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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ㅣ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사회를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국가를 바꾸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 … 나쁜 지배자를 조금 더 나은 지배자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변화일 뿐 … 지배자를 없애지 않는 한 피지배 계층은 언제나 자유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는 낡은 것의 무덤에서 출현한다.(p11)
'그녀'란 인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일 개인의 인생에마저 지워낼 수 없는 영향을 남겨줍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조차 ('보수'란 것에 대한 지긋지긋한 환멸로부터 시작된) '진보'에 대한 관심을 안겨주었으며, 급기야 ---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즉 정부를 부정하는 불온하고 허황된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p37)는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까지를 선사해주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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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번역된 것에서부터 잘못된 이해가 시작된다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더 정확한 표현"(p12)이라 서술하고 있지요.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포르의 다음 주장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아나키즘의 여러 가지 특성들 중, 이 부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다."(p44)
권위를 부정한다는 특징은 예의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는 단어로 번역해내고,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만,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p12) --- 즉,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p12)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무정부주의'란 단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된다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는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권력"(p118)이란 것이며, 이 점은 예의
"이 세상에서 나라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p20)
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의 등장을 초래하게 되지요
【 복종의 전제 조건 : '내가 합의한 질서' 】
아나키즘에 대한 첫 만남인 이 책을 읽고 가진 느낌은 (그 어떠한 '주의(主義)'도 거의 다 그러하겠으나, 현실에서의 적용이 아닌 그 뜻하고자 하는 바 자체로만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이상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일개 '단위'로서만 작용될 수 밖에 없는 현대에, '내가 합의한 질서'를 이상형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이상적이면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일단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대한민국이 고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주어진 기본 전제 조건이 되겠죠. 이 정체(政體)에서 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체의 현시인 국가를 다스리는 (여러 계층의) 권력자 뿐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p16)
와 같은 주장은 현실적으로는 --- 대한민국이 고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그것이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복종의 거부를 통한 '권력에의 저항'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기껏해야 "우리가 서슬 푸른 날을 준비한 것은 베기 위함보다도 짓기 위함에 있소"와 같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존재 자체는 인정함'이란 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시장의 폭력에 맞서도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p12)라는 일종의 '일상 속 아나키즘'을 실천할 수는 있겠지요.)
정치 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바는 '지배 - 피지배'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는, 다시 말해 "피라미드의 서열이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피라미드 자체의 변화"(p116)인 것이기에, 정치 담론으로서건 혹은 '일상 속 아나키즘'의 차원에서건 종국적으론 '권력의 정점'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폐지로 귀결될 수 밖엔 없는 겁니다.
바쿠닌은 국가를 폐지할 때에만 억압과 착취가 사라질 수 있고 그래서 아나키즘은 국가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치 권력은 결코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사람, 주인과 노예,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의 구별을 철폐하지 않는다.(p74)
【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 국가란 무엇인가 】
한학자 강명관 교수는 일 개인 누구에게나 '가장 영향력이 큰 책'은 교과서일 수밖게 없다라 주장합니다. 교육이란 것 자체가 국가에 의해 시행되는 강제적인 행위이며, 그 강제성이 함축적으로 집약된 것이 바로 교과서이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죠. 그가 전개하고 있는 논리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그의 주장은 우리에게 다시금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중 p17, 창비 刊, 2014.
특정 개인의 특정 사건으로부터의 경험 역시 위와 같은 방향으로서의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질문을 던져줄 수도 있습니다. 이 의문은 곧바로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요. 이처럼 특정 사건과 결부되어 생겨나는 의문 뿐만이 아닌, 2016년 현재, '이게 나라냐'라 외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의 '도대체 나에게 국가란 어떠한 존재인가'란 의문은 결국 --- 우리를 지배해 왔고 지금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란 것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입되어 있는 '국가주의'의 근원에 대해 강명관 교수와 허태일 교수가 각각 자신의 책에서 나름의 논리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만, 이 두 분의 논거는 예의,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68-69
와 다를 바 없다라 생각합니다. --- 한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났기에 국가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되며, 선거에서 나의 한 표는 소중한 것이기에 반드시 행사하여/되어야 한다라는 의식 역시 그에 반하는 자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까지 사용되기도 하고, 그러하기에 결국 대한민국이란 정체가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더 좁게 표현해보자면 '특정 연령 이하만의 국민들이 제외되어 시행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출생 당시부터 주어져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조건"이 되어 있는 겁니다.
(국가의 존재에 대한 당위는 일단 차치하고)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 '자연스러움'의 수준으로서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제도'인 것일까요? ---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기본적 사상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대의민주주의는 그 의도부터가 불순하기에 저 또한 '자연스러운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합니다.
"중간 계급이 왕권에 반항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고 동시에 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의회 제도는 중간 계급이 지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 단지 중간 계급은 민중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왕권을 저지하기 위해 의회 제도를 이용했을 뿐이다."(p83)
그 어떠한 연유에서건 아나키즘 자체가 대의민주주의 제도와 함께 설 수 없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p108)을 주창하는 것에 그 근본 이유가 있지요.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그리고 지금 제가 배워 알게된 아나키즘에 대한 지식의 수준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라는 건, "큰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작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큰 존재"(p11)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국가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그 차선의 선택일 수 있을 --- (아나키스트의 주장대로라면) 비록 일시적인 변화일 뿐일지라 하더라도, '나쁜 지배자를 조금 더 나은 지배자'로 바꾸려는 노력까지를 우리가 포기해서는 아니되겠지요. 여기서!!!
【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
에티엔 드 라 보에시는 복종하기를 멈추는 것으로부터 권력에의 저항이 시작되어야 한다라 주장했었었지요. 무슨 대단한 혁명이나 희생을 초래하는 항거가 없더라도, 단지 이제까지 해왔던 권력자에게의 자발적 복종을 거부함으로써, 그리하여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빼앗아올 수 있다라 했습니다... 만! --- 이는 2016년 11월 25일의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16세기식 저항의 방법일 뿐입니다.
유협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깡패다. 의리 있는 깡패,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서 폭력(그것도 대개는 절제된 폭력)을 쓰는 자다. … 전근대 사회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자들, 법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아니, 법을 넘어 있는 자들), 주로 관료나 토호 같은 자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민중은 유협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 강명관, 위의 책 p75.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은 "혁명의 조건과 방향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이론보다 대중의 분노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혁명을 살아 있게 한다"(p75)라는 이유로 대중의 폭력적인 저항을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 '폭력은 나쁜 것이다'란 명제는, 과연 상황의 여하를 떠나 항상 옳은 명제일 수 있을까요?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모든 폭력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행동도 분명 폭력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다. … 단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들은 그 행동에 당당히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 아나키즘은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고 선택한 길이라면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 길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한다.(pp19-20)
한 인물,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IS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 IS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서이기 때문이 아닌, 그들이 미국의 적이고, 그들이 테러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항일 투쟁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의열단'의 예에서 알 수 있듯 --- 일본인들에게는 의열단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떠나 한낱 극악한 테러집단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듯,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폭력의 행사 주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적이다시피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그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이 대통령에의 저항은 반드시 비폭력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일까요?
"아나키즘은 잘못된 결정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저항하고 싸울 때에만 나의 자치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p19) …… "아나키스트들도 때로는 고귀한 동기에서 비롯한 폭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폭력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제한되었다. 전쟁터에 떨어지는 폭탄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살해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폭력은 기업주나 정치인 같은 구체적인 인물을 향했다. 이런 폭력은 추상적인 대의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폭력에 물러서지 말고 맞저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졌다."(pp127-128)
이 책 「아나키즘」은 이처럼 나의 행복은 저항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100만의 촛불도 모자라, 150만의 촛불이 바로 앞에서 하야할 것을 요구함에도, 대한민국의 현재 권력은 그 요구를 묵살하고 있지요. 그 함성이 일개 공권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듯, 저항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폭력 역시 (이제까지 폭력의 행사자였던) 공권력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인 '그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래도 우리는! '그녀'를 향한 폭력을 용인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자오팅양의 견해를 빌자면, 2016년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루어내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반란, 봉기 또는 정변'이 아닌, 바로 '혁명'입니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p95)
단채 신채호 선생이 1923년 쓰셨던 <조선혁명선언>의 마무리는 위와 같다고 합니다. 단재가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글을 썼었노라 한다면, "생존 투쟁이 생물 진화의 원인"(p97)이라 설명하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엔 과연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을 한데 묶어 --- 민중의 폭력적 저항 역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 결국엔 인류가 진화할 수 있게 해주는 일 원인이 된다라 답한다라면, 이에 대한 비난은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새로운 지식을 처음 만나본 기회였었습니다.
저의 부족 혹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도 일본이다."(p57)
-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을 읽고 쓴 감상문에서 의미한 바의 '복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 "'권력'이란 단어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 즉 피지배계급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권력자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그 대상, 즉 피지배계급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을 '순응'이라 부르던, '수용' 혹은 '인정' 등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하건, 의미상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일 수밖엔 없지요. --- 기본적으로 '권력자'와 '독재자'를 구분하지 않는 라 보에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자면, 그것은 '복종' (혹은 '굴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상(理想)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共著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중 p24, 메디치 刊, 2016.
- 이 때의 '전제조건'이란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특정 정체만의 문제가 아닌, 아나키즘이 거부하고 있는 '지배 -피지배'의 관계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자발적 복종」중 p81, 생각정원 刊, 2015.
- 이광재 作 「나라없는 나라」중 p157, 다산북스 刊, 2015.
-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은 선거가 민주주의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지배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장치라고 주장하면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p50)
- '일상 속 아나키즘'이란 단어가, 의도적으로 아나키즘 사상이 뜻하고 있는 바를 축소시키려는 의미로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사회생태주의'를 주장했던 아나키스트 머레이 북친의 주장과 같이, '일상 속 아나키즘' 역시 '지배 - 피지배'의 관계를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지요. --- "북친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생태 위기는 그 위기를 불러온 사회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p86)
- 저자는 우리나라에 아나키즘 사상이 수입되었던 과정 역시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 이념으로 소개"(p13)되었다라 설명해줍니다.
- 바쿠닌의 주장하는 개념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칫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저자는 그 둘은 명확히 다르다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하려면 자본주의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 그런 단계를 거치면서 많은 노동 계급이 만들어지고 이 노동 계급이 사회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보편 계급'으로서 사회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르의 주장인 반면) …… 그 많은 노동 계급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 노동 계급의 증가와 산업화를 위해서는 농민이 도시를 떠나고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어야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 희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조차 … 농촌이 도시로 변하고 농민이 도시로 가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가 되는 것도 하나이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변화가 인류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 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다.(pp105-106)
-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일 것이다. …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배후에 두고 있다. 곧 교과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책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善)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쑤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 행위가 강제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해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 요컨대 국가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을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드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 강명관 著 「독서 한담」 중 pp82-85, 휴머니스트 刊, 2016.
- 한강 위의 책, p17.
- "국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을 '국익'으로 파악한다. 국가주의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며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애국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는 이런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국가와 나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p143)
-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억압적인 질서를 반대하며 저항했던 사람들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한국의 역사가 가진 한계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의 독립이나 국가 건설을 먼저 이야기해야만 다른 사회적 변화를 말할 수 있었다. 자연히 사회를 바꾸려는 힘은 국가 기구(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다양한 정부 형태들)를 만드는 것에 맞춰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민족주의나 자유주의, 사회주의 모두 국가를 중심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변화를 이루려 했다." --- 강명관 위의 책 pp143-144.
-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한국 기성세대들은 …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 없이 지난 6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구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 --- 허태일 著, 「어쩌다 한국인」 중 p79, 중앙북스 刊, 2015.
- '특정 연령 이하'만에게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성년으로서 올바른 판단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똑같은 이유로 '특정 연령 이상'으로부터도 참정권을 회수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참정권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미래에 대한 설계의 위탁'이라는 의미는 오히려 '특정 연령 이상'으로부터의 참정권 회수를 정당화시켜주기도 하지요.
- 이 '자연스러움'은 ---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원인과 결과의 되도 않게 기막힌 도치를 자랑스레 담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으며,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와 같은 맹목적 애국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 생각하며 자라왔었어야 했던 국민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인으로 박혀 있어, 애국가를 제창하지 않았던 어느 국회의원에게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 작동했었을 만큼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수준이지요.
-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준까지의 아나키즘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동의할 수 없음이 제 가치관으로부터 기인된 것인지, 혹은 이제 고작 한 권의 아나키즘을 읽고 났을 뿐이기 때문인지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는 확인할 수 없네요.
- "다수와 소수라는 상대적인 수적 개념을 결정의 근거로 삼는 '다수결/대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기실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포장하여 가리려는 불순한 의도의 산물일 뿐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 「세상을 바꾼 법정」의 감상문 중.
- "부르주아"(p83)
-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체제가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대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표하고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무시한다. … 그리고 대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원칙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대표가 없는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게 한다."(pp84-85)
-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문제가 초국적 기업을 비롯한 자본의 문제"(p11)
- "교육이나 사회 복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요구?(p11)
- "일본의 역사에서 이토는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로 큰 존경을 받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침략을 주도한 원수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중근도 역시 조선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적 영웅이며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단골 멤버지만 일본에서는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렇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서 객관적인 관점이란 대체 뭘까?" - 남경태 著, 「종횡무진 한국사 下」, p419 ,그린비刊, 2009.
- "1919년 11월 만주에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 '정의로운 일을 열렬히 실천한다'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직접적인 테러를 포함해 급진적인 혁명을 추구했다.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를 암살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나 경찰서 등을 폭파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고 실제로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p92)
-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해주길 바라거나 말이나 구호로만 사상을 표현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여 했다. 그래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때로는 폭탄과 무기를 들고 권력게 맞섰고, 때로는 학교를 세우고 탁아소를 만들며 공동체를 꾸렸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것, 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 '직접 행동 direct actioin'의 의미였다. …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 해방은 노동자의 힘으로", "농민 해방은 농민의 힘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노동자나 농민이 알아서 자신의 해방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을 구하는 방식과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은 반드시 당사자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pp112-113) …… "즉 직접 행동은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이다."(p119)
-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일부의 이익과 권력이 분배되는 상황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통치집단을 타도해서 그것을 대체하려 하는 것" ---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0.
-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서,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 자오팅양 외, 위의 책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