍박상이 그리 자세하게/절절하게 그려지고 있다고는 읽히지 않았더랬습니다. 단지 --- '창씨개명'이라는 특정 사건만을 일제하 조선이 겪어야 했던 치욕의 상징으로 부각시켜놓고 있으며, 그 사건을 일컫는 「잃어버린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과도 어울리듯, 이 작품에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미야모토'로 창씨개명을 한다는 부분만 빼고는)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질 않습니다. 그 창씨개명을 당하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참배하며 울고 원통해합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따지듯이 묻지요.
"이런다고 뭐가 되나요? 다들 이런다고 무슨 수가 생기나요? 이런다고 이미 끝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어요?"(p175)
이 질문에 대해 아버지는 "네 눈을 대하기가 부끄럽구나. 장차 너희들의 세대가 되면 우릴 용서해줘야 할 거야."(p169)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章)에 가서야, 이 때의 이 대답 속 '용서'에 대한 숨겨진 의미를 모두 밝혀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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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의 다음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 지금 대한민국에서 주류(主流)로 자리하고 있는 '친일'에 대한 생각에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헌데! 술자리에서 친구에게는 얼마든지 말해낼 수 있었습니다만, 뭔가 뚜렷한 언어로 그러한 저의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해낼 수가 없었던 저에게! 이 소설은 그 실체적 해답을 아주 뚜렷하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해방이 그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이에요. 그걸 뭐 우리가 쟁취했나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 선물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건 그거예요.(p279)
물론! 해방 자체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했다는 결과로 발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투쟁도 있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투쟁'이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지만 --- 예의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은 단지 거기까지만이었다라는, 그러했기에 '투쟁'으로 쟁취해 낼 '해방'을 맞이할 자체적인 준비와 계획은 거의 전무했었다라는 재반론에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주인공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변명이 차라리 그 솔직함에서나마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네 말이 맞아. 우리의 해방은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선물 같은 거지.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려. 우리 어른들이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어쩔 줄 모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모두 우리의 생존, 더 정확히 말한다면 개인적 생존에만 급급해서 해방이나 독립 같은 궁극적인 사태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거지.(p282)
이러한 변명에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개인적 생존'이라는 가치에 대해 절대로 가벼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는 저이기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란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제 치하를 살아남아내기 위해 취했던 행동들에 대해 지금 현재의 잣대로 '친일'이네 뭐네 재단한다라는 것이 심히 맘에 들지 않는 저이기에 !!!
네 할아버지 세대는 대체로 산만하고 일의 처리 능력이 없었다. 목표가 없었을뿐더러 여러 가지로 어리석기도 했지. … 그러다 나라 꼴을 개망신시키고 마침내 강산을 팔아넘기기까지 한 거야. 그러고 나서는 '이렇게 돼서 미안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달리 나라를 구해낼 길은 없었다'면서 나의 세대로 바통을 넘긴 거야.(282) …… 그렇게 해서 우리 차례가 됐을 땐 이미 늦었단 말야. 일본은 이미 우리나라를 합병한 뒤였고, 그들의 통치는 막강하여 항거할 방법이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때 벌써, 이른바 국제 정치의 흐름은 조선 합병을 하나의 기정 사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야. 하기야 해외에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다닌 사람도 있었지만, 국내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한 일이란 건 거의 없어. 나라 안에 남아서 버텨야 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 정신만을 굳세게 가지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또 기대해 온 거야. 생존이지. 그야말로 생존, 살아남는 일이었어. … 살아남았다는 것만이 우리 세대의 업적이야. 그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pp283-284)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살아남는 일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었다'란 아버지의 이 말에 물론! --- 혹자는 "그 세대에 '해방'이 주어졌으니까 성립되는 변명이다"라는 결과론적 비난을 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들'이 어쨌든 살아남아 주었기에 그들의 후손인 저와 종원군 세대가 이런 해방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결과론적 주장이 오히려, '지금 이 시점의 현재'에선 훨씬 더 합리적이고 온당하다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세대와는 달라서 우린 훨씬 강하고 자신만만한 세대가 될 거예요. 저희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갖지 못했던 해방과 자유를 갖고 출발하니까요. 그게 상당한 차이를 내고 말 거예요.…… 아무도 아버지의 세대가 나빴고, 누구의 세대는 훌륭했다는 식의 얘긴 못할 거예요. 우린 다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아버지? (pp284-285)
라는, 제가 이 작품의 핵심적 부분이라 생각하는 위 구절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무소불위적 '절대적 선(善)'이라 자칭하고 있는) '친일 단죄'의 기준과 사고에 대해 정확하고 날카롭게 반박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 해방 정국을 바라보는 강준만 교수의 다음 시각이야말로, 현재 '친일 단죄'라는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자들에겐, 그들이 쥐고 있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칼을 겨누고 있지 않나 싶네요.
"상호 타협하지 못할 원수는 없다. 우리가 오늘의 시점에서 해방정국의 극렬한 대립구도를 개탄한다면, 훗날의 사람들이 지금의 극렬한 대립구도에 대해서도 개탄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전투적 극단주의를 그대로 방임하는 걸 다시 생각해 볼 때다. 해방정국의 역사가 잘 말해 주듯이 중간에 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중간파'가 겪어야 했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화끈하고 '앗쌀'한 걸 너무 좋아하는 탓인지 여전희 '극단주의 미학'에 심취돼 있다. 이제는 이걸 자제하고 극복해야 한다. 역사에서 무슨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망정, 그것이 40년대 후반의 역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일 것이다."
▶ 짧은 한두 마디 : "이름만 바꾸면 그 얘기는 당신에 관한 것이다."
※ 읽어본, 작가 김은국의 다른 작품 : 「순교자」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 이광수 作, 「무정」
- 복거일 作, 「비명을 찾아서」
-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 1932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황해도에서 보냈다. - <작가 소개> 중.
- 이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문구입니다.
- "작가는 영어로 'Lost'라고 쓴 것을 '빼앗기다'라고 번역되기보다 '잃다'라고 번역되기를 원했습니다. - p311, <작품 해설>중.
- 이는 주인공의 친가와 외가 모두 부유층이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듯.
- 아버지의 이 말은 사실 다른 곳에서 등장했던 것입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상 주인공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라 이해해도 무방하다라 생각합니다.
- 그러했기에, 이 재미없는 소설에, 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족도가 생겨난 것이기도 합니다.
- 함석헌 옹의 '뜻밖에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라는 표현 역시 해방 자체가 우리 민족이 벌여왔던 '투쟁의 산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 강준만 교수는 '솔직하자. 너와 내가 다 몰랐느니라. 다 자고 있었으니라'라는 또 다른 함석헌의 표현과 함께 그의 진의(眞意)는 반가움의 표현이 아닌 조선인,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질책이었었다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 '과연 일제의 지배가 끝이 나게 될까?'에 대해 여하히 부정적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일제 치하의 시절 속에서, "'역사의 불가항력'을 이유로 일본 군국주의에 거부할 수 없는 협력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라했던 윤치호의 주장이나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지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신탁통치반대'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는 이영희 교수의 회고처럼, 당시의 친일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의 미숙이었을 뿐, 그것이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단죄되어야만하는 사상의 문제'였다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강준만 著,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인물과사상사 刊, 2009, 중.
- 복거일 作, 「비명(碑銘)을 찾아서」, p87, 문학과지성사 刊,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