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분명 '살기 위해 먹는' 존재입니다. 미식을 취미로 가진 이가 하는 '먹기 위해 산다'라는 말은, 본인이 그 취미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메타포일 뿐, '취식'이라는 행동이 '산다'라는 목적을 위한 일 수단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든 진보든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강수돌 외, 「리얼 진보」중 pp104~105, 레디앙, 2010.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떠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건 간에 ---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는 역사를 통해 한 사회가 채택한 수단의 하나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절차상의 편리라는 이유로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지요. 여기서의 핵심은 결국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헌데 --- 국민학교 시절의 반장 선거에서부터 접해왔었던 이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요? 대체 왜 '다수결의 원칙'을 옳다고 받아들이며 따라왔던 걸까요?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 주제 사라마구, 「눈뜬 자들의 도시」중 p377, 해냄, 2007.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그러한 민주주의가 가장 우월할 뿐 아니라 '정당한 것'이라 배워왔던 우리에게 이 책은 (과연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제도는 현재에도 당연히 정당한 것이며, 앞으로도 당연히 정당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아닌)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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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이 광범위하고 실질적으로 거버넌스에 관여하고, 시민들이 인지적으로 충분히 평등한 상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란 광범위한 시민이 (좋은 정책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상관 없이) 통치 과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pp36~37)
저자가 보는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는 절차적 민주주의입니다. 이는 곧, 절차적 정의(justice)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경제학자인 저자는 절차상의 정당성이 아닌,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가 낳는 결과에 관심을 가집니다. 즉, 정치학에서의 민주주의는 절차의 문제이겠으나, 그것이 결과의 좋고 나쁨까지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수정(modification)을 가했을 때, 현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는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죠. --- "민주주의의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다면,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p204)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목표는 절차적인 정당성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권자들이 정부에 관여하는 것은 편익은 물론 비용도 낳는다. 문제는 그 비용이 너무 흔히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볼 때 세계의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래퍼 곡선에서 지나치게 민주주의가 많은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p46) …… 내가 제안하는 개혁은 유권자들로부터 약간의 권력을 빼앗기를 하지만 여전히 정부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개혁이다. 10퍼센트 적은 민주주의란 바로 그런 것이다.(p80)
현재보다는 좀 더 '비민주적'인 수준의 민주주의가 보다 나은 결과의 효율성을 낳을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지요. 이러한 논리의 전개에 있어 저자는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책이 정치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라 요약될 수 있겠는 첫 번째의 제안에는 큰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문제는 두 번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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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 】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뛰어난 지도자에 의한 독재입니다."(p104) …… "국민의 선택이 늘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둘 수는 없죠.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고요."(p177)
- 야마다 무네키, 「백년법 (上)」중, 애플북스, 2014.
(작가의 주장대로) SF 소설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소설로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단기간에 국가를 재건하려면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의회민주주의는 적절치 않습니다"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국민은 개·돼지' 발언이 떠오르기도, 더 나아가서는 독재의 정당화로 읽혀질 수 있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 소설이지요. 이처럼 '권력의 소유'가 특정 계층/계급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는 다른 결에서 민주주의의 평등 원칙에 대한 의문 또한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투표에 있어 기호에 집착하는 한국 정당들 (그리고 유권자들)의 행태를 보면 정녕 '1인 1표'의 평등 투표가 합리적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죠.
지금에야 덜해졌다 해도 예전엔 --- 충청도에서는 인물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3번, 경상도는 1번, 전라도는 2번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라 말해도 될만큼) 보편적이었었고, 특히나 문맹률이 높은 노인층에게는 번호야말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함에 있어 거의 유일한 선택의 지표였었죠.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정동영의 소위 '노인 폄하 발언'도 그 의도 - 노년층은 보수 정당에 투표를 한다라는 가정 - 의 불순함과 싸가지 없는 wording이 문제였었지, 대한민국 투표장의 현실을 보자라면 저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보 격차'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유사한 의문을 낳게 되었죠. 출마한 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 소속 정당 이외의 추가적 정보를 (의도적이건 아니건)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동등하게 1표씩을 행사한다라는 것에 대한 정당성 말입니다. 유권자들의 정보 격차가 이른 바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무시/무지 rational ignorance'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특정 계층에 불리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자칫 --- 애써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1표 행사에 앞서 평균보다 많은 정보를 취득한 집단이 그 불리함을 감내하게 될 가능성도 분명 갖고 있기에, 예의 '1인 1표'에 대한 정당성이 공격을 받게 되지요.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각 개인의 행복, 각 개인의 합으로 정의(define)되는 한 사회의 행복의 증진 (혹은 최대 행복의 달성)이 목적이라면, '1인 1표제'라는 형식/수단 자체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선거라는 제도 역시 수단으로서의 지위에 충실해야한다/할 뿐이라는 당위를 부여받게 되죠.
"근대 정치학은 도덕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이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정치 엘리트나 그 어떤 민중적 교리를 갖는 정당도 대중이 요구해 제약되는 정치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덕적 헌신은 무뎌지고 편협한 조직의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강수돌 외, 위의 책 p105.
이 책의 저자 가렛 존스의 관점 또한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때! --- '대중의 규묘가 커질수록, 대중에게 도움을 주려고 조성되는 재화의 가치 비율을 낮아진다'라는 경제학 이론은 예의 경제학자인 저자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끌어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지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1인 1표'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편익과 비용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비용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다. 지식을 갖춘 유권자와 지식이 부족한 유권자 모두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주장에 드는 비용은 너무도 심각하여, 약간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갖춘 유권자에게 가중치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이다.(p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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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수준이 높은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다. 많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규칙은 명확하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더 많이 알고 있고, 선의의 제안을 포함한 다양한 정책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질지 아닐지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유권자일수록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투표를 한다. 정치인들은 투표권이 없는 사람보다는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에게 영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권자들의 능력, 지능, 인적자본이 늘어난다는 것은 정치인들로서는 자신들이 구매할 제품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p175~176) …… 유권자들의 능력이 거의 혹은 완전히 동등하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투표가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유권자들의 능력이 거의 동등하다는 구호는 거짓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거짓말을 그만두어야 한다.(p185)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읽어내기 쉽지 않을, 전적으로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하기에, ---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때 경제학의 매력이 극대화된다라 생각하는 저에게는, 저자의 주장 자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경제학적 관점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제도를 분석했다라는 점에서 예의 매력적인 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A pre-emptive strike might reduce the extent of damage to South Korea and lead to a quicker victory. Obviously, the first benefit is of special interest to South Korea, and the second benefit is of even more interest to the global economy -- the shorter the war, the less disruption to markets and trade. Let's say that a pre-emptive South Korean attack would cut the cost of war in half. Now, this is a cost that the world would incur with certainty, not a cost with a probability attached; in the event of a pre-emptive attack, there will be war for sure. Is the cost worth paying? Under our assumptions so far, the answer is almost certainly yes."
- Daniel Altman, "The Economics of War with North Korea : Would fighting Kim Jung Un be worth it", 「Foreign Policy」 April 15, 2013.
당사자가 아니라해서,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마저도 화폐 단위로 환산하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위와 같은 분석을 보자라면 경제학을 공부했다라는 것에 창피함을 가지게도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경제학이 이처럼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라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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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토크라시가 옳다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유능한 통치자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p206)
이 책에서 저자가 '교육 수준'을 'informed'의 수준을 측정하는 일종의 대리 변수(proxy variable)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안다면, 위 인용문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다만, '이전보다 훨씬 더 유능한 통치자'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보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참정권의 확대는 결국 커다란 비용을 치르기 마련이다. 특히 유권자들의 평균 정보 수준이 저하된다. 유권자들의 정보 수준이 낮을 때 정치인들은 편협하고 허약한 지적 토대를 갖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영합하기 마련이다.(p209)
'목적으로서의 정의(justice)는 수단으로서의 정의(justice)를 요구한다'라는 명제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 '정보'에 의존하기 보다는 '편가르기'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자행하고 있는 '민주적 통제'라는 미명 하의 법치 무시는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사법권과 관료의 독립'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유권자의 정보 수준이 민주주의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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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는 것과 믿음을 믿는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데닛의 말처럼 …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 감정이냐, 진리냐, 둘 다 중요하겠지만,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중, 김영사, 2012.
민주주의에서 '1인 1표제'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의문,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권리의 행사가 어느 수준까지 보장되어야 하는 가에 의문 ---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각 개인의 생각을 가다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라는 차원에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과감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정치인이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출현할 수 있겠는가라는 (부러움 섞인) 의문 또한 끝내 지워낼 수 없네요.
※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책들 : 「정의란 무엇인가」, 「권력의 종말」, 「리얼 진보」, 「불평등의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