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리커버 특별판)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경기도민 둘이서, 몇 시간동안 비싼 안주에 술병 쌓아가며 서울시장에 누가 당선되어야 하느냐를 토론하는 건, 민중의 정치적 성숙도 함양, 뭐 이딴 면에선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는 그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습니다. 현실을 결정짓는 도구는, 경기도민이 가지고 있는 기막히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니라, 멍청할지도 모를 어느 서울시민이 가지고 있는 한 표의 투표권이니까요. 이처럼!

우리가 알고자/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정확한 개념 - 예를 들면, '난 경기도민이고, 그러하기에 서울시장을 뽑는 선거엔 투표권이 없다라는 사실' - 을 사전적으로 인지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로 하여금 헛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라는 작은 이점으로부터, 크게는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에 대한 정확한 표식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까지를 해주게 됩니다.1


(이젠 드디어 '빨갱이'란 단어와 동치되지 않게 된, 그저 순수하게) "사회적 정의(justice)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들"2로 정의(define)될 수 있는/게 된 '좌파'라는 단어를 한 번 보죠. 이 정의에 따른다면 그 누구도 좌파되길 명시적으로 거부할 사람이 없을 것 같거늘, 정작 '(사회적) 정의(justice)'란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란 질문엔 예의 세대마다, 계층마다, 또한 개인마다, 아마도 모두 상이한 답변을 내놓게 되는, 이해 못할 불일치를 겪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justice)'에 대한, 그 다양한 답변들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핵심적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게 있기는 할까요? 만약 있다면 --- 이 유명한 책, 「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에서 우리는, 그 핵심적 개념을 배워볼 수 있는 걸까요?

"민주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p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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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센델 교수는, 정의(justice)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3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해 줍니다.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③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p279)

철학엔 관심이 많지 않기에, 이 책에 대한 정리는 딱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센델 교수는 세 번째 방식의 정의(definition)을 가장 선호한다 밝히고 있더군요. 이하의 글은 이 책을 읽고,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두 가지의 의문을 거칠게4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고로, 이 감상문은 이 책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는 거!


【 정의(justice) VS 최적(optimum) 】

경제학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5주의(utilitarianism)은 주장은 간단합니다. 바로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p63)라는 거지요. 센델 교수는 이와 같은 공리주의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비판이 주어진다라 설명해 줍니다. --- "첫 번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모든 선을 하나의 통일된 가치척도로 환산해 획일화하여, 그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6(p380) 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정확히 위와 같은 비판을 모두 받음직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제학은 결단코 이것을 '정의(justice)'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칸트가 공리주의를 향해 퍼부었던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p165)란 비판을 똑같이 퍼붓는다면, 경제학의 입장에서 죽도록 억울해하겠죠, 아마도. 경제학은 그 상태를 가리켜 right or wrong의 '정의(justice)'가 아닌 no better than의 '최적(optimum7)'이라 말하고 있며, 그 '최적'이란 단어에는 정의상(by definition) 그 어떠한 가치판단적 요소도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8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 대하여도 예의,

'정의(justice)'라는 개념의 차원이 아닌, 단지 '(사회적) 최적(optimum)'이란 (기계적) 개념과 연관지어질 뿐인, 즉 "사람들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취할 뿐,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p87)라는 전제 위에서 전개된 이론인 공리주의를, 굳이 도덕적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지려 하느냐란 비판이 가능하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센델 교수가 들고 있는 예(example)들 또한, '정의(justice)'를 논하는 것이 아닌, '비극(tragedy)'을 논하는 것에 인용되는 게 더 적절할 법한 것들만 모아놓고 있는 게 아닐까란 의문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더 이해 안되는 예들도 있지만) 핵폭탄 운운하며 고문의 정당성을 공리주의자의 관점에서 찾아내려는 부분만 봐도, 도대체 그것이 '정의(justice)'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하물며,

일체의 사적 판단이 배제된, 즉 "모든 취향은 동등하게 계산된다"(p87)라는 공리주의의 계산법은 A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과 B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이 동일하다는 결과를 낳는데 쓰여져야 마땅하거늘, 물에 빠진 두 아이 중 A의 아들은 살아났고, B의 아들은 익사했을 때 A와 B가 가지는 기쁨과 슬픔을 비교하려는 데에, 더 심하게는 2명의 아빠가 아이를 살렸고, 한 명의 아빠는 아이를 잃었다와 같은 비극에서의 효용과 비효용의 수치를 더하고 빼는 것에 적용시키는 듯한, 센델 교수가 거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예들이 지닌 어색함에 대한 불만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 묻고 있는 책에 상정하고 있는 '정의(justice)는 대체 무엇일까요?


【 욕망의 주체 】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과 관련 있다"(p163)라 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공리주의가 지닌 철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아니다.9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pp170-171)

칸트 옹은 여기서의 '자율적 행동'에 대해, 신체적 반응까지도 "외부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에 따라 행동할 뿐"(p168)이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수를 사 마심에 있어, 콜라를 마실지, 물을 마실지, 아님 우유를 마실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은 일견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동조차! "복종의 실천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 갈증에 대한 복종이다"(p168)라는 거지요. 즉, 칸트가 정의하는 '자율적 행동'이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완벽하게')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p169)이어야만 하는 겁니다. 잠깐! 어, 근데 이거 어디서 봤던 건데?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p12)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p16)

- 하승우 著, 「아나키즘」, 책세상 刊, 2008.

정치체제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가 아닌, '반(反)강권주의'로 번역되어야 하듯! --- 우리 삶 속 아나키즘은, "애초의 그 욕구가 자기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p180)라 이해될 수 있을 일상 속 아나키즘은 그리하여, 예를 들어10, 내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도 예의,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기 때문이 아니다. ……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실천할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p172)

(대개는 강제, 가끔은 애원의 모습이기도 한) 부모의 노력이 자식의 '명문 대학 합격'의 결과로 나타나지 못할지라도, 하물며 보석처럼 빛나길 바라지 않는다 하여도 그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의미다"(p171)란 명제를 실천할 수 있(었)음에 만족해 하는 것으로 간주되면 안될까, 그럴 수는 없을까하는 물음을 저 스스로에게부터 먼저 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아나키즘'에 대한 저의 관심은, 이마뉴엘 칸트의 철학에서까지 '아나키즘'의 향기를 느끼게도 해주었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도록 나에게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각자 어울리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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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이란 (이름마저 멋진) 사람이 했다는 말,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를 첨 읽었을 때 정말 찌릿!하고 섬뜩! 했더랬습니다. 그 찌릿함의 기원이 그 말의 철학적 배경이나 사회학적 뭐시기 등 때문은 아니었었고 그저, 당시 내 아이를 교육함에 있어 저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었죠. 그리고/그런데 이 표현, "아이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게 왜 섬뜩한 거냐 하면 --- 아이의 효용함수에 들어가는 독립변수 중, 정작 당사자인 그 아이의 것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게 된다라는, 이 상황을 극단까지 밀고가 보면 결국,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p114) …… ​"하느님이 주는 시련을 신자들이 오히려 감사해하듯,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걸 즐기는 애인의 뜻을 충실히 배려하면서 마냥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pp120-121)

- 폴린 레아쥬 作, 「O 이야기」, 문학세계사 刊, 2012.

아이 스스로 그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르게 되고, 심지어! 우리 부모는 그렇게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고/알면서도 즐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쾌감을 느끼게 되는 건11 아닐까 하는 염려가, 단지 머릿 속 염려로만 그치지 않는다라는 것, 바로 이 점이 섬뜩하다는 겁니다. 즉! 칸트 옹께서 말씀하셨던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p169)이란 것이 의미하는 '자율'이 완벽하게 무너졌으나, 스스로는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할 경우 --- '자유'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거겠죠. 이럴 땐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논의 또한 이 책엔 들어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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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양한 사례와 질문이 제시되지만 해답은 주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p434)
'인상을 갖기 쉽다'가 아닌, 실제로 센델 교수가 딱히 해답을 알려준 경우가 거의 없었다가 저는 생각합니다. 뭐 그럴 수 있겠죠. 철학이라는 게 원래 정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하지만!
경제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타주의자 99명이 살고 있는 사회에 단 한 명의 이기주의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서로를 도와가며 살고 있는 이타주의자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는 계속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만, 자신을 제외한 사회의 수많은 이타주의자들 덕에 아무런 불편함없이 살아가게 되고, 이를 지켜본 이타주의자들 중 하나가 드디어, 이기주의자의 행동을 따라하게 되고, 그러나 역시 그 사회는 이타주의적으로 돌아가는 거였고, 그렇게 조금씩 이기주의자로의 변절이 진행되어 결국, 그 사회의 모든 이타주의자들이 전부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예의 그 반대의 경우, 즉 이기주의자들만 살고 있는 사회에 들어간 한 사람의 이타주의자는 너무도 쉽게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센델 교수는 이 책에서, 칸트와 롤스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들은 단지 "자기 목적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강력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뿐"(pp319-320)이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 자신들의 사회에 들어 온 한 명의 이기주의자에게, 99명의 이타주의자들이 위와 같은 '도덕적 사고'를 발휘했을 때의 결과가, 기존 사회의 붕괴라면, 그게 과연 정의(justice)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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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정답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이 모든 판단은 다 상대적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때, 정말이지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었었던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 한편으로는 정답이 없다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하면 오답 역시 없다라 말해주는 것으로 정리되는 제 수준의 이해로는, 딱히 '이 책, 정말 훌륭해요!'란 말까지를 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정의로운 사람이라 스스로를 말할 자신도 없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곳이다란 생각 또한 가져지지 않지만, 그러한 것들이 '정의란 정말 무엇일까'란 질문마저 필요없다라 말하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꿈을 포기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래도 먹고살기는 해야 했다."12

일 개인의 위와 같은 고백에, 도대체 '정의(justice)'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 걸까, 어떤 의미가 되어줄 수 있는 걸까, 그게 여전히 궁금하긴 하네요.


 

  1. 이건 마치, 모든 수학적 증명의 시작이 개념을 정의하는 것(define)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2. 목수정 著, 「파리의 생활좌파들」중 p215, 생각정원 刊, 2015.
  3.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 … 이러한 견해들은 정의를 각기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p23)
  4. 진짜 거칩니다. --;;
  5. '공리(utility)'는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p63)로 정의되며, 경제학에서의 '효용극대화(utility maximization)' 가설이 바로 이 공리주의를 표현하고 있는 수식이 됩니다.
  6. 또는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비판 … 다른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두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p82)
  7. "Optimum​ or optimal level or state of something is the 'best' level or state that it could 'achieve'."
  8. 경제학만 그럴까요? 다수결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과연 공리주의적 사고(思考)와 관련이 없는 걸까요?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정의(justice)'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요, 아님 '최적(optimum)'의 도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요? 전 당연히 후자라 생각합니다만, 이것이 옳은 답이라고 장담은 못하겠네요.
  9.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반응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다."(p171)
  10. 사실 요즘의 저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문제입니다.
  11. "애인은 자신의 명백한 권력을 O의 고통을 통해 확인하는 데서 더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폴린 레아쥬, 위의 책 p21.
  12. 안토니오 아타리바 · 킴 共著,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중 p39, 길찾기 刊,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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