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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행복극대화'가
인간의 목표이고, 그 목표에 가해지는 제약은
'소득의 제약'이라 <경제원론>은 가르칩니다. 하지만! --- 교과서 밖, 실제 우리의 삶이란 건,
'행복극대화'라는 (이를테면)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라기 보단, 그 최종적 목표의 달성에 부과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인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에 거의 모든 focus가 주어져
있지요. 그러다보니,
어느덧
우린, '행복극대화'란 최종적 목표를 잊게 되었고, 휴일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보다는 내일의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라는 비정상적 상황에 대해서조차, 그럴 수밖에 없는/그러고 싶어하는 것이 마땅한
'가장(家長)의 고난' 정도로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요를 사회적으로까지
일반화시켜놓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
"수단의
양은 그 목적에 의해 제한된다" 와 "경제
행위는 '목적 합리성'이 철저히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란
(경제학에서의)
두 가지 기본 명제가 얼마나 우리의 실생활에서 철저하게 파괴되어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이며, 이 예가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라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기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위의 두 명제가 파괴된 곳이 비단 경제 생활에서만일까요?
………………………………………………………………………………
【
"우리한테는 그 표가 필요하단 말이오"
】
'정치'란
행위는 (현재
시점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한도에서 보자면) 사회
구성원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필요한 일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업(業)인 '정치인'이 되는 것, 혹은 그 업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들에게 '정치'란 행위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게 되지요. 그들에게
'정치'란 행위, 다시 말해 '권력'이란 건 자신들의 목표인 '정치인'이 된 후 얻어지는, 일종의 선택 가능한 게임 아이템과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 중에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도 있겠으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위대함이라 불리는 그 무엇에 홀려 기고만장"해질 수 있는 것 역시 존재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우리가
현실에서 보게 되는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후자의 아이템을 선택한다라는 거지요.
【
"이 의회는 이 도시에 속한 것입니다. 이 도시가 이 의회에 속한 게 아닙니다"】
이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는 포르투갈의 수도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완벽한 전이(轉移)'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단 자신의 조국의 정치 현실만을 향한 것이 아닌, '정치
일반'에 대한 일깨움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정치인들의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정치인들 사이에서의 위계와 당파 등에 의해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 내어 결국엔 --- "(사회
구성원들이)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p377)해버리는
것에 자신들의 아이템인 '권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지금
이 시각, 청와대 관저에 앉아 올림머리를 하고, 배우 현빈의 열애설에 애통해 하며 TV 드라마를 보고 있을지 모를 그녀
역시 --- '국민들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을 이루어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의 프레임
속에 국민들의 생각을 바꾸려 했었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바라는 행복'을 이루어 내기 위해 그 권력을 사용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권력의 오용'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p183)이기에,
또한 그 '때'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인 5년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인 4년보다 항상 더 먼저 발생되기에, 그리하여
끝내는
"우리의
삶을 망쳐놓은 두려움이 결국 아무런 근거도 없고, 존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확인"(p418)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에 --- 정치 권력의 오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아무리 변화된/한 형태로 민중을 괴롭힌다 하여도, 그 오용을 처음 접하는
시점 이후부터는 예의 '전례가 없던'이란 수식어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어,
"권리는
그것이 표현되는 말 속에서만, 또 헌법이든 법이든 규칙이든 그것이 기록되는 종이 위에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 … 권리라는 것을 가능한
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절대 실행 가능한, 구체적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p124)이란
그들, 정치인들의 오판에
맞서는 ---
"권리란
추상적인 게 아니지요, 존중받지 못할 때도 계속 존재하니까요. …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무, 그 권리를 존중하고 따를 의무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합니다"(pp79-80)이란
정의(正義, justice)를, 더 이상은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pp184-185)것
마냥 외쳐대는 저항에 맞닥뜨려지게 됩니다.
【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될 겁니까" 】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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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65.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가끔씩은
거짓말이 진실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임을 적시에 깨닫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p61)라 적고 있습니다만,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거짓말은 그런 보편적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저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그걸
구실로 다른 일을 꾸밀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p332)
전작
「눈먼 사람들의 도시」에 등장했었던, 시민들 가운데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안과의사의)
부인의 존재를 알게 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현재 사태의 근원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논리란 건 "첫
번째 이상한 사실이 자동적으로 두 번째 이상한 사실의 원인"(p336)이 된다라는 것 뿐이었지요.
이제
그들은 이 성립할 수 없는 논리를 성립시켜내기 위해,
"어떤 연관이 있든 없든 그
연관을 확립하는 것"(p272)에 매진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p325)이란 모토 아래 결국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선고가 내려진 사건"(p322)을 만들어 내지요. 예의 그들은 자신들 내부 속에서의 반감을
잠재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더
나쁜 것, 더 마키아벨리적인 것"(p111)이란 대상이 존재함을 국민들을 향해, 그리고 스스로에게조차 최면 걸듯 각인시키는
것을 잊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정치'는, 이러한 정치인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에, 과연 우리들 스스로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
눈 멀다 ]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라 말해주었던,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란 개념의 '눈멀다'를 그 작품의 결론으로 삼았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사람들의 도시」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의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우(愚)를
염려하도 했었듯 --- 이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를 통해, "내가
한 말은 우리가 사 년 전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쩌면 지금도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p225)란 메시지를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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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p377)
당연하게,
그저 누구에게나 모두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현재의 삶, 민주주의란 체제은 사실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p143)과 같은 과거 세대의
투쟁이 있었었기에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을, 그러나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p143)버렸다라는, 그리하여 ---
실제 자신 스스로 서명한 그 "평생 지킬 협정"을 "전통이라는
파라솔 밑에서 평생을 보내며 주식거래라는 냉방장치를 틀어놓고 시장이라는 따뜻한 서풍의 자장가를 듣던 사람"(p144)로 변해버린
후에는, 과거의 자신이 했던 서명을 보고는 "누가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니냐하는, 그리하여
결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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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p428)
작가
야마다 무네키는 「백년법」에서 "경고의
내용은 담은 예언이 가장 주목받는 건 참사를 미연에 방지했을 때가 아니라 예언된
참사가 실제로 일어났을
때"란 섬뜩한 말을 해주었었죠. 대한민국의 현 꼬라지가, 누군가에
의해 예언되었었건 아니건을 떠나, 심지어 "이제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다"(p164)의 단계마저도 넘어선 이 쪽팔린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을 --- (당연히!
그들의 잘못이 가장 결정적이긴 하지만) 오로지 정치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나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온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민주주의를, 이제껏 그저 누려오기만 했던 아이의 부모 세대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손에
쥔 감자가 너무 뜨거우면 입김을 부십시오"(p156)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라며 귀를 막는 부모가 아닌, 손에 쥔 뜨거운 감자에 입김을 불어낼 수 있는, 그런 부모로 기억되고 싶다는 -
설혹 나의 아이가 훗날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겠노라 한다 하여도 - 바람(願)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 이 작품에 깃든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바람(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아직 읽지 않은 작가의 작품들이 몇 편 있음에도 불구하고 --- 더 이상,
그 특유의 촌철살인과 비꼼, 읽는다라는 노동에 대해 이토록 즐거울 수가!하는 뿌듯함을 선사해주는 구구절절의 묘사들을, 새로운 작품으로는 만나볼
수 없다라는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 주네요. 이 분 웬지... 천국에서 신과 맞짱 토론 하고 있을 듯. ^^;;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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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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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1938) :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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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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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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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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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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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그룹
'넥스트'의 <도시인>이란 노래의 가사는, 대략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 "아침엔 우유
한잔 / 점심엔 FAST FOOD / 쫓기는 사람처럼 / 시계 바늘 보면서 거리를 /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 /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
THIS IS THE CITY LIFE …… 어젯밤 술이 덜 깬 흐릿한 / 두 눈으로 자판기 커피한잔 / 구겨진 셔츠 샐러리맨 / 기계
부속품처럼 큰 빌딩 속에 / 앉아 점점 빨리 가는 세월들 / THIS IS THE CITY LIFE …… 한 손엔 휴대전화 허리엔 / 삐삐차고
집이란 잠자는 곳 / 직장이란 전쟁터 / 회색빛의 빌딩들 / 회색 빛의 하늘과 / 회색 얼굴의 사람들 / THIS IS THE CITY
LIFE"
-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결코 '획득의 기술'이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중 p95, 책세상 刊,
2001.)
- p193.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중 p64, 생각정원 刊, 2015.
- 작가
주제 사라마구 역시, 이 작품에서 '정치인'을 다음과 같이 비하하는 뉘앙스로 묘사/정의하고 있지요. --- "도시의 운명을 가를 검은 차를 가진
사람들, 즉 투표소 문간에 내려주었다가 시민적 의무를 마치고 나면 다시 뒷자리에 실어줄 차를 가진 사람들"(p11)
- p141.
- "정부는
실제로는 통치를 하지 않고 그냥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한다"(p138)란 소설 속 문장은 정확하게! ---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 즉
대통령의 직무 정지와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 대행을 묘사하고 있는 듯도.
- "그들은
장갑을 끼고 들것을 들고 갈 것이다. 대부분은 불에 탄 주검에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다."(p164)
- 정치인들의
이러한 오판에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오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 "이 나라의 국민은 헌법이 부여한 권리의 적절한 이행을 요구하는
건강한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자신들의 권리가 중단된 것조차 잘 느끼지 못했다."(p76)
- p165.
- 이
억지는 "냄비를 만든 사람이 뚜껑도 만드는 거요"(p326)이란 문장 속에서도 보여지지요.
- 이러한
작업(?)의 시작으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 시민들의 집단적 시위가 발생하면, 경찰은 물대포나 최루판으로 그들을
해산시키려 하지만, 계엄령 하에서 "군은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p114)란 총리의 대답은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
시민들의 죽음까지도 불사한다는, 그야말로 완벽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는 극명한 예이지요.
- 촛불
시위에 종북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p31, 해냄 刊, 2012.
-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471.
-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467.
- 작가는
이를 "우리는 무엇을 듣지 못했나"(p406)라 달리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 야마다
무네키 作, 「백년법 하권」중 p132, 애플북스 刊,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