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 】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입니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문구를 인용하자면 "능력주의의 폭정"(p353)으로 번역될 수 있겠죠. 그냥 쉽게 옮기라 한다면 '잘난 놈들 전성시대'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인 '공정하다는 착각'은 (어찌보면 역자가 선택한 고차원적 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 - 문재인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표현했던 '공정한 과정'이란 문구의 '공정' - 를 의식한 마케팅의 산물일 것이란 의혹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굳이, 진짜 굳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공정'이란 단어와 취임사의 '공정'을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원제와 한국판 제목, 그리고 저의 의견(?)을 한데 엮어 보자면,
【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센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들을 제시하며,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279, 와이즈베리, 2014.
자신은 세 번째 방식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가장 선호한다 밝히고 있지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최종적으로 센델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잘난 놈들의 전성시대를 가져온 '능력주의'는 현재 폭정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폭정인 줄도 모른 채 '공정하다'라 착각하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지요.
【 운 VS 실력 】
"빨간색 구슬 5개, 검은색 구슬 4개, 노란색 구슬 3개, 초록색 구슬 2개, 파란색 구슬 1개를 담고 있는 항아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눈을 감고 무작위로 하나의 구슬을 뽑는데 검은색 구슬이 뽑혔다고 해보자. 뽑은 구슬을 항아리에 다시 집어넣는데 이때 같은 색의 검은색 구슬을 하나 더 집어넣는다. 이제 항아리에 들어 있는 다른 구슬의 숫자는 변함이 없지만 검은색 구슬은 5개로 1개가 더 늘어났다. … 처음에 어떤 색의 구슬이 뽑힐 확률은 항아리에 들어 있는 그 구슬 수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노란색 구슬이 뽑힐 확률은 20% (15개 중에 3개)다. … 만약 처음에 노란색 구슬이 뽑히면 다음에 노란색 구슬이 뽑힐 확률은 25%(16개 중에 4개)로 올라간다. 최초의 구슬 분포를 보면 특정 색 구슬이 더 선택 우위를 가지지만, 그럼에도 최종 승자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 구슬 개수를 실력으로 생각해보자. 실력이 제일 좋은 구슬이 우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실력이 승리를 결정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운은 초기 분포를 놀라울 정도로 뒤섞어 버린다. 한편 어느 한 색이 일단 충분히 앞서게 되면 그 게임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선호적 연결은 결과를 고착시켜버린다. 이 구슬 모형은 현실 세계에 비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경로 의존적 상황에서 성공이 실력과 얼마나 유리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 마이클 모부신, 「운과 실력의 성공 방정식」중 pp166~167, 에프엔미디어, 2019.
위 인용구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의) '성공'이라는 결과를 낳는 요인이 오로지 '개인의 실력'만은 아니라는 점, 운(luck) 또한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순화해서) 실력과 운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성공'이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과정은 (지극히) 경로 의존적(path-dependent)이기에, 그 시작점(initial point)에서의 (앞서거나 뒤쳐져 있는) 위치만으로는 결과를 미리 단언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화투판에서 타짜가 이길지 초짜가 이길지는, 물론 실력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크겠지만 어쨌든 --- 패를 까봐야 알 수 있다라는 것이죠. 들고 있는 패의 좋고 나쁨이 극명하다면, 좋은 패를 쥐고 있는 초짜가 형편없는 패의 타짜를 최소한 해당 판에서는 이길 수도 있으니까요. (반면, 수학자가 바라보는 '운의 작용'은 조금 다릅니다. '알파고'가 그 좋은 실례이지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 전도서 9장 11절 ~ 12절 (p79)
위 인용구 첫 문장의 영문은 'I have seen something else under the sun'입니다. 한국어로는 '돌이켜'로 번역되어 있는 부분이 사실은 '또 다른 면'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책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앞선 10절에서 하나님은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이라 명하고 계십니다. 즉 --- '때와 우연'에 의해 빠른 경주자가 뒤늦게 도착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해 너의 일을 하라'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 뜻인 겁니다.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Time and chance happen to them all"란 마지막 구절은, 작게 보면 '행운/불운의 발생이 무작위'란 것이고, 넓게 보면 누구나에게 주어진다라는 걸 의미할 뿐이죠. (센델 교수는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p79)라는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위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분포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운'이라는 요인은 (적어도 통계적으로는 반드시) 특정한 평균 수준으로 수렴되게 됩니다. 초짜에게 어떻게 쳐도 도무지 질 수 없는 패가 쥐어지는 경우는 말 그대로 '행운 중의 행운'일 뿐, 결국엔 타짜에게 수중의 돈을 다 털리게 되죠. 그러하기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운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실력이 향상될 뿐이다."
- 마이클 모부신, 위의 책 p40.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운'을 기대하며 앉아있기 보다는,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즉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쌓음으로써 나의 '평균 자체'를 높이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위 전도서의 구절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겠구요.
【 능력주의(meritocracy)의 명(明)과 암(暗) 】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준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p105)
노력만 하면 그 노력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그 노력의 (경제적) 대가는 온전히 너의 것이다라 말하는 능력주의는 효율성, 공정성 그리고 야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출생 이전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확정된 '신분/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신분제 사회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성공담에서 사회적인, 역사적인 운(運)은 대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그들의 인간 승리만이 비춰진다."
- 이건범,「파산」중 p13, 피어나, 2014.
이 책의 중점은 능력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논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센델 교수는 이 '잘난 놈들 전성시대'에 살고 있는 '잘난 놈들'의 '잘남'이 과연 (정당하게 얻어진, 그리고 온당하게 평가 받을 만한 것인가라는 의미에서) 공정한 것인가와 '잘나지 못한 놈들'과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지요.
#1. 정당성
센델 교수는 본인의 노력'만으로' 성공하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제 임의대로 명명을 해보자면) '선천적/개인적 운'과 '후천적/사회적 운'의 이유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본인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p37)이라 묻고 있지요.
① 선천적/개인적 운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제 얼굴이 원빈의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얼굴로 태어난 것이며, 원빈 또한 그 얼굴로 그렇게 태어난 거니까요. 신장 170cm의 한국 선수가 100m 경주에서 195cm의 우사인 볼트를 앞설 수는 없는 건, 그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리 길이와 운동 신경에서 생물학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결코 제가 현재의 얼굴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한국 육상 선수가 해당 신체 조건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건 그냥 "유전자 복권 당첨 결과"(p239)일 뿐이죠. 우사인 볼트에게 주어진 선천적 행운입니다. (이는 우사인 볼트의 신체적 우위를 강조하는 것이지, 그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억만장자라는 상황을 그의 자녀들이 미리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이건 그저 신의 선택이었을 뿐이죠. 이같은 개인적 행운은 오로지 가정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 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 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 권여선, 「레가토」중 p390, 창비, 2012.
태어나보니 대한민국 땅이고, 태어나보니 1960년이었으며, 태어나보니 여자였던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삶의 시작점으로 인해, 20대의 시작에 '1980년 광주'를 만나게 되었죠. (넓게 보아) 그녀에게 주어진 개인적 불운입니다. 그녀 스스로 1980년에 스무 살이 되지 않겠다 노력할 수 없는 것이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던 그녀가 제 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1980년의 광주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센델 교수가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선천적/개인적 운'은 ---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빌 게이츠 회장이었다라는 개인적 환경이 그 자녀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은 타인과 동일한 노력을 했을 때 훨씬 더 높은/효율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라면, 그 결과가 오로지 그 자녀들의 노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좀 아쉽죠.
② 후천적/사회적 운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 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가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라면 어떤가. 팔씨름 세계 챔피언은 르브론의 농구 능력만큼 귀한 재능을 팔씨름이란 분야에서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의 팔을 테이블에 내리꽂는 것 보고자 돈을 내려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pp200~201)
요약해보자면, 특정한 측면에서 '잘난'놈이 '잘났다'라는 평가를 받을 때, 그 평가의 주체는 본인이 아닌 사회의 선택이므로, 이 역시 온전히 본인만의 몫이라 할 수 없다라는 논지입니다. 개인의 성공/실패가 후천적/사회적 운에 달려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저는 센델 교수의 위 논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원빈이 현재 대한민국의 일반적/사회적 평가 기준에 따르자면 저의 얼굴보다 훨씬 '잘생긴'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사회적 평가가 곧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원빈이 태어났기에, (적어도 얼굴값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점이 공정하지 않다라 말해질 수 있겠으나, 그 얼굴의 원빈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점, 즉 --- 자신의 선천적 재능을 가장 비싼 값으로 보상해주는 분야를 찾아내었다라는 점은 분명 그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보상이, 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만약 이루어졌다면) 대학 교수 혹은 지금의 회사원에 주어지는 보상보다 크다라는 것에 대해 (적어도 제 생각은) 불공정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센델 교수가 예로 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역시, 사회적 수요가 많은 농구에 적합한 재능을 더 발전시킨 그의 노력, 더 나아가 --- 르브론 제임스가 만약 농구와 팔씨름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었는데, 그 중에서 자신의 직업으로 농구선수를 선택했다라면, 위 인용문에서 보여지는 센델 교수의 예는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센델 교수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p204)을 갖고 있다라는 견해를 펼치고 있습니다.
#2. 개인의 책임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p300)
능력주의는 결국 과거 내 삶 속에서 있었던 (나 스스로의)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란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공한 자는 온전한 자부심을 누릴 수 있지요. 그와는 반대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현재의 나를 실패하게 만들었다라면 그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지는 않아도 되게 됩니다. 허나, 능력주의는 그같은 운조차 본인의 책임이라는 뉘앙스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pp68~71)
센델 교수는, 본인의 성공이 오로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기에 그 과실을 온전히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서, 실패의 책임을 오로지 해당 개인에게 묻는 것 역시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p67)
물론, 그가 '보편적(universal)'인 측면에서 실패 책임의 개인 전가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섣부른 오독(誤讀)은 '투자의 결과는 전적으로 투자자의 책임'이라는 부분에서까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우(愚)를 낳을 수 있기에, 보다 세심한 서술이 있었어야 하지 않나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점은 --- 능력주의가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점은 외려, 보다 구조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는 측면입니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p161)
센델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 능력주의는 결과에 대한 성공/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기에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화살을 역시 각 개인 차원으로 돌리게 된다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지요. 기득권층에게는 일견 희소식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능력주의의 약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 이유는 능력주의가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쇠퇴는 궁극적으로는 불평등한 분배를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왕휘,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부활 아닌 불평등한 자본에 고민을 요구한 것이다" 중, DBR 167호, 2014.12.
자신들이 기득권이 오로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정당성을 갖는다라며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shield를 치거나 하는 쪽 모두가) 능력주의를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해왔던 주장의 효용이 더 이상은 약발을 가지지 못하게 되겠죠. 또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인 까닭은 능력주의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질 때, 힘있는 이가 힘없는 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움직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류동민 · 주상영,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중 p73, 한길사, 2015.
위와 같은 능력주의가 지닌 (최소한의) 장점 역시 "이러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자며 판을 짤 수 있는 힘"을 지닌 기득권층에게 요용될 수 있는 여지를 안겨주게도 되는 겁니다. 이래저래, 능력주의를 지지하자니 이런 문제가, 또 배격하자니 저런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걱정에 대해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니냐는 지적은 감내하겠습니다. 어쨌든,
"'내 인생의 CEO가 되라?' ……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CEO적 인생을 강조하는 것은 누가 무슨 일을 하건 로빈슨 크루소처럼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최선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 (그러나) 우리의 삶, 우리의 '일'을 혼자서 정교하게 기획하고 기획한 바대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최선의 상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환상일 줄 모르고 주장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다.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수는 자신의 '프로젝트'의 성패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자기 책임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 내가 너를 사랑함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것, 내가 비정규직인 것은 내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도록 일해도 한달 수입이 백만 원밖에 안되는 것는 내 '생산성'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잠을 줄이고 노력하여 부족한 내 사랑, 부족한 내 '스펙', 부족한 내 생산선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다그치는 것이 바로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주문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웅진지식하우스, 2013.
각 개인을 그 한계까지 쥐어짜내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며, 그 목표가 달성되지 못한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돌리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 조직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독려하지만 정작 성공의 과실은 조직이 가져가고, 실패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리는 구조의 악용을 통해, 청년층의 실업문제가 더 이상 국가의 책임/문제가 아닌 청년들 개인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논리에 대해서만큼은 보다 명확한 지적이 필요하지 않았나라는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3. 사회적 존중
"민주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마이클 센델, 위의 책 pp52-53.
이 책「공정하다는 착각」역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으로 정의(define)되는 정의(justice)의 개념을 지지하고 있는 센델 교수는 예의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에 대하여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있지요.
위에서 언급한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어두운 면 - 정당성, 개인의 책임 - 을 한데 묶어 rough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p37)
위 인용문의 내용이 왜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센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줍니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운명에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p53)
앞서도 언급했듯,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을 정의(justice)에 대한 가장 올바른 관점으로 보고 있는 센델 교수에게는 능력주의로 인해 발생되는 오만과 자괴/불만이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센델 교수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가 능력주의의 배격이 아닌, 그 폐해를 극복하자는 데 있다라 이해하는 저에겐, 바로 이 부분 - '사회적 연대의 강화를 통한 공동선의 추구'가 역시 이 책의 결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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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이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①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②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 그러나 ③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pp352~353)
「정의란 무엇인가」가 정말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센델 교수가 지지하는 정의(justice)의 개념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라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두 책에 대한 저의 의견을 표하라면 --- ①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인기가 많은가, ②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는가, ③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노래를 잘하는가와 같은, 굳이 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도 되는 주장을 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인기가 많은 가수가 가장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겠으나, 가창력이 가장 좋은 가수는 아닐 수도 있듯, 또한 인기와 가창력은 좋지 않으나 행사를 많이 뛰어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는 가수도 있을 수 있겠듯)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경제학을 전공한 저에게는 마음 속에 진심으로 와닿는 문제 제기였다고는 할 수 없네요.
【 부록 】
이 책 속에는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들의 주장과 합치되는 부분과 반대되는 주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철학자인 센델 교수가 보는 민주주의와 경제학자인 가렛 존스 교수가 바라보는 민주주의의 관점 및 현상에 대한 진단의 차이가 대표적이지요.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pp164~165)
센델 교수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 가렛 존스 교수는 「10% 적은 민주주의」에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의 개념을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에 부합되는 통계 수치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의 견해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앞서 든 가수의 예와 같이, '가수'라는 직업의 어떤 면에 보다 집중하여 살펴보느냐의 차이인 거죠.
지극히 미국적 상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 내용들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낳는 일 단초가 되었었듯, 초단기적으로는 ('능력주의'가 아닌) 현 정권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반발이 이후의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겠는, 뭐 그런 류의 분석도 누군가는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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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 … 이것이 난맥인 까닭은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왜 그것을 선택하는지 우리 스스로도 반드시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도록 사회가 바라기 때문일까? 달리 말해, 우리는 사회적 기대의 대리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일까?"
- 미히르 데사이,「금융의 모험」중 p173, 부키,2018.
센델 교수의 주장과는 별개로, 저와 당신 각자가 설정해 놓은 삶의 목표(란 게 있기는 하다면)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또한
"우리가 성공이라 여겼던 것이 성공이 아니었듯, 우리가 실패라 여겼던 것이 실패만은 아니란 점"
- 이건범, 위의 책 p6.
그 목표를 현재 어느 정도나 달성해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과연 제대로 되어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된 독서, 그리고 감상문 쓰기였었습니다. 2021년의 첫 독서는, 책의 내용에 더해 더 많은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해준, (감상문 쓰기는 매우 힘들었으나) 좋은 출발로 시작합니다. ^^
■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한국어로 된 문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정성이 부족한 번역이란 비판은 차마 감출 수 없네요. --- "입단 탈락에 따르는 실망감을 추스르는 과정('101번 불합격'이라 불리는)에 등록하기도 한다."(p284)에서 '101번 불합격'이란 문구는 101번의 불합격을 당한 이들이 등록하는 과정이란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미국 학과목에서 '101'이 붙는 건 개론 강의란 의미죠. 즉, 그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 탈락의 쓴 맛을 본 자들에게 '불합격'이란 개념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일종의 비유일진데, 그걸 저렇게 번역해 놓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