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으로는「상실의 시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본 작품입니다. 이 작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1985년에,「상실의 시대」는 고3이었던 1987년에 쓰여졌습니다. 고삐리였던 제가 어느덧 50대가 되었거늘, 이 작품의 내용에서는 그같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네요.
#2.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北海)의 하늘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
-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중 p14, 문학사상사, 2000.
제가 뭐, 특정 작가의 작품관에 대해 논할 수준은 못되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로 위 인용구를 꼽았던 저로서는, (그저 발표 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 작품「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
나이를 먹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 … 지치기도 하고.(p350)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속) 주인공이 설명해주고 있는 '지쳤다'라는 상태 - "감정의 구분이 흐릿해지죠. 자기에 대한 연민, 타인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연민, 자기에 대한 분노 - 그런 것들이"(p328) - 를 표현하는 문장은, <각주 1> 속 작가의 말을 읽고 "어느 한 구절도 버리고 싶지 않을만큼, 절절하게 공감되는"이란 감상을 제게 쓰게했었듯, 이번에도 예의 '이 사람 또, 내 감정선을 정확하게 찌르네~'라는 전율을 느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 성석제,「투명인간」중 p370. <작가의 말>
하루키의 문학관이 어떻고를 떠나, 사회생활에서 제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 - 아주 많은 스트레스와 아주 약간의 성취감 등등 - 이 저 혼자만 유난하여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전율과 함께 알려주었다라는 점에서, 790여 페이지에 달하는 (fancy한 표지의 양장본인)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행동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어서, 그래서 다들 혼란스러운 거야.(p341)
제가 지나온 삶과 완벽하게 동일한 궤적의 삶을 살아온 사람은 이 세상에 없겠으나, 그 일부 일부의 경험은 누군가도 분명 겪었었다라는 걸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주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며 --- '함께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이토록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라는 게 어찌나 신기하기만 한지요.
#3.
아예 다른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번갈아 써 나간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가 마지막에 합체된다. - 그런 계획이었다고 할까, 의도였다. … 그리고 결국, 두 이야기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었다. 양쪽에서 파들어 간 긴 터널이 한가운데서 만나 길이 뚫린 것처럼. …… 내가 '과연 어떻게 될지?'하고 즐기면서 이 소설을 써 나갔던 것처럼, 여러분도 '과연 어떻게 되려나?'하는 설렘으로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다. (pp6~7)
솔직히 말해, 저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즐겼다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전혀 상관없는 두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어 가며 저 역시 어느 지점에서 이 둘이 연결되는 것일까를 궁금해했었습니다만, 이 작품이 추리소설이 아닌 바에야 그 연결점이 크게 중요하다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유독 가사 전달이 정확한 가수들이 있지요. 제가 아는 한,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는 단연코 그 으뜸은 정밀아입니다. 반면 혁오의 '지정석'같은 곡을 들을 때면, 굳이 노래의 가사를 들으려, 아예 해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그저 흘러나오는 멜로디만 즐길 뿐.
이 작품을 전, 혁오의 '지정석'을 들을 때처럼 그렇게 읽어냈다고나 할까요?
#4.
어째 온 세계 여자들이 내 침대에 파고들려 하는 것 같았다. (pp325~326)
1985년, 일본에서 발표된 소설에 대해 (이순신 장군마저 등장시키는) 2020년 대한민국의 '성 인지감수성'을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이제껏 읽어 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편의 소설에 한하여 이야기해보자면, 작품 속 여성들이 섹스에 대해 은근 적극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는 되네요. 뭐 그렇다고 그게 막 추한 느낌을 주는 건 또 절대 아니구요.
이 작품이 '제 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이 어떤 작품에 허여되는 상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으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면 무리없이 추론되는 뭔가가 있듯), 다음의 구절을 읽는 순간 그 수상이 나름 합당(!)한 것이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팔찌를 한 그녀와 섹스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내가 팔찌를 한 그녀와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탓에, 나는 방의 조명을 어둡게 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라색인지 하얀색인지, 아니면 엷은 파란색인지, 매끈거리는 시크한 팬티를 벗기고 나자, 팔찌가 그녀 몸에 걸친 유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희미한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리고, 시트 위에서 가볍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사다리를 내려가다가 비옷 속에서 페니스가 발기하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아뿔싸,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발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 겨우 두 줄짜리 은팔찌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것도 세계가 끝나려는 이런 때에.(p376)
세상 모든 남자가 이런 상상으로 성적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에게는 이런 류의 상상이 충분히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세상이 끝나려는 때에, 달리 뭘 할 수/하고 싶겠습니까. ^^;;
여자가 정액 먹어 주는 거 좋아해요? … 여자가 먹어준 적 있어요?(p628)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낸 직후에, 17세 소녀가 30대 중반의 남자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또한 도무지 이유를 댈 수도 없으나 --- 이 작품이 하루키의 소설이기 때문에 (전후 맥락 하에서) 이 문장이 역겹게/추하게 읽혀지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덧붙여,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리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려고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러나 후크는 없었다. "앞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세계는 확실하게 진화하고 있다.(p715)
"진화란 그런 것이에요. 언제나 고통이 따르고, 그리고 슬퍼요. 즐거운 진화는 있을 수 없지"(p93)란,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인 박사의) 술회를, 후반부에 쓰여져있는 위 인용문의 순간에 주인공은 --- 브래지어 후크의 위치가 뒷쪽에서 앞쪽으로 바뀐 그 진화란 게, 과연 고통이고 슬픔이었을지, 아니면 역설적으로 '즐거운 진화'로 받아들여졌을지, 이 또한 작가가 독자들에게 건네 준 선택지가 아닐까하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제 멋대로의 추측을 더해보게도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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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 … 지치기도 하고.(p350)
앞에서 썼었듯, 이 작품의 주제로 저는 위 인용구를 꼽았습니다. 허나 --- 삶이란 게 오래될수록 지치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죠. 다음 인용문이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문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만큼은 최선의 처방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잃은 것은 이미 잃은 것이다. 전전긍긍해 봐야 되찾을 수 없다.(pp302~303)
79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읽고난 후에 써내는 감상문의 마지막으로 너무 허전하지 않은가, 혹은 작가의 의도를 어느덧 '중년 남성'이란 타이틀을 부여받은 이의 좁은 시야로만 이 작품을 이해한 것 아니냐 비난을 염려하여 --- 좀 더 멋져보이는(?) 무언가를 굳이 끄집어내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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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당신은 과거에 당신이 취했던 행위의 결과이다. 생각했고, 판단했고, 선택했고, 실행했던 사람은 바로 당신이며, 그 결과 지금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
- 임석민,「돈의 철학」중 p304, 다산북스, 2020.
이 작품 속 두 이야기의 연결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또 그 연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노 경제학자의 위 조언을, (어느덧 '노(老)라는 접두어가 어색하지 않아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마을을 만든 건 너 자신이야. 네가 모든 걸 만들었어. 벽이며 강이며 숲이며 도서관이며 겨울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 웅덩이도, 이 눈도 다.(p786)"이라 적고 있는 바,
한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의 '끝'을 맞이하게 되든지 나의 과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그 '끝'의 원인이라는 점, --- 뭔가 엄청난 뜬금포스럽지만, 젋은 청춘들에게 집어줄 수 있는 이 소설의 조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왜 짐승들은 밭의 작물에는 입을 대지 않는 거지?' 나는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왠지는 나도 몰라요' 그녀가 말했다.(pp536~537)
왠지도 모르면서, 그 '왠지'를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삶 --- "당신이 뭘 질문하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대답을 하고 말고는 내 자유야"(p76)라는 문장과 함께 곰곰히 생각해 볼 무언가를 작가로부터 건네어 받았노라는 점도 덧붙여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소설 속 '가장 하루키다운 한 문장'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전,
위스키는 처음에는 가만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다가 싫증이 나면 마신다. 아름다운 여자와 마찬가지다.(p470)
을 꼽게 됩니다. 왜냐고 묻는 건 당신의 자유이겠으나,
대답을 하고 말고는 저의 자유인 걸로...
※ 읽어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
※ 느닷없는 것 같지만, 이 작품 속 내용 (그리고 정밀아의 노래 동영상이 있는) 과 연관있는 책(의 감상문) :「해마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