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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당연하다라 생각하는 것들,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상들에 대해 그 '당연함'이란 것이 대체 어떤 근거로/왜 주어졌느냐란 질문을 받게 된다면, 대부분 흠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당연함에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다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죠. 이건 마치 ---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당신은 대체 왜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느냐를 묻는 것과 같은 걸 겁니다. 여기서!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당연함들'중 좋은 부분들, 혹은 나에게 유리한 부분들에서의 당연함에는 이처럼 이유란 것조차 물을 생각을 하지 않으나 --- 남들보다 불리한, 누군가는 지니고/누리고 있으나 나는 지니고/누리고 있지 못한 그 어떤 것에 대하여서는 그 '당연함'을 불합리하다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재벌가에 태어난 멍청한 놈은 너무도 당연하게 유학갔다와 덜커덕 실장이니 뭐니하는 직함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는데, 나는 왜 머리아픈 GRE를 공부해야하며, 왜 하필 그때 IMF는 터져 set 메뉴의 햄버거를 먹지 못했어야 했고,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왜 나에게 제발 좀 입사해주세요~란 부탁을 하지 않나 등등과 같은 불만말이죠.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한다"(p21)류의 위로로 스스로를 세뇌시킵니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 나는 하고싶었던 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시기의 연애감정은 꾹꾹 눌러놓아야만 한다라든가, 혹은 재벌가의 사람들은 돈은 많을지언정 내가 누리고 있는 소소한 행복같은 건 맛보지 못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 놈의 세상이란! --- 유학중에도 선남선녀의 dorm couple들은 넘쳐나고, 내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같은 건 행복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재벌가들의 여유로움 등을 그 답으로 보여주는 잔인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2016년의 대한민국을 40대 중후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의 것이라면, 2016년의 대한민국을 중2로 살아가고 있는 종원군의 생각은 분명 이것과 다를 겁니다. 하지만 이는 --- 그에게 컴퓨터란 것은 태어날 때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데데데의 수준을 벗어났을 때 또한 스마트폰의 세상이 활짝 펼쳐져 있었던 시절부터 생성되기 시작했던 그의 사고(思考)체계, 그리하여 그 녀석이 그 빠른 랩을 무리없이 따라할 수 있는 이유란 것이 그가 접한 '대중가요'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러했기 때문일 뿐, 그의 혀구조가 저의 혀구조보다 진화했기 때문은 아닌 것과 같은 이유로의 다름이 결과된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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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80, 생각정원 刊, 2015.
서른 살의 청춘에게 내려진 "당신은 내일 죽어요"(p20)란 선고는 선뜻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근처 마사지숍 적립카드를 한 개만 더 찍으면 무료 서비스권으로 교환할 수 있다느니, 화장실 휴지와 세제를 잔뜩 사둔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등의 시시한 생각들"(p12)이 그 바로 뒤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장식하게도 되지요. 그리고/그러나 잠시 후, "나는 아직 서른 살이다. … 채 이루지 못한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을 위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pp12-13) ---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만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말이죠. 이런 의문을 죽음 하루 전에야 해본다라는 거, 그리고 그건 소설 속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바로 --- 이 약간 유쾌한, 그러면서도 약간의 감동 또한 지니고 있는 작품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 독자에게 건네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넘쳐흐르는 온갖 것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p27)
주인공 앞에 나타난 악마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제안을 합니다. --- "이 세상에서 뭐든 한 가지만 없앤다. 그 대신 당신은 하루치 생명을 얻는 겁니다."(p22)
즉흥적으로 떠올랐던 첫번째 제거 대상은 쵸콜릿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초콜릿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p31)라 말하는 자신/누군가를 상상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하루치의 삶을 더 얻는 조건으로 초콜릿을 없애려 하나, 이내 "이렇게 맛있는 걸 없앨 수 없어!"(p34)란 악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그리하여 시작된 고민은 결국,
첫째 날엔 전화기를, 둘째 날엔 영화를, 넷째 날엔 시계를 없앱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 고양이를 없애자란 악마의 제안에 "누군가에게서 뭔가를 가로채 생명을 연장하는 걸 행복이라고 여길 수는 없"(p194)음을 깨닫게 된 주인공은 이젠 "이 세상에서 뭔가를 없애는 일을 그만두기로"(p194) 합니다. 허나 이 결정이,
그 대상이 생명을 지닌 고양이라서,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고양이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전화기를 없앴고, 영화를 없앴고, 시계를 없애오면서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들의 총합이, 드디어 고양이를 없애자란 제안 앞에서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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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69, 생각정원 刊, 2015.
전화가, 그렇기에 당연히 휴대전화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처음 주인공은 그저 "다른 무엇보다 불편했다"(p79)라 느꼈더랬습니다만, --- 헤어졌던 옛 여자친구를 만나, 자기의 어떤 점이 좋았었느냐를 묻는 주인공은 "당신 전화가 좋았어. 별스러울 것 없는 음악이나 소설을 세상이 뒤바뀔 것처럼 이야기해주는 당신이 좋았어"(p62)란 대답으로부터, 전화란 것이 자신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었던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전화가 생겨 곧바로 연결되는 편리함을 손에 넣었지만, 그에 반해 상대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시간은 잃어갔다. 전화가 우리에게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가고 증발시켜버린 것이다.(p74) …… 곧바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 시간이야말로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 자체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편지가 상대에게 도착하고, 상대의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듯이. 선물을 물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고를 때 상대가 기뻐하는 얼굴을 상상하는 시간 자체에 의미가 있듯이.(p80)
이처럼 전화, 시계 그리고 영화를 없앤 주인공은 "소중한 것 대부분은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p114)이란 걸 자각하게 되고, 이내 "내게 주어진 사물과 사람과 시간, 당연하게 여겼던 그것들이야말로 나 자신을 상징하고 나답게 만드는 것임"(p200)을 알게 됩니다. 불필요하다고 해서, 귀찮다는 이유로 없애버렸던 전화기와 영화, 시계가 없어지자 그에게 닥쳐온 것은 불필요함과 귀찮음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들로부터의 행복함이 아닌 불안과 후회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제가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부분 --- 전화는 '문명과 과학기술'을, 영화는 '문화'를, 시간은 '기억'을, 그리고 고양이는 '나의 존재의 기반인 관계이자 삶의 의미'를 상징한다는 옮긴이의 해석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리함을 위해 발명된 문명과 과학기술들을 향해 "인간은 속박을 대가로 규칙이라는 안도감을 얻은 것"(p125)라 규정하는 주인공의 깨달음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르네가 그녀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있는데, 그녀 자신은 그 자유가 너무도 싫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 입장에서 자유는 그 어떤 쇠사슬보다 나빴다"는 구절, 그리고 더 나아가 ---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라 보에시의 주장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라 보여지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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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끝내 고양이를 없애지 못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라는 설정은 뜻밖에도(?)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되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는 존재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양이', 즉 자기 존재의 근간이자 바탕을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제안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곧 '나'의 소멸이기 때문이다.(p222)
돌아가신 어머니와, 살아계시나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관계인 아버지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가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은 '행하는 것이었다"(p176)라 깨닫게 됩니다. --- "내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p204)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하여 "죽음이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p193)이라 결론내린 주인공의, 죽기 전 마지막 행보 - "늘 언덕에서 바라보던 그 동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고 줄곧 가지 못했던 동네. 나는 지금 간다. 옆 동네에 사는 아버지에게 간다. … 그 동네가 점점 가까워진다"(p218) - 는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약간 유쾌하며, 또한 약간 감동스런 이 소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끝맺음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춥지도, 전혀 덥지도 않은 요 며칠간의 날씨에 딱! 어울리는, 2016년 대한민국 대통령직은 이젠 그만 그녀로부터 사라져버려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더 하게되는, 그런 소설이었었네요. 누군가 말하길, "핸드폰 배터리도 5%면 가차없이 바꾼다!"는데 말이죠. --;;
- "세상에서 초콜릿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나는 상상해본다. 세계 각국의 초콜릿 중독자들은 탄식하고, 울부짖고, 슬픔에 휩싸이고, 급기야 혈당치가 떨어져서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겠지. 한편, '2월 14일의 피해자들'은 갈채를 보낼 게 틀림없다."(p30)
- "길을 아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p93) …… 최후의 만찬이니, 무인도에 챙겨가고 싶은 물건이니, 궁극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는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많이 봐왔지만, 막상 내가 그 처지가 되니 이보다 괴로운 일은 없었다."(pp94--95)
- 이 소설에서 '대상의 사라짐'은 존재 자체의 사라짐까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전화의 존재 자체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신경 쓰지 않는, 일종의 집단 최면상태로 만들어버렸다는 뜻이겠지. ... 전화는 결국 긴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그 존재가 사라져가겠지. 길가의 돌멩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그 자리에서 소실되어 가듯이."(p53)
- "휴대전화는 등장한 지 불과 이십 년 만에 인간을 지배해버렸다. 없어도 되었던 물건이 불과 이십 년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인 양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휴대전화를 발명하면서 휴대전화를 갖지 못하는 불안도 동시에 발명해버렸다.… 인간은 뭔가를 만들어낼 때마다 뭔가를 잃어왔다.(p49) …… 사람은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망각은 전진을 위한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막상 내가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떠오르는 것은 무수히 널린 사소한 추억뿐이었다. 휴대전화가 기억하고 있는 정보 쪽이 훨씬 유익해 보였다."(p67)
- "우리 아이들이 살게 될 세상은 어떨까 … 상상이 되니? 나는 iphone의 여러가지 기능들을 사용할 때마다 대학 다닐 때 남자친구와 연락이 안되서 길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어떤 날을 생각해. 우리 아이들은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는 설레임, 누군가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릿한 기억같은 … 그런 것 없는 세상에서 살겠지? 읽고 생각하는 시간보다 보는 문화를 즐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편리한 세상이 좋은 세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고등학교때에도 유난히, 정말로 유난히 문학소녀.스러웠던 한 여자동창이 저희 동기들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그리고 그 동창의 글에 대한 당시 저의 생각은 이러했었죠.
"제 여자동창.의 글에 등장하는 그런 설레임.이라던가 아릿함.은 사실, 지금 기준의편리함 혹은 합리적이란 단어들 앞에선 불편함과 비합리적이란 정반대의 신세가될 수밖에는 없을겁니다. … 볼펜으로 써내려가던 연애편지의 마지막즈음에 한 글자 틀려버려 차마 화이트로 지워내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금 써내려가야만했었던 그 생산성없는 노동, 엄연히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인 한때를 언제올지 모르는 연인을 위해 길거리에 서서 마냥 기다리며 흘러보내야만했던 시간의 낭비.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나에겐 설레임과 아릿함이었을지 모르나, 이십여년 넘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그저 '민초들의 삶' 그 다섯글자와 같은, 역사도 신화도 아닌 순전!히 개인史의 영역.에만 머물게되는 한줄 낙서.와도 같은 순간들. 인거였을뿐.이라 말한들, 사뭇 메말라버린 감정의 소유자.란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이 틀린 말이다.라는 힐난은 면할 수 있지않을까 싶기도 하지요." - <역사도 신화도 아닌> 포스트 중. - 이와 관련하여, '알로하'로 불리운 악마의 다음 말 역시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 그와 대비되는 아쉬움 등을 찌릿!하게 지적해주고 있지요. --- "나는 당신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상징이 아닐까 싶은데. … 숱하게 남은 당신의 자잘한 후회들,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저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갈림길 삼아 반대로 살았다면 당신은 이런 모습일 거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상일지어다!"(p197)
- "나는 어머니에게 거는 전화 한 통보다 당장 눈앞의 수신 목록으로 전화를 거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뒤로 미루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눈앞의 것을 우선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온 것이다. 눈앞의 것에 쫓기면 쫓길수록 정말로 소중한 것을 할 시간은 사라져간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 소중한 시간이 사라져가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에서 잠깐만 멈춰서 보면, 어떤 전화가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지 금방 알았을 텐데. 그리고 당장 눈앞에 닥친 본질적이지 않은 무수한 일에만 쫓겨온 결과, 인생 마지막 시점에 '이건 아니었는데'라며 한탄하는 것이다."(p136)
- "인간은 시간이라는 규칙에 준해서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논다. 다시 말해 시계에 맞춰서 살아간다. 인간은 구태여 자기들을 제한하는 시간, 연월, 요일이라는 규칙을 발명했다. 게다가 그 시간이라는 규칙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까지 발명했다. 규칙이 있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속박이 동반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 속박을 벽에 걸고, 방에 놓고,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행동하는 모든 장소에 배치했다. 급지가 자기 손목에 시간을 휘감아두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자유는 불안을 동반한다. 인간은 속박을 대가로 규칙이라는 안도감을 얻은 것이다."(p125)
- 폴린 레아주 作 「O 이야기」중 p149, 문학세계사 刊, 2012.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중 p70, 생각정원 刊, 2015.
- "나의 장례식. 내 머리맡에 모여드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 그들은 나에 관해 어떤 추억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내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삼십 년이나 살아오면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됐다. … 내가 존재한 세상과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거기에 있을 미세한 차이. 거기에서 생겨난 작디작은 '차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증거'인 것이다."(pp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