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일반적으로 젠더(gender)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남녀의 정체성, 즉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성이며 여성다움, 남성다움을 통칭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특정 성(sex)에 부합되는 젠더의 특질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을 그 방향으로 사회화시킨다. 페미니즘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비판하여 …"1 

​페미니즘에 대해선 좆도 모르(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지만,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의 성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gender'와 ('생물학적 존재' 이외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sex'의 차이에 대해, 최소한 위와 같은 수준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얇고 또한 얉은 지식으로 보아도/보자면 --- 이 작품 「기다림」에 대해,

'중국' 작가의 소설이니까! 그것도 1956년 생인, 그러니까 그의 성장기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문화혁명기와 겹친다"(p478) 하여도! --- 도대체, 이해(理解)고 자시고를 떠나, 최소한의 납득마저도 건져낼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2

………………………………………………………………………………………

"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어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p7)


나름! --- (의식적 행위인) '기억나는'이 아닌, (무의식적 행위로서의) '잊혀지지 않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기록되기에 부족함 없는, 독자로 하여금 이 것이 대체 어떻게 풀어내어질까를 아니궁금해 할 수 없게 만드는 첫 문장입니다. '청혼'이 아닌, '결혼'도 아닌 '이혼하기 위해 … 집으로 돌아갔다'라니요!

·

·

·

조너선 트로퍼의 소설 「당신 없는 일주일」을 읽고 쓴 감상문에서 전, '결혼'이란 행위를 '사회적·자발적 결합'이라 분류했더랬습니다만, 중국작가 하진의 작품 「기다림」을 읽고는 그러한 분류가 섣부른/잘못된 판단이었었으며, 지극히 현 시대 그리고 저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뭐, 중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만 추측해 보아도 --- '결혼'이란 것이, '결혼'이란 것에 대해, 이처럼 '사회적·자발적 결합'이라 말할 수 있게 된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 사실 18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p454) ……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 그런데 뭘 기다린 거야?"(p455) …… "그 세월 동안 너는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한 거야. …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p456)

'477'이란, 결코 짧지 않은 본문의 페이지에 가서야 끝맺음되는 이 소설의 결말은, '기다림'이란 단어를 차용함으로써, 뭔가 아련 내지 애틋한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은 기대를 한껏 심어준 이 소설은 이처럼 ---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라는, (허구헌 날 제가 외쳐대는) 이 치명적 실수가 사실은 얼마나 흔한/저질러지기 쉬운 것인지를, 더 근본적으로는! 고래적 할아버지이신 아리스토텔레스 옹의 일갈(一喝),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란 지혜가, 고래후3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여전히, 얼마나 이행되기 어려운 것인지까지를 극명하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 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 허용되지 않음이 허용되기를 기다린, 그렇게 그저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을 무려 18년 간 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 그냥  이게 전부죠!

………………………………………………………………………………………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


'subject to'4란 것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게 되었느냐, 그 의미가 어느 정도나 체화(體化)되었느냐가 바로, 4년이란 시절을 경제학과 학부생으로서 얼마만큼 충실하게 보내었느냐의 첫 번째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라 저는 생각합니다. 혹! 경제원론(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목적이 효용의 극대화이고, 그 한계는 소득의 제약이므로, "수단의 양(量)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란 위 문구는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 이해하는 경제학과 졸업생이 있다면 그건 --- "경제 행위는 '목적 합리성'이 철저히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5란 구절,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를 발생시켜서는 안된다'6라는 대전제를 잊고 있기 때문인거죠. 이제!   


'사랑'이라는 개인적 감정과,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수단과 목적' 또는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 속에서 각자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기본적 단계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죠. --- (현실에선 분명, 결혼하기 위해 사랑하려하는 부류들도 있겠으나, 그네들은 논외로 하자면) ①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어졌다'라 생각한다면, 결혼은 사랑의 목적 혹은 결과물이 되는 것이겠고, ②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결혼하고 싶어졌다'라면 이때의 결혼은 사랑(의 유지)이라는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겠죠. 물론, 이는 저의 생각일 뿐, 각자의 판단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단연 ②번 입니다.7)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들 중 하나가, '삶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일진데 --- 그 '삶의 목표'란 것은 어느 순간 '삶을 살아가는 이유'로 작동하게 되지요. 쉽게 말해,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무엇을 이루고 싶다'라는 목표가 이내 '나는 그러하기에 살아간다'가 된다는 겁니다. 이 때 만약, 그 '살아간다'의 이유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아내, 그것을 다시 새로운 '삶의 이유'로 만들어 내면 되는, 그토록 간단한 걸까요?

·

·

·

이 작품 속 주인공 쿵린은 --- 새로운 '삶의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존 '삶의 이유'를 불합리/부조리한 것이라 스스로에게 합리화 시켜버리는 인물입니다.


린은 이제 이혼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 익은 과일이 서리가 내리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둘은 이혼하게 돼 있었다. 그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힘으로 수위와 이혼한 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런 힘을 가리켜 사람들은 '운명'이라 하는 거겠지.(p330) 

부모의 필요에 의해 수위와 결혼했던 쿵린에게 '결혼'이란 사랑의 종착지, 즉 '사랑하기에 한 선택'이 아닌, '자식된 도리'라는 목적을 위한 일개 수단8에 불과했었던 겁니다. 이 사실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선택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이 --- 페미니즘의 비판이 가해지는 지점, 즉 '특정 성(sex)에 부합되는 젠더(gender}의 특질이 있다는 믿음'의 강요를 통한 사회화/사회적 강요, 그리고 그러한 사회화/사회적 강요가 "남성중심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에게 부과된 것"9이라는 비판에, 너무나도 적합한 스토리라는 것 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이라는 성(sex)로서의 생물학적 존재를 아예 포기한, 오로지 아내라는 성 역할(gender)/사회적 존재로서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성 수위와, 수위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자체 역시 당연하다라 여기는 남성 쿵린, 여기에 아내라는 gender보다 여성이라는 sex에 더 집착하는 우만나라는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이 삼각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종말, 이 종말을 바라보는 남성 쿵린의 후회 - "아직 자신에게 열정과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온몸을 바쳐 사랑하는 법을 배워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텐데. … 이제는 다른 일을 해보기에는 너무 늙었다."(p458) - 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으로부터, '기다림'이란 것이 세 등장인물들에게 과연 어떠한 의미인가를 알아 내고 싶었던 저의 바람(願)이, 얼마나 허황되었었나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이런 류의 삶에 '사랑'이란 단어를 결부시킬 수 있겠으며,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 쿵린, 수위 그리고 우만나의 삶이, 제 아무리 시대와 장소의 한계를 감안해낸다 하더라도, 이들의 '기다림'이 각자가 원하는 끝맺음을 맞이했노라, 동의해줄 수 있을까 싶기만 하네요.


<전미 도서상>과 <팬 포크너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니, 제가 알아채지 못한/끄집어 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추측까지를 지워내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제가 생각하는 '불륜'의 조건들과 비교하며 이 작품을 이야기하려 했었던 애초의 의도를 주저 없이 내버린 채 --- 이 소설 앞에 제가 붙여낼 수 있겠는 형용구란 오로지 "뭐 이딴~" 이외에는 생각해낼 수가 없네요. 뭐, 아쉽지만 (2016년과 2017년에 걸친 독서의) 2017년 첫 감상문은 이러... 합. --;;

 

 

 

 



 

  1. ​"[네이버 지식백과] 젠더 [Gender]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중.
  2. <역자 후기>가 그토록 내용도 없고, 그토록 짧은 것으로 보아,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이 작품의 역자인 작가 김연수의 감상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3. 이 표현이, 성립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
  4. 이는 결국 feasibility와 affordability를 의미하지요.
  5. 예를 들자면 ---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획득의 기술'이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p95, 책세상 刊, 2001.)
  6. 이와 비슷한 혼동 중 하나가 --- '원의 둘레 = 원의 지름 × 원주율(π)'라 알고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사실 이 공식은 '원주율 π는 원의 둘레를 원의 지름으로 나눈 값으로 정의된다'를 뒤집어 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원래 '원주율 ≡ 원의 둘레/원의 지름'의 정의(define)를 우리는 원의 둘레를 구하는 '공식'인 것으로 배워왔던 겁니다.
  7. 작가 박현욱도 ②번과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수긍하는 건 아니기도 하지요. --- "제도라는 거, 인간이 만드는 거잖습니까. 일부일처제가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제도일질 몰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p181) ……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박현욱 作, 「아내가 결혼했다」중 p398, 문학동네 刊, 2014.)
  8. "21년 전인 1962년, 린은 선양 시에 있는 육군의학교 학생이었다. 어느 여름 그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 아픈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한 시라도 빨리 색시를 맞아들이라고 채근했다. 자식 된 도리로 린은 적당한 색싯감을 구하겠다는 양친의 말이 동의했다."(p14)
  9. ​"[네이버 지식백과] 젠더 [Gender]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