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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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 아빠가 입던 건데, 이제 종원이가 입네~", "아닌데요, 이거 이모가 사주신 건데요?"

제 말도 맞았고, 종원군의 말도 맞았습니다. 전 티셔츠를 생각하며 '아빠가 입던 건데'란 말을 했던 것이고, 종원군은 바지를 생각하고는 '이모가 사주신 거'란 대답을 했었던 거였기 때문이었죠. 이처럼/이와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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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마이클 센델 著, 「정의란 무엇인가」 중 p279, 와이즈베리 刊, 2014.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은 아니었었습니다. 오히려 뭔가,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와, 「정의란 무엇인가」가 다루고 있는 '정의(justice)'는 다른 것이 아닐까, 혹 이제까지 내가 '정의(justice)'라 알고 있었던 개념이 정확한 정의(definition)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등의 의문만을 남겨 주었었지요. 그러던 차,


역시나, 어쩌면 당연하게 --- '정의(justice)'를 이야기하고 있을 꺼라 믿어야만 할 듯한/믿으라 말하고 있는 듯한/이렇게까지 노골적인데도 믿지 않을래?라 말하는 듯한 소설, 「저스티스맨」에서, 이제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정의(justice)'의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이 말해주는 바는,

마이클 센델 교수가 다루었던 정의(justice)는 '분배 정의,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다'란 맥락으로 언급되는 정의(definition)이었던 것이고, 제가 알고 있었던, 또한 이 작품 「저스티스맨」이 다루고 있는 정의(justice)는 '정의의 사도,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와 같은 맥락에서의 개념이었었다라 하네요. 티셔츠를 가리키고 한 말과, 바지를 떠올리며 했던 대답마냥, 이건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의 차이와 비슷한 거죠. 물론! --- 그저 평범한 일 개인일 뿐인 저의 관심은 당연히, 이 소설에서 차용되고 있는 맥락으로서의 정의(justice)를 넘어설 수 없(으며,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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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자신만의 독후감을 써놓는 분들 중, 제가 부러워하는 분들을, 다음의 세 부류 - ① 간단명료한 요약, ②제가 생각해 내지 못한 맥락 집어내기, ③읽는다라는 노동을 즐거운 재미로 만들기 - 로 나누어볼 수 있거늘, 네이버 블로그의 '까칠한 비토씨'는 (본인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제겐 단연 ③번의 타입으로 각인되어 있는 분이었었습니다. 이 때의 '재미'라는 건, 흔히 '언어의 유희'라 표현되는 것 뿐만이 아닌, 글을 읽어가는 흐름이 너무도 매끄럽기에 느끼는 재미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까칠한 비토씨'는 거의 완벽하게 그 두 가지의 재미를 지닌 글을 쓰시는 분이었었죠. 자, 이제 '작가 도선우'로 만나보는 그의 글은 어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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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라는 게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흔히 결과만을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오류가 발생하기 쉬우며 그러한 집단 오류가 또 다른 이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p13)

​작품에 등장하는 열 개의 살인 사건 속 피살자들 간에는 예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스러운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살인이라는, 엄청난, 자극적인, 극단적 결과의 원인들이라는 게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는 아주 보통의 일상으로부터 시작"(p101)된다/될 수도 있다라는 점을, "정말 소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들"(p203)을 빌어 알려주고 있지요.



【 그래서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박근혜가 탄핵되고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이, 최순실의 부정한 재산을 모두 환수시켜버리고 죽을 때까지 감방에 처박아 놓는 것이, "법망에 걸리지는 않으나 도의적인 책임에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자"(p93)로 성공적인 안착을 한 듯 보이는 우병우를 기어이 법의 몽둥이로 시원하게 때려주는 것, 이런 것들이 혹,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실현'인 건 아닐까요? 아마도, --- 당신은 아니라고, '정의의 실현'이란 그런 것들 보다는 훨씬 더 커다른 차원의 무언가라 이야기할 꺼라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노는 나쁜 놈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놈이 충분히 처벌받는 것을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허태균 著, 「어쩌다 한국인」중 p183, 중앙books 刊, 2015. 

​전, 허태균 교수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시스템의 해결이 아닌, '나쁜 놈, 죽일 놈'을 찾아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해 버리는 건 결국 --- 뭔가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때, 때려 잡아야 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유신 시대와 5공화국 때의 대한민국이었었죠. 그때는, "어떤 연관이 있든 없든 그 연관을 확립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삼고 있는 당시의 국가 공무원들에게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이었었으며, 심지어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선고가 내려진 사건"들도 만들어 내었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이제, 2017년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누리꾼의, 누리꾼에 의한, 누리꾼을 위한 광() 케이블만이 존재"(p218)하는, 일단/적어도 온라인 상의 대한민국"모두가 옳다 하니 옳아진 진실"(p231)에 현혹되어,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p13)에 흥분하고 말아, 매우 종종 "한번 생성되면 이변이 없는 한 곧바로 사명감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자신이 아니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거란 궁극의 자기애"(p41)로까지 발전시켜 내어서는 "누가 뭐래도 분명한 정의의 수호자임에 틀림없다는 자족감"(p42)에 심하게도 도취되어, '오늘도 수고했어!'란, 되도 않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안겨 주고 행복한 꿈나라로 들어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p242)

자신이 노예인지조차 모르는 채, '정의(justice)'와 '권력'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그저 "모두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결정된 사실에 관한 믿음"(p158)을 곧 '정의(justice)'라 착각하고 사는, "마땅히 죽을 놈이 죽었으니 통쾌하다"(p95)라 반응하지만, 정작 그 '마땅함'에 대한 설명의 요구에는, --- 그러니까  작품 속 열 명의 피살자들이, 정말로 '마땅히 죽을 놈들'이었느냐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죽어 마땅하다'라는 판단은 어떠한 경우 이루어져야 (또한) '마땅함을 인정받는가'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본 후, '마땅히 죽을 놈들'이란 선고를 내렸느냐와 같은 과정조차 없는, 오로지 감정적 흥분만을 대답으로 내놓는/내놓을 능력밖엔 되지 않는 병신들의 숫자가, 무시하기엔 너무 많아지고 있지요. 작가 도선우는 이 작품을 통해, 


"신기하고 놀랍게도 제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돌렸을 뿐인데 모든 게 다 다르게 보였다. 정말이지 이제껏 자기가 보아왔던 진실은 거울에 비친 허상이었던 듯 진정한 진실을 자신의 뒤에 있어, 그러니까 뒤돌아선 지금에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흥분된 마음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p210)

(문학에 한정하여, 손아람의 「소수의견」이 말하고 있는 정의(justice)와는 다른,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 속 정의(justice)와도 많이 다른) '정의(justice)'가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말해줄 수 없으나 적어도, --- "각자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종의 진리 같은 것"(p99)이 되어야 하지, 무작정의 신뢰가 더해진 일종의 가설이 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 정도는 쫌! 알고 있자, 란 말을, 


위와 같은 일종의 조언, 달리 보면 반성에 대한 변명의 꺼리로 쓰일 수도 있는 단서와 함께 해주고 있다라 저는 추측해 봅니다. (이게 그저 추측일 수밖에 없는 건, '선(善)은 악(惡)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절정의 아름다움이 극악과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p10)이란 문장과 "각자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종의 진리 같은 것"(p99) 사이의 충돌을, 제가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막! 공부하는, 뭐 그러고 싶지까지는 않... --;;)

 

 

【 그리고 당신과 나의 대한민국은 정말? 

"그들에게 이웃이란 오로지 인터넷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눈을 맞추지 않은 지가 어언 백만 년이었다. 길에서건 복도에서건 승강기 안에서건, 열에 아홉은 모두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손바닥만 한 액정 화면 속에 있었다.…… 그 오피스텔 거주자들의 휴대폰 통화 목록에 기록된 최근 발신 번호의 대부분은 식당 전화번호였다."(pp87-89)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긴 하나,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은 결코 아니다라고,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 있는 건 맞는데,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은 역시나 결코 아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 생각하는 미친 놈은 이제 없는 곳이 바로 지금 나와 당신이 살아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고, 작가의 생각을 옮겨볼 수도 있을 듯, 아니 어쩌면 --- 저의 생각이 그러하기에, 타인의 글마자 그렇게 해석해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헬조선'에 살고 있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닌, 우리 스스로가 '헬조선인'이기 때문이란 허태균 교수의 말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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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작품의 무게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기대했던) '읽는다라는 노동을 즐거운 재미로 만들어 주는 소설'이라고까지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보여주는 원인과 과정은 꽤나 매끄럽게 펼쳐지고 있습니다만 --- '이것이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작가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잠시 해보았었을 만큼,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는, (그 중 하나를 빌어보자면) "드레스덴에 투하되었던 폭탄의 개수"(p58)와 맞먹지 않을까 싶은 '비유'의 남발은, 


"마치 대지 속에서 화석이 되어 희석되기만을 기다리듯이"(p79)처럼, 정말로 불필요하게 삽입되어 있다란 생각을 하게 해주었기도, "알곡을 토해내는 탈곡기처럼 … 한여름 낮 운동장을 뒤덮은 흙먼지처럼"(p108)과 같은 반복적 사용에서는, 끝내 식도를 역주행해내지 못한, 위장 속 잔여물이 묵직하게 느껴졌기도, "기분은 마치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가 화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p255)란 <작가의 말>에선, 주어와 동사가 어딘가 어색하게 읽혀지는 문장까지를 만들어 낸, --- 제겐 적잖은 아쉬움이었었고, 그런 아쉬움은, 참으로 아쉽게도, '까칠한 비토씨'의 글에서 받았던 재미를 이 작품으로부터는 온전히 즐길 수 없게하는 방해요소로 활발하게 작동되었었다란 것만 저의 기억에 남게 될 듯 싶네요. 

뭔가, 권태기스런 지루함에 빠져 있는 요즈음의 저입니다. 설마 이게, '그럭저럭 41일 째'인 금연의 후유증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만, 뭐 그렇다고 다시 담배를 피겠다는 건 아닙니다. 이번엔 좀 독하게 맘 먹었거든요. ^^;;


※ '정의(justice)'를 말하고 있는 우리 문학 :

- 손아람 作, 「소수의견

- 박민규 作, 「지구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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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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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武家)의 첫째가는 도리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군인이자 행정관이었던 그들은 무사무욕(無私無慾)을 무사도의 으뜸 덕목으로 마음에 새겼다. 뒤집어 말하면 그것은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다. 무사(無私)이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회의하는 자, 그것이 무사(武士)였다."

- 아사다 지로 作,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중 pp248-249, 문학동네 刊, 2013.

'알아야 좋아할 수 있다'라는 말에는 '경우에 따라서'란 전제가 있어야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좋아하면 알고싶어진다'란 말에는 (글자 그대로) 무조건적 동의를 표하는 저이기에 --- '올해의 딱 한 권 : 2015'이었던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속 무사도(武士道), 그러니까 소위 '사무라이의 정신'1이란 것에 깃들어 있는, 그들이 지녔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 했던 그 사소한 무엇"2이 정녕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 뭔가, 쉽게 감당 안될 것 같은 뭉클한 무언가를 제게 건네줄 듯 싶은 예감 가득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기 전에 먼저 - 알고자, 이케가미 에이코의 이 책 「사무라이의 나라 The taming of the Samurai」를 펼쳤더랬습니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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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무엇보다도 집단주의적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고, 개인주의와 대담한 혁신은 저평가하도록 장려하는 사회가 공업화와 기업경영에서 어떻게 현재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p26) 

​시작은 좋았습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사무라이 정신 자체 뿐 아니라, "집단 순응성, 수치의 회피 그리고 경쟁을 통한 명예와 위신의 추구"(p48)로 요약되어지는 현대 일본 기업의 조직문화가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더 크게는 '현재의 일본'을 만들어 감에 있어 어떻게 작동되었었는가,까지를 살펴보겠노라는 저자의 일갈은 엄청난 기대를 제게 안겨주었었지요. 저자는 일단,


"내가 분석의 초점을 사무라이의 명예문화로 선택한 것은 그들의 명예 관념이야말로 집단주의적 사고와 개인주의적 사고 사이의 대립적인 긴장관계와 상호관계를 가장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3(p30)

​'명예문화'라는 단어를 이 책의 핵심 키워드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 "계급문화의 중심적 가치(p92)"이자, "사무라이의 존재 이유"(p93)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명예'란 것이 어떠한 이유로 그들에게 하나의 '문화'로까지 각인되었었느냐,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일본에까지 이식되었느냐/될 수 있었으냐를 담고 있는 이 책을, 그러한 관점의 frame 하에서 요약해 보자면, 


"어떤 문화적 자원이 한 사회에서 주요한 상징이 되는 것은 ⓐ지배적 집단 혹은 유력한 소수집단이 그 자원을 유지하며 성장시킬 때이고, 한 문화가 제도로서 확립되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는 사회기반이 존재할 때이다."(p93) 

크게 보아 이 책은, 이처럼 사무라이 계급의 ⓐ형성 및 성장과정, 그리고 ⓑ문화로의 확립이라는 두 가지 단계를 담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 사무라이란? 】 

"'사무라이'라는 말은 '사부라이 侍(모실 시)'가 변한 것으로 귀족을 시중드는 남자들을 가리킨다."(p89) …… "'사부라이'라는 말은 또한 지방 정청의 관할 아래 있는 '활과 화살의 남자들'로서 지방 장관에 봉사하는 현지의 군인들도 가리키고 있었다."(p557) …… "사무라이란 원래 전문가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집단이었다. … 그들은 군사전문가로서 명확한 자기정체성을 갖는 일본 최초의 사회 집단이었다."(p89)

저자는 "사무라이 출현의 수수께끼는 완전하게 풀리지 않았고 여전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p99)정도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4 --- 일 개인에게 취미로서의 독서라는 것이, 게다가 제가 이 책에 부여한 의의는 단지, 「칼에 지다」를 만나기 전, 준비 운동의 수준이었으므로, 저 역시 더 이상의 관심은 그만!


 


【 사무라이의 성장 】

"사무라이 계급 출현 이후의 일본역사는 집단으로서 사무라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적인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우월적 입장을 합법화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 사무라이는 서로 끊임 없이 싸워 상하관계를 바꾸는 과정을 반복했고 이를 통해 최강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지위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 최강의 개인은 통상 왕실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아 자동적으로 사실상 국가의 지배자로서 공인되었다. 합법적 승인의 기제가 이러한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폭력을 '명예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문화의 재편성과 개념의 재구성 즉, 사무라이 명예문화의 창조와 유지가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p72)

즉,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명예'라는 개념과는 많이 다른 명예인 겁니다. '집단으로서의 사무라이'가 "싸움을 해결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힘을 가지는 사람들로 이해"(p91)되는 수준이라면, 이제 '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5는 그러한 명예가 안겨준 권력6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  



【 명예 개념의 변화 】

"힘이 있다는 평판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다"(p57)란 「리바이어던」 속 구절은, 평판에 취하게 되는 순간, (기존) 힘의 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라는 의미를 (의)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오랜 역사의 흐름을 지나면서 결국 "명예에 집착하는 일은 … 일본역사에서 사무라이가 폭력사태를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고, 모욕에 대해 극단적인 민감함을 과시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사회적 자격으로 지속"(pp300-301)되어버렸고, 그렇게 권력을 안겨주는 도구(mechanism7)로 시작되었던 '명예'가 이젠 스스로 하나의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지요.8 여기에,


"중세 사무라이의 명예를 평가할 때는 개인의 의사가 항상 중요한 요소이다. 대장과 함께 자결을 감행하는 행위는 극한적이고 이타적인 자기희생처럼 보이지만 사무라이의 자율성에 대한 정서의 핵심을 상징한다. …… 거기에는 무사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다."(pp180-181)

"자신의 죽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生)도 지배한다"(p185)는 인식이 '명예'에 가미되는 순간, "순수하게 자기성찰적인 폭력의 형태인 할복자살은 명예폭력을 스스로를 향해 표명한 것"(p379)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다시,


사무라이의 형성 및 사회적 인정을 획득했던 과정으로 되돌아가 보면, "폭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나 싸움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은 폭력이 명예의 유일하고 정당한 표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무라이의 통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결한 수단이었기 때문"(p72)란 것이 결국 ---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간다는, 쌍팔년도 가요의 가사 마냥) '유지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 (계급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사무라이에게 죽음만을 선택지로 내보이게 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버린 것 아닌가라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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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형성은 원래 무력행사의 특권을 독점해 가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국가형성의 초기단계에서는 많은 집단이 폭력행사의 권리를 두고 다툰다. 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그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져 기구는 집권화되고 하위의 구성 그룹으로부터 권력을 몰수한다."(p71)

메이지 유신은 사무라이들로부터 칼을 빼앗습니다. 이는 그들, 사무라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조치9로 받아들여졌지요. 이후의 일본 역사에 대해, 작가 아사다 지로와 학자인 이케가미 에이코의 해석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작가 아사다 지로의 참뜻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에 실려 있는 여섯 편의 소설들을 통해 제가 느꼈었던 바가,

 

   
 

"여행이란 말이다, 결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거야."10   

 

 

 

 

 


로 표현될 수 있겠는, '사무라이 계급'의 퇴장에 진한 아쉬움11이었다라면, --- 학자 이케가미 에이코는, 이 책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국민에게 무엇보다도 집단주의적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고, 개인주의와 대담한 혁신은 저평가하도록 장려하는 사회가 공업화와 기업경영에서 어떻게 현재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p26) 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는 것으로 '메이지 유신의 의의' - 어쩌면 '사무라이 계급의 퇴장'과의 동치(equivqlent)12 - 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메이지 체제는 지금까지의 명예문화의 구성에서 세습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서 보다 순수한 능력사회를 향한 길을 개척했다. 도쿠가와 시대 평민의 아들들에게는 명예공동체에 참가하는 형태로 진정한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새로운 유행 이데올로기 즉, 평민의 아들이라도 근면하게 일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면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는 확신은 이 명예지향 사회의 기업가적 활동에 엄청난 탄력을 주었다. 즉, 메이지 유신은 일본 민중의 잠자고 있는 능력주의적이고 실적본위적인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이런 야심은 시장에서의 성공과 명예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정렬로 나타났다."(pp528-530)

너무도 확연하게 다르지요?


……………

 '썩 멀지않은 옛날, 갑자기 눈앞을 막아선 근대의 울타리 앞에서 주저하고 당황하면서도 어쨌든 그것을 넘어섰던 사람들의 고생담'13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마지막 문턱으로 여겨졌었을, 허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저하고 당황하면서도 어쨌든' 넘어서야 했던 힘겨운 언덕이었을, 그 시기에 대한 해석 중, 아무래도 전... 후자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읽고 이해해내기에 너무도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사무라이에 대해 기본적 맥락만을 얻으려 했던, 단순한 목적을 지닌 저에게 '역사사회학, 사회이론, 문화사회학' 전공자라는 저자가, 역사, 사회학, 정치학, 경제사, 심지어 막스 베버까지 동원해 가며 설명해주는 사무라이는 아무래도, 용량 초과 벨을 너무도 여러 번 울리게 해주더군요. 아쉽게도, 여기에 더해 --- 번역 또한 '빌빌하다' 소리 들어도, 별 대꾸 못하지 않을까 싶을 수준이기도 합니다. 제가 원했던 수준의 지식은 그저,


​네이버 지식백과의 이 시리즈가 딱!이었던 듯.

암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으며, 또한 읽고 나서,

왠지 다시금 이 책을 뒤적여보게 되지 않을까... 도 싶네요. 

※ 아사다 지로 作,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꾸역꾸역... 금연 35일째.


 

  1. "일본에서 사무라이란 정확히는 상류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사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사무라이’보다 넓은 개념 … 그러나 무사도라고 할 때는 모든 무인들이 상급 무사인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유정래 著, 「일본 무사 이야기」중 p26, 어문학사 刊, 2016.
  2. 허태균 著, 「어쩌다 한국인」중 p289, 중앙books 刊, 2015.
  3. 이 서술을 통해 저자는, 이 책이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임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4. 이케가미 에이코 교수는 사무라이 출현에 대한 몇몇 가설들을 소개해주고 있기는 합니다. 이를 "재지영주론(在地領主論), 직능론(職能論) 및 국아군제론(國衙軍制論)"의 명칭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도 있더군요. (유정래, 위의 책, p14.)
  5. "명예문화는 사무라이들이 신분집단 status group으로서 집단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현 … "(p68)
  6. "명예가 권력을 가져온다"(p57)
  7. "A mechanism is a special way of getting something done within a particular system." - 네이버 영어사전
  8.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최배달의 말입니다. 얼핏 멋있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사무라이 정신이 혼돈된 결과가 아닐까,란 생각이 드네요.
  9. "자신(들)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 아사다 지로, 위의 책 p100.
  10. 아사다 지로, 위의 책 p226.
  11. 아사다 지로의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를 읽고 쓴, 감상문의 마지막은 이러했었었네요. --- "'백성이 안심하게 살게 해주는 기구야말로 국가라고'(p112) 믿고 있었기에 사무라이들은 "우리의 목숨, 이 나라에 바치지 않겠나"(p77)라 외쳐댔었던 것이었다라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무라이의 국가는 그들에게 '세상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주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적응할 시간적 여유를 허락하지도 않았더랬지요. 바로!!! 이 환경, 즉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무라이들을 구태(舊態)라 탓할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변화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있는 그들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던 메이지 유신의 막무가내를 탓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 이 (너무나도 슬픈) 여섯 편의 소설들을 읽었다라는 겁니다."
  12. 저의 과도한 편파적 감정일 수 있겠지만, 전 이 책의 제목 'The taming of the Samurai'가 이미! 이러한 투의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13. 아사다 지로, 위의 책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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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리커버 특별판)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경기도민 둘이서, 몇 시간동안 비싼 안주에 술병 쌓아가며 서울시장에 누가 당선되어야 하느냐를 토론하는 건, 민중의 정치적 성숙도 함양, 뭐 이딴 면에선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는 그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습니다. 현실을 결정짓는 도구는, 경기도민이 가지고 있는 기막히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니라, 멍청할지도 모를 어느 서울시민이 가지고 있는 한 표의 투표권이니까요. 이처럼!

우리가 알고자/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정확한 개념 - 예를 들면, '난 경기도민이고, 그러하기에 서울시장을 뽑는 선거엔 투표권이 없다라는 사실' - 을 사전적으로 인지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로 하여금 헛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라는 작은 이점으로부터, 크게는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에 대한 정확한 표식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까지를 해주게 됩니다.1


(이젠 드디어 '빨갱이'란 단어와 동치되지 않게 된, 그저 순수하게) "사회적 정의(justice)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들"2로 정의(define)될 수 있는/게 된 '좌파'라는 단어를 한 번 보죠. 이 정의에 따른다면 그 누구도 좌파되길 명시적으로 거부할 사람이 없을 것 같거늘, 정작 '(사회적) 정의(justice)'란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란 질문엔 예의 세대마다, 계층마다, 또한 개인마다, 아마도 모두 상이한 답변을 내놓게 되는, 이해 못할 불일치를 겪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justice)'에 대한, 그 다양한 답변들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핵심적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게 있기는 할까요? 만약 있다면 --- 이 유명한 책, 「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에서 우리는, 그 핵심적 개념을 배워볼 수 있는 걸까요?

"민주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pp52-53)

……………………………………………………………………………………

마이클 센델 교수는, 정의(justice)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3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 줍니다.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③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p279)

철학엔 관심이 많지 않기에, 이 책에 대한 정리는 딱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센델 교수는 세 번째 방식의 정의(definition)을 가장 선호한다 밝히고 있더군요. 이하의 글은 이 책을 읽고,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두 가지의 의문을 거칠게4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고로, 이 감상문은 이 책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는 거!


【 정의(justice) VS 최적(optimum) 】

경제학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5주의(utilitarianism)은 주장은 간단합니다. 바로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p63)라는 거지요. 센델 교수는 이와 같은 공리주의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비판이 주어진다라 설명해 줍니다. --- "첫 번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모든 선을 하나의 통일된 가치척도로 환산해 획일화하여, 그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6(p380) 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정확히 위와 같은 비판을 모두 받음직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제학은 결단코 이것을 '정의(justice)'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칸트가 공리주의를 향해 퍼부었던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p165)란 비판을 똑같이 퍼붓는다면, 경제학의 입장에서 죽도록 억울해하겠죠, 아마도. 경제학은 그 상태를 가리켜 right or wrong의 '정의(justice)'가 아닌 no better than의 '최적(optimum7)'이라 말하고 있며, 그 '최적'이란 단어에는 정의상(by definition) 그 어떠한 가치판단적 요소도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8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 대하여도 예의,

'정의(justice)'라는 개념의 차원이 아닌, 단지 '(사회적) 최적(optimum)'이란 (기계적) 개념과 연관지어질 뿐인, 즉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취할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p87)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된 이론인 공리주의를, 굳이 도덕적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지려 하느냐란 비판이 가능하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센델 교수가 들고 있는 예(example)들 또한, '정의(justice)'를 논하는 것이 아닌, '비극(tragedy)'을 논하는 것에 인용되는 게 더 적절할 법한 것들만 모아놓고 있는 게 아닐까란 의문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더 이해 안되는 예들도 있지만) 핵폭탄 운운하며 고문의 정당성을 공리주의자의 관점에서 찾아내려는 부분만 봐도, 도대체 그것이 '정의(justice)'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하물며,

일체의 사적 판단이 배제된, 즉 "모든 취향은 동등하게 계산된다"(p87)라는 공리주의의 계산법은 A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과 B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이 동일하다는 결과를 낳는데 쓰여져야 마땅하거늘, 물에 빠진 두 아이 중 A의 아들은 살아났고, B의 아들은 익사했을 때 A와 B가 가지는 기쁨과 슬픔을 비교하려는 데에, 더 심하게는 2명의 아빠가 아이를 살렸고, 한 명의 아빠는 아이를 잃었다와 같은 비극에서의 효용과 비효용의 수치를 더하고 빼는 것에 적용시키는 듯한, 센델 교수가 거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예들이 지닌 어색함에 대한 불만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 묻고 있는 책에 상정하고 있는 '정의(justice)는 대체 무엇일까요?


【 욕망의 주체 】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과 관련 있다"(p163)라 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공리주의가 지닌 철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9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pp170-171)

칸트 옹은 여기서의 '자율적 행동'에 대해, 신체적 반응까지도 "외부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에 따라 행동할 뿐"(p168)이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수를 사 마심에 있어, 콜라를 마실지, 물을 마실지, 아님 우유를 마실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은 일견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동조차! "복종의 실천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 갈증에 대한 복종이다"(p168)라는 거지요. 즉, 칸트가 정의하는 '자율적 행동'이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완벽하게')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p169)이어야만 하는 겁니다. 잠깐! 어, 근데 이거 어디서 봤던 건데?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p12)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p16)

- 하승우 著, 「아나키즘」, 책세상 刊, 2008.

정치체제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가 아닌, '반(反)강권주의'로 번역되어야 하듯! --- 우리 삶 속 아나키즘은, "애초의 그 욕구가 자기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p180)라 이해될 수 있을 일상 속 아나키즘은 그리하여, 예를 들어10, 내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도 예의,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기 때문이 아니다. ……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실천할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p172)

(대개는 강제, 가끔은 애원의 모습이기도 한) 부모의 노력이 자식의 '명문 대학 합격'의 결과로 나타나지 못할지라도, 하물며 보석처럼 빛나길 바라지 않는다 하여도 그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의미다"(p171)란 명제를 실천할 수 있(었)음에 만족해 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안될까, 그럴 수는 없을까하는 물음을 저 스스로에게부터 먼저 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아나키즘'에 대한 저의 관심은, 이마뉴엘 칸트의 철학에서까지 '아나키즘'의 향기를 느끼게도 해주었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도록 나에게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각자 어울리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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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이란 (이름마저 멋진) 사람이 했다는 말,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를 첨 읽었을 때 정말 찌릿!하고 섬뜩! 했더랬습니다. 그 찌릿함의 기원이 그 말의 철학적 배경이나 사회학적 뭐시기 등 때문은 아니었었고 그저, 당시 내 아이를 교육함에 있어 저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었죠. 그리고/그런데 이 표현,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게 왜 섬뜩한 거냐 하면 --- 아이의 효용함수에 들어가는 독립변수 중, 정작 당사자인 그 아이의 것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게 된다라는, 이 상황을 극단까지 밀고가 보면 결국,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p114) …… ​"하느님이 주는 시련을 신자들이 오히려 감사해하듯,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걸 즐기는 애인의 뜻을 충실히 배려하면서 마냥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pp120-121)

- 폴린 레아쥬 作, 「O 이야기」, 문학세계사 刊, 2012.

아이 스스로 그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르게 되고, 심지어! 우리 부모는 그렇게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고/알면서도 즐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쾌감을 느끼게 되는 건11 아닐까 하는 염려가, 단지 머릿 속 염려로만 그치지 않는다라는 것, 바로 이 점이 섬뜩하다는 겁니다. 즉! 칸트 옹께서 말씀하셨던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p169)이란 것이 의미하는 '자율'이 완벽하게 무너졌으나, 스스로는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할 경우 --- '자유'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거겠죠. 이럴 땐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논의 또한 이 책엔 들어있지 않습니다.
……………………………………………………………………………………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양한 사례와 질문이 제시되지만 해답은 주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p434)
'인상을 갖기 쉽다'가 아닌, 실제로 센델 교수가 딱히 해답을 알려준 경우가 거의 없었다가 저는 생각합니다. 뭐 그럴 수 있겠죠. 철학이라는 게 원래 정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하지만!
경제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타주의자 99명이 살고 있는 사회에 단 한 명의 이기주의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서로를 도와가며 살고 있는 이타주의자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는 계속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만, 자신을 제외한 사회의 수많은 이타주의자들 덕에 아무런 불편함없이 살아가게 되고, 이를 지켜본 이타주의자들 중 하나가 드디어, 이기주의자의 행동을 따라하게 되고, 그러나 역시 그 사회는 이타주의적으로 돌아가는 거였고, 그렇게 조금씩 이기주의자로의 변절이 진행되어 결국, 그 사회의 모든 이타주의자들이 전부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예의 그 반대의 경우, 즉 이기주의자들만 살고 있는 사회에 들어간 한 사람의 이타주의자는 너무도 쉽게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센델 교수는 이 책에서, 칸트와 롤스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들은 단지 "자기 목적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강력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뿐"(pp319-320)이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 자신들의 사회에 들어 온 한 명의 이기주의자에게, 99명의 이타주의자들이 위와 같은 '도덕적 사고'를 발휘했을 때의 결과가, 기존 사회의 붕괴라면, 그게 과연 정의(justice)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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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정답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이 모든 판단은 다 상대적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때, 정말이지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었었던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 한편으로는 정답이 없다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하면 오답 역시 없다라 말해주는 것으로 정리되는 제 수준의 이해로는, 딱히 '이 책, 정말 훌륭해요!'란 말까지를 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정의로운 사람이라 스스로를 말할 자신도 없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곳이다란 생각 또한 가져지지 않지만, 그러한 것들이 '정의란 정말 무엇일까'란 질문마저 필요없다라 말하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꿈을 포기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래도 먹고살기는 해야 했다."12

일 개인의 위와 같은 고백에, 도대체 '정의(justice)'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 걸까, 어떤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걸까, 그게 여전히 궁금하긴 하네요.


 

  1. 이건 마치, 모든 수학적 증명의 시작이 개념을 정의하는 것(define)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2. 목수정 著, 「파리의 생활좌파들」중 p215, 생각정원 刊, 2015.
  3.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 … 이러한 견해들은 정의를 각기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p23)
  4. 진짜 거칩니다. --;;
  5. '공리(utility)'는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p63)로 정의되며, 경제학에서의 '효용극대화(utility maximization)' 가설이 바로 이 공리주의를 표현하고 있는 수식이 됩니다.
  6. 또는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비판 … 다른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두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p82)
  7. "Optimum​ or optimal level or state of something is the 'best' level or state that it could 'achieve'."
  8. 경제학만 그럴까요? 다수결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공리주의적 사고(思考)와 관련이 없는 걸까요?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정의(justice)'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요, 아님 '최적(optimum)'의 도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전 당연히 후자라 생각합니다만, 이것이 옳은 답이라고 장담은 못하겠네요.
  9.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반응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다."(p171)
  10. 사실 요즘의 저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문제입니다.
  11. "애인은 자신의 명백한 권력을 O의 고통을 통해 확인하는 데서 더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폴린 레아쥬, 위의 책 p21.
  12. 안토니오 아타리바 · 킴 共著,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중 p39, 길찾기 刊,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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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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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nburgh castle에 올라섰을 때, 영국사(史)에 대한 특별한 지식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사람들(Scottish)이 왜 자신들을 영국인(English)라 부르는 것에 그토록 질색을 했던가에 대한, 차마 저의 언어로는 표현해내지 못하겠는, 하지만 너무도 뚜렷하게 느껴지기는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더랬습니다. 그러하기에, ---  지난 2014년,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던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에서 (완전한 제3 자적 입장에서의 기대로는) 찬성의 결과가 나오길 기대했었었거늘, 예의 "영국에서 분리·독립할 경우 경제적 대재앙을 맞게 될 거라는 경고"1와 같은 (일단 막 던져놓고 보는) '현실'과 관련되어져 표현되는 위협은,

"무지하게 겁이 났다. … 총알에 맞는 것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어디에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p62)


와 같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부추켰었고 결국/이내, 그들의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하게 만들어/막아 주었었지요. 암튼! --- 그때 만약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결정된다면, 그 다음 차례는 무조건 여기!라 예상되었던 곳이 바로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지역이었던 걸 기억합니다.   


언어·문화에도 독자적인 카탈루냐어()2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왕정시대와 프랑코 독재정권 때는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과 대립하였으며 지금도 카탈루냐 사람들은 여전히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독립과 자치를 요구한다. ……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카탈루냐 지방은 노동 운동과 자치·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1932∼1934년, 1936년에 자치권을 획득하였으나 스페인 내전 후 프랑코 정권이 확립된 후에는 다시 자치권을 상실하고 카탈루냐어의 공식 사용도 금지되었다.


- 카탈루냐(Catalonia)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는 스페인 전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소설'3이라 해야할 지, 아니면 일종의 '기록(문학)'4으로 보아야할 지, 혹은 다른 이름의 장르이어야 할지,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만, "스페인 전쟁5 … 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6이었다"(p66)라는 조지 오웰의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장(戰場)과 관련된 묘사가 아닌,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p71)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정치적 측면, 그러니까 다름 아닌 '사상/이념'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독자에게 요구/강요/권유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해줍니다. 


……………………………………………………………………… 


"노동자들의 군대에서 규율은 자발적인 것이다. 이들의 규율은 계급7에 대한 충성에 기초한다. ……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이 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pp41-42) 

아나키스트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당시 스페인의 '인민전선(People's front)' 의용군들은 예의, 위와 같은 아나키즘적 사고8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군대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임에도, 민주주의가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조직'이란 역설적 표현9이 존재/가능하다라는 걸 감안할 때, (국방의 의무를 다한 저에게 ^^;;) 내전/혁명에 대처하는 조직의 운용이 위와 같은 자발적 충성에 의해 이루어졌었다라는 점은 결코 가벼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냄에 있어,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라는/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다시 말해 ---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일면(aspect)이란 게 어쩌면, 1930년대 초반의 스페인에서 일어났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갈등10"(p194)으로부터 기인된 '혁명의 실패11'와 같은 결과로서의 일 현상(phenomenon)이 아닌, (그것이 반드시 '아나키즘'과 같은 특정의 것이 아닐 지라도) '이념', '사상' 혹 넓게는 '신념'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겠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일 개인/집단의 확신(이 지니는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을/까지를 해보기도 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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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과연 나는 대한민국의 무엇을 지켜내기 위해 전쟁터에 기꺼이 나갈 수 있겠느냐란 자문에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비단 저의 용기 없음 뿐만은 아닐 수도 있을 꺼란 생각,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p13)는 확신을, 대한민국의 교육은 국민들에게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해/믿어 보게도 됩니다. 그러하기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p66)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대한민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보통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제게, 그 속에 '북한 체제'와의 상대적 비교가 아닌, '대한민국' 자체를 향한 절대적 가치로서 존중하고 싶다란 믿음을 배워본 적 없는 제게 ---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p11)이란 조지 오웰의 (위와 같은) 사고(思考)는 그저 놀랍고 낯설고, 사실은/심지어는 뭉클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 내전에 참가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p13)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 받았기 때문이란 조지 오웰의 고백은, (1969~2017에 이르르는) 저의 삶에선 도무지/도대체 대입되어질 수조차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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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귀하고 아름답지만,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다."


- 유시민 著, 「후불제 민주주의」 중 p37,  돌베개 刊, 2009.

먼 과거로부터, 여전히 '남의 일'로 보여지기만 했었던 1987년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자유'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피와 눈물'을, 전 완벽하게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 완벽하지도 못한/약간의 알고 있음에마저 예의 '느낄 수 있음'은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투는 … 자신들이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위해 싸운다고 믿는 인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p70)


이 책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homage란 단어의 대상이 되기에 차고도 넘치는 2017년의 대한민국과, 더 나아가 ---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하나씩 정상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대한민국을 나의 아들이 살아갈 나라로 건네어 주는 것엔 굳이, '우리의 피와 눈물'까지는 요구되지 않는다라는 다행스러움마저 지니고 있는 우리들에게, 2017년의 5월 9일은,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영속적인 의지"12서의 정의(justice)를 내 손으로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될 수 있지 않겠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 물론! --- 대한민국에 뿌리내려주길 바라는 '정의(justice)'의 모습/수준은 세대마다, 계층마다, 또한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다시 한 번 더) 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이란 것이 단지/오로지 범위의 차이로부터 기인되는 것이기만을, 그것이 정녕 '개념(definition)'의 차이로부터 생겨난 것은 부디 아니길13, 함께/부디 바래어(願)도 봅니다. 


※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안토니오 아타리바 · 킴 共著,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길찾기 刊, 2013.

※ 아나키즘이란? - 하승우 著 「아나키즘」, 책세상刊, 2008. 


 

  1. "스코틀랜드 독립 무산" - 한겨레 2014.9.19.
  2. 스코틀랜드에서 듣게 되는 영어 역시, 그걸 'English'라 칭하기엔 심히 애매하다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독일어라 하는 게 오히려 고개를
    더 끄덕여지게 해줄...
  3.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 - 노암 촘스키
  4. 책의 본문에서 작가는 이 기록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 모든 전쟁이 똑같다. 병사들은 전투를 하고, 기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람은 잠깐의 선전 여행을 제외하면 전선 참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p88-90)
  5. 'Battle for Spain' 또는 'Spanish Civil War'
  6. 저자 조지 오웰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p297)이라 표현했었다 합니다.
  7. 이 때의 '계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그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다음 두 구절을 통해, 제가 한 단어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이 문장 속 '계급'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으실 듯 싶네요.
    ① "의용군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 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 모든 의용군이 위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물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명령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 장교도 있고 하사관도 있었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군사적 계급은 없었다. … 의용군 내에서 일시적이나마, 계급 없는 사회의 산 표본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없었다. 그러나 평등의 수준은 내가 그때까지 보아온 모든 것 이상이었고, 또 내가 전시에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pp40-41)
    ②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 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다."(pp140-141)
  8.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 하승우 著, 「아나키즘」 p12, 책세상 刊, 2008.
  9.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량만 축냈습니다."(p96)
  10. 그 갈등의 이념적 원인은 어쩌면 다음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공산주의자는 늘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한다 .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p84)
  11. "흔히 제창되는 구호 가운데 '전쟁이 먼저고, 혁명은 나중이다'라는 것이 있었다. … 그러나 그 구호는 눈속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스페인 혁명을 미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 노동자들은 점점 권력을 빼앗겼다. 온갖 부류의 혁명가들이 점점 더 많이 투옥되었다. 모든 행동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 그 결과 노동자들은 우월한 지위로부터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의 재도입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터였다."(p92)
  12. 마이클 리프 · 미첼 콜드웰 共著, 「세상을 바꾼 법정」중 p143, 궁리 刊, 2006.
  13. 우리나라가 정말, 대통령이 되겠다는 다섯 명의 유력 후보가 나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만큼, 다양한 견해까지가 필요한 나라일까요? 목수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들"(「파리의 생활좌파들」중 p215, 생각정원 刊, 2015.)을 좌파의 정의 중 하나로 상정하고 있습니다만, 태극기를 둘러멘 꼴보수들 역시, 자신들을 과연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제외시킬 것인가에 대해선 긍정이 되질 않습니다. 즉! --- 우리나라에서 외쳐지는 '진보'와 '보수'란 구분은 다 가짜고 말 뿐인, 기실은 본질로부터는 거리가 먼, 그런 것들이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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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 - 감각의 향연
이사벨 아옌데 지음, 정창 옮김 / 영림카디널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자연은 개인과 종족의 보존에 필요한 단순하고 최소한의 것만을 요구한다. 나머지 모든 것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고자 인위적으로 고안한 장식품이나 핑계에 불과하다."(p36)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단순하고 최소한의 것'을, 이 책의 저자 이사벨 아옌데는 '식욕과 성욕'이라 이해1하고 있으며, 이 책 「아프로디테 : 감각의 향연」은 그러한 저자의 이해가 "섹스와 음식을 탐색하는 모험"(p52)의 내용으로 활자화된 것이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루를 되돌아보는 황혼의 마지막 순간"(p13)이라 나이 오십대2를 표현한 저자는 "열아홉 살 이후 나는 거의 평생 동안 기혼자로 살았다. … 그 오랜 시간 동안, 대략 16,425번 내 남자의 이성을 잃게 하지 않았나 싶다"(p231)라 사뭇 유쾌하게 자신의 '하루'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여자는 허벅지」란 책을 읽으면서는 '성별, 나이, 문화'의 차이로 인해 그 책 속 성 담론에 공감할 수 없었다라 썼었었거늘 --- 이 책에 담겨 있는 성에 관한 이사벨 아옌데의 솔직함은, 뭔가 확~ 와닿지 않는 한두 부분들3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저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더 많았으며, 무엇보다 일단! 이 책이 무지하게 재미있게 읽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뭐랄까, 그녀의 '섹드립'(?) 코드가 저와 너무도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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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성욕이 항진되게 하는 약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4이라 정의되는 '최음제'입니다. 최음제라... 뭔가, 45년 전 사용되었다는 돼지발정제5스런 뉘앙스가 강력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게다가/심지어, 책은 '최음제'로 사용 가능한 음식들의 레시피까지도 잔뜩 소개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 물론, 이 책 속 '최음제'의 의도가, 누군가를 그/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반(反)하여 '성욕을 항진'시키는 데 있지는 않다라는 건 누구나 쉽게 알게 됩니다. 아니 그럼 대체 뭐냐?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시즘의 구분의 취향의 문제다."(p34) …… "암탉의 깃털을 이용하면 에로티시즘이고, 암탉 한 마리를 이용하면 포르노다."(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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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서 얻는 즐거움은 우리가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 series 중​

"사랑의 욕망을 부추기는 모든 실체와 행위"(p34)로 최음제를 정의하는 저자 이사벨 아옌데는, 비록 몇몇 (실체적) 최음제들은 과학적 작용을 통해 인간에게 '성욕의 항진'을 가져다주기도 하겠으나 그 대부분, 즉 '성욕의 (진정한) 항진'은 "상상의 충동"(P34)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버섯6, 아스파라거스7, 오이8 또는 당근9 등이 남성의 성기나 고환10를 연상시킨다거나, 조개11, 달팽이12나 복숭아13 등이 여성의 특정 신체부위와 유사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연상 작용을 통해 에로틱한 무언가를 떠올리게"(p34) 해주기도 하나, 그 이유들이 역설적으로 "에로티시즘이 생리 작용보다는 환상과 믿음에 달려 있다는 근거"(p267)가 또한 되기도 한다라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쩌면 --- (영어로 '최음제'를 뜻한다14는) aphrodisiacs가 '아름다움과 욕망을 대변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로부터 기인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육체적인 사랑을 자극하는 것"(p18)이 최음제의 궁극적인 목적일 때, "우리를 유혹하는 음식이라면 모두 최음제가 될 수 있15"(p38)겠지만 무엇보다도!

​"오로지 목적과 결과를 생각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의식과 과정을 중시한다. 특히 사전 의식은, 설사 환상을 좇는 행위일지라도 여자에게는 나중에 펼쳐질 에로틱한 곡예만큼이나 짜릿한 자극이 될 것이다."(p59) …… "우리는 새우를 씻고 양념하고 요리하는 남자를 지켜보면서 노련하고 차분한 그들의 손길이 우리 몸에 와 닿는 에로틱한 마사지를 상상한다. 그들이 요리의 맛을 확인하고자 해산물 한 조각을 섬세하게 맛볼 때면 마치 목덜미가 깨물리는 느낌에 전율한다."(p57)

현대의 기독교는 '간음하지 말라'와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라는 십계명의 두 계명을 한데 묶어, '네 이웃의 아내를 간음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라는 도덕률을 준수하라 설교합니다만, 우리의 도덕률 역시 '내 이웃의 아내를 간음하고 싶다'란 생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상상은 집요한 악마와 같다. 상상 없는 세상은 흑백일 것이다."(p36)

뭐, 굳이 'Impossible is Nothing'이란 말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 저자 이사벨 아옌데가 그려내고 있는 다음의 장면은, 그저 읽고 가볍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성욕의 항진'을 가져와 줍니다.

"식탁보 밑에서 우연히 서로의 무릎이 스친다.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접촉이지만 그들은 번개에 맞은 듯하다. 겉으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오르는 욕망이 너무나 격렬해서 심장이 요동을 칠 정도다. … 이제 세상에는 오로지 둘만 존재한다. 웨이터가 다가와 빈 잔에 와인을 따르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떨고 있다. 여자가 포크를 집어 들고 입술을 연다. 식탁 반대편의 남자는 그녀가 내뱉는 숨결의 온기와 타액의 향기를 음미한다. 숨을 막히게 하는 무시무시한 연체동물처럼 자신의 입안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혀를 상상해본다. … 그녀의 시선은 남자의 접시에 남아 있는 마지막 굴에 꽂혀 있다. "(pp87-88)

​뭐, 이게 뭔 야설의 일부라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으나, '성욕의 항진'을 선사해주는 이러한 상상의 상대방이 반드시 '이웃의 아내'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16! --- 당신의 배우자와도 "바퀴벌레 가루를 삼키는 극단적인"(p38) 자양강장까지 굳이 행하지 않더라도 "막 다리미질을 끝낸 모포 속에서 살을 섞을 때 주고받는 이야기"(p22)를 통한 "영혼의 섹스"(p26)를 가진 후, "(당신이 수시로 짝을 바꿀 형편이 안 된다면) 사랑의 행위라도 다양하게"(p42) 함으로써 얼마든지 에로틱한 유희를 즐길 수 있노라는 저자의 권고17는, "우리의 미각, 시각과 청각은 기본적으로 그 대상 자체의 특성보다 우리가 그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18라는 경영학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우리의 성(性) 현실에 적용시켜 놓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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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쓰는 감상문에, 그 책으로부터의 인용구를 유독 많이 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문장이 좋아서였던 경우도, 지식의 전달을 위한 복기였던 경우도, 요약해 내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던 경우도 있었었거늘 --- 이 책, 「아프로디테 : 감각의 향연」을 읽고 쓴 이 감상문에는, 그저 그 문장 전체에 공감한 경우가 많았었기 때문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유를 더하게 됩니다.

​"맛의 쾌감은 입안보다 기억에서 시작된다 … 나는 아직도 40년 전 처음 키스했을 당시 껌과 담배, 맥주의 맛을 기억하지만 함께 키스했던 미국인 선원의 얼굴은 까맣게 잊어버렸다."(p91)

……

"나는 내 삶을 스쳐 지나간 남자들을 이런 식으로 기억한다. 어떤 남자는 피부의 감촉으로, 다른 남자는 키스의 맛으로, 혹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나 속삭이는 목소리의 기억 같은 것으로 말이다."(p15)

……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들은 마음을 주고받는 '공감'이란 필수 요소가 없다면 어떤 최음제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 공감이 완벽의 경지에 이르면 곧 사랑이 된다. 나는 항상 공감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사랑을 할 수 없을 때, 그러니까 내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꼬부랑 할머니가 함께 즐길 남자를 찾지 못해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에는 음식과 기억만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p286)

저에게도 머지 않은(Shoot!!!), '오십'이라는 나이의, 대한민국과 멀어도 한참 먼 남미에 사는, 여성이 쓴 이 한 권의 책이 제게 준 공감은 예의 당신의 것(echo in your heart)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해보며, 이 감상문의 마지막으로 인용하겠노라, 읽는 순간부터 결심했었던 문장을 옮겨 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 전체 p429에서 끝맺음 되는 책을, p286까지만 읽었습니다만19, 요리를 좋아하는 그리고 '성욕의 항진'을 느껴보고 또 선사하고픈 당신이라면! 제가 받은 즐거움에 비하지 못할 쾌락의 선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솔직히 말해 반드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웃분들이 실제 분 떠오릅니다.^^) 이 감상문에 인용되지 않은, 남미 아줌마 이사벨 아옌데의 야릇한 뉘앙스의 이야기들 또한 빼놓지 마시고!


  1. "식욕과 성욕은 역사의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 세상의 모든 창조 행위는 소화와 생식의 끊임없는 오랜 순환이다."(p283)
  2. 저자 이사벨 아옌데는 1942년 생이며, 이 책은 그녀가 50대 중반 무렵이었던 1997년에 출간되었습니다.
  3. "신선한 토마토를 손바닥에 쥐고 깨물어 즙이 입에 가득 차고 턱과 목으로 흘러내릴 때 이를 다른 구강의 쾌락과 비교하고 싶은 유혹은 성인이면 누구라도 뿌리치기 어렵다."(p264) --- 이 장면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는 알겠는데,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라는 데까지는 뭐랄까...
  4. <네이버 지식백과>
  5. 돼지발정제의 원료로 사용된다는 재료에 대한 설명 : "요힘베는 카메룬에서 자생하는 나무껍질에서 채취한 것으로 약초 가게나 성인 용품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데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독성 물질이 있어 과다 복용하면 격렬한 경련과 고통스런 환각, 견디기 힘든 소화 불량에 시달리게 된다."(pp252-253)
  6. "축 처진 남근"(p269)
  7. "핏기 없는 남근"(p271)
  8. "모양만 에로틱"(p272)
  9. "과부의 노리개라고 저속하게 불린다 …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근 하나로 흥분하는 사람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물론 전적으로 먹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p268)
  10. "아시아와 폴리네시아에서는 … 고환을 닮았다고 해서 남성 음식으로 여겨진다. 망고만 한 고환이라..."(p212)
  11. "여성 생식기 모양"(p34)
  12. "여성의 주름진 곳 사이에서 살짝 보였다 사라지는 클리토리스와 비슷하게 생겨서 에로틱한 명성을 얻었다고 하는데, … 내 몸에는 달팽이처럼 생긴 것이 전혀 없다. 내가 아는 한 내 여자 친구 대부분도 그렇다."(p167)
  13. ​"가장 관능적인 과일"(p212) …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생김새"(p213)
  14. 이번에 처음으로 '최음제'라는 우리말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게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몰랐던 게 당연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일단, 최음제란 우리말 단어부터가 일생 몇 번이나 써보게 될지 모를 단어이거늘 그러한 말의 영어 단어를 공부했을 리가 만무하겠죠.
  15. 중국 작가 옌렌 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 역시, 음식과 성욕을 연결하고 있지요. ---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라곤 빨간색과 파란색 꽃무늬가 뒤섞인 얇은 실크드레스 잠옷 하나뿐이었다. 실크드레스는 품이 너무 크고 헐렁헐렁해서 언제라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 선풍기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 때마다 류롄의 드레스가 흩날렸다. … 바람이 드레스 자락을 들칠 때마다 그녀의 허벅지는 아름다운 산수가 제 모습을 드러내듯 그대로 드러났다. 하얗고 늘씬한 데다 적나라하게 탄력이 넘치는 허벅지 살이 남김없이 노출되었다. 실사구시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다왕이 실크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보는 것은 이번에 생전 처음이었다. … 부풀어 오른 드레스의 옷깃 사이로 그의 눈이 순간 경계심을 잃은 사이에 그만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의 가슴은 하얋고 큰 것이 마치 원을 그린 것처럼 둥글고 풍만했다. 밀가루 반죽이 잘 되고 화력도 가장 좋을 때 자신이 사단장을 위해 쪄냈던, 사단장이 가장 즐겨 먹는 따끈하고 속이 빈 하얀 찐빵과 같았다. … 류롄의 커다란 유방을 본 우다왕은 자신이 쪄낸 크고 따끈한 찐빵을 떠오리며 순간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6. "나는 심하게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화해의) 수프를 요리한다. …… 나는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손톱을 빨갛게 칠한 다음 따뜻한 접시에 발효 크림을 고명으로 얹어 수프를 내놓는다."(pp232-233)
  17. "섹스와 심장이 하나가 되어 뛸 때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황홀경을 맛볼 수 있습니다."(p138)
  18.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 series 중.
  19. '최음제'로 쓰일 수 있는 음식의 레시피들이 들어있는 이후의 페이지를, 요리하지 않는 제가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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