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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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해진 날씨에, 뭔가 따뜻한 내용의 소설을 읽고파 아사다 지로의 「천국까지 100마일」을 만지작거리다, 이왕 서늘한 날씨때문인거라면 뭔가 화끈!한 쪽으로 가보자 해 펼쳐든 책이었건만 --- 가학(加虐/苛虐)과 피학(被虐)이 난무하는, 읽는다라는 노동이 제겐 한없이 지루하기만 한 소설이었습니다. 방의 구조나 여성의 옷에 대한 설명등은 물론이거니와, 당췌 머리속에서 그려내지지 않는 체위에 대한 묘사따위를 글자로 읽고 있자니, 같은 박씨로서 저 또한 "이러려고 내가 이 책을 펼쳤던가하는 자괴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겠더군요. 암튼! 이 소설이 읽기에 재미없다라는 건 보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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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디스트(sadist)와 마조히스트(masochist)가 아닌 이상,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굳이 이해를 해내려는 노력조차 사실 필요가 없지요. 내가 아니고 내 아내가 아니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실, O의 이런 심리가 어떤 계기로 생겨났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습니다만, 책을 덮는 순간까지 그딴 건 그려지지 않습니다.)


르네가 채찍질을 가하고 매춘을 시키는 건 O로서는 그저 행복한 일이었다. 열정적으로 나를 내던짐으로써 애인의 소유임을 증명할 수 있는 데다, 채찍질의 고통과 수치는 물론, 내 몸을 유린하면서 쾌락을 강요하는 자들의 횡포를 통해 결국 그간의 죄가 상쇄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 O의 태도가 저열하면 저열할수록 그녀를 쾌락의 도구로 삼겠다는 르네의 결정은 자비로움을 더하는 셈이 된다.(pp137-138)

​뭐, 이런 심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어케 이해합니까. 제 아무리 소설이 간접경험의 기회가 된다한들, 이딴 사람들의 심리까지 제가 이해해낼 수 있는 용량까지를 지니고 있진 못합니다. 헌데 말이죠!


하느님이 주는 시련을 신자들이 오히려 감사해하듯,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걸 즐기는 애인의 뜻을 충실히 배려하면서 마냥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pp120-121)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S&M을 종교와 결부1시키는 위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이후의 모든 내용들을 신과 그 신을 믿는 신자들간의 관계로 치환하여 이 소설을 내내 읽게 되더군요.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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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그의 신자들과 사생활을 지배하고, 규칙, 금지, 금제를 비롯한 다른 터무니없는 것들을 세울 권리가 있다는 이상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 주제 사라마구 作 「카인」중 p191, 해냄 刊, 2015.

​소설 속 남자들은 O에게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자기를 사랑하는 한, 그 어떤 점에서도 그녀에게 자유란 없다"(p79)라 말합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정말 무서운 건 살아 계신 신의 손 밖으로 떨어져나가는 것"(p138)이라 생각하는 O는 "그렇게 명령을 내려주는 것 자체에 감사"(p161)했을 뿐 아니라, "그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녀는 곧장 스스로도 원하게 되는데, 이유는 오로지 그가 요구했기 때문"(p161)이었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로서 생각하며 행동하지요.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p114)

​「자발적 복종」에서 저자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노예가 자신의 노예임에 의문을 갖는 대신, 노예임을 기정 사실로 간주하고 다른 노예와의 비교를 통해 만족감을 갖게 된다'라 지적했었듯2, 이미 O의 심리는 자신이 노예임인 것 자체에, 자신을 노예로 소유하고 있어줌3에 감사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4 헌데 말이죠 --- O의 이런 심리가 터무니없다라 생각하는 당신이 (저와 같은)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요구하지요. 거기에 더해 순교자의 죽음은 고통스러워야하며, 가능하다면 수치스러워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형태의 순교야말로 신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퍼뜨리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최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이용할 수 있는 나뭇조각이지. … 너는 숟가락이 될 거야, 나는 그 숟가락을 인류에게 집어넣어 내가 앞으로 되고자 하는 새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득 떠올리게 될 거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영혼을 구하려면 몸은 희생되어야 한단다."

- 주제 사라마구 昨 「예수복음」증, 해냄 刊, 2010.

기독교에 대한 비신자의 위와 같은 조롱을 이제는 이해하여야 하는 게 아닐까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녀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어"(p156)했던 소설 속 남자들은 --- 욥이 평생 이루어 온 모든 것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까지도 사탄에게 허락했던 하나님의 모습5, 하나 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아브라함6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모습7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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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당한다는 생각 자체가 즐겁다가도, 막상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는 그걸 면하기 위해 온 세상을 팔아치워도 시원찮을 것 같다가, 급기야 고문이 끝나면 모든 걸 잘 견뎌낸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데, 그 기분은 고문이 잔혹하고 길어질수록 배가되기 마련이다.(p221)
위와 같은 O의 고백에는 말도 안 된다란 반응이 선뜻 나오면서도 ---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8란 성직자의 설명엔 '아멘'이라 답한다는 건 분명 설명해낼 수 없는 모순이 됩니다.
"애인은 자신의 명백한 권력을 O의 고통을 통해 확인하는 데서 더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p21)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쾌감이 설마! 다음과 같은 설명과 의미상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구약성서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부자이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욥은 신의 시험을 받는다. 신이 사탄에게 시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준 것이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J. 스티븐 랭 著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 중 p420, 들녘 刊, 2007.

「O 이야기」속 등장인물들에 대해선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는 저에게, 기독교 신자로서의 위와 같은 질문을 이 소설은 안겨 주었습니다. 서늘한 날씨에 뭔가 화끈한 이야기를 원했던 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네요.


※ 감상문에 등장한 작품들 :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카인

- 엔도 슈사쿠 作 「침묵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1. 소설 속엔 이처럼 S&M을 종교와 결부시키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 ​"O는 … 그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방법 그대로, 되도록 천천히 무한한 존경심을 내비치면서, 성기를 애무하는 데 집중했다. … 급기야 그 안에 울컥 싸질러주기에 O는 자신의 입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녀는 마치 신을 받아 모시듯 정액을 받아들였고"(p30)
  2.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증 p81, 생각정원 刊, 2015.
  3. "신을 사랑하지만, 신에 의해 어둠 속에 버려진 사람들은, 그 버려졌다는 사실 하나로 늘 죄지은 기분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들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잘못의 정체를 찾는다."(pp136-137)
  4. "지금보다 완벽한 노예상태에 빠진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지금만큼 행복하게 받아들인 적 또한 없었다."(p84)
  5. "O, 이제 너한테 재갈을 물릴 거야. 그리고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해줄 거야. 허락해 주겠지?" O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당신 거예요"(pp154-155)
  6. 이런 비교는 소설 속 O를 아브라함과 동치시켜 주기도 합니다. - "과연 이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세상 그 어떤 쾌락도, 어떤 희열도 그의 손에 제멋대로 유린당하고 놀아나면서 느끼는 이 행복감에 비할 순 없다는 것을."(p269)
  7. "애무든 구타든 스티븐 경이 그녀 몸에 손을 댈 때, 그녀에게 무엇이든 요구하고 명령할 때, 오로지 그의 욕망과 욕구만이 중요하다는 O의 믿음이란 얼마나 충만한지"(pp269-270)
  8. 엔도 슈사쿠 作 「침묵」중, 홍성사 刊,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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