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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8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영화가 아니었다면 "Back to the Future"라는 구문 자체가 아예 태어날 수 없었을 것처럼, '개가'라는 주어부와 '삐약거렸다'란 서술부는 하나의 문장 안에선 서로 결합될 수 없다라 보는 것이 정상적인 언어 체계의 결론일 겁니다... 만! --- 발칙하기 짝이 없는 이 소설은 무려!!! (my ex-와 같은 접두어조차 없이) '아내가 결혼했다'란, 쉬이 이해될 수 없는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소설 중 불륜에 관한 작품 좀 골라주세요'란 부탁에, 제가 좋아하는 동네 책방 사장님께서 권해주셨던 이 책, 대체 뭔 내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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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것에의 의문 】
제가 읽어본, 불륜에 관한 다섯 작품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이라는 불륜의 정의(定義)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더랬습니다. 즉, '사람의 도리'가 일반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라는 거지요. 이처럼 자신이 행하고 있는 '불륜'의 행위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것'임을 인정하였기에, 새로운 상대방과의 만남이 행복했던 만큼, 현재의 배우자에 대한 미안함이 그 (새로이 추가된 항목으로부터의) 행복에 예외없이 마이너스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에 의문을 한 번 제기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쉽게 말해, 한 여자를 사랑해 그녀와 결혼을 했는데, 뒤늦게 '더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녀, 새로운 상대를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새로운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싶다라는 욕망까지를 가지게 되었다라는 게 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냐라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당신은 무어라 대답해주시겠습니까? (솔직히 저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답이 정말 궁금하긴 해요.)
20대 시절, 저의 가치관을 shaping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한 인물을 꼽으라면, 그는 단연코 작가 이문열이어야 합니다. 그 분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질문들에 대해 저만의 대답을 만들어 가며 그렇게 --- 그러한 바탕위에서 지금의 '저'가 만들어졌었기 때문이지요.
어느 작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이문열의 작품 중 바로 위와 같은 질문이 등장하는 소설이 있었더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헌데 '뒤늦게 나타난 더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나는 지금 내 아내와 한 이불 속에 누워있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다른 여자가 자리잡고 있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정녕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져주었던 작품이었죠. --- 20대 초반의 청춘에게는 사실 거의 와닿지 않는 문제였더랬습니다만!
'결혼이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연애가 이벤트라면 결혼은 일상이다(p140)'라는 지극히 당연한/당연해보이는 문구는 이내 '아주 짧은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 정작 사랑했던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p282)라는 종착점에,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이르르게 되는, 이 사회의/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쯤되면, 이걸 일부의 일탈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는, 혹여 '인간 본성의 하나/일부'라 인식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바로 여기 --- '인간 본성의 하나/일부'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두 본질적 문제가 서로 충돌하게 되는 지점을 이 작품 「아내가 결혼했다」가 포인트로 잡아내고 있는 겁니다. (앞서의 불륜에 관한 소설들의 감상문에서 썼었던 'feasible set'의 개념을 사용해보자면 - 결혼이라는 시점 이후에는 각자의 feasible set이 많이 축소된다라는, 사뭇 당연시되었던 점에 이 소설은 "결혼 이전의 feasible set을 결혼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해나가면 대체 왜 안되는거냐?"라 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부부간 금실이 좋다는 게 왜 자랑이겠으며 왜 감탄의 대상이 되겠어? 금실 좋은 부부로 살기 어렵다는 걸 다들 아니까 그렇겠지.(p94)
【 사랑 VS 결혼 】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러면서도 나와 이혼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 역시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그런 아내와 헤어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놈은 남편이 버젓이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그 또한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체 사랑이 뭐길래.(p205)
이 소설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란 질문에 관한 작품... 같아 보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결혼 제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일단!!! --- 작가는, 남자 주인공인 덕훈을 통해서는 기존의 '사랑관'을, 여자 주인공인 '인아'를 통해선 파격적인(이란 단어조차 모자랄만큼의) '사랑관'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이란 게 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시작을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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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의 합목적성'이란 것에 대해 두어 번 정도 썼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더 적어보자면 --- 예를 들어, 맹장 수술같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에도 마취라는 사전 작업은 필수적입니다만, 이때의 '마취'라는 작업은 단지 성공적인 '수술'을 위한 수단일/이어야 할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헌데 마취과 의사가 갑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취 지식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며 수술에 필요한 시간 (예를 들어 2-3시간 정도)을 훨씬 넘어 48시간 동안 환자를 마취시켜놓는다면 그건 분명 '수단의 합목적성'에의 심각한 위반이 되는 행위가 되는거지요. 또 다른 예로 :
'당신의 단기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돈을 버는 겁니다.'
'이후 당신의 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한 10억쯤 모아놓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10억으로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죠?' '그건 뭐... 일단 10억을 모아놓고 생각해보려구요.'
이런 식으로 연이어지는 질문은 결국 '개인의 목표에 대한 본질'을 묻게 됩니다. 자신의 목표에 대한 본질을 알고 있지 못한 이는 결국 '목적'과 '수단'을 명확하게 구분지어내지 못하며, 많은 경우 그 양자의 위치를 바꾸어 놓게도 되지요.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목적과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이 자리바꿈을 하게 되고, 그 수단에만 내내 매달려 있게 되다보면, 결국 그 둘을 원위치시켜 놓지 못한 채 끝내 '10억'이 그의 '인생 목표'로 남게 되는 겁니다.
자! '사랑'이란 게 대체 뭘까요? (온전히 저의 독해로는) 이 작품은, 앞에도 적었듯 '사랑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즉, '본질'에 대한 질문은 생략한 채, 오로지 '수단'과 '목적'에 관해서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거지요.
남자 주인공 덕훈의 사랑관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사랑에서 낭만을 빼면 남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p32)라 말하는 그였기에, 당연히 자신의 애인은 자신과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라 생각했었었지요. 이에 반해, 덕훈이 사랑하는 여자 인아는 '나는 ……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도 같이 잘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이상해?'(p73)라 되묻는 인물입니다.
이런 상반된 두 인물을 통해 작가가 결국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질문은 바로 '사랑의 도착점이 반드시 결혼이 되어야 하는 거야?'라는,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혹은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혼이란 게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어졌다와 같은) '사랑의 목적/결과'인가, 아니면 글자 그대로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제도적 수단//원인'이느냐를 독자에게 묻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의 두 인용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도라는 거, 인간이 만드는 거잖습니까.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질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p181) ……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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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에 대한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뭐 그게 사랑의 종류가 많아서가 아닌, 오로지 '남녀간의 사랑'에만 국한시켜 이 질문을 생각해본다 해도 쉽사리 한두 개의 문장으로 그 대답을 만들어내기는 쉽지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해'란 말을 연신 내뱉었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우리는 정녕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한다'라 말하고 있다라는 걸까요?
한 마디로 된 '사랑의 정의(定義)'를 말해낼 수 없다면, 현실 또는 문학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사랑의 모습'들을 통해 그것을 거꾸로 유추해낼 수 있다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선택과 유추의 과정에는 다분히 한 개인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반영되겠지요. (40대 중반의,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아이도 있는) 저의 가치관이 선택한 남녀 간 '사랑의 정의'는 바로!!! ---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보여지는 사랑이야말로 그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사랑은 놀이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들 심각하게 사랑와 연애와 결혼을 규정하고, 억압하고, 비판하지 말고, 이 모든 사랑의 산전수전을 신명나는 놀이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p422)
라는, <해설>을 쓴 작가 정여울의 견해에는 전적인 반대의 뜻을 표하게 됩니다. --- (일반적으로!) '사랑'의 진행이라는 것이 '결혼'으로 끝맺음되지만, 이내 '결혼이란 연애의 무덤이다'(p90)라는 것이 별 거부감없이 모두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이 현실을 '사랑와 연애와 결혼에 대한 규정과 억압, 그리고 비판'이라 표현하는 정여울의 견해를 정면으로/매우 간략하게 반박하고 있는 '낚시줄 끝이 낚시줄의 반대겠어?'라는 물음에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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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것들. ……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열정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p29)
'단 한번뿐인 열정적인 사랑을 하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는, 그러하기에 결혼 이후에 다른 배우자와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란 생각에 대해 이 작품은 '폴리아모리(polyamory) : 다자간 사랑'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반박하며, 그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예의 이에 대해 동의할 수는 없지만!
결혼해서 더 좋아진 사람을 못 봤는데 어떻게 그래. 결과가 너무 뻔해. ……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행복하게 사는 게 좋잖아.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거야.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작은 피해와 내 행복이 부딪치게 된다면 나는 내 행복을 택할 거야. …… 그 반대로 나 자신의 작은 피해와 다른 사람의 행복이 부딪치면 나도 그 피해를 감수할 거야.(p97)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라는 대전제하에 전개되는 여자 주인공 인아의 이하 논리에 딱히 반박해낼 수 있는 말이 저에게는 선뜻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작품 전반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식의 질문을 연신 해대는 덕훈을 향해, "사랑이 꼭 한 가지 모습일 수만은 없잖아요"(p29)라 대답하는 인아의 논리는 사뭇 짜증이 날만큼 빈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작가 정여울은 <해설>을 통해 --- '덕훈에게 행복은 독점이지만, 인아에게 행복이란 타자와의 만남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라 정리해 주고 있거늘, 우리에게 있어 '사랑'이란 감정이 내포하고 있는 소유욕이란 게 독점이 아닌 확장을 통한 행복을 과연 용인할 수 있는 걸까요? '소유'라는 단어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배타성'을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확장을 통한 행복'이란 개념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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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새로운 각도에서 '불륜'을 그려내 이 작품. 그 '새로움'에는 찬탄의 박수를 보냅니다만, 이야기의 설정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아쉬움이 많습니다. 바로 --- '사랑이 무엇이길래'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성의없는 답변이 그 아쉬움의 이유이지요. 소설에서 덕훈이 인아를 끝내 떠나지 못하는, 즉 '사랑하니까'라는 이 상황에 대해 작가는 단지 '그녀와의 황홀한 섹스' 이외에는 그 어떤 이유도 제시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섹스로부터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해 중혼(重婚)이라는 천지개벽할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 설정에 공감할 수 있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기만 하네요.
'불륜'에 관한 소설 읽기를 마치고, 이 작품이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사랑이 무엇이길래'에 관한 소설들을 읽으려 뽑아 놓았습니다만, 뭔가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 (이게 진짜 온 국민을 둘로 갈라놓고, 여당과 야당이 핏대 높여 싸울만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문학의 해석'으로 다음의 소설읽기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뭐... 길어지면 꽤 길어질 수도, 재미없으면 단번에 끝내질 수도 있겠죠?
▶ 짧은 한두 마디 : 과연 작가 박현욱은 자신이 쓴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감당해낼 수 있는 걸까요?
※ 읽어본, '불륜'에 관한 소설
- 이문열 作, 「레테의 연가」
- 옌렌 커 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히가시노 게이고 作, 「새벽 거리에서」
- 파울로 코엘료 作, 「불륜」
- 다니자키 준이치로 作, 「열쇠」
- 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에 등장하는 예입니다.
- 이때의 '본질'이란 --- 이것이 <왜> 자신 인생의 목표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자들은 전통경제학이 경제성장을 오로지 물질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화폐의 근원적 기능을 '가치의 척도'와 '교환의 수단'으로 적고 있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화폐는 엄연히! 인간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음을 전통경제학이 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일 년에 한 국가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한 수치'인 국내총생산(GDP)는 분명 국가 경제의 활동 수준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고안된 것인데, 현재에는 이 <수단>이 국가 경제활동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매년 '목표 경제성장률'이라는 게 발표되지요. 심지어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도 등장하는. --;; )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열대우림의 파괴, 공해, 범죄 등을 경제성장의 대가로 치러야하는 부작용들을 (그 이름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외부효과'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제외시켜버리는 반면, 이러한 부작용들을 교정하기 위한 경제활동들 - 예를 들어 농약, 총기류 등의 제조 - 은 오히려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 상정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낳게합니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의 감상문 중.
-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약점이라 생각합니다.
- 이 소설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인아의 이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 '그건 안돼!'가 당신의 대답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이 작품의 말미에 있는 작가 정여울의 <해설>은 뭔가 억지로 '나는 이 작품을 옹호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에 맞게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더군요.
- 율리 체 作, 「어떤 소송」에 나오는 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