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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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 아빠가 입던 건데, 이제 종원이가 입네~", "아닌데요, 이거 이모가 사주신 건데요?"

제 말도 맞았고, 종원군의 말도 맞았습니다. 전 티셔츠를 생각하며 '아빠가 입던 건데'란 말을 했던 것이고, 종원군은 바지를 생각하고는 '이모가 사주신 거'란 대답을 했었던 거였기 때문이었죠. 이처럼/이와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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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마이클 센델 著, 「정의란 무엇인가」 중 p279, 와이즈베리 刊, 2014.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은 아니었었습니다. 오히려 뭔가,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와, 「정의란 무엇인가」가 다루고 있는 '정의(justice)'는 다른 것이 아닐까, 혹 이제까지 내가 '정의(justice)'라 알고 있었던 개념이 정확한 정의(definition)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등의 의문만을 남겨 주었었지요. 그러던 차,


역시나, 어쩌면 당연하게 --- '정의(justice)'를 이야기하고 있을 꺼라 믿어야만 할 듯한/믿으라 말하고 있는 듯한/이렇게까지 노골적인데도 믿지 않을래?라 말하는 듯한 소설, 「저스티스맨」에서, 이제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정의(justice)'의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이 말해주는 바는,

마이클 센델 교수가 다루었던 정의(justice)는 '분배 정의,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다'란 맥락으로 언급되는 정의(definition)이었던 것이고, 제가 알고 있었던, 또한 이 작품 「저스티스맨」이 다루고 있는 정의(justice)는 '정의의 사도,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와 같은 맥락에서의 개념이었었다라 하네요. 티셔츠를 가리키고 한 말과, 바지를 떠올리며 했던 대답마냥, 이건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의 차이와 비슷한 거죠. 물론! --- 그저 평범한 일 개인일 뿐인 저의 관심은 당연히, 이 소설에서 차용되고 있는 맥락으로서의 정의(justice)를 넘어설 수 없(으며,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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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자신만의 독후감을 써놓는 분들 중, 제가 부러워하는 분들을, 다음의 세 부류 - ① 간단명료한 요약, ②제가 생각해 내지 못한 맥락 집어내기, ③읽는다라는 노동을 즐거운 재미로 만들기 - 로 나누어볼 수 있거늘, 네이버 블로그의 '까칠한 비토씨'는 (본인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제겐 단연 ③번의 타입으로 각인되어 있는 분이었었습니다. 이 때의 '재미'라는 건, 흔히 '언어의 유희'라 표현되는 것 뿐만이 아닌, 글을 읽어가는 흐름이 너무도 매끄럽기에 느끼는 재미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까칠한 비토씨'는 거의 완벽하게 그 두 가지의 재미를 지닌 글을 쓰시는 분이었었죠. 자, 이제 '작가 도선우'로 만나보는 그의 글은 어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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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라는 게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흔히 결과만을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오류가 발생하기 쉬우며 그러한 집단 오류가 또 다른 이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p13)

​작품에 등장하는 열 개의 살인 사건 속 피살자들 간에는 예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스러운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살인이라는, 엄청난, 자극적인, 극단적 결과의 원인들이라는 게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는 아주 보통의 일상으로부터 시작"(p101)된다/될 수도 있다라는 점을, "정말 소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들"(p203)을 빌어 알려주고 있지요.



【 그래서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박근혜가 탄핵되고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이, 최순실의 부정한 재산을 모두 환수시켜버리고 죽을 때까지 감방에 처박아 놓는 것이, "법망에 걸리지는 않으나 도의적인 책임에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자"(p93)로 성공적인 안착을 한 듯 보이는 우병우를 기어이 법의 몽둥이로 시원하게 때려주는 것, 이런 것들이 혹,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실현'인 건 아닐까요? 아마도, --- 당신은 아니라고, '정의의 실현'이란 그런 것들 보다는 훨씬 더 커다른 차원의 무언가라 이야기할 꺼라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노는 나쁜 놈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놈이 충분히 처벌받는 것을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허태균 著, 「어쩌다 한국인」중 p183, 중앙books 刊, 2015. 

​전, 허태균 교수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시스템의 해결이 아닌, '나쁜 놈, 죽일 놈'을 찾아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해 버리는 건 결국 --- 뭔가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때, 때려 잡아야 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유신 시대와 5공화국 때의 대한민국이었었죠. 그때는, "어떤 연관이 있든 없든 그 연관을 확립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삼고 있는 당시의 국가 공무원들에게 "증거란 필요하면 나타나게 마련"이었었으며, 심지어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선고가 내려진 사건"들도 만들어 내었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이제, 2017년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누리꾼의, 누리꾼에 의한, 누리꾼을 위한 광() 케이블만이 존재"(p218)하는, 일단/적어도 온라인 상의 대한민국"모두가 옳다 하니 옳아진 진실"(p231)에 현혹되어,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p13)에 흥분하고 말아, 매우 종종 "한번 생성되면 이변이 없는 한 곧바로 사명감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자신이 아니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거란 궁극의 자기애"(p41)로까지 발전시켜 내어서는 "누가 뭐래도 분명한 정의의 수호자임에 틀림없다는 자족감"(p42)에 심하게도 도취되어, '오늘도 수고했어!'란, 되도 않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안겨 주고 행복한 꿈나라로 들어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p242)

자신이 노예인지조차 모르는 채, '정의(justice)'와 '권력'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그저 "모두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결정된 사실에 관한 믿음"(p158)을 곧 '정의(justice)'라 착각하고 사는, "마땅히 죽을 놈이 죽었으니 통쾌하다"(p95)라 반응하지만, 정작 그 '마땅함'에 대한 설명의 요구에는, --- 그러니까  작품 속 열 명의 피살자들이, 정말로 '마땅히 죽을 놈들'이었느냐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죽어 마땅하다'라는 판단은 어떠한 경우 이루어져야 (또한) '마땅함을 인정받는가'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본 후, '마땅히 죽을 놈들'이란 선고를 내렸느냐와 같은 과정조차 없는, 오로지 감정적 흥분만을 대답으로 내놓는/내놓을 능력밖엔 되지 않는 병신들의 숫자가, 무시하기엔 너무 많아지고 있지요. 작가 도선우는 이 작품을 통해, 


"신기하고 놀랍게도 제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돌렸을 뿐인데 모든 게 다 다르게 보였다. 정말이지 이제껏 자기가 보아왔던 진실은 거울에 비친 허상이었던 듯 진정한 진실을 자신의 뒤에 있어, 그러니까 뒤돌아선 지금에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흥분된 마음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p210)

(문학에 한정하여, 손아람의 「소수의견」이 말하고 있는 정의(justice)와는 다른,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 속 정의(justice)와도 많이 다른) '정의(justice)'가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말해줄 수 없으나 적어도, --- "각자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종의 진리 같은 것"(p99)이 되어야 하지, 무작정의 신뢰가 더해진 일종의 가설이 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 정도는 쫌! 알고 있자, 란 말을, 


위와 같은 일종의 조언, 달리 보면 반성에 대한 변명의 꺼리로 쓰일 수도 있는 단서와 함께 해주고 있다라 저는 추측해 봅니다. (이게 그저 추측일 수밖에 없는 건, '선(善)은 악(惡)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절정의 아름다움이 극악과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p10)이란 문장과 "각자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종의 진리 같은 것"(p99) 사이의 충돌을, 제가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막! 공부하는, 뭐 그러고 싶지까지는 않... --;;)

 

 

【 그리고 당신과 나의 대한민국은 정말? 

"그들에게 이웃이란 오로지 인터넷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눈을 맞추지 않은 지가 어언 백만 년이었다. 길에서건 복도에서건 승강기 안에서건, 열에 아홉은 모두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손바닥만 한 액정 화면 속에 있었다.…… 그 오피스텔 거주자들의 휴대폰 통화 목록에 기록된 최근 발신 번호의 대부분은 식당 전화번호였다."(pp87-89)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긴 하나,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은 결코 아니다라고,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 있는 건 맞는데,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은 역시나 결코 아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 생각하는 미친 놈은 이제 없는 곳이 바로 지금 나와 당신이 살아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고, 작가의 생각을 옮겨볼 수도 있을 듯, 아니 어쩌면 --- 저의 생각이 그러하기에, 타인의 글마자 그렇게 해석해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헬조선'에 살고 있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닌, 우리 스스로가 '헬조선인'이기 때문이란 허태균 교수의 말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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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작품의 무게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기대했던) '읽는다라는 노동을 즐거운 재미로 만들어 주는 소설'이라고까지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작가가 보여주는 원인과 과정은 꽤나 매끄럽게 펼쳐지고 있습니다만 --- '이것이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작가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잠시 해보았었을 만큼,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는, (그 중 하나를 빌어보자면) "드레스덴에 투하되었던 폭탄의 개수"(p58)와 맞먹지 않을까 싶은 '비유'의 남발은, 


"마치 대지 속에서 화석이 되어 희석되기만을 기다리듯이"(p79)처럼, 정말로 불필요하게 삽입되어 있다란 생각을 하게 해주었기도, "알곡을 토해내는 탈곡기처럼 … 한여름 낮 운동장을 뒤덮은 흙먼지처럼"(p108)과 같은 반복적 사용에서는, 끝내 식도를 역주행해내지 못한, 위장 속 잔여물이 묵직하게 느껴졌기도, "기분은 마치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가 화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p255)란 <작가의 말>에선, 주어와 동사가 어딘가 어색하게 읽혀지는 문장까지를 만들어 낸, --- 제겐 적잖은 아쉬움이었었고, 그런 아쉬움은, 참으로 아쉽게도, '까칠한 비토씨'의 글에서 받았던 재미를 이 작품으로부터는 온전히 즐길 수 없게하는 방해요소로 활발하게 작동되었었다란 것만 저의 기억에 남게 될 듯 싶네요. 

뭔가, 권태기스런 지루함에 빠져 있는 요즈음의 저입니다. 설마 이게, '그럭저럭 41일 째'인 금연의 후유증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만, 뭐 그렇다고 다시 담배를 피겠다는 건 아닙니다. 이번엔 좀 독하게 맘 먹었거든요. ^^;;


※ '정의(justice)'를 말하고 있는 우리 문학 :

- 손아람 作, 「소수의견

- 박민규 作, 「지구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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