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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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국가를 바꾸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 … 나쁜 지배자를 조금 더 나은 지배자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변화일 뿐 … 지배자를 없애지 않는 한 피지배 계층은 언제나 자유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는 낡은 것의 무덤에서 출현한다.(p11)

'그녀'란 인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일 개인의 인생에마저 지워낼 수 없는 영향을 남겨줍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조차 ('보수'란 것에 대한 지긋지긋한 환멸로부터 시작된) '진보'에 대한 관심을 안겨주었으며, 급기야 ---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즉 정부를 부정하는 불온하고 허황된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p37)는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까지를 선사해주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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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번역된 것1에서부터 잘못된 이해가 시작된다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더 정확한 표현"(p12)이라 서술하고 있지요.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포르의 다음 주장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아나키즘의 여러 가지 특성들 중, 이 부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다."(p44) 

권위를 부정한다는 특징은 예의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는 단어로 번역해내고,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만,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p12) --- ​즉,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p12)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무정부주의'란 단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된다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는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권력"(p118)이란 것이며, 이 점은 예의 

"이 세상에서 나라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p20)

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의 등장을 초래하게 되지요  



【 복종2의 전제 조건 : '내가 합의한 질서' 】

아나키즘에 대한 첫 만남인 이 책을 읽고 가진 느낌은 (그 어떠한 '주의(主義)'도 거의 다 그러하겠으나, 현실에서의 적용이 아닌 그 뜻하고자 하는 바 자체로만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이상적3'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일개 '단위'로서만 작용될 수 밖에 없는 현대에, '내가 합의한 질서'를 이상형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이상적이면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일단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대한민국이 고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주어진 기본 전제 조건이 되겠죠. 이 정체(政體)에서 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체의 현시인 국가를 다스리는 (여러 계층의) 권력자 뿐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p16) 

와 같은 주장은 현실적으로는 --- 대한민국이 고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그것이 하나의 전제조건4으로 주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복종의 거부를 통한 '권력에의 저항'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기껏해야 "우리가 서슬 푸른 날을 준비한 것은 베기 위함보다도 짓기 위함에 있소"5와 같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존재 자체는 인정함'6이란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시장의 폭력에 맞서도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p12)라는 일종의 '일상 속 아나키즘'7을 실천할 수는 있겠지요.)


정치 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바는 '지배 - 피지배'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는, 다시 말해 "피라미드의 서열이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피라미드 자체의 변화8"(p116)인 것이기에, 정치 담론으로서건 혹은 '일상 속 아나키즘'의 차원에서건 종국적으론 '권력의 정점'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폐지로 귀결될 수 밖엔 없는 겁니다.


​바쿠닌은 국가를 폐지할 때에만 억압과 착취가 사라질 수 있고 그래서 아나키즘은 국가에 적대적9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치 권력은 결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사람, 주인과 노예,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의 구별을 철폐하지 않는다.(p74)


【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 국가란 무엇인가 】

​한학자 강명관 교수는 일 개인 누구에게나 '가장 영향력이 큰 책'은 교과서일 수밖게 없다라 주장합니다. 교육이란 것 자체가 국가에 의해 시행되는 강제적인 행위이며, 그 강제성이 함축적으로 집약된 것이 바로 교과서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죠.10 그가 전개하고 있는 논리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그의 주장은 우리에게 다시금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중 p17, 창비 刊, 2014.

​특정 개인의 특정 사건으로부터의 경험 역시 위와 같은 방향으로서의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질문을 던져줄 수도 있습니다. 이 의문은 곧바로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11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요. 이처럼 특정 사건과 결부되어 생겨나는 의문 뿐만이 아닌, 2016년 현재, '이게 나라냐'라 외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의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의문은 결국 --- 우리를 지배해 왔고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12'란 것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입되어 있는 '국가주의'의 근원에 대해 강명관 교수13와 허태일 교수14가 각각 자신의 책에서 나름의 논리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만, 이 두 분의 논거는 예의,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68-69

와 다를 바 없다라 생각합니다. --- 한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났기에 국가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되며, 선거에서 나의 한 표는 소중한 것이기에 반드시 행사하여/되어야 한다라는 의식 역시 그에 반하는 자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까지 사용되기도 하고, 그러하기에 결국 대한민국이란 정체가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더 좁게 표현해보자면 '특정 연령 이하만의 국민들이 제외15되어 시행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출생 당시부터 주어져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16 조건"이 되어 있는 겁니다.

   

(국가의 존재에 대한 당위는 일단 차치하고17)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 '자연스러움'의 수준으로서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제도'인 것일까요? ---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기본적 사상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대의민주주의는 그 의도부터가 불순하기에 저 또한 '자연스러운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18)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합니다.


"중간 계급이 왕권에 반항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고 동시에 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의회 제도는 중간 계급19이 지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단지 중간 계급은 민중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20 왕권을 저지하기 위해 의회 제도를 이용했을 뿐이다."(p83)

그 어떠한 연유에서건 아나키즘 자체가 대의민주주의 제도와 함께 설 수 없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p108)을 주창하는 것에 그 근본 이유가 있지요.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그리고 지금 제가 배워 알게된 아나키즘에 대한 지식의 수준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라는 건, "큰 문제21를 해결하기엔 너무 작고 작은 문제22를 해결하기엔 너무 큰 존재"(p11)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국가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그 차선의 선택일 수 있을 --- (아나키스트의 주장대로라면) 비록 일시적인 변화일 뿐일지라 하더라도, '나쁜 지배자를 조금 더 나은 지배자'로 바꾸려는 노력까지를 우리가 포기해서는 아니되겠지요. 여기서!!!


【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복종하기를 멈추는 것으로부터 권력에의 저항이 시작되어야 한다라 주장했었었지요. 무슨 대단한 혁명이나 희생을 초래하는 항거가 없더라도, 단지 이제까지 해왔던 권력자에게의 자발적 복종을 거부함으로써, 그리하여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빼앗아올 수 있다라 했습니다... 만! --- 이는 2016년 11월 25일의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16세기식 저항의 방법일 뿐입니다.


유협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깡패다. 의리 있는 깡패,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서 폭력(그것도 대개는 절제된 폭력)을 쓰는 자다. … 전근대 사회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자들, 법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아니, 법을 넘어 있는 자들), 주로 관료나 토호 같은 자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민중은 유협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 강명관, 위의 책 p75.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은 "혁명의 조건과 방향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이론보다 대중의 분노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혁명을 살아 있게 한다"(p75)라는 이유로 대중의 폭력적인 저항을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 '폭력은 나쁜 것이다'란 명제는, 과연 상황의 여하를 떠나 항상 옳은 명제일 수 있을까요?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모든 폭력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행동도 분명 폭력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다. … 단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들은 그 행동에 당당히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 아나키즘은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고 선택한 길이라면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 길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한다.(pp19-20)

한 인물,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23 우리가 IS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 IS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서이기 때문이 아닌, 그들이 미국의 적이고, 그들이 테러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항일 투쟁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의열단'24의 예에서 알 수 있듯 --- 일본인들에게는 의열단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떠나 한낱 극악한 테러집단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듯,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폭력의 행사 주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적이다시피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그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이 대통령에의 저항은 반드시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일까요?


"아나키즘은 잘못된 결정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저항하고 싸울 때에만 나의 자치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25(p19) …… "아나키스트들도 때로는 고귀한 동기에서 비롯한 폭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폭력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제한되었다. 전쟁터에 떨어지는 폭탄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살해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폭력은 기업주나 정치인 같은 구체적인 인물을 향했다. 이런 폭력은 추상적인 대의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폭력에 물러서지 말고 맞저라는 적극적인 의미가졌다."(pp127-128)

이 책 「아나키즘」은 이처럼 나의 행복은 저항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100만의 촛불도 모자라, 150만의 촛불이 바로 앞에서 하야할 것을 요구함에도, 대한민국의 현재 권력은 그 요구를 묵살하고 있지요. 그 함성이 일개 공권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듯, 저항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폭력 역시 (이제까지 폭력의 행사자였던) 공권력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인 '그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래도 우리는! '그녀'를 향한 폭력을 용인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자오팅양의 견해를 빌자면, 2016년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루어내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반란, 봉기 또는 정변'26이 아닌, 바로 '혁명'27입니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p95)

​단채 신채호 선생이 1923년 쓰셨던 <조선혁명선언>의 마무리는 위와 같다고 합니다. 단재가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글을 썼었노라 한다면, "생존 투쟁이 생물 진화의 원인"(p97)이라 설명하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엔 과연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을 한데 묶어 --- 민중의 폭력적 저항 역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 결국엔 인류가 진화할 수 있게 해주는 일 원인이 된다라 답한다라면, 이에 대한 비난은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새로운 지식을 처음 만나본 기회였었습니다.

저의 부족 혹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1.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도 일본이다."(p57)
  2.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을 읽고 쓴 감상문에서 의미한 바의 '복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 "'권력'이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 즉 피지배계급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권력자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그 대상, 즉 피지배계급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을 '순응'이라 부르던, '수용' 혹은 '인정' 등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하건, 의미상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일 수밖엔 없지요. --- 기본적으로 '권력자'와 '독재자'를 구분하지 않는 라 보에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자면, 그것은 '복종' (혹은 '굴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3.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상(理想)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共著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중 p24, 메디치 刊, 2016.
  4. 이 때의 '전제조건'이란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특정 정체만의 문제가 아닌, 아나키즘이 거부하고 있는 '지배 -피지배'의 관계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자발적 복종」중 p81, 생각정원 刊, 2015.
  5. 이광재 作 「나라없는 나라」중 p157, 다산북스 刊, 2015.
  6.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지배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장치라고 주장하면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p50)
  7. '일상 속 아나키즘'이란 단어가, 의도적으로 아나키즘 사상이 뜻하고 있는 바를 축소시키려는 의미로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사회생태주의'를 주장했던 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의 주장과 같이, '일상 속 아나키즘' 역시 '지배 - 피지배'의 관계를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지요. --- "북친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생태 위기는 그 위기를 불러온 사회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p86)
  8. 저자는 우리나라에 아나키즘 사상이 수입되었던 과정 역시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 이념으로 소개"(p13)되었다라 설명해줍니다.
  9. 바쿠닌의 주장하는 개념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칫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저자는 그 둘은 명확히 다르다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하려면 자본주의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 그런 단계를 거치면서 많은 노동 계급이 만들어지고 이 노동 계급이 사회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보편 계급'으로서 사회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르의 주장인 반면) …… 그 많은 노동 계급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 노동 계급의 증가와 산업화를 위해서는 농민이 도시를 떠나고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어야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 희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조차 … 농촌이 도시로 변하고 농민이 도시로 가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가 되는 것도 하나이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변화가 인류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 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다.(pp105-106)
  10.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일 것이다. …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배후에 두고 있다. 곧 교과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책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善)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쑤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 행위가 강제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해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 요컨대 국가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을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드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 강명관 著 「독서 한담」 중 pp82-85, 휴머니스트 刊, 2016.
  11. 한강 위의 책, p17.
  12. ​"국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을 '국익'으로 파악한다. 국가주의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며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애국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는 이런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국가와 나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p143)
  13.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억압적인 질서를 반대하며 저항했던 사람들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한국의 역사가 가진 한계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의 독립이나 국가 건설을 먼저 이야기해야만 다른 사회적 변화를 말할 수 있었다. 자연히 사회를 바꾸려는 힘은 국가 기구(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다양한 정부 형태들)를 만드는 것에 맞춰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민족주의나 자유주의, 사회주의 모두 국가를 중심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변화를 이루려 했다." --- 강명관 위의 책 pp143-144.
  14.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한국 기성세대들은 …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 없이 지난 6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구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 --- 허태일 著, 「어쩌다 한국인」 중 p79, 중앙북스 刊, 2015.
  15. '특정 연령 이하'만에게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성년으로서 올바른 판단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똑같은 이유로 '특정 연령 이상'으로부터도 참정권을 회수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참정권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미래에 대한 설계의 위탁'이라는 의미는 오히려 '특정 연령 이상'으로부터의 참정권 회수를 정당화시켜주기도 하지요.
  16. 이 '자연스러움'은 ---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원인과 결과의 되도 않게 기막힌 도치를 자랑스레 담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으며,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와 같은 맹목적 애국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 생각하며 자라왔었어야 했던 국민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인으로 박혀 있어, 애국가를 제창하지 않았던 어느 국회의원에게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 작동했었을 만큼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수준이지요.
  17.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준까지의 아나키즘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동의할 수 없음이 제 가치관으로부터 기인된 것인지, 혹은 이제 고작 한 권의 아나키즘을 읽고 났을 뿐이기 때문인지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는 확인할 수 없네요.
  18. "다수와 소수라는 상대적인 수적 개념을 결정의 근거로 삼는 '다수결/대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기실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포장하여 가리려는 불순한 의도의 산물일 뿐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 「세상을 바꾼 법정」의 감상문 중.
  19. "부르주아"(p83)
  20.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체제가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대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표하고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무시한다. … 그리고 대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원칙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대표가 없는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게 한다."(pp84-85)
  21.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문제가 초국적 기업을 비롯한 자본의 문제"(p11)
  22. "교육이나 사회 복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p11)
  23.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24. "1919년 11월 만주에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 '정의로운 일을 열렬히 실천한다'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직접적인 테러를 포함해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했다.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를 암살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나 경찰서 등을 폭파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고 실제로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p92)
  25.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해주길 바라거나 말이나 구호로만 사상을 표현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여 했다. 그래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때로는 폭탄과 무기를 들고 권력게 맞섰고, 때로는 학교를 세우고 탁아소를 만들며 공동체를 꾸렸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것, 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 '직접 행동 direct actioin'의 의미였다. …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 해방은 노동자의 힘으로", "농민 해방은 농민의 힘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노동자나 농민이 알아서 자신의 해방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을 구하는 방식과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은 반드시 당사자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pp112-113) …… "즉 직접 행동은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이다."(p119)
  26.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일부의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상황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통치집단을 타도해서 그것을 대체하려 하는 것" ---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0.
  27.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서,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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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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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말과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 때 조선일들이 하는 말이 있소. 무엇인지 아시오?"(p276)

1894년 전봉준 등이 앞장 서 일으켰던 '동학농민운동'2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엄연히 소설이란 외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라는 점3에서, 2016년 11월의 대한민국은 이 작품을 '소설'이란 문학의 장르로서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부터의 교훈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해줍니다. (비록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도 않으며전봉준이란 개인이 어떠한 인물인가 역시 이 소설이 가리키고 있는 지향은 아니지만) --- 2016년 11월 12일, 지금이 광화문이 애초부터 이러했던 것이 아니었었듯, '고부'란 특정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군수 조병갑의 개인적 만행4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시작되었던 일종의 민란이 결국 청일전쟁의 근원이 되었었던 이유인,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키운 것은 정부의 태도"5였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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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세상을 이룰 것이다."(p43)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은 동학이라는 특정 종교만의 봉기6도 아니었으며, 그러하기에 특정 세력이 주도하는 난(亂)도 아니었습니다. 소설 속 한 인물의 말을 빌자면 이는 "좌절과 분노"(p151)"가 한계선을 넘어 "뜻이 차오른 데"(p45)로부터 기인된 것이었었으며, (소설 속에서) 대원군으로 상징되는 지배 세력의 판단 역시 "조선은 지금 끓는 물이나 다름없소. 언젠가 솥뚜껑은 솟구칠 게니 안에서는 백성이 쏟아져 나오겠지요"(p21)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남경태는 「종횡무지 한국사 하권」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접선을 시도하기도 했다"(p385)라 간단하게 대원군과 전봉준의 접점을 서술해놓고 있습니다. 작가 이광재는 이를 "나라의 명운이 그대들의 손에 달렸음을 명심하라. 조선의 마지막 기회니라.(p25)라는 대원군의 말이나, "우리는 대원위 대감을 존중하는 무리들"(p76)이란 전봉준의 말로 작화(作話)하고 있지요. 하지만 --- 대원군과 전봉준 모두 상대를 완전한 협력의 대상이 아닌, 지금 당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단기적 도구로서만 여겼었다라는 점7을 볼 때, 두 사람의 만남과 이후의 협력에 설득력이 갖추어지지 못하다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여기서!

민중들의 저항은 그 품은 뜻에서는 옳았었으나,8 그 뜻을 실제의 행동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의지와 힘으로는 안 되는 일에 대한 두려움"(p171)에 대한 작가의 주시(注視)는, 이 책이 문학작품임을 여실히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만,9 --- 관군을 이끄는 인물이 가지는 "비록 적도를 소탕하더라도 예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란 예감"(p294)"단언컨데, 세상은 지금 안전하지 않다"(p352)라 표현될 수 있을 2016년 11월 대한민국의 현재를 단지 문학작품이라고만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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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상을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슬 푸른 날을 준비한 것은 베기 위함보다도 짓기 위함에 있소."(p157)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며 보국안민은 대체 무엇이냐고"(p157)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봉준은 소설의 마지막에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재(嶺)를 넘었느니라. 게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이 재 너머에 있던 것들이다. … 재는 또 있다.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pp34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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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의 대한민국.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불리우고 있는 그녀는, 2016년 11월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민중들이 이 언덕을 넘어서내었을 때 과연 어떠한 이름10으로 불리우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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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p276)


이 감상문의 맨 처음에 인용되어 있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추측이 아닌, 심지어 예정의 수준도 아닌,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란 필연을 선고받은 그녀에게, 훗날 불리워질 이름 따위가 뭐 중요한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오늘 끝낸다!"(p169)11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이 아닌 그 어느 곳에 있던, 거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바람(願)이자 주권자로서의 요청이 실현되는 순간이 머지 않았다라는, 바로 이 점이 그녀에겐 지금 당장 더 두렵겠지요. (어차피 맞아야하는 매입니다. 당신에게 아직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서로 피곤치 않게 맞을 건 빨리 맞읍시다.)  

읽어본 역대 '혼불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밤의 눈




 

  1. 제 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2. "1894년이 갑오년이기에 갑오농민전쟁이라도고 부르는데,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380, 그린비 刊, 2009.
  3. "「나라 없는 나라」는 … 동학농민혁명을 재구성"(p350)
  4. "조병갑은 군수로 부임하던 이튿날부터 호방과 한통속이 되어 만만한 사람 골라내기를 가장 서둘러 할 일인 양 재촉하였다. 호방이 양안(量案)을 놓고 부요한 농민을 골라내면 조병갑은 불효와 불목, 음행이며 잡기 등의 죄목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늑탈하였다."(p41)
  5. 남경태 著 위의 책 p380.
  6.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는 안핵하기는커녕 봉기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붙였다. 동학은 실정법상 금지되어 있으니까 일단 처벌의 근거를 말현하려는 의도다." - 남경태 著, 위의 책 p380.
  7. "-대원위는 외방에 나라를 팔 사람이 아니요, 민씨 무리를 심히 증오하는 인물이요, 권력을 취하려 하며 백성이 안돈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오. 여기까지가 우리와 같소. … 그는 구래의 선치로 돌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우리와는 나아갈 궁극이 다를 수 있지요. 김덕명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거야 민씨 도당을 쓸어낸 뒤의 일이니 그 전에야 무슨 문제가 있겠소. 같음에 주목하여 손을 잡고 차후 경쟁이든 다툼이든 하겠지요."(p32)
  8. "이 길이 가장 옳았다고 확신하십니까?… 백성들은 장하였소."(p308)
  9. "전투의 패배란 어느 한쪽의 피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정해지는 것 같았다. 체계를 잃고 군사가 오에서 일탈하는 순간이 전투의 패배라면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순간 전쟁의 패배는 찾아오는 것이다."(p303)
  10. "항차 백성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네들이 불러주는 이름이 참 이름이 될 것"(p13)
  11. 전봉준이 전투 중 부하에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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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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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연하다라 생각하는 것들,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상들에 대해 그 '당연함'이란 것이 대체 어떤 근거로/왜 주어졌느냐란 질문을 받게 된다면, 대부분 흠칫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당연함에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다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죠. 이건 마치 ---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당신은 대체 왜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느냐를 묻는 것과 같은 걸 겁니다. 여기서!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당연함들'중 좋은 부분들, 혹은 나에게 유리한 부분들에서의 당연함에는 이처럼 이유란 것조차 물을 생각을 하지 않으나 --- 남들보다 불리한, 누군가는 지니고/누리고 있으나 나는 지니고/누리고 있지 못한 그 어떤 것에 대하여서는 그 '당연함'을 불합리하다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재벌가에 태어난 멍청한 놈은 너무도 당연하게 유학갔다와 덜커덕 실장이니 뭐니하는 직함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는데, 나는 왜 머리아픈 GRE를 공부해야하며, 왜 하필 그때 IMF는 터져 set 메뉴의 햄버거를 먹지 못했어야 했고,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왜 나에게 제발 좀 입사해주세요~란 부탁을 하지 않나 등등과 같은 불만말이죠.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한다"(p21)류의 위로로 스스로를 세뇌시킵니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 나는 하고싶었던 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시기의 연애감정은 꾹꾹 눌러놓아야만 한다라든가, 혹은 재벌가의 사람들은 돈은 많을지언정 내가 누리고 있는 소소한 행복같은 건 맛보지 못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 놈의 세상이란! --- 유학중에도 선남선녀의 dorm couple들은 넘쳐나고, 내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같은 건 행복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재벌가들의 여유로움 등을 그 답으로 보여주는 잔인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 2016년의 대한민국을 40대 중후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의 것이라면, 2016년의 대한민국을 중2로 살아가고 있는 종원군의 생각은 분명 이것과 다를 겁니다. 하지만 이는 --- 그에게 컴퓨터란 것은 태어날 때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데데데의 수준을 벗어났을 때 또한 스마트폰의 세상이 활짝 펼쳐져 있었던 시절부터 생성되기 시작했던 그의 사고(思考)체계, 그리하여 그 녀석이 그 빠른 랩을 무리없이 따라할 수 있는 이유란 것이 그가 접한 '대중가요'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러했기 때문일 뿐, 그의 혀구조가 저의 혀구조보다 진화했기 때문은 아닌 것과 같은 이유로의 다름이 결과된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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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아쉬움은 즐거움을 안 뒤에 오고, 지나간 기쁨에 대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불행을 인식하는 것이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80, 생각정원 刊, 2015.

서른 살의 청춘에게 내려진 "당신은 내일 죽어요"(p20)란 선고는 선뜻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근처 마사지숍 적립카드를 한 개만 더 찍으면 무료 서비스권으로 교환할 수 있다느니, 화장실 휴지와 세제를 잔뜩 사둔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등의 시시한 생각들"(p12)이 그 바로 뒤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장식하게도 되지요. 그리고/그러나 잠시 후, "나는 아직 서른 살이다. … 채 이루지 못한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을 위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pp12-13) ---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만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말이죠. 이런 의문을 죽음 하루 전에야 해본다라는 거, 그리고 그건 소설 속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바로 --- 이 약간 유쾌한, 그러면서도 약간의 감동 또한 지니고 있는 작품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 독자에게 건네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넘쳐흐르는 온갖 것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p27)

주인공 앞에 나타난 악마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제안을 합니다. --- "이 세상에서 뭐든 한 가지만 없앤다. 그 대신 당신은 하루치 생명을 얻는 겁니다."(p22)


즉흥적으로 떠올랐던 첫번째 제거 대상은 쵸콜릿이었습니다.1 "오늘 나는 초콜릿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p31)라 말하는 자신/누군가를 상상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하루치의 삶을 더 얻는 조건으로 초콜릿을 없애려 하나, 이내 "이렇게 맛있는 걸 없앨 수 없어!"(p34)란 악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그리하여 시작된 고민2은 결국,


첫째 날엔 전화기를, 둘째 날엔 영화를, 넷째 날엔 시계를 없앱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 고양이를 없애자란 악마의 제안에 "누군가에게서 뭔가를 가로채 생명을 연장하는 걸 행복이라고 여길 수는 없"(p194)음을 깨닫게 된 주인공은 이젠 "이 세상에서 뭔가를 없애는 일을 그만두기로"(p194) 합니다. 허나 이 결정이,


그 대상이 생명을 지닌 고양이라서,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고양이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전화기를 없앴고, 영화를 없앴고, 시계를 없애오면서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들의 총합이, 드디어 고양이를 없애자란 제안 앞에서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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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69, 생각정원 刊, 2015.

전화가, 그렇기에 당연히 휴대전화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3 처음 주인공은 그저 "다른 무엇보다 불편했다"(p79)라 느꼈더랬습니다만, --- 헤어졌던 옛 여자친구를 만나, 자기의 어떤 점이 좋았었느냐를 묻는 주인공은 "당신 전화가 좋았어. 별스러울 것 없는 음악이나 소설을 세상이 뒤바뀔 것처럼 이야기해주는 당신이 좋았어"(p62)란 대답으로부터, 전화란 것이 자신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었던가4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전화가 생겨 곧바로 연결되는 편리함을 손에 넣었지만, 그에 반해 상대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시간은 잃어갔다. 전화가 우리에게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가고 증발시켜버린 것이다.5(p74) …… 곧바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 시간이야말로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 자체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편지가 상대에게 도착하고, 상대의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듯이. 선물을 물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고를 때 상대가 기뻐하는 얼굴을 상상하는 시간 자체에 의미가 있듯이.(p80)

​이처럼 전화, 시계 그리고 영화를 없앤 주인공은 "소중한 것 대부분은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p114)이란 걸 자각하게 되고, 이내 "내게 주어진 사물과 사람과 시간, 당연하게 여겼던 그것들이야말로 나 자신을 상징하고 나답게 만드는 것임"(p200)을 알게 됩니다.6 불필요하다고 해서, 귀찮다는 이유로 없애버렸던 전화기와 영화, 시계가 없어지자 그에게 닥쳐온 것은 불필요함과 귀찮음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들로부터의 행복함이 아닌 불안과 후회7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제가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부분 --- 전화는 '문명과 과학기술'을, 영화는 '문화'를, 시간은 '기억'을, 그리고 고양이는 '나의 존재의 기반인 관계이자 삶의 의미'를 상징한다는 옮긴이의 해석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리함을 위해 발명된 문명과 과학기술들을 향해 "인간은 속박을 대가로 규칙이라는 안도감을 얻은 것"8(p125)라 규정하는 주인공의 깨달음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르네가 그녀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있는데, 그녀 자신은 그 자유가 너무도 싫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 입장에서 자유는 그 어떤 쇠사슬보다 나빴다"9는 구절, 그리고 더 나아가 ---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10는 라 보에시의 주장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라 보여지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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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끝내 고양이를 없애지 못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라는 설정은 뜻밖에도(?)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되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는 존재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양이', 즉 자기 존재의 근간이자 바탕을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제안에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곧 '나'의 소멸이기 때문이다.(p222)

돌아가신 어머니와, 살아계시나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관계인 아버지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가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은 '행하는 것이었다"(p176)라 깨닫게 됩니다. --- "내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p204)11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하여 "죽음이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p193)이라 결론내린 주인공의, 죽기 전 마지막 행보 - "늘 언덕에서 바라보던 그 동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고 줄곧 가지 못했던 동네. 나는 지금 간다. 옆 동네에 사는 아버지에게 간다. … 그 동네가 점점 가까워진다"(p218) - 는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약간 유쾌하며, 또한 약간 감동스런 이 소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끝맺음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춥지도, 전혀 덥지도 않은 요 며칠간의 날씨에 딱! 어울리는, 2016년 대한민국 대통령직은 이젠 그만 그녀로부터 사라져버려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더 하게되는, 그런 소설이었었네요. 누군가 말하길, "핸드폰 배터리도 5%면 가차없이 바꾼다!"는데 말이죠. --;;



 

  1. "세상에서 초콜릿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나는 상상해본다. 세계 각국의 초콜릿 중독자들은 탄식하고, 울부짖고, 슬픔에 휩싸이고, 급기야 혈당치가 떨어져서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겠지. 한편, '2월 14일의 피해자들'은 갈채를 보낼 게 틀림없다."(p30)
  2. "길을 아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p93) …… 최후의 만찬이니, 무인도에 챙겨가고 싶은 물건이니, 궁극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는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많이 봐왔지만, 막상 내가 그 처지가 되니 이보다 괴로운 일은 없었다."(pp94--95)
  3. 이 소설에서 '대상의 사라짐'은 존재 자체의 사라짐까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 "전화의 존재 자체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신경 쓰지 않는, 일종의 집단 최면상태로 만들어버렸다는 뜻이겠지. ... 전화는 결국 긴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그 존재가 사라져가겠지. 길가의 돌멩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그 자리에서 소실되어 가듯이."(p53)
  4. ​"휴대전화는 등장한 지 불과 이십 년 만에 인간을 지배해버렸다. 없어도 되었던 물건이 불과 이십 년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인 양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휴대전화를 발명하면서 휴대전화를 갖지 못하는 불안도 동시에 발명해버렸다.… 인간은 뭔가를 만들어낼 때마다 뭔가를 잃어왔다.(p49) …… 사람은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망각은 전진을 위한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막상 내가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떠오르는 것은 무수히 널린 사소한 추억뿐이었다. 휴대전화가 기억하고 있는 정보 쪽이 훨씬 유익해 보였다."(p67)
  5. "우리 아이들이 살게 될 세상은 어떨까 … 상상이 되니? 나는 iphone의 여러가지 기능들을 사용할 때마다 대학 다닐 때 남자친구와 연락이 안되서 길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어떤 날을 생각해. 우리 아이들은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는 설레임, 누군가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릿한 기억같은 … 그런 것 없는 세상에서 살겠지? 읽고 생각하는 시간보다 보는 문화를 즐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편리한 세상이 좋은 세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고등학교때에도 유난히, 정말로 유난히 문학소녀.스러웠던 한 여자동창이 저희 동기들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그리고 그 동창의 글에 대한 당시 저의 생각은 이러했었죠.
    "제 여자동창.의 글에 등장하는 그런 설레임.이라던가 아릿함.은 사실, 지금 기준의편리함 혹은 합리적이란 단어들 앞에선 불편함과 비합리적이란 정반대의 신세가될 수밖에는 없을겁니다. … 볼펜으로 써내려가던 연애편지의 마지막즈음에 한 글자 틀려버려 차마 화이트로 지워내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금 써내려가야만했었던 그 생산성없는 노동, 엄연히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인 한때를 언제올지 모르는 연인을 위해 길거리에 서서 마냥 기다리며 흘러보내야만했던 시간의 낭비.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나에겐 설레임과 아릿함이었을지 모르나, 이십여년 넘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그저 '민초들의 삶' 그 다섯글자와 같은, 역사도 신화도 아닌 순전!히 개인史의 영역.에만 머물게되는 한줄 낙서.와도 같은 순간들. 인거였을뿐.이라 말한들, 사뭇 메말라버린 감정의 소유자.란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이 틀린 말이다.라는 힐난은 면할 수 있지않을까 싶기도 하지요." - <역사도 신화도 아닌> 포스트 중.
  6. 이와 관련하여, '알로하'로 불리운 악마의 다음 말 역시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 그와 대비되는 아쉬움 등을 찌릿!하게 지적해주고 있지요. --- "나는 당신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상징이 아닐까 싶은데. … 숱하게 남은 당신의 자잘한 후회들,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저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갈림길 삼아 반대로 살았다면 당신은 이런 모습일 거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상일지어다!"(p197)
  7. "나는 어머니에게 거는 전화 한 통보다 당장 눈앞의 수신 목록으로 전화를 거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뒤로 미루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눈앞의 것을 우선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온 것이다. 눈앞의 것에 쫓기면 쫓길수록 정말로 소중한 것을 할 시간은 사라져간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 소중한 시간이 사라져가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에서 잠깐만 멈춰서 보면, 어떤 전화가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지 금방 알았을 텐데. 그리고 당장 눈앞에 닥친 본질적이지 않은 무수한 일에만 쫓겨온 결과, 인생 마지막 시점에 '이건 아니었는데'라며 한탄하는 것이다."(p136)
  8. "인간은 시간이라는 규칙에 준해서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논다. 다시 말해 시계에 맞춰서 살아간다. 인간은 구태여 자기들을 제한하는 시간, 연월, 요일이라는 규칙을 발명했다. 게다가 그 시간이라는 규칙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까지 발명했다. 규칙이 있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속박이 동반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 속박을 벽에 걸고, 방에 놓고,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행동하는 모든 장소에 배치했다. 급지가 자기 손목에 시간을 휘감아두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자유는 불안을 동반한다. 인간은 속박을 대가로 규칙이라는 안도감을 얻은 것이다."(p125)
  9. 폴린 레아주 作 「O 이야기」중 p149, 문학세계사 刊, 2012.
  10.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중 p70, 생각정원 刊, 2015.
  11. "나의 장례식. 내 머리맡에 모여드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 그들은 나에 관해 어떤 추억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내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삼십 년이나 살아오면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됐다. … 내가 존재한 세상과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거기에 있을 미세한 차이. 거기에서 생겨난 작디작은 '차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증거'인 것이다."(p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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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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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해진 날씨에, 뭔가 따뜻한 내용의 소설을 읽고파 아사다 지로의 「천국까지 100마일」을 만지작거리다, 이왕 서늘한 날씨때문인거라면 뭔가 화끈!한 쪽으로 가보자 해 펼쳐든 책이었건만 --- 가학(加虐/苛虐)과 피학(被虐)이 난무하는, 읽는다라는 노동이 제겐 한없이 지루하기만 한 소설이었습니다. 방의 구조나 여성의 옷에 대한 설명등은 물론이거니와, 당췌 머리속에서 그려내지지 않는 체위에 대한 묘사따위를 글자로 읽고 있자니, 같은 박씨로서 저 또한 "이러려고 내가 이 책을 펼쳤던가하는 자괴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겠더군요. 암튼! 이 소설이 읽기에 재미없다라는 건 보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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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디스트(sadist)와 마조히스트(masochist)가 아닌 이상,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굳이 이해를 해내려는 노력조차 사실 필요가 없지요. 내가 아니고 내 아내가 아니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실, O의 이런 심리가 어떤 계기로 생겨났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습니다만, 책을 덮는 순간까지 그딴 건 그려지지 않습니다.)


르네가 채찍질을 가하고 매춘을 시키는 건 O로서는 그저 행복한 일이었다. 열정적으로 나를 내던짐으로써 애인의 소유임을 증명할 수 있는 데다, 채찍질의 고통과 수치는 물론, 내 몸을 유린하면서 쾌락을 강요하는 자들의 횡포를 통해 결국 그간의 죄가 상쇄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 O의 태도가 저열하면 저열할수록 그녀를 쾌락의 도구로 삼겠다는 르네의 결정은 자비로움을 더하는 셈이 된다.(pp137-138)

​뭐, 이런 심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어케 이해합니까. 제 아무리 소설이 간접경험의 기회가 된다한들, 이딴 사람들의 심리까지 제가 이해해낼 수 있는 용량까지를 지니고 있진 못합니다. 헌데 말이죠!


하느님이 주는 시련을 신자들이 오히려 감사해하듯,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걸 즐기는 애인의 뜻을 충실히 배려하면서 마냥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pp120-121)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S&M을 종교와 결부1시키는 위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이후의 모든 내용들을 신과 그 신을 믿는 신자들간의 관계로 치환하여 이 소설을 내내 읽게 되더군요.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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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그의 신자들과 사생활을 지배하고, 규칙, 금지, 금제를 비롯한 다른 터무니없는 것들을 세울 권리가 있다는 이상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 주제 사라마구 作 「카인」중 p191, 해냄 刊, 2015.

​소설 속 남자들은 O에게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자기를 사랑하는 한, 그 어떤 점에서도 그녀에게 자유란 없다"(p79)라 말합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정말 무서운 건 살아 계신 신의 손 밖으로 떨어져나가는 것"(p138)이라 생각하는 O는 "그렇게 명령을 내려주는 것 자체에 감사"(p161)했을 뿐 아니라, "그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녀는 곧장 스스로도 원하게 되는데, 이유는 오로지 그가 요구했기 때문"(p161)이었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로서 생각하며 행동하지요.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p114)

​「자발적 복종」에서 저자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노예가 자신의 노예임에 의문을 갖는 대신, 노예임을 기정 사실로 간주하고 다른 노예와의 비교를 통해 만족감을 갖게 된다'라 지적했었듯2, 이미 O의 심리는 자신이 노예임인 것 자체에, 자신을 노예로 소유하고 있어줌3에 감사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4 헌데 말이죠 --- O의 이런 심리가 터무니없다라 생각하는 당신이 (저와 같은)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요구하지요. 거기에 더해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하며,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형태의 순교야말로 신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이용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지. … 너는 숟가락이 될 거야, 나는 그 숟가락을 인류에게 집어넣어 내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새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득 떠올리게 될 거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영혼을 구하려면 몸은 희생되어야 한단다."

- 주제 사라마구 昨 「예수복음」증, 해냄 刊, 2010.

기독교에 대한 비신자의 위와 같은 조롱을 이제는 이해하여야 하는 게 아닐까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녀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어"(p156)했던 소설 속 남자들은 --- 욥이 평생 이루어 온 모든 것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까지도 사탄에게 허락했던 하나님의 모습5, 하나 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아브라함6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모습7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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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당한다는 생각 자체가 즐겁다가도, 막상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는 그걸 면하기 위해 온 세상을 팔아치워도 시원찮을 것 같다가, 급기야 고문이 끝나면 모든 걸 잘 견뎌낸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데, 그 기분은 고문이 잔혹하고 길어질수록 배가되기 마련이다.(p221)
위와 같은 O의 고백에는 말도 안 된다란 반응이 선뜻 나오면서도 ---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8란 성직자의 설명엔 '아멘'이라 답한다는 건 분명 설명해낼 수 없는 모순이 됩니다.
"애인은 자신의 명백한 권력을 O의 고통을 통해 확인하는 데서 더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p21)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쾌감이 설마! 다음과 같은 설명과 의미상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구약성서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부자이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욥은 신의 시험을 받는다. 신이 사탄에게 시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준 것이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J. 스티븐 랭 著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 중 p420, 들녘 刊, 2007.

「O 이야기」속 등장인물들에 대해선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는 저에게, 기독교 신자로서의 위와 같은 질문을 이 소설은 안겨 주었습니다. 서늘한 날씨에 뭔가 화끈한 이야기를 원했던 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네요.


※ 감상문에 등장한 작품들 :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카인

- 엔도 슈사쿠 作 「침묵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1. 소설 속엔 이처럼 S&M을 종교와 결부시키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 ​"O는 … 그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방법 그대로, 되도록 천천히 무한한 존경심을 내비치면서, 성기를 애무하는 데 집중했다. … 급기야 그 안에 울컥 싸질러주기에 O는 자신의 입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녀는 마치 신을 받아 모시듯 정액을 받아들였고"(p30)
  2.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증 p81, 생각정원 刊, 2015.
  3. "신을 사랑하지만, 신에 의해 어둠 속에 버려진 사람들은, 그 버려졌다는 사실 하나로 늘 죄지은 기분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들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잘못의 정체를 찾는다."(pp136-137)
  4. "지금보다 완벽한 노예상태에 빠진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지금만큼 행복하게 받아들인 적 또한 없었다."(p84)
  5. "O, 이제 너한테 재갈을 물릴 거야. 그리고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해줄 거야. 허락해 주겠지?" O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당신 거예요"(pp154-155)
  6. 이런 비교는 소설 속 O를 아브라함과 동치시켜 주기도 합니다. - "과연 이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세상 그 어떤 쾌락도, 어떤 희열도 그의 손에 제멋대로 유린당하고 놀아나면서 느끼는 이 행복감에 비할 순 없다는 것을."(p269)
  7. "애무든 구타든 스티븐 경이 그녀 몸에 손을 댈 때, 그녀에게 무엇이든 요구하고 명령할 때, 오로지 그의 욕망과 욕구만이 중요하다는 O의 믿음이란 얼마나 충만한지"(pp269-270)
  8. 엔도 슈사쿠 作 「침묵」중, 홍성사 刊,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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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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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니토는 책이 늘어나 집이 비좁아지는 바람에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진술했습니다. … 니토의 말로는 아내와 딸이 사라지면 그만큼 집에 공간이 생기므로 책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p28) 

아예 시작부터, 살인범살인 동기 심지어 살인 방법까지 모조리 알려주며 시작되는 소설입니다. 따라서 --- 제가 이해하는 바 '추리 소설의 세 요소'인 '누가, 왜, 어떻게'는 이제 더 이상, 최소한 이 사건의 진행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작가는 살인범 니토라는 인간 자체라는 새로운 관점에 대해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p27) 이 살인의 동기에 대해, 살인범이 왜 그러한 동기를 가지게 되었을까를 파헤쳐 보자라는 거지요. 이처럼,


'이제 남은 건 이것 뿐!'이라 말하듯, 이 소설이 지닐 수 있는 마지막 패를 까보이는 것으로 작가 누쿠이 도쿠로는 한 편의 소설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새로운 형식의 추리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라도 의외로 척척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p279) 

​이 작품 「미소짓는 사람」에는, 위와 같은 '의외로 척척 해결되는 경우'가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을 추리 소설로 분류하기는 좀 민망하죠. 심지어, '추리'의 결론도 일찌감치 느껴집니다.1 게다가! --- p339에서 끝나는 본문이거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선 "이것이야말로 니토의 원점이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동기로 사람을 죽이는 남자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p318)와 같은, 읽으면서 '짜장같은 논리의 비약'이란 comment를 작성해 놓았을 만큼 허술한 단정적 결론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작가는 세상 욕이란 욕은 다 들어보겠다,란 심경인 듯 무려!"쇼코 씨는 남자거든요"(p329)와 같은, 드라마 <인어 공주>식 막장 무리수까지도 서슴치 않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 째 끓인 차가 더 맛있다라든가, 오래 삭힌 홍어가 제 맛이라든가, 뭐 암튼 그런 류의 모든 비유를 모두 끌어다 쓰고 싶을 만큼, 작가 누쿠이 도쿠로는 이 소설의 마지막 두세 페이지에 가서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아주 짧은, 하지만 무거운/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터뜨려 놓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 몇 대의 담배를 피웠어야할만큼, 상당한 시간 후에라야 겨우 손에 잡혔던 이 작품의 주제는 --- 그리하여, 책의 뒷표지에 쓰여 있는, "르포르타주 미스터리의 새 경지"란 표현에 대해, 최소한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 아닌 '허구가 아닌 사실에 관한 보고(報告)2'라는 뜻을 지닌 '르포르타주'로 이해하는 것에, 이의 없는 독자의 동의를 무리 없이 이끌어 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이 작품 속 사건들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라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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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더는 꽂을 곳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바닥에 쌓아 올렸습니다만, 그런 건 제 미의식에 반하는 짓입니다. 책장에 저자와 출판사별로 책을 깔끔하에 꽂아야 비로소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법이죠."(p154)

삭힐대로 삭힌 홍어는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치즈는 먹지 못하는 저의 입맛을 타인에게 어찌 설명해야 하는건지 알지 못합니다. 그 반대의 누군가 - 와인매냐님! - 가 지닌 식성을 그저 그렇구나,정도로 이해하듯 타인들도 저의 설명 없이도 그저 그렇구나라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죠. 이처럼,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니토의 미의식에 공감하게 될 겁니다. 책을 가로로 쌓고, 그것도 모자라 책장의 꼭대기에, 심지어 바닥에까지 쌓아놓아야 한다는 건 참으로 마음 아프고 마음에 안드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살인이라는 금기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결여된 인간이 있다. 그러한 인간에게 살인은 사태를 해결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죄악감이라는 억제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쉽게 결단을 내리는 법니다.(154)

책 놓을 곳이 없다 해, 가족을 죽여버려야겠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미의식을 제 아무리 극단까지 연장해 본다 한들 도저히 상상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 이 작품은 니토는 책 놓을 곳이 없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1년 빨리 승진을 하고 싶어서라든가 친구의 게임기를 가지고 싶어서, 또는 "이웃집에서 개를 쫒아내기 위해 개 주인을 죽였다"(p263)와 같은, '살인'이라는 행동을 설명해 내기엔 심히 부족한 이유들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하는, 니토에 대한 서술자의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추측을 보여주고 있지요. 설... 마?


……………………………………………………………………

 


대체,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그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녀의 성장 과정 등을 보며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죠. 게다가 그녀가 지난 몇 년간 저질렀던 말도 안되는 행동들로 그녀를 재단(裁斷)하는 건 2016년 10월이 되서야 가능해진 일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당시의 대한민국의 51.6%는 그저,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남을 본다. 어떤 사람은 니토를 선한 사람으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살인귀로 보았다. 나는 니토를 이해하지 못할 가치관의 소유자로 보았다. 전부 나라는 필터를 거친 허상이다. 허상은 허상일 뿐 진실은 아니다.(p338)

진실이 아닌 허상의 그녀를 선택했었던 것이고, 이전/이후 그녀가 보여주었던 예상치 못한 선택들에 대해서조차도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라 해도 이해하기 쉬운 트라우마가 존재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p325)란 식의 이해를 근근이 이어왔던 것이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가 있으면 다들 안심할 수 있어요"(p327)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3 바로 이 지점이!


"니토는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쓴 극악한 놈입니다."(p219)


우리가 이 작품을 '허구가 아닌 사실에 관한 보고(報告)'라는 뜻의 '르포르타주'로 이해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니토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본에 존재하지는 않았었음에도 이를 '르포르타주'라 말할 수 있는 건 !!! --- '가면'이란 없다라는, 즉 우리의 잘못된 시선과 잘못된 판단만 존재할 뿐4보여지는 현상(現像)에는 (자신 스스로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보여질 수 있는) 변신이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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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결말이 나는 건 픽션뿐이에요."(p326)

무지의 산물로서의 호감5이 그녀에게 부여한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그녀의 직함은 픽션이 아니었으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그녀가 했던 역할은 픽션이었다라는, 이 기가 막힌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미소짓는 사람」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p349)란 어느 기자6의 소설에 대한 해설이, 단지 소설에 대한 해설만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 이런 게 바로 그녀가 원했던 '창조경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이거 참... --;; 

 

 

 



 

  1. pp184-190의 부분은, 만약 니토가 진범이라면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지요.
  2. "프랑스어로 탐방 · 보도 · 보고를 의미하며, 소위 ‘르포’로 줄여 쓰는 르포르타주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허구가 아닌 사실에 관한 보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르포르타주는 창작 소설과는 달리 실제의 사건을 보고하는 문학을 의미한다. 보고문학이나 기록문학 그리고 논픽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관해 직접 체험하거나 조사한 것을 토대로 구성한다. 르포르타주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현실감은 물론 생동감을 준다. 르포르타주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문학형식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 내 일부 대학에서는 이에 관한 강좌까지 개설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인 소설이 이상적인 것을 소재로 허구적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달리 르포르타주는 실제적인 사실을 통한 문학적인 욕구가 증가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르포르타주는 물론 방송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장르이다. 특히 방송은 사실의 전달을 중요시하는 매체인 만큼 르포르타주 형식의 프로그램이 최근 들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MBC의 『PD수첩』이나 KBS의 『추적 60분』과 『르포 60』등이 대표적인 르포르타주 형식에 해당된다." - <네이버 지식백과 : 드라마사전>
  3. 어린 나이에 부모 잃은 그녀를 우리가 이해하고 보살펴줘야 하지 않겠느냐,란 특정 지역 특정 세대의 생각이 바로 그 실례이겠죠.
  4. ​"쇼코 씨는 남자거든요"(p329) --- 이런 설정이 뜬금 없이 등장하는 것 역시, 어쩌면 작가가 '가면'에 대해 보충해주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5. ​"당신은 '싫은 사람'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동급으로 둘 수 있는가? '호감'이 '무지'의 살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p349)
  6. "김용언(「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의 저자, <프레시안> 기자)"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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