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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 히틀러에 대한 유일한 내부 보고서
알베르트 슈페어 지음, 김기영 옮김 / 마티 / 2016년 6월
평점 :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공격했을 때 조금 불안했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치가 학교, 신문사, 유대 인 등을 잇따라 공격했을 때, 나는 더 불안했지만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마침내 나치는 교회를 공격하였다. 나는 목사였고, 그때서야 행동에 나섰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독일 고백 교회의 니묄러 목사의 증언 -
"만일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을 겁니다"(p819)라 자신을 소개한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의, 일종의 자서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 이 책의 의의는 (슈페어라는 일 개인 자신의 일생에 대한 주체적 자서전이 아닌) 권력의 최정점으로서의 히틀러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히틀러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객체적 인물로서의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요.
저자 슈페어는 그런 히틀러의 모습들과,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이 바친 복종을 통해 "한 인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본질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p11)라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 속엔, 히틀러 정권에서 군수장관을 역임했던 저자 슈페어가 '솔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참회가 기술되어 있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의 죄로, 종전(終戰) 후 20년 형을 선고받았던 슈페어는 훗날 적은 일기장을 통해 --- 위와 같은 사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이 자신의 죄값에 비하면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란 소회를 밝히고 있기도 하지요.
"세상에는 사과를 해도 처벌을 받아야 할 일이 있다. 그 죄가 너무도 무거워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p830)
뭐, 이쯤되면 "이 기록의 목적은 피할 수 없었던 재앙의 전제를 밝해는 데 있다"(p11)란 이 두꺼운 책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제3제국에 관한 내밀한 반추"(p835)와 같은, 최소한 역사적 사료의 측면으로 보자면 긍정적인 것만 존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 "슈페어의 두꺼운 자기변명"(p836)일 뿐이란 부정적 평가가 더 부각되며, 이 책을 읽어낸 저 역시 후자의 평가에 훨씬 더 공감하게 되는, 심지어 "피할 수 없었던"이란 구절에 역겨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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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일방적 기억 】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에 사로잡혔던 나는 부드러운 침대를 버려둔 채 딱딱한 바닥에 내려와 잠을 청하는 것으로 군인들의 궁핍함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p20)
(그나마 객관적이라 믿어야 할 것 같은) 사관(史官)의 기록이 아닌 바에야, 일 개인이 제 아무리 많은 양의 기록을 하였다하더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주관성이라는 한계는, 제 3자에게는 쉬이 극복되어질 수 없습니다. 즉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가 메모광(狂)이었다라는 사실이 곧! 그가 기록해놓은 엄청난 양의 메모들이 객관적이다라는 것과는 동치될 수는 없다라는 거죠.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슈페어가 표현한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이라는 것 역시 특정 시대의 특정 국가에서 태어난 특정 연령의 특정 성별의 한 개인이 지닌 (다시 말해, 객관적 확인이 불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 "나는 경험한 일들을 서술하며 지금 이 순간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나의 입장도 밝혔다. 작업 내내 과거를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p11)란 슈페어의 고백은 외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이 기록 속에 개입시켜 놓았다란 일종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의 일방적 기록을 읽어내고 해석해냄에 있어, 우리는 '왜곡'과 '주관의 개입'을 가려낼만한 장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이 책 속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일 개인의 편향된/되어있다라 의심되는 기억에 의존한 기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물론! --- 슈페어는 자신의 기록이 객관적임을 어찌해서든 증명해내려는 듯, 무지막지한 양의 각주를 통해 그 (주로 공식문서들의 형태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기록이란 어차피 '편집'이라는 일종의 필터를 거쳐 보여지는 것이기에, 그 근거들 역시 선택적 편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들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① "히틀러는 … 독일의 모든 것을 재생시키기 위한 시작점에 서 있었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대규모 경제 프로그램을 착수한 장본인이었다."(p56)
② "히틀러는 권력을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쓰지는 않았다. 점령 지역에서 획득하거나 몰수한 작품들 가운데 단 하나도 개인 소유로 하지 않았다."(p285)
집권 초기를 묘사하고 있는 ①번과, 2차 세계대전을 막 일으킨 직후의 ②번의, 히틀러에 대한 두 묘사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설명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지요. 박정희는 그 뒤로 이어진 집권세력 덕분에 비교적(?) (2017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말'이란 단어가 선보이듯) 그 영화(榮華)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던 반면 --- 패전이란 참혹한 결과를 맞이했던 히틀러에게는
"히틀러가 자신을 초인적인 능력의 소유자라고 믿게 된 데에는 측근들의 책임이 크다. … 히틀러가 절제력 강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칭송의 홍수 속에서는 별 수 없이 자아 성찰의 기준을 상실했을 것이다"(p397) …… "히틀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마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 권력을 향한 모든 음모와 싸움은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혹은 그 말이 상징하는 바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와 우리의 위치는 그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p503)
와 같은, 박정희를 향한다한듯 전혀 어색하지 않을, 위와 같은 냉소적인 평가가 남겨집니다. 이러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라는 게 아니라, --- 히틀러에 대한 배신이라 표현되어질 수도 있겠는, 슈페어라는 한 인물의 (소위/일방적) '고백'이란 것에, 뭔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또한 정서적으로도) 어색하지 않느냐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구심에는,
● "나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제국의 최연소 장관직에 올랐다. … 군수장관에 취임한 지 6개월 만에 우리가 관할하는 모든 영역에서 놀라운 정도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 우리는 노동력 대비 생산성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한 셈이다."(pp336-337)
● "나는 전쟁의 절정이자 전환점에 이르서도 독일의 도시에 깃들어 있는 역사적 흔적을 지키는 데, 그리고 분별 있는 재건 정책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p499) …… "나는 히틀러를 설득해 곧 적의 손에 넘어갈 산업시설과 발전 설비를 파괴하기보다는 마비시키는 데 동의하게 만들었다."(p642) …… "독일의 부활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 생산시설의 보호와 보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p686)
실제, 생산성이 두 배나 향상되었고, 슈페어가 독일의 역사적 흔적을 지키는 데 실제로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하더라도! --- 이러한 자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타인(히틀러)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대비되어지는 순간, 실감되게 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어버린 자'의 처지는 '산 자의 기록'에 객관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지요. 더군다나, 그 '살아있는 자'가 '죽어버린 자'를 향해 다음과 같은 명백한 동정을 표하고 있다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당시 극심했던 감정적인 혼란은, 내가 그의 비도덕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파멸과 그가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건설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모습에 마음의 고통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 시점부터 히틀러에 대한 나의 감정에는 혐오감과 연민, 매혹이 뒤섞여 있었다."(pp683-684)
이 밖에도, 건축가였던 슈페어의 시선에서 본 히틀러의 시대, 그러니까 온통 건축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 듯 그려지는 히틀러의 모습 등은, 저자의 관심사와 저자의 기억에, 그리하여 결국 저자의 기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한 마디로 이 책은 (요즈음의 유행어이기도 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객관적일 수 없는) 결과물일 뿐이란 개인적 판단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 개인의 의도적 기억 】
일국의 지도자가 히틀러처럼 "민주주의가 국가를 약화시킨다고 굳게 믿"(p487)고 있었다 한들, 그가 그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라는 것 자체만큼은 그의 선택이고 그러하기에 그 선택의 결과는 히틀러와 (히틀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운) 독일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몫일 뿐, 지도자의 선택에 대한 찬반까지를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저같은) 제 3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새로운 국가수반인 카를 되니츠는 여전히 민족사회주의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12년 동안 우리는 민족사회주의 정권을 위해 일해왔다."(p789)
이러한 슈페어의 고백과,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계기라 소개한 "나는 민족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마력에 사로잡혔고 그 이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pp37-38)란 (일종의) 주장 사이의 괴리만큼은, (유대인이 아닌, 심지어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는 저같은) 제 3자에게도 그(와 그의 기록들)를 비난할 수 있는 여지, 즉 슈페어가 인종차별의 경악스런 결과에 대해 미리! 분명한 선을 긋겠다란 의도하에 이 책을 써냈다란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해준다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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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독일 국민의 운명이 한 개인의 운명과 묶여 있다는 관점을 가질 권리는 없습니다. … 이 시점에서 정부가 우리 국민의 삶에 지장을 줄 파괴를 선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 파괴는 독일 국민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입니다."(p690)
히틀러에게 올린 슈페어의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여타의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하고 읽어낸다면, 위 인용문의 주장은 100% 옳습니다. 저자 슈페어는 위 인용문의 정당성, 즉 자신의 '그나마 덜 나쁜 놈'으로서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기 위해 책의 초반부터 그러한 의도적 장치들을 뿌려 놓지요.
"내 사상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 그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 히틀러는 매력적이었다. …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연설 내용보다 훨씬 심오했다.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잊은 지 오래다. 무엇보다 나는 그 열정에 빨려 들어갔다. …… 희망 없는 실직 대신 경제 회복을 해낼 수 있다고 히틀러는 우리에게 강변했다. 유대인 문제는 단지 주변적인 것으로 언급했을 뿐이다."(pp34-36)
쉽게 옮겨보자면, '난 아무 것도 몰랐었고, 히틀러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그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빠졌었던 거다. 기억나는 건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를 크게 거론하지 않았었다란 거다'라는, 한 마디로 --- "당시를 관통하던 이러저러한 시대적 조류를 감지하는 데 성공"(p33)했던 히틀러가 "이 조류를 …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활용"(p33)했었던 것에 자신은 그저 놀아났던 것 뿐이란 변명인 거죠. 그러면서도, 슈페어는 다음과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쁜 놈이긴 해요'란 자책을 넣어둠으로써, 죄값은 받겠습니다란, 보기에 따라선 매우 교묘한 (일종의) 역사와의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직업 선택을 경솔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우리는 비판적 사고에 스위치를 내리고 자신을 정해진 직업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히틀러의 당원이 되기로 한 나의 결정도 그와 비슷하다"(p39)
히틀러의 무리에 가담했던 자신의 결정을, 이처럼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현재에도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의 범주에 넣어버림으로써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긴 했었지만, 이게 내가 나쁜 놈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란 전제를 깔아놓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일 히틀러가 1933년 이전에, 몇 년 후 유대인 회당을 불사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들과 정적을 학살할 거라고 했다면, 그는 나를 비롯해 1930년 이후 그를 지지하게 된 대부분의 측근을 잃었을 것이다."(p40) …… "독일 내의 한 인종집단을 모조리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할 뭔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그때라도 눈치챘다면 … 그와 같은 야만의 분출이 나의 실체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알아차렸던가? 나는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p190)
슈페어는 이와 같이 '악(惡)'의 문제를 '무지'의 차원으로 전환시켜 놓지요. 그리고 그 '무지'역시, "난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았던 것이다"(p593)와 같이 분명하게 자신의 의도였었다라는 걸 못박아 놓습니다. 이와 같은 "고의적인 무지"(p594)란 전제 하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思考)를 회피한 행동은 그 시작부터 이어지는 결과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p40) …… 히틀러의 당에 입당함으로써, 이미 나는 본질적으로 … 이른바 '바람직하지 못한 무리'의 죽음, 정의의 말살, 모든 악의 고양으로 직접 연결되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p42) …… "그 순간에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온전히 개인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p594)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우병우 같은 이가 내놓는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러한 사과와 반성이기에, 이 책이 지니고 있다는 "나치 정부의 유일한 내부자 증언이자 사료"(p836)라는 평가에 전혀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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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사과는 합니다. "그 어떤 사죄도 불가능하다"(p191)란 정도까지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 진정한 사과는 아무런 이유대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라 생각하거늘, 슈페어는 ('고의적 무지'란 주장에서와 같이) "나치의 사상교육은 분리적인 사고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건물을 짓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했다"(p191)와 같은, 자신의 책임을 제한하는 전제 조건을, 사과의 앞에 기어이 깔아놓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전제, 즉 저자의 '분리적인 사고'라는 것이 나치의 사상교육에서 비롯되었다라는 주장 역시,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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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프레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중 p276, 돌베개 刊, 2007.
슈페어는 히틀러 "스스로가 자신의 거짓말을 믿었"(p568)었으며, 그러한 "믿음을 향한 의지가 자기 확신으로 변질되었을 뿐"(p568)이라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 "뉘른베르크는 나의 삶을 파괴했고 선고한 형량을 넘어 아직도 나를 벌하고 있다"(P12)란 슈페어 스스로의 고백 역시,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무지는 예의 '고의적 무지'였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믿고 싶어하였고 결국 믿게 된 것이 아닐까란 의심을 지워낼 수 없습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 프레모 레비 著. 「살아남은 자의 아픔」중 P33, 노마드북스 刊, 2011.
이러한 죄가 어찌, 1930년대 독일의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죄는 2017년의 박근혜와 최순실과 우병우 등에게도 똑같이 물어져야 하겠습니다만, 바로 그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도 또한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행동하지 않은 죄, 그리고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죄'로부터 자유롭다라 차마 말할 수는 없겠지요.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는 것으로 나의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분명하게 반대하지만 --- 타인의 "그때는 왜 그랬던가"(p99)수준의, 그것도 거짓된 반성을 통해, 이제껏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겠구나, 정도를 알게 되었다라는 정도가, 이 책이 지닌 제게 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
"나는 언제나 현실을 인식하고 환상을 좇지 않는 것을 최고의 자질로 여겨왔다. 그러나 수감 기간을 포함해 나의 지난 삶을 생각해볼 때, 내가 환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순간은 없는 듯하다."(p464)
이토록, 지독히도 개인적이기만 한 후회에 기반한 반성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냔거죠.
※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다 아무것도 아닌데..."(p756)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의 결과들
- 프레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刊, 2007.
- 헤르타 뮐러 作, 「숨그네」, 문학동네 刊, 2010.
- 독일의 항복 선언 직전, 새로운 정부의 구성에 있어, 니묄러 목사는 신설이 논의되는 종교장관직의 적임자로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p796 참조)
- <네이버 지식백과> '제2차 세계 대전, 대량 학살의 시대' 중.
- "사람들은 강력하고 자랑스럽고 통일된 독일을 위해 염훤을 이루어줄 지도자가 히틀러뿐이라고 믿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p107) --- 이러한 일반 국민들의 평가에 대해 슈페어는 "괴벨스가 만들어 놓은 신에 가까운 이미지"(p471)일 뿐이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히틀러가 밤낮으로 국사를 돌보는 지도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의 느슨한 일과는 흔히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성과 같았다."(p219)
- "지금까지 히틀러는 역사학자들의 진지한 연구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육신과 본질을 가진 물리적 존재이다."(p467)
- "인식 주체와의 관계에서 본 실재(實在)" - <네이버 지식백과> 중.
- 이러한 이유로, 즉 이 책의 내용이 본인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히틀러의 심복'으로서의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서전'이 아닌, 아닌, '일종의 자서전'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 "권력자를 추종하는 이들은 권력자의 총애를 너무도 바라 마지않기 때문에 추종자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총애를 얻고자 한다. 히틀러의 측근들 사이에도 노예근성이 만연해 있어서 그들은 경쟁적으로 헌신을 드러내려 했다. 이런 현상은 지배자까지 흔들어놓아 서서히 부패하게 만든다. 권력을 가진 자의 주요한 자질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p149)
- "현대의 전쟁에서 정부의 최고위 지도부가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pp815-816) …… "모든 지도부 인사는 받은 명령을 검증하고 판단해야 하며, 그 명령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진다. 비록 그것이 강제로 수행된 것이라도 말이다."(p820)
- "슈페어는 한스 프랑크와 함께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시인하고 사죄한 단 두 명의 나치 고위직이다." - 위키백과 중.
-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역사를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죄의 대가는 치르도록 했다. 비록 역사적 무게에 비해 형량은 미미했다 하더라도, 시민으로서의 내 존재에 종말을 고하기에는 충분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의 삶을 파괴했고 선고한 형량을 넘어 아직도 나를 벌하고 있다."(p12)
-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의 독일제국(1934∼1945)을 일컫는 용어로서 1933년 정권을 장악한 나치스 독일이 1934년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사망을 계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체주의적 이념을 실현화하는 지도적 용어로서, 나치스가 제3제국의 완성을 제창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나치스 독일은 962∼1806년의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1871∼1918년의 독일제국을 제2제국, 1933∼1945년의 나치스 지배체제를 제3제국이라 일컬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중.
- "좌절뿐이었던 노력만 수년간 해온 뒤였고, 나는 뭔가를 미친 듯이 이루고 싶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위대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나는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은 것이다. 그(히틀러)는 괴태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p58) …… "나는 히틀러가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건축가의 꿈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고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다".(p68)
- "처음으로 나는 히틀러 아래서 '건축'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p53) …… "히틀러는 건축의 목적을 자신의 시대와 정신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역사상 위대한 시대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철학자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p93) …… "건설은 전쟁과 상관없이 계속되어야 하네. 전쟁으로 인해 나의 계획이 중단되도록 하진 않겠어."(p289) …… "비록 민심에 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공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p284)
-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히틀러에 대해 내리는 평가들 중에는 확신조차 동반하지 못하는 주관성 깃든 표현들 또한 쉽게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 ① "그는 가까운 측근이나 정권을 얻기 위해 함께 싸웠던 신뢰하는 동료들의 명성과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p213), ② "내가 보기에는 히틀러가 일부 전문 분야에서 위업을 달성한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것 같았다. … 어쩌면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이유로 히틀러가 나 같은 약관의 건축가를 발탁하지 않았다 싶다. 나에게는 전혀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p217), ③ "어쩌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과 채권자들을 속이려고 하는 파산자 같았다."(p464)
- "히틀러의 유일한 목표는 권력의 쟁취였고"(p40) ……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의 원천이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p173)
- 여기에 더해, 슈페어는 '약혼녀에게 쓴 편지'라는, 정녕 확인되어질 길 없는 기재마저 동원해 자신이 반인종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 "타 인종이 얼마간 섞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 같아. 만일 오늘날 우리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 인종이 섞여서 그런 것이 아니야. 강력한 힘으로 번성하던 중세부터 피는 섞이기 시작했고, 프로이센에서 슬라브인들을 몰아냈을 때나 훗날 유럽의 문화를 미국에 전해주었을 때도 그랬어. 우리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쇠퇴하는 거야.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지. 그걸 막을 방법은 없어."(pp27-28)
- "정치적 무관심은 당시 젊은이들의 특징이었다. 전쟁과 패배의 혁명, 인플레이션은 젊은이들을 지치게 했고 정치에 대한 환상을 앗아갔다."(p23)
- 이런 시도는, 지금 2017년의 대한민국 뉴스에서 매일 볼 수 있지요. --;;
- "일반 당원들에게는 위대한 정책은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원칙이 주입되었다. 대표자가 따로 있으므로 그들은 그 어떤 일에도 개인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되었다. 당원들이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치당의 장치였다."(p60)
- 예를 들자면, ① "나는 민족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추종자가 된 것"(p37), ②"주변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프리메이슨과 사회민주당,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압제를 공공연하게 선언할 때마다 직접 가담하지 않는 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p60), ③ "나는 스스로를 히틀러의 건축가라고 여겼다. 정치적 사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