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 히틀러에 대한 유일한 내부 보고서
알베르트 슈페어 지음, 김기영 옮김 / 마티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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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사회주의자를 공격했을 때 조금 불안했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치가 학교, 신문사, 유대 인 등을 잇따라 공격했을 때, 나는 더 불안했지만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마침내 나치는 교회를 공격하였다. 나는 목사였고, 그때서야 행동에 나섰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독일 고백 교회의 니묄러 목사1의 증언2 -

"만일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을 겁니다"(p819)라 자신을 소개한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의, 일종의 자서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 이 책의 의의는 (슈페어라는 일 개인 자신의 일생에 대한 주체적 자서전이 아닌) 권력의 최정점으로서의 히틀러3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히틀러의 모습4을 곁에서 지켜보았던5 객체6적 인물로서의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요.7      

 

저자 슈페어는 그런 히틀러의 모습들과,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이 바친 복종8을 통해 "한 인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그의 본질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p11)라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 속엔, 히틀러 정권에서 군수장관을 역임했던 저자 슈페어가 '솔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참회9가 기술되어 있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의 죄로, 종전(終戰) 후 20년 형을 선고받았던 슈페어는 훗날 적은 일기장을 통해 --- 위와 같은 사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이 자신의 죄값에 비하면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란 소회를 밝히고 있기도 하지요.


"세상에는 사과10를 해도 처벌을 받아야 할 일이 있다. 그 죄가 너무도 무거워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p830)11

 

뭐, 이쯤되면 "이 기록의 목적은 피할 수 없었던 재앙의 전제를 밝해는 데 있다"(p11)란 이 두꺼운 책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제3제국12에 관한 내밀한 반추"(p835)와 같은, 최소한 역사적 사료의 측면으로 보자면 긍정적인 것만 존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 "슈페어의 두꺼운 자기변명"(p836)일 뿐이란 부정적 평가가 더 부각되며, 이 책을 읽어낸 저 역시 후자의 평가에 훨씬 더 공감하게 되는, 심지어 "피할 수 없었던"이란 구절에 역겨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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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일방적 기억 】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에 사로잡혔던 나는 부드러운 침대를 버려둔 채 딱딱한 바닥에 내려와 잠을 청하는 것으로 군인들의 궁핍함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p20)

(그나마 객관적이라 믿어야 할 것 같은) 사관(史官)의 기록이 아닌 바에야, 일 개인이 제 아무리 많은 양의 기록을 하였다하더라도, 그것이 지니고 있는 주관성이라는 한계는, 제 3자에게는 쉬이 극복되어질 수 없습니다. 즉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가 메모광(狂)이었다라는 사실이 곧! 그가 기록해놓은 엄청난 양의 메모들이 객관적이다라는 것과는 동치될 수는 없다라는 거죠.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슈페어가 표현한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이라는 것 역시 특정 시대의 특정 국가에서 태어난 특정 연령의 특정 성별의 한 개인이 지닌 (다시 말해, 객관적 확인이 불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 "나는 경험한 일들을 서술하며 지금 이 순간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나의 입장도 밝혔다. 작업 내내 과거를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p11)란  슈페어의 고백은 외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이 기록 속에 개입시켜 놓았다란 일종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의 일방적 기록을 읽어내고 해석해냄에 있어, 우리는 '왜곡'과 '주관의 개입'을 가려낼만한 장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이 책 속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일 개인의 편향된/되어있다라 의심되는 기억에 의존한 기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물론! --- 슈페어는 자신의 기록이 객관적임을 어찌해서든 증명해내려는 듯, 무지막지한 양의 각주를 통해 그 (주로 공식문서들의 형태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기록이란 어차피 '편집'이라는 일종의 필터를 거쳐 보여지는 것이기에, 그 근거들 역시 선택적 편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들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① "히틀러는 … 독일의 모든 것을 재생시키기 위한 시작점에 서 있었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대규모 경제 프로그램을 착수한 장본인이었다."(p56)

 "히틀러는 권력을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쓰지는 않았다. 점령 지역에서 획득하거나 몰수한 작품들 가운데 단 하나도 개인 소유로 하지 않았다."(p285) 

집권 초기를 묘사하고 있는 ①번과, 2차 세계대전을 막 일으킨 직후의 ②번의, 히틀러에 대한 두 묘사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설명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지요. 박정희는 그 뒤로 이어진 집권세력 덕분에 비교적(?) (2017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말'이란 단어가 선보이듯) 그 영화(榮華)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던 반면 --- 패전이란 참혹한 결과를 맞이했던 히틀러에게는

"히틀러가 자신을 초인적인 능력의 소유자라고 믿게 된 데에는 측근들의 책임이 크다. … 히틀러가 절제력 강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칭송의 홍수 속에서는 별 수 없이 자아 성찰의 기준을 상실했을 것이다"(p397) …… "히틀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마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 권력을 향한 모든 음모와 싸움은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혹은 그 말이 상징하는 바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와 우리의 위치는 그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p503)

와 같은, 박정희를 향한다한듯 전혀 어색하지 않을, 위와 같은 냉소적인 평가가 남겨집니다. 이러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라는 게 아니라, --- 히틀러에 대한 배신13이라 표현되어질 수도 있겠는, 슈페어라는 한 인물의 (소위/일방적) '고백'이란 것에, 뭔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또한 정서적으로도) 어색하지 않느냐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구심에는,

● "나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제국의 최연소 장관직에 올랐다. … 군수장관에 취임한 지 6개월 만에 우리가 관할하는 모든 영역에서 놀라운 정도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 우리는 노동력 대비 생산성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한 셈이다."(pp336-337)

● "나는 전쟁의 절정이자 전환점에 이르서도 독일의 도시에 깃들어 있는 역사적 흔적을 지키는 데, 그리고 분별 있는 재건 정책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p499) …… "나는 히틀러를 설득해 곧 적의 손에 넘어갈 산업시설과 발전 설비를 파괴하기보다는 마비시키는 데 동의하게 만들었다."(p642) …… "독일의 부활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 생산시설의 보호와 보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p686)

실제, 생산성이 두 배나 향상되었고, 슈페어가 독일의 역사적 흔적을 지키는 데 실제로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하더라도! --- 이러한 자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타인(히틀러)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대비되어지는 순간, 실감되게 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어버린  자'의 처지는 '산 자의 기록'에 객관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지요. 더군다나, 그 '살아있는 자'가 '죽어버린 자'를 향해 다음과 같은 명백한 동정을 표하고 있다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당시 극심했던 감정적인 혼란은, 내가 그의 비도덕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파멸과 그가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건설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모습에 마음의 고통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 시점부터 히틀러에 대한 나의 감정에는 혐오감과 연민, 매혹이 뒤섞여 있었다."(pp683-684)

이 밖에도, 건축가였던 슈페어의 시선에서 본 히틀러의 시대, 그러니까 온통 건축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 듯 그려지는 히틀러의 모습14 등은, 저자의 관심사와 저자의 기억에, 그리하여 결국 저자의 기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한 마디로 이 책은 (요즈음의 유행어이기도 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객관적일 수 없는15) 결과물일 뿐이란 개인적 판단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 개인의 의도적 기억 】

일국의 지도자가 히틀러처럼 "민주주의가 국가를 약화시킨다고 굳게 믿"(p487)고 있었다 한들, 그가 그러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라는 것 자체만큼은 그의 선택이고 그러하기에 그 선택의 결과는 히틀러와 (히틀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운) 독일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몫일 뿐, 지도자의 선택에 대한 찬반까지를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저같은) 제 3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새로운 국가수반인 카를 되니츠는 여전히 민족사회주의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12년 동안 우리는 민족사회주의 정권을 위해 일해왔다."(p789)​ 

이러한 슈페어의 고백과,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계기라 소개한 "나는 민족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마력에 사로잡혔고 그 이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pp37-38)(일종의) 주장 사이의 괴리만큼은, (유대인이 아닌, 심지어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는 저같은) 제 3자에게도 그(와 그의 기록들)를 비난할 수 있는 여지, 즉 슈페어가 인종차별의 경악스런 결과에 대해 미리! 분명한 선을 긋겠다란 의도하에 이 책을 써냈다란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해준다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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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독일 국민의 운명이 한 개인의 운명과 묶여 있다는 관점을 가질 권리는 없습니다. … 이 시점에서 정부가 우리 국민의 삶에 지장을 줄 파괴를 선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파괴는 독일 국민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입니다."(p690)

히틀러에게 올린 슈페어의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여타의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하고 읽어낸다면, 위 인용문의 주장은  100% 옳습니다. 저자 슈페어는 위 인용문의 정당성, 즉 자신의 '그나마 덜 나쁜 놈'으로서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기 위해 책의 초반부터 그러한 의도적 장치들을 뿌려 놓지요.


"내 사상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 그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 히틀러는 매력적이었다. …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연설 내용보다 훨씬 심오했다.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잊은 지 오래다. 무엇보다 나는 그 열정에 빨려 들어갔다. …… 희망 없는 실직 대신 경제 회복을 해낼 수 있다고 히틀러는 우리에게 강변했다. 유대인 문제는 단지 주변적인 것으로 언급했을 뿐이다."(pp34-36)

쉽게 옮겨보자면, '난 아무 것도 몰랐었고, 히틀러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그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빠졌었던 거다. 기억나는 건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를 크게 거론하지 않았었다란 거다'라는, 한 마디로 --- "당시를 관통하던 이러저러한 시대적 조류를 감지하는 데 성공"(p33)했던 히틀러가 "이 조류를  자신의 목적16을 위해 활용"(p33)했었던 것에 자신은 그저 놀아났던 것 뿐이란 변명17인 거죠. 그러면서도, 슈페어는 다음과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쁜 놈이긴 해요'란 자책을 넣어둠으로써, 죄값은 받겠습니다란, 보기에 따라선 매우 교묘한 (일종의) 역사와의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직업 선택을 경솔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우리는 비판적 사고에 스위치를 내리고 자신을 정해진 직업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히틀러의 당원이 되기로 한 나의 결정도 그와 비슷하다"(p39)

히틀러의 무리에 가담했던 자신의 결정을, 이처럼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현재에도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의 범주18에 넣어버림으로써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긴 했었지만, 이게 내가 나쁜 놈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란 전제를 깔아놓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일 히틀러가 1933년 이전에, 몇 년 후 유대인 회당을 불사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들과 정적을 학살할 거라고 했다면, 그는 나를 비롯해 1930년 이후 그를 지지하게 된 대부분의 측근을 잃었을 것이다."(p40) …… "독일 내의 한 인종집단을 모조리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할 뭔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그때라도 눈치챘다면 … 그와 같은 야만의 분출이 나의 실체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알아차렸던가? 나는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p190)

​슈페어는 이와 같이 '악(惡)'의 문제를 '무지'의 차원으로 전환시켜 놓지요.19 그리고 그 '무지'역시, "난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았던 것이다"(p593)와 같이 분명하게 자신의 의도였었다라는 걸 못박아 놓습니다.  이와 같은 "고의적인 무지"(p594)란 전제 하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思考)를 회피한 행동은 그 시작부터 이어지는 결과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p40) …… 히틀러의 당에 입당함으로써, 이미 나는 본질적으로 … 이른바 '바람직하지 못한 무리'의 죽음, 정의의 말살, 모든 악의 고양으로 직접 연결되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p42) …… "그 순간에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온전히 개인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p594)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우병우 같은 이가 내놓는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러한 사과와 반성이기에, 이 책이 지니고 있다는 "나치 정부의 유일한 내부자 증언이자 사료"(p836)라는 평가에 전혀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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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사과는 합니다. "그 어떤 사죄도 불가능하다"(p191)란 정도까지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 진정한 사과는 아무런 이유대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라 생각하거늘, 슈페어는 ('고의적 무지'란 주장에서와 같이) "나치의 사상교육은 분리적인 사고20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건물을 짓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했다"(p191)와 같은, 자신의 책임을 제한하는 전제 조건을, 사과의 앞에 기어이 깔아놓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전제, 즉 저자의 '분리적인 사고'라는 것이 나치의 사상교육에서 비롯되었다라는 주장 역시, 의심스럽기도 합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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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프레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중 p276, 돌베개 刊, 2007.

​슈페어는 히틀러 "스스로가 자신의 거짓말을 믿었"(p568)었으며, 그러한 "믿음을 향한 의지가 자기 확신으로 변질되었을 뿐"(p568)이라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 "뉘른베르크는 나의 삶을 파괴했고 선고한 형량을 넘어 아직도 나를 벌하고 있다"(P12)란 슈페어 스스로의 고백 역시,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무지는 예의 '고의적 무지'였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믿고 싶어하였고 결국 믿게 된 것이 아닐까란 의심을 지워낼 수 없습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 프레모 레비 著. 「살아남은 자의 아픔」중 P33, 노마드북스 刊, 2011.

이러한 죄가 어찌, 1930년대 독일의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죄는 2017년의 박근혜와 최순실과 우병우 등에게도 똑같이 물어져야 하겠습니다만, 바로 그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도 또한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행동하지 않은 죄, 그리고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죄'로부터 자유롭다라 차마 말할 수는 없겠지요.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는 것으로 나의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분명하게 반대하지만 --- 타인의 "그때는 왜 그랬던가"(p99)수준의, 그것도 거짓된 반성을 통해, 이제껏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겠구나, 정도를 알게 되었다라는 정도가, 이 책이 지닌 제게 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체,

 

 


​"나는 언제나 현실을 인식하고 환상을 좇지 않는 것을 최고의 자질로 여겨왔다. 그러나 수감 기간을 포함해 나의 지난 삶을 생각해볼 때, 내가 환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순간은 없는 듯하다."(p464)

이토록, 지독히도 개인적이기만 한 후회에 기반한 반성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냔거죠.



 

※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다 아무것도 아닌데..."(p756)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의 결과들

- 프레모 레비 著,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刊, 2007.

-  헤르타 뮐러 作, 「숨그네」, 문학동네 刊, 2010.

  1. 독일의 항복 선언 직전, 새로운 정부의 구성에 있어, 니묄러 목사는 신설이 논의되는 종교장관직의 적임자로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p796 참조)
  2. <네이버 지식백과> '제2차 세계 대전, 대량 학살의 시대' 중.
  3. "사람들은 강력하고 자랑스럽고 통일된 독일을 위해 염훤을 이루어줄 지도자가 히틀러뿐이라고 믿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p107) --- 이러한 일반 국민들의 평가에 대해 슈페어는 "괴벨스가 만들어 놓은 신에 가까운 이미지"(p471)일 뿐이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4. "사람들은 히틀러가 밤낮으로 국사를 돌보는 지도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의 느슨한 일과는 흔히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성과 같았다."(p219)
  5. "지금까지 히틀러는 역사학자들의 진지한 연구대상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육신과 본질을 가진 물리적 존재이다."(p467)
  6. "인식 주체와의 관계에서 본 실재(實在)" - <네이버 지식백과> 중.
  7. 이러한 이유로, 즉 이 책의 내용이 본인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히틀러의 심복'으로서의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서전'이 아닌, 아닌, '일종의 자서전'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8. "권력자를 추종하는 이들은 권력자의 총애를 너무도 바라 마지않기 때문에 추종자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총애를 얻고자 한다. 히틀러의 측근들 사이에도 노예근성이 만연해 있어서 그들은 경쟁적으로 헌신을 드러내려 했다. 이런 현상은 지배자까지 흔들어놓아 서서히 부패하게 만든다. 권력을 가진 자의 주요한 자질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p149) ​
  9. "현대의 전쟁에서 정부의 최고위 지도부가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pp815-816) …… "모든 지도부 인사는 받은 명령을 검증하고 판단해야 하며, 그 명령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진다. 비록 그것이 강제로 수행된 것이라도 말이다."(p820)
  10. "슈페어는 한스 프랑크와 함께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시인하고 사죄한 단 두 명의 나치 고위직이다." - 위키백과 중.
  11.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역사를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죄의 대가는 치르도록 했다. 비록 역사적 무게에 비해 형량은 미미했다 하더라도, 시민으로서의 내 존재에 종말을 고하기에는 충분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의 삶을 파괴했고 선고한 형량을 넘어 아직도 나를 벌하고 있다."(p12)
  12.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의 독일제국(1934∼1945)을 일컫는 용어로서 1933년 정권을 장악한 나치스 독일이 1934년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사망을 계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체주의적 이념을 실현화하는 지도적 용어로서, 나치스가 제3제국의 완성을 제창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나치스 독일은 962∼1806년의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1871∼1918년의 독일제국을 제2제국, 1933∼1945년의 나치스 지배체제를 제3제국이라 일컬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중.
  13. "좌절뿐이었던 노력만 수년간 해온 뒤였고, 나는 뭔가를 미친 듯이 이루고 싶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위대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나는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은 것이다. 그(히틀러)는 괴태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p58) …… "나는 히틀러가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건축가의 꿈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고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다".(p68)
  14. ​"처음으로 나는 히틀러 아래서 '건축'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p53) …… "히틀러는 건축의 목적을 자신의 시대와 정신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역사상 위대한 시대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철학자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p93) …… "건설은 전쟁과 상관없이 계속되어야 하네. 전쟁으로 인해 나의 계획이 중단되도록 하진 않겠어."(p289) …… "비록 민심에 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공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p284)
  15.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히틀러에 대해 내리는 평가들 중에는 확신조차 동반하지 못하는 주관성 깃든 표현들 또한 쉽게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 ① "그는 가까운 측근이나 정권을 얻기 위해 함께 싸웠던 신뢰하는 동료들의 명성과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p213), ② "내가 보기에는 히틀러가 일부 전문 분야에서 위업을 달성한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것 같았다. … 어쩌면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이유로 히틀러가 나 같은 약관의 건축가를 발탁하지 않았다 싶다. 나에게는 전혀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p217), ③ "어쩌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과 채권자들을 속이려고 하는 파산자 같았다."(p464)
  16. "히틀러의 유일한 목표는 권력의 쟁취였고"(p40) ……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의 원천이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p173)
  17. 여기에 더해, 슈페어는 '약혼녀에게 쓴 편지'라는, 정녕 확인되어질 길 없는 기재마저 동원해 자신이 반인종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 "타 인종이 얼마간 섞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 같아. 만일 오늘날 우리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 인종이 섞여서 그런 것이 아니야. 강력한 힘으로 번성하던 중세부터 피는 섞이기 시작했고, 프로이센에서 슬라브인들을 몰아냈을 때나 훗날 유럽의 문화를 미국에 전해주었을 때도 그랬어. 우리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쇠퇴하는 거야.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지. 그걸 막을 방법은 없어."(pp27-28)
  18. "정치적 무관심은 당시 젊은이들의 특징이었다. 전쟁과 패배의 혁명, 인플레이션은 젊은이들을 지치게 했고 정치에 대한 환상을 앗아갔다."(p23)
  19. 이런 시도는, 지금 2017년의 대한민국 뉴스에서 매일 볼 수 있지요. --;;
  20. "일반 당원들에게는 위대한 정책은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원칙이 주입되었다. 대표자가 따로 있으므로 그들은 그 어떤 일에도 개인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되었다. 당원들이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치당의 장치였다."(p60)
  21. 예를 들자면, ① "나는 민족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추종자가 된 것"(p37), ②"주변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프리메이슨과 사회민주당,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압제를 공공연하게 선언할 때마다 직접 가담하지 않는 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p60), ③ "나는 스스로를 히틀러의 건축가라고 여겼다. 정치적 사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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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여행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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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예를 들어 한 편의 소설을 읽어내고 이해함에 있어, 쓰여져 있는 줄거리 그대로 straight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맥락의 렌즈로 한 번 걸러 이해해야 하는가는 물론 당연히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 '이것은 소설이고, 그것은 논문이다'와 같은 명백한 구분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고, 예의 그 구분은 독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저 줄거리 그대로 읽혀지고, 쓰여져 있는 바 그대로 이해되어지길 바랐었을 작가의 의도1완 달리, 그 작품에 작가가 실어놓지 않은, (때로는 과도한 두께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맥락의 렌즈를 통해 이해해내는 독자들도, 또는 그 반대 경우의 독자들도 존재하게 되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은, 어느 한 쪽이 틀렸다/잘못 짚은 거다란 판단마저 쉽지 않습니다. 속된 말로 '지 꼴리는 대로 읽으면 되잖아!'란 말을 압도할 별다른 반박의 문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제가 읽어본'이란 범위내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들에 관해서는, 최소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하게 주목할 만한 줄거리/의미 있는 이야기의 흐름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저의 생각엔 '거의 대부분의 누구나 다!' 그렇게 동의할 것이라 믿게 됩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그냥 '읽는다라는 노동으로부터 얻어지는 재미'만 있다고 해도 무방할 수도 있겠는, 뭐 그렇지 않나 싶지요. 이 작품 「코끼리의 여행」에도 역시나, 줄거리/이야기의 뼈대라 쓸만한 거라곤, 'A가 B에게 결혼 축하 선물로 보낸 코끼리의 이동 과정' 이외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게 과거의 실화였건 아니건은 딱히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그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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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에 살아 온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언저리에 신을 창조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부터 집안의 부엌과 곳간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이 있었다. 이 신들은 사람의 뜻으로 창조되었지만, 크고 작은 권능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신의 권능에 기대어 소원을 빌고 하소연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면고 삼가면서 살아 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갖가지 아기자기한 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우리 신화이다.

- 서정오 著,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중, 현암사 刊, 2003.

우리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종종 우리는 위안을 받아었다란, 신화(神話)의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저야 당연히 그러하지 않지만 --- 주제 사라마구에게 기독교란 종교는 예의 그 '신화'의 하나에 불과할 뿐2이지요. 하지만!


기독교란 신화는 그 영향력이 너무도 강하여, 인간을 위로하는 신(神)의 범위를 벗어나, 종국엔 '인간 스스로의 욕망을 이루어내는 것에 사용되는 유용한 도구'로까지 신(神)의 역할을 확장시켜 놓습니다.  

 

기사들은 신과 크리스트교를 위해 싸우는 것을 주요한 사명이라 여겼다. 때마침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그렇듯 이교도인 아랍 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사실을 아주 과격한 어느 프랑스 설교자가 기사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으며, … 크리스트교 세계의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한 교환 역시 성지 해방을 위해 나서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수천, 수만 명의 기사들이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왔다. "신께서 원하신다! 신께서 원하신다!"

- 에른스트 H. 곰브리치 著, 「곰브리치 세계사」 중 pp239-240, 비룡소 刊,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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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왕 동 주안 3세와 그의 부인 도나 카나리나 왕비는 막시밀리안 대공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로 '솔로몬'이란 이름의 코끼리를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을 오스트리아까지 보내기 위해선 그의 조련사인 수브흐로, 그리고 이동 중 솔로몬의 먹이를 싣고 가야 하는 짐꾼들과 그들을 호위할 군인들도 필요하지요. 여기서! --- 일단, 솔로몬을 결혼 축하 선물로 보내기로 한 결정 자체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귀찮은 짐 하나3를 그럴듯한 명분4을 내세워 이 참에 폐기 처분해 버리겠다란 거였으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저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그걸 구실로 다른 일을 꾸밀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뜬 자들의 도시」중 p332, 해냄 刊, 2007. 

십자군 전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발단의 외양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배타적 싸움을 띠고 있으나, 그 속에는 각 계층들의 현실적 욕망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5 바로 이 점, 즉 자신의 본래 의도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고 있듯이,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코끼리 솔로몬과 그와 함께 먼 길을 (단지 왕의 명령에 따라!) 이동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들 자체는 결코 부각되어서는 안되는 부차적인 것도 안되는 사항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저,


"목적이 거룩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도 거룩한 거야."(p17)6

 

란 왕의 선언에 의해, 실제론 왕의 성가심을 해소하기 위한 '거룩한 수단'이 될 뿐이지요. 이러한 왕의 선언 앞에서, "코끼리가 쥐색이 아니라, 쥐가 코끼리 색이다"(p284)와 같은 항변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심각한 (신을 앞세운) 속임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에는!


"이른바 '신의 심리적 또는 정서적 필요성이다'란 주장에 대해서도 "종교가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신을 믿는 것과 믿음을 믿는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데닛의 말처럼 …… 'X는 참이다'와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 감정이냐,진리냐, 둘 다 중요하겠지만,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 리처드 도킨스 著, 「만들어진 신」중, 김영사 刊, 2012.

'X가 참이다'란 왕/종교 지도자의 선언은 이의 제기를 허용치 않는 진실로 둔갑되는 것이며, 따라서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가 지니고 있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말살시켜 버리게 되는 겁니다. 물론, 왕/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권위에 의해서만 'X가 참이다'를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의 'X가 참임'을 보여주는 (당연히 조작된!) 증거들을 민중들에게 제시하지요.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7이란 작가의 현실에의 비판은 이 작품 속에도 예의 등장합니다. "코끼리라는 종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p76)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진 "솔로몬이 바실리카 성당 앞에서 무릎을 꿇는 기적"(p217)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이내 "복음의 메시지가 동물의 왕국 전체에도 전해지고 있다"(p225)로 윤색되어지고, 결국엔 "믿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소, 그리고 하느님은 필요한 일을 하실 거요"(p221)라는 선동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선동은 그것이 전해지는 사람들의 입과 귀의 수가 많아질수록8 "자신보다 더 고등한 전능자가 자신 운명을 지배한다는 망상"9을, 일종의 반박할 수 없는 진실로 확정되지요. 이제, 그 전능자의 대리인인 종교 지도나나 왕은 민중들의 운명까지를 '신의 이름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코끼리 솔로몬은, 그리고 솔로몬의 이동에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인 겁니다. "빈으로 보내버려요."(p12)란 말로 시작된 솔로몬과 그 일행들의 고난스런 여정이란 게 결국엔 '신이 원하신다!'란 한 마디로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과 동일하다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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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구경거리인 한은 좋다. 그러나 우리를 선수로 끌어들이여고 할 때, 특히 우리가 아무런 준비나 경험이 없을 때 문제가 시작된다."(p155)

선물의 수취인인 막시밀리안 대공 역시, 코끼리 솔로몬과 그 일행을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은 그저 그 '전쟁'에 동원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이건 마치, ---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10란 성직자들의 설교와 다름 없습니다. 예의, 'X가 참임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의 조언의 수준이 아닌, 'X가 참이다'란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이라는 강요에, 그 어떠한 근거도 제시되지 못하는 그 강요에, 그저 "신께서 원하신다"란 한 마디에 대해 "아멘!"이란 복종만을 요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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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그 종교는 부모님의 종교와 같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 당신은 자신이 아칸소 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가 옳고 이슬람교가 틀렸다고 생각할 뿐이고, 만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다면 반대로 생각했을 것"11이란 리처드 도킨스의 지적을, 주제 사라마구는 "한 청년은 할아버지한테 왜 코끼리를 코끼리라고 부르냐고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코가 길기 때문이지."(p290)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거장의 지적은 결국,


"이리는 인간의 타고난 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리에게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들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우리가 방해를 할 때만 가끔 나타나는 거니까."(p120)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리'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신(神)의 역할에의 비판으로 귀결되지 않나 싶습니다. --- "우리는 점점 장점은 사라지고 결점만 남는 것 같다"(p168)란 작가의 지적이 어쩌면, 이처럼 결점이 더 많아진 저의 신앙에 대한 묘사인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맹장을 떼어내는 것과 목숨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가? 사실 없다. 즉 당신이 어차피 죽게 되어 있다면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사후의 삶을 믿는 진정한 종교 신앙을 갖고 있다해도 차이가 없다. 당신이 그런 신앙을 갖고 있다면, 죽음은 단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의 전이일 뿐이다."


- 리처드 도킨스, 위의 책 중.​

무신론자의 발언으론 뭔가 뜬금 없는 듯도 보여지는 위의 발언에 화답이라도 하듯, 주제 사라마구는 --- 이 세상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존재 자체로는 인정/대우 받지 못했던 솔로몬에게, "코끼리는 이 년이 안 되어, 다시 찾아온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p295)라는, '다른 삶으로의 전이'를 안겨주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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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코끼리의 여행」에 대한 저의 이해가, 종교적 맥락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오역(誤譯)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제까지의 경험에 한정해 본다면 --- 어지간한 반박이 있지 않다면, 이러한 저의 이해가 변치 않을 꺼란 건 확실합니다. 


"인간들이 하는 전쟁이었죠. 글쎄요, 뭐 다른 종류의 전쟁이 있겠습니까."(p249)


이 두 마디에 담겨 있는 허탈함을 과연 누가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허나 역설적으로 --- '읽는다라는 노동으로부터 얻어지는 재미'에 더해,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이런 지적이 끝내 향하고 있는 지점은, 그런 허탈함을 이겨내어야 한다라는 것임을 알기에, 그의 작품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을 뛰어넘는, 심지어 "노벨문학상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세계적인 거장"과 같은 형용구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라 느껴질 정도의) 위대함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자!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전 화요일까지 쉬어요. 이 연휴 동안, 평소라면 정복(?)하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한 권의 책 읽기와 독후감 쓰기를 해내려 하는데, 글쎄요, 그 결과는 과연 어떨지...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도플갱어· 예수복음· 카인」 · 「눈뜬 자들의 도시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저의 경우, 작년 <올해의 딱 한 권>으로 꼽았던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2.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사람에 관한 동화"(p82)
  3. "그게 선물이 될 수 있잖아요. … 솔로몬이 적당한 결혼 선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건 상관없잖아요. … 코끼리는 이 년 전에 인도에서 왔는데, 왔을 때부터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 하는 일이 없어요, 그래도 물통에는 늘 물을 채워두고 먹을 것을 꾸준히 갖다 줘야 해요, 우리가 짐승을 부양하는 셈인데, 이 짐승은 사료 값도 못하는 셈이에요, … 그러니까 빈으로 보내버려요."(p12)
  4. "그의 왕국 전체에서 코끼리 솔로몬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고 … 솔로몬은 신의 창조에서 드러난 통합의 힘, 즉 모든 종을 연결시켜 그들 사이의 친족 관계를 확립하는 힘을 대표 … 코끼리는 그 몸에 상징적이고 본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재현하고 있"(p14)
  5.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기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십자군 전쟁' 중.
  6.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다"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중, 해냄 刊, 2010.
  7.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325.
  8. "이런 왜곡은 진실이건 가정된 것이건, 진짜이건 순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이건, 사실들이 계속 사람을 거치며 전달이 된 결과였다. 이런 사실들은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의 대체로 단편적인 이야이게서부터 그냥 자기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하는 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완전한 마침표, 아니면 쉼표라도 덧붙이고 싶은 유혹에 저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p227)
  9. 리처드 도킨스, 위의 책.
  10. 엔도 슈사쿠 作,「침묵」중, 홍성사 刊, 2003.
  11. 리처드 도킨스,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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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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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극대화'가 인간의 목표이고, 그 목표에 가해지는 제약은 '소득의 제약'이라 <경제원론>은 가르칩니다. 하지만! --- 교과서 밖, 실제 우리의 삶이란 건, '행복극대화'라는 (이를테면)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라기 보단, 그 최종적 목표의 달성에 부과되는 수단(에 불과할 뿐)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에 거의 모든 focus가 주어져 있지요. 그러다보니,

어느덧 우린, '행복극대화'란 최종적 목표를 잊게 되었고1, 휴일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보다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라는 비정상적 상황2에 대해서조차, 그럴 수밖에 없는/그러고 싶어하는 것이 마땅한 '가장(家長)의 고난' 정도로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요를 사회적으로까지 일반화시켜놓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 "경제 행위는 '목적 합리성'이 철저히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경제학에서의) 두 가지 기본 명제가 얼마나 우리의 실생활에서 철저하게 파괴되어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이며, 이 예가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라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기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위의 두 명제가 파괴된 곳이 비단 경제 생활에서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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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한테는 그 표가 필요하단 말이오"3

'정치'란 행위는 (현재 시점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한도에서 보자면) 사회 구성원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필요한 일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업(業)인 '정치인'이 되는 것, 혹은 그 업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들에게 '정치'란 행위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게 되지요. 그들에게 '정치'란 행위, 다시 말해 '권력'이란 건 자신들의 목표인 '정치인'이 된 후 얻어지는, 일종의 선택 가능한 게임 아이템과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 중에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도 있겠으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4해질 수 있는 것 역시 존재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우리가 현실에서 보게 되는 거의 모든 정치인5들은 후자의 아이템을 선택한다라는 거지요.


【 "이 의회는 이 도시에 속한 것입니다. 이 도시가 이 의회에 속한 게 아닙니다"6

이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는 포르투갈의 수도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완벽한 전이(轉移)'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단 자신의 조국의 정치 현실만을 향한 것이 아닌, '정치 일반'에 대한 일깨움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정치인들의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정치인들 사이에서의 위계와 당파 등에 의해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 내어 결국엔 --- "(사회 구성원들이)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p377)해버리는 것에 자신들의 아이템인 '권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지금 이 시각, 청와대 관저에 앉아 올림머리를 하고, 배우 현빈의 열애설에 애통해 하며 TV 드라마를 보고 있을지 모를 그녀7 역시 --- '국민들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을 이루어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의 프레임 속에 국민들의 생각을 바꾸려 했었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 권력을 사용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권력의 오용'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p183)이기에, 또한 그 '때'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인 5년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인 4년보다 항상 더 먼저 발생되기에, 그리하여 끝내는 "우리의 삶을 망쳐놓은 두려움이 결국 아무런 근거도 없고, 존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확인"(p418)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에 --- 정치 권력의 오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아무리 변화된/한 형태로 민중을 괴롭힌다 하여도, 그 오용을 처음 접하는 시점 이후부터는 예의 '전례가 없던'이란 수식어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어,8


"권리는 그것이 표현되는 말 속에서만, 또 헌법이든 법이든 규칙이든 그것이 기록되는 종이 위에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 … 권리라는 것을 가능한 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절대 실행 가능한, 구체적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p124)이란 그들, 정치인들의 오판9에 맞서는 --- "권리란 추상적인 게 아니지요, 존중받지 못할 때도 계속 존재하니까요. …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무, 그 권리를 존중하고 따를 의무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합니다"(pp79-80)이란 정의(正義, justice)를, 더 이상은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pp184-185)것 마냥 외쳐대는 저항에 맞닥뜨려지게 됩니다.


【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10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65.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가끔씩은 거짓말이 진실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임을 적시에 깨닫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p61)라 적고 있습니다만,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거짓말은 그런 보편적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저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그걸 구실로 다른 일을 꾸밀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p332)

전작 「눈먼 사람들의 도시」에 등장했었던, 시민들 가운데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안과의사의) 부인의 존재를 알게 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현재 사태의 근원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논리란 건 "첫 번째 이상한 사실이 자동적으로 두 번째 이상한 사실의 원인"(p336)이 된다11라는 것 뿐이었지요.

이제 그들은 이 성립할 수 없는 논리를 성립시켜내기 위해, "어떤 연관이 있든 없든 그 연관을 확립하는 것"(p272)에 매진하게 됩니다.12 이를 위해 그들은 ---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p325)이란 모토 아래 결국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선고가 내려진 사건"(p322)을 만들어 내지요. 예의 그들은 자신들 내부 속에서의 반감을 잠재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더 나쁜 것, 더 마키아벨리적인 것"(p111)이란 대상이 존재함13을 국민들을 향해, 그리고 스스로에게조차 최면 걸듯 각인시키는 것을 잊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정치'는, 이러한 정치인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에, 과연 우리들 스스로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 눈 멀다 ]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14라 말해주었던,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15란 개념의 '눈멀다'를 그 작품의 결론으로 삼았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사람들의 도시」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16의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우(愚)를 염려하도 했었듯 --- 이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를 통해, "내가 한 말은 우리가 사 년 전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쩌면 지금도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p225)란 메시지17를 알려 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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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p377)

당연하게, 그저 누구에게나 모두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현재의 삶, 민주주의란 체제은 사실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p143)과 같은 과거 세대의 투쟁이 있었었기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을, 그러나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p143)버렸다라는, 그리하여 --- 실제 자신 스스로 서명한 그 "평생 지킬 협정"을 "전통이라는 파라솔 밑에서 평생을 보내며 주식거래라는 냉방장치를 틀어놓고 시장이라는 따뜻한 서풍의 자장가를 듣던 사람"(p144)로 변해버린 후에는, 과거의 자신이 했던 서명을 보고는 "누가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니냐하는, 그리하여 결국에는!

………………………………………………………………………………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p428)

작가 야마다 무네키는 「백년법」에서 "경고의 내용은 담은 예언이 가장 주목받는 건 참사를 미연에 방지했을 때가 아니라 예언된 참사가 실제로 일어났을 때"18란 섬뜩한 말을 해주었었죠. 대한민국의 현 꼬라지가, 누군가에 의해 예언되었었건 아니건을 떠나, 심지어 "이제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다"(p164)의 단계마저도 넘어선 이 쪽팔린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을 --- (당연히! 그들의 잘못이 가장 결정적이긴 하지만) 오로지 정치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나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온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민주주의를, 이제껏 그저 누려오기만 했던 아이의 부모 세대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손에 쥔 감자가 너무 뜨거우면 입김을 부십시오"(p156)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라며 귀를 막는 부모가 아닌, 손에 쥔 뜨거운 감자에 입김을 불어낼 수 있는, 그런 부모로 기억되고 싶다는 - 설혹 나의 아이가 훗날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겠노라 한다 하여도 - 바람(願)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 이 작품에 깃든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바람(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아직 읽지 않은 작가의 작품들이 몇 편 있음에도 불구하고 --- 더 이상, 그 특유의 촌철살인과 비꼼, 읽는다라는 노동에 대해 이토록 즐거울 수가!하는 뿌듯함을 선사해주는 구구절절의 묘사들을, 새로운 작품으로는 만나볼 수 없다라는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 주네요. 이 분 웬지... 천국에서 신과 맞짱 토론 하고 있을 듯. ^^;;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도플갱어· 예수복음· 카인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1. 그룹 '넥스트'의 <도시인>이란 노래의 가사는, 대략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 "아침엔 우유 한잔 / 점심엔 FAST FOOD / 쫓기는 사람처럼 / 시계 바늘 보면서 거리를 /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 /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 THIS IS THE CITY LIFE …… 어젯밤 술이 덜 깬 흐릿한 / 두 눈으로 자판기 커피한잔 / 구겨진 셔츠 샐러리맨 / 기계 부속품처럼 큰 빌딩 속에 / 앉아 점점 빨리 가는 세월들 / THIS IS THE CITY LIFE …… 한 손엔 휴대전화 허리엔 / 삐삐차고 집이란 잠자는 곳 / 직장이란 전쟁터 / 회색빛의 빌딩들 / 회색 빛의 하늘과 / 회색 얼굴의 사람들 / THIS IS THE CITY LIFE"
  2.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획득의 기술'이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p95, 책세상 刊, 2001.)
  3. p193.
  4.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중 p64, 생각정원 刊, 2015.
  5. 작가 주제 사라마구 역시, 이 작품에서 '정치인'을 다음과 같이 비하하는 뉘앙스로 묘사/정의하고 있지요. --- "도시의 운명을 가를 검은 차를 가진 사람들, 즉 투표소 문간에 내려주었다가 시민적 의무를 마치고 나면 다시 뒷자리에 실어줄 차를 가진 사람들"(p11)
  6. p141.
  7. "정부는 실제로는 통치를 하지 않고 그냥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p138)란 소설 속 문장은 정확하게! ---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 즉 대통령의 직무 정지와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 대행을 묘사하고 있는 듯도.
  8. "그들은 장갑을 끼고 들것을 들고 갈 것이다. 대부분은 불에 탄 주검에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다."(p164)
  9. 정치인들의 이러한 오판에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오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 "이 나라의 국민은 헌법이 부여한 권리의 적절한 이행을 요구하는 건강한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자신들의 권리가 중단된 것조차 잘 느끼지 못했다."(p76)
  10. p165.
  11. 이 억지는 "냄비를 만든 사람이 뚜껑도 만드는 거요"(p326)이란 문장 속에서도 보여지지요.
  12. 이러한 작업(?)의 시작으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 시민들의 집단적 시위가 발생하면, 경찰은 물대포나 최루판으로 그들을 해산시키려 하지만, 계엄령 하에서 "군은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p114)란 총리의 대답은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 시민들의 죽음까지도 불사한다는, 그야말로 완벽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는 극명한 예이지요.
  13. 촛불 시위에 종북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
  14.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p31, 해냄 刊, 2012.​
  15.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471.
  16.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467.
  17. 작가는 이를 "우리는 무엇을 듣지 못했나"(p406)라 달리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18. 야마다 무네키 作, 「백년법 하권」중 p132, 애플북스 刊,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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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일반적으로 젠더(gender)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남녀의 정체성, 즉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성이며 여성다움, 남성다움을 통칭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특정 성(sex)에 부합되는 젠더의 특질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을 그 방향으로 사회화시킨다. 페미니즘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비판하여 …"1 

​페미니즘에 대해선 좆도 모르(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지만,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의 성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gender'와 ('생물학적 존재' 이외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sex'의 차이에 대해, 최소한 위와 같은 수준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얇고 또한 얉은 지식으로 보아도/보자면 --- 이 작품 「기다림」에 대해,

'중국' 작가의 소설이니까! 그것도 1956년 생인, 그러니까 그의 성장기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문화혁명기와 겹친다"(p478) 하여도! --- 도대체, 이해(理解)고 자시고를 떠나, 최소한의 납득마저도 건져낼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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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어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p7)


나름! --- (의식적 행위인) '기억나는'이 아닌, (무의식적 행위로서의) '잊혀지지 않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기록되기에 부족함 없는, 독자로 하여금 이 것이 대체 어떻게 풀어내어질까를 아니궁금해 할 수 없게 만드는 첫 문장입니다. '청혼'이 아닌, '결혼'도 아닌 '이혼하기 위해 … 집으로 돌아갔다'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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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트로퍼의 소설 「당신 없는 일주일」을 읽고 쓴 감상문에서 전, '결혼'이란 행위를 '사회적·자발적 결합'이라 분류했더랬습니다만, 중국작가 하진의 작품 「기다림」을 읽고는 그러한 분류가 섣부른/잘못된 판단이었었으며, 지극히 현 시대 그리고 저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뭐, 중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만 추측해 보아도 --- '결혼'이란 것이, '결혼'이란 것에 대해, 이처럼 '사회적·자발적 결합'이라 말할 수 있게 된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 사실 18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p454) ……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 그런데 뭘 기다린 거야?"(p455) …… "그 세월 동안 너는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한 거야. …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p456)

'477'이란, 결코 짧지 않은 본문의 페이지에 가서야 끝맺음되는 이 소설의 결말은, '기다림'이란 단어를 차용함으로써, 뭔가 아련 내지 애틋한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은 기대를 한껏 심어준 이 소설은 이처럼 ---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라는, (허구헌 날 제가 외쳐대는) 이 치명적 실수가 사실은 얼마나 흔한/저질러지기 쉬운 것인지를, 더 근본적으로는! 고래적 할아버지이신 아리스토텔레스 옹의 일갈(一喝),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란 지혜가, 고래후3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여전히, 얼마나 이행되기 어려운 것인지까지를 극명하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 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 허용되지 않음이 허용되기를 기다린, 그렇게 그저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을 무려 18년 간 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 그냥  이게 전부죠!

………………………………………………………………………………………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


'subject to'4란 것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게 되었느냐, 그 의미가 어느 정도나 체화(體化)되었느냐가 바로, 4년이란 시절을 경제학과 학부생으로서 얼마만큼 충실하게 보내었느냐의 첫 번째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라 저는 생각합니다. 혹! 경제원론(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목적이 효용의 극대화이고, 그 한계는 소득의 제약이므로,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란 위 문구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 이해하는 경제학과 졸업생이 있다면 그건 --- "경제 행위는 '목적 합리성'이 철저히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5란 구절,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를 발생시켜서는 안된다'6라는 대전제를 잊고 있기 때문인거죠. 이제!   


'사랑'이라는 개인적 감정과,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수단과 목적' 또는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 속에서 각자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기본적 단계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죠. --- (현실에선 분명, 결혼하기 위해 사랑하려하는 부류들도 있겠으나, 그네들은 논외로 하자면) ①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어졌다'라 생각한다면, 결혼은 사랑의 목적 혹은 결과물이 되는 것이겠고, ②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결혼하고 싶어졌다'라면 이때의 결혼은 사랑(의 유지)이라는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겠죠. 물론, 이는 저의 생각일 뿐, 각자의 판단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단연 ②번 입니다.7)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들 중 하나가, '삶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일진데 --- 그 '삶의 목표'란 것은 어느 순간 '삶을 살아가는 이유'로 작동하게 되지요. 쉽게 말해,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무엇을 이루고 싶다'라는 목표가 이내 '나는 그러하기에 살아간다'가 된다는 겁니다. 이 때 만약, 그 '살아간다'의 이유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아내, 그것을 다시 새로운 '삶의 이유'로 만들어 내면 되는, 그토록 간단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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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속 주인공 쿵린은 --- 새로운 '삶의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존 '삶의 이유'를 불합리/부조리한 것이라 스스로에게 합리화 시켜버리는 인물입니다.


린은 이제 이혼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 익은 과일이 서리가 내리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둘은 이혼하게 돼 있었다. 그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힘으로 수위와 이혼한 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런 힘을 가리켜 사람들은 '운명'이라 하는 거겠지.(p330) 

부모의 필요에 의해 수위와 결혼했던 쿵린에게 '결혼'이란 사랑의 종착지, 즉 '사랑하기에 한 선택'이 아닌, '자식된 도리'라는 목적을 위한 일개 수단8에 불과했었던 겁니다. 이 사실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선택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이 --- 페미니즘의 비판이 가해지는 지점, 즉 '특정 성(sex)에 부합되는 젠더(gender}의 특질이 있다는 믿음'의 강요를 통한 사회화/사회적 강요, 그리고 그러한 사회화/사회적 강요가 "남성중심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에게 부과된 것"9이라는 비판에, 너무나도 적합한 스토리라는 것 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이라는 성(sex)로서의 생물학적 존재를 아예 포기한, 오로지 아내라는 성 역할(gender)/사회적 존재로서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성 수위와, 수위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자체 역시 당연하다라 여기는 남성 쿵린, 여기에 아내라는 gender보다 여성이라는 sex에 더 집착하는 우만나라는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이 삼각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종말, 이 종말을 바라보는 남성 쿵린의 후회 - "아직 자신에게 열정과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온몸을 바쳐 사랑하는 법을 배워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텐데. … 이제는 다른 일을 해보기에는 너무 늙었다."(p458) - 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으로부터, '기다림'이란 것이 세 등장인물들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인가를 알아 내고 싶었던 저의 바람(願)이, 얼마나 허황되었었나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이런 류의 삶에 '사랑'이란 단어를 결부시킬 수 있겠으며,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 쿵린, 수위 그리고 우만나의 삶이, 제 아무리 시대와 장소의 한계를 감안해낸다 하더라도, 이들의 '기다림'이 각자가 원하는 끝맺음을 맞이했노라, 동의해줄 수 있을까 싶기만 하네요.


<전미 도서상>과 <팬 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니, 제가 알아채지 못한/끄집어 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추측까지를 지워내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제가 생각하는 '불륜'의 조건들과 비교하며 이 작품을 이야기하려 했었던 애초의 의도를 주저 없이 내버린 채 --- 이 소설 앞에 제가 붙여낼 수 있겠는 형용구란 오로지 "뭐 이딴~" 이외에는 생각해낼 수가 없네요. 뭐, 아쉽지만 (2016년과 2017년에 걸친 독서의) 2017년 첫 감상문은 이러... 합. --;;

 

 

 

 



 

  1. ​"[네이버 지식백과] 젠더 [Gender]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중.
  2. <역자 후기>가 그토록 내용도 없고, 그토록 짧은 것으로 보아,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이 작품의 역자인 작가 김연수의 감상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3. 이 표현이, 성립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
  4. 이는 결국 feasibility와 affordability를 의미하지요.
  5. 예를 들자면 ---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획득의 기술'이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p95, 책세상 刊, 2001.)
  6. 이와 비슷한 혼동 중 하나가 --- '원의 둘레 = 원의 지름 × 원주율(π)'라 알고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사실 이 공식은 '원주율 π는 원의 둘레를 원의 지름으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를 뒤집어 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원래 '원주율 ≡ 원의 둘레/원의 지름'의 정의(define)를 우리는 원의 둘레를 구하는 '공식'인 것으로 배워왔던 겁니다.
  7. 작가 박현욱도 ②번과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수긍하는 건 아니기도 하지요. --- "제도라는 거, 인간이 만드는 거잖습니까.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질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p181) ……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박현욱 作, 「아내가 결혼했다」중 p398, 문학동네 刊, 2014.)
  8. "21년 전인 1962년, 린은 선양 시에 있는 육군의학교 학생이었다. 어느 여름 그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 아픈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한 시라도 빨리 색시를 맞아들이라고 채근했다. 자식 된 도리로 린은 적당한 색싯감을 구하겠다는 양친의 말이 동의했다."(p14)
  9. ​"[네이버 지식백과] 젠더 [Gender]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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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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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편의 책들을 만나보았던 2016년.

되돌아보니,

딱히 '알찬 독서'를 했던 한 해였다라 말해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특정 흐름이 있는 독서를 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 양으로라도 뿌듯해 할 수 있는 한 해도 아니었던,

무엇보다

저 스스로 책 읽는 것보다는 다른 것들에

시간을 빼앗겼고, 시간을 빼앗았었다란 자책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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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그리고 '감상문을 써본다'라는 행위는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채 시작되었음에도

예의 커다란 즐거움과 배움을, 저에게 남겨 준다라는 사실 자체는

2016년에도 변함이 없었었지요.


이처럼!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단이 항상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내려진다는 법은 없다. 날마다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나 접했던 말들이 어느샌가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훗날 돌이켜봐도 무엇 하나를 콕 집어 원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 야마다 무네키 作, 「백년법 下」중 p62, 애플북스 刊, 2014.

저 스스로도 특정한 목적을 내세우지 않은 이 행위가, 또한 특정한 목적을 저에게 강요하지 않는 책들을 만나 제 안에 쌓여가며 그렇게 --- 저 스스로도 어느 시점을 특정해낼 수 없이, 그렇게 저를 변화시켜주고 성장시켜주는 것이겠지요. 그러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가다 보면,


​"인간은 DNA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억의 총합입니다."

- 박주영 作, 「고요한 밤의 눈」중 p36, 다산책방 刊, 2016.

저의 직접적 경험, 그리고 그것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단서 혹은 길잡이가 되는 간접 경험들이 어울어져 '기억의 총합'으로 정의(define)되는, 특정 시점 - 예를 들어, 1969년 6월 17일부터 시작되어 오늘 2017년 1월 1일까지의 총합인 '저'라는 사람의 생(生)을 조각해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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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총합'의 시간적 배경은 어쩔 수 없이 그 '총합' 자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summation의 시간적 배경이 '1969~2017'인 저와, '1942~2017'인 제 어머니에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물 자체가 다르기에, 그 총합의 결과물 역시 다른 모습을 띠게 될 수 밖엔 없으니까요.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 권여선 作, 「레가토」중 p390, 창비 刊, 2013.

'1969~2017'이란 제 삶의 기간동안, 제 삶에 개입되지 않았던/못했던 '독재에의 항거'라는 시간적·사회적 배경을 이야기 한 권여선의 「레가토」는 그런 점 - 제 삶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들에, 관심도 없었으며, 관심이 없었기에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저의 습성에 '그러하면 아니된단다~'란 메시지를 매우 매우 극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던 소설이었노라 기억됩니다.


​"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허삼관 매혈기」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글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인용했었던, 소설을 접할 때면 항상 제 마음 속에 자리잡고, 그 이야기를 이해하는 제 시선을 shaping해주는 문구입니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단지 중국 작가 위화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 "문학은 개인적인 것이며 점점 더 개인적이 되어가고 있다."1라며 동일한 견해를 보여준 작가 박주영은, 그러나 일견 충돌되는 듯 보여지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작가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2란, 사뭇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듯한 견해를 또한 밝히고도 있었죠. 바로 이 지점!

문학의 개인적인 면과, 사회를 향한 제대로 된 관찰자로서의 작가라는 두 가지 면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낸 작품이라 생각하는 소설이 바로 --- 예의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제가 <올해의 딱 한 권 : 2016>으로 꼽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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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소설이나 가상소설이라고 처음부터 작정을 해둔 게 아니면 글쓰기는 결국 뒤돌아보기 아닌가. 적어도 문학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들은 성찰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

- 신경숙 作, 「외딴방」중 p81, 문학동네 刊, 2014.

그녀 스스로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p11,p511)이라 표현한 이 작품은 --- 작가 신경숙이 살았(내었)던 특정 시대, 누군가는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으로 살아보지 못했던 그 시대의 개인적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특정 방향의 사고(思考)를 굳이 강요하지 않으며 그 시대에 대한 제대로 된 관찰자 역할을, 더 이상 담담할 수 없는 문체3로 그려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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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일러주었네. 나는 난쟁이보다 더 크지 않고, 거인보다 더 작지 않음을, 나는 모든 사람이 만들어지던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 칼릴 지브란


"자신만큼은!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생각했었던 지도자들을 가졌었던/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과거를 살아왔었고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어 주는 작가 신경숙의 "우리가 그 집에 살았을 때라든지, 혹은 옛날에 우리가 닭을 길렀을 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이 글 속에 그런 행복이 잠겨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긴다."(p471)는 소박한 바램은 정녕!!! --- 지난 일년 여간의 제 개인사(史)와 어울려, 심각하게 뭉클한 무언가를 제게 안겨주었더랬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역시! 'OO했었던 그때와 이때'를 행복하다라 말할 수 있을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꺼라 믿어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마치 전쟁과도 같고, 어쩌다보니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해왔었다 해도, 결국엔 참아낸 '그때 그 시절의 그들'처럼, 저 역시... 참아내고 참아내다보면 언젠간, 이기는 순간의 보람을 맛볼 수 있겠지,하는 희망을 예의 굳건히 믿어봅니다."

………………………………………


지금으로부터 8개월 여전, 이 작품을 읽고 썼던 감상문의 마지막입니다. 뭔가 많이 힘들었었던 그 때의 저 믿음이 있었었기에 다행히도! --- "참아내고 참아내다보면 언젠간, 이기는 순간의 보람"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있노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2016년의 마무리를 만들어내었노라 생각합니다.



"모든 기록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아닌 타인을 위해서 한다."4



제 아무리, 저 스스로의 기억을 (완전히까진 아니더라도) 대신해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록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쓰는 한, 제가 쓰는 감상문들이 혹여라도 '타인을 위한' 글일 수도 있다라는 염려를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염려로도 막아내지 못한, 그리하여 때로는 솔직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글들 읽어주신, 읽고 댓글 달아주신 노동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으셨던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리며, <2016> folder를 닫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Happy 2017!이길~ (제가 또... 닭띠! ^^)


<올해의 딱 한 권! : 2015>

<올해의 딱 한 권! : 2014>




  1. 박주영, 위의 책 중 p278.
  2. 박주영, 위의 책 중 p265.
  3. "단문. 아주 단조롭게.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 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 사진 찍듯. 선명하게."(p46)
  4. 박주영, 위의 책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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