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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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으로 말랑말랑한 제목의 책입니다. 책의 서술 또한 제목만큼이나 말랑말랑하여 술술술 읽혀집니다. 허나, 담겨져 있는 내용까지 말랑말랑할꺼란 예단은 금물! ---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라는 말랑말랑한 제목이 외려 불만스럽게도 느껴지네요.


#2.

13개로 나뉘어진 part 속에 총 75가지의 심리법칙/효과를 담고 있습니다. 오직 심리학의 내용들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과 관련된 part도 있고, 경영학 관련 서적들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여 시작부터 끝까지 흥미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읽어낼 수 있더군요. 이 책, 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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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야기는 딱 두세 가지밖에 없다. 그 이야기들이 마치 전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 양 강렬하게 계속 되풀이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다섯 가지 음조로 똑같이 노래해 왔던 시골의 종달새처럼 말이다."


- 미히르 데사이, 「금융의 모험」중 p315, 부키, 2018.


새로운 책을 만나고, 그 내용을 이해할수록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뭐, 실제로 두세 가지밖에 없지야 않겠지만 인간사(人間)란 것이 결국엔 '거기서 거기'라는 표현까지를 부인할 수는 없다는거죠. 사고(思考)의 범위나 생활의 모습이 예의 '거기서 거기'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저에게 --- '거기서 거기'인 인간의 이야기는 사실 '거기서 거기'인 한 인간 혹은 인간 관계 속의 심리 작용들로부터 비롯된다 할 수 있겠고, 그 '거기서 거기'를 75개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건,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심리 법칙들이 (적어도 저는 확실하게 포함되어 있는) 우리들의 일상 전반을 큰 틀에서 (거의) 모두 설명해주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에 담겨 있는 심리법칙을 읽으며, 너무다 자연스럽게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들의 내용이 떠오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었죠. 예를 들어, 


「사회심리학」을 쓴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이기적 편향 Self-serving bias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자아와 관련한 정보를 만들어낼 때 일종의 잠재적 편견이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는 쉽게 벗어던지면서 성공의 찬사는 달게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고한다. 대부분은 타인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기 미화 감정은 자신의 훌륭한 면에 스스로 도취하게 하고, 어두운 면은 간간이 흘려넘기게 한다. 성공하면 내 실력 덕분이고, 실패하거나 잘못되면 세상이나 남 때문이다.(p23) 


이 부분에선, 바로 직전에 읽었던 「멀티팩터」, 그리고 「운과 성공의 실력방정식」, 더 나아가 「파산」등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찾아보았더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 "목표가 미래지향적이고 도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더욱 효과적"(p100)이란 내용의 '로크 법칙'에선 OKR(Objective & Key Results)에서 강조했던 목표 수준 설정1의 이론적 배경을, "일은 흥미를 위한 것이고 임금을 받는 것은 단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p301)하는 것이 조직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왜/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내용은 배리 슈워츠의 「우리는 왜 일하는가」속 내용2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압권은,


디드로 효과 … 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더 많이 얻을수록 만족하지 않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즉 어떤 것을 얻지 못할 때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일단 얻으면 그 욕심은 끝이 없어진다. … 끝없이 이어지는 욕망들은 많은 사람을 디드로 효과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현대인들은 매일 피곤해한다. 몸에 짊어지는 무거운 짐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에 필요 없는 것들을 포기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많은 욕망과 속박을 마음속에 안고 있어서이다.  디드로 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과한 욕망을 억제하고 줄이는 것이다.(pp327~329) 


제가 배웠던 주류 경제학의 내용과는 쉬이 합치되지 않는 '디드로 효과'를 꼽게 됩니다. 물론 --- 역사학자3, 경제학자4 그리고 심리학자5가 쓴 책들에서 이미 만나보았던 질문과 내용입니다만, 그 모두가 '디드로 효과'라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로 요약될 수 있다라는 걸 알게된 순간, 뭔가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저의 지식이 완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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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역사의 토픽들만이 아닌, 예의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문학작품 속 이야기들 또한 '거기서 거기'라는 범위 내에서의 변주(variation)임을, 이 책은 알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루시퍼 효과 Lucipher effect'6를 통해서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투명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금지된 과일일수록 더 달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숨겨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할수록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금지된 일일수록 사람들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금지령을 깨뜨린다.(p234)


('금지된 과일 효과 Forbidden fruit effect'를 통해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텍사스 존슨 사건'의 예라고 생각됩니다만, 저에게는 외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를 사랑했던 건 맞지만, 죽음도 불사하기까지 된 연유는 바로 그 둘 간의 사랑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사랑에의 허용 또는 적당한 수준의 반대만 있었었다면 둘 간의 사랑이 중간에 깨졌을지도 모른다라는 추론도 큰 무리없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이를 더 넓혀보자면, 


금지된 과일 효과는 두 가지 심리를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반항심'이고 다른 하나는 '호기심'이다. … 사람들은 금지된 일을 만나면 먼저 호기심을 갖고 '이 일이 왜 금지되었을까?', '진짜 우리에게 위험한 일이 맞을까?' 생각한다. 만약 이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반항심을 품고 '금지'된 맛을 직접 맛보려고 한다.(p235)


위 인용문은 곧바로 에덴 동산에서 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브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성경의 구절 상으로만 보자면 이브에게 '반항심'이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으나, 어쨌든 뱀의 꾀임7으로부터 자신의 '호기심'을 지켜낼 수는 없었던 것이죠. 허나, --- 좀 더 현대적인 예를 찾아본다면 그건 단연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음'8으로 정의되는) '불륜'이 되어야한다 생각합니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점을 정확하게 보여주었죠. 


"우리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넘기 전에는 그 경계선에 높은 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넘어 버리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벽은 스스로 만들어 낸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날 밤의 일이 한때의 기분에 휩쓸린 결과라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 경계선 너머에 눈알이 핑핑 돌 만큼 감미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영원히 그것을 넘지 않을 수 있을까. 경계선 위에 벽 따위는 없고 한 걸음만 가볍게 내디디면 된다는 것을 알아 버린 지금, 그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 불륜은 쾌락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일단 시작돼 버리면 그렇게 미적지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옥이다. 감미로운 지옥. 여기서 도망치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속의 악마9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 「새벽 거리에서」중 pp80~88, 재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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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투기 행위의 관건이 투자 대상의 가치를 예측하는 게 아니라 자신보다 더 큰 바보가 있는지 판단하는 데 있다.(p264)


경제학은 '투자'와 '투기'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10 대략 '예측 가능한 수준의 이윤을 창출했느냐' 정도의 두루뭉술한 답변만 내놓고 있지요. 그럼 점에서 위 인용문은 (현실에서 법적인 적용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예측 가능한 수준의 이윤 창출'이라는 기준보다는 보다 간결한 이해를 안겨 줍니다. 또한, 책의 pp226~233에서 설명되고 있는 '문간에 발 들여놓기 효과'와 '문간에 머리 들여놓기 효과'는 지금 제가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도 응용될 수 있겠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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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느낌이다. 얼마나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는 오직 행복에 대한 우리의 민감도에 달려 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항상 즐겁고, 마음으로 느낄 줄만 알면 행복은 반드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일깨워 준다.(p325)


보다 젊었을 시절에 이 글귀를 읽었었다면 한낱 책 속의 경구 정도로만 치부했었을 겁니다. 허나 --- 삶의 up and down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50대 초반의 가장으로서 읽어 본 위 인용문은, 그저 '책 속의 보기 좋은 글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라는 지극히 말랑말랑한 이 책의 제목은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을 읽고 제가 '행복해졌다'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비논리적인 직감을 과대평가한다. 직감적으로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p48)


올 한해, 제가 공부해보고자 하는 '행동경제학'이 대체 왜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단초를 얻었다는 것 또한, 이 책으로부터의 부가적 소득이 아닐까 싶네요. 






※ 함께 읽으며 좋을 책들 : 빌게이츠는 왜 과학책을 읽을까」, 「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 「어쩌다 한국인








  1. "목표들은 수월한 것과 어려운 것들로 나뉘는 게 아니에요. 그것들은 모두 도전적이고 어려운 목표들이어야 해요. 목표들을 달성하기가 어려워야 하죠.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냥 어려운 정도요. 불가능한 목표들은 절망감을 주거든요. 어려운 목표들은 사기를 북돋고요." - 크리스티나 워드케, 「구글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OKR」중 pp113~114, 한국경제신문, 2018.
  2. "직원 감축, 업무 재촉, 엄격한 성과 감시 등 경쟁 압박에 대한 자동반사 반응은 직원들의 효율성과 만족감을 떨어뜨리면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 대조적으로, 일의 특성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면 선순환이라 부를 만한 것이 창조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그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그들은 일하러 가는 것 자체를 행복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할수록 더욱 유능하고 똑똑하게 일한다."(p63) …… "왜 우리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진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업무환경을 설계하지 않았는가? 이제까지 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왔다.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은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데올로기 탓이다. 그러나 또한 너무나 편협한 생산효율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p167) - 배리 슈워츠, 「우리는 왜 일하는가」중, 문학동네, 2018.
  3. "진화적 관점의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p142) …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p147) …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은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p152) …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p136)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김영사, 2015.
  4.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중세 시대 때 공동토지에서 일했던 평범한 농부 한 사람이 연간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래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 데이비드 보일 · 앤드류 심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중, 사군자, 2012.
  5. "현대 사회가 이룩한 쾌거는 달면서도 쓰다. 인생의 구석구석에서 그렇게 달면서도 쓴맛이 나는 까닭은 뭐니뭐니해도 선택 과잉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으면 마음이 괴로워진다."(p256) … "선택안이 늘어나면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만큼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택이 축복에서 짐으로 전락하는 이유 중 하나다."(p57)​ … "온갖 것을 선택할 수 있으니 우리는 그냥 '적당히 좋은' 것에 만족할 수가 없다."(p245) - 베리 슈워츠, 「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 예담, 2015.
  6. "이 세상에는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이는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선과 악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잠재되어 상황의 변화와 필요에 따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회질서가 바로잡힌 환경에서 '악한 본성'은 깊숙이 감춰지지만, '스탠퍼도 교도소'처럼 법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나면 권력을 쥔 '루시퍼'처럼 언제든지 밖으로 튀어나와 좋은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루시퍼 효과 Lucipher effect'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덕과 사회윤리는 항상 선과 악을 구분 지으며 악한 사람을 경계하고 선량하게 사는 것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스탠퍼도 교도소 실험은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이 원래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단지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나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p196
  7. "You will not certainly die. the serpent said to the woman. "For God knows that when you eat from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세기 32 : 4~5)
  8. 네이버 국어사전.
  9. '악마'라는 단어에 대한 부연은 이문열의 다음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죠. : "배가 난파했을 때, 꼭 한 사람만이 의지할 수 있는 통나무에 두 사람이 헤엄쳐 간 경우... 그때 둘 중 하나가 자기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밀쳐 결국 그가 죽게 되더라도 그 행위는 정당 방위가 된다는 거야. … 누가 먼저 그 통나무를 잡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 이문열, 「레테의 연가」중, 아침나라, 2001
  10. "투자와 투기 여부는 자산매입자의 목적에 따라 결정되므로, 개별 부동산이나 주식을 매입하는 개별 소비자나 기업의 마음속에 있는 매입목적을 제3자가 구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전매이득을 위해 시골에 땅을 구입하면서 은퇴 후 집짓고 살기 위해서 구입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진위여부를 제3자가 명확하게 구별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입할 때는 진정 은퇴 후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중도에 마음이 바뀌거나 또는 보다 좋은 집터를 발견해서 기존의 땅을 전매할 수도 있는 것이니 어느 사람의 부동산매입이 투자인지 투기인지는 정말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손정식, <자유기업원> 칼럼 '투자와 투기에 대한 오해' 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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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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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 】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입니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문구를 인용하자면 "능력주의의 폭정"(p353)으로 번역될 수 있겠죠. 그냥 쉽게 옮기라 한다면 '잘난 놈들 전성시대'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인 '공정하다는 착각'은 (어찌보면 역자가 선택한 고차원적 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 - 문재인 대통령께서 취임사에서 표현했던 '공정한 과정'이란 문구의 '공정' - 를 의식한 마케팅의 산물일 것이란 의혹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굳이, 진짜 굳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공정'이란 단어와 취임사의 '공정'을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원제와 한국판 제목, 그리고 저의 의견(?)을 한데 엮어 보자면,



【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센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했습니다.1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들을 제시하며,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279, 와이즈베리, 2014.


자신은 세 번째 방식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가장 선호한다 밝히고 있지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최종적으로 센델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잘난 놈들의 전성시대를 가져온 '능력주의'는 현재 폭정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폭정인 줄도 모른 채 '공정하다'라 착각하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지요. 



【 운 VS 실력 】 


"빨간색 구슬 5개, 검은색 구슬 4개, 노란색 구슬 3개, 초록색 구슬 2개, 파란색 구슬 1개를 담고 있는 항아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눈을 감고 무작위로 하나의 구슬을 뽑는데 검은색 구슬이 뽑혔다고 해보자. 뽑은 구슬을 항아리에 다시 집어넣는데 이때 같은 색의 검은색 구슬을 하나 더 집어넣는다. 이제 항아리에 들어 있는 다른 구슬의 숫자는 변함이 없지만 검은색 구슬은 5개로 1개가 더 늘어났다. … 처음에 어떤 색의 구슬이 뽑힐 확률은 항아리에 들어 있는 그 구슬 수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노란색 구슬이 뽑힐 확률은 20% (15개 중에 3개)다. … 만약 처음에 노란색 구슬이 뽑히면 다음에 노란색 구슬이 뽑힐 확률은 25%(16개 중에 4개)로 올라간다. 최초의 구슬 분포를 보면 특정 색 구슬이 더 선택 우위를 가지지만, 그럼에도 최종 승자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 구슬 개수를 실력으로 생각해보자. 실력이 제일 좋은 구슬이 우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실력이 승리를 결정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운은 초기 분포를 놀라울 정도로 뒤섞어 버린다. 한편 어느 한 색이 일단 충분히 앞서게 되면 그 게임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선호적 연결은 결과를 고착시켜버린다. 이 구슬 모형은 현실 세계에 비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경로 의존적 상황에서 성공이 실력과 얼마나 유리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 마이클 모부신, 「운과 실력의 성공 방정식」중 pp166~167, 에프엔미디어, 2019.


위 인용구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의) '성공'이라는 결과를 낳는 요인이 오로지 '개인의 실력'만은 아니라는 점, 운(luck) 또한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순화해서) 실력과 운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성공'이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과정은 (지극히) 경로 의존적(path-dependent)이기에, 그 시작점(initial point)에서의 (앞서거나 뒤쳐져 있는) 위치만으로는 결과를 미리 단언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화투판에서 타짜가 이길지 초짜가 이길지는, 물론 실력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크겠지만 어쨌든 --- 패를 까봐야 알 수 있다라는 것이죠. 들고 있는 패의 좋고 나쁨이 극명하다면, 좋은 패를 쥐고 있는 초짜가 형편없는 패의 타짜를 최소한 해당 판에서는 이길 수도 있으니까요.2 (반면, 수학자가 바라보는 '운의 작용'은 조금 다릅니다.3 '알파고'가 그 좋은 실례이지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 전도서 9장 11절 ~ 12절 (p79)


위 인용구 첫 문장의 영문은 'I have seen something else under the sun'입니다. 한국어로는 '돌이켜'로 번역되어 있는 부분이 사실은 '또 다른 면'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책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앞선 10절에서 하나님은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이라 명하고 계십니다. 즉 --- '때와 우연'에 의해 빠른 경주자가 뒤늦게 도착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해 너의 일을 하라'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 뜻인 겁니다.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Time and chance happen to them all"란 마지막 구절은, 작게 보면 '행운/불운의 발생이 무작위'란 것이고, 넓게 보면 누구나에게 주어진다라는 걸 의미할 뿐이죠. (센델 교수는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p79)라는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위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분포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운'이라는 요인은 (적어도 통계적으로는 반드시) 특정한 평균 수준으로 수렴되게 됩니다. 초짜에게 어떻게 쳐도 도무지 질 수 없는 패가 쥐어지는 경우는 말 그대로 '행운 중의 행운'일 뿐, 결국엔 타짜에게 수중의 돈을 다 털리게 되죠. 그러하기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운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실력이 향상될 뿐이다."


- 마이클 모부신, 위의 책 p40.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운'을 기대하며 앉아있기 보다는,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즉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쌓음으로써 나의 '평균 자체'를 높이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4 위 전도서의 구절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겠구요.



【 능력주의(meritocracy)의 명()과 암() 】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5 …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준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p105)


노력만 하면 그 노력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그 노력의 (경제적) 대가는 온전히 너의 것이다라 말하는 능력주의는 효율성, 공정성 그리고 야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출생 이전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확정된 '신분/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신분제 사회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입니다.6 그러나,


"성공담에서 사회적인, 역사적인 운()은 대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그들의 인간 승리만이 비춰진다."


- 이건범,「파산」중 p13, 피어나, 2014.


이 책의 중점은 능력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논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센델 교수는 이 '잘난 놈들 전성시대'에 살고 있는 '잘난 놈들'의 '잘남'이 과연 (정당하게 얻어진, 그리고 온당하게 평가 받을 만한 것인가라는 의미에서) 공정한 것인가와 '잘나지 못한 놈들'과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지요.   



#1. 정당성


센델 교수는 본인의 노력'만으로' 성공하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제 임의대로 명명을 해보자면) '선천적/개인적 운'과 '후천적/사회적 운'의 이유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본인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p37)이라 묻고 있지요.7 


① 선천적/개인적 운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제 얼굴이 원빈의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얼굴로 태어난 것이며, 원빈 또한 그 얼굴로 그렇게 태어난 거니까요. 신장 170cm의 한국 선수가 100m 경주에서 195cm의 우사인 볼트를 앞설 수는 없는 건, 그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리 길이와 운동 신경에서 생물학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결코 제가 현재의 얼굴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한국 육상 선수가 해당 신체 조건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건 그냥 "유전자 복권 당첨 결과"(p239)일 뿐이죠. 우사인 볼트에게 주어진 선천적 행운입니다. (이는 우사인 볼트의 신체적 우위를 강조하는 것이지, 그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억만장자라는 상황을 그의 자녀들이 미리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이건 그저 신의 선택이었을 뿐이죠. 이같은 개인적 행운은 오로지 가정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 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 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 권여선, 「레가토」중 p390, 창비, 2012.


태어나보니 대한민국 땅이고, 태어나보니 1960년이었으며, 태어나보니 여자였던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삶의 시작점으로 인해, 20대의 시작에 '1980년 광주'를 만나게 되었죠. (넓게 보아) 그녀에게 주어진 개인적 불운입니다. 그녀 스스로 1980년에 스무 살이 되지 않겠다 노력할 수 없는 것이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던 그녀가 제 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1980년의 광주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센델 교수가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선천적/개인적 운'은 ---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빌 게이츠 회장이었다라는 개인적 환경이 그 자녀들로 하여금 그렇지 않은 타인과 동일한 노력을 했을 때 훨씬 더 높은/효율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라면, 그 결과가 오로지 그 자녀들의 노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좀 아쉽죠. 


② 후천적/사회적 운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 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가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라면 어떤가. 팔씨름 세계 챔피언은 르브론의 농구 능력만큼 귀한 재능을 팔씨름이란 분야에서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상대의 팔을 테이블에 내리꽂는 것 보고자 돈을 내려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pp200~201) 


요약해보자면, 특정한 측면에서 '잘난'놈이 '잘났다'라는 평가를 받을 때, 그 평가의 주체는 본인이 아닌 사회의 선택이므로, 이 역시 온전히 본인만의 몫이라 할 수 없다라는 논지입니다. 개인의 성공/실패가 후천적/사회적 운에 달려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저는 센델 교수의 위 논리8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원빈이 현재 대한민국의 일반적/사회적 평가 기준에 따르자면 저의 얼굴보다 훨씬 '잘생긴'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사회적 평가가 곧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원빈이 태어났기에, (적어도 얼굴값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점이 공정하지 않다라 말해질 수 있겠으나, 그 얼굴의 원빈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점, 즉 --- 자신의 선천적 재능을 가장 비싼 값으로 보상해주는 분야를 찾아내었다라는 점은 분명 그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 대한 보상이, 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만약 이루어졌다면) 대학 교수 혹은 지금의 회사원에 주어지는 보상보다 크다라는 것에 대해 (적어도 제 생각은) 불공정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9


센델 교수가 예로 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역시, 사회적 수요가 많은 농구에 적합한 재능을 더 발전시킨 그의 노력, 더 나아가 --- 르브론 제임스가 만약 농구와 팔씨름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었는데, 그 중에서 자신의 직업으로 농구선수를 선택했다라면, 위 인용문에서 보여지는 센델 교수의 예는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센델 교수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p204)을 갖고 있다라는 견해를 펼치고 있습니다. 



#2. 개인의 책임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p300) 


능력주의는 결국 과거 내 삶 속에서 있었던 (나 스스로의)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10이란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공한 자는 온전한 자부심을 누릴 수 있지요. 그와는 반대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현재의 나를 실패하게 만들었다라면 그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지는 않아도 되게 됩니다. 허나, 능력주의는 그같은 운조차 본인의 책임이라는 뉘앙스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11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pp68~71)


센델 교수는, 본인의 성공이 오로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기에 그 과실을 온전히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서, 실패의 책임을 오로지 해당 개인에게 묻는 것 역시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p67)


물론, 그가 '보편적(universal)'인 측면에서 실패 책임의 개인 전가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섣부른 오독(誤讀)은 '투자의 결과는 전적으로 투자자의 책임'이라는 부분에서까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우()를 낳을 수 있기에, 보다 세심한 서술이 있었어야 하지 않나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점은 --- 능력주의가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점은 외려, 보다 구조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는 측면입니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p161)


센델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 능력주의는 결과에 대한 성공/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기에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화살을 역시 각 개인 차원으로 돌리게 된다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지요. 기득권층에게는 일견 희소식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능력주의의 약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 이유는 능력주의가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쇠퇴는 궁극적으로는 불평등한 분배를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왕휘,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부활 아닌 불평등한 자본에 고민을 요구한 것이다" 중, DBR 167호, 2014.12.


자신들이 기득권이 오로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정당성을 갖는다라며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거나12, 혹은 그렇게 shield를 치거나 하는 쪽 모두가) 능력주의를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13로 사용해왔던 주장의 효용이 더 이상은 약발을 가지지 못하게 되겠죠. 또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인 까닭은 능력주의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질 때, 힘있는 이가 힘없는 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움직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류동민 · 주상영,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중 p73, 한길사, 2015.


위와 같은 능력주의가 지닌 (최소한의) 장점 역시 "이러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자며 판을 짤 수 있는 힘"14을 지닌 기득권층에게 요용될 수 있는 여지를 안겨주게도 되는 겁니다. 이래저래, 능력주의를 지지하자니 이런 문제가, 또 배격하자니 저런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걱정에 대해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니냐는 지적은 감내하겠습니다. 어쨌든,


"'내 인생의 CEO가 되라?' ……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CEO적 인생을 강조하는 것은 누가 무슨 일을 하건 로빈슨 크루소처럼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최선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 (그러나) 우리의 삶, 우리의 '일'을 혼자서 정교하게 기획하고 기획한 바대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최선의 상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환상일 줄 모르고 주장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다.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수는 자신의 '프로젝트'의 성패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자기 책임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  내가 너를 사랑함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것, 내가 비정규직인 것은 내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도록 일해도 한달 수입이 백만 원밖에 안되는 것는 내 '생산성'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잠을 줄이고 노력하여 부족한 내 사랑, 부족한 내 '스펙', 부족한 내 생산선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다그치는 것이 바로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주문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웅진지식하우스, 2013.


각 개인을 그 한계까지 쥐어짜내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며, 그 목표가 달성되지 못한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돌리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 조직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독려하지만 정작 성공의 과실은 조직이 가져가고, 실패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리는 구조15의 악용을 통해, 청년층의 실업문제가 더 이상 국가의 책임/문제가 아닌 청년들 개인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논리에 대해서만큼은 보다 명확한 지적이 필요하지 않았나라는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3. 사회적 존중


"민주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 마이클 센델, 위의 책 pp52-53.


이 책「공정하다는 착각」역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으로 정의(define)되는 정의(justice)의 개념을 지지하고 있는 센델 교수는 예의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에 대하여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있지요. 


위에서 언급한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어두운 면 - 정당성, 개인의 책임 - 을 한데 묶어 rough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내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p37)


위 인용문의 내용이 왜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센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줍니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운명에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p53)


앞서도 언급했듯,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을 정의(justice)에 대한 가장 올바른 관점으로 보고 있는 센델 교수에게는 능력주의로 인해 발생되는 오만16과 자괴17/불만18이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19 센델 교수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가 능력주의의 배격이 아닌, 그 폐해를 극복하자는 데 있다라 이해하는 저에겐20, 바로 이 부분 - '사회적 연대의 강화를 통한 공동선의 추구'가 역시 이 책의 결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이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①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②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  그러나 ③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pp352~353)


「정의란 무엇인가」가 정말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센델 교수가 지지하는 정의(justice)의 개념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라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두 책에 대한 저의 의견을 표하라면 --- ①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인기가 많은가, ②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는가, ③대한민국 가수 중에 누가 가장 노래를 잘하는가와 같은, 굳이 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도 되는 주장을 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인기가 많은 가수가 가장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겠으나, 가창력이 가장 좋은 가수는 아닐 수도 있듯, 또한 인기와 가창력은 좋지 않으나 행사를 많이 뛰어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는 가수도 있을 수 있겠듯)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경제학을 전공한 저에게는 마음 속에 진심으로 와닿는 문제 제기였다고는 할 수 없네요. 



【 부록 】 


이 책 속에는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들의 주장과 합치되는 부분과 반대되는 주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철학자인 센델 교수가 보는 민주주의21와 경제학자인 가렛 존스 교수가 바라보는 민주주의22의 관점 및 현상에 대한 진단의 차이가 대표적이지요.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pp164~165)


센델 교수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 가렛 존스 교수는 「10% 적은 민주주의」에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23의 개념을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에 부합되는 통계 수치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의 견해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앞서 든 가수의 예와 같이, '가수'라는 직업의 어떤 면에 보다 집중하여 살펴보느냐의 차이인 거죠. 


지극히 미국적 상황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 내용들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낳는 일 단초가 되었었듯, 초단기적으로는 ('능력주의'가 아닌) 현 정권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반발이 이후의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겠는, 뭐 그런 류의 분석도 누군가는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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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 … 이것이 난맥인 까닭은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왜 그것을 선택하는지 우리 스스로도 반드시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일까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도록 사회가 바라기 때문일까? 달리 말해, 우리는 사회적 기대의 대리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일까?" 


- 미히르 데사이,「금융의 모험」중 p173, 부키,2018.


센델 교수의 주장과는 별개로, 저와 당신 각자가 설정해 놓은 삶의 목표(란 게 있기는 하다면)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또한


"우리가 성공이라 여겼던 것이 성공이 아니었듯, 우리가 실패라 여겼던 것이 실패만은 아니란 점" 


- 이건범, 위의 책 p6.



그 목표를 현재 어느 정도나 달성해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과연 제대로 되어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된 독서, 그리고 감상문 쓰기였었습니다. 2021년의 첫 독서는, 책의 내용에 더해 더 많은 부분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해준, (감상문 쓰기는 매우 힘들었으나) 좋은 출발로 시작합니다. ^^


■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한국어로 된 문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정성이 부족한 번역이란 비판은 차마 감출 수 없네요. --- "입단 탈락에 따르는 실망감을 추스르는 과정('101번 불합격'이라 불리는)에 등록하기도 한다."(p284)에서 '101번 불합격'이란 문구는 101번의 불합격을 당한 이들이 등록하는 과정이란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미국 학과목에서 '101'이 붙는 건 개론 강의란 의미죠. 즉, 그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 탈락의 쓴 맛을 본 자들에게 '불합격'이란 개념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일종의 비유일진데, 그걸 저렇게 번역해 놓았더군요.  





※ 읽어본,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저작 : 「정의란 무엇인가



  1.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 … 이러한 견해들은 정의를 각기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23, 와이즈베리, 2014.
  2. "운의 분산이 실력의 분산보다 훨씬 클 경우 단기적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의 성적이 나쁠 수 있고 실력 없는 사람의 성적이 좋을 수도 있다. … 운의 분산이 클수록 운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도 더 커진다." - 마이클 모부신, 위의 책 p332.
  3. "체스와 같은 게임에서 정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에게는 모든 것이 보인다. 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상대가 어떻게 말을 움직였는지도 안다. 플레이어들이 사건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게임에 운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 애덤 쿠하르스키,「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중 p247, 북라이프, 2016.
  4. 물론 노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인의 체격 조건으로는 NBA 농구 선수들을 이길 수 없듯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한계도 분명 존재하겠죠. : "실력 향상에 특정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노력하면 선천적인 격차마저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근거 없는 직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 마이클 모부신, 위의 책 p216.
  5. "계급이 인위적인 형태의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재생산될 때, 승리자들은 그 결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쉽니다. 패배자들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리처드 리브스, 「20 VS 80의 사회」중 p123, 민음사, 2019.
  6. "노력과 선도적 시도, 재능에 후하게 보상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의 기여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보상하는 체제나 정실주의로 정해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체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오직 각자의 능력대로만 보상하는 시스템은 공정성을 갖는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효율성을 늘리고 차별을 배제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꿀 수 있는 존재다. … 나의 성공이 스스로의 덕이며 재능과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라면 그 성공을 자랑할 만하다. 내 성취에 따른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말이다. 따라서 능력주의 사회는 이중으로 고무적이다.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한다."(pp66~67)
  7. "현재 미국의 중상류층 사이에는 '나는 이만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중상류층이 1퍼센트를 비난하며 '우리가 99퍼센트'라고 외칠 때처럼,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기 마련이라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의 지위는 나의 능력(학력, 두뇌, 노력) 덕분이므로 마땅히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 리처드 리브스, 위의 책 p18.
  8. "내가 가진 재능이 희귀한지 흔해빠졌는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장에서 갖는 위치에 따라 나의 소득은 결정된다."(p220)
  9. 경제학을 전공한 제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반면, 철학자인 센델 교수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도덕적 가치'의 개념을 더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해됩니다.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그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비판했던 점에 대해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과 전적으로 일치합니다.
  10.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중 p43, 다산책방, 2016.
  11. "운은 불평등한 결과를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실력으로 볼 것인지도 결정한다." - 마이클 모부신, 위의 책 p174.
  12. "너무 많은 미국의 중상류층이 자신과 자녀의 성공을 전적으로 본인의 재능과 머리와 노력 덕분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식축구 코치 배리 스위처의 생생한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삼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삼루타를 친 줄 안다'." - 리처드 리브스, 위의 책 p29.
  13. 류동민 · 주상영,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중 p74, 한길사, 2015.
  14. 류동민 · 주상영, 위의 책 p57.
  15. "시력이 안좋은 청년이 시력 검사표를 외워 신검을 받고 … 미처 외우지 못한 부분이 나오자 … "꼭 가고 싶습니다!"라 외쳤던 박카스 광고. (이 청년이 '정신이상'으로 군 을 면제 받았을 것이라는 유머도 있었다) … 지킬 것은 지킨다며 통금에 맞춰 여자친구를 집에 들여보내는 순수한 청년 (이 청년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 중소기업에 취직한 청년이 출근을 하며 "작은 회사에요"라고 말하자 "가서 크게 키우면 되지 뭐"라고 담담하게 대꾸하는 구멍가게 아저씨 … 교과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네모반듯한 청년들은 현실의 청년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광고는 청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개인의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 광고는 마치 열심히 살고 있는 청년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현실의 청년들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광고를 본 어른들의 눈총과 '난 뭐지?'라는 자과감속에서 청년들은 마음 놓고 하소련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씁쓸한 다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피로 회복제가 사람에게 훈계를 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 한윤형 외,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중, 웅진지식하우스, 2011.
  16. 이러한 오만이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주의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적 속성이라 보는 게 맞겠죠. :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p128)
  17.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게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다'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리고 실패자는 '누구 탓을 할까? 다 내가 못한 탓인데'라고 여기게 된다."(pp59~60)
  18.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p42)
  19. 센델 교수는 능력주의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는 패자들의 반란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낳은 원인 중 하나라 보고 있습니다. : "집권 엘리트들은 지금껏 '대학 학위야말로 성공의 길이자 사회적 명망의 기반'이라고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 못 간 사람에게 고약한 낙인이 찍히게 됨을 나 몰라라 한다. 그러다 보니 포퓰리즘이 터져 나오고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다."(p54)
  20.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p33)
  21.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 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p126)
  22.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1인 1표'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편익과 비용21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비용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다. 지식을 갖춘 유권자와 지식이 부족한 유권자 모두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주장에 드는 비용은 너무도 심각하여, 약간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갖춘 유권자에게 가중치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이다."(pp17~18) … "에피스토크라시가 옳다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유능한 통치자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p206) - 가렛 존스, 「10% 적은 민주주의」중, 21세기북스, 2020.
  23. 가렛 존스, 위의 책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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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가 직장에서 이토록 쓸모 있을 줄이야
한정엽.권영지 지음 / 원앤원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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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다릅니다. … 한국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해서 일의 언어도 능숙하게 하는 건 아닙니다."(pp4~5) …… "숫자'는 혼돈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 '곧', '최선을 다해', '상당히', '꽤', '한동안', '열심히', '많이', '매우' 등의 추상적인 단어는 일의 언어가 아닙니다. … '많이' 대신 '15%', '한동안' 대신 '3개월', '최선을 다해서' 대신 '1억 원을 투입하여' 등과 같이 숫자로 이야기하는 겁니다."(pp76~77)


- 박소연,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말합니다」중, 더퀘스트, 2020.



위 인용문 뿐만 아니라, 저의 실제 경험을 보아도 --- ①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어가기 위한 업무 과정을 진행하고, 그 과정의 결실을 (보고하기 이전에) 자평하며, ②특정된 형식을 취한 채 상대방에게 조직 내에서 저라는 개인과 제가 속해 있는 부서의 존재 이유를 '설득'하기 위해 쓰는 보고서의 질(quality)은 결국에는 '계량화 정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각합니다. (블로그에 쓰는 글처럼, 읽혀지는 것보다는 표현하여 기록으로 남긴다라는 것에 중점이 찍혀진 개인적 수필이 아닌) 금전적 거래가 수반되고 있는 조직 생활에서 일 개인 그리고 특정 부서의 존재가 회사가 제시한 목표/가치에 어느 정도나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있을 것인가를 증명해내는 '보고서'라는 글은 그 특성 상,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한들) 계량적 수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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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를 공부하는 목적은 달라도 목표는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바로 재무제표 읽기입니다. … 기업들이 당면한 이슈는 재무제표에 숫자로 반영됩니다."


김수헌·이재홍, 「하마터면 회계를 모르고 일할 뻔 했다」중 p6, 어바웃어북, 2018.


재무(finance)의 목적이건, 관리의 목적이건 회계를 공부하는 목적이 결국엔 '재무제표'를 이해해내기 위함이라는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A라는 회사의 재무제표는 --- 자사 경영진에게는 향후 전략 수립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며, 주주에게는 투자자의 관점에서 읽혀질 것이고, 경쟁사에게는 비교 수치를 제공하는 자료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A라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말단 사원은, 특정 부서의 부서장은 어떤 이유로 자사의 재무제표를, 더 나아가 '회계'라는 분야를 이해할 수 있어야하는 걸까요?


결국 회사가 원하는 것은 이 사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해서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그 성장의 모습을 가장 효율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활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때 기준이 되는 수치들은 모두 예외 없이 회계적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집니다.1 … 숫자로 소통하고 숫자로 구성된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숫자가 가진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장인들이 회계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자 경영진이 원하는 업무 방향이기도 합니다.(pp 44~45)


(회계사가 아니라면) '회계'라는 것은 조직 생활에서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일 수단이며, (회사 생활을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언젠가는 경영진의 일원이 되기를 욕망하는 직장인에게 "재무회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관리회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역량"(p73)은 반드시 갖춰야하는 자질이라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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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이 제때 결정을 내리지 않거나 필요한 지원을 해 주지 않아도 그를 원망하지 말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상관이 결정을 내리고 자원을 배분하는 데 필요한 중요 전보를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를 검토하라."


조코 윌링크 · 레이프 바빈, 위의 책 p273.


내가 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보다, 나에게 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을 때엔 위의 이유로, 시간이 흘러 내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가 커져 있을 때엔 또한 다음의 이유로, '회계'라는 수단이 필요할 겁니다. 


"승리한 군대와 패배한 군대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경제 기초와 군사력 등의 객관적 요소의 차이이며, 이를 비교·분석한 뒤에 비로소 승리를 점칠 수 있으며 전쟁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손자의 기본 입장이었다."


- 손자 (김원중 ), 「손자병법」중 p22, 휴머니스트, 2016.



'회계 지식을 설명하는' 일종의 실용서로 소개되는 것 보다는 --- 물론, 기초적인 회계적 지식을 담고는 있습니다만, 그 분량에 관계 없이, (회계 전공자가 아닌, 실무로 회계를 익힌 저자들이 적어낸) 회계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력이 유독 돋보였던 책이기에,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회계 입문서를 읽기 이전에) 회계를 알아가는 여정 중에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다지는 것으로 읽어낼 때 극대화된 효용성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그래서,


"리더는 뭘 할지를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왜 하는지'를 설명하는 사람이다."


조코 윌링크 · 레이프 바빈,「네이비씰 승리의 기술」중 p105, 메이븐, 2019.


다음 주 월요일, 

'왜 하는지'에 대한 아주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뭘 할지'(=이 책을 읽어라!)를 지시받는 직원들이 있을 듯. 



※ 읽어 본 회계 입문서 :하마터면 회계를 모르고 일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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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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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분명 '살기 위해 먹는' 존재입니다. 미식을 취미로 가진 이가 하는 '먹기 위해 산다'라는 말은, 본인이 그 취미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메타포일 뿐, '취식'이라는 행동이 '산다'라는 목적을 위한 일 수단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든 진보든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강수돌 외, 「리얼 진보」중 pp104~105, 레디앙, 2010.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떠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건 간에 ---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는 역사를 통해 한 사회가 채택한 수단의 하나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절차상의 편리라는 이유로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지요. 여기서의 핵심은 결국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헌데 --- 국민학교 시절의 반장 선거에서부터 접해왔었던 이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요? 대체 왜 '다수결의 원칙'을 옳다고 받아들이며 따라왔던 걸까요?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 주제 사라마구, 「눈뜬 자들의 도시」중 p377, 해냄, 2007.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그러한 민주주의가 가장 우월할 뿐 아니라 '정당한 것'1이라 배워왔던 우리에게 이 책은 (과연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제도는 현재에도 당연히 정당한 것이며, 앞으로도 당연히 정당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아닌2)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3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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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이 광범위하고 실질적으로 거버넌스에 관여하고, 시민들이 인지적으로 충분히 평등한 상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란 광범위한 시민이 (좋은 정책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상관 없이) 통치 과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pp36~37)


저자가 보는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는 절차적 민주주의입니다. 이는 곧, 절차적 정의(justice)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경제학자인 저자는4 절차상의 정당성이 아닌,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가 낳는 결과에 관심을 가집니다. 즉, 정치학에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의 문제이겠으나, 그것이 결과의 좋고 나쁨까지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수정(modification)을 가했을 때, 현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는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죠.5 --- "민주주의의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다면,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p204)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목표는 절차적인 정당성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6  그리하여, 


유권자들이 정부에 관여하는 것은 편익은 물론 비용도 낳는다. 문제는 그 비용이 너무 흔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볼 때 세계의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래퍼 곡선7에서 지나치게 민주주의가 많은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p46) …… 내가 제안하는 개혁은 유권자들로부터 약간의 권력을 빼앗기를 하지만 여전히 정부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개혁이다. 10퍼센트 적은 민주주의8란 바로 그런 것이다.(p80)


현재보다는 좀 더 '비민주적'9인 수준의 민주주의가 보다 나은 결과의 효율성을 낳을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지요. 이러한 논리의 전개에 있어 저자는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책이 정치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라 요약될 수 있겠는 첫 번째의 제안10에는 큰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문제는 두 번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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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11 】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뛰어난 지도자에 의한 독재입니다."(p104) …… "국민의 선택이 늘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둘 수는 없죠.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고요."(p177)


- 야마다 무네키, 「백년법 ()」중, 애플북스, 2014.


(작가의 주장대로) SF 소설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소설로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단기간에 국가를 재건하려면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의회민주주의는 적절치 않습니다"12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국민은 개·돼지' 발언이 떠오르기도, 더 나아가서는 독재의 정당화로 읽혀질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 소설이지요. 이처럼 '권력의 소유'가 특정 계층/계급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는 다른 결에서 민주주의의 평등 원칙에 대한 의문 또한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투표에 있어 기호에 집착하는 한국 정당들 (그리고 유권자들)의 행태를 보면 정녕 '1인 1표'의 평등 투표가 합리적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죠. 


지금에야 덜해졌다 해도 예전엔 --- 충청도에서는 인물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3번, 경상도는 1번, 전라도는 2번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라 말해도 될만큼) 보편적이었었고, 특히나 문맹률이 높은 노인층에게는 번호야말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함에 있어 거의 유일한 선택의 지표였었죠.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정동영의 소위 '노인 폄하 발언'13도 그 의도 - 노년층은 보수 정당에 투표를 한다라는 가정 - 의 불순함과 싸가지 없는 wording이 문제였었지, 대한민국 투표장의 현실을 보자라면 저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보 격차'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유사한 의문을 낳게 되었죠. 출마한 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 소속 정당 이외의 추가적 정보를 (의도적이건 아니건)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동등하게 1표씩을 행사한다라는 것에 대한 정당성 말입니다. 유권자들의 정보 격차가 이른 바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14 무시/무지 rational ignorance'15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특정 계층에 불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자칫 --- 애써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1표 행사에 앞서 평균보다 많은 정보를 취득한 집단이 그 불리함을 감내하게 될 가능성도 분명 갖고 있기에, 예의 '1인 1표'에 대한 정당성이 공격을 받게 되지요.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각 개인의 행복, 각 개인의 합으로 정의(define)되는 한 사회의 행복의 증진 (혹은 최대 행복의 달성)이 목적이라면, '1인 1표제'라는 형식/수단 자체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선거라는 제도 역시 수단으로서의 지위에 충실해야한다/할 뿐이라는 당위를 부여받게 되죠. 


"근대 정치학은 도덕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이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정치 엘리트나 그 어떤 민중적 교리를 갖는 정당도 대중이 요구해 제약되는 정치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덕적 헌신은 무뎌지고 편협한 조직의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강수돌 외, 위의 책 p105.


이 책의 저자 가렛 존스의 관점 또한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16라는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때! --- '대중의 규묘가 커질수록, 대중에게 도움을 주려고 조성되는 재화의 가치 비율을 낮아진다'17라는 경제학 이론은 예의 경제학자인 저자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끌어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지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1인 1표'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편익과 비용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비용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다. 지식을 갖춘 유권자와 지식이 부족한 유권자 모두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주장에 드는 비용은 너무도 심각하여, 약간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갖춘 유권자에게 가중치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이다.(p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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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수준이 높은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다. 많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규칙은 명확하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더 많이 알고 있고, 선의의 제안을 포함한 다양한 정책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질지 아닐지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유권자일수록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투표를 한다. 정치인들은 투표권이 없는 사람보다는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에게 영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권자들의 능력, 지능, 인적자본이 늘어난다는 것은 정치인들로서는 자신들이 구매할 제품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p175~176) …… 유권자들의 능력이 거의 혹은 완전히 동등하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투표가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유권자들의 능력이 거의 동등하다는 구호는 거짓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거짓말을 그만두어야 한다.(p185)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읽어내기 쉽지 않을, 전적으로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하기에, ---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때 경제학의 매력이 극대화된다라 생각하는 저에게는, 저자의 주장 자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경제학적 관점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제도를 분석했다라는 점에서 예의 매력적인 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A pre-emptive strike might reduce the extent of damage to South Korea and lead to a quicker victory. Obviously, the first benefit is of special interest to South Korea, and the second benefit is of even more interest to the global economy -- the shorter the war, the less disruption to markets and trade. Let's say that a pre-emptive South Korean attack would cut the cost of war in half. Now, this is a cost that the world would incur with certainty, not a cost with a probability attached; in the event of a pre-emptive attack, there will be war for sure. Is the cost worth paying? Under our assumptions so far, the answer is almost certainly yes."


Daniel Altman, "The Economics of War with North Korea : Would fighting Kim Jung Un be worth it",  「Foreign Policy」 April 15, 2013.


당사자가 아니라해서,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마저도 화폐 단위로 환산하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위와 같은 분석을 보자라면 경제학을 공부했다라는 것에 창피함을 가지게도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경제학이 이처럼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라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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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토크라시가 옳다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유능한 통치자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p206)


이 책에서 저자가 '교육 수준'을 'informed'의 수준을 측정하는 일종의 대리 변수(proxy variable)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안다면, 위 인용문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다만, '이전보다 훨씬 더 유능한 통치자'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보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참정권의 확대는 결국 커다란 비용을 치르기 마련이다. 특히 유권자들의 평균 정보 수준이 저하된다. 유권자들의 정보 수준이 낮을 때 정치인들은 편협하고 허약한 지적 토대를 갖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영합하기 마련이다.(p209)


'목적으로서의 정의(justice)는 수단으로서의 정의(justice)를 요구한다'18라는 명제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 '정보'에 의존하기 보다는 '편가르기'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자행하고 있는 '민주적 통제'19라는 미명 하의 법치 무시는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사법권과 관료의 독립'20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유권자의 정보 수준이 민주주의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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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는 것과 믿음을 믿는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데닛의 말처럼 …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 감정이냐, 진리냐, 둘 다 중요하겠지만,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중, 김영사, 2012. 


민주주의에서 '1인 1표제'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의문,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권리의 행사가 어느 수준까지 보장되어야 하는 가에 의문 ---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각 개인의 생각을 가다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라는 차원에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과감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정치인이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출현할 수 있겠는가라는 (부러움 섞인) 의문 또한 끝내 지워낼 수 없네요. 





※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책들 : 「정의란 무엇인가」, 「권력의 종말」, 「리얼 진보」, 「불평등의 세대 







  1. 현 시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채택되고 있는'이란 의미 정도로의 '정당성'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케네스 애로우의 (소위) '불가능성 정리'에서도 알 수 있듯, 다수결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물론 존재하고 있습니다.
  2. 해리 프랭크버트는 「평등은 없다」에서 보여주었던 의문은 '평등'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에 정면으로 반하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지요. : "평등주의에 대한 옹호는 대부분 논증이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은 나쁜 것 같다는 막연한 도덕적 직관을 바탕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수가 많은 돈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를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본다."(p48) ……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p70) ………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p71) - 해리 G. 프랭크버트, 「평등은 없다」중, 아날로그, 2019.
  3. "직접 민주주의란 정부의 모든 법안과 공직자 선출에 대해 국민투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고, 간접 민주주의란 유권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후보자 혹은 정당 사이에서 선택을 하고, 선택 받은 사람 혹은 정당이 정해진 기간 동안 실제 정부를 운영한 다음, 다시 유권자들에게 신임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일단 '민주주의'가 광범위한 시민이 통치에 참여하는 여러 형태를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국민들에게 가장 좋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이 책에서 나는 현대 민주주의에 어떤 유형의 속박을 가할 때 좀 더 나은 사회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 고려해보려 한다."(pp34~37)
  4. "나는 금융경제학을 전공했다."(p14)
  5. "우리의 목표는 개인들에게 입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주자는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정책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p199)
  6. 이 부분을 간과한다면 이 책에 대한 오독(誤讀)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아질거라 생각합니다.
  7. 이 책에서의 '래퍼 곡선'은 전적으로 trade off relation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8. '10퍼센트'라는 수치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강조점이 주어져야 하는 부분은 '(현재보다) 적은'이지요. ---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개혁의 일반적인 방향이 더 중요하다"(p335)
  9. "'독립적'이라는 말은 사실은 '비민주적'이라는 말의 순화된 표현이다."(p123)
  10. 첫 번째 제안을 보다 세분화하자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① 정치의 (유권자로부터의) 독립 : "결국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정치이고, 그것도 단기적인 스윙 스테이트에서의 정치다. 장기적인 경제 번영을 위해 냉정하고 침착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몇 십년에 걸쳐 축적된 자료와 수없이 많은 판단에 비추어보자면, 선거가 다가온다는 것은 좋은 경제학에는 나쁜 소식이다."(p71) …… "유권자들을 의식할 때, 정치 엘리트들은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데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p74) …… "조금 덜 빈번하게 선거를 치르는 경우 … 정치인들이 좀 더 담대하게 맡은 바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전 세계의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좀 더 나은 경제정책을 취하게 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p80)
    ② 중앙은행의 독립 : "중앙은행이 덜 정치적이고 덜 민주적일수록 그리고 내부자에 의해 운영될수록, 그 결과가 훌륭하기 마련이다. 여러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 전반적으로 볼 때, 중앙은행을 정치인들(그리고 유권자들)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이익이라는 점은 확실하다."(pp99~100) …… "선출직 정치인들의 일상적인 영향에서 자유롭고, 민주주의의 일상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중앙은행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다."(p117)
    ③ 사법권과 관료의 독립 : "전문적인 결정은 판사나 임용된 관료들에게 맡기는 편이 가장 좋을 수 있다."(p120)
  11. "지식을 갖춘 이들에 의한 통치"(p186)
  12. 야마다 무네키, 「백년법 (下)」중 p369, 애플북스, 2014.
  13.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이 꼭 미래를 결정해 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 - 출처 : 나무위키 '정동영' 중.
  14. "비용과 편익을 계산해서 편익이 나는 일을 선택할 때 그 사람을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 정보는 얻는 데 필요한 비용이 정보의 가치보다 크다면 그 정보를 무시하는 것이 합리적" - 데이비드 프리드먼, 「데이비드 프리드먼 교수의 경제학 강의」중 pp16~17, 옥당, 2015.
  15. "대중의 규모가 커질수록, 대중에게 도움을 주려고 조성되는 재화의 가치 비율은 낮아진다. … (예를 들어) 해당 법률안이 자신에게 10달러만큼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같은 의심을 확인하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다. 잠재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는 금액이 적고, 결과를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어떤 일은 자신이 기꺼이 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집중된 이해관계'에 있는 구성원들과 비교했을 때, '분산된 이해관계'에 있는 구성원들은 관련 정보에 무지하기로 함으로써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 법안을 둘러싸고 입찰을 벌이는 개인과 이해집단의 이런 단순함 모델에 기초해서 우리는 어떤 예측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측은 분산된 이해집단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 집중된 이해집단에 편익을 제공하는 쪽으로 입법이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농부들을 대하는 방식이 좋은 예다.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처럼 전체 인구에 비해 농부의 숫자가 적은 부유한 나라에서는 농부들이 수확하는 곡물 가격을 인상시키는 방향으로 농업정책이 결정된다. 반면, 인구 대비 농부의 비율이 높은 아프리카나 많은 아시아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농부들로 이뤄진 분산된 대집단에 비용을 부과함으로써 노동자와 엘리트에게서 정치적인 지지를 얻으려 한다. 따라서 농업정책은 식품 가격을 낮추는 쪽으로 고안된다." - 데이비드 프리드먼, 위의 책 pp396~397.
  16. "어떠한 수단을 사용했든 간에 권력을 차지한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을 위해서만 그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집단은 자신들을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 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세상을 바꾼 법정」중 pp306~307, 궁리, 2006.
  17. <각주 20> 참조.
  18. 김석, 「법철학 소프트」중 p165, 박영사, 2015
  19. '민주적 통제'에 대한 법학자의 의견은,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였었습니다. : "여론을 따르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 것이고, 민주주의에 충실한 것이 아닌가. 헌법재판을 하는 권력도 국가권력의 일종이며, 무릇 모든 권력행사는 국민의사에 쫓아야 하는 것" - 양건, 「헌법의 이름으로」중 p353, 사계절, 2018.
  20. <각주 15>의 ③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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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으로는「상실의 시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본 작품입니다. 이 작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1985년에,「상실의 시대」는 고3이었던 1987년에 쓰여졌습니다. 고삐리였던 제가 어느덧 50대가 되었거늘, 이 작품의 내용에서는 그같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네요. 



#2.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北海)의 하늘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


-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중 p14, 문학사상사, 2000.


제가 뭐, 특정 작가의 작품관에 대해 논할 수준은 못되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로 위 인용구를 꼽았던1 저로서는, (그저 발표 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 작품「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


나이를 먹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 … 지치기도 하고.(p350)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속) 주인공이 설명해주고 있는 '지쳤다'라는 상태 - "감정의 구분이 흐릿해지죠. 자기에 대한 연민, 타인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연민, 자기에 대한 분노 - 그런 것들이"(p328) - 를 표현하는 문장은, <각주 1> 속 작가의 말을 읽고 "어느 한 구절도 버리고 싶지 않을만큼, 절절하게 공감되는"이란 감상을 제게 쓰게했었듯, 이번에도 예의 '이 사람 또, 내 감정선을 정확하게 찌르네~'라는 전율을 느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 성석제,「투명인간」중 p370. <작가의 말>


하루키의 문학관이 어떻고를 떠나, 사회생활에서 제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 - 아주 많은 스트레스와 아주 약간의 성취감 등등 - 이 저 혼자만 유난하여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전율과 함께 알려주었다라는 점에서, 790여 페이지에 달하는 (fancy한 표지의 양장본인)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행동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어서, 그래서 다들 혼란스러운 거야.(p341)


제가 지나온 삶과 완벽하게 동일한 궤적의 삶을 살아온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겠으나, 그 일부 일부의 경험은 누군가도 분명 겪었었다라는 걸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주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며 --- '함께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이토록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라는 게 어찌나 신기하기만 한지요. 



#3. 


아예 다른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번갈아 써 나간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가 마지막에 합체된다. - 그런 계획이었다고 할까, 의도였다. … 그리고 결국, 두 이야기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었다. 양쪽에서 파들어 간 긴 터널이 한가운데서 만나 길이 뚫린 것처럼. …… 내가 '과연 어떻게 될지?'하고 즐기면서 이 소설을 써 나갔던 것처럼, 여러분도 '과연 어떻게 되려나?'하는 설렘으로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다. (pp6~7)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즐겼다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전혀 상관없는 두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어 가며 저 역시 어느 지점에서 이 둘이 연결되는 것일까를 궁금해했었습니다만2,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아닌 바에야 그 연결점이 크게 중요하다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유독 가사 전달이 정확한 가수들이 있지요. 제가 아는 한,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는 단연코 그 으뜸은 정밀아입니다. 반면 혁오의 '지정석'같은 곡을 들을 때면, 굳이 노래의 가사를 들으려, 아예 해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그저 흘러나오는 멜로디만 즐길 뿐. 


이 작품을 전, 혁오의 '지정석'을 들을 때처럼 그렇게 읽어냈다고나 할까요? 



#4. 


어째 온 세계 여자들이 내 침대에 파고들려 하는 것 같았다. (pp325~326)


1985년, 일본에서 발표된 소설에 대해 (이순신 장군마저 등장시키는) 2020년 대한민국의 '성 인지감수성'을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이제껏 읽어 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편의 소설에 한하여 이야기해보자면, 작품 속 여성들이 섹스에 대해 은근 적극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는 되네요. 뭐 그렇다고 그게 막 추한 느낌을 주는 건 또 절대 아니구요. 


이 작품이 '제 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이 어떤 작품에 허여되는 상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으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면 무리없이 추론되는 뭔가가 있듯), 다음의 구절을 읽는 순간 그 수상이 나름 합당(!)한 것이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팔찌를 한 그녀와 섹스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내가 팔찌를 한 그녀와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탓에, 나는 방의 조명을 어둡게 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라색인지 하얀색인지, 아니면 엷은 파란색인지, 매끈거리는 시크한 팬티를 벗기고 나자, 팔찌가 그녀 몸에 걸친 유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희미한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리고, 시트 위에서 가볍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사다리를 내려가다가 비옷 속에서 페니스가 발기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아뿔싸,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발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 겨우 두 줄짜리 은팔찌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것도 세계가 끝나려는 이런 때에.(p376)


세상 모든 남자가 이런 상상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에게는 이런 류의 상상이 충분히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3 뭐, 세상이 끝나려는 때에, 달리 뭘 할 수/하고 싶겠습니까. ^^;;


여자가 정액 먹어 주는 거 좋아해요? … 여자가 먹어준 적 있어요?(p628)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낸 직후에, 17세 소녀가 30대 중반의 남자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또한 도무지 이유를 댈 수도 없으나 --- 이 작품이 하루키의 소설이기 때문에 (전후 맥락 하에서) 이 문장이 역겹게/추하게 읽혀지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덧붙여,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리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려고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러나 후크는 없었다. "앞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세계는 확실하게 진화하고 있다.(p715)


"진화란 그런 것이에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그리고 슬퍼요. 즐거운 진화는 있을 수 없지"(p93)란,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인 박사의) 술회를, 후반부에 쓰여져있는 위 인용문의 순간에 주인공은 --- 브래지어 후크의 위치가 뒷쪽에서 앞쪽으로 바뀐 그 진화란 게, 과연 고통이고 슬픔이었을지, 아니면 역설적으로 '즐거운 진화'로 받아들여졌을지, 이 또한 작가가 독자들에게 건네 준 선택지가 아닐까하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제 멋대로의 추측을 더해보게도 되네요.  


………………………………………………………………………………… 


나이를 먹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 … 지치기도 하고.(p350) 


앞에서 썼었듯, 이 작품의 주제로 저는 위 인용구를 꼽았습니다. 허나 --- 삶이란 게 오래될수록 지치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죠. 다음 인용문이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문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만큼은 최선의 처방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잃은 것은 이미 잃은 것이다. 전전긍긍해 봐야 되찾을 수 없다.(pp302~303)

 

79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읽고난 후에 써내는 감상문의 마지막으로 너무 허전하지 않은가, 혹은 작가의 의도를 어느덧 '중년 남성'이란 타이틀을 부여받은 이의 좁은 시야로만 이 작품을 이해한 것4 아니냐 비난을 염려하여 --- 좀 더 멋져보이는(?) 무언가를 굳이 끄집어내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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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당신은 과거에 당신이 취했던 행위의 결과이다. 생각했고, 판단했고, 선택했고, 실행했던 사람은 바로 당신이며, 그 결과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


- 임석민,「돈의 철학」중 p304, 다산북스, 2020.


이 작품 속 두 이야기의 연결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또 그 연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노 경제학자의 위 조언을, (어느덧 '노()라는 접두어가 어색하지 않아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마을을 만든 건 너 자신이야. 네가 모든 걸 만들었어. 벽이며 강이며 숲이며 도서관이며 겨울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 웅덩이도, 이 눈도 다.(p786)"이라 적고 있는 바, 


한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의 '끝'을 맞이하게 되든지 나의 과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그 '끝'의 원인이라는 점, --- 뭔가 엄청난 뜬금포스럽지만, 젋은 청춘들에게 집어줄 수 있는 이 소설의 조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왜 짐승들은 밭의 작물에는 입을 대지 않는 거지?' 나는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왠지는 나도 몰라요' 그녀가 말했다.(pp536~537) 


왠지도 모르면서, 그 '왠지'를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삶5 --- "당신이 뭘 질문하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대답을 하고 말고는 내 자유야"(p76)라는 문장과 함께 곰곰히 생각해 볼 무언가를 작가로부터 건네어 받았노라는 점도 덧붙여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소설 속 '가장 하루키다운6 한 문장'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전, 


위스키는 처음에는 가만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다가 싫증이 나면 마신다. 아름다운 여자와 마찬가지다.(p470) 



을 꼽게 됩니다. 왜냐고 묻는 건 당신의 자유이겠으나,

대답을 하고 말고는 저의 자유인 걸로...



※ 읽어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 

※ 느닷없는 것 같지만, 이 작품 속 내용 (그리고 정밀아의 노래 동영상이 있는) 과 연관있는 책(의 감상문) :해마를 찾아서 





  1.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소설의 테마는 제가 이해한 바와는 조금 다르기도, 어찌보면 비슷하기도 합니다. : "제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의 작품 중 pp8-9.
  2. 대략 스토리의 2/3쯤 되는 부분에서 뭔가 힌트스러운 부분들, 예를 들어 - "이 일대의 지하에는 빈굴이 많습니다. 그 안을 바람과 물이 오가고 있죠"(p543)이라든가, "기억이 역류하고 있는 거예요"(p604)같은 부분 - 이 나오긴 합니다만, 전 두 스토리의 연결에 굳이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3. 반면, 다음과 같은 찰스 부코스키 타입의 묘사가 나름 시원시원(?)하기는 하나, 제 타입은 아닙니다. : "내 자지를 거의 절반쯤은 물어뜯고, 불알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기던 그녀는 나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라디오에서는 말러가 연주되고 그녀의 빨아대는 소리가 온 방안을 가득 채웠다." - 찰스 부코스키,「팩토텀」중 p50, 문학동네, 2007.
  4. 찰스 부코스키의 조언(?)이 너무 강렬하게 제게 남아았어서일까요? :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희망. 사람을 낙담시키는 것은 바로 희망의 결핍이다." - 찰스 부코스키,「팩토텀」중 p91, 문학동네, 2007.
  5. 조지 오웰 역시 이같은 대중의 '무지와 무기력함'을 통렬히 비판했었죠. --- "무슨 결의안을 제출하는 건 언제나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하는 법까지는 알았지만 자기네 스스로 무슨 결의안 같은 걸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동물농장」중 p31, 민음사, 2006.
  6. 사실 제가 '하루키답다'라는 문장을 써낼 자격은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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