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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평점 :
'혼밥'이나 '혼술'같은 단어의 의미는 알고 있지만 ---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게 어떤 의미를 지닌 소설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혼을 일깨우는 우리시대 대표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며 전주문화방송이 제정한 문학상"이라는데, 당췌 「혼불」이란 소설을 읽지 않았으니, 심지어 그런 소설이 있다라는 것마저 알지 못했었으니, '최명희의 문학정신'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알 수가 없었던거죠.
「혼불」은 지나간 역사를 다룬 소설이지만 그 역사를 현재적 의미로 충만한 그것으로 되살려낸 소설이다. 한마디로 「혼불」은 인간 역사의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관계를 정확하게 읽어낸, 그래서 역사적이되 현대적인 소설인 것이다.(p315)
- <제 6회 혼불문학상 심사평> 중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알게 된 - 365개 이상의 문학상이 존재한다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그리하여 최소한 하루에 한 편 이상의 문학작품이 '문학상 수상작'의 칭호를 받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 '혼불문학상'이 지향하고 있다는 그 무엇입니다. ---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짜맞추듯 해석하는 식의 우(愚)를 피하려해도 어쩔 수 없이, 이 작품 「고요한 밤의 눈」을 향해 "인간 역사의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관계를 정확하게 읽어낸" 소설이란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냥 '읽어낸 소설'이란 표현은 심히 부족한, '잔인하다라 말하고 싶은 수준의 직설적 시선으로 읽어낸 소설'이라 말해져야 마땅할 소설이라 생각되고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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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p265)
이런 시대에 작가의 역할은?이란 질문에, 작품 속 작가인 Z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작가 박주영의 신념 뭐 이런 것이 아닐까라 추측(을 넘어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의 작가가 관찰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당연히 시대와 시대상,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 가고/내고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하지만! ---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설명/서술해 주는 것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작가라면, '뛰어난'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보고 있는 것이 아닌 대상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설명/서술해줄 수 있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고요한 밤의 눈처럼 아침이 오면 알게 되는 달라진 세상"(p309)을 대중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알려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작가 박주영은 이 작품 「고요한 밤의 눈」을 통해, 자신이 '뛰어난 작가'임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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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DNA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억의 총합입니다."(p36)
이 때의 '총합'이란 것이 단순한 summation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명확한 사실을 독자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기 위해 작가는 지난 십오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X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지요. --- "내가 읽어버린 과거의 시간 속에서 몇 시 몇 분에 무얼 했는지를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게 되지는 않았다."(p24)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p43)이란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나, 수많은 과거 선택들의 (현재까지의) '총합'인 현재의 나에 대해, 사실 현재의 나는,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좋고 비싼지는 알 수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p37)란 수준까지만 알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란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이러하지요.
그동안 나는 '왜'라는 질문 없이 살아왔다. 내게는 언제나 목적이 주어졌고, 그 목표는 '어떻게'가 중요할 뿐이었다.(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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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챕터의 시작에 기재되어 있는 알파벳 대문자가, 그 챕터의 화자라는 걸 알아챈 순간이 58페이지를 여는 시점이었었을만큼, 이 소설은 불친절합니다. 이런 류의 구성을 "모자이크 소설"(p319)이라 일컫는다거늘, 심지어 그 모자이크의 완성된 모습이란 것마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끝내고서도 저에겐 명확하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대신!!! ---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혹은 이해했다 말하면서도 자꾸만 틀린 답을 써내기만 하는 학생을 위한, 심지어 이해했다 말하고 한 문제에 정답을 써내었음에도 이를 약간만 비틀어 문제를 내면 여지없이 틀린 답을 써내는 학생을 위한 선생님의 집요한 반복학습마냥, 작가 박주영은 작품 전체를 통해, 그리고 여러 명의 화자들을 통해 하나의 사실을 끊임 없이 반복해 서술해주는 인내를 보여주고 있지요.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미지의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누군가'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진부한 해석이란 힐난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냥 철없이 단순하기만 한 도식이란 비난을 받아야할 이유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작가가 이토록 반복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그것은 바로,
부자는 과거를 수집하고 중산층은 미래를 계획하고 빈민은 현재를 걱정한다.(p147)
작가가 내세우고 있는 '스파이'란 직업이, 그처럼 특별한 누군가를 의미하는 게 아닌,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 가고/내고 있는, 스스로를 평범하다라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일 것이란 ('옳은 해석'이라 믿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p145)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저 "예전부터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라는 것을 믿으면 이 삶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진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왜라는 질문 없이도 살아가게 된다. 원래부터 사람은, 혹은 세상은 그렇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p126)라 생각하여야하는 '스파이'처럼,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의 착각을 심어줌으로써,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란 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무시 받는다고 부당하다고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고 사는 세상"(p77)을 만들어내었다라 믿게한다라는 겁니다.
나는 결국 실패한 것인가. 나 자신으로서도, 스파이로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엇이 우리를 스파이로 살게 하는 것일까.(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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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러한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의 목표는 거의 완벽하게 이행되었습니다. 물론! --- 민중들로 하여금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를 믿게"(p83)하려는 신자유주의가 "십 년 전에도 세상이 아주 살기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빠지니 알겠다.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p96)와 같은 위험(!)한 발상을 근본적으로 지워내지는 못했으나, 그 점만 제외하면 완벽하다라 말해질 수 있는 성취를 이루어내었죠.
"가장 덜 양심적이고 덜 진지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서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군가는 먹고 살기 바빠서, 누군가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다만 지켜보고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고 만다."(pp45-46) …… "문제가 있을 때는 시비를 걸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아예 싸울 줄 모를뿐더러 비록 이번에 싸워서 승리하지는 못해도 승리에 한걸을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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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서,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共著,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중 p31, 메디치 刊, 2016.
"혁명은 죽은 단어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몰랐으므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혁명의 과거는 판타지 역사 소설이 되었고 혁명의 미래는 허무맹랑한 미래과학 소설이 되었다"(p143)라 말하는 '신자유주의 하 자본주의'를 살아가고/내고있는 Z와 같은 인물이 있는 반면 --- "혁명은 사람들의 기억과 핏속, 심장에 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세탁할 수도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의 심장을 바꿀 수도 없다. 피는 흐르고 기억은 숨고 심장은 뛴다. 어디선가 여전히"(p188)라 인식하고 있는 D도 등장하고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묻습니다.
"다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올바른 소수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게 촛불, 혹은 죽음 뿐인게 정상입니까?"(pp206-207)
작가는 답합니다.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출까.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 혼자만 죽게 될 뿐이다 … 억울하지만 더 억울해지기는 싫다 … 어떤 방법으로소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심지어 목숨을 걸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악의 악순환을 바꾸어야 한다. 시작은 나 하나로도 세상은 바뀐다는 것이다."(p261)
그리고,
작가는 조언해 줍니다.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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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줄거리로 표현되어서는,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할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 읽어갈 때보다, 다 읽고났을 때보다, 다 읽은 후 읽어가며 적어놓았던 부분들을 다시 읽어봤을 때보다, 그것들을 정리해 가며 감상문의 얼개를 잡아갔을 때보다, 감상문을 써가는 와중보다, 감상문의 마지막을 쓰고 있는 지금보다, 다 쓰여진 감상문을 읽을 얼마 후(後)보다, 이 세상을 변하게 하지 못할 저이겠지만, 언젠가 만약 세상이 변하여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변한 세상에서도 이 소설이 읽혀질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지금은 소설이 아닌 그 무엇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설이다."(p322)
란 작가의 바람(願)과 확신은 그 때서야 실현될 것이며, 이 바람과 확신이 부디 실현되어진 과거완료의 시제가 될 수 있길, 저 역시 바래어 봅니다.
밖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현상 이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실체가 있다고 의심한다. 사람 위의 사람, 세상 위의 세상, 뉴스에 나오는 모든 기사가, 권력이 말하는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정보는 가공하는 조직의 구미에 맞게 교묘하게 재편집되거나 주장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해 재배치된다. 그 과정에서 사실이란 왜곡하거나 조작하기 위한 원재료에 불과하다.(p290)
- "우리는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결코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p93) --- '스파이'란 직업에 대한 이같은 묘사는 어쩌면 '뛰어난 작가'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변방인, 주변인, 소외된 자, 실패자, 루저, 뭐라 불러도 좋다. 그 모든 구십 퍼센트를 모아 대중이라고 부르자."(p173) --- 이 작품에서 의미되고 있는 바의 '대중'은 사뭇 패배주의적이라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패배주의적 시각이 사실이라면, 그건 더 이상 '패배주의적'이라 불리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겠죠. 바로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섬뜩하게 읽혀집니다.
- 이처럼 어떠한 개념 - 예를 들어, 이성(理性)이라든가 심지어 죽음같은 것까지도 의인화시키는 주제 사라마구 처럼 - 이 의인화되어 있는 것이라 이 작품을 바라보게 되면, X,Y,Z,B 등은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하의 면면들이라 해석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